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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요즘 핫한 고구려 최대강역 ( 원제 : 사서로 고증한 고구려 최대 강역 )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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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구려 지도 재조명 되고 있다? 요즘 핫한 고구려 최대강역 ( 원제 : 사서로 고증한 고구려 최대 강역 )

원글 1 : https://blog.naver.com/gleamkim/221569661180

원글 2 : https://cafe.naver.com/booheong/225978

원본 : https://www.fmkorea.com/best/6749303661

에 대해, 일찍이 이런 지도가 있다. 

과장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고,

실제로 한강 유역은 7세기에 확실히 고구려 땅은 아니었지만,

북부의 경우에는 저게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위의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위서』·『북사』·『주서』·『수서』 등 5세기 이후를 다룬 중국의 사서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2,000리·남북 1,000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당서』·『구오대사』·『오대회요』 등 당나라 이후의 사서에서는

갑자기 동서 3,100리·남북 2,000리로 크게 증대되어 나타난다.

 

또한 고구려의 서쪽 경계 역시

『위서』·『북사』·『주서』 등에서는 요동으로 인식되었으나,

『구당서』·『신당서』·『구오대사』·『오대회요』 등에서는

요하를 건너 영주(榮州)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에 근거했을 때 고구려의 세력권은

(당나라의 1리는 약 560m이므로, 3,100리는 1,736km이고 2,000리는 1,120km이다.)

 

이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게 된다.

이때 남쪽 경계를 하슬라(강릉)로 잡은 것은

3월에, 왕이 하슬라(何瑟羅) 땅이 말갈(靺鞨)에 맞닿아 있으니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경(京)을 폐지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都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三月, 王以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5년 -

 

이 기록에 근거하며

실위를 일부나마 고구려 세력권에 넣은 것은

이다조(李多祚)의 선조는 말갈 추장으로

황두도독(黃頭都督)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중국에 들어오니 세계(世系)가 요원해졌다.

李多祚, 其先靺鞨酋長, 號黃頭都督, 後入中國, 世系湮遠.

『신당서』 권109 이다조열전 -

이 기록의 황두도독이 곧 황두실위 도독이기 때문이다.

(저 도독위를 수여한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고 거란은

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을 지키며

그 무리와 거란병·말갈병을 이끌고 내부하여,

아들 헌성을 보내 (당나라) 조정에 호소하였다.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與契丹·靺鞨兵內附, 遣子獻誠訴諸朝.

『신당서』 권110 천남생열전 -

 
 
 

이 기록에서 고구려 멸망 직전까지 고구려군에 동원되었음이 확인된다.

반대로 당나라에 동원되는 기록은 660년부터 사라지며

저 연남생의 투항 이후에야 다시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멸망 직전 고구려의 영역은

통념과 달리 이전보다 넓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7세기 후반 고구려 영향권'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상 끝.

 
 

참고문헌:

김재효, 강연석, 고호경, 「전통적인 길이 척도 환산에 대한 역사ㆍ문화적 재고」, 『한국의사학회지』 23(2), 2010, 15-22.

이민수, 「高句麗 遺民 李他仁의 族源과 柵城 褥薩 授與 배경에 대한 고찰」, 『대구사학』 128, 2017, 143-178.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1-167.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157-218.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54-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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