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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趙克善神道碑文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0. 4. 19.

■14세 문목공 휘 극선
양절공-한풍군파.
자는 유제.호는 야곡.
인조1년 추천을 받아 동몽교관이 되시고,호조정랑,면천군수,순창군수,형조정랑,사어,온양군수를 역임하시고,통훈대부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시고 시호는 문목공이다.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 조정에서 정려가 내렸으며,학문을 좋아하여 숙종이 책을하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야곡집과 야곡삼관기가 전해진다.
6세 양절공 묘비를 새로 세웠으며,신창의 도산서원.덕산의 회암서원에 배향되셨고,묘는 예산 봉산 시동리이며,신도비와 정려비각 어서제가 있다.

■趙克善神道碑文■

[頭篆]

朝鮮國 贈資憲大夫史 曹判書 行南臺掌令 贈諡文穆公 漢陽 趙先生 神道碑銘

[題目]

贈資憲大夫 吏曹判書兼 知義禁府事 成均館祭酒 五衛都摠府都摠管 行通訓大夫 司憲府掌令 贈諡文穆公 漢陽 趙先生 神道碑銘幷序

坡平 尹拯 撰

正憲大夫 議政府贊政 兼掌禮院卿 奎章閣提學 潘南 朴箕陽 謹書 幷篆

冶谷先生趙公諱克善字有諸潛冶朴先生浦渚趙先生之門人也公幼有遠志始讀小學見嘉言善行慨然有感發於心又讀家禮曰學而不習禮則日用之間不知所措不可不先從事於斯也初從潛窩李公命俊學得見朱字書大耽樂之手抄口誦盡焚其平日所做科文曰人中天地而立却將第一等讓與別人甘心自處於下流良足羞矣李公勸令見二先生且爲之紹介盖二先生作於牛栗之後以道學自任潛冶篤信先賢浦渚多務自得而其學皆以孝悌爲本踐履爲主眞實無僞爲宗學者多歸之二先生見公皆愛重焉潛冶首取近思錄而示之曰此乃四書之階梯也遂盡告以淵源之學浦渚則曰學者當以孔孟爲法古今未有力學而不成者又曰仰不愧俯不?是功效也須當以毋自欺爲先公一依其說尊信服習卒以是成德焉仁祖初選學行士公以薦調童蒙敎官一以小學之道敎諸生躬親先之有古師弟子風陞宗簿寺主簿已拜工曹佐郞有不樂意棄官歷翊衛司司禦翊衛戶曹正郞軍器寺僉正沔川郡守則爲崇禎丙子時朝延新絶虜和令州縣召募忠義公言于按使曰欲得民之死力必先有以感動之令征/無藝而有司莫之恤責之以忠義不亦難乎請짋再徵之稅罷管餉漁鹽之害以悅民心又修鍊兵器區畵纖悉兵使宋英望見之嘆服曰誠者萬事之原豈不信然哉及寇至上入南漢山城公時已罷郡家居匹馬奔問至天安不得進歸奉老親避兵於海島及聞有城下之盟憤泣廢食者累日尋丁外憂服ⅳ仍/迹不出連除淳昌郡守刑曹正郞及司禦皆不就戊子拜溫陽郡守浦渚勸之出曰高潔固好世所指名沈於下位用行舍藏不亦可乎公乃拜命孝宗卽位浦渚爲相薦公經學宜爲太學之師卽拜成均館司業公辭謝不就復除江華府經歷淳昌益山郡守工曹正郞或就或否丁酉七月以司憲府持平召尋又以掌令召公以君召再至不敢不赴入城謝恩上卽引見便殿.迎謂曰望之久矣今幸相見深用喜悅勞問甚至及退命有司給食物俄命以本職出入經席會有冬雷之變公上疏極言修省之道上嘉納公雖感激殊遇勉一出而禮士隆渥謙不敢當每於前席陳懇乞免已而遞授繕工監僉正或謂公曰亦將去乎公曰幸得閑局隨分支吾徐當有以處之吾豈屑屑然昨遞而今去耶供職惟謹歲時又有米饌柴炭之賜公上疏辭兼獻箴規明年戊戌正月復拜掌令再命牌招不得已出肅遽中風疾於闕下命禁中衛士以肩輿歸邸越二日甲辰卒上驚悼謂筵臣曰山野之人强使赴闕有若由予而死予甚痛惜盖始聞公病卽召入直御醫畢來看病特賜毛衣一襲以覆體命取用內局藥物勿待啓下訃聞命官庇喪自衣衾棺槨諸需悉備別賜衾資紋綿玄?又命沿路護柩給造墓役夫皆曠世異典也嗚呼公令名早著然而平生謙退自守晩際聖明知遇方深而遽不淑壽僅六十有四卒不能盡展所學有識莫不悼惜焉公有至行純性其事父母自兒時已能承順無違凡齒髮爪甲皆收藏曰父母遺?