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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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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Jeolui’, ‘Jeoluijisa’ and ‘Dumundong 72 Hyun’
김병인**・이성원***
Kim, Byoung-in・Lee, Sung-won

목 차
Ⅰ. 머리말
Ⅱ. ‘절의’의 용례와 ‘절의지사’의 
 등장 배경
Ⅲ. ‘두문동 72현’의 두 계보와 역사화 
 작업
Ⅳ. 맺음말


|Abstract|
‘Jeolui (integrity)’ means “a strong attitude that does not bend the convictions 
and the moral principles that a person should keep as a person. The symbolic 
figures in the late Goryeo dynasty and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Lee Saek, 
Giljae, and Jeong Mong-ju, and they are called ‘Jeoluijisa’ meaning a scholar of 
integrity. However, when we examine the usage of ‘jeolui’ in the Goryeo Dynasty, 
we cannot find a case where it was used in this way. In the Goryeo Dynasty, 
‘jeoluija’ was a compound word of ‘Jeolbu (faithful wife)’ and ‘Uibu (faithful 
husband)’, and was the subject of the relief from the king. The word of Jeoluijisa’ 
appeared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hen Kwon Geun praised a ‘scholar of 
integrity’ to recruit new talents, reflecting the political position of King Taejong. 
At that time, in his position, King Taejong needed new people with talents who 
could help him even though they had not participated in the opening of his new 
dynasty. Accordingly in order to attract the officials of the former dynasty who 
had been secluded with the principle called ‘Bulsaigun (meaning refuse to serve 
two kings)’, he praised them by elevating to ‘Jeoluijisa’, which gave them a justification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8S1A6A3A04042721).
**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제1저자)
***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교신저자)
호남학 68 : 145∼196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146 호남학 제68집

 

for the political position. 
“Dumundong 72Hyun” means “72 Goryeo officials who kept their integrity for 
the former king without going to the new dynast until the end when Goryeo dynasty 
fell and Joseon was founded. It was in the 16th year of King Yeongjo (1740)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at Dumundong 72Hyun became “historical” by 
revealing their concrete appearance to the world. At this time, King Yeongjo who 
led the government through the ‘Gyeongsin-cheobun’ strengthen the royal power 
by emphasizing ‘Uiri-myeongbun (loyalty and justification)’, and prased ‘Dumundong 
72Hyun’ calling ‘those who keep their integrity’, which was a way to attract his 
power group. As a result, ‘Dumundong 72Hyun’ came to appear as historical. 
72Hyun is symbolic like ‘72 Hyun of Confucius’ disciples’, and its specific list 
did not exist at first, but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was created with the efforts 
of descendants who wanted to put their ancestors on the 72 Hyun list. In relation 
to the ‘Dumundong 72 Hyun’ list, there are lots of literature sources, as there 
exist various influence by the factions, families, and descendants who want to make 
realistic profits by honoring their ancestors as ‘Jeoluijisa’.
 Key words : Jeolui (integrity), Jeoluijisa (scholar of integrity), Dumundong 72 
Hyun, King Taejong, Kwon Geon, King Yeongjo

 

Ⅰ. 머리말
 ‘절의(節義)’의 사전적 개념은 “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
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고려말 조선초 절의의 상징적 인물은 이색, 
길재, 정몽주 등이다. 이들을 흔히 ‘절의파’ 또는 ‘절의지사’라고 부른다.1) 그렇
다면 고려시대 전체적으로, 아니라면 후기에라도 절의파에 해당하는 절의 관
념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고려시대 ‘절의’에 
 

1) ‘절의파’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여말 절의파의 연구」(문경현・한명수・김광
순(1984), 󰡔한국의 철학󰡕 12)이다. 정호훈 역시 여말선초 사상계의 동향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사림파의 전단계로 절의파를 지목하였다[정호훈(2005), 「여말 선초 사상계의 
동향–절의론을 중심으로」, 󰡔운곡학회연구논총󰡕 1]. ‘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47


대한 용례를 검토해보면 대체적으로 ‘절부(節婦)’와 ‘의부(義夫)’의 합성어로 사
용되었음이 확인된다. 특히 노인, 효자와 효손, 환과고독(鰥寡孤獨), 독질자(篤
疾者), 폐질자(廢疾者) 등과 함께 사회적 배려자로 인식되어 국가의 진휼대상
이었다. 즉, 고려 당대의 절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전적 의미와는 성격
이 달랐다. 그렇다면 고려말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이 정치적 차원에서 절의의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소위 ‘절의파’ 또는 ‘절의지사’로 불리게 된 배경은 무엇
인지 궁금하다.2)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고려시대 절의에 대한 용례 검
토를 통해, ‘절의지사’와 관련된 ‘절의’ 관념이 언제 어떻게 정착되어 갔는지 확
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절의지사’는 어떠한 인물들이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함께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흔히 여말선초 절의의 상징공
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두문동’과 그곳에서 절의를 지킨 ‘72현’은 언제 어떻게 
‘두문동 72현’으로 개념화, 역사화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3)
이상의 논의를 통해 여말선초 그리고 조선 전시기에 걸쳐 절의, 절의지사, 
두문동 72현 등과 관련된 용어가 갖는 역사적 함의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Ⅱ. ‘절의’의 용례와 ‘절의지사’의 등장 배경
 
