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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征頌◑
皇帝御天下 황제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神功超妨勳 신공은 帝堯(방훈)보다 뛰어났네
德寬包有截 너그러운 덕 단절(斷折)도 포용하고
澤廣被無圻 넓은 은택 경계 없이 입히네
車共千途轍 수레는 천도의 바퀴와 함께 했고
書同九域文 글은 구성의 문장을 같이 했네
唯殘島夷醜 오직 추한 섬 오랑캐가 남아서
假息鼎魚羣 잠시 솥 안의 고기처럼 살았네
但恃滄溟隔 단지 푸른 바다가 사이에 있는 것만 믿고
仍圖疆場分 영토 나누기를 도모했다
苞茅曾不入 포모(苞茅)는 일찍 들어오지 않았고
班瑞亦無聞 반서 또한 들어본 적 없네
帝乃赫斯怒 황제가 이에 노하여
時乎命我君 그 때에 우리 임금에게 명령했네
一千龍鵲舸 천척의 용작(군함)의 배와
十萬虎貔軍 십만의 호비군으로
問罪扶桑野 부상(일본)의 들에게 문죄하고
興師合浦濆 합포(마산)의 물가에서 군사를 일으켰네
鼓鼙轟巨浸 북소리 큰 바다를 진동시키고
旌施拂長雲 깃발은 먼 구름을 떨쳤다오
驍將皆趨死 용감한 장수들은 모두 죽음을 맹세하고
英雄競立勳 영웅들은 공훈을 다투었네
江思韓信背 강가에서 한신의 배수진을 생각하고
舟欲孟明焚 배에서는 맹명같이 화공하려 했네
係越奚專美 월나라 없앤 것만 어찌 훌륭한가
平吳不足云 오나라 평정은 만족하지 않으랴?
斫營應瞬息 순식간에 군영을 파괴하니
獻捷在朝曛 승첩은 아침저녁에 달려 있네
玉帛爭修貢 옥백으로 다투어 조공하고
干戈盡解紛 간과로 분쟁을 모두 해결했네
元戎錫圭卣 원융은 보물과 술통을 받고
戰卒返耕耘 병졸은 전묘로 돌아가네
快劒匣三尺 삼척의 날랜 칼은 칼집으로
良弓櫜百斤 백근의 좋은 활은 활집으로
四方家浩浩 사방엔 노래 소리 널리 퍼지고
八表樂欣欣 팔표엔 즐거움이 충만하네
烽燧收邊警 변경에서 봉수는 걷히고
風塵絶塞氣 변방엔 바람과 먼지가 끊겼네
當觀聖天子 성스런 천자를 보라
萬歲奏南薰 만세토록 남훈 태평가를 아뢰리
“쌍성총관부의 설치 경위와 위치 추정”=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의 허(虛)와 실(實)=윤여동설 - 원나라가 고려 땅에 설치했던 쌍성총관부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tistory.com)
몽고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경위를 살펴보면 `어부지리`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몽고는 고려 영토인 화주에 와서 가만히 주둔 만 하고 있었는데 고려의 반역자들이 고려 땅을 가지고 투항한 것입니다. 지레 겁먹었는지 아니면 고려 조정에 환멸을 느꼈는지 혹은 어떤 이득 때문에 투항했는지 모르겠지만 몽고의 입장으로는 거져 먹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고려사>고종 45 년(1258년) 12 월에 몽고의 산길대왕 普只官人이 군사를 거느리고 옛 화주和州에 와서 주둔하자, 고주.화주和州.정주定州.장주.의주宜州.문주 등 15 주의 사람들이 저도楮島에 들어가 지키다가 죽도로 옮겨 지켰다. 용진사람 조휘와 정주定州사람 탁청이 삭방 여러 성 사람과 함께 몽고를 끌어들여 빈틈을 타서 병마사 愼執平과 登州부사 박인기 和州부사 김선보를 죽이고 和州 이북 땅을 몽고에 바쳤다.
몽고는 쌍성총관부를 和州에 두고 조휘를 총관, 탁청으로 천호를 삼았다.
- <아방강역고> 정약용 지음 장지연 편저 이민수 옮김 360 쪽 2004 범우사 ,이하 <강역고>와 쪽수만 표시합니다.