也十二歲丁母夫人憂病時思食苽而未及新公及終身不忍食苽每雨雪輒至墓所掃除塋域夏療亦冒雨周省每見人俱慶爲之慽然至讀孟子三樂章未賞不流涕事考迪順公竭誠奉養志物俱備或宦遊京師思慕如창兒遇正至晨興炷香望鄕再拜以폑思親念墓之誠迪順公七 창風疾坐臥須人者五載公色잿服勤受針必先試便씸所汚手自浣濯嘗猝劇割指進血得甦迪順公病廢食而猶嗜膾公躬漁釣以供之未嘗乏絶比沒不復食膾居喪哀慽踰禮旣卒哭猶水和곪飯而?之不茹菜醬祭祀一依家禮將祭之日終夜不寐祭後不脫冠帶因戒子弟曰祭先?畢便自怠惰甚無餘敬也若有故不得與祭候其行事必衣服冠而坐雖暫時遷次必奉主移安不使一日無人於廟傍事庶母亦致愛敬遇?妹夫無異同氣姝寡而貧敎育其孤使之婚嫁以時訓子嚴正必以勤謹忠信於宗族鄕閭不遺疎賤慶吊?恤咸盡其情鄕中人有墻閱者公寓其里忽變作和平人謂有以感和之也潛窩及二先生之喪.皆心喪朞年夫人忌辰.亦爲之行素後又上疏言李公淸白得蒙褒錄國忌無論遠近家食亦不肉仁祖昇遐公時在溫陽?粥枕?朝夕哀臨一如親喪一邑爲之市不沽酒野無農歌每有恩賜輒行拜受之禮其係上供之物必冠帶祗送于大門外入國不敢中道而行以避輦路居家示明而起竟日無倦怠之容發言制行尤謹於獨知之地安於貧婁未嘗有求於入或有饋遺毫髮不慊則若將닭己居官簡簿嘗以孟子得志不爲之訓自견外舅崔公家?稍溫一子先沒無嗣欲以後事託於公之子公固拒勸取姓族爲後雅不喜聲色少時族宦獨處者十餘年及喪힣不復卜妾平生未嘗以禍福得喪置?慽皆隨遇順受嘗誦范文正先憂後樂之語曰其用心如是豈不誠大丈夫哉區區以一已得失爲憂樂者陋矣至如陰陽卜祝方術之類一切絶於言議唯家間或有災異則輒爲之反己自省貶衣減食曰災異之作天所以譴告於人者理當恐懼修省登以家國而有異乎其治郡平易近民務通下情不姑息以要民譽不紛更以貽後弊文廟釋菜及社稷城隍等祭齋戒致潔必親行之修 舍曼書籍進諸生而躬敎之遇事裁處不以權勢利害有所遷就其收賦稅使民自操斗斛事官長以敬吏胥如奴僕僚吏交承皆有恩義所在仁心著聞久益追思之盖公氣質之稟陽德爲多故孝悌之行始於家庭睦 之實孚於親黨以至待人接物접然常有慈愛惻?之心自事親而爲事君自居家而爲居官率由是心而無所勉强其得於天者已如此而漸之以師友成之以學問由是表裏如一幽顯不貳一言一行無非可爲後生法式者今不能悉書然觀於此亦可知其爲篤學力行之君子矣顯宗朝道臣以公孝行上聞命旌閭鄕中章甫又疏陳公學問踐履之實孝友淸白之行命贈史曹參議公幼時自爲日錄凡日用云爲皆書之以自省有過則閉戶自撻卷首書事親孝事君忠事師敬九字及見二先生作自警箴以述其志又擇經傳中修身存心之法數百條爲一冊名曰 己要訣不去懷袖又 記其所得於耳目心思者謂之三官記以驗窮格每覽古人言行之善者必心慕而手記之名曰常目編或有意會爲之感涕仁祖朝啓運宮之喪.群臣議服制不一沙溪金文元公以爲當依爲人後例稱以伯叔父母而服不杖朞或以爲當依君之母非夫人之文而服 或以爲持堅大宗者當降其小宗稱號則當以父母而服則當從不杖朞툢皆以爲群臣無服而潛冶先生.獨謂當用受國於祖者爲其父斬衰之禮服喪三年群臣皆從服朞公之見與潛冶合乃著說以辨明之又有雜記二卷遺文若干卷藏于家公之先漢陽人八代祖諱溫入我朝策三勳封漢川府院君謚良節高祖諱敬良曾祖諱쭅祖諱興武考諱景璡皆不仕以門功加散階考迪順公力學不遇敎授鄕里推爲巨人長者浦渚銘其墓틌公州李氏進士致霖之女慈順孝敬甚有婦德配江華崔氏僉知贊之女贈淑夫人後公一年而生先公四年而卒性仁儉養舅奉祭誠敬備至勤身節用制産有方公與庶房同居夫人規弟之妻如同胞睦 黨撫퀳曲一以公之心爲心遭崔府君之喪每朔望說位而哭踰年竟以毁終病革謂諸子曰我死藻浴必潔無垢我全歸之身葬于德山臺城山向乙之原公沒遂同榮而異室焉有三男二女長曰昌漢縣監次曰晟漢縣監次曰晸漢女長適參奉李光胤忠武公舜臣之曾孫也次適士人李根昌漢一男曰栢一女폖申洵晟漢七男曰 ?c 枋쮡餘及一女幼晸漢一男曰根三女皆幼李先胤六男一女男長弘毅都事次弘著縣監次弘緖次弘健餘皆幼拯少遊炭翁權公之門翁亦潛冶門人也每稱公德行不厭其後先君子一見公如舊交申以札翰其義固不淺矣顧拯病蟄不類竟不能遂掃門之願以爲平生之恨縣監兄弟誤以墓碣相託重念拯學陋詞拙不足以當此任惟辛託名于石末不敢終辭遂撮而폑之繫以銘銘曰

