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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소재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2-1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공 조정윤(趙鼎允) 묘소▣
[趙廣河,1907.9.19~1967.4.25]묘소
https://blog.naver.com/roaltlf/222658934146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2-1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2-1
[前 유택모습]
[趙鼎允 義務損財技錄(조정윤 의무손재기록)]
▣조정윤(趙鼎允) : 1854년 生 ~ 1940년 卒. 漢陽 趙氏.
1880년에 군읍관리로 시작하여 1882년에 광무주사(鑛務主事)로 근무했다. 1895년 장진군수를 시작으로 성천군수, 태천군수를 두루 역임하고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인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에 이르렀다.
대한제국 시절에 금광 사업으로 함경도 제1의 거부이기도 하며 장진군의 中東학교와 성천군의 東明학교, 경성 五星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1896년(丙申年) 부터 많은 기부를 하였는데 1896년부터 1906년(丙午年)까지 葉錢으로 이십육만사천백삼십이兩을 여러 곳에 기부하였고 1907년(丁未年)부터 1926(丙寅年)까지 구만오천이백팔십이円을 여러 곳에 매년 기부하였다.
(참고로 1912년의 80kg 쌀 한가마니 가격은 5원 정도)
우연히 입수하게된 "趙鼎允義務損財抄錄"을 토대로 1906년 한해의 기부내역을 기재하여 본다.
"平壤국민학교 삼천냥, 京城국민학교 이만냥, 安州국민학교 삼백냥, 价川국민학교 오백냥, 博川국민학교 오백냥, 嘉山국민학교 오백냥, 德川국민학교 삼백냥, 江東국민학교 삼백냥, 順安국민학교 삼백냥, 長津국민학교 일천냥, 龍川국민학교 천냥, 雲山국민학교 오백냥, 江界국민학교 오백냥"등을 1906년 한해에 기부하였다.(당시엔 소학교였겠만 기록 당시인 일제강점기식)
이와같이 매년 여러곳에 기부를 하였는데 교육기관에 기부한 목록이 제일 많다.
이 "趙鼎允義務損財抄錄"은 뒷장에 5인의 도장이 있는것으로 보아 다섯명이 한부씩 갖고 있었는데 그중 한분의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작성시기는 기부의 끝자락인 1926년 이후인 1927년 정도(낡은 정도로 보아도)로 보여진다.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 현 대통령실 수석) 조정윤(趙鼎允) 가족묘원]
조정윤[趙鼎允, 철종 3년(1852)~1940], 보명은 조정원(趙鼎元), 자는 구열(九列), 증조는 부호군 증좌장례 조창순(趙昌順), 조부는 증통정비서감승 조성규(趙性奎), 아버지는 증가선대부 협변 조종진(趙鍾軫), 어머니는 오위장 임성소(林成巢)의 따님 전주임씨, 초배는 임시택(林蒔澤)의 따님 평택임씨, 계배는 의관 이두일(李斗鎰)의 따님 농서이씨,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조병희(趙秉禧), 차남 조병갑(趙炳甲), 이공학박사로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조광하(趙廣河)가 손자이다.
1882년 광무(鑛務)주사, 1895년부터는 함경남도 장진군수, 평안남도 성천군수, 평안북도 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고종 42년(1905)년 종2품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 현 대통령실 수석)에 임용되고, 칙임관 3등에 서임되었다. 공의 귀(貴)로 부친과 조부, 증조부 3대에게 벼슬을 추증하였다.
조정윤은 한양조씨 2대 도유사(대종회장)로서 종사에 길이 빛나는 공헌을 특출나게 많이 하였다고 한다.
묘는 근래 납골 가족묘로 그 자리에 다시 조성하였다고 한다.
[(상)시종원 부경 조정윤(趙鼎允) 묘 (하)장남 조병희(趙秉禧) 묘]
【1930년 조언찬(趙彦瓚) 외 3인 간찰(簡札)】
이 문서는 발신인은 조언찬(趙彦瓚), 조만용(趙萬容), 조도석(趙燾錫), 조세용(趙世容)이고, 수신처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내용상 종중(宗中)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간찰을 작성한 이유는 선조를 기리는 길을 이어나가기 위해 계원들이 모은 돈을 보낸다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그 내용을 보면 이전에는 사는 곳이 다르고 길도 멀어 제사를 올리지 못해 선조인 총관(摠管)의 업적과 덕을 기리지 못하였는데, 후손인 참판 조정윤(趙鼎允) 씨가 특별히 만원이 넘는 돈을 내어 비석을 세우고, 묘지기를 두어 묘소를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문으로 작성하여 전후 사정을 알게 하였으며, 북쪽의 사림들은 조정윤의 높은 뜻에 감복하여 수계(修稧)의 논의가 세차게 일어났다. 후손이 아닌 자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데, 본 후손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성의를 각각 내어 약간의 보답을 하려고 했으나 여러 번 기근을 겪어 내실이 비어 보답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계원마다 약간의 돈을 내었다. 계원마다 50전씩 내어 총 26원을 모았는데, 여러분께서는 적다고 내치지 말고 받아달라고 하였다.
통문에 등장하는 조정윤 씨는 한양조씨 참판공파 16대손 23세 趙鼎允(1854~1940)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금광 사업으로 성공한 함경도 제1의 거부이자 관리이다.
1882년 광무(鑛務)주사, 1895년부터는 함경남도 장진군수, 평안남도 성천군수, 평안북도 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고종 42년(1905)년에는 종2품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용되고, 칙임관 3등에 서임되었다.
