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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 생년: 1661년(현종 2) ~ 몰년 : 1719년(숙종 45)▣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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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육박물관은 향토교육자료를 조사․발굴․수집하고, 그 중 제주역사와 민속, 교육적 가치가 있는 향토교육 자료를 선정하여 교육자료로 발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국역으로 발간된 우암(寓庵)선생 문집은 우암 남구명(南九明)이 1712년(숙종38)10월 ~ 1715년 5월간(2년7개월)에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여 제주도의 산천과 형승, 풍속과 신앙, 기후와 풍토, 육지와 제주의 교통로인 육로, 해로 특히 흉년을 겪었던 일을 기록한 책으로 우암선생 4대손인 홍양(鴻陽)이 1860년에 간행한 시문집으로 5권 3책(天․地․人)으로 된 목판본을 1책으로 묶어 발간하였다.

이 책의 구성은 권두에 유태좌(柳台佐)의 서문이 있고, 권1, 권2는 부(賦)․시, 권3은 서(書)․기(記)․발(跋)․전(傳)․제문(祭文)․묘갈명(墓碣名), 권4는 설(說)․ 잡저, 권 5는 부록으로 되어있다.

이번 우암선생문집(寓庵先生文集)은 퇴직 교원인 김영길(金永吉)선생이 원문을 국역(國譯)하였고, 우암선생 관련 유적은 화보로, 원문은 영인본으로 편집, 발간했다.

이에 제주교육박물관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제주도 역사와 교육에 관심을 갖고, 좋은 자료들을 선정하여 향토교육자료를 발행하는데 참여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우암(寓庵)남구명(南九明) 생년: 1661년(현종 2) ~ 몰년 : 1719년(숙종 45)▣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현종 2 1661 신축 順治 18 1 3월, 寧海 元丘里에서 태어나다.
현종 10 1669 기유 康熙 8 9 모친상을 당하다.
~ - ~ ~ ~ - ~ 탈상 후에 부친을 따라 大芚山의 閑溪로 이거하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27 진사시에 합격하다. ○ 장남 南國衡이 태어나다.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28 11월, 부친상을 당하다.
숙종 - ~ ~ 康熙 - ~ 복을 마치고 처가가 있는 慶州로 이거하다.
숙종 19 1693 계유 康熙 32 33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다. ○ 權知成均館 學諭가 되다.
숙종 31 1705 을유 康熙 44 45 부인상을 당하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47 9월, 學正이 되다. ○ 12월, 保安 察訪이 되다.
숙종 - ~ ~ 康熙 - ~ 獒樹와 昌樂의 찰방을 역임하다.
숙종 37 1711 신묘 康熙 50 51 5월, 果川 縣監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影湖 서쪽에 ‘寓庵’을 짓고 자호로 삼다.
숙종 38 1712 임진 康熙 51 52 5월, 濟州 通判이 되다.
숙종 39 1713 계사 康熙 52 53 4월, 한라산을 등정하고 장편시 〈壯遊〉를 짓다. ○ 5월, 공무 수행을 위해 大靜에서 旌義를 일주하고 〈續壯遊〉를 짓다.
숙종 - ~ ~ 康熙 - ~ 대기근에 賑政을 펼친 공으로 통정대부에 가자되다.
숙종 41 1715 을미 康熙 54 55 12월, 五衛將이 되다.
숙종 42 1716 병신 康熙 55 56 1월, 司果가 되다. ○ 5월, 順天 府使가 되다. ○ 10월, 濟州監賑御使 黃龜河의 誣啓로 파출되다. ○ 12월, 직첩이 還授되다.
숙종 45 1719 기해 康熙 58 59 10월 25일, 우암에서 졸하다.
철종 11 1860 경신 咸豐 10 - 5대손 南有龜가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家狀(南龍萬 撰), 墓誌銘(趙德鄰 撰), 墓碣銘(丁範祖 撰),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本集內容 등에 의함

 

[편찬및간행]

저자의 유문은 손자대에 와서야 수습 정리에 들어갔는데, 화재로 인하여 대부분 소실되고 남아 있는 것은 문하생의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抄錄 정도였다. 그러나 초록의 내용은 저자가 제주도에서 지은 기괴한 이야기나 남다른 행적에 국한된 것이어서, 經學에 대한 담론과 시편의 일부는 누락되었다. 이렇게 수습한 글들을 저자의 손자 南龍萬(1709~1784)과 증손 南景羲(1748~1812)가 교감하여 家藏하였다.