人之爲善只循天理 사람이 선행하는 것은, 천리를 따르는 것이니

曰知曰行惟此而已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오로지 이 하나뿐

苟或不然爲名與利 혹여 그러지 아니하여, 명예와 이익을 구한다면

大本已失雖善亦僞 기본을 이미 잃어, 선행 또한 위선일세

公有美質早自植志 공은 아름다운 자질 갖춰, 일찌감치 스스로 뜻 세우고

洎得依歸 講此宗旨 스승을 얻게 되자, 이 핵심을 연구했네

匪言是出允蹈於己 말을 꺼내지 않고, 진정 몸으로 실천하니

由內達外罔非吾事 안에서부터 바깥까지, 자신 일 아님 없도다

以此終身他無所爲 종신토록 이를 실천하여, 다른 일 하지 않았으나

名不副實位未滿德 이름이 실제와 걸맞지 않고, 지위가 덕망을 따르지 못하니

雜其實心可傳後學 오직 그 참된 마음만이, 후학들에 전해지리라

我誦公言以銘墓石 내가 공의 말을 읊조려, 묘석에다 명을 새기니

惟僭是懼庶無愧色 오직 참람될까 두려울 뿐, 부끄럽진 않다네

사람이 착함을 행하는 것은 천리를 따름이다.

지와 행이 오직 이것 뿐이로다.

진실로 그렇지 아니하면 명예와 이로움을 위함이라.

대본을 잃으면 비록 착하더라도 또한 거짓이라.

공은 바탕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뜻을 세워 의지해

돌아감을 스스로 얻어서 이 종지를 강하였도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요 진실로 몸에 실천함이로다.

안에서 밖에 까지 내 일이 아님이 없도다.

이것으로 몸을 마치니 여타는 할 바가 없었다.

명성은 실지보다 못하고 지위는 덕에 차지 못한다.

오직 그 실한 마음이 후학에게 가히 전할만하니

내 공의 말을 외워서 묘석에 새기노라.

오직 참람됨을 두려워하니 아마도 부끄러운 빛은 없으리라.

[追記]

謹接先生之墓始 於弘臺城山矣追後緬奉于富德山下統山向丁之原配贈貞夫人之墓亦移퉿焉至哲宗朝因士林疏請特贈正卿賜諡文穆公道德博文曰文布德執義曰穆.而明齊尹先生之撰碑文乃肅宗六年庚申也墓所遷封朝家恩典後時不及故謹玆追記爾

先生歿後二百七十二年己巳月己巳日立

문목공 야곡 조극선 신도비문

<조극선 신도비문 趙克善神道碑文>

[두전(頭篆)]

조선국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행남대장령 증시문목공 한양 조선생 신도비명(朝鮮國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南臺掌令贈諡文穆公漢陽趙先生神道碑銘)

[제목(題目)]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성균관제주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훈대부 사헌부장령 증시문목공 한양 조선생 신도비명 병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館祭酒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訓大夫司憲府掌令贈諡文穆公漢陽趙先生神道碑銘幷序)

파평윤씨(坡平尹氏) 명재(明齋) 윤증(尹拯) 찬(撰)

정헌대부 전의정부찬정 겸장례원경 규장각제학 반남 박기양 근서 병전(正憲大夫前議政府贊政兼掌隷院卿奎章閣提學潘南朴箕陽謹書幷篆).