위 기록은 몽고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경위와 위치 등이 비교적 자세히 설명된 것인데, 쌍성총관부가 있던 화주와 그 이북 지역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흡사한 일이 과거에도 수차례 있었습니다.
<고려사>명종 5 년(1175) 10 월 서경유수 조위총이 사신을 보내서 금에 소속되기를 청하자 금의 임금이 잡아 죽였다.
<금사> 세기대정 15 년(1175) 9 월 서경유수 조위총이 임금을 배반하고 자비령 서쪽과 압록강 동쪽 40 여 성을 이끌고 와서 소속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윤월에 고려왕이 아뢰어 조위총은 죽임을 당했다.
- 강역고 402<고려사>고종 7 년(1220) 2 월에 한순.다지 등이 의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청천강을 경계로 동진에 투항하여 금의 원수 우가하를 의주에 주둔케 하여 여러 성들을 거느리게 했으며...
- 강역고 407<고려사>고종 18 년(1231)에 몽고의 살례탑이 와서 침범하자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이 군전에 나와서 항복했고, 몽고 군사가 함신진을 포위하자 지키던 장수 조숙창이 항복했다. 이에 드디어 삭주.선덕진에 글을 보내 타일러 항복하게 했다.
<원사> 지리지원나라가 요동을 처음 평정하자, 고려국 인주의 신위도령 홍복원이 서경도호, 귀주의 40 여 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이에 진수사를 각각 세우고 관청을 설치하여 그 백성을 다스리더니, 뒤에 고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홍복원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소속 되었다. 이에 고려의 군민만호를 제수하여 항복한 백성을 옮겨서 요양.심주에 흩어져 살게 하고, 요양의 옛 성을 다스리게 했다.- 강역고 408~410
고려인들이 적국에 항복하는 정황을 변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굳이 그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고려 조정이 무신들이 정권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였다고 봅니다.
1170년 정중부로 부터 시작한 무신들의 정권은 1273 년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게 제주도에서 삼별초를 이끌던 김통정이 살해되고 1300 여명이 투항하는 것을 끝으로 무려 104 년에 이르렀습니다.
1258년 몽고에 투항한 조휘나 탁청의 경우, 당시 최의가 집권하였지만 몽고군이 수시로 침입함에도 백성들을 몰고 섬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뚜렷한 대항을 하지 못하는 고려 조정에 환멸을 느꼈을 법도 합니다. 차라리 병마사 신집평, 등주.화주 부사 등과 힘을 합쳐 몽고와 대항할 것이지 하는 부질없는 기대를 해 봅니다.
하지만 옛 일을 기록만 가지고 실상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지요.
한편 총관부가 설치되기 약 220 여년 전에 고려에서는 천리장성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장성의 동쪽 끝이 총관부가 설치된 화주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려사> 兵志덕종 2 년(1033)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북쪽 경계에 관방을 새로 만드는데 서해 물가의 고국내성(古國內城) 경계인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간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흥화.정주靜州.영해.영덕.영삭.운주.안수.청새.평노.영원.정융.맹주.삭주의 14 성을 지나고 , 요덕.정변.화주和州의 세 성에 다달아서 동쪽으로 바다에 닿은 것이 연해지고 뻗치기 1000 여리에 돌로 성을 쌓았다.
그리고 다산은 <아방강역고> 북로연혁고에서, 고려는 덕종 2 년(1033)에 천리에 걸친 장성을 쌓았는데, 서쪽 의주에서 시작하여 가운데로 영원의 군계를 지나고, 지금의 영흥 요덕진.정병진을 거쳐 도련포에 닿았으니, 이는 유소가 쌓은 것이다. 700 리 장성은 이것 말고 따로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라고 합니다.
위의 붉은 글씨 부분을 보면 고려는 천리장성을 지금의 압록강 의주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동해 가까이 있는 지금의 원산 북쪽에 있는 영흥 부근까지 쌓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결정적으로는 <고려사> 병지에서 천리장성이 요덕.정변.화주의 세성에 다달아서 동쪽 바다에 닿았다는 기록과 쌍성총관부를 화주(지금의 금야읍)에 설치하였다는 기록과 연계되어 동해안 가인 지금의 원산 부근인 영흥을 화주라 비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고려가 쌓은 천리장성의 서쪽 시작점인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간 옛 국내성 경계 혹은 의주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적을 방어하기 쉬운 압록강을 나두고 왜 개마고원 남쪽을 가로질러 동해안까지 쌓았을까하는 점입니다.
