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목판본 남구명(南九明) 우암선생문집(寓菴先生文集)권1,2 1책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4. 28.
728x90

남구명(南九明) 우암선생문집(寓菴先生文集) 5권3책

목판본 제주판관역임 남구명(南九明) 우암선생문집(寓菴先生文集)권1,2 1책(조선시대) 내종형(內從姪)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상품 상세설명]

목판본 남구명(南九明) 우암선생문집(寓菴先生文集)권1,2 1책 상태좋음 크기:31.7*20.7센치 보35-4-3 **남구명(南九明)1661 ~ 1719 조선 후기의 문신. 숙종 때의 제주판관. 자는 기서(箕瑞)이고 호는 우암(寓菴)이며, 본관은 영양(英陽), 종사랑 남상주(南尙周)의 아들이다. 168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93년(숙종 19) 문과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로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인 경상도 영해(寧海)로 내려가 10여년간 은거하다가, 형 노명(老明)의 권으로 전적을 지냈다. 1712년 (숙종 38) 10월, 신선완(申善浣)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여 1715년 5월에 떠났다. 당시의 제주목사는 이악한(李翊漢)과 변시태(邊是泰)이며 정의현감은 조명주(趙命周), 김초보(金楚寶) 등이고 대정현감은 권윤(權倫)과 이현징(李顯徵), 김희윤(金熙潤) 등이다. 남구명은 본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순천(順天)에서 10여년 은둔생활을 하더니 친형 남노명(南老明)의 강력한 권고로 제주판관에 착임, 청백리로 이름난 그는 제주에서 망아지 한 마리를 사서 길렀는데 그의 부하에게 주고 임기를 마쳐 순천으로 돌아갔다. 그 후 순천부사로 기용되자 제주판관 당시의 부하가 병든 망아지를 잘 길러 다시 가져왔다. 남구명은 옛날의 부하에게 여비를 주고 또 잘 대접하여 그 말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부하는 팔마비(八馬碑)에 매어두고 제주로 향해 떠나버렸다고 전해진다. 한편 1713년 본도의 교수(敎授)를 파(罷)하여 판관으로 하여금 겸임하게 했다. 재임 중인 숙종 39년ㆍ40년 두 해에 걸쳐 모진 흉년이 들어 남구명은 곡물을 다량 비축, 진휼한 공로가 인정되어 통정대부로 승진되었다. 외직(外職)이라는 바쁜 직무중 제주에서 「남정기(南征記)」를 지었다. 곧 우암(寓菴)이 발령을 받고 서울로부터 강진ㆍ제주 사이의 노정(路程)을 상술하고 또 제주의 경관과 풍물을 기록했다. 제주통판(濟州通判)으로 부임하여 흉년으로 심한 제주 기근을 구제한 공으로 뒤에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영전하여 다시 향리로 돌아가 풍류를 즐기다가 죽었다. 순천에는 동비(銅碑)가 세워지고, 제주에서는 죽림사(竹林祠)를 세워 그를 추모했다. 저서로는 「우암집(寓菴集)」이 있다. 우암문집은 남구명의 시문집이며 5권 3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1860년(철종 11)4대손 홍양(鴻陽)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태좌(柳台佐)의 서문이 있다. 