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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숙종 40) 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焚香錄
KSAC+Y10+KSM-XG.1714.4725-20180630.Y1850201006
기본정보
분류작성주체작성지역작성시기형태사항소장정보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시도기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심원록 |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
1714 |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3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
안내정보
1714년(숙종 40) 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焚香錄
자료적 가치
갑오년 옥동서원에서 거행된 朔望際를 주관한 인물들을 기록한 명단인 『분향록』이다. 본 문서를 비롯한 옥동서원 소장 분향록에 의하면 삭망제는 대체로 院長과 齋任, 儒生이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에는 구성원의 직임과 성명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黃氏의 주도로 향례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옥동서원이 위치한 상주목 천하촌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장수황씨의 세거지로서 서원은 바로 이들 후손의 주도로 건립·운영되었는데 이는 서원의 주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제향의식을 대부분 서원구성원들 특히 문중인 장수황씨에 의해 수행되는 사실이 나타나는 문서이다. 삭망분향은 주로 재임과 유생이 주관하고 있으며 단지 주관자의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본 문서의 정확한 작성연대는 첫 입록자인 齋任 黃沈의 출생연대가 1688년(숙종 14)이기 때문에 표제에 기재된 갑오년은 1714년(숙종 40)이다. 황침은 본관이 장수, 字 중회(仲晦), 숙종 45년(1719) 己亥 增廣試 생원 3등에 입격했고, 경종 1년(1721) 辛丑 증광시 을과 7위에 문과 급제하여 承文院正字를 역임하였다. 중복 포함하여 총 37명으로 원장은 보이지 않고 재임 6명, 나머지는 일반 유생들의 삭망분향시 주관자들이 입록되어 있다. 이를 성씨별로 분류하면 황씨 18명으로 압도적이며 趙氏 13명, 이씨 4명, 申 2명 순이다. 옥동서원에서의 삭망분향을 주관하는 인물들 중 많은 수가 중복적으로 기재된 것을 보이고 있는데, 중복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옥동서원의 운영 핵심가문인 장수황씨가 절대적이다. 성관의 분포로 미루어 옥동서원 이미 18세기 문중 중심으로 서원이 운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후손들이 사는 고을에 설립된 문중서원은 물론이고 大賢書院에서도 후손들이 원임에 취임하는 것은 흔히 목격되는 일이었다. 한편 1724년 9월 朔에는 國恤未行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경종이 승하했기 때문에 별도의 분향례를 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의례 역주2,향음주례 향사례』, 박례경 외, 세창출판사,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14년(숙종 40) 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焚香錄
자료적 가치
갑오년 옥동서원에서 거행된 朔望際를 주관한 인물들을 기록한 명단인 『분향록』이다. 본 문서를 비롯한 옥동서원 소장 분향록에 의하면 삭망제는 대체로 院長과 齋任, 儒生이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에는 구성원의 직임과 성명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黃氏의 주도로 향례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옥동서원이 위치한 상주목 천하촌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장수황씨의 세거지로서 서원은 바로 이들 후손의 주도로 건립·운영되었는데 이는 서원의 주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제향의식을 대부분 서원구성원들 특히 문중인 장수황씨에 의해 수행되는 사실이 나타나는 문서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질서체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 書院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세워진 사립학교였을 뿐만 아니라 설립과 관련된 특정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祭享을 하는 공간으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서원은 교육기능보다는 상대적으로 제향을 통한 선현 숭배의 기능이 크게 강조되었다. 넓은 의미로서의 서원의 향례는 士林의 공론에 의해 결정되고 국가에 의해 인준되는 것이었으므로 여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일과 다름없었다. 더불어 享禮는 유교경전을 비롯한 유교문화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참여 자체가 자신의 유교적 소양을 대외적으로 높이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서원의 제례의식은 유교적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했다. 현전하고 있는 옥동서원 관련 자료에는 제례와 관계되는 자료는 드문 형편이다. 따라서 분향을 비롯한 여러 제례의 절차나 형식, 내용에 관해서 알려져 있는 부분이 없으나 다만 본 문서를 비롯한 수십여 분향록을 통해 朔望焚香時의 참여 인원에 대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삭망분향은 매달 음력 초하루와 그 달의 한 가운데 날인 보름날에 향을 피워 올리는 비교적 간단한 의례이다. 삭망분향은 주로 재임과 유생이 주관하고 있으며 단지 주관자의 성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본 문서의 정확한 작성연대는 첫 입록자인 齋任 黃沈의 출생연대가 1688년(숙종 14)이기 때문에 표제에 기재된 갑오년은 1714년(숙종 40)이다. 황침은 본관이 장수, 字 중회(仲晦), 숙종 45년(1719) 己亥 增廣試 생원 3등에 입격했고, 경종 1년(1721) 辛丑 증광시 을과 7위에 문과 급제하여 承文院正字를 역임하였다. 