당시 고려의 북쪽에 있었던 적이란 거란과 여진이였습니다. 거란과 여진은 고려의 북쪽에서 동.서로 위치하였고 그 경계선은 대략 장백산맥이였습니다. 장백산맥의 서남쪽 지역이 거란의 근거지였으며 장백산맥의 동북쪽은 옛 숙신.읍루.물길.말갈의 후예인 여진의 세력지였습니다.
그러한 거란과 여진의 세력 분포지를 참고한다면 여진이 세력을 확대하여 남쪽으로 한반도 원산 부근까지 진출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는 있겠습니다. 과연 그러한 상황때문에 고려에서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여 백두대간을 가로 질러가면서까지 천리장성을 쌓았을까요?
또 하나의 의문은 몽고는 왜 압록강 하류를 나두고 굳이 동해안 가인 화주(지금의 금야읍)에 총관부를 두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다산의 말로 보아서 후조선 후기까지도 고려의 장성은 유일하게 유소가 쌓은 천리장성 하나였다는 것인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의 기록이 아닌 상대방의 기록은 어떨까요?
몽고가 쌍성총관부를 화주에 설치할 때 조휘 등의 반역자가 같이 헌납한 定州에 대하여 설명을 한 청나라시대 지리지인 <대청일통지>를 보겠습니다.
정주성定州城은 평양 서북쪽 300 여리에 있는데 고려가 설치한 것이다. 정동현을 다스리고, 요나라가 취해서 그대로 정주라 하더니, 후에 고려로 들어가서 지금에 그대로 정주가 되었는데, 서남쪽은 의주와 경계가 접해있다. - 강역고 395
위 기록도 정주가 지금의 평양성 서북쪽 300 여리에 있고 서남쪽으로 의주와 경계가 접한다고 하니, 영락없이 지금의 압록강 하류 남쪽 부근으로 추정(의주)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상대편의 기록에도 역시 뾰죽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도 동해안 원산 보다는 압록강 변 정주나 의주에 세우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지 않았을까요? 요양과 고려의 개경 사이인 정주나 의주보다 적절한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시기를 조금 건너 뛰어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는 상황을 보겠습니다.
무신 정권 100 여년을 보내고 이어서 몽고의 압제 또 100 년 가까이 이르는 시기를 지낸 후 몽고의 쇠퇴기를 맞아 고려는 북쪽의 영역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을 시작합니다.
<고려사> 지리지공민왕 5 년(1356년)에 추밀부사 유인우를 보내 쌍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지도를 살펴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豫州.문주文州.고주高州.의주義州와 선덕진.원흥진.영인진.요덕진.정변진을 수복했다. 전에 삭방도가 도련포를 경계로 하여 장성을 쌓고 세 관문을 설치했다가 원나라에 들어간 지 99년 만에 비로소 수복했다. 이수산을 도순무사로 삼아 영토를 획정하고 다시 동북면이라고 이름했으니, 비록 이름은 같지 않으나 고려 초년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진 남쪽, 삼척 북쪽을 동계라고 했다.
또 함주는 원나라에서는 합난부라고 했는데 공민왕 5 년에 수복했고, 길주는 원나라에서는 해양이라고 했는데 공민왕 5 년에 수복했다. 복주는 원나라에서 독로올이라 했는데 공민왕 때에 수복했고, 북청주는 원나라에서 삼살이라고 했는데 공민왕 5 년에 수복했다.... - 강역고 362 쪽
공민왕 초에 99 년 전에 잃었던 화주의 쌍성을 비롯하여 정주.의주 등과 함주를 비롯하여 길주.복주 등 약 250여년 전에 윤관이 여진을 공략하고 얻은 9 성 일부 지역까지도 회복하였다는 기록입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위 기록을 아무리 유심히 살펴도 한반도 북쪽 경계인 압록강 부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쌍성총관부가 한반도 동해안 원산 부근에 설치되었다는 학계의 정설을 믿어야 할까요?
