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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14세 삼휴당휘휴묘소/재실과 父13세조현주공첫配숙부인고흥유씨정려각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0. 4. 26.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비홍로 1178-19

(지번주소) 남원시 주생면 정송리 산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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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휴[趙休]의 묘갈명(墓碣銘)송덕한시(頌德漢詩)

◑龍宮縣監趙公墓碣銘 八月二日◐

●수우문체우행 (邃于文摰于行)

●섭우학유우정 (涉于學裕于政)

●세소한애무명 (世所罕欸無命)

●시위명과자경 (是爲銘過者敬)

◎문장은 심오하였고 행실은 진지하였으며,

◎학문은 박식하였고 정사는 느긋하였네.

◎세상에 드문 인물이었으나 아! 생명이 길지 못하였으니,

◎이 분의 명을 지어 지나는 자들이 공경하게 하노라.

 

◐조휴[趙休]의 묘갈명(墓碣銘) -박세채(朴世采)◑

 

공(公)의 휘(諱)는 휴(休)이고 자(字)는 휴휴(休休)이며 자호(自號)는 삼휴당(三休堂)이다. 바로 현주공(玄洲公) 조찬한(趙纘韓)의 맏아들이자 현곡공(玄谷公) 조위한(趙緯韓)의 조카이다. 처음에 현주공 형제가 만력(萬曆) 연간을 당하여 박학(博學)하고 고문사(古文詞)를 잘 지어 명성을 한 시대에 크게 떨쳤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기운(機雲, 진대(晉代)의 문장가들인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형제를 말함)이 다시 나왔다고 칭송하였는데, 공은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8세에 글을 배워 문장이 나날이 성취되었다. 10여 세에 이미 남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말들을 많이 하였고, 종유(從遊)한 자들도 모두 노성(老成)한 선배들이었으며, 16세에 상상(上庠, 성균관을 말함)에 올라 명성과 영예가 성하였다. 그러나 공은 사람됨이 옛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기개(氣槪)를 자부(自負)하여 지향과 절개가 우뚝 빼어났으므로, 이로부터 날마다 선진(先秦)ㆍ서한(西漢) 때의 글들을 읽었는데, 특히 장마(莊馬, 장자(莊子)와 사마천(司馬遷)을 말함)를 비롯한 대가(大家)들의 글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장옥(場屋, 과거 시험장을 말함)의 틀에 박힌 형식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숭정(崇禎)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에 우복(愚伏) 정공(鄭公, 정경세(鄭經世)를 말함)이 전형(銓衡)을 주관하였는데, 정공이 평소부터 공의 재주를 알고 있어서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에 천거하였다. 그 당시 현주공(玄洲公, 아버지 조찬한을 말함)이 선산(善山)의 수령(守令)으로 재임하고 있었으므로 문안을 다니기에 편리한 까닭에 마침내 부임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현주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으며 곧이어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거상(居喪)을 마친 뒤에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는데, 학도(學徒)들을 가르치는 방도가 매우 적절하였으나, 이윽고 벼슬을 그만두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속을 따라 달수를 계산하여 따지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었기 때문이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서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공은 모친을 모시고 발로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피난하였다가 난리가 끝나자 이리저리 떠돌다가 장성(長城)의 토천(土泉)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곧 현주공 형제가 석주(石洲) 권공(權公, 권필(權韠)을 말함)과 연구(聯句)를 지은 곳이었다. 공은 마침내 그곳에 집 한 채를 짓고서 백설헌(白雪軒)이라고 편액(扁額)을 걸고 물길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으며, 꽃과 대나무 등을 뒤섞어 심고 느긋하게 자적(自適)하였다.

