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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의 전쟁사]성 프란체스코의 도시!!!
동아일보2024.04.29 23:34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도시 아시시는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이다. 그의 생가는 현재 성당이 되어 있는데, 아시시의 중심 광장 바로 근처에 있다. 생가의 입지가 보여주듯이 그의 부친은 상당한 부를 쌓은 상인이었다.
소년 시절 부유하고 방탕하게 살던 그는 출세를 동경하며 기사가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포로가 되어 1년간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이 포로 생활이 그에게 인생과 죽음, 삶의 가치에 대해 깨닫게 했던 것 같다.
몇 년 뒤 다시 참전을 위해 길을 나서던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고, 삶의 목표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그가 살았던 13세기의 교회, 특히 교황과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은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이었다. 교황령은 이탈리아에서 제일 큰 국가였고, 전 유럽 귀족들이 교황과 성직을 탐냈다. 이런 시대에 프란체스코는 부와 권력을 멀리하고 오직 수양, 기도, 봉사에 헌신하는 진정한 종교인, 수도사의 자세를 가르쳤다.
그는 정식으로 사제품을 받지도 않았지만, 가톨릭의 성인이 되었으며, 그가 창설한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서 제일 번창하고 존경받는 수도회가 되었다. 심지어 귀족과 부자들도 프란체스코회의 성당에 묻히고 싶어 했다.
아시시에는 교황 명령으로 프란체스코 기념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 아시시는 밝고 따뜻한 도시이다. 이탈리아 소도시 투어를 하는 사람들은 아시시를 최고로 꼽는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이 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도시의 건물 배치 자체가 요새 기능을 겸한다. 요새 기능에 치중할수록 거리는 좁고 어두워진다. 아시시는 건물 간격을 느슨하게 배치한 대신 도시 정상에 로카 마조레라는 다른 도시 성채와 비교해도 특별하고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다. 성과 속, 생활공간과 요새의 절묘한 균형이 밝은 아시시의 비결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도시도 국방에 관해서는 낭만적인 발상을 거부한다.
임용한 역사학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스페인어: Francisco Xavier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바스크어: Frantzisko Xabier 프란치스코 샤비에르); (1506년 4월 7일 ~ 1552년 11월 2일)는 인도와 일본에서 전도한 예수회 선교사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축일은 12월 3일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나바라 왕국(현재 에스파냐 바스크)에서 고위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나바라 왕국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와 에스파냐간의 전쟁(1512년-1524년)에서 에스파냐가 승리하면서, 그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하급 귀족이 되었고, 형들도 몰락한 왕국의 군인출신이 되어, 어려운 생활을 했다. 하비에르는 9세때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인 미켈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프란체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미켈 신부로부터 신학수업에 필요한 헬라어, 라틴어문학과 문법을 배운 하비에르 소년은 이들 언어로 된 가톨릭 문헌을 읽을 수 있었고, 덕분에 신학이 깊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파리대학교와 성 바르브 학교(1530년 입학) 학생시절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알게 된 그는 예수회 창립일원이 되었다. 성직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된 하비에르는 사제서품을 받아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인도에서의 선교활동
하비에르 신부는 1542년 5월 6일 인도 고아 주에 도착하여 가톨릭 교리해설서와 성가를 현지말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전교활동을 했으며, 교회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고아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일본에서의 선교활동
종교개혁 후 개신교로 전향한 사람들의 전도를 막기 위해 직접 선교에 나선 그는 포르투갈사람인 알파르스 선장을 통해 사쓰마 번 태생의 일본인 부시(武士)야지로를 알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바오로 디 산타후에), 야지로의 동생(요한네스), 야지로의 부하(안토니오)에게 예수회 교리를 가르쳐, 1548년 3월 성령강림주일에 세례를 받게 하였다. 야지로가 포르투갈말을 잘하게 되자,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야지로를 포함한 7명의 일행(로마 가톨릭 사제, 수도사, 중국인 봉사자 등)들과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 현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1549년 9월 29일 하비에르 일행은 다이묘 시마츠의 초대로 그의 성에 갔는데, 다이묘는 전도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였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하비에르 신부는 《예수의 길》이라는 기독교 책을 일본어로 발간했다. 당시 하비에르의 기록을 보면 그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문화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은 대단히 예의가 바른 사람들인데, 잘 사는 것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남자는 14세가 되면 항상 칼을 옆에 차고 다닙니다. 사무라이는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무기를 항상 갖고 다니며,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비에르 신부는 《공교요리》(公敎要理)라는 기독교 교리해설서를 쓰기도 했는데,이를 읽고 감명받은 베르나르도라는 무사가 하비에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비에르 신부는 베르나르도를 일본 교회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예수회에 가입시켰으며, 로마에 보내 신학공부도 하게 했다. 얼마후에는 미켈이라는 농부를 포함한 15명이 신자가 되었으며, 1년간의 전도로 1백명에서 1백 50명이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불교 신자들의 반발로 시마츠 다이묘가 기독교에 대해 차가운 모습을 보이자, 야지로에게 교인들을 맡기고 교토로 가기로 했다. 1551년 하비에르 신부는 히라도와 야마구치 현을 거쳐 교토에 갔지만,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야마구치에 되돌아갔다. 오우치 다이묘는 기독교가 서양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으로 판단, 대도사라는 빈 절을 교회로 내줄 정도로 하비에르의 전도활동을 도와주었다. 야마구치에서 5개월간 전도한 하비에르는 중국에서의 전도를 위해 1551년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27일에 광둥 성 앞의 섬에서 열병으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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