하지만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 전에 위에 언급된 모든 지명이 과연 현재의 압록강 주위에 있었는지와 도련포가 동해안 원산 부근이였는지 철저한 검토를 해야 합니다.
위에서 <대청일통지> 정주 기록 만을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이러한 단편적이고 맥빠진 글들이 <아방강역고>도처에 횡행합니다. 조금 더 직설적이고 핵심을 파고든 인용문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다산의 역사지리 한계인지 혹은 조작의 결과인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우선 정주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들자면 <고려사>에,고려 예종 2 년(1107) 윤관이 부원수 오연총.중군 좌복야 김한충.좌군 좌상시 문관 등과 함께 12 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기 위하여 집결했던 곳이 바로 정주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윤관은 5 만여 명을 거느리고 정주 태화문을 나서고 문관은 3 만여 명을 이끌고 선덕진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여진을 토벌하고 윤관이 쌓은 영주.웅주.복주.길주의 성과 공험.통태.선화.숭녕.진양의 진 등 9 성 중에 공험진이나 길주의 추정 위치는 지금의 원산보다 훨씬 북쪽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희생을 치루고 얻은 윤관의 9 성은 이듬해에 여진에게 반환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033 년에 유소가 쌓은 천리장성 북쪽 지역에서 윤관이 여진을 물리치고 9 성을 쌓은 것이고, 9 성 지역이 여진에게 다시 귀속된 후 대략 150 여년이 지나고 몽고가 9 성 지역의 여진을 깨트려 물리치고 동해안 원산 지역에 총관부를 설치한 것이라고 일단 이해해 보겠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몽고족 원이 그곳에 설치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요?
평양 서북쪽 300 리에 있는 정주나 정주 서남쪽에 있는 의주를 마다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편 위 기록에서 공험진 남쪽에서 삼척 북쪽 지역을 동계 혹은 동북면이라 한 것이 약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는데, 아마도 윤관의 9 성 중에서 공험진 이동 이남 지역으로부터 삼척 이북 사이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먼저 단정적 결론을 내리자면 위에서 동계 혹은 동북면 그리고 삼척이라는 방향성 지명 때문에 지금의 동해안 삼척이나 함경북도 지역을 연상한다면 그것은 성급한 판단이라 봅니다.
다산은 후조선의 북쪽 영토를 북로北路와 서북로西北路로 분류하였는 바, 위 <고려사> 지리지에서 동북면이라 한 지역은 후조선의 북로 지역에 포함된 것으로, 서북로에 비하여 동북쪽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치는 아마도 앞 글 그림지도의 고려 천리 장성 동쪽 끝 지역에 있었을 것이며, 삼척의 위치도 지금의 동해안 위치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화주 쌍성이 동해안 가의 원산 부근이 아니듯이 삼척 또한 그 동해안 가 지명일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서서히 드러날 것입니다.
한편 위 9 성의 명칭은 다산의 설명이고 <고려사> 윤관전에는, 윤관이 다시 영주.복주.웅주.길주.함주咸州와 공험진에 성을 쌓고 공험진에 비석을 세워서 경계로 삼았다. 고도 하여 함주가 추기되어 있습니다. 다산의 설명보단 고려 정사를 신뢰할 수 있기에 윤관 열전에 언급된 함주가 의미있다 생각합니다.
조금 불분명한 기록으로 보이지만 영주기英州記- 강역고 340 쪽에는 여진은 그 땅이 사방 300 리다. 동쪽은 큰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끼였으며, 남쪽은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의 두 주에 접해있다. 산천이 수려하고 땅이 기름지니, 본래 옛 고구려 땅이다. 새로 6 성을 쌓았는데, 첫째는 진동군 함주대도독부요, 둘째는 안령군 영주방어사요, 셋째는 영해군 웅주방어사요, 넷째는 길주방어사요, 다섯째는 복주방어사요, 여섯째는 공험진방어사이다. 또 의주宜州와 통태.평융의 두 진에 성을 쌓으니, 함주.영주.웅주.길주.복주.의주 및 공험진과 더불어 북계 9 성이었다. 모두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옮겨다 채웠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주는 분명히 윤관 9 성 중의 하나이며 대도독부라 한 것을 보면 여타 8 성의 본부 격이였나 봅니다.