야곡(冶谷)선생 조공(趙公)의 휘(諱)는 극선(克善)이요 자는 유저니, 잠야(潛冶) 박선생과 포저(浦渚) 조선생의 문인이다. 공이 어려서 뜻이 있어서 처음에 소학을 읽으면서 가언선행(嘉言善行)을 보고서 개연히 마음에 감발함이 있었고, 또 가례(家禮)를 읽고서 말하기를 배우고서 예를 익히지 않으면 날마다 쓰임의 사이에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게 되니 불가불 여기에 먼저 종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처음에 잠와(潛窩) 이공 명준(命俊)을 따라서 주자서(朱子書)를 얻어 보고서 그것을 크게 즐겨하여 손수 초하고 입으로 외우고서 평소에 공부하던 과문 글을 모두 태워 버리며 말하기를 사람은 천지 가운데에 서 있으니 장차 가장 우두머리가 된다. 겸퇴해서 사람으로 더불어 하류에 마음을 달게 먹고 스스로 처했으니 진실로 부끄럽도다 하였다. 이공이 권해서 두 선생을 뵙게 하고 또 그를 위하여 소개하였는데 대개 두 선생은 우계와 율곡의 뒤에 일어나서 고학으로써 자임한 분들이었다.

잠야는 선현을 도타이 믿고 포저는 힘써서 자득하여 그 학문이 모두 효제로 근본을 삼고 실천으로 주를 삼아서 진실되고 거짓됨이 없는 것으로 마루를 삼아서 학자들이 많이 그에게 돌아갔다. 두 선생께서 공을 보고 모두 사랑하고 중히 여기었다. 잠야는 먼저 근사록(近思錄)을 가져다가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사서(四書)의 계단이다라고 하여 드디어 연원의 학문을 모두 고하였고 포저는 말하기를 배우는 자 마땅히 공맹으로 법을 삼을 것이니 예나 이제나 힘써 배우고서 이르지 않는 자가 있지 않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러러 보아 부끄럽지 아니하고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으면 이것이 효과이다 하고 모름지기 마땅히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으로 우선하니 공이 한결같이 그 말씀을 의지해서 높이 믿고 복종해 익혀서 마침내 이것으로써 덕을 이루었다.

인조대왕 처음에 학행이 있는 선비를 뽑을 때 공이 천거로 동몽교관에 제수되어서 하결같이 소학의 도로써 제생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해서 옛 스승과 제자의 풍이 있었다. 종부시 주부로 승진하고 좀 있다가 공조좌랑에 배수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그뒤 익위사 사어와 익위와 호조정랑과 군기시 첨정을 역임하고 면천군수가 되었는데 곧 숭정 병자인지라. 때에 조정이 오랑캐와 화친을 끊고 주현으로 하여금 충의사를 불러 모집하게 하는데 공이 안사에게 말하여 가로되 백성의 힘을 다해 죽을 것을 얻고자 할진대 반드시 먼저 그들에게 감동할 수 있음이 있어야 하거늘 이제 세금이 그지없는데도 유사들이 그것을 돌보지 아니하는데 그들에게 충의를 바라면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청컨대 두 번 걷는 세금과 관향(管餉)과 어렴(漁鹽)을 감하여 그 해로움을 피해서 민심을 기쁘게 하고 또 병기를 닦아 단련시키고 계획을 성실하게 하소서 하니, 병사 송영망이 그를 보고 탄식해 말하기를 사실이로다. 만사의 근원이 어찌 진실로 그러하지 아니한가.

도적이 쳐들어옴에 임금께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시니 공은 당시에 이미 군수를 그만두고 집에 칩거하여 있던 때였다. 임금에게 필마로 달려 문안 드리려하여 천안에 이르렀다가 나아갈 수가 없어서 돌아와서 노친을 받들고 바다섬으로 난리를 피하였다가 도성 아래에서 항복한 맹세가 있음을 듣고 분하여 울고 음식을 폐하기를 여러날 하였다. 외간상을 만나서 복을 마치고도 인하여 자취를 거두고 나아가지 아니하니 연해서 순창군수와 형조정랑과 및 사어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무자년에 온양군수를 배하였는데 포저가 공에게 나가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높고 깨끗한 것이 진실로 좋으나 세상에서 지명되는 바로써 낮은 벼슬에 잠겼으니 쓰이면 행하고 버리면 감추는 것이 또한 가하지 아니한가 하니, 공이 이에 명을 배수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포저가 정승이 되어 공을 천거하여 경학이 마땅히 태학의 스승이 될만 하다 하여 곧 성균관 사업을 배수하니 공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다시 강화부 경력과 순창·익산군수와 공조정랑을 제수함에 혹 나아가고 혹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정유년 7월에 사헌부 지평으로 부르고 곧 또 장령으로 부름에 공이 인군의 부르심이 두 번이나 이르러 감히 다다르지 않을 수 없다해서 도성에 들어가 은혜에 사례하니 상이 곧 편전으로 불러 보시고 말씀하기를 그대를 바랜지가 오래도다. 이제 다행히 보았으니 기뻐해서 위로하고 물음이 지극하였고 물러나옴에 미처서 유사에게 명하여 음식을 주시고 좀 있다가 본직을 명하여 경석에 출입하게 하였다.