 고려시대 ‘절의’라는 용어는 자주 등장하는데 󰡔고려사󰡕, 󰡔고려사절요󰡕, 󰡔보
 2) 이에 관해서는 김보정(2008)의 󰡔조선초기 절의파 사대부의 정치적 성향과 사상󰡕(부산
대학교 박사학위논문)에서 다룬 바 있으며, 본고의 작성 과정에서 많은 참고가 되었다.
 3) ‘두문동 72현’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참고된다. 김정자(1991), 「소위 ‘杜門洞 72賢’의 
정치 성향」, 󰡔부대사학󰡕 15・16. ; 김정자(1995), 「기우자 李行의 생애와 학풍」, 󰡔부대
사학󰡕 19. ; 김정자(1998), 「두문동 72현의 선정인물에 대한 검토-󰡔華海師全󰡕과 󰡔騎牛
集󰡕을 중심으로」, 󰡔부대사학󰡕 22. ; 박재우(2019), 「여말선초 李行의 정치적 입장과 節
義 인식」, 󰡔대동문화연구󰡕 108.148 호남학 제68집
한집󰡕, 󰡔동인지문사륙󰡕 등에서 찾을 수 있다.4)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 인용
하면 다음과 같다. 
A-1)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무릇 국가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먼저 근본에 힘써야 
하니, 근본에 힘쓰는 데 효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 효는 삼황오제가 근본으
로 삼았던 일로서 모든 일의 실마리이며 온갖 선행의 주체이다. …… 이로
써 나는 6경의 법칙을 취하고 삼례의 규범에 기대어 저 온 나라의 풍속이 
다섯 종류의 효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요사이 사자를 6도에 보내 교조
를 반시하고, 기근으로 서로 떨어진 노약자를 구휼하고 궁핍한 홀아비나 고
아를 진휼하는 한편, 효자와 순손 및 의부와 절부를 구하여 찾았다.5)
2) 왕이 건덕전에 거둥하여 덕음을 반포하여 참형과 교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
한 자는 형을 면제시켜 유배보내고, 유배형 이하의 죄수도 역시 모두 사면하
였다. 온 나라의 노인 및 환과고독, 절부와 의부, 효자・순손들에게 술과 음
식을 하사하고, 아울러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6)
3) 나이 80세 이상의 노인 및 효자와 순손, 절부와 의부, 환과고독, 독질자와 
폐질자에게 왕이 친히 음식을 대접하고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주었다.7)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의 ‘절의(자)’는 대체적으로 효자, 순
손, 환과고독, 독・폐질자 등 고려시대 국왕의 ‘정상(旌賞)’ 대상과 함께 거론되
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은 주로 국왕이 사면을 행사하거나 백성들을 위무
하고자 할 때 부름을 받아서 잔치에 참여하고 선물을 받았으며, 정문(旌門)을 
 4) 이들 기록에 나타난 절의 용례를 정리하면 부록에 있는 <고려시대 절의 관련 용례 목
록> 표와 같다.
 5) 敎曰 凡理國家 必先務本 務本莫過於孝 …… 是以 取則六經 依規三禮 庶使一邦之俗 咸
歸五孝之門 頃者 遣使六道 頒示敎條 恤老弱之饑離 賑鰥孤於窘乏 求訪孝子順孫義夫節
婦(󰡔고려사󰡕 권3, 성종 9년 9월 丙子).
 6) 御乾德殿 頒德音 犯斬絞者免刑流配 流以下並赦之. 中外老人 及鰥寡孤獨節義孝順者賜
酒食 幷賜物有差(󰡔고려사󰡕 권13, 예종 6년 1월 丙寅).
 7) 親饗年八十以上老人 及孝順節義鰥寡孤獨篤廢疾者 賜物有差(󰡔고려사󰡕 권16, 인종 11년 
10월 丙午).‘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49
하사받기도 하였다.8) 경우에 따라서는 부역을 면제받거나, 등용의 대상이 되
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성종 9년(990) 효자・순손・의부・절부를 전국에서 찾
아 포상토록 한 사례를 들 수 있다(A-1). 당시 성종은 “대체로 국가를 다스리
는 데에는 먼저 근본을 힘써야 한다. 근본을 힘쓰는 데에는 효도보다 더한 것
이 없으니 효도는 삼황오제의 기본사업으로써 만사의 강령이요 모든 선의 주
체이다”고 강조했다.9) 이후 고려 전시기를 거쳐 절의는 절부와 의부의 합성어
로 사용되면서 자주 등장한다. 용례는 ‘의부절부’, ‘절부의부’, ‘절의’, ‘의절’, ‘의
부’, ‘절부’ 등 다양한 편인데, ‘절의’와 ‘절부의부’ 또는 ‘의부절부’는 특별한 구
분없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0)
 당시 절의에 합당한 행위는,
 장군(將軍) 현문혁(玄文奕)의 처와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의 처는 바다에 
투신하여 몸은 죽었지만 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절의가 가상하므로, 등급을 
초과하여 증직 추봉(封贈)하며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겠다.11)
 8) 정표(旌表)란 선행을 칭찬하여 이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뜻하며, 정려(旌閭)는 
효자・충신・열녀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이것은 신
라 때부터 유래하였는데, 신라의 효녀 지은에 대한 포상으로 조 500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복호(復戶)하며 그 마을을 정표하여 효자방(孝養坊)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
다(󰡔삼국유사󰡕 권5 孝善, 권9 女養母 ; 󰡔삼국사기󰡕 권48, 열전 8, 孝女知恩).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으며, 이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다수 등장한다.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 수 세워졌다. 조선왕
조는 유교적인 지배윤리를 위한 도덕규범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순손・의부・절부들을 
매년 뽑아 예조에 보고케 하여 정문・복호・상직・상물 등으로 포상하였던 것이다. 󰡔경국
대전󰡕 권3 예전 장권조에 의하면 “효도・우애・절의 등의 선행을 한 자는(효자・순손・절
부・나라를 위하여 죽은 자의 자손・목족・구환과 같은 등속이다) 해마다 연말(세초)에 
본조가 정기적으로 기록하여 王에게 아뢰어 장권한다(상직을 주거나 혹은 상물을 주며 
더욱 특이한 자는 정문을 세워주고 복호를 해 준다. 수신한 처에게도 또한 복호를 해준
다)”라고 되어 있다[박주(1989), 「17세기 정표정책에 대한 연구」, 󰡔국사관논총󰡕 4].
 9) 김갑동은 성종이 효의 윤리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관리들로 하여금 국가
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았다[김갑동(2002), 「고려 귀족사회의 성립」, 󰡔신편한
국사󰡕 12, 146쪽]. 
10) 절부(節婦)에 대해서는 권순형(2017)의 「고려시대 절부(節婦)에 대한 고찰」(󰡔여성과 
역사󰡕 27)을 참고하기 바란다.150 호남학 제68집
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배우자가 있는 부인이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
해 죽음을 택한 경우를 의미하는 것같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절부와 의부를 정문을 세우거나 포상하는[旌
賞] 정책은 계속되었다. 
B-1) 상께서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각도에 하여금 효자・순손・의부로 실행이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되, 성명을 갖추어 계문하여 이를 근거로 삼아 발탁 임용
하라고 하였다.12)
2) 임금이 좌・우정승에게 분부하였다. “지금 각도에서 보고한 효자・순손・의부・
절부 등은 모두 실적이 있으니 마땅히 포상을 더하고 문려를 세워 정표하되, 
구실이 있는 자는 복호하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구휼하여 주어 풍속을 
가다듬게 하라.” …… 함열 사람 전 산원 최득림의 아내 홍씨 …… 양성의 
고(故) 판사 전오복의 아내 노씨 …… 춘주의 낭천감무 조안평의 모친 이씨 
…… 교동의 전 별장 이제의 아내 조씨 …… 모두 절부이다. 명하여 모두 그
들을 복호하고 그 자손들을 구휼해 주게 하되, 그 중에서 벼슬하기를 원하
는 자는 말을 주어 서울로 올라오게 하고, 나이 많고 집이 가난한 자와 부인
들에게는 차등 있게 쌀을 내려 주고, 또 그 동구문[閭]에 정표하게 하고는 
사실을 기록해서 경중과 외방에 널리 알리게 하였다.13) 
3) 좌정승 조준 등이 시무 3조목을 면대하여 진술하였다. “ …… 하나. 여러 도
의 남녀로서 나이 80세 이상이 된 사람과 효자・순손・의부・절부와 빈궁하고 
폐질이 있어 능히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11) 將軍玄文奕妻 直學鄭文鑑妻 投水亡身 不爲賊所汚 節義可尙 宜超等封贈 官其子孫(󰡔고
려사󰡕 권27, 원종 12년 10월 丁酉).
12) 上命都評議使司, 令各道擧孝子順孫義夫有實行者, 具名啓聞, 以憑擢用(󰡔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7월 26일 정사 2번째기사).
13) 上命左右政丞曰 今各道所報孝子順孫義夫節婦 各有實跡 宜加褒賞 旌表門閭. 其有役者
則復之 貧乏者則周之 以勵風俗. …… 悅人前散員崔得林妻洪氏 …… 陽城故判事全五福
妻盧氏 …… 春州 狼川監務趙安平母李氏 …… 喬桐前別將李提妻曺氏 …… 皆節婦也. 
命皆復其家 存恤其子. 其中願從仕者 令給馬上京 年老家貧者及婦人 賜米有差. 且令旌
表其閭 仍錄實迹 通諭中外(󰡔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9월 16일 정미 1번째기사).‘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51
묻지 않고 잡역을 면제하고 우대하여 긍휼할 것이며, 하나. 효자・순손・의부
로서 실효가 있어 쓸 만한 사람은 별도로 갖추어 아뢰어 탁용에 빙고하게 
할 것입니다.” 임금이 “좋다”고 말하셨다.14) 
4) 사헌부 대사헌 한상경 등이 시무 10사를 올렸는데, 이러하였다. “ …… 둘. 
󰡔맹자󰡕에 이르기를, ‘사람마다 그 어버이를 친어버이로 여기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게 되면 천하가 태평하여진다.’고 하였으니, 원컨대, 경중과 
외방의 효자・순손・의부・절부를 살펴 물어 포상함으로써 풍속을 가다듬게 하
소서.……”15) 
5)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중외에 교서를 내리어, 효자・절부・의부・순손이 있는 
곳을 찾아 실적으로 아뢰라고 했더니, 무릇 수 백인이 되었다. 임금이 말하
기를, "마땅히 그 중에 특행이 있는 자를 추리라."하고, 정초를 명하여 예조
에 올린 행장 기록을 가지고 좌・우 의정과 의논한 결과 무릇 41인이었다. 
…… 임금이 명하여 …… 등에게는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포창하고, 그 집
의 요역을 면제하게 하고, …… 등은 요량하여서 벼슬을 주라고 하였다.16)
6) 의정부에 하교하기를, “…… 하나. 초야의 사이에서 도덕을 마음에 가진 측
루나 유일이 혹시 있을 듯하고, 효자・순손・의부・절부와 조행이 남보다 뛰어
났는데도 아직 정문이나 상을 받지 못한 자가 또한 혹은 있을 것이니, 감사
가 널리 찾아 물어서 아뢰어라. 오직 너희 정부는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서 중앙과 외방에 효유하라.”하였다.17)
14) 左政丞趙浚等面陳時務三條 …… 一 諸道男女年八十已上者及孝子順孫義夫節婦 貧乏廢
疾不能自存者 無問尊卑 蠲免雜役 優加矜恤. 一 孝子順孫義夫有實効可用者 別具以聞 
以憑擢用. 上曰 善(󰡔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12월 6일 무신 2번째기사).
15) 司憲府大司憲韓尙敬等 上時務十事 …… 二曰 孟子云 人人親其親長其長 而天下平. 願
京外孝子順孫義夫節婦 考問褒賞 以勵風俗 ……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윤7월 6
일 계해 5번째기사).
16) 上初卽位 下敎中外 求孝子節婦義夫順孫所在 以實迹聞 凡數百人. 上以爲宜簡特行 命鄭
招 以禮曹所上記行實狀 議於左右議政 凡得四十一人以聞. …… 上命 …… 等 竝旌表門
閭 復其家 …… 等量宜注授(󰡔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1월 21일 경신 3번째기사).
17) 下敎議政府曰 …… 一. 草菜之間 懷藏道德 側陋遺逸 恐或有之 孝子順孫義夫節婦 操行
卓異 而未蒙旌賞者 亦或有之 監司廣行 搜訪以聞. 惟爾政府 體予至懷 曉諭中外(󰡔문종
실록󰡕 5권, 문종 즉위년 12월 28일 무술 6번째기사).152 호남학 제68집
 이상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 태조 이후 ‘정상(旌賞)’ 정책은 계승
되었다. 그런데 중종 즉위 이후 이에 대한 타당성을 하교하여 논의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다음의 사료를 보자. 
C-1) 조강에 나아갔다. 특진관 심정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보건대, 고려 성종 
때에 효자・순손・의부・절부를 공궤하였는데, 이는 바로 성세의 일입니다. 바
라건대 각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고려 때의 고사에 의하여 대접하고 표창한
다면, 풍속과 교화에 도움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18)
 2) 효자・순손・절부・의부를 궤향함이 타당한지의 여부에 대하여 유순정이 의논
드리기를, “효자・순손・절부・의부에게 정문을 세우고 복호하며, 더러는 때로 
물품을 하사하여, 역대 제왕들의 포장하는 법이 이렇게 함에 지나지 아니하
였으니, 전조의 고사를 답습하여 궤향할 것이 없습니다.”하고, 이손・김응기
의 의논도 같았으며, 성희안・홍경주・신윤무・신용개・장순손・김전・강징・조
계상・유담년・손주・성세순・임유겸은 의논드리기를, “고려 때에 효자・순손・
절부・의부를 궤향하였으니 이는 아름다운 일이나, 아조에서도 권장하는 법
을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반드시 전조의 일을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양로연 때에 혹 때로 겸하여 거행한다면 세속을 감화시키는 데에 일
조가 될 것입니다.”하니, 유순정의 의논을 따랐다.19)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중종은 특진관 심정이 ‘고려 성종 때에 효자・순
손・의부・절부를 공궤(供饋)한’ 사례를 들어 이들을 사례하고 포상해주라는 요
18) 御朝講. 特進官沈貞曰 臣嘗觀高麗 成宗時 嘗餽孝子順孫義夫節婦 此乃盛世事也. 請令各
道觀察使 依高麗故事 餽餉而褒奬之 不無有補於風敎. 上曰 可(󰡔중종실록󰡕 17권, 중종 7
년 10월 8일 무신 1번째기사).
19) 孝順節義人饋餉當否 柳順汀議 孝順節義 旌門復戶 或有時賜物 歷代帝王 褒奬之典 不過
如斯 不須踵前朝故事饋餉. 李蓀 金應箕議同. 成希顔 宋軼 洪景舟 辛允武 申用漑 張順
孫 金詮 姜澂 曺繼商 柳聃年 孫澍 成世純 任由謙議 高麗時餉孝順節義 此是美事. 我朝
勸奬之典 靡所不擧 不必取法前朝. 然於養老之日 或時兼擧 有補於感化之一端. 從順汀議
(󰡔중종실록󰡕 17권, 중종 7년 10월 18일 무오 8번째기사).‘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53
청을 따랐다(C-1). 이후 10일 뒤에 다시 신료들에게 전조의 고사를 따르는 것
이 타당한지를 물었고,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유순정의 의논을 따른다(C-2). 
실제로 중종 이후 의부, 절부에 대한 공궤 기사는 사라진다. 이는 의부와 절부
에게 ‘공궤(供饋)’하는 것이 고려왕조의 특별한 정책이었음을 뜻한다. 물론 조
선시대 의부와 절부를 궤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려시대 고
유의 정책으로서 굳이 그 방식대로 추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20)
이는 절의라는 용어가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절의지사’와 무관하게 진휼대상으
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해준다. 
 절의에 관한 다음 용례로는 ‘謚節義(節義公)’, ‘知大體守節義’, ‘忠勤節義
同德贊化’, ‘推忠節義定亂功臣’, ‘忠勤節義翊衛’, ‘忠勤節義贊化’ 등처럼 공
신호와 시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공신호와 시호는 대개 각각의 글자를 
합쳐서 의미를 부여하는데, ‘절’과 ‘의’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공신호와 
시호 작법에 관한 기록이나 정보가 없어서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시기의 시호제도가 후일 조선의 그것과 별 차이점이 없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21) 
 다음으로 ‘勵臣子以節義禮節’, ‘嘉其節義’, ‘崇奬節義’, ‘節義殊異者’, ‘慕節
20) 16세기 이후 성리학이 보편화되면서 남성 중심의 가족질서가 확립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같다. 특히 조선시대 지리지 인물조에 ‘의부(義夫)’ 항목이 사려져가는 것도 이
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21) 고려말에 오면 시호를 내린 사례들이 잘 나타나고 있어, 이를 통해 대강이나마 고려시
대의 시호제도에 관하여 추측할 수 있다. 고려말 첨의찬성사를 지낸 조위(趙瑋)가 죽은 
지 1년 정도 지난 상황에서 제작된 󰡔贈諡莊景公墓銘󰡕에 의하면. 그에게 장경이라는 시
호를 내리기 위한 행적과 찬문이 그려져 있다. 또한 고려말 이인임이 죽었을 당시 시호
를 내리는 과정에서 전의부령(典儀副令)이었던 공부(公俯)가 시호를 황무(荒繆)라는 
악시(惡諡)로 정하니 그 종당(宗黨)이 이를 갈았으나 공부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기록
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와 시호를 맡았던 전의시 부령이 시호를 관장하는 직책이었음
을 알 수 있다. 전의시는 현종 때 태상부(太常府)가 설치된 이래 충렬왕 24년에는 봉상
시(奉常寺)로 바뀌어 10년 쯤 지속되었다가 전의시로 개칭되어 고려말까지 이어진 관
청이었다[박홍갑(2004), 「조선시대의 諡號制度」, 󰡔한국중세사회의 제문제󰡕, 한국중세
사학회, 정림사, 380쪽].154 호남학 제68집
義’, ‘節義可尙’, ‘宜崇節義’, ‘素無節義’, ‘不渝於節義’ 등 국왕의 통치방침이나 
신료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례가 있는데, 이것이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비교적 가까운 사례로 보인다. 이들 용례는 의로운 사람, 절개있는 사람, 비분
강해형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22)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 절의 용례에는 여말선초 이후 정몽주 
등을 호칭하는 ‘불사이군(不事二君)’ 차원의 ‘절의지사’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
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의 절의 관념은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 
궁금하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에서의 절의 개념의 기원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조선에서의 단초를 추적해보기로 하자. ‘절의’의 개념의 기원은 고대 한자 문
화권에서 ‘의’에서 비롯되었고. ‘절의’는 결국 ‘의’의 확인이라는 수사라고 볼 수 
있다. ‘절의지사’가 훗날 ‘의사’로 축약되어 표현되는 것도 그 점에서 자연스럽
다. 의의 기원은 약 4천여 년 전 고대 초기 국가인 상나라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갑골문에 기록된 ‘의’의 상형을 고려하면 
고대인은 그것을 ‘신’이 검증해 주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의는 양(羊)과 
22) 삼국시대에도 흔치는 않지만, 의부(義夫)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백제의 침공이 더욱 
급박해져 속함・기잠・혈책의 세 성이 혹은 함락되거나 혹은 항복하였다. 눌최는 남은 
세 성으로 굳게 지키다가, 5군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눈
물을 흘리면서 병졸에게 이르기를, “봄날의 따뜻한 기운에는 초목이 모두 꽃을 피우지
만, 추위가 오면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늦게 낙엽진다.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이 
없어, 날로 대단히 위험해지고 있다. 지금이 진실로 뜻있는 병사[志士]와 의로운 사람
[義夫]이 절조를 다 바쳐[盡節]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겠
는가?”라고 하였다. 병졸들이 눈물을 뿌리며,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고 오직 명을 따르
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됨에 미치자 군사들이 죽어 몇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결심하고 싸워 구차히 살아 보겠다는 마음이 없었다(󰡔삼
국사기󰡕 卷47, 列傳 7, 訥崔).”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백제의 침공에 맞서 싸운 눌최와 
병졸들의 죽음을 각오한 최후 항전의 자세를 ‘뜻있는 병사[志士]’와 ‘의로운 사람[義夫]’
으로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사’와 ‘의부’는 ‘절조를 다 바침[盡節]’으로
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절조’를 지킴이 ‘지사’와 ‘의부’의 충족 조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당시 ‘뜻있음’, ‘의로움’, ‘절의를 다함’ 등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행동양식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는 것[人皆殊死
戰]이었다. 이때의 의부와 고려시대의 의부가 같은 개념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고려시대 전투와 관련하여 의부라는 표현을 사용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55
창[戈]이 결합된 글자로서 즉 신에게 봉헌되는 희생양(犧
牲羊)과 그 양을 참수하거나 살육하기 위해 사용되는 창
이 결합된 일련의 ‘희생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다. 때문에 
고대 ‘의(義)’자와 ‘희(犧, 羲)’자는 고문자의 형상이 동일
한 기원에서 출발하였다. 즉, 수많은 제사의식이나 집체의
식에서 상나라 사람들은 신에 대한 희생의식을 통해 여러 
의식의 목적과 내용을 신에게 고하고 그 공정함과 신성함
을 신이 보증한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검증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것은 신과 소통하며 신탁을 받을 수 있
는 무축왕(巫祝王)과 같은 성격의 상왕(商王) 자신이나 극소수의 제사관이 점
복을 통해 신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공표할 수 있었다. 바로 그 결
과물이 갑골복사였으며 그 과정은 매우 비전적(祕傳的)이고 주관적인 것이었
다. 그런 점에서 신탁의 결과는 근본적으로 객관성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실은 
그 의가 지니는 권위과 명분의 실질적 보지자는 상왕 자신이었다. 신의 권위를 
빌어 무축왕은 의와 불의를 판단하고 이에 대한 후속 대응을 결정하였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주왕과 제후 간에, 그리고 여러 열국 간에 갈등이 
증폭되고 충돌을 반복하면서 의는 주관적으로 해석되었고 개념의 혼선을 초래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의에 대한 개념에 주목하고 그 정립에 일조한 
제자(諸子)가 전국시대의 맹자였다. 즉, 의의 개념과 성격은 문헌과 문장의 맥
락마다 다양하지만 고대 이래 가장 체계적으로 ‘의론(義論)’이 개진된 것은 단
연 󰡔맹자󰡕이다. 맹자는 인간이 지닌 본원적인 성정(性情)에 ‘불쌍히 여기는 마
음[惻隱之心], 부끄러워하는 마음[羞惡之心], 겸양하여 사양하는 마음[辭讓之
心], 그리고 진실과 거짓을 밝히고자 하는 마음[是非之心]’이 있으며, 그 각각
의 마음은 인・의・예・지(仁義禮智; 四端)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23) 이 입
23)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仁也. 惻隱之
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
也(󰡔孟子󰡕, 公孫丑 上).
[義 犧(商, 甲骨文)]156 호남학 제68집
론을 따르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을 증오할 수 있는 수오지심은 바로 의
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역설적으로 부연하면 자신 스스로가 부끄
러운 이유이자 타인을 증오하는 이유도 ‘의가 없거나[無義]’ ‘불의(不義)’함에 
의존하여 행동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의롭고 불의한 근
거와 기준은 무엇인가.
 맹자는 개인과 가문의 사적인 ‘이익’과, 심지어 사회와 국가라 하더라도 공
적 가치가 결핍된 단순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그 이익
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의로 보았다.24) 때문에 의가 부재하거나 의에 반하
여 사사로운 권력에 치우치면 일국의 군주를 시해하고 반적(反賊)이 될 수 있
다고 보았다.25) 때문에 맹자는 의가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부분 또한 ‘군주
와 신하의 관계[君臣有義]’라고 생각했다.26) 그러나 군신유의의 함의는 다층
적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는 ‘군주와 신하 사이에는 의가 있어야 한다’고 해석
될 수 있는데, 실제 맹자는 신하가 군주에게 복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곧 군신
유의(君臣有義)의 기본이라고 보았다.27) 그러나 힘과 무력을 기반한 패도정
치를 비판하고, 도덕성에 기반하여 천명을 받은 군주만이 통치할 수 있다는 
소위 왕도를 통치의 전범으로 확신했던 맹자의 정론을 감안하면, 백성을 함께 
통치하는 공치자(共治者)로서 ‘군주와 신하 모두에게 의가 있어야 한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가령 폭정을 일삼는 부도덕하고 불의한 군주에 대한 신하의 
맹목적 복종과 공경을 ‘군신유의’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맹자는 
위민에 이반한 불의한 군주와 왕조에 대해서는 ‘역성혁명’까지 주장하였다.28)
24) 王曰 叟 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孟
子󰡕, 梁惠王 上).
25) 齊宣王問曰 …… 臣弑其君 可乎 曰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孟子󰡕, 梁惠王 下). 
26) 聖人有憂之 使契爲司徒 敎以人倫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孟
子󰡕, 滕文公 上). 
27) 曰 惡 是何言也. 齊人無以仁義與王言者 豈以仁義爲不美也. 其心曰 是何足與言仁義也 
云爾 則不敬莫大乎是. 我非堯舜之道 不敢以陳於王前 故齊人莫如我敬王也(󰡔孟子󰡕, 公
孫丑 下). ‘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57
한편 이러한 ‘의’를 지키고자 때론 목숨을 걸고 ‘절의’의 노정을 걸었던 역사상
의 인물들을 기록에 남긴 역사가가 사마천이었다. 
 동아시아의 장대한 경사(經史)문화에서 정사의 효시는 사마천의 󰡔사기󰡕에
서 비롯되었다. 사마천은 이전 역사서술의 모든 방식을 참고하면서도 자신 만
의 독자적인 구성을 기획하여 마침내 기원전 100년 경 전 130권 52만 6,500자
의 󰡔사기󰡕를 완성하였다. 󰡔사기󰡕에서 사마천이 가장 천착한 부분은 역사의 주
체인 ‘사람’이었다. 사마천은 「열전」의 첫 번 째 인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
弟)를 꼽았다. 기원전 1,100년 경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자, 상왕실
과 분봉관계였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었던 백이와 숙제 형제는 상왕실
에 대한 종법질서와 충의를 지키기 위해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숨어들어가 곡기를 끊고 고사리로 연명하며 은거하였다고 한다. 사마천은 충
의를 지키고자 했던 두 현자가 죽기 전 불렀다는 「채미가(采薇歌)」를 소개함
으로써 그 애잔한 비장미를 배가시켰다. 물론 사마천이 백이와 숙제를 열전편
의 첫 권으로 기록한 데에는 그 충의를 현양하기 위함이었지만 그의 사평(史
評)은 사마천 자신의 심연에 담긴 깊은 고민과 통찰이 담겨 있었다. 공자를 
비롯하여 유가들이 그토록 상찬하였던 백이와 숙제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가 
얼마나 냉소적이었는지는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다음 사평은 ‘역사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사마천의 깊은 문제의식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자와 같은] 선인들은 말한다. “천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선인(善人)과 
함께 한다.” 백이와 숙제야말로 가히 선인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그들은 어진 덕
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이 하였건만 굶어죽었다. 공자는 70여 명의 제자가 있었는
데 안연(顏淵)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는데, 그는 항상 가난하여 술지게
미와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요절하였다. 하늘이 선한 이에게 보시(報施)
한다면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 근래에도 보면 하는 일이 올
바르지 못하고 법령을 위반하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고 즐겁게 살며 대대로 부귀
28) 曰 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易位(󰡔孟子󰡕, 公孫丑 下). 158 호남학 제68집
를 누리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한 발을 내딛어도 신중히 하고 말 한마디를 
해도 때에 맞추며, 길을 갈 때에도 지름길로 돌지 않고 공정한 일에만 분발하는 
데도 재앙을 만나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으니 실로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만약 
이러한 상황도 천도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29)
 사마천도 백이・숙제의 충의를 모르는 바 아니며 그들의 절개를 결코 폄하하
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현들이 이들의 고사를 전하며 
‘천도는 선인과 함께 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역사의 현실은 그런 것인지를 
고민하며 사마천은 반문한 것이다. 충의를 다하고 덕행을 쌓은 이들은 요절하
거나 횡사하고, 위법과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현실을 목
도하며 사마천은 천도의 당위성과 낙관성을 회의하고 있다. 이처럼 부조리한 
역사적 현실을 사마천은 냉철하게 비판하며 그러기에 쉽지 않지만 견지해야할 
‘절의’와 ‘충의’의 교훈을 「열전」의 첫 권에 기록하여 만세의 전범으로 전하고
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경사문화를 공유하였던 동아시아 문화권에 
그 ‘절의’와 ‘충의’의 전통은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다음으로 조선왕조에서 사전적 의미의 절의 관념은 태종대 권근이 고려에 
대해 절의를 지킨 정몽주, 김약항, 길재 등에 대해 ‘절의지사(節義之士)’로서 
포상하기를 건의하여 이들을 추증하면서부터이다. 이는 다음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참찬문하부사 권근이 상서하였다. …… 다섯째는 절의를 포창하는 것입니다. 자
고로 국가를 가진 자는 반드시 절의있는 선비[節義之士]를 포창하니, 만세의 강상을 
굳게 하자는 것입니다. 왕자가 의를 들어서 창업할 때에 자기에게 붙좇는 자는 
상을 주고, 붙좇지 않는 자는 죄를 주는 것이 진실로 의당한 일이오나, 대업이 
이미 정하여져서 수성할 때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전대에 절의를 다한 신하를 상
주어, 죽은 자는 벼슬을 추증하고, 살아 있는 자는 불러 써서, 아울러 정표와 상
29) 󰡔史記󰡕 권61, 伯夷列傳(󰡔孟子󰡕, 萬章 下).‘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59
을 가하여 후세 인신의 절의를 장려하나니, 이것은 고금의 통한 의리입니다. …… 
마땅히 다시 예로써 불러 작명을 더하시고, 굳이 예전의 뜻을 지키어 오지 않는
다면, 곧 그 고을로 하여금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케 하여, 성조에서 절의를 
포상하는 법을 빛내게 하소서.30)
 권근은 절의를 포상할 것을 주장하면서, ‘절의지사(節義之士)’와 ‘진절전대
지신(盡節前代之臣)’을 그 구체적 대상으로 꼽았다. 권근이 이들을 포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후세인신지절(後世人臣之節)’을 장려하기 위함이었
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절의지사’가 등장한 것이다. 기존 용례에서 절의는 주
로 의부(義夫), 절부(節婦), 절의자(節義者), 절의특이자(節義殊異者) 등처럼 
‘부(夫)’・‘부(婦)’・‘자(者)’와 결합되었다. 길재가 사직을 요청하자 정종이 괴이
하게 여겨 ‘길자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을 때, 권근은 ‘한미한 유자[寒儒]’
라고 대답하였다.31) 이때까지만 해도 국왕[정종]이나 권근의 입장에서 길재는 
‘절의지사’는 아니었다.32) 그런데 이후 태종대 들어와서 권근에 의해서 길재는 
‘절의지사’로 불렸으며, 처음으로 ‘절의’가 ‘士’와 연결된 것이다. 그 이전 절의
를 지키거나 행동에 옮긴 사람이 일반인이었다면, 이제 선비 혹은 신료로 바
뀐 것이다. 권근이 언급한 ‘절의지사’와 ‘진절전대지신’은 당연히 출사할 수 있
는 혹은 출사해 있는 선비이자 신료를 지칭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권근은 
새로운 인재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길재를 통해 ‘절의있는 선비’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30) 參贊門下府事權近上書 書曰 …… 五曰褒節義. 自古有國家者 必褒節義之士 所以固萬世
之綱常也. 王者擧義創業之時 人之附我者賞之 不附者罪之 固其宜也. 及大業旣定 守成之
時 則必賞盡節前代之臣 亡者追贈 存者徵用 竝加旌賞 以勵後世人臣之節 此古今之通義
也. …… 宜更禮召 以加爵命 苟守前志 尙不克來 卽令其州 旌門復戶 以光盛朝褒賞節義
之典(󰡔태종실록󰡕 권1, 태종 원년 1월 14일 甲戊 3번째기사).
31) 上覽而怪之曰 此何人也 左右曰 寒儒也(󰡔정종실록󰡕 권5, 정종 2년 7월 2일 乙丑 20번째
기사).
32) 위 기사의 말미에 사신 홍여강(洪汝剛)이 길재를 ‘忠烈之士’라고 칭한 점은 흥미롭다. 
한영우는 정도전 등의 혁명파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충절파’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한
영우(1973), 󰡔정도전사상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160 호남학 제68집
 그렇다면 권근이 바라는 새로운 인재상은 어떤 사람들이며, 누구를 위한 존
재였을까? 권근은 태종이 바라는 새로운 신료상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정도전이 생각하는 군신관계에서의 신료상과는 다른 모습이다. 권근이 
길재를 거론한 까닭은 ‘무신이주(臣無二主)’와 ‘불사이성(不事二姓)’을 내세우
며 사직하고 돌아간 바가 있기 때문이다.33) 이에 권근은 앞의 상서에서, “혁명 
이후에 옛 임금을 위하여 절개를 지켜 작록을 사양한 사람은 오직 이 한사람
뿐이니 어찌 고사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건국 후에 관직을 내렸는데 작록을 
사양한 것은 길재뿐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는 길재의 절의를 강
조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왕조를 버리고 쉽게 관직을 받은 개국공신
들이나 이성계 추종세력에 대한 배타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권근의 
개인적인 뜻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새로운 인재상이 필요
한 태종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태종 2년(1402) 11월 현비 강씨의 족속인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강씨
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34) ‘조사의 난’은 태조 이성계
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태종의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던 사건이
다.35) 이때 조전절제사에 임명되어 태종을 보좌하던 이거이(李居易), 이숙
번(李叔蕃), 민무질(閔無疾)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왕권을 안정시
킨 인물이 후일 ‘두문동72현’에 포함되는 이행(李行)이다. 이행은 당시 태조로
부터 신왕조 개창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던 인물이다.36) 태
33) 再遂上書 略曰 臣本寒微 仕於辛氏之朝 擢第至門下注書. 臣聞女無二夫 臣無二主 乞放
歸田里 以遂臣不事二姓之志 孝養老母 以終餘年(󰡔정종실록󰡕 권5, 정종 2년 7월 2일 乙
丑 20번째기사).
34) 安邊府使趙思義等擧兵 發人于州郡調兵. 大護軍安遇世適自東北面而還 飛馹來告其由. 
思義 卽顯妃 康氏之族屬也 欲爲康氏報仇也(󰡔태종실록󰡕 권4, 태종 2년 11월 5일 甲申 
2번째기사).
35) 안준희(1993), 「조선초기 태종의 집권과정과 趙思義의 난」, 󰡔역사문화연구󰡕 5, 한국외
국어대학교 사학연구소.
36) 이행뿐만 아니라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즉위하고, 역성혁명에 반대한 56명을 반
란모의 죄로 처벌하는데, 후일 ‘두문동 72현’에 속한 상당수가 여기에 포함되어 고초를 ‘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61
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인물은 이행처럼 신왕조 개창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새로운 인재였다. 이에 ‘불사이군’을 내세워 
은둔해있는 전왕조의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는 그들을 ‘절의지사’로 격상함으로써 출사의 명분을 제공해 준 것으로 여겨진
다. 또한 이미 세상을 뜬 인물에 대해서는 증직과 추존, 정상(旌賞) 등을 통해 
포상함으로써 그들의 후손들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치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37)
 이러한 조짐은 이방원의 집권 과정부터 나타났다. 2차 왕자의 난에 기여한 
공로가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좌명공신을 책봉하는데, 태조 이성계 지지세력
인 개국공신 52명 가운데 6명만이 포함되었을 뿐이다. 이는 태조 보좌세력에 
대한 견제를 의미하고, 이방원의 측근세력 형성에 여지가 생겼음을 뜻한다. 이
때부터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는 인물들이 태종의 측근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예를 들어 ‘두문동 72현’인 이존의 아들 이래는 
우현보의 문생인데, 이방간의 처조카로서 2차 왕자의 난의 기미를 알려준 덕
분에 태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는 좌명공신들이 개국・정사공신과는 달리 
태종 이방원의 측근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조 중심에서 태종 중심으로 
정치주도세력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뜻한다.38)
 다른 사례로서, 2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한 후인 정종 
2년(1400) 7월에 이행은 계림윤에 임명되었다.39) 당시 같은 날 이방원의 추천
으로 길재가 봉상박사(奉常博士)에 임명된 것을 생각하면, 이행의 계림윤 임
명은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이 개국공신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
적에서 군신의리를 내세워 고려 왕조에 충성을 바친 절의의 인물을 높이 평가
하고 등용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40) 권근의 상소 이
치르게 된다(김보정, 앞의 박사학위 논문, 114∼117쪽).
37) 정종대부터 두문동 72현 계열의 인물에 대한 정치적 처우가 약간 변하기 시작한다(김
보정, 앞의 박사학위논문, 124쪽).
38) 김보정, 앞의 박사학위논문, 129∼130쪽.
39) 以李行爲雞林尹(󰡔정종실록󰡕 권5, 정종 2년 7월 2일 乙丑 19번째기사).162 호남학 제68집
후 태종은 전대의 절의있는 유신들을 추존하거나 포상하고 관직을 제수하는 
등 포용정책을 펼쳐나갔다. 특히 권근은 정몽주와 길재를 들어서 그 절의를 
새로운 왕조의 수성을 위해서 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정몽주
는 영의정부사로, 김약항은 의정부찬성사로 추증되었으며, 길재는 대표적인 
절의지사로 천거되었다. 또한 태종은 유일지사의 천거를 통해 제도권 밖에 있
던 전조의 신하들을 최대한 등용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힘입어 권근은 충청
도 온수현에서 은거하고 있던 옛 동료 맹희도와 이행에게 함께 정사를 이끌어 
갈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변화 과정 속에서 태종 2년 조사의 난, 태종 4년 이거이부자의 옥, 태
종 5년 조준의 죽음으로 태조대 개국공신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사실상 소멸되
면서 절의파 사대부인 두문동 72현 계열의 은둔은 더 이상 정치적 의미가 없
어졌다. 절의파 사대부인 두문동 이행, 길재 등은 자손들의 관직 진출은 더욱 
드러났다.41)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고려시대 절의자는 주로 국가의 진휼대상이었는
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불사이군의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절의지사’로 확장
되면서 새로운 개념의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 조선사회
에서 절의 문제는 도통과 연결되어 각종 정치적 사건과 변란을 거치면서 다양
한 모습으로 현실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재지세력의 형성에도 작용하였다. 도
학의 계보를 공인하려는 이들의 논리는 조선 초기 왕권의 강화를 추구하던 태
종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권근 계열은 왕조의 건국기에 정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전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이 비록 태종대 국가의 학
문적・이념적 측면을 관장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역할은 왕
권의 통제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었다. 문묘종사가 다시 주장된 것은 중종반
정 이후 조광조 세력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였다. 그들은 정몽주-김굉필
의 문묘종사를 요구하였다. 정몽주는 태종 이래 길재와 함께 전조의 충신이라
40) 박재우, 앞의 논문, 130쪽.
41) 김보정, 앞의 박사학위논문, 135∼138쪽.‘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63
는 명목으로 국가적인 추숭 사업의 대상이었다. 중종대의 사림은 국가가 인정
한 충신의 전범인 정몽주의 이미지에 도학의 전승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김
굉필과 함께 문묘종사를 추진하였다. 이는 정몽주의 평판과 명망에 김굉필을 
연결하여 그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정작 조광조 세력에게 중
요한 것은 김굉필이었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이며 무
오사화의 희생자였다. 그를 문묘에 종사하여 성현의 지위에 올리게 되면, 세조
와 연산군의 자의적 왕권 행사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있을 뿐만 아
니라, 조광조 세력에게 이념적 정통의 권위까지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정몽주
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추진하던 시기에 사육신과 연산군대 피화인의 복권이 
같이 추진된 것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조선도학계보’의 
도통론은 정통의 근거로 ‘도학’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학문적 성취를 판단의 근
거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절의’ 개념이 계보를 형성하는 기준이었
다. 사실 계보에 포함된 이들을 학문적으로 연결하는 공통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들은 학문적 성취를 가늠할 수 있을 만한 자료를 남기지 못하였다. 이
러한 상황은 당시 실천을 강조하는 노재 학풍의 경향 아래서 용인될 수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도통론의 확산과 문묘종사의 추진은 조선 전기 정치과
정에서 사림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기능하였
다. 사림 세력은 도통론을 통해 국왕과의 정치 투쟁에서 이념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42)
Ⅲ. ‘두문동 72현’의 두 계보와 역사화 작업
 소위 ‘두문동 72현’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
자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72인의 고려 유신이며, 두문동 태학생 
42) 김영두(2006), 󰡔조선 전기 도통론의 전개와 문묘종사󰡕,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164 호남학 제68집
72인이라고도 한다”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문동 72현 조항에서 
전하는 개략적인 정보는 다음과 같다.
 현재 72인의 성명이 모두 전하지는 않고, 임선미・조의생・성사제・박문수・민안
부・김충한・이의 등의 성명만 전한다. 그밖에 맹씨라는 성만 전하는 자가 있다. 두
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이들에 관
해서는 여러 가지 구전이 있는데 그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명은 조
선이 건국되자 태학생 임선미 등 72인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고서 문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태조는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경덕궁에서 친히 과장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의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그 고
개를 ‘부조현’이라 하였다. 그리고 부조현 북쪽에 관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하여 
이를 ‘괘관현’이라 불렀다고 한다. 영조 16년(1740) 영조가 개성을 행차할 때 부조
현의 이러한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 뒤 이 고사가 임선미・조의생 자
손의 가승을 통하여 정조에게 알려져 정조 7년(1783)에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
를 세워 추모하였다. 다른 한 속전에 따르면, 개성 부근 보봉산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도 두문동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 유장 48인
이 들어와서 몸을 씻고서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한 골짜기라고 한다. 이들의 성명 
역시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신정・회맹대라는 지명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43)
 이처럼 대부분 구전과 속전으로 전하는 두문동 72현은 여말선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세상에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며 ‘역사화’ 된 것은 조선
후기 영조 16년(1740) 국왕의 명에 의하여 송도[개경]에 ‘부조현비(不朝峴碑)’
가 세워지면서부터이다. 두문동은 지리적으로 개경의 북쪽에 위치한 만수산 
아래에 있는 동네이다.44) 두문동이라는 명칭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4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문동 72현 조항. 대체로 후술할 영조 16년 기사 내용과 
같다.
44) 󰡔僻隱先生實記󰡕 권1, 󰡔松都志󰡕에는 두문동이 두 군데였다고 전한다. 동두문은 송도의 
동쪽 30리로 보황산 10리쯤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고려 유신 48현이 ‘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65
지리지 등에는 보이지 않다가 영조 16년 이후에 나타난다. 영조는 1740년 9월 
1일 송도에 도착하여 연을 타고 가면서 시신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부조현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이름지은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니, 
주서 이회원이 아뢰기를, “태종께서 과거를 설행했는데, 본도의 대족 50여 집안
에서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
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
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에게 말하기를, “말세에
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했다는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칠언시 한 구를 쓰
게 하니, 이르기를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勝國忠臣勉繼
世]’ 하였다. 가마를 따르는 옥당과 승지・사관으로 하여금 시를 이어서 지어 올리
게 하였으며, 또 직접 부조현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그 터에다 비석을 세우게 하
였다.45)
 이것이 ‘두문동’ 또는 ‘두문동 72현’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다. 위의 내용대로
라면 두문동은 고려가 멸망한 뒤에 생긴 동네이며 부조현 등으로 불리다가, 
18세기 중반 국왕이 직접 ‘부조현’이라는 비석을 세움으로써 절의를 상징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변모하게 된 셈이다. 물론 두문동의 지리적 위치는 조선 초기 
은둔했으며 그 아래에 세신정, 회맹대, 괘관현이 있으며 그 아래에 팔판사동(八判事
洞), 차간의동(車諫義洞), 궁녀동(宮女洞)이 있다. 서두문은 송도의 서쪽 10리로 만수
산 아래에 있는 동네로 태학사 72현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이곳에서 모두 죽었다는 
고사가 있다. 󰡔杜門洞書院志󰡕의 서에 언급된 두문동은 일반적으로 서두문을 말한다[김
정자(1998), 「杜門洞72賢의 선정인물에 대한 검토」, 󰡔부대사학󰡕 22집, 99쪽]. 
45) 上於輦路 顧侍臣曰 不朝峴在于何處 其命名亦何意也. 注書李會元曰 太宗設科 本都大
族五十餘家 不肯赴擧 以是名也. 且杜門不出 故又以杜門名其洞. 上前至不朝峴 命止
轎 謂近臣曰 末世君臣之義掃地矣. 今聞不朝峴命名之義 雖累百載之後 猶令人懍然如
覩. 仍命承旨書七言一句曰 勝國忠臣勉繼世. 令隨駕玉堂承史賡進 後又親書不朝峴三
字 立碑于其墟(󰡔영조실록󰡕 52권, 영조 16년 9월 1일 己巳 2번째 기사).166 호남학 제68집
지리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후 조선후기 지도인 󰡔송경복원도(松京復原圖)󰡕
를 보면 두문동이 개경의 북서쪽 방향인 만수산 아래에 있는 동네이름으로 등
장한다. 
 ‘72현’은 ‘공자의 많은 제자 가운데 뛰어난 72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미 고
려 초기부터 인지되었다.46) 성리학 도입 이전에 고려 유학자들은 공자의 72현
을 인식하고 있었다. 공자의 제자가 3,000명이 넘는데 그 가운데 72명을 꼽았
듯이, 조선 건국에 반대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는데 그 중에서 상징적이며 
대표적인 72현으로 집약한 것으로 보인다.47) 그렇다면 당시 존재했던 부조현
과 72현에 대한 인식, 존재하지 않은 ‘두문동’이 후대의 어느 시점에 ‘두문동 
72현’으로 결합되었으며, ‘부조현’・‘괘관현’・‘세신정’・‘회맹대’ 등의 명칭과 연결
되어 구전・속전・전설의 형태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즉, 영조가 부
조현이라는 비석을 세운 이후 ‘두문동 72현’은 보다 구체적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서 ‘역사화’의 단계를 밟게 된 것이다. 
 영조는 다음날 승지 김상로(金尙魯)를 보내어 고려 태조의 능에 제사를 지
내게 하고,48) 행궁에서 회가하기 위해 선죽교에 이르렀을 때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어갈 것이니[道德精忠亘萬古] 포은공의 곧은 절개는 태산처럼 높구
나[泰山高節圃隱公]’라는 열네 글자를 써서 유수로 하여금 비석에 새겨 세우
게 하였다.49) 당시 영조는 제릉[齊陵: 태조 정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능]과 후릉[厚陵: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을 전알(展謁)하고 봉심(奉
審)하기 위하여 송도를 찾았다. 영조가 ‘군신의 의리’를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특별히 부조현을 거론하고 포은의 절개를 추앙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임금이 태학을 두루 관람하고 탄식하기를, “이렇게 좋은 기지(基址)가 있
46) 고려 성종 때 박사 임노성(任老成)이 󰡔칠십이현찬기󰡕 1권을 송나라에서 가져왔다(󰡔고
려사󰡕 권3, 성종 2년 5월 甲子).
47) 김보정, 앞의 박사학위논문, 16∼18쪽.
48) 特遣承旨金尙魯 致祭于麗 太祖陵(󰡔영조실록󰡕 52권, 영조 16년 9월 2일 庚午 4번째 기사).
49) 上自行宮 將回鑾 至善竹橋 親書道德精忠亘萬古 泰山高節圃隱公十四字 令留守刻碑立之
(󰡔영조실록󰡕 52권, 영조 16년 9월 3일 辛未 1번째 기사).‘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67
는데도 사문(斯文)을 숭상하는 정치를 하지 않고 오로지 불교만 숭상하다가 
나라가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50) 전 왕조의 수도였던 송도에 대한 관심과 예의를 표한 행동으
로 보인다. 
 다만 영조의 송도 행행은 당시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성리학적 의리명
분론을 강조하기 시작하는 정치상황과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영조 16년은 
경신처분(庚申處分)으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의 핵심이 되고 있던 신임사화
(辛壬士禍) 문제가 노론의 승리로 일단락된 시기였다.51) 경신처분을 통해 영
조는 자신을 둘러싼 왕위 계승상의 정통성 논란에서 일단 벗어나게 됨으로써 
정치적 안정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후에 이루어진 󰡔속대전(續大典)󰡕의 간행
이나 균역법(均役法)의 시행 등은 정치적 안정 위에서 가능했는데, 경신처분
은 그 출발이었다. 그해 8월 영조는 제릉과 후릉을 참배한다는 목적으로 송도
로 행행하여 부조현을 지나면서 두문동 72현을 추숭하기 시작하였다. 영조 16