그런데 이 함주가 천리장성의 동쪽 끝인 화주와 나란히 언급된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추정했다시피 윤관은 천리장성 북쪽에서 여진을 몰아냈기 때문에 천리장성 동쪽 끝 지명과 나란히 언급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함주가 한반도 동해안 원산 북쪽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큼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우왕 14 년(1388년)에 설장수가 경사에서 돌아와 황제의 뜻이라며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소속되었던 땅이니 모두 요동에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명나라가 철령위를 세우려 하자 왕은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 표문을 올려 `철령 이북은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에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본국 땅이였는데, 지원 초년(1258~ )에 몽고의 산길대왕 보지관인 등이 여진을 거두어 붙일 때에 본국의 반역한 백성 조휘.탁청 등이 화주 이북 땅을 가지고 맞아서 항복했습니다. 금나라 요동의 함주로 부근 심주瀋州에 쌍성현이 있고, 본국의 함주 근처 화주和州에 옛날에 쌓은 조그만 성 두개가 있는데, 불분명하게 주청했기 때문에 화주和州를 쌍성이라고 함부로 부른 것입니다. - 강역고 366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일까요?철령과 요동이 왜 여기에 언급이 될까요?
또 고려에서 올린 표문으로 보아 철령의 북쪽에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그리고 공험진 등이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금까지의 한국통설은 한반도 동해안 원산 북쪽인 영흥이 화주였었다고 하여 그렇다면 화주 북쪽으로 함경도 지역에 함주.길주.북청 등과 두만강 남.북에 각각 공험진 등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는데 갑자기 철령이 등장하고 또 철령 이북에 있다니요?
위 기록을 토대로 대략적인 위치를 조정해 보자면, 아마도 철령 남쪽으로는 함주.화주.정주 등이 있고 북쪽으로는 문주.고주.공험진 등이 있다는 소리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금나라 요동의 심주에 쌍성이 있었으며 그 부근이 금나라 함주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의 함주는 쌍성총관부가 있는 화주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금나라 함주로 심주 쌍성현과 혼동하였다는 소리인가 봅니다. 즉 함주와 쌍성이 고려와 금국에 각각 있었는데 이것을 혼동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명나라 주원장은 고려가 요동에 있는 심주의 쌍성을 달라고 하는 줄 알았나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리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아 보입니다.
우선 요동의 철령과 심주 쌍성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 고려의 함주가 금의 함주로 심주 쌍성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조금 더 명확한 자료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또 불분명하게 주청하게 된 사유가 무엇이였는지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어쨋든 윤관이 세운 진동군 함주대도독부 그리고 고려의 화주 쌍성총관부가 한반도 동해안 원산 부근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심주 근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기록입니다.
사실 철령은 한반도 북계인 압록강과 두만강에서도 한참 북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요동과 심주마저도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압록강.의주.정주 그리고 동해안 원산 부근일 것이라는 화주, 그 북쪽의 함주.길주 등등 보다 훨씬 북쪽에 있으며 같이 언급될 지명과 지역이 아닙니다.