때마침 겨울에 우뢰가 일어나는 변이 있어서 공이 상소해서 닦고 살피는 도를 극진히 말하니 상이 가납하시었다. 공이 비록 특별한 만남에 감격해서 한결같이 노력하였으나 선비를 예로 대함이 융숭하여 겸손함을 당할 수가 없었다. 매양 앞자리에서 정성을 베풀고 면하기를 빌어서 얼마후에 체직해서 선공감 첨정에 제수되었다.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장차 떠날것이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다행히 한가한 자리를 얻어서 분수에 따라 지탱할 것이니 서서히 여기에 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어찌 가볍게 해서 어제 체직하고 오늘 떠나겠는가 하고서 공직하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과세할 때에도 쌀과 음식과 나무와 탄을 하사하니 공이 상소해서 사양하고 겸해서 잠규를 바쳤다. 명년 무술 정월에 다시 장령을 배수함에 두 번이나 패초를 명하니 부득이해서 나아갔다. 갑자기 중풍의 병이 궐하에서 나니 대궐안에 호위하는 군사를 명해서 견여(가마의 류)로 집에 돌아와서 이틀이 지나서 갑진에 마침내 졸하였다. 상이 놀라고 슬퍼하여 연신들에게 일러 말씀하기를 산야의 사람을 억지로 대궐에 이르도록 했으니, 나로 말미암아 죽은 것 같아서 내 심히 아프고 아깝도다.

대개 처음에 공의 병을 듣고서 곧 입직한 어의를 불러 병을 보게 하고 특별히 모의 일습을 하사하여 몸을 덮게 하고 궁내의 약물을 취하여 쓰도록 명하고 계하하기를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부고가 들림에 관원을 명하여 상사를 돕게 하여 의금 관곽으로부터 수의를 모두 갖추게 하고 특별히 이불의 자료로 수놓은 비단과 검은 훈을 하사하고 또 연로에 명해서 상여를 호위하게 하고 산소를 만드는 역부를 하급하시니 모두가 세상에 없었던 특별한 은전이었다.

오호라! 공은 영명이 일찍 나타났으되 평생토록 겸양하고 물러서서 스스로 지키고 만년에 밝은 임금님의 지우가 깊음에 급히 돌아가시니 수가 겨우 64세로 마침내 배운 바를 다 펼수가 없었으니 이를 아는 이들이 슬퍼하고 아깝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지극한 행동과 순수한 성품으로 그 부모를 섬김에 아이때로부터 이미 승순하고 어김이 없었으며 모든 이와 터럭과 손톱을 모두 거두어 감추면서 말하기를 부모가 끼쳐준 몸이라고 하였다.

12세에 모부인의 상사를 당하였는데 병환으로 있을때에 외를 잡수시고자 하였으나 미처 햇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공이 몸을 마치도록 차마 외를 먹지 아니하고 비나 눈이 올때마다 문득 산소에 가서 영역을 쓸고 여름 장마에도 또한 비를 무릅쓰고 두루 살피고 매양 남들의 두 부모을 모신 것을 보고서 그를 위하여 척연하게 슬퍼하고 맹자의 삼락장을 읽고서는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아버지 적순공(迪順公)을 섬김에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혹 서울에 나아가 벼슬 할 적에도 사모하기를 어린아이 처럼 하고 정월과 동지에 일찍이 일어나서 향불을 피우고 시골을 바라보며 재배하면서 어버이를 생각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폈다. 적순공이 칠순에 풍질에 걸려서 앉고 누움에 사람이 따라야한 것이 5년이었으되 공이 걱정하여 부지런히 모여 침을 놓을때는 반드시 먼저 시험하고 소·대변으로 더럽힌 것은 손수 빨았다. 갑자기 병환이 급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드려서 소생하게 되었다. 적순공(迪順公)이 병으로 음식은 폐하면서도 오히려 회를 즐겨하여 공이 몸소 고기잡이 하고 낚시질 해서 이것을 떨어지지 않게 공급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다시 회를 먹지 아니 하였다.