 

이때 마침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의 관소(館所)에서 환국(還國)하여 공을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에 임명하였으므로 공은 조정에 들어가 뵙고서 그냥 돌아왔다. 다시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에 제수되어 인의(引儀)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수부 원외랑(水部員外郞)으로 옮겼다가 다시 판조(版曹, 호조의 별칭)로 옮기었다. 그 뒤에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갔는데, 공의 계씨(季氏)인 조비(趙備)가 이에 앞서 청하 현령(淸河縣令)으로 있었으므로 공의 형제가 임무를 교대하러 오가는 가마가 눈부시게 왕래하였으므로 길에서 보는 자들이 영예롭게 여기었다. 용궁현에는 국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설치는 자가 있어 남의 노비들을 많이 점유하였는데, 공이 부임하여 그를 법으로 다스리자, 그가 마침내 유언비어로 선동(煽動)하였다. 그 당시에 암행 어사(暗行御史)가 경내의 여러 고을 사이를 순행하고 있었는데, 그 자가 어사에게 연줄을 대어 공을 근거 없이 헐뜯고 비방하였다. 그러나 공에게 지적할 만한 죄가 없자, 공이 모친에게 음식을 푸짐하게 바쳤다고 죄안(罪案)을 만들어 공은 마침내 의금부(義禁府)에 나아가 심리를 받았는데, 사건이 중지되어 가라앉자 곧 교하(交河)의 선영(先塋) 아래로 돌아가서 복건(幅巾)과 심의(深衣) 차림으로 한가하게 지내며 뜻을 여유 있게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654년 효종 5년) 가을에 계씨(季氏)가 모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재차 호남(湖南)에 외직으로 나가기를 간청하였으므로, 공은 장차 그곳에 가서 모친에게 문안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선친의 기일(忌日)을 당하여 묘소에 가서 오랫동안 곡(哭)하느라고 풍한병(風寒病)이 호되게 들었다. 병이 낫지 않은 채로 길을 출발하여 모친께 문안을 마치고 백설헌에 돌아가 누워지내다가 11월 8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55세였다. 집의 뒤쪽에 있는 산기슭 사향(巳向)의 묏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은 천성이 참으로 효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나태하지 않았는데, 현주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드시게 하였고, 상(喪)을 당해서는 소금이나 간장조차도 입에 대지 않고 나무 젓가락으로 콩죽만 먹으면서 3년상을 마쳤으며, 아침과 저녁마다 슬프게 곡(哭)을 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복상(服喪)을 마친 뒤에도 남들과 얘기하다가 그 일을 언급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며, 일찍이 유장(遺狀)을 기초(起草)하였으나 끝내 차마 붓을 대지 못하였다.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미리 그달 초하루부터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대부인(大夫人)을 봉양함에 있어 얼굴에 화색(和色)이 물씬 넘치어 슬하(膝下)에서 우스개까지 해보이며 마치 어린애처럼 재롱을 부리기도 하였다. 집안에 사사로운 저축이 없어서 처자식들이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는데도 공은 그것을 덤덤하게 여기었다.

 

 

젊었을 때 비록 문장을 좋아하여 옛 작자(作者)의 법도를 추종(追從)하였으나, 또한 능히 이치와 의리로써 스스로 기뻐하였다. 상중(喪中)에 독례(讀禮)하는 여가(餘暇)에도 손수 성현(聖賢)의 훈계(訓戒) 중에 자기에게 절실한 것을 초록(抄錄)하여 그 책의 이름을 ≪치기진경(治己眞經)≫이라고 짓고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은 채로 마치 엄한 스승을 마주하고 있는 듯이 하였으며, 거상(居喪)하는 기간이라고 하여 조금도 게을리 지내지 않았다. 그러한 까닭에 무릇 득실(得失)ㆍ비탄(悲歎)ㆍ영욕(榮辱)ㆍ이해(利害) 따위에 조금도 그 속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운명하던 날에는 부녀(婦女)들에게 손짓하여 가까이 오지 말라고 내보내고서 자리에 똑바로 누운 채 베개를 옮기고 서거(逝去)하였으니, 평생 동안 수양한 것을 또 대략 알 수가 있다.