그 후 저자의 4대손 南鴻陽(1768~1849)이 家狀, 墓誌銘, 挽詞 등을 덧붙여 편차하고 鶴棲 柳台佐에게 서문을 받는 등 간행 준비를 하였으나 중도에 졸하였다. 이를 이어 저자의 5대손 南有龜(1790~1869)가 외현손 定軒 李鍾祥에게 다시 교정을 받아 1860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2249),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13-34), 장서각(D3B-873, K4-6336),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811.98/남구명)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2010년에 제주교육박물관에서 「寓庵集」 전문을 국역하고 원문을 첨부하여 영인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의 5대손 남유귀가 1860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序(柳台佐 撰), 後敍(李鍾祥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5권 3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 柳台佐가 지은 序와 目錄이 있다. 작품의 절반 이상이 제주의 풍토와 생활상을 그린 것이며 自註와 編者註를 달았다.

권1은 賦(2), 詩(99題)이다. 부 가운데 〈憎蚊賦〉는 모기에 의한 피해를 열거하고 모기를 탐관에 빗대어 지은 것이다. 시는 詩體 구분 없이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장편고시가 많으며 주요 수창자는 南老明, 李翊漢, 李顯徵, 李衡祥 등이다. 〈自閑溪向月城告別諸兄〉은 청명절 즈음에 한계를 떠나는 심정을 읊은 것이고, 〈奉別李甁窩仲玉之任濟州〉는 1702년에 경주 부윤으로 있다가 제주 목사로 부임하는 이형상을 송별한 것이다. 〈郵館遣懷〉, 〈郵館書懷次杜詩荊南述懷三十韻〉은 驛丞으로 재임할 때의 소회를 읊은 것이다. 〈毛興穴古事〉는 제주의 聖所인 삼성혈의 신화를 소재로 제주 역사를 노래한 것이며, 〈凶歲遣懷次韓詩五十韻〉은 제주 부임 후 겪은 기근의 절박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次南槎錄果園韻〉, 〈又次南槎錄三姓穴韻〉은 1601년 按撫御史로 제주에 파견된 金尙憲의 일기체 기행문인 南槎錄에 수록된 시에 차운한 것이고, 〈補乇羅歌〉, 〈又補乇羅歌〉, 〈重補乇羅歌〉는 1465년에 제주에서 약물을 진공하러 온 사람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金宗直이 지은 〈탁라가〉 14수에 차운한 것이다.

권2는 詩(93제)이다. 〈有感〉은 제주에 유임된 심정을 읊조린 것이며, 〈迎郞曲〉, 〈送郞曲〉, 〈娼樓曲〉은 제주 기녀가 노래한 민요를 한시로 지은 것이고, 〈次崔學士耽羅詩三十五絶〉은 1487년에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온 崔溥가 읊은 풍물시에 차운한 것이다. 〈發昇平向光陽〉, 〈咸安路上〉은 순천 부사를 사직하고 떠나는 아쉬움을 읊은 것이고, 〈田家卽事〉는 경주 影湖에 돌아와 농가를 들으며 한가로움을 즐긴 것이다. 〈岳院次任實兮韻〉, 〈在岳院雨後贈崔命始求和〉, 〈待敬叟不至更步前韻〉은 경주 西岳書院에서 교우하며 지은 것이다. 南峻明, 洪重周, 張璶 등을 애도한 挽詩가 있다.

권3은 南征日記, 書(3), 記(5), 跋(1), 傳(1), 祭文(2), 墓碣銘(2)이다. 남정일기는 한양에서 제주에 到任하기까지의 노정에 시를 곁들여 기록한 것이다. 記 가운데 〈西山點馬記〉는 貢馬를 점검하면서 말들의 정연한 모습에 견주어 제주민의 교화 의도를 서술하고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는 목민관을 풍자한 것이며, 〈北浦放大龜記〉는 곤경에 빠진 거북이를 놓아주면서 안분할 것을 강조하고 자신도 체귀하기를 바라며 지은 것이다. 〈石決明盃記〉는 겉은 보잘것없으나 속 무늬는 아름다운 전복껍질로 만든 술잔을 남이 알아주지 않는 학덕 높은 선비에 비견한 것이고, 〈蘆根枕記〉는 땔감으로 쓰일 갈대 뿌리를 베개로 만들어 소박한 정취를 즐기며 지은 것이다. 〈尙植傳〉은 군자의 덕목을 갖춘 제주 관노 金尙植을 칭찬하며 지은 것이다. 제문은 숙부 南尙召와 白㫾에 대한 것이고, 묘갈명은 崔三宅과 任勉에 대한 것이다.