권1ㆍ2는 부(賦)ㆍ시(詩),권 3은 서(書)ㆍ기(記)ㆍ발(跋)ㆍ전(傳)ㆍ제문ㆍ묘갈명, 권 4는 설(說)ㆍ잡저, 권5는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에는 「의수양춘부(疑愁陽春賦)」와 「증문부(憎蚊賦)」2편이 있고, 시는 저자가 제주통판(濟州通判)ㆍ순천부사 등을 지내면서 그곳의 풍물을 읊은 것과 당시 교유인사들과 수창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시 끝부분에 「남정일기(南征日記)」를 실었는데, 이는 저자가 1711년(숙종 37) 제주통판으로 부임할 때 서울에서부터 임지에 이르기까지의 경로를 기록한 것으로서 당시 육로ㆍ해로의 교통수단 또는 소요일정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서(書)는 이경옥(李景玉),임실혜(任實兮) 등에게 보낸 것이며, 기는 「한라산사중창기(漢拏山祠重創記)」,「서산점마기(西山點馬記)」,「북포방생기(北浦放生記)」등으로 모두 제주통판 재임 때의 산물이다. 발에는 「신효랑기사후발(申孝郞記事後跋)」,전(傳)에는 제주 관노(官奴)인 상식(尙植)의 전기, 제문에는 「제숙부분(祭叔父文)」,「제백여항문(祭白汝恒文)」,묘갈명에는 최삼택(崔三宅), 임면(任勉)에 대한 것이 있다. 설은 모두 제주에 관계되는 「신산설(神山說)」,「천기설(天氣說)」,「지리설(地理說)」등으로 그 지방의 풍속과 신앙, 산천과 형승, 기후와 풍토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잡저 역시 「작(鵲)」,「서(鼠)」,「오(烏)」등 그 지방의 희귀물을 관찰한 것과 재임 당시 그곳에서 흉년을 겼었던 일을 기록한 「흉년기사(凶年記事)」등이다. 이 책은 제주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특히 기,설 부분은 그곳의 특색만을 다룬 것으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세심한 관찰력이 문장으로 잘 묘사되어 문학적 작품으로도 뛰어나다. 장서각도서ㆍ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또 제주판관으로 재임 중 기록한 「탐라기사지(耽羅紀事志)」전문을, 정조때 대사간을 지낸 유태좌(柳台佐)가 1800년(정조 24) 첫 판으로 각인(刻印)했다. 이것을 남구명의 9대손인 남영복(南永福-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1가 219-2) 종가(宗家)의 재실(齋室) 지연정사(止淵精舍)에 보관 중이었다. 이 목판의 기록은 「탁라가(乇羅歌)」가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것이라는 일부 학자의 주장과는 달리 전체 42수(首) 중 14수만이 김종직이 제주의 한약상으로부터 전해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28수 중에 14수는 보탁라가(補乇羅歌), 남구명 자신이 기록한 14수는 우보탁라가(又補乇羅歌),남신명(南愼明)이 기록한 14수는 중보탁라가(重補乇羅歌)로 구분하였다. 이매당(二梅堂) 남신명은 우암(寓菴)의 동생으로서 우암을 따라 제주에 들어와 수집한 것이다. 그래서 이 목판본에 김종직이 수집 기록한 14수는 제주민의 구전하던 것을 남구명이 보충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이 목판본에 김종직이 수집 기록한 14수는 보탁라가(補乇羅歌),남구명 자신이 기록한 14수는 우보탁라가(又補乇羅歌),남신명(南愼明)이 기록한 14수는 중보탁라가(重補乇羅歌)로 구분하였다. 이매당(二梅堂) 남신명은 우암(寓菴)의 동생으로서 우암을 따라 제주에 들어와 수집한 것이다. 칠언절귀(七言絶句)로 된 탁라가 이외에도 부녀자들이 남편을 바다에 보낼 때와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부른 송랑곡(送郞曲)과 영랑곡(迎郞曲),또 기생이 부른 창루곡(娼樓曲)·자조곡(自嘲曲)·불침곡(不寢曲) 등과 민요 5수도 실어 있다. 이와 같이 제주의 설화·각종 고사· 풍물·지리·역사 등 다양하게 게재되어 있어 제주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1716년 11월 제주 진정(賑政)을 조사하여서 제주판관 남구명은 파직하고 자급(資級)을 빼앗았으며, 전 목사 변시태(邊是泰), 전 정의현감 김초보(金楚寶)는 잡아다 신문하고, 전대정현감 이현징(李顯徵)은 파직하였다. 이는 어사 황구하(黃龜河)의 별단(別單)으로 인하여 논죄한 것이다.