년 이후 정국을 주도하게 된 노론세력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위배되는 과거의 
처사를 바로잡고 의리 명분을 강조함으로써 성리학적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였
으며,52) 그 일환으로 두문동 72현을 고려를 위해 절의를 지킨 인물로 추앙하
는 등 역사적 재평가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53) 
 이후 영조 27년(1751)에는 개성 유수(留守) 서종급(徐宗伋)의 장계(狀聞)
50) 上周覽太學 歎曰 有此好基址 不以右文爲治 專事崇佛 以至亂亡 豈不惜哉(󰡔영조실록󰡕
52권, 영조 16년 9월 3일 辛未 1번째 기사).
51) ‘경신처분’은 ‘경신사(庚申事)’라고도 한다. 경종 2년(1722)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에 의
해서 발생한 임인옥사(壬寅獄事) 당시 고변의 내용은 노론 측에서 세 가지 수단을 통
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노론 측 상당수가 화를 당하였는데, 조
사 과정에서 당시의 왕세제[후일 영조]가 시해 과정에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거론되었
다. 따라서 왕위에 오른 영조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한 
혐의에서 벗어나야만 하였다. 영조는 즉위 이후 여러 조치를 통해 서서히 자신의 혐의
를 벗었으며, 영조 16년(1740) 6월 13일 소위 ‘경신처분’을 통해 임인옥사가 소론 측에 
의한 무고로 인한 것으로 판정하였다.
52) 정옥자(1988), 󰡔조선후기문화운동사󰡕, 일조각, 56쪽.
53) 김정자, 앞의 논문(1998), 99∼101쪽. ; 김보정, 앞의 박사학위논문, 15쪽. 168 호남학 제68집
를 받고 두문동 72인의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고, 또 어필(御筆)로
서 ‘고려 충신이 지금도 그 명성이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洞)에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열 네 글자를 써서 내
리고 비에 새겨서 세울 것을 명하였다.54) 당시 제문은,
 유 숭정 기원후 124년 신미 10월 21일에 조선 국왕은 신하 개성부 유수 서종
급을 보내어 두문동 중에서 고려의 여러 충신들의 영령에게 치제하노라. 절의를 
지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은 신하의 떳떳한 도리요 충신 열사를 표창한 것
은 예장에 나타나 있도다. 우리 조선이 천명을 받아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에 
순응하여 임금의 성화가 온 세상에 미치니 모든 사람이 신하가 되었건만, 오직 
고려의 사람 72인은 망국의 신하로 자처하고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였도다. 
그들이 들어간 동리가 있으니 어찌 문에 빗장을 걸어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 형적
을 숨겼는가. 비록 몸은 죽었으나 그 절의는 사라지지 아니하였나니 충절을 지켜 
죽음에 이름에도 후회함이 없었도다. 뒤에는 부조현이 있고 앞에는 괘관현이 있
도다.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을 취함은 같으니 오직 조와 임과 맹성 세 사람만
이 이름이 전하고 나머지는 기록이 되지 못하였도다. 내가 옛날에 이곳을 지나가
다가 유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니 감회를 그칠 수가 없구나. 
사적이 점점 오래되고 문헌이 없어져 후세에 권장을 하려해도 표석이 없으므로 
특별히 큰 글자 14자를 비석에 새겨 나의 뜻을 나타내었노라. 남긴 충렬을 생각
하여 후손을 찾아내어, 방위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깨끗하게 제수를 장만하
여 제사를 드리노라. 백세가 어찌 멀다고 하겠는가? 길이 풍성을 세우리라.55)
54) 命祭高麗 杜門洞七十二忠臣 因開城留守徐宗伋狀聞也. 又以御筆 書下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十四字 命刊碑竪之(󰡔영조실록󰡕 74권, 영조 27년 9월 27일 庚寅 2번째 
기사).
55) 國王遣臣開城府留守徐宗伋 侑祭于杜門洞中高麗諸忠臣之靈 守節不二 臣道之常 顯忠褒
烈 著在禮章 我朝受命 應天順人 聖化攸及 率普皆臣 爰有麗賢 七十有二 罔臣罔僕 自靖
其志 有洞曰何 有門斯扃 閉而不出 晦迹匿形 其身雖廢 其節不沫 抱忠守貞 之死靡悔 後
有不朝 前有掛冠 顧名雖殊 取義則班 予昔歷玆 顧詢遺址 躊躇興感 予懷曷已 事蹟漸遠 
文獻無徵 欲勸于後 其無褒稱 特書大書 有十四字 庸豎貞珉 庸表子意 想像遺烈 搜訪後
裔 相方視位 以壇以祭 牲酒蠲潔 黍稷惟香 百世何遠 永樹風聲(󰡔騎牛集󰡕 권2, 부록, 杜
門洞賜祭文).‘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69
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두문동 72인 가운데 이제 단지 
임・조 두 성이 있을 뿐이라고 하니, 매우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두 성 가
운데서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담당부서로 하여금 장문케 하여 즉시 뽑
아서 등용하도록 하라.” 하였다.56) 두문동 72현은 영조에 의하여 완전히 복권
되어 역사의 무대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정조 7년(1783) 개성부 유수 서유방(徐有防)의 상소에 의거하여, 두
문동태학사 임선미, 조의생, 맹씨 3명을 숭절사에 배향하였고, 22년(1798)에
는 ‘두문동 72현’에 속한 인물로 알려진 김주・김제의 형제에게 시호를 하사하
였다. 
E-1) 개성부 유수 서유방이 상소하기를, “충신을 포양하고 절의를 권장함은 그 나
라의 더없이 큰 국정인 것이기에, 무릇 전조의 사람으로서 병의하고 입근한 
처지에게는 모두 열성조의 포장하는 은전을 입게 하였습니다. …… 특히 두
문동 태학생 72인들은 우뚝한 충절이 진실로 정몽주・길재 등이 성취해 놓은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는데, 그 72인 중에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조의생・임선미와 성이 맹가인 세 사람이며, 맹가는 성만 전해지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선조 신미년에 특별히 명하여 두문동에 비를 세웠는
데, 어제하여 어필한 그 글에 ‘승국의 충신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특별
히 그 동리에다 비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표창한다.’고 하시고, 이어 본부의 
유수를 보내 치제하게 하였고, 임선미의 자손에게 특별히 침랑을 제수했습
니다. …… 본부에는 숭절사가 있습니다. 고 부사 송상현・고 부사 김연광・부
원수 유극량은 이 고장에서 생장하다가 임진년에 절사한 사람들인데, 조가
에서 사액하여 제향을 차리게 한 자리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지금 새로 서
원을 창립할 것 없이 이 사우에다가 세 사람까지 아울러 향사하게 한다면, 
절의를 지킨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게 되어 진실로 사체에 합당하게 되니, 
해조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시기 바랍니다.57)
56) 仍敎曰 杜門洞七十二人中 今只有林 曹二姓云 深用慨然. 二姓中可以堪任者 令該府狀聞 
卽爲調用(󰡔영조실록󰡕 74권, 영조 27년 9월 27일 庚寅 2번째 기사).170 호남학 제68집
2) 하교하였다. “지난번 영남 유생의 말에 따라 고려 충신 황명 예부상서 김주
에게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었다. 그런데 지금 장차 관원을 시켜 제사드리
게 하려는 차에 듣건대 ‘그의 형은 이름이 김제이고 호는 백암으로서 평해지
군으로 있다가 벽에 시를 써놓고 바다로 갔는데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모른
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바꿔 제해라고 했으니, 이는 대체로 노중련이 바다
에 빠져 죽겠다고 한 것처럼 하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고 하였다. 
우리 동방은 풍속이 미개한 상태로 있다가 기사께서 오신 뒤로 인륜에 관한 
일을 얻어 듣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정문충 등 제현에 이르러 제대로 그 뜻
이 밝혀졌는데, 그들 모두 은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호를 삼았으니 이들이 이
른바 9은으로 불린 분들로서 바로 포은・목은・도은・야은이라고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 밖에 72인이 산골짜기에 함께 들어가 그곳을 두문동이라고 이
름하였다. …… 하라.”58)
 그리고 순조 22년(1822)에 유생들의 상소에 따라, 고려조 예의판서 민안
부(閔安富)와 김충한(金沖漢)을 두문동 표절사(表節祠)에 배향하였고,59) 31
년(1831)에는 예조의 주청에 의하여 고려 충신 장안세(長安世)에게 시호를 내
려주었다.60) 그러나 헌종 이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두문동 72현에 대한 언급이 
57) 開城府留守徐有防上疏曰 褒忠奬節 有國大政. 凡係前朝人秉義立殣之地, 皆蒙列聖朝褒
奬之典. …… 獨杜門洞太學生七十二人 卓卓忠節 實無愧於鄭夢周吉再諸賢之成就 而七
十二人中 傳其名者 有曺義生林先味孟姓三人. 而孟則傳姓而不傳名. 先朝辛未 特命竪碑
於杜門洞 御製御筆有曰 勝國忠臣 今焉在 特竪其洞 表其節. 仍遣本府留守致祭 而林先
味子孫 特除寢郞. …… 本府有崇節祠 故府使宋象賢 故府使金鍊光副元帥劉克良 生長此
土 節死壬辰之人 而朝家賜額設祭之處也. 臣意 則今不必創立新院 就此一祠 竝享三人 
則節義咸萃 事面允當 乞命該曹稟處焉(󰡔정조실록󰡕 16권, 정조 7년 7월 14일 계묘 1번
째기사).
58) 敎曰 向因嶺儒言 諡高麗忠臣皇明禮尙書金澍曰忠貞. 而今將伻官宣侑際 聞其兄名濟號白
巖 以平海知郡 題詩璧間 浮海而去 不知所終. 而變其名曰齊海 蓋欲思齊於仲連之蹈海云
爾. 東俗蚩蚩 自箕師以后 得聞彝倫之敍. 及至鄭文忠諸賢 乃能倡明之 皆以隱爲號 號稱
九隱 卽圃牧陶治是耳. 外此七十有二人 同入山谷 而名曰杜門 …… (󰡔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 9월 6일 丙寅 1번째기사).
59) 命麗朝禮儀判書閔安富金冲漢兩人 追腏于松京杜門洞 表節祠 因儒生疏陳 兩人麗末全節
之實 收議大臣許施也(󰡔순조실록󰡕 권25, 순조 22년 12월 丙寅).‘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71
없다가, 고종 40년(1903)에 “우리 영조 때에 두문동 72현의 절의를 기려서 단
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낸 일이 있는데, 이번에 어필 비각을 다시 중건하게 되
니 더욱 감회가 새롭다. 지방관에게 치제케 하라.”는 조령을 내렸다.61) 영조부
터 시작하여 고종까지 계속된 두문동 72현에 대한 정치적 복권과 추숭작업은 
이후 여말선초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세력에 맞서 고려에 대
한 절의를 지킨 일단의 정치세력을 역사적 존재로 부각시키는 데에 크게 일조
하였으며, 현재는 선후관계가 뒤바뀐 채 여말선초부터 추앙된 두문동 72현이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본 장에서는 두문동 72현에 대해서 두 가지 사항을 검토하고자 한다. 하나
는 72현의 구체적 명단이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하는 문제, 다른 하나는 어떤 
기록을 통해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72현이라는 숫자
의 의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두문동 72현이라는 구체적 인물은 언제 어떻게 현실로 드러났을까? 영조 27
년에 두문동비가 세워진 이후 두문동 72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당시 개성유수였던 서종급이 지은 「두문동사제문」을 살펴보면 72현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고, 고려를 위해 절의를 지킨 인물로 두문동
72현이라 할 뿐이었다. 그리고 「두문동비각상량문(杜門洞碑閣上樑文)」에서,
 我聖朝受命之初 有此諸公殉節之所 世傳爲七十二子 符孔氏升堂之賢 今至
于三百餘年 稱麗朝杜門之洞(「杜門洞碑閣上樑文」)
이라고 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72명이라는 숫자는 공자의 제자 72명에서 나
왔다고 한다. 즉, 문묘에 배향된 공자 제자 72현에서 착안하여 고려의 두문동 
60) 禮曹啓言 高麗忠臣張安世 邑誌所載諸賢文集 俱有可據. 際當攀龍之會 獨守取熊之義 屢
徵不起 終身草野 杜門諸賢 多蒙貤贈 而以此卓節 尙今泯沒 實爲輿論之齎鬱. 請賜謚 從
之(󰡔순조실록󰡕 권32, 순조 31년 7월 己巳).
61) 詔曰 粤我英廟 褒揚杜門洞七十二賢之節義 有設壇致侑之擧 而今當御筆碑閣之重建 尤庸
感念. 令地方官致祭(󰡔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5월 19일 양력).172 호남학 제68집
72현으로 칭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리학이 유입되기 이전에 고려 유학
자들은 공자의 72제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공자 제자 중에 
72현을 꼽듯이 조선건국을 반대한 수많은 고려 유학자 중 72현을 선정하여 그 
대표성을 부각한 것으로 보인다.62)
 그런데 고려말부터 영조 16년까지 ‘두문동 72현’의 구체적 명단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조 16년 부조현비가 건립되고 난 이후에 간행
된 문집에서도 두문동 72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점을 통해서 확인된
다. 또한 영조 27년 개성유수 서종급의 제문에서,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
을 취함은 같으니 오직 조와 임과 맹성 세 사람만이 이름이 전하고 나머지는 
기록이 되지 못하였도다.”라고 했고, 정조 7년 임선미・조의생・맹씨 3명을 숭
절사에 배향할 때, “72인 중에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조의생・임선미와 
맹가 세 사람인데, 맹가는 성만 전해지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즉, 고려말 조선초 ‘두문동 72현’이라는 추상적 단위
만 운위되었으며, 따라서 구체적인 명단은 처음부터 없었거나, 아니라면 중간
에 그 명단이 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라면 72현이라는 숫자는 상징성이
었는데, 후일 두문동 72현이 정치적으로 복권을 이루어 추숭의 대상이 되자, 
당파나 가문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72현의 명단에 넣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서 72현이 구체적으로 선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후일 ‘두문동 72현’의 명단에 들어있는 고려의 유신들이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절의적 인물로 부상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고려말 조선초부터 고종대
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단계를 거치면서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증직, 
공신호 수여, 후손 발탁, 후손 봉작, 배향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추숭되었다. 김
보정의 연구에 따르면, 첫째 태종대 권근의 건의에 의해 고려의 충신으로 절
의를 지킨 정몽주 등이 추증되었고, 우현보의 아들들이 원종공신으로 칭하되
었으며, 세종대 길재가 추증되었다. 둘째, 문종대와 성종대 그리고 연산군대에 
62) 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18쪽.‘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73
충신의 자손들을 봉작하거나 관직을 제수하였다. 셋째, 중종대에 정몽주의 문
묘종사 논의와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졌다. 넷째, 명종대부터 숙종대까지 전조 
충신들의 사당, 서원, 사우 건립 추진과 편액 하사 요청에 따른 지원과 사액 
등이 잇달았다. 다섯째, 영조 초반에 김주 등의 자손들이 녹용되거나 관직제수
를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끝에 영조대에 이르러서 두문동 72현으로 추
숭되고 치제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정조대에 임선미 등이 충절사에 배향
되고 김주 형제에게 시호를 하사하였으며, 순조대 박문수 등이 표절사에 배향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숭양서원에서 치제하였
다. 조정에서 두문동 72현을 지속적으로 추숭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종 9년
(1872) 두문동 72현에 대한 명단이 󰡔기우집(騎牛集)󰡕에 등장하기에 이른다.63)
 이제 ‘두문동 72현’의 명단 형성 과정과 그 자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영조대 이후 노론의 주도적인 입장에서 두문동 72현에 대한 긍정적 입장이 표
명되자, 침묵하고 있던 두문동 72현의 후손들도 그들의 선조에 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각자 가문에서 문집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64) 이 가운데 두문
동 72현의 명단과 관련해서는 󰡔철감록(掇感錄)󰡕(1774)과 「부조현언지록(不朝
峴言志綠)」, 󰡔화해사전(華海師全)󰡕(1860)과 「언지록(言志錄)」, 󰡔기우집󰡕(1872)
과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 󰡔여조충열록(麗朝忠㤠錄)󰡕(1923), 
󰡔전고대방(典故大方)󰡕(1924)과 「여조두문칠십이인(麗朝杜門七十二人)」 등
이 주목된다. 이외 두문동과 관련된 기록은 「부조현비문・음기」, 「두문동비문・
음기」, 「두문동치제문」, 「두문동비각상량문」 등도 있다. 이들 자료를 중심으
로 ‘두문동 72현’ 명단에 대해서 검토하도록 하겠다. 
63) 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18∼22쪽.
64) 두문동 72현을 비롯한 절의파 사대부와 관련된 인물의 문집은 29권이다(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24쪽, 표-2 참조). 이들 문집은 대체적으로 편찬 시기를 기록함에 있어서 명
의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명이 망한 이후 중화의 정통을 조
선이 잇고 있다는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상적으로 성리학적 의리명분
론을 바탕으로 하여 두문동 72현을 추숭하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었다[김정자
(1998), 앞의 논문, 101쪽].174 호남학 제68집
 두문동 72현의 명단은 1774년에 간행된 󰡔철감록󰡕에 실린 「부조현언지록」에
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철감록󰡕은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사람인 여주이씨 
이행의 후손들이 만든 문집이다.65) 여기에 수록된 「부조현언지록」은 철종 11
년(1860) 󰡔화해사전󰡕이 간행될 때 다시 수록된다. 때문에 「부조현언지록」은 
두문동 72현과 관련하여 선구적인 기록이므로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이후 
「두문동72현록」이 실린 󰡔기우집󰡕이 간행될 때까지는 몇 단계를 거쳤는데, 먼
저 이행의 11세손인 이지운(李之運)이 선대의 유고를 모아서 영조 20년(1744)
에 󰡔철감록󰡕(갑자본)을 간행하였다. 이것이 후일 󰡔기우집󰡕의 모태가 된 책이
다. 이후 이지운의 7세손인 이필상(李弼相)이 갑자본을 보완하여 고종 9년
(1872) 8월 다시 5권 2책의 󰡔철감록󰡕(壬申本)을 간행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이행의 16대손 이종술(李鍾述)이 󰡔철감록󰡕의 권1에 해당하는 「기우선생유고」
를 따로 분리하여 󰡔기우집󰡕(壬申本)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기우
집󰡕의 원본이라 할 수 있다. 󰡔기우집󰡕(壬申本)에는 「두문동72현록」이 수록되
어 있으며, 「부조현언지록」, 「영묘조두문동비표」, 「두문동사제문」, 「부조현비
음기」 등도 실려 있다.66)
 󰡔철감록󰡕과 󰡔기우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는 「부조현언지록」의 내용은 다음
과 같다.
 洪武二十五年壬申秋七月哉生魄乙未 卽麗氏運訖 本祖受命之際也. 忠臣烈
士之徒罔 有臣僕之志 自靖其義之所當盡於是焉. 齊登松都市東南峴 掛朝天之
冠 戴蔽陽之笠 南登不朝峴. 朴門壽曰 天命有歸 國事已非 吾屬盍各言其志. 成
思齊曰 寧爲王氏鬼 不作李家臣. 曹義生曰 甘心杜門 死而後已. 林先味ㆍ高天
65) 󰡔기우집󰡕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기우자 이행의 문집으로 두문동 72현록을 싣고 
있는 최초의 문집이다. 조선 초기에 간행되어 유포된 적이 있었으니 병란으로 소실되
었다고 전한다. 이후 순암 안정복이 어린 시절 󰡔기우집󰡕을 보았다고 했으니, 조선 후기
에 다시 간행된 것같다[김정자(1998), 앞의 논문, 103쪽]. 다만 최초의 󰡔기우집󰡕에 두
문동 72현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66) 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27쪽 및 김정자(1998), 앞의 논문, 105∼106쪽.‘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75
祥曰 惟當從者義. 田貴生曰 深入於山 耕者誰知. 李崇仁曰 陶河之世 嗟己遠矣. 
李孟藝曰 願灑淸風於雷首. 柳玽曰 磻溪直鉤 釣周何意. 田祖生曰 欲爲耕者 何
山可往. 具鴻曰 伯夷何人我何人. 禹玄寶曰 去國季札 終身可效. 趙永肅曰 伯
夷之餓亦我意也. 蔡貴河曰 東瞻開城 非復我土 西望首陽 忍忘一心. 李行曰 西
望首陽 忍食周粟. 徐仲輔曰 願不北面於新朝 愧二心之人. 邊肅曰 樓宋誰家子 
其操可慕. 朴諶曰 願尋高麗山. 申晏曰 新王非我王 忍作二王臣. 朴寧曰 橫島
安在 欲往茫然. 高天祐曰 願歸田里. 趙安鄕曰 時已非矣 不去何求. 言訖咸望
松京曰 夷齊何人 曾餓西山 流涕而皆曰可去矣. 時鄭夢周殉國於善竹橋 李穡已
見放韓山 吉再先去金烏山 朴門壽歸排祿洞 田貴生逃入絶島 成思齊退居於午
正門外山谷間 李祐ㆍ李孟藝隱東鼇川 趙捐ㆍ具鴻ㆍ元寶隱松山 曹義生ㆍ林先
味ㆍ高天祥ㆍ徐仲輔皆入杜門洞 李守生ㆍ鄭煕良ㆍ金震陽ㆍ李種學並流遠地 
崔瀣隱猊山 柳玽隱五鳳山 元天錫隱雉岳山 金澍ㆍ禹玄寶入中國 崔瀁入中臺
山 趙承肅歸德谷 全五倫入瑞雲山 趙珙遯栗原 金自粹隱秋嶺 李思敬隱肅薪里 
李遂生隱栗里 金若時隱金光里 南乙珍隱古沙川 蔡貴河隱多義峴 朴諶隱立巖 
趙安鄕隱泉山 邊肅隱鴨山 朴寧隱法峴 徐隱積巖 李行隱醴泉洞 申晏歸黃衣山 
李淪歸桃灘 李養中遯廣陵 徐甄遯襟陽 林卓歸錦城 金英庇隱古石山 宋桂歸洪
陽 高天祐ㆍ邊龜壽ㆍ安從約ㆍ金俊ㆍ尹珪ㆍ朴忱ㆍ許錦ㆍ裴尙志ㆍ李惟仁ㆍ
閔普ㆍ文成ㆍ車ㆍ嚴ㆍ張ㆍ金沖漢ㆍ李ㆍ金煒ㆍ閔安富ㆍ田祖生之徒 歸排祿
洞 而皆抗不二之節 取其義而成其仁焉. 當時士大夫皆高尙其道希之者惟恐不
及 更相標榜爲之稱號(󰡔기우집󰡕 권2, 부록, 「不朝峴言志錄」).
 그런데 「부조현언지록」에 등장하는 인물은 홍무 25년(1392) 7월 을미일에 
부조현에서 소회를 밝힌 사람이 22명이고, 죽거나 유배되거나 도망가거나 은
거한 인물들이 66명이다. 여기에서 중복된 인물을 빼면 66명이다. 「부조현언
지록」에 두문동 72현과 관련하여 꼽을 수 있는 인물이 66명밖에 되지 않는다
는 사실은 1774년 󰡔철감록󰡕을 간행할 단계에는 ‘두문동 72현’의 72명이라는 
구체적 숫자나 명단이 확정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더구나 이들 66명 중 나중
에 󰡔기우집󰡕의 「두문동72현록」에 수록된 인물은 정몽주, 김주, 최양, 길재, 남
을진, 임선미, 원천석, 조의생, 김자수, 이색, 이양중, 김진양, 이사경, 조승숙, 176 호남학 제68집
서견, 배상지, 이행, 변숙, 이종학, 구홍, 성사제, 김충한, 유구, 박문수, 민안부, 
조견, 김약시 등 27명뿐이다. 그렇다면 두문동 72현 중 나머지 45명은 어느 
시점에 새롭게 포함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67) 이런 과정을 거쳐서 󰡔철감록󰡕
의 「부조현언지록」이 등장한 이후 100년의 시간이 흐른 1872년 󰡔기우집󰡕의 
「두문동72현록」에 드디어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68)
이후 1924년 강호석(姜斅錫)이 우리나라 역대 인물에 대한 전거를 밝힌 인물
지 형식의 󰡔전고대방󰡕을 발간했는데,69) 여기에 수록된 「여조두문72인」을 통
67) 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29쪽. 이에 대하여 김정자는, “영조대 두문동 72현이 추숭되는 
배경 속에서 󰡔철감록󰡕의 「부조현언지록」이 100년이 지나면서 재조정될 필요가 있었음
을 뜻한다. 즉, 󰡔철감록󰡕의 「부조현언지록」과 󰡔화해사전󰡕의 「언지록」에 수록된 인물만
으로 고려의 절의를 대표하는 72현을 구성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기우집󰡕
의 「두문동72현록」을 편찬하면서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선정한 것”으로 보았다[김정
자(1998), 앞의 논문, 107쪽].
68) 󰡔기우집󰡕 「두문동72현록」에 실린 두문동 72현의 명단은 정몽주(鄭夢周), 김주(金澍), 
이존오(李存吾), 정추(鄭樞), 최양(崔瀁), 길재(吉再), 남을진(南乙珍), 임선미(林先味), 
원천석(元天錫), 조의생(曺義生), 맹유(孟裕), 도동명(陶東明), 도응(都膺), 이사지(李思
之), 김자수(金自粹), 장안세(張安世), 국(鞠), 정광(程廣), 한철충(韓哲沖), 나천서(羅天
瑞), 조(趙), 김약시(金若時) 정온(鄭溫), 맹희도(孟希道), 신덕(申德), 서견(徐甄), 최문
한(崔文漢), 허징(許徵), 조승숙(趙承肅), 이사경(李思敬), 성부(成溥), 이명성(李明誠), 
이색(李穡), 정지(鄭地), 하자종(河自宗), 이양중(李養中), 김진양(金震陽), 안성(安省), 
김약항(金若恒), 배상지(裵尙志), 이석지(李釋之), 이행(李行), 변숙(邊肅), 김선치(金先
致), 이왕택(李涓), 이종학(李種學), 이양소(李陽昭), 민유(閔愉), 문익점(文益漸), 임탁
(林卓), 조희직(曺希直), 송인(宋寅), 곽추(郭樞), 조철(趙鐵), 김사렴(金士廉), 윤충보
(尹忠輔), 유(柳), 채왕택(蔡王澤), 송교(宋皎), 최칠석(崔七夕), 차원(車原), 김자진(金
子進/金自進), 김승길(金承吉), 범세동(范世東), 성사재(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
부(閔安富), 김충한(金忠漢), 구홍(具鴻), 채귀하(蔡貴河), 조유(趙瑜), 김제(金濟), 전
조생(田祖生), 전귀생(田貴生) 등이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김보정의 학위논문
(29∼32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69) 󰡔전고대방󰡕 발간 직전 1923년에 󰡔기우집󰡕 「두문동72현록」을 그대로 인용한 󰡔여조충열
록󰡕이 간행되었다. 이는 조선왕조 건국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고려왕조에의 절의를 지
키다 두문동에서 죽음을 당한 두문동 72인을 비롯한 고려수절신의 실기와 그에 대한 
포장 및 감술 등을 모은 필사본으로 원・속편 각 1책이다. 필사 시기는 발문을 대신한 
듯 한 권말의 「麗季事蹟問答」 중 「今年崧陽建院之五回而開日 卽圃隱成仁之八回甲也」
라는 문구가 있고 기년은 壬申인 것으로 미루어 고종 9년(1872)인 듯하며 필사자는 미
상이다. 원편은 「凡例」와 「麗朝忠烈錄」으로, 속편은 「褒獎」, 「感述」, 「麗朝忠烈錄附記」 ‘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77
해 새로운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나타난다.70) 󰡔기우집󰡕의 「두문동72현록」 이
후 ‘두문동 72현’에 속한 72명은 각각의 가문과 문중에서 추숭되다가, 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 다른 차원에서 변화를 겪게 된 셈이다. 󰡔전고대
방󰡕의 「여조두문72인」은 그 출처를 󰡔화해사전󰡕으로 밝히고 있다. 󰡔화해사전󰡕
은 고려 말 인물인 신현(申賢)과 그 자손에 관한 글을 모아 놓은 것으로 철종 
11년(1860) 그의 후손인 평산신씨 가문에서 간행하였다.71) 󰡔화해사전󰡕은 󰡔철
감록󰡕 간행 이후 처음으로 「언지록」을 수록한 문집이다. 전체적으로는 󰡔철감
록󰡕의 「부조현언지록」 내용을 따르고 있지만, 「언지록」이 고려가 멸망하고 조
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유신들이 부조현으로 넘어가면서 각자의 심정을 표현한 
글이 아니라, 정몽주의 순절을 애도하는 제전에 참여한 인물들의 정몽주과 고
려의 앞날에 대한 소회를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따로 전하고 있다. 이는 결
국 󰡔화해사전󰡕의 「언지록」에 입각한 󰡔전고대방󰡕의 「여조두문동72인」이 󰡔기우
집󰡕의 「두문동72현록」과는 다른 차원에서 제작되었음을 뜻한다.72)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70) 여기에서는 두문동과 관련된 여타의 자료를 소개하지 않고 72현의 이름만 적혀 있다. 
󰡔騎牛集󰡕에서는 ‘두문동 72현’으로, 󰡔典故大方󰡕에서는 ‘여조두문동72인’으로 칭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겠다(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33쪽).
71) 󰡔華海師全󰡕에 대해서는 전석만(1993)의 「華海師全 小考」(󰡔한국향토사연구󰡕 5)를 참
조바란다.
72) 󰡔典故大方󰡕에 수록된 두문동 72현 명단은 우현보(禹玄寶), 조의생(曹義生), 임선미(林
先味), 고천상(高天祥), 전귀생(田貴生), 이숭인(李崇仁), 이맹예(李孟藝), 유순(柳洵), 
전조생(田祖生), 조승숙(趙承肅), 채귀하(蔡貴河), 서보(徐輔), 변숙(邊肅), 박심(朴諶), 
신안(申晏), 박녕(朴寧), 김충한(金冲漢), 고천우(高天祐), 서중보(徐仲輔), 조안경(趙安
卿), 이색(李穡), 이유(李裕), 조견(趙狷), 허금(許錦), 이수인(李守仁), 정희(鄭熙), 길
재(吉再), 원천석(元天錫), 김주(金澍), 최양(崔瀁), 전오륜(全五倫), 조홍(趙洪), 김자
수(金自粹), 이사경(李思敬), 이수생(李遂生), 김약시(金若時), 남을진(南乙珍), 이행(李
行), 이륜(李淪), 이양중(李養中), 서견(徐甄), 임탁(林卓), 김육비(金六庇), 변귀수(邊貴
壽), 안종약(安從約), 김준(金俊), 윤육(尹陸), 박침(朴忱), 배상지(裴尙志), 구홍(具鴻), 
이유인(李唯仁), 박문수(朴門壽), 이석지(李釋之), 성사제(成思齊), 민보(閔普), 임척(林
隲), 차원조(車元覜), 최문한(崔文漢), 신석(申釋), 신자악(申自嶽), 김위(金瑋), 민안부
(閔安富), 신덕린(申德隣), 신포시(申包翅), 박의중(朴宜中), 이양소(李陽昭), 박태시(朴
太始), 이경(李瓊), 맹호성(孟好性), 길인적(吉仁迪), 신이(申彛), 반모(潘某) 등이다. 이178 호남학 제68집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기우집󰡕의 「두문동72현록」은 100여 년 전에 
간행된 󰡔철감록󰡕을 모태로 삼으면서도 「부조현언지록」과는 달리 72현 가운데
서 44명이나 새로운 인물을 선정하였다. 󰡔기우집󰡕보다 52년 뒤에 간행된 󰡔전
고대방󰡕의 「여조두문72인」은 그 출처를 󰡔화해사전󰡕으로 밝히고 6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을 그대로 수록하였다. 󰡔전고대방󰡕의 경우 󰡔화해사전󰡕의 내용을 
전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부조현언지록」에 수록된 인물을 중심으로 ‘두문
동 72현’을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기우집󰡕은 「부조현언지록」과는 다른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두문동 72현을 선정한 것이고, 󰡔전고대방󰡕은 󰡔화해사
전󰡕의 「언지록」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72명을 선정한 것이다. 두문동 72현의 
선정 기준의 차이는 󰡔기우집󰡕과 󰡔화해사전󰡕의 편찬자들의 두문동 72현에 대
한 인식의 차이에서 발로했다고 불 수 있다. 
 우선 󰡔기우집󰡕의 경우에는 정몽주를 대표적인 인물로 선정하였다. 
 鄭夢周 字達可 號圃隱 延日人. 趙英珪椎殺于架資橋 靑竹卽生橋上 因號善
竹橋.73)
 위 기록은 󰡔기우집󰡕 「두문동72현록」에 첫 번째로 실려 있는 정몽주에 대한 
내용이다. 72명을 나열하면서 특별한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서두에, 
 “고려말 충신으로서 절의를 세워 의롭게 죽은 자[立節死義者]가 많으나 그 나
머지들, 즉 당대에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거나[杜門屛迹] 혹은 죽지 않아도 스
스로 몸을 다스린 자[不死自靖者]들을 통칭하여 두문동 72인이라 부르니 그 의
리는 같다. 오직 송경에서만 숨어 살았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고 기록되어 
있다.74)
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김정자, 앞의 논문(1998), 111∼112쪽 및 김보정, 앞의 학위
논문, 36쪽 참조바란다.
73) 󰡔기우집󰡕 권2, 부록, 「두문동72현록」.
74) 麗未 忠臣 立節死義者多 其餘則杜門屛迹於當世 或不仕自靖者 通稱杜門洞七十二人 同‘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79
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말 충신으로서 ‘입절사의자(立節死義者)’, 
‘두문병적자(杜門屛迹者)’, ‘불사자정자(不死自靖者)’ 순서로 기록한 것같다. 
실제로 정몽주는 가자교에서 조영규에 의해서 추살되었다. 정몽주 다음에 기
록된 김주(金澍)는 1392년(공양왕 4)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일을 마치
고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의 운명이 다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고 편지를 써 보내
고 곧이어 조복(朝服)을 부치며, 부인이 죽은 뒤에 합장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편지를 보낸 날이 나의 제삿날이라고 하고 중국으로 돌아가 절강에 거
처하였다.75) 김주가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지만, ‘발서일위아망일(發書曰爲我
忘日)’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를 ‘입절사의자’로 본 것같다. 다음 인물은 이존오, 
정추, 최양인데, 이들도 ‘걱정과 분노가 넘쳐 병에 걸려 죽었다[憂憤成疾卒]’, 
‘분한 마음에 편치 않은 세월을 살다 등창으로 인해 죽었다[憤惋不平 疽發背
卒]’, ‘토지와 녹봉을 하사하였지만 받지 않고 생을 마쳤다[賜田祿不受而終]’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역시 ‘입절사의자’로 평가받았다.76) 다음 길재는 ‘관직을 버
리고 금오산에 돌아가 은거하였다[棄官歸隱金烏山]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이,77) ‘두문병적자’로 평가된 것같다. 이하 인물들도 같은 순서에 해당하는 행
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서두의 언급이 실제 「두문동72현록」의 기록 순서이자 
기준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기우집󰡕에서는 왜 「두문동72현록」의 순서를 입절사의자 → 두문
其義理 而不但屛居於松京之謂也(󰡔기우집󰡕 권2, 부록, 「두문동72현록」).
75) 金澍 號籠巖 善山人 恭讓朝 以禮判奉使天朝 還到鴨綠江 聞運訖 寄夫人書曰 忠臣不事
二君 烈女不更二夫 仍送朝衣 夫人下世後以此合葬 且以發書曰爲我忘日 遂入中原居淅
江(󰡔기우집󰡕 권2, 부록, 「두문동72현록」).
76) 李存吾 號石灘 慶州人 恭愍九年登第 授監察糾正 見時事亂 憂憤成疾卒 贈大司成 立
祠. 鄭樞 淸州人 見天命有歸 憤惋不平 疽發背卒 諡文簡. 崔瀁 號昭六 會州人 受學於
其舅鄭圃隱之門 文科大提學 我太祖龍興之日 握手曰 吾友崔瀁來耶 賜田祿不受而終 
享西山祠(󰡔기우집󰡕 권2, 부록, 「두문동72현록」).
77) 吉再 字再父 號冶隱 善山人 種竹御賜田 手把黃花祭伯夷 以注書知國將亡 棄官歸隱金烏
山(󰡔기우집󰡕 권2, 부록, 「두문동72현록」).180 호남학 제68집
병적자 → 불사자정자로 정하였을까, 즉 정몽주를 왜 대표인물로 꼽았는지 궁
금하다. 󰡔기우집󰡕의 편찬자들은 공민왕 이후부터 고려가 멸망해 가는 시기라
고 보고 목숨을 버려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을 우선시한 것으로 보인
다. 그렇다면 왕조의 존폐 앞에서 목숨을 바쳐 의를 다한[立節死義] 정몽주를 
대표적 인물로 꼽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기우집󰡕은 여주이씨
[여흥이씨] 가문에서 발간하였는데, 그들은 󰡔철감록󰡕의 발문을 남인의 대표적 
인물인 안정복, 󰡔기우집󰡕의 서문 역시 남인계열 인물인 허전(許傳)에게 받은 
것으로 보아, 󰡔기우집󰡕은 남인계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견해가 
있다.78) 여주이씨가 남인계열이고, 발문과 서문에 참여한 안정복과 허전이 남
인계열이라고 하더라도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정몽주를 대표로 내세워 「두문
동72현록」을 작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행은 대체적으로 절의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79) 이행이 조선 건국 이후 
장남 이적(李逖)이 자신과 함께 벼슬을 사임하고 자정(自靖)하려 하자, “신
왕(新王) 또한 성인이며 너와 나는 처지가 다르니 반드시 나를 따르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다. 모름지기 잘 섬겨라”고 하였다. 또한 이행이 남긴 두 편의 
시에 망국의 한이나 처지의 비참함은 나타나 있지 않다. 오히려 소를 타고 유
유자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과 절친한 성석린과 권근이 출사하는 데
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왕자의 난 이후 권근의 종용에 따라 
출사하여 조선 조정으로부터 끊임없이 관직을 제수받았다. 물론 곧바로 관직 
제의에 이행은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기존 연구에서는 이행을 
절의파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행의 행적을 전하는 다양한 자료 속에서 
정몽주와 교유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태종에게 신임을 얻어 정치활
동을 재개하였고, 군사・외교・경제 분야에서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였다.80) 이
78) 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39∼40쪽.
79) 박재우(2019), 「여말선초 李行의 정치적 입장과 節義 인식」, 󰡔대동문화연구󰡕 108, 117 
∼118쪽. 
80) 김도형(2007), 「여말선초 이행의 정치활동과 사상적 경향」, 󰡔역사와 세계󰡕 31, 8∼25
쪽 및 박재우 위의 논문, 130∼135쪽.‘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81
러한 이행의 조선 초 행동 양상에 비추어 보면 󰡔기우집󰡕이 반드시 ‘입절사
의(立節死義)’의 정신을 중시하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같다. 오히려 왕실과의 
혼인, 사후 공신호, 이행 후손의 정치적 성공과 가문의 성장 덕분에 두문동 72
현에 포함된 것은 아닌지 살필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이행이 여말 선초에 절의적 인물로 평가받은 것과 「두문동72현록」에 
포함된 절의 기준은 차이가 있다. 이행은 권근의 제안을 받아들여 태종에 의해 
절의적 인물로 평가되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정몽주를 절의의 표
상으로 삼았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주장하는 신권(臣權)이 아닌 왕조에 충성
하는 절의적 신하가 필요했을 것이다.81) 권근이 “수성할 때에는 반드시 전대
에 절의를 다한 신하에게 상을 주어, 죽은 자는 벼슬을 추증하고 살아있는 자
는 불러 쓰고 정표와 상을 주어 후세의 인신의 절의를 장려할” 것을 주장한 
데에 따른 것이다.82) 이후 정몽주와 이행은 태종에 의해 절의적 인물로 평가
되어 각각 정치적 복권과 관직 등용이 제청되었다. 그들은 왕권의 안정과 강화
를 위한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국왕 중심의 정치론을 
전개하면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였다. 이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태종
의 입장과 부합된다.83) 이처럼 절의적 인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신료가 아니
라 국왕이다. 또한, 절의적 인물의 추숭으로 혜택을 입은 당사자는 그들의 후
손이다. 그동안 두문동 72현에 대해서 알려진 인물이 거의 없다가, 여주이씨 
가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기우집󰡕의 「두문동72현록」에서 처음으로 그 명단
이 완성되었다. 이때 정몽주를 ‘입절사의자’로서 대표 인물로 삼기는 했지만, 
‘두문병적자’와 ‘불사자정자’가 훨씬 많다. 정몽주, 김주, 이존오, 정추를 제외하
81) 태종대 비개국파 유신들의 정계 진출은 절의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시대분위기 속에서 
가능했고[류주희(1998), 「조선초 비개국파 유신(儒臣)의 정치적 동향」, 󰡔역사와 현실󰡕
29, 61쪽), 당시 절의정신의 포상은 개국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한편 새로
운 세력을 규합하는 사상적 배경으로 이루어졌다는 시각도 있다[김정자(1991), 「소위 
‘杜門洞 72賢’의 정치성향」, 󰡔부대사학󰡕 15・16, 368∼371쪽).
82) 󰡔태종실록󰡕 권1, 태종 1년 1월 14일 甲戌 3번째기사.
83) 류주희, 앞의 논문, 62∼63쪽.182 호남학 제68집
고는 68명이 ‘두문병적자’ 또는 ‘불사자정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행 가문
과 남인계열에서는 정몽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출사하
고 성공한 자신의 선조들을 절의로 표상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입절사의’ 하지 않은 자신의 선조 이행을 자연스럽게 72현에 포함시키는 방법
이기도 했을 것이다. 즉, 󰡔기우집󰡕의 「두문동72현록」에 들어간 72현의 명단을 
작성한 배경은 ‘입절사의자’보다는 ‘두문병적자’와 ‘불사자정자’를 절의적 인물
로 표상함으로써 혜택을 입을 그 후손들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84)
그들의 이러한 목적과 ‘경신처분’ 이후 정국을 주도하게 된 영조의 입장과 일
치된 것이다.
 한편 󰡔전고대방󰡕의 「여조두문72인」은 󰡔화해사전󰡕의 「언지록」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는 「여조두문72인」 맨 끝에 ‘출화해사전(出華海師全)’이라고 적혀 
있고, 󰡔화해사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료는 「언지록」밖에 없기 때문이
다. 그런데 󰡔전고대방󰡕 1∼4권까지 50편의 글에서 출전을 밝힌 것은 「여조두
문72인」뿐이다. 이는 󰡔전고대방󰡕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 인명을 나열하는 것인
데, 유독 「여조두문72인」만 출전을 밝힌 것은 전적으로 그 자료를 옮겨왔음을 
뜻한다. 그런데 󰡔화해사전󰡕은 평산신씨 가문의 주도로 제작되었다. 그렇다면 
「여조두문72인」에 등장하는 ‘두문동 72현’은 평산신씨 가문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까지는 「여조두문72인」에서 우현보(禹玄寶)를 대표 인물로 선정하였기 
때문에 그 자료의 성격 규정을 우현보를 중심으로 살핀 경향이 있다. 즉, 영조
대 집권세력인 노론들은 조선왕조의 정통성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역성혁명의 
정당성과 성리학의 근본이념인 의리명분론을 지킨 고려의 여러 신하들도 인정
하여야 하는 양면성을 우현보에서 찾았다는 견해가 있다. 노론계열의 입장에 
역성혁명 자체를 중요한 정치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현보는 
정몽주와 함께 공양왕대 혁명파 사대부들인 정도전, 조준 등과 대립적인 관계
84) 이행의 진출에는 태종이 절의를 바친 신료를 등용하는 분위기뿐만 아니라, 이행의 족
당 성석연(成石珚)의 형제들인 성석린(成石璘), 성석용(成石瑢)이나 권근이 이미 출사
해 있었던 것도 영향이 있었다(류주희, 앞의 논문).‘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83
였으며 손자 우성범(禹成範)으로 인해 절의파 사대부로 몰려 이색과 함께 폐
서인되었다. 그러나 정몽주와 달리 2차 왕자의 난에서 좌주로서 태종 이방원
을 도왔다. 이는 조선후기 영조대 노론계열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에 대한 절의
를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왕조의 정통성도 인정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었
다.85) 다만 우현보는 고려 말 이성계파의 공격대상자로서 조선에서 벼슬한 인
물 53명 중 한 명인데, 유일하게 두문동 72현에 포함되었다.86) 그렇다면 우현
보가 두문동 72현에 포함된 것이, 노론의 입장대로 성리학적 의리명분론과 조
선건국의 정당성을 아울러 겸비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우
현보의 정치적 선택과 조선 건국세력의 수용이라는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른 
반대급부 혹은 우현보 후손이 조선사회에서 차지한 정치적 위상에 따른 투쟁
의 산물이 아닌지 고려해볼 필요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전고대방󰡕의 「여조두문72인」에 실린 ‘두문동 72현’에 신
안(申安), 신석(申釋), 신자옥(申自獄), 신이(申彛) 등 평산신씨 인물이 4명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총 72명 밀양박씨 3명, 개성고씨 2명, 
옹진이씨 2명, 이천서씨 2명, 고령신씨 2명을 제외하면 57명은 각각 단일 성
씨이다. 그렇다면 평산신씨가 4명씩 들어간 점은 특이해 보인다. 게다가 󰡔기우
집󰡕의 「두문동72현록」에 실린 ‘두문동 72현’에는 평산신씨가 한 명도 없다. 또
한 󰡔화해사전󰡕의 「언지록」에는 신안(申安)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석, 신자
옥, 신이 등은 󰡔전고대방󰡕의 「여조두문동72인」에 새롭게 포함되었다. 그렇다
면 󰡔전고대방󰡕의 「여조두문72인」을 작성하는 데에는 평산신씨의 영향력이 행
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고대방󰡕의 「여조두문72인」은 󰡔화해사전󰡕의 「언지
록」에서 가져왔다는데, 󰡔화해사전󰡕은 고려말 불의재(不誼齋) 신현(申賢)과 그
의 자손에 관한 글을 모아 놓은 것으로 철종 11년(1860) 그들의 후손인 평산
85) 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39∼40쪽.
86) 우현보는 고려 말 이성계파의 공격대상자로서 조선에서 벼슬한 인물 53명 중 한명인데
[김당택(2011), 「고려말 이성계의 정적」, 󰡔한국중세사연구󰡕 31, 435∼436쪽], 유일하게 
󰡔전고대방󰡕의 「여조두문동72인」에 기록된 ‘두문동 72현’에 포함되었다. 184 호남학 제68집
신씨 가문에서 간행하였다. 그런데 신현의 행적을 기록한 문집이 원천석의 집
안에서 보관되어 왔다고 한다. 신현은 우탁(禹倬)의 제자이며, 신현의 아들 신
용희(申用羲)는 원천석의 스승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원천석은 스승인 신
용희의 아버지 신현의 행적을 기록하고 그 글을 자손들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
인다.87) 그렇다면 강호석은 1924년 󰡔전고대방󰡕을 간행하면서 「여조두문72인」
을 어떻게 구한 것이고, 그 명단은 어떻게 완성된 것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
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다만 󰡔전고대방󰡕의 「여조두문72인」은 󰡔화해사
전󰡕의 「언지록」을 인용하였다는 것만 확실하다. 이때 이미 죽었거나 시기적으
로 부적절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나 이름이 불문명한 정몽주, 이종학, 최해, 엄, 
장, 이 등 6명은 제외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로 이석지, 최문한, 신석, 신자
옥, 박의중, 이양소, 박태시, 이경, 맹호성, 길인적, 신이, 심 등 12명을 추가하
였다. 이때 평산신씨 가문 출신 3명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전고대방󰡕
의 「여조두문72인」은 󰡔화해사전󰡕의 「언지록」을 인용하였고, 󰡔화해사전󰡕은 평
산신씨 가문에서 제작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여조두문
동72인」에 우현보가 대표인물로 포함되어 있어서 노론계열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견해와 달리 평산신씨 가문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정몽주는 󰡔화해사전󰡕에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인정받고서
도 󰡔전고대방󰡕에서 두문동 72현으로 선정되지 못했으나, 󰡔기우집󰡕에서 절의
를 인정받고 ‘두문동 72현’에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현보는 󰡔기우집󰡕
에서 그 절의는 평가받았으나 ‘두문동 72현’에는 포함되지 못했고, 대신 󰡔화해
사전󰡕에서 절의를 인정받고 󰡔전고대방󰡕에서 ‘두문동 72현’으로 선정되었다.88)
󰡔기우집󰡕과 󰡔전고대방󰡕에서 정몽주와 우현보의 절의는 인정하면서도 각각의 
명단에서는 한쪽을 제외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두문동 72현’이 조선후기 
영조의 절의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필요성, 절의에 대한 인식과 입장 차이, 72
87) 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34쪽.
88) 김보정, 앞의 학위논문, 39∼40쪽.‘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85
현을 자료로 남긴 가문의 이해관계 등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89) 때문에 이들
이 고려에 절의를 지켰다고 평가받는 그 자체가 무의미해질 일은 아니다. 이에 
󰡔기우집󰡕과 󰡔전고대방󰡕의 ‘두문동 72현’ 명단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이
들 모두를 고려말 조선초 절의적 인물로 평가하고, 이들이 왜 당시 절의적 인
물로 표상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양한 방면에서 천착하는 것이 중
요할 것으로 판단된다.90)
Ⅳ. 맺음말
 본고에서는 여말선초 ‘절의’의 용례 검토를 통해, ‘절의지사’의 관념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절의를 상징하는 구체적 공간과 인물로서 소위 ‘두문동 
72현’이 어떻게 역사적 개념으로 정착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검토한 
바를 요약하여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절의(節義)’의 사전적 개념은 “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
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고려말 조선초 절의의 상징적 인물은 이색, 
길재, 정몽주 등이며, 이들을 흔히 ‘절의파’ 또는 ‘절의지사’라고 부른다. 그런
데 고려시대 절의의 용례를 살펴보면, 이런 뜻의 절의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
가 없었다. 고려시대 절의자는 주로 국왕의 진휼대상이었으며, 절의에 합당한 
행위는 배우자가 있는 부인이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경우를 
의미하였다. 이후 조선 태종대 권근이 태종의 입장을 반영하여 새로운 인재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절의있는 선비[節義之士]’를 추숭하기 시작했다. 태종
89) 김정자는 은거지의 지역적인 분포를 살펴보면 󰡔기우집󰡕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전라
도지역이 강세였고, 󰡔전고대방󰡕의 경우는 황해도지역이 강세였다고 보았다. 이는 두문
동 72현이 주자성리학자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은거지는 경제적 기반이 어느 정
도 축적된 곳이었을 것이며, 성리학의 향촌사회로의 확산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김정자(1998), 앞의 논문, 116∼117쪽].
90) 김보정도 앞의 학위논문(39∼40쪽)에서 같은 입장을 보였다.186 호남학 제68집
의 입장에서는 신왕조 개창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새
로운 인재가 필요하였다. 이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내세워 은둔해있는 전
왕조의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하여 그들을 ‘절의
지사’로 격상함으로써 출사의 명분을 제공해 준 것이다. 
 ‘두문동 72현’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
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72인의 고려 유신”이다. 두문동 72현이 세상
에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며 ‘역사화’ 된 것은 조선후기 영조 16년(1740) 국왕
의 명에 의하여 개경에 ‘부조현비(不朝峴碑)’가 세워지면서부터이다. ‘경신처
분’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된 영조와 노론세력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위배되는 
과거의 처사를 바로잡고 의리 명분을 강조함으로써 성리학적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두문동 72현을 고려를 위해 절의를 지킨 인물로 추앙하는 등 
역사적 재평가를 시도한 것이다. 72현이라는 숫자는 수많은 공자 제자 중에 
72현을 꼽듯이 조선건국을 반대한 수많은 고려 유학자 중 72현을 선정하여 그 
대표성을 부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명단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가문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72현의 명단에 넣으려고 노력의 결과 만들
어진 것으로 보인다. 
 두문동 72현의 명단과 관련해서는 󰡔철감록󰡕(1774)과 「부조현언지록」, 󰡔화
해사전󰡕(1860)과 「언지록」, 󰡔기우집󰡕(1872)과 「두문동칠십이현록」, 󰡔여조충
열록󰡕(1923), 󰡔전고대방󰡕(1924)과 「여조두문칠십이인」 등이 주목된다. 󰡔철감
록󰡕의 「부조현언지록」에 66명의 명단이 기록된 이후, 1872년 󰡔기우집󰡕의 「두
문동72현록」에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기우집󰡕의 편찬
자들은 왕조의 존폐 앞에서 목숨을 바쳐 의를 다한 정몽주를 대표적 인물로 
꼽았다. 그리고 조선개국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후일 출사한 자신의 선조들을 
절의적 인물로 표상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목적과 ‘경신처분’ 이후 정국을 주
도하게 된 영조의 입장과 일치된 것이다.
 󰡔전고대방󰡕의 「여조두문72인」은 󰡔화해사전󰡕의 「언지록」을 인용하였고, 󰡔화
해사전󰡕은 평산신씨 가문에서 제작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전고대방󰡕‘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87
의 「여조두문72인」에 실린 ‘두문동 72현’에 신안, 신석, 신자옥, 신이 등 평산
신씨 인물이 4명 포함되어 있다. 이로써 󰡔전고대방󰡕의 「여조두문72인」을 작성
하는 데에는 평산신씨의 영향력이 행사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두문동 72현’이 조선후기 영조의 절의에 대한 새
로운 차원의 필요성, 절의에 대한 인식과 입장 차이, 72현을 자료로 남긴 가문
의 이해관계 등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188 호남학 제68집
[별첨자료] 고려시대 절의 관련 용례 목록
왕대 용례 유형 비고
태조
(1) 19년 9월
王旣定三韓 欲勵臣子以節義 遂自製政誡一卷 誡百僚書八篇 頒中外
勵臣子以
節義禮節]
󰡔고려사절요󰡕 권1
王旣定三韓 欲使爲人臣子者 明於禮節 遂自製政誡一卷 誡百寮書八篇 頒
諸中外 󰡔고려사󰡕 권2
성종
(4)
成宗 ( )天資嚴正 器宇寬洪 立法定制 崇奬節義 求賢恤民 政治有可觀者 崇奬節義 󰡔고려사절요󰡕 권2
天文 ( 1, 月五星凌犯及星變) 成宗 8년 9월 甲午, 彗星見 赦 王責己修行 
養老弱恤孤寒 
進用勳舊 褒賞孝子節婦 放逋懸 
蠲欠負 節婦 󰡔고려사절요󰡕 권2
󰡔고려사󰡕 권47
9년 9월
敎曰 凡理國之本莫過於孝 遣使六道 頒示敎條 訪求孝子順孫義夫節婦
義夫節婦
󰡔고려사절요󰡕 권2
敎曰 凡理國家 必先務本 務本莫過於孝 …… 頃者 遣使六道 頒示敎條 恤老弱
之饑離 賑鰥孤於窘乏 求訪孝子順孫義夫節婦 󰡔고려사󰡕 권3
15년 8월 車盖幸東京 頒赦 …… 又收籍內外義夫節婦孝子順孫 旌表門閭 賜物段有
差[15년 8월은 16년 8월의 오기로 보임]
義夫節婦
󰡔보한집󰡕 권