권4는 說(10), 雜著(7)이다. 說 가운데 〈神山說〉은 말 이외에는 귀한 산물이 없는 것이 오히려 한라산의 모습을 보전하게 됐음을 서술한 것이다. 〈天氣〉, 〈地理〉, 〈不死草辨〉 등에서는 특이한 제주자연의 이치를 설명하였고, 〈義鵶說〉, 〈猫說〉, 〈馬說〉, 〈蛇說〉 등은 동물을 소재로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잡저의 〈凶年記事〉는 1713년 대기근의 참상을 기록하고 진휼책을 제시한 것이고, 〈人妖〉는 민심을 선동한 무당을 벌하며 淫神 배척 의지를 보인 것이며, 〈野馬對〉는 공마와 야마의 대화를 통해 자유로운 삶의 가치를 되새긴 寓話이다.

권5는 부록이다. 손자 南龍萬이 지은 家狀, 내종형 趙德鄰이 지은 墓誌銘, 丁範祖가 지은 墓碣銘과 李憲默이 지은 墓碣銘識, 崔敬中, 李翊漢, 李浹, 金昌錫, 李栽, 權斗經 등이 지은 挽詞(66), 朴萬普, 鄭萬陽 등이 지은 誄(6), 玉山書院과 龍山書院 유생이 지은 제문(2)이 실려 있다.

권미에 외현손 李鍾祥이 1860년에 쓴 後敍가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미실(李美實) | 2011

 

 

[범례]

○ 本集은 寓庵 南九明(1661:顯宗2 ~ 1719:肅宗45)의 文集이다.
○ 本集은 著者의 4代孫 鴻陽이 著者의 孫 龍萬과 曾孫 景羲가 校勘한 詩文을 바탕으로 蒐集ㆍ編次한 稿本을, 5代孫 有龜가 著者의 外後孫 李鍾祥의 校正을 받아 1860年 木板으로 刊行한 初刊本이다.
○ 分量은 5卷 3册으로 總 185板이다.
○ 本 影印底本은 高麗大學校 中央圖書館藏本(圖書番號:D1-A2249)으로서 半葉은 10行 20字이고 半郭의 크기는 21.5×16.8(cm)이다.
○ 本集의 標點者는 李承昌이고 監修者는 吳圭根이다.

한국문집총간 DB에서 사용된 부호는 다음과 같다.
。:문장 안에서 구(句)나 절(節)의 구분이 필요한 곳과 문장의 끝에 사용하였다.
   묘도문이나 부(賦), 사(辭) 등에서 銘曰, 辭曰 등의 뒤에 사용하였다.
   대구(對句), 연구(聯句) 등 운문의 각 구마다 원주로 저자를 표시한 경우, 각 구의 끝뿐 아니라 원주 뒤에도 사용하였다.
,:인명, 지명, 관직명, 서명 등이 나열되어 구분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였다.
[] : 저본에 없는 제목이나 본문 내용을 생성하였을 때 사용하였다.
   글의 저자가 문집의 저자와 다른 경우, 제목 옆에 저자를 밝히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저본에서 작은 글씨로 구분된 按, 增 등의 글자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제목이나 원주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성격이 달라져 구분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였다.
▣ : 저본의 결자(缺字)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 어떤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는 마멸자(磨滅字)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 저본의 묵등(墨等 검게 칠해진 부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밑줄:교감주, 난외주 등 원주를 제외한 주석의 대상이 되는 표제어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림:도식에 가까운 그림은 하단에 ‘삽도’로 표시하고, 소자(小字)로 제목을 병기하였다.
   회화에 가까운 그림은 하단에 ‘삽화’로 표시하고 소자로 제목을 병기하였다.