상사에 거함에 슬퍼함이 예에 넘치고 졸곡이 지나서도 오히려 물에 거친밥을 말아서 그것을 마시고 채소나 간장을 자시지 아니 하였다. 제사에는 한결같이 가례에 의존하고 장차 제사지내는 날에 밤새도록 자지 아니하고 제사를 마친 뒤에도 관과 띠를 벗지 아니하고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조상을 제사지냄에 겨우 마치고서 스스로 태만하면 남의 공경이 없는 것이다. 만일 연고가 있어서 제사에 참여할 수가 없으면 그 행사하기를 기다려서 반드시 옷을 입고 갓을 쓰고 앉아서 비록 잠시라도 옮겨서 반드시 신주를 받들고 옮겨 편안히 하고 하루라도 사당 곁에 사람이 없게 하지 아니하였다.

서모를 섬김에도 또한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고 자매부를 만남에도 동기간과 다름이 없이 하여 매씨가 과부가 되고 가난해서 그 아이를 교육시켰고 그들을 시집보내고 장가보내고 자식을 가르침에 엄중하여 반드시 부지런하고 삼가고 충성스럽고 믿게 하여 종족과 향리에서 미천한 사람들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경사와 애사에 돌보기를 모두 그 사정에 극진히 하였다.

향중에 어떤 집의 담을 넘겨 보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그 마을에 우거하니 홀연히 변해서 화평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를 감화시켰다고 하였다. 잠와와 포저 선생의 상사에 심상(心喪)으로 기년을 하였다. 부인의 기고 때에도 소복하였다. 뒤에 또 상소해서 이공의 청백을 말하여 포상을 받도록 하고 나라의 기일에는 멀고 가까움을 논할 것 없이 집에서 먹을 때도 또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인조께서 승하 하심에 공이 당시에 온양에 있었는데 죽을 마시고 짚으로 베게하고 조석을 슬피 임하여 하나같이 친상과 같이 하니 온 고을이 저자에서 술을 팔지 아니하고 들에서 농가(農歌)가 없었다. 매양 은사품이 있을 때마다 문득 배수하는 예를 행하고 그 상과 관계 되는 물건은 반드시 갓 쓰고 띠를 매고 공경해 대문 밖에 까지 전송하였다. 서울에 들어가서 감히 길 가운데에 다니지 아니하고 임금 행차 길을 피하였다.

집에 있어서는 밝기 전에 일어나서 해가 마치도록 권태한 모양이 없으며 말씀을 하거나 행동을 제재하여 더욱 혼자만이 아는 곳에 삼가 하였다. 가난하면서도 편안히 하여 일찍이 남에게 구함이 있지 아니하고 혹 보내줌이 있음에 호발이라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마치 장차 몸을 더럽힐 것 같이 하고 벼슬에 거해서는 문서를 간략히 하고 일찍이 맹자의 뜻을 얻어서는 하지 아니한다는 가르침으로써 스스로 힘썼다. 외구 최공의 가업이 조금 넉넉한데 하나인 아들이 먼저 죽고 후사가 없어서 공의 아들에게 후사를 부탁하고자 하니 공이 굳이 거절하고 일가에서 취해서 후사를 삼으라고 권하였다.

평소에 소리나 빛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젊었을 때에 나그네로 벼슬길을 나감에 홀로 처한지가 10여년이요, 부인을 잃고서도 다시 첩을 두지 아니하였다. 평생에 화와 복과 얻고 잃는 것으로 기뻐하고 슬퍼하지 아니하고 모두 만남을 따라서 순하게 받아 들였다. 일찍이 범문정(范文正)의 근심을 먼저하고 낙을 뒤로 하라는 말을 외우고 말하기를 그 마음 씀이 이와같으니 어찌 참으로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구구마다 자기의 한 몸에 득실만 가지고서 걱정하고 즐겨하는 자는 좁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음양복서의 방술과 같은 류에 이르러서는 일체 말해서 끊고 집안에 혹 재앙의 변이가 있으면 문득 자기 몸을 스스로 살피고 옷과 음식을 줄이고 감해 말하기를 재앙이 일어난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꾸짖어 고한 것이니 마땅히 두려워 하고 닦아 살필 것이니 어찌 집이나 나라가 다름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 고을을 다스림에는 편안하고 백성에게 가까이 해서 아래 정을 통하기를 힘쓰고 구차하게 백성의 칭찬을 바라지도 아니하고 어지럽게 폐단을 끼치지도 아니하였다. 문묘의 석전과 사직과 성황당 등의 제사에는 재계하여 깨끗함을 이루고 반드시 몸소 행하고 향교를 닦아 나가고 서적을 사서 학생들을 진취시키고 몸소 그들을 가르쳤다. 일을 만나 처리함에는 권세와 이해로써 옮기는 바가 있지 아니하고 세금을 걷음에 있어서는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두량을 헤아리게 하였다. 관장을 섬김에 공경하고 아전을 어거함에 노복과 같이 하여 관료와 아전들이 서로 이어 모두 은혜와 의리를 지닌 바가 있어서 어진 마음의 소유자라는 소문이 드러나 오래도록 그를 생각하였다.