 

 

공은 평소에 재능을 갖추어서 관직에 재임하게 되면 매우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이치를 잘 분별하기로 일컬어졌다. 청암역(靑巖驛)으로 말하자면, 역졸(驛卒)들이 오래 지난 뒤에도 공의 선정(善政)을 그리워하였으니, 공의 어진 마음씨가 남들을 감동시킨 것이 깊었던 것이다.

 

공은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기풍이 웅건하고 언사(言辭)가 풍부하여 선대의 법도를 충분히 계승하였으며, 현주공(玄洲公)도 일찍이 말하기를, “정밀하게 도달한 곳은 나로서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였을 정도이다. 공이 저술한 것들은 난리로 인하여 산일(散逸)되었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단지 그중의 극히 적은 분량이니, 더욱 애석한 노릇이다.

 

조씨(趙氏)는 한양(漢陽)을 근원(根源)으로 삼아 명덕(名德)이 서로 잇달아 배출되었는데,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壁)과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에 이르러 계속하여 국초(國初)에 현달(顯達)하였다. 공의 증조(曾祖)는 조옥(趙玉)으로 현령(縣令)을 지냈다. 할아버지는 조양정(趙揚庭)으로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곧 현주공으로,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공의 부인은 원성 원씨(原城元氏)로 우윤(右尹)을 지낸 원황(元鎤)의 딸인데,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인 조두상(趙斗祥)은 참봉(參奉)이고, 차남인 조규상(趙奎祥)은 진사(進士)이며, 딸들은 감역(監役) 박순(朴錞)과 이항(李恒)ㆍ윤세징(尹世徵)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이 낳은 아들로서 조유상(趙柳祥)과 조오상(趙五祥)이 있다. 손지(孫支, 손자를 비롯한 후손들을 말함)가 영체(零替)하여 겨우 약간 명이 있다.

 

 

나는 공이 살아있을 때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였는데, 공이 나를 보잘것없다고 무시하지 아니하여 여러 번 공과 더불어 토론(討論)을 하였으니, 지금 이 일을 맡게 되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옷소매를 적시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문장은 심오하였고 행실은 진지하였으며, 학문은 박식하였고 정사는 느긋하였네. 세상에 드문 인물이었으나 아! 생명이 길지 못하였으니, 이 분의 명을 지어 지나는 자들이 공경하게 하노라.

 

 

龍宮縣監趙公墓碣銘 八月二日

 