 

 

寓庵先生文集序

寓庵先生文集序[柳台佐]

寓庵南公歿。已百餘年矣。而東都人士。至今誦慕不衰。不佞生也晩。猶耳熟焉。公以魁偉之表。聰悟之性。贍博之文。蚤擢大小科第。擁軒駟賁笙鏞。乃其手分。而影湖之西。耕且漁者十餘年。出以仕於朝。不過曰三郵丞,一縣官,一通判,一知府。而縣官則擲烏帽解公服。戴笠而歸。通判又是重溟數千里外。鯨濤蜒霧之鄕也。命途之奇舛。一至此哉。逮夫緋玉之寵。有隕自天。昇平之擢。稍存公議。則耽羅監賑之人。以要見之日。不簉其門。疑其簡。構捏爲辭。上達天聽。以降其恩資。世道之險巇。樊棘之亂聽。又何如也。雖然。夷考其前後官蹟。則問之三郵。郵卒曰永世不忘。問之昇平。平人曰三月政成。至於通判時實績。尤有所特異者。分符之初。山鬼煽妖。禾穀粉𩐎。公私儲蓄蕩竭。民且溝壑。公乃至誠存恤。一心賑救。凡徵贖奉貰。刮富復役。一切衒能沽名等事。不之屑。專以除民瘼聽民願。使各自安堵爲先務。齊勞逸便往來。罷無名稅。捐不緊費。弛禁撤肆。苟事所當爲。則不以簿書契印從事。而驀直做去。故雖戹於讒人之口。而其政似疎而實密。其惠似小而實大。一島之民。賴以全活。死亦稱德。觀於遺集中記事一通。闔境之幾無孑遺。賑事之費盡誠力。如在眼中。令人不覺涕淚而感歎也。乃若館人繫馬之碑。軼美古人之淸白。霜風破裘之詠。留傳樂譜之雅韻。而均田使移書銓家。復擬宿硏。苟非實惠茂績之入人者深。能有是乎。歸臥湖庄。溫理舊業。蕭然一室。口授生徒。又有西河河汾之敎。東都人士。至今稱誦。以是故也。公之所著詩若文。皆出於多讀汎覽之餘。式閎以肆。故不事雕餙而自然理到。在濟時所著天文,地紀,星經,山水,草木,蟲魚,鳥獸,謠俗之異。方言之訛。無不究極其所以然。辨明其所當然。皆所以納民於軌物也。四世孫上舍生鴻陽甫。裒輯成編。合挽祭狀碣文字爲幾卷。將謀繡梓以傳後。謬託其弁首之文於台佐。顧惟陋拙。何敢與聞於斯役。蓋屢辭而終不獲。謹依王梅溪序坡集例。詳於蹟而略於文。重以世道累欷感慨之旨。以答賢孫之孝懇云。嘉善大夫原任禮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豐山柳台佐謹書。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8

 

寓庵先生文集卷之五 / 附錄

家狀[南龍萬]

