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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연정리 151-1
12세조 모계공(慕溪公) 조강(趙綱)[1527(중종 22)∼1599(선조32)]선생 배향 : 효충사(孝忠祠)
◉ 慕溪 奉先遺書 (모계 봉선유서)
右奴婢田土 各位墓所禁伐 無人則其中 二名完定 山直代數 雖遠其 墓所 或崩頹 或雜木蕞生 爲在如 中其奴婢 貢膳及 田土所在以措 辨祭物及役軍供 饋盡心竭力爲之母 使中心有愧 奉祀人非 仕宦王都外若欲 居遠地者 內外子孫 等 諸會諄諄 曉喩其 不可棄去之 意若不肯從則 將此文記 內辭綠 雖其 同生與 四寸 六村兄弟中 若居此地者 奉祭祀 使用耕食使不得 放賣如有 敢生他許者 告官治罪 向事如此 遺書雖在於法外 吾賞不人 家子孫等 或稱勢艱 或稱窮 迫盡賣 祖上財物穨不念 祖先祭祀及守 護之埄心 常慟憤者 久矣故不覺 言之煩詞之 復而如是云若子 等 與復孫 等 各自盡其 心力 無爲人所指所得 罪於 先祖不捧幸幸 甚甚印 右文記四度 各一度 或許與爲去乎 今日以前 庚申年 同生和會 文記三度 及金恭謹 處 金桐文記 光弼處養父母 四時祭 忌日祭 四名日祭 條文記外 他無別及文記 老父三十年前 連喪父母 又遭妻子之喪 者非一常 患濕病心證亦 重臨書手 指戰濕 老來尤極 文記之作 難始於 是日 不能畵一 書之式 一日一行 一月數行 至數朔之後 始克成置於 一 二三字 不能俱書字 與行或斜 橫又多塗付剝割遺落處 難著書於其背 不肖子 見其如此 不無加減字畫 指摘爲錯者 然將四度文記 彼此比萬則 尢可見其必在於 一手下決官則 官吏非徒 當治非理之罪 必有殃禍流及於其 後 子孫 老夫非惟 有見於古 背書籍於念 身親見聞 不睦親族爭 訟 非理者 子孫十無 一二能 保其門戶 此文記所付甚爲畧畧 而如是云云 極爲愧恨然不肖者 尤心不在多少 汝 等 其各勤愼無置身於 有過不肖之地 則行矣矣幸矣
< 번역된 문집에서..... >
◉ 모계공의 선조를 받드는 유서
거느리고 있는 노비와 토지. 각위 묘소에 벌초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가운데 2명으로 아주 산지기로 정하라. 비록 사는곳이 멀어 그 묘소가 혹 허물어지고 혹 잡목이 무성하게 두지말고 그 노비와 음식 공양 및 토지가 있는 곳에 제물을 갖추어 두고 일꾼의 먹을거리를 제공함에 있어서는 정성을 다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나라에서 벼슬 살이를 하는 사람 이외에 만약 먼곳으로 이사하여 살고자 하는 자는 내외 자손 등이 모두 모여 그 버리고 가는 생각이 옳지 않다고 순순히 깨우쳐주고 만약 기꺼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 유서(遺書) 내용을 가지고 따르게 하라. 비록 그 동생과 사촌. 육촌 형제라도 이곳에 사는 자에게는 제사를 받들고 그로 하여금 밭 갈아 먹게 하되 마음대로 팔게 하지는 못하게 하라.
만약 감히 다른 계획을 하는 자가 있으면 관가에 고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라.
이와 같은 유서가 비록 법 밖에 있지만 나는 우리 집안의 자손 중에 혹 가세가 어렵다고 말하거나 혹은 궁핍하다고 조상의 재물을 모두 팔아치우고 조금도 조상의 제사와 지켜야 할 분묘를 생각하지 않아 마음으로 늘상 통분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 때문에 번거롭고 중복되는 것을 알지만 이와 같이 말한다.
만약 자식 등과 후손 등은 각자가 그 마음과 힘을 다하여 선조를 받들지 못한 것으로 죄를 얻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비웃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더욱 다행일 것이다.
날인한 오른쪽의 문서 네 건은 (사남매)각 한 건씩 가지고 있도록 허락할 것이며 이전 경신년에 너희 동생(광필)과 만든 화회 문서 와 김공근에게 준 금동문기와 광필(작은아들)의 양부모 사시제(四時祭).사명일제(설,추석,단오,동지) 조문기(교육을 위한교재) 외에 달리 별도로 지급한 문서는 없다.
나는 30년전에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하고 또 처자의 상을 만난 것이 한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늘상 저리고 붓는 습병이 있고 가슴이 뛰는 병환 역시 중하여 글을 쓰는데 손이 떨렸는데 늙을수록 더욱 심하여 문서 작성을 시작하였으나 능히 일정하게 글씨를 쓸수 없었다. 하루에 한줄 ,한달에 여러줄 여러달이 지난후에야 비로서 완성할 수 있었으나 몇 군데는 글자와 행을 갖출수가 없어 서 혹 비스듬히 쓰기도 하고 가로로 쓰기도 하였다.
또한 풀로 붙이거나 떨어져 나간 곳이 많아서 그 뒤에 도장을 찍기가 어려웠다.
부족한 사람의 아들이 이와 같은 것을 보고 가감(加減)하고 글자와 획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네 번째 문서는 이문서와 저문서가 완전에 가까워 즉 반드시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알수 있다. 관리에게 판결하게 한 즉 관리는 판결을 하고 다스릴 뿐이지만 비리가 있는 죄는 반드시 재앙이 그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나는 다만 옛 서적에서 본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친히 보고 듣기로 친척과 화목하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다투어 송사하는 자는 자손 가운데 열에 한둘도 능히 그 집안을 보호하지 못하였다.