16년 8월 
乙未, 幸東京 宴群臣 扈從臣僚軍士 賜物有差. 中外官各加勳階 義夫節婦
孝子順孫 旌門賜物 遂頒赦 󰡔고려사󰡕 권3
乙未, 幸東京 宴群臣 扈從臣僚軍士 賜物有差 中外官 各加勳階 奇材異能
隱滯丘園者 命有司 搜訪以聞 義夫節婦孝子順孫 旌門賜物 遂頒赦 󰡔고려사절요󰡕 권2
현종
(2)
5년 12월 丁巳, 赦流罪以下 減諸死罪杖流. …… 孝子順孫義夫節婦 量賜分物 義夫節婦 󰡔고려사󰡕 권4 
15년 6월 
(禮6, 흉례, 제신
上) 顯宗 15년 6월 平章事崔沆卒 王悼甚 …… 謚節義
謚節義
(節義公)
󰡔고려사󰡕 64
門下侍郞平章事崔沆卒 …… 諡節義 後配享王廟 󰡔고려사절요󰡕 권3
禮( 2, 吉禮대사, 태묘) 禘祫功臣配享於庭 …… 顯宗室 太師贈門下侍中

義公崔沆 󰡔고려사󰡕 권60‘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89
왕대 용례 유형 비고
정종
(1) 12년 9월 
즉위년 9월
親饗年八十以上有官人及百姓男女孝子順孫義夫節婦鰥寡孤獨篤
癈疾者於
毬庭 賜物有差 義夫節婦
󰡔고려사절요󰡕 권4
문종
(3)
己亥, 親饗年八十以上官員及百姓男女孝子順孫義夫節婦鰥寡孤獨廢疾於
毬庭 賜物有差 󰡔고려사󰡕 권7
3년 3월 
庚子, 饗八十以上國老 尙書右僕射崔輔成 司宰卿趙顒 太子詹事李澤成等
於閤門 王親臨賜酒 …… 翼日 饗庶老男女及義夫節婦孝子順孫鰥寡孤獨
廢疾于毬庭 賜物有差 義夫節婦
󰡔고려사󰡕 권7
饗庶老男女及義夫節婦孝子順孫鰥寡孤獨篤
癈疾于毬庭 分貴賤 設次於左
右同樂亭及廊下 賜物有差 󰡔고려사절요󰡕 권4
5년 8월 
辛丑, 親饗年八十以上僧俗男女一千三百四十三人 篤廢疾僧俗男女六百五
十三人孝子順孫節婦十四人于毬庭 賜物有差 節婦 󰡔고려사󰡕 권7
親饗年八十以上及篤
癈疾孝子順孫節婦于毬庭 賜物有差 󰡔고려사절요󰡕 권4
헌종
(1)
즉위년 11
월, 御神鳳樓 赦 饗年八十以上及篤
癈疾者義夫節婦孝子順孫鰥寡孤獨 賜
物有差 義夫節婦 󰡔고려사절요󰡕 권6
예종
(5)
원년 9월 
庚子, 親饗年八十以上男女 義夫節婦孝子順孫鰥寡孤獨篤
癈疾者于闕庭 賜
物有差 義夫節婦 󰡔고려사󰡕 권12
親饗年八十以上及義夫節婦孝子順孫鰥寡孤獨篤
癈疾者 闕庭 賜物有差 󰡔고려사절요󰡕 권7
3년 2월 辛卯, 御神鳳樓 肆赦曰 …… 民年八十以上 及孝子順孫義夫節婦鰥寡孤獨篤廢
疾者 賜設分物 義夫節婦 󰡔고려사󰡕 권12
6년 
(춘)정월
丙寅, 御乾德殿 頒德音 犯斬絞者免刑流配 流以下
並赦之 中外老人 及鰥寡
孤獨節義孝順者賜酒食 幷賜物有差 節義 󰡔고려사󰡕 권13
赦 賜中外老人及鰥寡孤獨節義孝順酒食 幷賜物有差 󰡔고려사절요󰡕 권7190 호남학 제68집 왕대 용례 유형 비고 예종(5)
6년 3월 癸未, 饗庶老及節義孝順男女于宮庭 節義 󰡔고려사󰡕 권13 饗庶老及節義孝順男女于宮庭 󰡔고려사절요󰡕 권7
17년 11월 親饗年八十以上男女及義夫節婦篤疾
癈疾于闕庭 賜物有差
義夫節婦
󰡔고려사절요󰡕 권8
인종
(10)
즉위년
11월 丙子, 親饗年八十以上男女 及義夫節婦篤廢疾于闕庭 賜物有差 󰡔고려사󰡕 권15
2년 8월
庚午, 御神鳳樓 大赦 敎曰 …… 宜以餘恩推及內外 斬絞二罪以下咸赦除
之 望秩山川 饗老人及篤廢疾鰥寡孤獨義夫節婦 賜物有差 義夫節婦 󰡔고려사󰡕 권15
御神鳳樓, 大赦, 敎曰 …… 饗老人及篤
癈疾鰥寡孤獨義夫節婦 賜物有差 󰡔고려사절요󰡕 권9
(열전11, 金縝傳) [4년 4월], (金縝)使從者閉戶 逮火而死 年五十六 亂定 嘉其節義 贈謚
烈直 賜子壻爵一級 嘉其節義 󰡔고려사󰡕 권98
4년 윤11월 壬辰, 饗年八十以上及鰥寡孤獨孝順節義者 賜物有差 節義者 󰡔고려사󰡕 권15 赦 饗年八十以上及鰥寡孤獨孝順節義者 賜物有差 󰡔고려사절요󰡕 권9
6년 4월 
乙卯, 詔曰 比來天文有變 時令不調 冀推恩而寬刑 或調氣而消
灾. 宜令有
司慮囚 赦二罪以下望祀國內山川 饗耆老及篤廢疾節義孝順鰥寡孤獨 賜物
有差 節義
󰡔고려사󰡕 권15
詔曰 比來 天文有變 時令不調 宜令有司慮囚 赦二罪以下 
望祀國內山川 
饗耆老及篤