嚮在肅考元孝王己亥冬。我祖考寓庵公沒于第。享年五十有九。葬于慶之府東鼈山負辰之原。卽夫人李氏墓後。南氏系出英陽。英毅公敏。其肇祖也。有諱須。以監察御史。入于寧海。九世而公生於重九峯下元丘里。諱九明。字箕瑞。方娠夢龍。命小字矯然。生有異姿。氣宇魁偉。最聰悟。日誦數千萬言。出語輒驚人。操觚家傳誦以爲奇唱。中丁卯司馬。癸酉以經明第製講。皆居甲一。旣而南徙雞林。宅于影湖西畔。寓庵其自號。結小屋。讀書其中。從學者衆。日以是爲樂。若將終身。釋褐後。不復渡漢者十數年。丁亥。始除郵丞。伯兄佐郞公年老家居。勸之使赴。四歲而三易郵。所至有聲績。辛卯。知果川縣。將行見首相。相問所歷官次。曰驟陞幸也。公辭退門外。擲烏紗地。解公服。戴笠而還。閽者見之入告。相曰。此必怒我也。送人謝之。勑銓曹勸赴者三。公曰。士君子出處不可苟。翼日遂南下。明年。通判濟州。公乞遞甚力。該曹欲稟啓。首相止之曰。此人向者怒我無情語。公聞之。知其終不可免。卜日辭陛。京中素相識者。皆來唁于祖。贈送詩者百數。公處之泰然。少無幾微見于色辭。渡海遇颶風。檣帆皆摧碎欲沒。舟中無人色。公倚几而坐。朗吟詩。命琴歌之。顔貌終不變。湖人聞者皆以爲有涪州舍達之意。旣到。不卑其官。廢政悉擧。民俗至蠢頑。化行甚速。是年島中大饑。人將相食。賑活比陸土尤難。牧營欲使收私儲以均民。公曰。取諸人以爲己惠。非義也。令公私俱竭非計也。力請上司。放工手許商路。弛百禁蠲雜徭。使之各專生業。日馳報方伯。不絶船粟。一島晏然。明年旱且風。先秋而霜。山海皆蕩然不毛。公復申前法。條理尤密。計口而饋。如家母調活。割俸取贏。行販陸邑。得米穀七百石零。待公糶告絶。出施以繼麥曰。此如涸鮒霑壺水。待雨而生。蓋惠小而功實大焉。時上特軫島民。聞封進上京。召入陪來人問曰。殺歲何以料生。對曰。賴判官。得不死。上問判官姓名。手題殿壁。公處事容易。日調賑萬口。不動聲色。然兩年間鬚髮盡白。可見其一心營職焉。几案間。不廢書卷。賦詩綴文。凡人妖物怪。星經地勢。謠俗土物之可喜可愕可異者。皆著之篇章而率歸之。理政尙嚴正。嘗斥破廣壤淫祠。以曉衆惑。有一妖巫隨來牧營內衙。行賂狼藉。公託以祈禱招來。縛載出陸船以遠之。人皆快服。是時京城人被謫到海南。問島中治理效。海南人曰。家書渡海。不持南物。但見漁船販舶。滿載政聲而來。蓋於湖海間。有冰聲。 朝廷爲島民加留一年。乙未解歸。丙申。除順天纔數月。濟州監賑御史啓覈以爲虛張賑穀石數。以要寵典。此蓋自備穀外。他穀六十石在分賑中者。牧使啓辭蒙曨。不能區別。公則實不知也。公見 啓草。笑曰。可以六十石賭寵耶。卽日投紱歸。先時。公承順天除命在邸。御史以公知濟州事詳。要見甚強。公辭曰。以所按管下舊吏相見嫌不許。至是有此啓。順天民臥轍挽不得。男女僧俗。日往訴營門。請留之。一日。大雨且風。濕立營外。號泣不散者累千。公行到咸安地聞之。有忽憶州民千百口。冷風寒雨泣完城之句。歸埽湖上茅廬。復收拾古書。無意於世。越四年歿。庚子。金相在魯以均田使至湖南。順天民咸訴願得如南府使者。均田使知惠政已著。移書銓曹。復除順天。公歿已經歲。順民思之豎銅碑。銘其面曰。三月爲政。百里太古。其自濟還也。所騎馬蹇。棄之海南舍館。及爲順天館人牽還之。公不受。強納之數四而拒之益牢。其人繫八馬碑而去。八馬碑者。高麗太守崔碩其去也。還例贈馬八匹不受。故立碑名之云。後太守聚士設試者。以繫馬八馬碑爲題。棄順天時。有詩曰。新秋赴任暮秋還。笑別江南面面山。一出城門前路豁。霜風吹打破裘寒。湖中人傳詠之。遂爲昇平樂譜云。公氣像曠達疎快。平時應接人。風徽穆穆。在椆廣。一座動色。口不言人過。坐中或有評人。輒倚枕而臥。平生慟恨祿養不逮。事兄如事父。每解官。歸槖枵然。在耽羅。遺兄子一騎。鬻以資貧。墟所居基以廣宗基。屬所買田。以益墓田。其自爲計者。一屋子容膝而已。在湖庄數十年。學子坌集。不計知愚。來則不拒而口授之。一方丕變。至今餘敎不絶。人多追慕。以爲興學鼻祖焉。考從仕郞公諱尙周。早謝公車業。奬學以育才。自號閑溪。老於大芚山下水石間。宗戚子弟科甲崢嶸。世稱厚福。妣漢陽趙氏。良敬公涓之後。進士廷珩女。祖諱佶進士。曾祖諱慶薰。萬曆進士。號蘭皋。郭再祐火旺之役。與書畫方略。又往從與之誓死。語在忘憂堂手錄。文行見州誌。高祖諱義祿。有功爵判官。配李氏貫月城。益齋先生齊賢之後。武科璡之女。生二男二女。嗚呼。公恢曠之器度。富麗之文章。容人之德。應猝之才。忠厚和舒之氣。融液精微之學。考藝揀材之明。進退辭受之節。皆一世人所服。知者以爲可以當大任。試之當時者。不過龔黃理劇之績。卽今距古寢遠。惟以古循吏稱。豈謂遭遇明時而止於此耶。遺事表著者。宜書之史刻之石。以傳於世。其出於記言者之私牘者。各擧其一二所知而已。平生所涉歷者。尙未得屬之大手。以成一通公乘。聊記所聞於先子者。又考之遺草。以備秉筆君子之採擇焉爾。不肖孫龍萬謹書。