도대체 명나라 주원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사실 돌이켜보면 의문스러운 것은 철령.요동.심주 뿐이 아닙니다. 철령보다 더 북쪽에 있는 장춘이 이미 등장했었습니다. 너무 동떨어진 지명이였기에 관련지어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풍대08블로그임다 (daum.net)=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의 허(虛)와 실(實)=
명색이 사학계가 공인하고 있는 함경도에 원나라가 세웠다는 쌍성총관부가 고려사연표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나라는 1258년 철령북부에 쌍성총관부를 세운 3년후 요양으로 남하하여 1261년 요양(遼陽)의 고성(故城)을 수리하고,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摠管府)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요동에 있던 고려땅을 침략하여 그땅에 살던 고려민을 달래기 위한 총관부를 둔것입니다. 그리고 누차에 걸쳐 <<원사>>는 원나라 쌍성총관부가 요동에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도 막무가내로 함경도설을 고집하는 태도는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원나라는 10여차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하여 서기 1273년 제주도에 그들의 다루가치총관부(탐라총관부)를 두었던 기록까지 있지만 함경도의 쌍성총관부 기록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단 한국사 연표를 다루고 있는 엔싸이버 두산 세계대백과에서는 1258년 영흥에 쌍성총관부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258년 : [고종 45년] 3월, 유경(柳璥)·김준(金俊), 최의를 죽임 : 최씨 정권이 끝나고 왕정이 복고됨. 12월, 몽고, 영흥에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
***<<고려사>>권137 신우 5 창(昌)에는 함경도의 쌍성은 위칭(胃稱)즉 사칭이라는 기록이 상세하게 밝혀저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등은 고려의 영토강역이 요동의 개원까지 진출했던 사실을 전연히 고려치못한 상태에서 기록된것들입니다. 당시 기록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지만 고의적으로 왜곡시켰다고 인정할수 밖에 없는 증거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고려사에서 쌍성총관부 최초 설치 지명을 고화주(古和州)로 하였다가 다시 화주로 기록한것은 교치된 지명을 의미한것으로 보입니다.아래지도는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고려강역도인데 지금까지도 강단사학계는 후손들에게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북방한계선이 북쪽으로 천리밖에 있는데 이게 무슨 망령입니까? 우리가 확인하고 제시한 자료들은 정말 잘못된 근거일까요? 아니면 기득권자들이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 눈이 뒤집힌 까닭일까요.
이 지도는 함경도 함주(함흥) 남쪽으로 쌍성총관부를 두고 안변 남쪽으로 철령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이곳을 적어도 99년동안을 원나라가 통치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함경도 사람들은 몽골어가 주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정(倭政)은 36년인데도 그들이 남긴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기 1269년 이연령.현원렬과 최 탄 이란 자가 고려의 60여개 성을 들어 원에 항복했을때 서경도 그 강역 안에 포함 되어 있었으니 이 지도는 잘못그려진 지도지요.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지 10년만에 최탄이 항복하였으니 서경이 반환될때 까지 적어도 수십년동안 원나라의 통치를 받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지도를 서경에서 안변 철령으로 선을 그어놓고 보면 한반도의 35프로는 원나라의 땅이 되었다는것이고 백두산의 소유권 마져 주장할수 없게 됩니다. 만약 서경까지 원이 진출하였다면 개경은 지척인데 그 위치에서 천도를 하지않고 버틸수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억울하더래도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 아니기에 밝혀서 역사의 정체성을 찾자는 것입니다. 서경이 원나라의 동령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게 아닙니다. 서경의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부인하는게 아니라 그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서경을 위시한 최탄등이 상납했던 60성은 고려가 자력으로 회복한게 아니라 원나라가 자진하여 반환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그렇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대에 이르러 서기1356년 추밀원부사 유원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축출하고 화주목(和州牧)을 세웠으며 원의 배척운동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후 서기 1369년 이성계등을 앞세워 동녕로를 탈환하여 원위치로 회복시킨것은 명나라가 건국되기 2년전입니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원(元)나라가 고려 화주(和州:함남 永興)에 둔 통치기구라고 우리나라 네이버백과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과연 그러한가?
雙城총관부는 고려와 원나라의 접경을 이루는 중요한 지역이므로 그 위치를 알면 고려의 서북강역을 짐작할 수 있다. ?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 하면 쌍성은 현 흑룡강성 하얼빈 남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쌍성시 쌍성보라고 추정된다. 元史와 金史, 조선왕조실록에 흩어져 등장하는 쌍성(雙城)과 쌍성총관부를 하나 하나 찾아서 연결하여 위 결론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기로 한다.
◎ 먼저, 원사의 과세편에는 쌍성이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志/卷九十四 志第四十三 食貨二/歲課 初,金課之興,自世祖始.(..)在遼陽者,至元十年,聽李德仁於龍山縣胡碧?淘採,每歲納課金三兩.十三年,珞璞∇竇む津珹夾뚤朮τ畜雲?
원나라는 금(金)산출지역에 대하여 매년 금을 공납하게 하였는데, 세조13년 요동의 쌍성(遼東雙城)과 화주(和州)에서 금을 캤다. ☞ 화주(和州)도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위 고지도 거란 지리도를 보면 화주가 요하를 사이에 두고 심양과 마주보고 있다.