疾節義孝順鰥寡孤獨 賜物有差 󰡔고려사절요󰡕 권9
7년 3월 
庚寅, 西京及所過州縣 耆老孝順節義鰥寡孤獨篤廢疾者 賜酒食 仍賜物
有差 節義
󰡔고려사󰡕 권16
至自西京 赦 賜所過州縣耆老孝順節義鰥寡孤獨篤
癈疾者酒食 
又賜物有差 
免今年租稅 󰡔고려사절요󰡕‘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91
왕대 용례 유형 비고
인종
(10)
8년 10월 
壬申, 饗耆年及孝順節義鰥寡孤獨篤
癈疾 賜物有差
節義
󰡔고려사󰡕 권16
王至自西京 赦 
蠲所歷州縣今年租稅 饗耆年及孝順節義鰥寡孤獨
癈篤疾 賜
物有差 󰡔고려사절요󰡕 권9
11년 5월 乙丑, 詔曰 …… 其有淸白奉公 節義殊異者 宜各褒擧 節義 殊異者
󰡔고려사󰡕 권16
詔曰 …… 其有淸白奉公 節義殊異者 宜各褒擧 󰡔고려사절요󰡕 권10
11년 10월 丙午, 親饗年八十以上老人 及孝順節義鰥寡孤獨篤廢疾者 賜物有差 節義 󰡔고려사󰡕 권16 親饗年八十以上老人 及孝順節義鰥寡孤獨篤
癈疾者 賜物有差 󰡔고려사절요󰡕 권10
17년 11월 癸未, 親享耆老及孝順節義