 

●墓誌銘[趙德鄰]●

故昇平伯南君箕瑞病歿于月城東寓舍後十年。其子國衡。持狀乞銘于余。余謂之曰。爾來宜也。爾父於吾。爲外從兄弟。相往來相隨。以長以老。知爾父莫吾若也。爾父聰明強記。卓詭不羇。早以文詞鳴。誦十餘萬言。以經明魁三百諸生。歸臥海上。婆娑嬉遊。若無意世事者。一日。強起赴調。試郵丞典籍。出知圻邑。時相有違言。君卽脫冠投狀。時相悔謝。再三送言。因謂君無讓。君不聽。遂南歸。時相恨之。翼年。除濟州通判。濟州在極南漲海外。水陸二千里。非所以處君。而君夷然而行。遇風濤濱死者數矣。旣到。不卑其官。不鄙其民。一心營職。威德幷流。翼年癸巳。島中大饑。暵乾水溢。雨風霜雪極備。隔幷百里如赭。山海之利。蕩然無收入。方秋氣像慘悽。棄妻殺子。雉經魚爛。塡滿街路。君多方拯濟。過意節縮。休其力役。放其工手。不問出入。俾專生業。船粟哺飢。燠𢊒撫摩。仁孚惠洽。島民悅喜。死猶稱德。朝廷嘉之。特命加資。又命留待春賑。乙未六月。始遞歸。島民數百人。越海來愬于備局。請仍差本牧不得。丙申。除順天府使。其地土廣民悍。俗雜難理。君莅職纔三月。合境大和。謠頌以興。時御史黃龜河。監賑于濟州。還言判官南某勒捧私穀。增加石數。濫蒙賞典。還奪其資。君卽日投紱徑歸。州民大小髫白。僧俗男媍。塡郛溢郭。臥轍遮迣。又齊赴于營門。號泣乞留。廵使別關不許去。君不顧而出。浩然而歸。縱酒賦詩。略無幾微見于色辭。己亥。均田使金在魯到順天。順天民齊訴願借南公一年。金貽書銓曹命下。而君不見矣。順民聞之流涕。爲鑄銅碑。以寓去思。濟州亦立竹林祠以報德云。嗟呼惜哉。其死於是。而止於是耶。君自幼狀貌魁梧。骨格骯髒。方娠夢龍而生。仍命以小字。少失恃。隨父處士公。轉徙山庄。家益貧。敗絮糲食恒不給。略不屑意。懷奇負氣。跌宕文史。出語輒驚人。處士公奇愛之。丁卯。中司馬。戊辰。丁外艱。服除。託于月城之贅家。登癸酉第。旣得十餘年。堅臥不出。伯氏佐郞公。年老家居。惜其才憫其貧。使之仕。丁亥。始入都。除郵丞。郵無遺事。方伯牧守見之者。皆知其爲偉器可大任用。惜也。觀其所旣立。殆用而未究耳。夫意曠者。多失於密察。才高者。或病於疎略。而君內行旣完。外美亦彰。祿不逮養。慟慕終身。事伯兄如事父。每自悲糊口於異地。居遠於桑鄕。自買田以屬墓田。捐居基以廣宗基。耽羅歸槖。不持南物。顧獨以數騎遺長姪。蓋爲其主宗事而厚之也。善飮酒。有時轟飮大噱。詼調縱謔。若無甚拘撿。而口不言人過失。與物無忤。倚醉輒誦古人詩律。或雅頌之辭。抑揚頓挫。聲氣淸壯。以洩其磊磈不平之懷。讀書泛覽博取。浩汗無涯涘而獨擅精覈。爲文滂沛大肆。不事雕餙。而卒歸之理。不爲空言也。在濟時所著詩若文。其天文,地紀,星經,山峙,水鍾,人妖,物異,眞仙,靈草。下至蟲魚鳥獸。凡可信可疑可喜可愕。皆於文乎發之。雜以謠俗之好。方言之訛。而必究其所然。得其指歸。要在剖惑破怪。納民軌物。若縛牧營之妖巫。放之出陸。斥廣壤之淫祠。驅之使遠。蓋其剛正之氣。廉白之操。足以屛淫誣而服人心也。其自濟還也。行中人牽一馬來。君咈然不平之。及登陸。其馬蹇。君付其馬館人。館人以爲馬病而留之也。君到順天。館人還其馬。馬病已充肥。君曰。初付汝時。馬病不能行。猶棄物也。豈有意更推也。且汝有醫飼功。不受。其人固納之。遂卻之。其人繫其馬八馬碑而去。八馬碑者。古有賢守。其遞歸也。辭邑人之例贈馬八匹不受。州人立石頌之。名之曰八馬碑云。孔子曰。斯民也。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今夫島民至蠢頑也。湖俗至獷悍也。君爲之則數年之化。一變其風。荒墟再闢。三月之政。一革前習。近悅遠來。至越重溟經累歲。奔走籲號。願借乞留而不知止。濟之民至今稱曰。微南公。吾民靡孑遺也。湖邑棄官小詞。飜入於昇平樂譜而詠歌之。繫馬淸風。亦揭於試士之扁而鋪張之。俄傾之間。風動神速。有如此者。世言末俗。爲鬼爲鬽。終不可化者。徒虛語爾。直道而行。民情可見。而彼番番於一便邑。靳靳於一官資。而終至於斥外降奪者。獨何人哉。吾聞時相羞悔勸行。而君不行。繡衣固要相見。而君不見。彼反視以爲簡己也。豈非末俗易高。險途難盡者哉。君諱九明。箕瑞其字也。南氏系出英毅公敏。廟祀英陽。君爲英陽人。高祖諱義祿。朝散大夫軍器判官。曾祖諱慶薰進士。祖諱佶進士。考諱尙周從仕郞。有文名。屢擧不中。以詩酒自娛。爲鄕里所重。妣漢陽趙氏。漢平府院君良敬公諱涓之後。進士諱廷珩之女。君以辛丑三月日。生于寧海元皋里第。晩家于月城。因自號寓庵。棄果川歸。結屋于影池之畔。讀書其中。訓學諸子。敎授生徒。力耕稼以自給。己亥十月二十五日。考終于寓庵。得年五十有九。配月城李氏。益齋先生齊賢之後。武科璡之女也。先君十四年乙酉沒。葬在月城東面輪火坪辰坐之原。君沒之明年庚子九月。遂葬君于夫人墓後。同原異墳。有二子二女。男國衡,國華。女長適李仁載。次適任一鉉。國衡生五男。曰潤萬。曰龍萬出爲從祖叔父國先後。沃萬,濟萬。餘幼。國華生四男。皆幼。銘曰。