◎ 원사에서 쌍성은 요동의 고려와 하얼빈의 여진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本紀/卷十七 本紀第十七 世祖十四/至元二十九年 高麗、女直界首雙城告饑,?高麗王於海運內以粟賑之.弛平?州酒禁.詔不敦、忙兀[禿]魯迷失以軍征八百?婦國.
고려, 여진 경계의 수령들이 쌍성의 기근을 보고하자, 고려왕에게 조칙을 내려 해운으로 조를 운반하여 기근을 구휼하게 하고, 평주 난주 등에 금주령을 내렸다. ☞ 여기에서 여진 완안부 아골타는 현 흑룡강성 하얼빈시 동쪽 아성(阿城 )에 건국하고 상경회녕부라고 하였는바, 쌍성은 하얼빈에 근거를 둔 여진과 경계에 있었다. 고지도 지리도를 보면 평주, 난주는 난하 하류에 있었다. 이곳에 금주령을 내리고 조를 요하를 통해 쌍성으로 운반하도록 한 것이다. 평주, 난주의 조를 한반도를 돌아서 함경도 영흥으로 운반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진의 위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찾아 보자.
◎ 원사에 元개원로(치소: 하얼빈 東 아성)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開元路 開元路,古肅신之地,隋、唐曰黑水靺鞨.(..)東瀕海,南界高麗,西北與契丹接壤,?金鼻祖之部落也.初號女?,後避遼興宗諱,改曰女直.太祖烏古打?滅遼,?上京設都,海陵遷都於燕,改?會寧府.
개원로, 옛 숙신의 땅임. 수, 당대에 흑수말갈, (..) 동은 바다이고(?),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 서북은 거란과 접한다. 金 시조의 부락이고 처음이름은 여진, 요 흥종의 이름을 피하여 뒤에 여직이라 고쳤다. 이곳에 상경 회녕부(역자 주 : 하얼빈 동쪽 아성(阿城))을 설치하였다.
고려이고 다시 동쪽으로 점선으로 추가된 선이 조선과 여진의 분계도입니다. 가오리가 조금 더 커졌지요.책성의 북쪽으로 몽골과 내몽골계라는 분명한 표시가 있습니다. 고려와 요령성을 경계로 국경을 이룬 나라는 거란.발해.몽골.여진이었습니다. 이러한 책성을 쌓은 주인공들은 고려와 조선이었습니다. 따라서 강동6주라는 지명은 요하(압록강)의 동쪽을 위주로 하여 남쪽으로 여순까지를 범위로 잡아야 합니다.
◎ 고려의 반역도(反逆盜) 홍복원이 몽고에 바친 고려의 40성은 현 요녕성 요양, 심양로(현재의 심양) 일대이다. 요양등처안무고려군민총관부과 심양등처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나뭄!!!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瀋陽路 瀋陽路,本읍婁故地,渤海大氏建定理府,都督瀋、定二州,此?瀋州地.契丹?興遼軍,金?昭德軍,[三]又更顯德軍,後皆?於兵火.元初平遼東,高麗國麟州神騎都領洪福源率西京、都護、龜州四十餘城來降,各立?守司,設官以撫其民.後高麗復叛,洪福源引衆來歸,授高麗軍民萬戶,徙降民散居遼陽瀋州,初創城郭,置司存,僑治遼陽故城.中統二年,改?安撫高麗軍民總管府.及高麗?國內附,四年,又以質子(淳)[?]?安撫高麗軍民總管,[四]分領二千餘戶,理瀋州.元貞二年,?兩司?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仍治遼陽故城,轄總管五、千戶二十四、百戶二十五.至順錢糧戶數五千一百八十三
심양로, 발해 정리부, 도독, 정주, 심주 두 개 주가 심주가 되다. 원나라 초에 요동을 정벌할 때 고려 인주(麟州)신기도령 홍복원은 서경, 도호, 귀주의(龜州) 40여성을 들어 항복하자 각 곳에 진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반격을 가하여 홍복원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자, 元은 홍복원에게 고려군민만호를 제수하고 무리들을 요양 심주에 분산하여 살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거국적으로 내부한 뒤에는 인질로 있던 순(淳)을 안무고려군민총관으로 삼아 심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총관부는 요양 옛성에 있었고, 총관 다섯, 천호 24, 백호 25를 관할하였다.