公諱休。字休休。自號三休堂。寔爲玄洲公諱纘韓之長子。玄谷公諱緯韓之從子。始玄洲公昆弟當萬曆中。博學善古文詞。名大噪一世。世稱機,雲復出。公生而有儁才。八歲學書文日就。十餘歲已多驚人語。所從游皆先執老成。十六登上庠。聲華蔚然。然公爲人。好古負奇氣。志節卓犖。自是日讀先秦西漢文。尤致力於莊馬諸大家。不屑爲場屋彀率。竟不得登第。崇禎庚午。愚伏鄭公秉東銓。素知公才。薦爲金泉道察訪。時玄洲公方守善山。以便省覲遂赴焉。無何玄洲公罷歸。仍丁外艱。服除。除童蒙敎官。甚得訓迪道。旣而棄不仕。蓋亦以循俗計朔爲恥也。丙子西虜入寇。公奉親徒步避兵于嶺南。亂已轉住長城之土泉。卽玄洲公昆弟與石洲權公聯句處也。遂搆一軒。扁以白雪。引水爲沼。雜樹花竹。怡然自適。會昭顯世子自瀋館東還。拜翊衛司副率。乃入覲而歸。復除靑巖道察訪。陞引儀。移水部員外郞。又移版曹。出知龍宮縣。季氏備先宰淸河。迭迎板輿。往來有煒。道路榮之。縣有武斷者多占人臧獲。公以法繩之。遂煽蜚語。時當繡衣行諸邑間。因緣浸潤。然無罪可摭。乃以供母豐飫爲案。竟就理。事得寢。乃歸交河隴下棲息。幅巾深衣。意裕如也。甲午秋季氏爲養親再乞湖南縣。公將往省。値先忌哭于墓移晷。重感風寒。未瘳而行。省訖歸臥白雪軒。至十一月八日不起。壽五十五。葬于家後麓面巳之原。公天性誠孝。服勤不怠。及玄洲公疾谻。斫指進其血。比喪輟鹽醬不食。木匙菽粥以終三年。晨夕哀號。隣里莫不感動。去喪語及必流涕。嘗草遺狀。終不忍下筆。忌日預自月朔不肉以爲常。奉大夫人油油翼翼。嬉戲膝下。殆若嬰兒。家無私蓄。妻孥不免飢寒。而處之泊如也。少時雖好文章。追軌古作者。然亦能以理義自悅。當讀禮之暇。手抄聖賢訓誡切於爲巳者。名曰治巳眞經。終日危坐。對越如嚴師。不以墨容柴毀少懈焉。繇此於凡得失悲歡榮辱利害。無一動其中。卒之日。揮婦女勿近。正席移枕而逝。平生所養。又可略見也。雅有才具。涖官游刃。多以辦理稱。至靑巖驛卒久而益思之。仁心入人者深矣。其爲文氣雄辭蔚。足繼先矩。玄洲公亦曰精詣處吾所不及。所著因亂散佚。今存者特其一斑。重可惜也。趙氏源于漢陽。名德相望。至襄烈公諱仁璧。良節公諱溫。繼顯于國初。曾祖諱玉縣令。祖諱揚庭贈判書。考卽玄洲公。官至承旨。公娶原城元氏。右尹鎤之女。生三男二女。男斗祥參奉。奎祥進士。女適朴錞,監役李恒,尹世徵。側室子曰柳祥,五祥。孫支零替堇有若干人。余逮公時纔弱冠耳。乃蒙不鄙。屢與之討論。今當斯役。不覺掩袂。銘曰。

邃于文摰于行。涉于學裕于政。世所罕欸無命。是爲銘過者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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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거사

2020.05.05 10:03

趙炻喜님의 三休堂 修德齋

●국역: 안동김가 청음후손

서윤공파문정공파 白村 金彰顯선생님이 도움은 주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baikchon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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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이해】

✴幸參 다행히 참가함. 요행히 참가.

즐거움으로 참여.< 제 의견>

• 어리석은 신하가 다행히도 / 愚臣幸參

• 여러 어진이 곁에 참예하였기로 / 群賢之側

• 요행히 사마시(司馬試)에 참여 / 臣於丁巳冬

• 소신이 높은 선발에 뽑힘이 얼마나 다행한가 / 小臣何幸參高選

✴修德 덕을 닦음 . 덕을 쌓음. 수양 덕행. 행선적덕

✴ 祀 祭祀와 관련. 제사 천신. 사당제사.

• 祭神的地方 : 묘나 사당에서 지냄.

祀堂(祭殿) ,祭奠, 祀舍, 祀壇, 祀場

✴慕仰 덕망이나 인품에 우러르고 사모함 . 앙모하다 추 모하다 경모(敬慕)하다

• 푸르고 푸른 나무숲엔 안개가 또 끼었어라 / 蒼蒼樹亦煙

• 강기슭 검푸른 숲 방향 바뀌고 / 岸轉蒼蒼樹

✴遺謨 남긴 가르침. 남긴 계책. 남긴 법.