중복포함하여 총 37명으로 원장은 보이지 않고 재임 6명, 나머지는 일반 유생들의 삭망분향시 주관자들이 입록되어 있다. 이를 성씨별로 분류하면 황씨 18명으로 압도적이며 趙氏 13명, 이씨 4명, 申 2명 순이다. 옥동서원에서의 삭망분향을 주관하는 인물들 중 많은 수가 중복적으로 기재된 것을 보이고 있는데, 중복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옥동서원의 운영 핵심가문인 장수황씨가 절대적이다. 성관의 분포로 미루어 옥동서원 이미 18세기 문중 중심으로 서원이 운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후손들이 사는 고을에 설립된 문중서원은 물론이고 大賢書院에서도 후손들이 원임에 취임하는 것은 흔히 목격되는 일이었다. 한편 1724년 9월 朔에는 國恤未行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경종이 승하했기 때문에 별도의 분향례를 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조선 사회에서 향사를 비롯한 유교적 의례 행위는 사회구성원들이 관계와 경계를 설정하고 형성하는 중요하고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대내외적으로 향사에 참여하는 행위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으며, 그 지역사회에서의 주도권을 누가 선점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주요한 척도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문서가 작성될 시점에 옥동서원의 삭망분향례를 주도하였던 인물들을 통해 당시 옥동서원의 실질적 운영주체의 일면을 보여주는 분향록이다. 조선시대 서원은 인재를 양성하는 사립 교육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설립과 관련된 특정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향을 하는 공간으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건립 초기에는 인재양성과 학문연구라는 교육적 기능이 우선하였지만, 점차 先儒 향사와 지역 사회의 교화적 기능이 중시되어갔다. 더불어 서원이 지역별, 학맥별로 유대를 강화해 가면서 그 상징적 제향인물에 대한 제례의식과 기능이 점차 증대되어 갔다. 본 문서는 서원의 제향의식이 명맥을 유지하는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당시의 院任과 院生의 인적구성의 단면을 보여주고, 상주 지역에서 옥동서원에 참여하는 이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후기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의례 역주2,향음주례 향사례』, 박례경 외, 세창출판사, 2013
1차 작성자 : 채광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焚香錄
甲午十一月
甲午十一月
焚香錄
焚香錄
焚香錄
焚香錄
甲午十一月十九日丁巳奉安
十二月初一日
齋任黃沈
十五日
齋任黃沈
乙未正月初七日
甲午十一月十九日丁巳奉安
十二月初一日
齋任黃沈
十五日
齋任黃沈
乙未正月初七日
趙恁
十月十五日
趙恁
十一月一日
趙恁
十五日
十月十五日
趙恁
十一月一日
趙恁
十五日
趙恁
十二月一日
趙恁
十五日
趙允紀
己亥正月七日
十二月一日
趙恁
十五日
趙允紀
己亥正月七日
趙恁
趙允紀
黃鎭玉
申植
黃龍河
黃鍾應
趙允紀
黃鎭玉
申植
黃龍河
黃鍾應
黃鍾瑞
黃鍾準
十五日
趙恁
二月一日
趙恁
黃鍾準
十五日
趙恁
二月一日
趙恁
十五日
趙允紀
三月一日
黃鍾瑞
趙恁
十五日
趙允紀
三月一日
黃鍾瑞
趙恁
十五日
趙恁
四月一日
黃鎭國
十五日
黃鎭國
五月一日
黃鎭國
四月一日
黃鎭國
十五日
黃鎭國
五月一日
黃鎭國
五月望日
齋任李增垓
六月初一日
齋任李增垓
六月望日
黃鎭國
七月初一日
齋任李增垓
六月初一日
齋任李增垓
六月望日
黃鎭國
七月初一日
黃鎭國
七月望日
黃鎭國
八月朔
齋任黃泰河
李增垓
七月望日
黃鎭國
八月朔
齋任黃泰河
李增垓
八月望日
黃鎭玉
九月朔
齋任黃泰河
黃鎭玉
九月朔
齋任黃泰河
李增垓
十月一日
申植
十月望日
黃鎭玉
十月一日
申植
十月望日
黃鎭玉
1714년(숙종 40) 경상도 상주목 옥동서원 焚香錄
조임(趙任)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70C784FFFFB1573X0 |
자(字) | 자중(子重) |
호(號) | 사월(沙月) |
생년 | 1573(선조 6) |
졸년 | 1644(인조 2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한양(漢陽) |
활동분야 | 학생 > 유생 |
조임(趙任)
1573년(선조 6) 12월 5일∼1644년(인조 22) 7월 5일. 조선 중기 유생‧의병장. 자는 자중(子重)이고, 호는 사월(沙月)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영양읍(英陽邑)이다.
조부는 조원(趙源)이고, 부친 증판윤(贈判尹) 조광인(趙光仁)과 모친 안수인(安壽仁)의 딸 광주안씨(廣州安氏)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수월(水月) 조검(趙儉)과 동생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적(趙籍)이 있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권소(權昭)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이고, 둘째 부인은 권응주(權應周)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절의(節義)가 있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형 조검과 함께 궐기하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들어가서 왜적들과 싸웠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620년(광해군 12) 군자감판관(軍咨監判官)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가산(家産)을 털어서,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이후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고, 의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려고 하였으나 청나라와의 화의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하고 통탄하였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정황(趙廷璜)‧조정진(趙廷珍)‧조정숙(趙廷琡)‧조정옥(趙廷玉)이다.
유고로 2권 1책의 시문집 『사월선생문집(沙月先生文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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