대개 공의 기질은 양덕을 받음이 많았기 때문에 효제의 행동이 가정에서 비롯하고 화목하는 사실이 친척에서 나타나고 사람을 접대하고 물건을 접함에 이르러서도 애연하게 항상 사랑하고 슬피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어버이 섬김으로부터 인군을 섬기고 집에 거함으로부터 관에 거하기까지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힘쓰는 바가 없었으니 그 하늘에서 얻은 것이 이미 이와 같았다.

그리고 스승과 벗으로써 학문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표리가 한결같고 숨고 나타남이 둘이 되지 아니하고 한마디 말과 한가지 행동에 가히 후생들이 법 받을 만한 것이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제 능히 다 기록하지는 못하나 그러나 여기에서 볼적에 또한 그 학문을 독실히 하고 행동에 힘쓰는 군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종조에 도신이 공의 효행을 임금님께 알리어 정려를 명하고 고을 안에 선비들이 또 상소를 올려 공의 학문과 행실이 실하고 효우하고 청백한 행동을 진술하니 이조참의를 명하여 증직하였다.

공이 어렸을 때에 스스로 일기를 만들어서 날마다 행하는 일을 모두 여기에 써서 스스로 살펴서 허물이 있은 즉 문을 닫고 스스로 종아리쳤다.

책머리에 「사친효(事親孝)·사군충(事君忠)·사사경(事師敬)」의 아홉자를 쓰고 두선생을 뵙고서는 자경잠(自警箴)을 지어서 그 뜻을 술회하고 또 경전 중에서 수신과 존심의 방법 수백가지를 가려서 한 책을 만들어서 폄기요결(鐄己要訣)이라 이름하고 품과 소매에 떠나지 아니하고 또 귀나 눈이나 마음으로 생각한데에서 얻은 것을 쪼각쪼각 기록해서 삼관기(三官記)라고 이름해서 이치를 연구해서 격물하는 것을 증험하였다. 매양 옛사람의 언행이 착한 것을 보면 반드시 마음으로 사모하고 손으로 기록해서 상목편(常目編)이라 이름하고 혹 생각이 맞는 것이 있으면 감격해 울곤 하였다.

인조조에 운궁의 상사가 열림에 군신들이 복제를 의논함이 한결같지 아니하였다. 사계(沙溪) 김문원공은 말씀하기를 마땅히 양자로 후계한 예를 따라서 백숙부모로 일컫고 복은 불장기(不杖朞:지팡이 없이 1년 복을 입는 것)로 해야 한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마땅히 군의 어머니에 의하여 부인으로 문식하지 않으므로 복을 시마로 해야 한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대종을 굳게 유지하던자 소종으로 감동을 당했다해도 칭호는 부모이기 때문에 복은 마땅히 불장기를 따라야 한다 하여 모두가 말하기를 군신들은 복이 없다하는데 잠야 선생은 홀로 말하기를 마땅히 조부에게서 나라를 받은 자는 그 아버지를 위해서 참최(斬衰)의 예를 사용하고 3년 상의 복을 입어야 한다라고하여 군신들이 모두 따라서 기년복을 입었다. 공의 견해가 잠야로 더불어 같아서 이에 설을 지어서 이것을 변명하고 또 잡기 2권과 유문 약간 권을 집에다 소장하였다.

공의 선세는 한양인이다. 8대조 휘 온(溫)은 아조에 들어와서 세 공신에 책록되고 한천부원군으로 시호를 양절(良節)이라 하고 고조의 휘는 경량(敬良)이요, 증조의 휘는 곤이요, 조의 휘는 흥무(興武)요, 고의 휘는 경진(景璡)이니 모두 벼슬하지 아니하고 가문의 공으로 산계(散階)를 가하였다. 아버지 적순공(迪順公)은 힘써 배웠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서 향리에서 교수하여 거인과 장자로 추대되었다. 포저가 그 산소에 명을 하였다. 비위 공주이씨는 진사 치림의 따님이신데 자순하고 효경하여 심히 부덕이 있었다.