이 문서에 첨부된 것은 심히 간략하여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대단히 부끄럽고 한스러운 일이나 나의 마음은 그 많고 적음에 있지 않으니 너희들은 각기 근신하고 삼가 하여 허물 있고 불미한 곳에 몸을 두지 않는다면 다행이겠다 !
♠충북청원군한양조씨충정공-절효공파-12世祖모계공중종유서[慕溪公重宗遺書]♠
우리 집안의 세가는 한양에서 나왔다. 비록 名族이라고는 하나 만약 선조의 거듭 쌓은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들의 일반 백성이 되는 것을 거의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 漢山君 忠靖公은 개국초에 훈로를 세웠고, 일찍이 대부 金溝令이 정성을 다해 上疏하여 參議公의 원통함을 씻어 내었다. 우리 집안이 천민과 노예가 되는 것을 면하고 사족이 된 것은 실로 이 두 분 조상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우리 당형 內禁公은 元勳의 嫡長으로 先業을 받들어 제사하였는데 집안의 재산이 궁핍하고 성품 또한 어리석고 옹졸하여 능히 祠宇를 수리하지 못하여 모두 퇴락하고 다만 빈 터만이 있게 되었다. 이에 四代의 神主를 竈上樓(조상루)에 안으로 옮기었는데 때가 묻어 잘 보이지 않고 또한 祠宇도 수리하지 않았으니 대단히 슬프도다!
내가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에 비록 간절한 마음이 있긴 하나 힘이 능치 못하여 만 가지의 계책이 쓰여지지 않아 다만 스스로 개탄할 뿐이 었으니 이는 자손 중에 사람이 없어서일 뿐이다. 다행히 부모와 선조의 남은 은택에 힘입어 己卯年에 一命을 받았다. 매양 종가집에 이르러 展拜함에 때로 문득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곁에 있는 사람에게 비웃음을 산 것이 7년이다. 또한 내자봉사로 제수되어 곧바로 좇아 나아가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집인 식구를 먹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의복은 찢어지고 남루하였으나 2년 동안 아끼고 저축하여 丙戌年 가을에 이를러 재물과 기와를 모으고 工人과 일꾼을 불러모아서 비로소 능히 사당을 세울 수 있었으나 修粧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또한 司餐直長으로 전직되자 매우 淸寒하여 수리를 마칠 수가 없었다. 또다시 禮賓主簿로 轉職되었는데 墳墓의 값에 안에 드는 費用이 서로 같아 거의 그 役事를 마치게 되었으니 기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간절한 청으로 銓曹에서 원하였으나 外職을 補任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己丑年 仲春에 억지로 恩津 백성의 앙망을 애써 생각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사사로이 사당을 세우는 것을 꺼렸으니 감히 役事를 마치지 돌아온 후에 못한 것을 잠시도 잊지를 못 하였다. 5년 전 겨울에 이르러 罷職되어 돌아온 후에 몸에 질병이 많았으나 병과 노쇠함에도 이 일을 가지고 마음을 수고롭게 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집에서 두 번이나 오고가며 그 비용을 대었고 人力 외에 양식과 傭力에 든 비용은 쌀 여덟 석이 넘어 나무는 십오필이 족히 넘었다. 부지런히 왕래하느라 질병 역시 심하여 졌으나 내 어찌 나이 많고 몸이 늙었다고 집안의 재산이 궁핍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헛되이 소비하는 것이 좋아하여 스스로 집안을 더욱 궁핍하게 하고 몸을 피곤하게 하겠는가?
진실로 선조를 편안히 모실 곳이 없음을 참지 못하여 처음 벼슬한 때부터 한 순간도 마음에도 잊은 적이 없었다. 마음 속으로 늘 상 스스로 책하여 이르기를 “내가 이 몸이 있는 것은 부모의 은혜 때문이다. 이것으로써 그것을 미루어보면 그 처음을 생각할 것이요 그 처음은 한 사람의 몸이니 나 스스로는 능하지 못할 따름이다.”라 하였다. 드디어 원하는 바를 얻어서 奉安祭告한 연후에 나는 비로소 편안히 잠자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너희들이 친히 본 바인데 내가 늙었다고 여긴다면 말 할 수가 없다. 만약에 옳다고 여긴다면 宗家와 祠宇에 급하게 보수할 일이 있으면 힘써서 하라. 혹 가급적 오늘 나의 간절한 정성을 잊지 말도록 하고 힘을 다하여 구할 것을 돌아본다면 거의 사람된 도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너희의 몸을 사랑할 줄 안다면 선조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을 힘쓰고 또 힘써서 훗날 九泉에서 부모를 뵙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게 하라.
이 遺書는 別書를 만들지 않았으니 반드시 이것을 기록하라. 무릇 사람은 先人의 말씀에 돈독하게 믿는 것을 아는 자이니 대개 나는 그 재물에 있어서 감히 미혹되지 않았다. 이것을 取錄하여 그들로 하여금 펴서 보는 사이에 때때로 반상하게 할 것이다. 外孫 등이 만약 옛 것을 좋아하고 善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면 역시 장차 이 말에 느낌이 있어 이와 같이 曲盡하게 말할 것이다.
(辛卯[1591년] 겨울 十日月 日)
== 父自筆中訓大夫行恩津縣監 趙綱 == [二子(諱光弼)광필(字卿勛)校尉副司果公筆書]
[▲청원향토문화연구회 충북대 국문학과 임동철 교수님이
번역하면서 발간한 문집:2002.3]
▣한양조씨 모계공(慕溪公) 조강(趙綱) : 1591년 모계중종유서(慕溪重宗遺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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