• 향음례의 남긴 법이 하루에 새로워지니 / 鄕飮遺謨一日新

• 열성조의 남긴 법 따르는 게 좋으리 / 列祖遺謨正可遵

✲蒼樹-遺謨나 千年色 -百世香 의 자리는 한시에서

언제나 대구이다. 창수 나 유모가 적절한 대구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松楸 선영(先塋)=조상의 무덤 先山. 분묘(墳墓)

소나무나 추 나무로 묘지에 많이 심는다. 이로 인해 분묘, 무덤을 칭한다. 조상, 선조 부모 등의 墳塋

송추는 묘지에 많이 심는 나무들 楸 개오동나무 . 가래나무. 호두나무

• 구천의 우로가 송추에 흡족하였도다 / 九天雨露洽松楸

송추는 묘지에 많이 심는 나무들로 분묘(墳墓)나 선영(先塋)을 뜻함.

✴依舊 옛날 그대로 변함이 없다 =依然 끝이 없는 생각이나 그리움의 모양 등을 표현 할 때 쓰는 말.

✴ 莎草 벼풀처럼 생긴 풀로 들이나 산에 자라고

키 작은 뿌리가 붙은 상태로 무리 지어 있는 잔디 풀.

=잔디 =草茅

✴故故 자주. 누차 , 때때로, 여러 번

의성어로 새의 울음소리에 사용.

• 객이 오자 기웃기웃 앞 처마에 들어오네 / 客來故故入前簷

• 새 시편 짐짓 더디어지는구나 / 新篇故故遲

• 머뭇머뭇 오히려 훗날의 생각을 두네 / 故故猶存後日思

✴仍孫 잉손: 여덟째 대의 자손

일곱째 대라고 하는 의견도 있음

운손(雲孫)은 아홉째 대의 자손.

운잉(雲仍): 운손(雲孫)과 잉손(仍孫)으로, 먼 후손을 가리킴

✴獻爵 제사 때, 술잔을 올림 .獻酒 敬酒

• 爵은 원래 飮酒의 그릇.《周禮·考工記·梓人》

• 梓人爲飮器,勺一升,爵一升,觚三升。獻以爵

-----------------------------------------------------------【내용이해】

<두련>: 사당 참여. 추모-- 선조의 그리움

<함련>: 사당 분위기- 선조의 향기 풍김 < 대구>

<경련>: 무덤 분위기- 선조의 향기 풍김< 대구>

< 미련>: 조상 추모- 헌작. 경건함.

-----------------------------------------------------------

幸參修德祀 慕仰三休堂

행참수덕사 모앙삼휴당

蒼樹千年色 遺謨百世香

창수천년색 유모백세향

 

다행히도 수덕재 제사 참가해

그리운 삼휴당 님 우러러 보네.

 

푸른 나무 천년의 빛깔이지만

남긴 교훈 백 세대의 향기이로다.

 

松楸依舊碧 莎草入春芳

송추의구벽 사초입춘방

故故淸風裏 仍孫獻爵忙

고고청풍리 잉손헌작망

 

선영(先塋)은 예전처럼 푸르러 있고

무덤 풀은 봄 향기 풍겨져 오네.

 

솔솔 부는 맑은 바람 그 속에서도

팔대 후손 분주히 술잔 올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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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기식 5언 율시 下平성七陽운<堂香芳忙>

‣ 시의 평수운

측측평측측 측측평평평

평측평평측 평평측측평

평평평측측 평측측평평

측측평평측 평평측측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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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휴[趙休]의 묘갈명(墓碣銘)송덕한시(頌德漢詩)

◑龍宮縣監趙公墓碣銘 八月二日◐

●수우문체우행 (邃于文摰于行)

●섭우학유우정 (涉于學裕于政)

●세소한애무명 (世所罕欸無命)

●시위명과자경 (是爲銘過者敬)

◎문장은 심오하였고 행실은 진지하였으며,

◎학문은 박식하였고 정사는 느긋하였네.

◎세상에 드문 인물이었으나 아! 생명이 길지 못하였으니,

◎이 분의 명을 지어 지나는 자들이 공경하게 하노라.

(번역에 도움을 주신 분 :국역: 안동김가 청음후손 서윤공-문정공파 白村 金彰顯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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