배위 강화 최씨는 첨지 찬의 따님이신데 숙부인으로 증직되었다. 공보다 1년 뒤에 낳아서 공보다 4년 앞서 졸하였다. 성품이 어질고 검소하고 시아버지를 봉양하고 제사를 받듦에 정성과 공경이 갖추어 이루고 몸을 부지런히 하고 쓰임을 절약하여 살림 마련에 방법이 있었다. 공이 서제와 더불어 거할 때 부인이 아우의 아내 보기를 친형제와 같이 하고 집안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어루만짐에 한결같이 공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았다. 최부군(친정 아버지)의 상사를 만나서 삭망마다 자리를 마련하여 곡하고 해를 넘김에 마침내 슬픔으로 병이 위중해지자 여러 아들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목욕을 반드시 깨끗이 해서 때가 없이 하고 나를 온전히 돌려보내 달라고 하였다.

덕산 대성산 을향의 언덕에 장사지냈고 공이 몰하자 드디어 같은 산소에 실을 달리 하였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창한은 현감이요, 차남 성한도 현감이요, 다음은 정한이요, 큰 딸은 참봉 이광윤에게 시집가니 충무공 순신(舜臣)의 증손이요, 다음은 선비 이은에게 시집갔다. 창한이 1남이니 백(栢)이요, 1녀의 사위는 신순이다. 성한이 7남이니 장·총·강·방·광과 나머지 둘과 딸 하나는 어리다. 정한의 한 아들은 근이요, 세 딸은 모두 어리다. 이광윤이 6남 1녀를 두니 장남 홍의는 도사요, 차남 홍저는 현감이요, 다음은 홍서요, 다음은 홍건이요,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증(拯)이 어려서 탄옹 권공의 문하에서 놀았는데 탄옹(炭翁)도 또한 잠야의 문인이다. 매양 공의 덕행을 칭찬하기를 싫어하지 아니하더니 그 후에 선군자께서 공을 한 번 보고 구교와 같이 하고 거듭 편지하니 그 의가 진실로 얕지 아니하다. 돌아 보건대 증(拯)은 병들고 칩복해서 답지 못하여 마침내 능히 문생의 원을 이루지 못하여 평생 한이 되었는데 현감 형제가 묘갈을 잘못 부탁하니 거듭 증(拯)의 학문이 고루하고 문장이 졸렬함을 생각함에 족히 이 책임을 당할 수가 없다.오직 돌 끝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이것을 요약해서 술하고 이어서 명하노라.

司憲府掌令贈吏曹參議冶谷先生趙公墓碣銘

人之爲善只循天理

사람이 착함을 행하는 것은 천리를 따름이다.

曰知曰行惟此而已

지와 행이 오직 이것 뿐이로다.

苟或不然爲名與利

진실로 그렇지 아니하면 명예와 이로움을 위함이라.

大本已失雖善亦僞

대본을 잃으면 비록 착하더라도 또한 거짓이라.

公有美質早自植志

공은 바탕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뜻을 세워

洎得依歸講此宗旨

의지해 돌아감을 스스로 얻어서 이 종지를 강하였도다.

匪言是出允蹈於己

말만 하는 것이 아니요 진실로 몸에 실천함이로다.

由內達外罔非吾事

안에서 밖에 까지 내 일이 아님이 없도다.

以此終身他無所爲

이것으로 몸을 마치니 여타는 할 바가 없었다.

名不副實位未滿德

명성은 실지보다 못하고 지위는 덕에 차지 못한다.

雜其實心可傳後學

오직 그 실한 마음이 후학에게 가히 전할만하니

我誦公言以銘墓石

내 공의 말을 외워서 묘석에 새기노라.

惟僭是懼庶無愧色

오직 참람됨을 두려워하니 아마도 부끄러운 빛은 없으리라.

 

<추기>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산소는 처음에 대성산에 있다가 추후에 부덕산하 통산 정향의 언덕에 면봉하고 배위 증정부인의 묘 또한 여기에 옮겨 부장하였다. 철종조에 이르러서 사림의 상소하여 특별히 정경을 증직하고 시호를 문목공(도덕박문(道德博文)을 문(文)이라 하고 포덕집의(布德執義)를 목(穆)이라 한다.)이라 하였고 그리고 명재(明齋) 윤선생이 찬한 비문은 곧 숙종 6년 경신(庚申)년이었다. 묘소를 천봉한 것은 조정에서 은전을 내린 뒤에 시기가 미치지 못함으로 삼가 이에 추기한다.

선생이 몰한 뒤 270년 기사(己巳)월 기사(己巳)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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