[주-D001] 櫱 : 蘗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8

墓誌銘[趙德鄰] 내종형 趙德鄰

故昇平伯南君箕瑞病歿于月城東寓舍後十年。其子國衡。持狀乞銘于余。余謂之曰。爾來宜也。爾父於吾。爲外從兄弟。相往來相隨。以長以老。知爾父莫吾若也。爾父聰明強記。卓詭不羇。早以文詞鳴。誦十餘萬言。以經明魁三百諸生。歸臥海上。婆娑嬉遊。若無意世事者。一日。強起赴調。試郵丞典籍。出知圻邑。時相有違言。君卽脫冠投狀。時相悔謝。再三送言。因謂君無讓。君不聽。遂南歸。時相恨之。翼年。除濟州通判。濟州在極南漲海外。水陸二千里。非所以處君。而君夷然而行。遇風濤濱死者數矣。旣到。不卑其官。不鄙其民。一心營職。威德幷流。翼年癸巳。島中大饑。暵乾水溢。雨風霜雪極備。隔幷百里如赭。山海之利。蕩然無收入。方秋氣像慘悽。棄妻殺子。雉經魚爛。塡滿街路。君多方拯濟。過意節縮。休其力役。放其工手。不問出入。俾專生業。船粟哺飢。燠𢊒撫摩。仁孚惠洽。島民悅喜。死猶稱德。朝廷嘉之。特命加資。又命留待春賑。乙未六月。始遞歸。島民數百人。越海來愬于備局。請仍差本牧不得。丙申。除順天府使。其地土廣民悍。俗雜難理。君莅職纔三月。合境大和。謠頌以興。時御史黃龜河。監賑于濟州。還言判官南某勒捧私穀。增加石數。濫蒙賞典。還奪其資。君卽日投紱徑歸。州民大小髫白。僧俗男媍。塡郛溢郭。臥轍遮迣。又齊赴于營門。號泣乞留。廵使別關不許去。君不顧而出。浩然而歸。縱酒賦詩。略無幾微見于色辭。己亥。均田使金在魯到順天。順天民齊訴願借南公一年。金貽書銓曹命下。而君不見矣。順民聞之流涕。爲鑄銅碑。以寓去思。濟州亦立竹林祠以報德云。嗟呼惜哉。其死於是。而止於是耶。君自幼狀貌魁梧。骨格骯髒。方娠夢龍而生。仍命以小字。少失恃。隨父處士公。轉徙山庄。家益貧。敗絮糲食恒不給。略不屑意。懷奇負氣。跌宕文史。出語輒驚人。處士公奇愛之。丁卯。中司馬。戊辰。丁外艱。服除。託于月城之贅家。登癸酉第。旣得十餘年。堅臥不出。伯氏佐郞公。年老家居。惜其才憫其貧。使之仕。丁亥。始入都。除郵丞。郵無遺事。方伯牧守見之者。皆知其爲偉器可大任用。惜也。觀其所旣立。殆用而未究耳。夫意曠者。多失於密察。才高者。或病於疎略。而君內行旣完。外美亦彰。祿不逮養。慟慕終身。事伯兄如事父。每自悲糊口於異地。居遠於桑鄕。自買田以屬墓田。捐居基以廣宗基。耽羅歸槖。不持南物。顧獨以數騎遺長姪。蓋爲其主宗事而厚之也。善飮酒。有時轟飮大噱。詼調縱謔。