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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대사헌을 역임한 조성교(趙性敎) 간찰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7.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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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관(趙亨觀)

 

 

◎문헌공(文獻公) 조성교 [趙性敎, 1818(순조 18)∼1876(고종 13), 유택:기흥읍 신갈리 양촌 :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 (민속촌로 11번길)]

 

기묘제현수첩(己昴諸賢手帖) 1875년의 발문

대사헌을 역임한 조성교(趙性敎) 간찰

1874년 조성교(趙性敎)가 성산이씨 30세 정언공파 이관희(李觀熙)에게 보낸 답신

 

◎공조판서 조종필(趙鐘弼, 1840년(헌종 6)∼?, 유택: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조한원(趙漢元, 1893 ~ 1969, 유택: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만성집(晩醒集)발문

  [박치복(朴致馥)晩醒先生文集跋○趙漢元]  

日朴君正善踰嶺而西。訪余於龍仁田舍。言其仲父晩醒先生遺集重刊事甚悉。要余一言以實其蹟而重世好。緬惟先生於吾家。吾先大父旣推奬之不遺餘力。先父不敢友而實師之焉。而不肖亦嘗從事左右而聞命矣。至先生之文章。固非膚淺末學如不肖者所可得闚其涯涘而論其得失者。而以聞諸長老者。則先生之文。根據六經。汎濫百家。紆餘曲折。汪洋𩃎霈。而要必大㱕于正。盖先達所謂橫說竪說無不當理者。先生似其人焉。使天假之時。佐鳴國家之盛。陶鑄文化。賁餙太平。於先生何有。而晩暮旌招。位不稱德。此固足爲邦家恨。而謂先生之不幸則非也。况先生雖遠。而遺文具在。後之讀者。猶可以想見其經綸之富學術之正。而知先生之所以爲先生矣。嗚呼。世遭滄桑。耆舊宿德凋零殆盡。所可觀感而寓慕者。亦惟其咳唾儀刑之未盡泯滅者。而此亦付諸不問。則後死者之罪也。朴君之不憚艱勞也有以夫。今玆之役。嶺中人士尸其事而蕫其工。其樂善好賢之誠。其又可感也云爾。乙丑十二月癸酉。後學漢陽趙漢元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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