◎ 원사(元史) 지리지 동녕로 조에는 동녕로가 고구려 평양성이며 고려가 서경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東寧路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其王高璉始居平?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西京.元至元六年,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府州縣?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婆娑府.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다.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고 평양성을 함락한 뒤 그 나라는 동으로 옮겨갔는바, 압록수 동남 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평양의 땅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은 서경이 되었다. 원나라 지원6년 이연령, 최탄, 현원렬 등이 60여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서경은 동녕부가 되었다.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 위원진을 떼어서 파사부에 속하게 하였다. ☞ 인주신기도령이던 홍복원이 서경을 들어 항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주가 곧 고려의 서경관할 이었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에 고구려 옛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海州 耀州(..)巖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
요주 암연현, 동은 신라와 접한다. 옛 평양성이 현의 서남에 있다. 동북으로 120리에 해주(역자주 : 현 요녕성 해성시)가 있다.
◎ 금사 지리지에 쌍성은 심주에 속한다고 하였다.
新校本金史/志/卷二十四 志第五/地理上/東京路 瀋州,昭德軍刺史,中.本遼定理府地,遼太宗時置軍曰興遼,[一一]後?昭德軍,置節度.明昌四年改?刺史,與通、貴德、澄三州皆?東京.戶三萬六千八百九十二.縣五: 樂郊(..)章義遼舊廣州(..)遼濱遼舊遼州東平軍(..)邑樓遼舊興州興中軍(..) 雙城遼雙州保安軍也,皇統三年降?縣,章宗時廢.
심주에 속한 다섯 개 현은 낙교(樂郊), 장의(章義), 요빈(遼濱), 읍루(邑樓), 쌍성(雙城)으로서 쌍성은 심주에 속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공민왕이 환조에게 쌍성의 백성을 진무하게 하다.’ (..) 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인우(仁雨) 등이 등주(登州)에 머무르니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里)였다. 그곳에 머무르면서 나아가지 않으니,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환조에게 시소 부윤(試少府尹)을 제수(除授)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내리고 중현 대부(中顯大夫)로 계급을 승진시키고는,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교지(敎旨)를 전하여 내응(內應)하게 하였다.
환조는 명령을 듣고 즉시 <군졸과 말을> 함매(銜枚)하고 행군(行軍)하여 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쌍성을 쳐부수니, 소생(小生)과 도경(都卿) 등은 처자(妻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이에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와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홍헌(洪獻)·삼살(三撒)의 땅을 수복(收復)했으니, 고종(高宗) 때 원(元)나라에 점령당한 때로부터 99년만에 지금에 와서 이를 모두 수복하였다. 왕이 환조를 승진시켜 대중 대부(大中大夫) 사복 경(司僕卿)으로 삼고, 서울에 제택(第宅) 1구(區)를 내리고 이내 머물러 거주하게 하였다"
이제 쌍성의 현재 위치를 추적해 보자
쌍城是一座歷史悠久的文化古城,?位于黑龍江省南端,松花江南岸,距省都哈얼빈去40公里
쌍성: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고성이다. 흑룡강성남단, 송화강 남안에 위치, 성도인 하얼빈에서 약 40킬로미터 지점이다. ☞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쌍성은 원사, 금사, 고려에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는 쌍성이 모두 같은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금사에 등장하는 심주의 쌍성은 심양에 있고, 또다른 쌍성은 장춘서쪽 60킬로미터 지점의 쌍성보, 나머지 하나는 하얼빈 남쪽 쌍성현 쌍성보가 있다. 고려쌍성은 그 중 여진과 경계지점인 하얼빈 남쪽 쌍성현의 쌍성보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합단군의 거점인 대경시와 가까워서 합단군을 견제 방비하기 적정하고, 원사 개원로조에서 개원로(치소 하얼빈 동쪽 아성)의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공민왕때 회복한 화주, 고주, 의주, 함주 등의 지명도 모두 거란 지리도에서 요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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