若無甚拘撿。而口不言人過失。與物無忤。倚醉輒誦古人詩律。或雅頌之辭。抑揚頓挫。聲氣淸壯。以洩其磊磈不平之懷。讀書泛覽博取。浩汗無涯涘而獨擅精覈。爲文滂沛大肆。不事雕餙。而卒歸之理。不爲空言也。在濟時所著詩若文。其天文,地紀,星經,山峙,水鍾,人妖,物異,眞仙,靈草。下至蟲魚鳥獸。凡可信可疑可喜可愕。皆於文乎發之。雜以謠俗之好。方言之訛。而必究其所然。得其指歸。要在剖惑破怪。納民軌物。若縛牧營之妖巫。放之出陸。斥廣壤之淫祠。驅之使遠。蓋其剛正之氣。廉白之操。足以屛淫誣而服人心也。其自濟還也。行中人牽一馬來。君咈然不平之。及登陸。其馬蹇。君付其馬館人。館人以爲馬病而留之也。君到順天。館人還其馬。馬病已充肥。君曰。初付汝時。馬病不能行。猶棄物也。豈有意更推也。且汝有醫飼功。不受。其人固納之。遂卻之。其人繫其馬八馬碑而去。八馬碑者。古有賢守。其遞歸也。辭邑人之例贈馬八匹不受。州人立石頌之。名之曰八馬碑云。孔子曰。斯民也。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今夫島民至蠢頑也。湖俗至獷悍也。君爲之則數年之化。一變其風。荒墟再闢。三月之政。一革前習。近悅遠來。至越重溟經累歲。奔走籲號。願借乞留而不知止。濟之民至今稱曰。微南公。吾民靡孑遺也。湖邑棄官小詞。飜入於昇平樂譜而詠歌之。繫馬淸風。亦揭於試士之扁而鋪張之。俄傾之間。風動神速。有如此者。世言末俗。爲鬼爲鬽。終不可化者。徒虛語爾。直道而行。民情可見。而彼番番於一便邑。靳靳於一官資。而終至於斥外降奪者。獨何人哉。吾聞時相羞悔勸行。而君不行。繡衣固要相見。而君不見。彼反視以爲簡己也。豈非末俗易高。險途難盡者哉。君諱九明。箕瑞其字也。南氏系出英毅公敏。廟祀英陽。君爲英陽人。高祖諱義祿。朝散大夫軍器判官。曾祖諱慶薰進士。祖諱佶進士。考諱尙周從仕郞。有文名。屢擧不中。以詩酒自娛。爲鄕里所重。妣漢陽趙氏。漢平府院君良敬公諱涓之後。進士諱廷珩之女。君以辛丑三月日。生于寧海元皋里第。晩家于月城。因自號寓庵。棄果川歸。結屋于影池之畔。讀書其中。訓學諸子。敎授生徒。力耕稼以自給。己亥十月二十五日。考終于寓庵。得年五十有九。配月城李氏。益齋先生齊賢之後。武科璡之女也。先君十四年乙酉沒。葬在月城東面輪火坪辰坐之原。君沒之明年庚子九月。遂葬君于夫人墓後。同原異墳。有二子二女。男國衡,國華。女長適李仁載。次適任一鉉。國衡生五男。曰潤萬。曰龍萬出爲從祖叔父國先後。沃萬,濟萬。餘幼。國華生四男。皆幼。銘曰。