조정윤은 1896년부터 많은 기부를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정윤 의무손재초록(義務損財抄錄)에 기록되어 있다. 기부를 통해 장진군의 중동학교, 성천군의 동명학고, 경성의 오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24년에는 한양조씨 족보인 갑자8권보(甲子八卷譜)를 자비로 편찬하였으며, 1926년에는 갑자팔권보를 1권으로 요약한 병인1통세보(丙寅一統世譜)도 본인이 부담하여 편수하였다. 조정윤이 기린 총관(摠管)은 한양조씨 2세 총관공 조휘(趙暉)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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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丙申年)부터 많은 기부를 하였는데
1896년부터 1906년까지 엽전(葉錢)으로 二十六萬四千百三十二兩을 여러 곳에 기부하였고
1907년부터 1926까지 九萬五千二百八十二엔(円)을 여러 곳에 매년 기부하였다.
(참고로 1912년의 80kg 쌀 한가마니 가격은 5원 정도)
우연히 입수하게된 "趙鼎允義務損財技錄"을 토대로 1906년 한해의 기부내역을 기재하여 본다.
"平壤국민학교 삼천냥, 京城국민학교 이만냥, 安州국민학교 삼백냥, 价川국민학교 오백냥, 博川국민학교 오백냥, 嘉山국민학교 오백냥, 德川국민학교 삼백냥, 江東국민학교 삼백냥, 順安국민학교 삼백냥, 長津국민학교 일천냥, 龍川국민학교 천냥, 雲山국민학교 오백냥, 江界국민학교 오백냥" 등을 1906년 한해에 기부하였다.(당시엔 소학교였겠만 기록 당시인 일제강점기식)
이와같이 매년 여러 곳에 기부를 하였는데 교육기관에 기부한 목록이 제일 많다. 이 "趙鼎允義務損財抄錄"은 뒷장에 5인의 도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섯명이 한부씩 갖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의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작성시기는 기부의 끝자락인 1926년 이후인 1927년 정도(낡은 정도로 보아도)로 보여진다.
∎한양조씨대종회 2대 도유사 가선대부 시종원부경 조정윤(趙鼎允)
《출처 : 한국학자료센터/한국학 자료포털 및 한양조씨대종회 홈페이지》
[시종원 부경 조정윤(趙鼎允) 묘]
[시종원 부경 조정윤(趙鼎允) 묘]
【보전(普專), 연전(延專), 세전(世專)에 의연(義捐)한 조병갑(趙炳甲)씨 인물, 교육봉사】
얼마 전에 교육자금으로서
연희전문학교 2만원
보성전문학교 2만원
셰부란스전문 2만원 합계 6만원
이리하야 6만원의 거금을 셰 학부에 義捐하야 세인을 감격케 한 趙炳甲 씨란 엇던 분인가. 우리는 씨의 인격을 소개하야 그 교육을 위한 성의에 사의를 표할 바인가 한다.
씨는 서울 黃金町의 세대명문 趙鼎允 씨의 차남으로서 일직이 시내 水下町 보통학교를 마친 뒤 第一高等普通學校를 수석의 우등으로 졸업하고 다시 帝國大學에 입학하야 의학부에서 수학하든 중 2학년 때에 가사 관계로 퇴학한 뒤 재계와 사회사업에 활약하는 今春 29세의 청년 실업가이다. 두뇌 명석하야 학창시대에 늘 수석으로 지내어 儕輩를 놀래게 하엿거니와 일단 발을 재계 방면에 投하야 또한 今春에 재계 호경기의 물결에 어울녀 거대한 수익을 거두었든 사실은 재계 선배를 놀래이게 한 바이다.
말하자면 이번에 3대학부에 장학 기금으로 이 6만원을 낸 것은 제1보로서 앞으로 영재교육을 위하야 더 많은 성의를 보일 것이다. 교육 기근에 처하여 그야말로 영재 駿兒가 衒衢에 차 잇는 이 때 씨를 맛난 이 세대는 얼마나 감사의 意를 표하면 다 하랴.
◐李容翊 씨와 더부러 宮中侍臣 趙鼎允◑
그런데 趙炳甲 씨의 엄친은 趙鼎允 씨로서, 일즉히 成川 군수와 長津 등 數三 군의 군수를 지내고 다시 內職으로 昇次하엿다가 侍從院 副卿을 거처 侍從院卿이 되어 궁중에 드러가 李太王을 보시고 게섯다. 이와같이 정계와 궁중에서 활약하든 趙鼎允씨는 그 집안에 또 한 혁혁한 巨星을 가지고 있었으니 內藏院卿 李容翊씨는 씨의 매부라. 당대 偉才을 품은 李容翊씨에 대하여는 너무나 유명함으로 여기에 煩說을 피하거니와 엇잿든 그때 趙鼎允씨와 李容翊씨는 처남, 매부의 손마진 侍臣으로 宮中 府中에서 사직의 安泰를 위하야 많은 활약을 하엿섯다. 그 뒤 日月이 흘너가매 씨는 궁중으로부터 물너나와 오직 閑雲野鶴을 벗하면서 즐기는 만 권 詩書와 벗을 삼어 지낸다. 今春 84세의 노옹이다.
그런데 趙鼎允씨는 일즉 西北協成學校가 설치되자 校舍 건축 기금으로 1만원을 義捐하엿고 咸南의 고향 사숙과 보통학교에도 屢 巨萬의 大金을 앗김없이 던지어 교육사업에 열의을 보엿스며 그밧게 乙丑年과 3南 水害 등 동포의 참화가 매우 클 때마다 수천 수만의 돈으로서 동포애를 베풀기를 마지 안었다.
더욱 옹의 장손 趙大河 씨는 함경남도의 유명한 실업가로 長津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鶴髮 노옹의 씨는 자손 번영한 속에서 고요히 깨긋한 淸節을 직히면서 여생을 즐기고 있다.<19>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삼천리 제9권 제4호/1937.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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