癈疾者 節義 󰡔고려사󰡕 권17 親饗耆老及孝順節義篤廢疾者 󰡔고려사절요󰡕 권10
의종
(1)
21년 9월 乙亥, 王還京都 赦二罪以下 詔加名山大川爵號. 內外八十以上 篤廢疾鰥寡孤
獨孝順節義孝弟力田者 皆賜物 節義 󰡔고려사󰡕 권18
희종
(1) 4년 10월 乙亥, 饗國老・庶老・孝順・節義 王親侑之 節義 󰡔고려사󰡕 권21 親饗國老庶老孝順義節. 又大
酺鰥寡孤獨篤
癈疾 賜物有差 義節 󰡔고려사절요󰡕 권14
고종
(1) 11년 10월 己亥, 饗國老庶老孝子順孫義夫節婦 義夫節婦 󰡔고려사󰡕 권22 饗國老庶老孝子順孫義夫節婦鰥寡孤獨篤
癈疾 賜物有差 󰡔고려사절요󰡕 권15
원종
(2)
원년 6월 
丁酉朔, 下制 肆赦 
蠲丁巳年以上公私逋租. 年八十以上 及鰥寡孤獨篤疾癈疾
者 各給奉養一人 孝子順孫義夫節婦 旌表其門 義夫節婦
󰡔고려사󰡕 권25
下制 肆赦 
蠲逋租 年八十以上及鰥寡孤獨篤
癈疾者 各給奉養一人 孝子順
義夫節婦 旌表其門 󰡔고려사절요󰡕 권18
12년 10월 
丁酉, 赦曰 …… 將軍玄文奕妻直學鄭文鑑妻投水而死 不爲賊所汚 節義可
尙 加封贈 官其子孫 節義可尙
󰡔고려사󰡕 권27
赦 …… 將軍玄文奕妻直學鄭文鑑妻投水而死 不爲賊所汚 節義可尙 加封
贈 官其子孫 󰡔고려사절요󰡕 권19192 호남학 제68