嗚呼箕瑞。世卻曲其行。子履砥也。人苟得爲榮。子脫屣也。萬里滄瀛。視平地也。絶島飢氓。惠以字也。嘉功策名。降之璽也。赤芾蔥珩。尹湖壘也。三月而政成。衆所墍也。八馬碑之淸。摠余轡也。玉點於蠅營。毁言之至也。投紱出城。如涕唾棄也。可見民情。若奪我怙恃也。借寇重迎。墮峴碑之淚也。世道難平。欲起而旋躓也。我銘以貞之。仇我者之恥也。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趙德鄰撰。

출처: https://sugisa.tistory.com/entry/▣우암寓庵-남구명南九明-생년-1661년현종-2-몰년-1719년숙종-45▣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좋은 백성 만들기

2016. 3. 23. 03:02

[동아일보]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4월에 관아에 질병이 돌아 밖에 나가 지낸 일이 있었다. 이웃집에 고양이가 있었는데 늘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릇을 뒤져 무슨 음식이든 훔쳐갔다. 고기를 매달아 놓으면 어금니를 갈고 주둥이를 벌름거리며 펄쩍 뛰어서는 기어이 잡아채서 먹었다. 노복들이 골치 아파하며 몽둥이로 쫓고 개를 풀어 물게 하고 덫을 놓아 잡고 밧줄로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리는 등 실컷 괴롭힌 뒤 놓아주었지만 고양이의 도둑질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노복들이 서로 의논하였다. “이 고양이가 그렇게 고통을 받고 다 죽게 되어도 하는 짓이 여전하니, 이는 필시 배가 고파 그러는 것이다. 앞으로 이놈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하는 짓을 보는 게 좋겠다.”

마침내 밥을 조금 덜어 고양이에게 주었다. 고양이는 아침저녁으로 와서 먹이를 먹었다. 그러더니 이때부터 마음을 고치고 습관을 바꿔서 비록 음식이나 어육(魚肉)이 앞에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입맛 한 번 다시지 않았다. 사람과 친해져서 고개를 숙이며 매일같이 와서 길들여지니 노복들도 고양이를 사랑하여 더욱 잘 길러주었다.

 

제주(濟州)에서 통판(通判) 벼슬을 하던 남구명(南九明·1661∼1719) 선생의 ‘고양이 이야기(猫說)’입니다. 대책 없던 도둑고양이가 길들이고 보니 그렇게 착할 수 없더라, 그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바로 안정적인 생계 대책이더라 하는 이야기. 이러니저러니 해도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입니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도 좋은 백성이 되고 싶습니다.

제주도에는 본래 도적이 없어 밤에 문도 닫지 않고 나그네도 들판에서 잤다. 풍속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 가뭄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가니 인심이 크게 변하여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서 소와 말, 곡식이며 옷감을 죄다 훔쳐갔다.

내가 이를 보고 알게 되었으니, 배부르면 양민이요 배고프면 도적이 될 뿐이다(飽則民, 飢則盜耳). 누군들 좋아서 도적이 되고 싶겠는가. 속담에 ‘3일 동안 먹지 못하고 도적이 되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三日不食, 鮮不爲盜)’라 하였으니 참으로 맞는 말이다. 아, 누군들 떳떳한 덕이 없고 염치가 없겠는가마는, 굶주리다 보니 본성을 잃어 살아서는 강도요 죽어서는 흉한 귀신이 된다. 비록 행실을 고쳐 착하게 살아 다시 태평성세의 백성이 되고자 하여도 될 수 있겠는가.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