嗚呼箕瑞。世卻曲其行。子履砥也。人苟得爲榮。子脫屣也。萬里滄瀛。視平地也。絶島飢氓。惠以字也。嘉功策名。降之璽也。赤芾蔥珩。尹湖壘也。三月而政成。衆所墍也。八馬碑之淸。摠余轡也。玉點於蠅營。毁言之至也。投紱出城。如涕唾棄也。可見民情。若奪我怙恃也。借寇重迎。墮峴碑之淚也。世道難平。欲起而旋躓也。我銘以貞之。仇我者之恥也。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趙德鄰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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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丁範祖]

範祖素聞嶺南多君子。近頗獲銘其先輩事行。益信所聞不虛。其本之躳修而處公私合義。鄕塾服其善。如寓庵南公。尤可敬焉。公諱九明。字箕瑞。以顯宗辛丑生。丁卯。中司馬。癸酉。登明經科。製講居魁。丁亥。 除郵丞。四歲三郵。輒有聲績。辛卯。除果川縣監。不赴。明年。通判濟州。州比歲大饑。牧使欲令分民儲助賑。公曰。藉人而爲惠。義不可。且令公私俱竭。非計也。報乞方伯。船粟轉哺。通商貨。弛禁蠲役。使各專業。凡施設井井有條。又割俸販陸市取嬴。得米七百石零。繼糶至食麥。一島賴以免溝瘠。上聞之。手書姓名殿壁。命加資。政先敎化。一切禁去氓俗淫祈以曉惑。有妖巫憑牧使內眷煽甚。誘致縛出。海人皆快之。朝廷加留一年。乙未遞歸。明年。除順天府使。赴數月。濟州監賑御史誣啓。公虛張賑穀石數以要寵。卽棄歸。蓋公承除命在京。御史要見公問濟州事。公謂身是御史所按管下舊吏。見之嫌。不肯見。御史啣之。有此啓。將歸。民攔塗挽不得。赴訴廵營乞留。雨立號泣者數千人。其後金相在魯以均田使至順天。民齊訴願得太守如南府使者。均田使素知公惠政。抵書銓曹。復授順天。而公歿已經歲。民爲立銅碑。銘曰。三月爲政。百里太古。公不樂進取。旣釋褐。卜居雞林之影湖。讀書講學以自娛。無當世意。以伯氏命強赴郵丞爲果川。行辭首相。相問官歷曰驟陞也。公出門脫帽抵地。戴笠歸。相慚遣人謝。勑銓曹勸赴。不爲屈。尋判濟州。又乞遞甚力。相囑該曹。愼勿 啓。是曩者怒我故然。律己廉潔。濟州時。吳尙書始復謫海南。問公治狀海人曰。船交海者。日載政聲來。而書附家。無南物。其還。棄所騎病馬海南館。爲順天館人牽還之。公不受。強納之而拒益牢。則繫之八馬碑而去。八馬碑者。高麗有崔太守碩。嘗辭例贈八馬不受。故名其碑。馬繫碑者。謂公廉如崔太守也。後宰順天者。試士題曰。繫馬八馬碑云。夫盡心職事。去就不苟。辭受以義。此三者。豈無本而然哉。公有至性。嘗恨祿不逮親養。推之事伯氏。重宗祀。讓與其土廛。自謀則一屋子而已。喜訓導後進。無愚智。皆口授文義。由是彬彬鄕多學士。至今慕義不竆。幼聰穎。日誦數萬言。晩益篤學。文詞贍暢。其爲海島雜述。恢奇瓌詭。卒歸之道理。蓋其性質文學。發之爲事行者。不可誣也。享年五十有九己亥卒。葬于慶州府東鼈山負辰之原夫人墓後。南氏系出英陽。肇祖曰英毅公諱敏。至監察御史諱須。移家寧海。寔公九世祖。高祖諱義祿。從郭忘憂再祐。有軍功爵判官。曾祖諱慶薰進士。亦參謀軍事。語在忘憂集中。祖諱佶進士。考諱尙周從仕郞。妣漢陽趙氏。進士廷珩女。公娶月城李氏。益齋先生齊賢後。武科璡女。生二男二女。男國衡,國華。女李仁載,任一鉉。國衡生五男。潤萬,龍萬生員,沃萬,濟萬文科早夭。濡萬。國華生三男。濬萬,瀷萬,浩萬。龍萬甫以狀屬範祖爲銘。銘曰。

雖試以粗。亦見其異。斂精而歸。嗟時不利。茫茫來世。我銘是視。後學通政大夫前行承政院同副承旨。錦城丁範祖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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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識[李憲默]

寓庵公之孫潤萬。來示公遺稿及丁學士範祖所撰墓銘。請憲默書之。又求尾語。顧憲默生晩。未及陪杖屨。而飽聞遺風於鄕父老者久矣。不可以不文辭。遂起而歎曰。公釋褐初。負公輔之望於士大夫間。其未大厥施者命也。夫貪榮慕勢。終古滔滔。而公獨投帽於時相之一言。不枉於繡衣之坐邀。其去就操守。毅然君子也。耽羅生祠之報。江南鐵碑之頌。有非毁言可損。天日照盆。再除昇平。而公遽歿不見。豈但爲南民之不幸。於國家亦不無失賢之歎。每讀公笑別江南面面山之詩。亦可想像其胷次坦蕩。直與彭澤歸田之辭。同一氣像。他蹟具於碣銘。此不更贅焉。後學通政大夫行司諫院大司諫驪江李憲默小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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