왕대 용례 유형 비고
충렬∼
충숙왕(1) (열전17, 羅益禧傳) 幼習武藝 不暇讀書 而性耿介 慕節義 恥與人爭 慕節義 󰡔고려사󰡕 권104
공민왕
(7)
(열전24, 李子松傳) 唯(李)子松・淳・黃大豆等 匿不從 久居燕 錢粮匱竭 終始不貳 旣還 
王嘉其節義 各賜米豆三十碩 嘉其節義 󰡔고려사󰡕 권111
(열전25, 李仁復傳) 元下詔赦誅奇氏及犯邊之罪 當遣使謝王以(李)仁復知大體守節義, 
遣之
知大體
守節義
󰡔고려사󰡕 권112
(열전38, 李春富傳) 8년 (李)春富無才望 以柔順謟事旽 又務迎合王心 遂拜侍中 賜忠勤
節義同德贊化功臣號
忠勤節義同德
贊化
󰡔고려사󰡕 권125
9년 3월 壬子, 安祐推忠節義定亂功臣中書平章政事 推忠節義 定亂功臣 󰡔고려사󰡕 권39
(열전35, 申少鳳傳) (공민왕 16년) 賜忠勤節義翊衛功臣號 忠勤節義翊衛 󰡔고려사󰡕 권122
18년 3월 甲寅, 遣同知密直司事王重貴如元賀聖節 又謝恩表曰 …… 臣敢不誓節義 金
石之堅 惟一終始 不誓節義 󰡔고려사󰡕 권41
(열전25, 柳淑傳) 賜忠勤節義贊化功臣號 忠勤節義贊化 󰡔고려사󰡕 권112
우왕
(2)
11년 9월, 倬加以忠臣烈士孝子順孫義夫節婦使幷祭之 義夫節婦 󰡔고려사절요󰡕 권32
(열전33, 尹紹宗傳) 上䟽曰 …… 反正之初 宜崇節義 戒貪邪 一新士習 宜崇節義 󰡔고려사󰡕 권120
공양왕
(1) (열전28, 禹玄寶傳) (공양왕 4년 6월) 禹玄寶素無節義 阿世取容 位至宰相 素無節義 󰡔고려사󰡕 권115
미상
(2)
謝右拾遺知制誥表 朴浩 …… 如臣者 識媿淹通 智慙宏遠 曾御簾而忝第 獲仕綴以繫蹤 
而自兩倅左符 再塵右職. 庶不渝於節義 迷有傲於物情 遂令事與志違 邈先年老 …… 不渝於節義 󰡔東人之文四六󰡕 권11 表
謝金侍郞薦擧啓 …… 其節義之彌堅也 玲玲瓏瓏如珠如玉 …… 節義 󰡔東人之文四六󰡕 권14 啓‘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93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도경󰡕, 󰡔파한집󰡕, 󰡔보한집󰡕, 󰡔고려묘지명집성󰡕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동문선󰡕, 󰡔松都志󰡕
󰡔掇感錄󰡕(「不朝峴言志綠」), 󰡔華海師全󰡕(「言志錄」), 󰡔騎牛集󰡕(「不朝峴言志錄」, 「杜
門洞七十二賢錄」), 󰡔麗朝忠㤠錄󰡕, 󰡔典故大方󰡕(「麗朝杜門七十二人」)
󰡔사기󰡕,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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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I : G704-001747.2012..25.008
투고일자: 2020. 11. 27. 심사일자: 2020. 12. 3.∼2020. 12. 11. 게재확정일자: 2020. 12. 15.‘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195

