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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1711년 조덕린(趙德鄰) 위장(慰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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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조덕린(趙德鄰) 위장(慰狀)▣

 

기본정보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위장
내용분류: 종교/풍속-관혼상제-위장
조덕린, 이시성
경상북도 영양군
1711
크기: 29.5 X 47.4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원소장처: 영양 주곡 한양조씨 옥천종택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11년 조덕린(趙德鄰) 위장(慰狀)

1711년 11월 10일에 조덕린이 상중에 있는 사돈 생원 이시성(1669~1725)을 위로하고 안부를 전하는 위장이다. 상대가 상중에 있는 데 미리 안부 편지를 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사위를 통해 그의 상중 안부를 전해 듣고 그를 위로하였다. 이후 자신의 근황을 전하며 鄭査兄이 끝내 돌아가셨다는 것과 子婦가 병의 위독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또 사위와 딸이 길을 떠나는 것이 눈길에 염려된다고 하였다.

『漢陽趙氏兵參公派世譜』

1차 작성자 : 이재현

상세정보

1711년 11월 10일에 趙德鄰이 喪中에 있는 사돈을 위로하고 안부를 전하기 위해 生員 李時成에게 쓴 慰狀

1711년 11월 10일에 趙德鄰(1658~1737)이 喪中에 있는 사돈을 위로하고 안부를 전하기 위해 生員 李時成(1669~1725)에게 쓴 慰狀이다.

먼저 상중에 있는 이시성에게 미리 안부 편지를 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사위를 통해 그의 상중 안부를 전해 듣고 그를 위로하였다. 이후 자신의 근황을 전하며 鄭査兄이 끝내 돌아가셨다는 것과 子婦가 병의 위독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또 사위와 딸이 길을 떠나는 것이 눈길에 염려된다는 마음을 전하였다.

발신자인 조덕린의 본관은 漢陽, 자는 宅仁, 호는 玉川이고, 영양에 거주하였다.(주실마을) 부는 趙頵이고, 葛菴 李玄逸의 문인으로 167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9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1728년 李麟佐의 난 때에는 嶺南號召使가 되었으며, 이후 동부승지에 올랐다. 영조 연간에 당쟁이 격화된 가운데 남인의 입장에서 활동하다가 1737년에 탄핵을 받아 제주로 귀양 가던 중에 강진에서 사망하였다.

수신자인 이시성은 본관이 固城이고, 부는 병조 정랑 등을 역임한 李後榮(1649~1711)으로 안동 법흥동에 거주하였다.(임청각) 조덕린의 딸이 이시성의 아들인 李元鳳과 혼인하였다. 이시성은 당시 부친상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漢陽趙氏兵參公派世譜』,

1차 작성자 : 이재현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11년 조덕린(趙德鄰) 위장(慰狀)


李生員 大孝哀前。
疏上。 省式謹封。
省式言。聞
孝候愆違。每切馳情。宜有以奉
問。而近緣多事迫。卒未能也。
不意
先自惠存。愧仄罙深。昨見壻君。
細審
調中哀候。比曩頗勝。慰釋
何勝爲喩。幸更
節哀勉扶。亟收差常。至禱至禱。
德鄰。姑能自存。而鄭査
兄。竟不起。子婦。亦在喪所。方
病危劇。再昨自舊栖奔還
春庄。急走問疾。而尙不得消
息。日夜憂灼。幾欲自絶。患憂
如此。女息之行已迫。而不能同守
作別。尤爲缺恨。第雪後。山路
泥滑。人馬不着足。扶挈兒稚。
何以作行。亦甚慮閔。擾遑正
甚。暫爾奉候。不成式。欠悚。伏惟
哀下照。
辛卯 十一月 十日。趙德鄰 疏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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