 

|국문초록|
‘節義’와 ‘節義之士’ 그리고 ‘杜門洞 72현’


 ‘절의(節義)’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
야 할 도리”를 뜻한다. 고려말 조선초 절의의 상징적 인물은 이색, 길재, 정몽
주 등이며, 이들을 ‘절의지사(節義之士)’라고 부른다. 그런데 고려시대 ‘절의’
의 용례를 살펴보면, 이런 뜻으로 사용된 경우를 찾을 수 없다. 고려시대 ‘절의
자’는 ‘절부(節婦)’와 ‘의부(義夫)’의 합성어로서, 국왕의 진휼 대상이었다. ‘절
의지사’는 조선 초 권근이 태종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여 새로운 인재 등용을 
위해 ‘절의있는 선비’를 추숭하면서부터 등장한다. 당시 태종의 입장에서는 신
왕조 개창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새로운 인재가 필요
하였다. 이에 ‘불사이군’을 내세워 은둔해 있던 고려왕조의 신료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하여 그들을 ‘절의지사’로 격상함으로써 괸직에 진출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두문동 72현’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충절을 지킨 72인의 고려 유신”을 뜻한다. 두문동 72현이 세상에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며 ‘역사화’ 된 것은 조선후기 영조 16년(1740)이다. 이때 ‘경신
처분’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된 영조가 ‘의리명분’을 강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방편으로 ‘두문동 72현’을 ‘절의를 지킨 인물’로 추앙하
면서 역사적 존재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72현’은 ‘공자 제자 72현’처럼 상징적
인 것이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명단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조선 후기
에 이르러 자신의 조상을 72현의 명단에 넣으려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
졌다. ‘두문동 72현’의 명단과 관련해서 다양한 문헌 자료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선조를 ‘절의지사’로 추앙함으로써 현실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당파, 가문, 후손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다. 
주제어 : 절의, 절의지사, 두문동 72현, 태종, 권근, 정몽주, 길재, 영조, 우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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