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여원 연합군의 1차 일본 정벌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4. 9.
반응형

여원 연합군의 1차 일본 정벌

원나라의 일본 정복 야욕에 휘말리다

시대

1274년

1274년 10월, 원나라 쿠빌라이는 고려와 연합군을 조직해 일본 정벌을 시작한다. 마침내 여원 연합군은 일본 영토에 도착하여 대규모로 전투를 벌였으며, 일본군은 연합군에게 거듭 패배당하였다. 하지만 지휘부 내에서 몽골과 고려의 의견이 대립하는 가운데, 연합군 함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귀환해야 했다. 이로써 여원 연합군은 일본 정벌에 실패하였다.

목차

배경

1270년 배중손을 위시로 삼별초가 원나라에 항거하다.
1271년 삼별초군이 탐라로 이동하다.
1273년 원나라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제주도를 장악하다.

설명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은 쿠빌라이, 즉 원 세조(世祖, 재위 1260~1294)의 영토 확장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재위 기간에 중국 대륙을 장악한 쿠빌라이는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조공을 거부하는 일본을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를 일본 정벌의 디딤돌로 삼아 군사와 군량, 전함 등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염려한 고려는 일본 정벌을 막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40여 년에 걸쳐 전란이 계속된 터라 나라와 민생은 거의 도탄에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처지였으므로 쿠빌라이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초 쿠빌라이는 군사를 일으키기보다 회유 전략으로 일본을 복속시키기 위해 1266년 이후 일본을 여러 차례 설득했으나, 일본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1266년에는 추밀원부사 송군비(宋君斐)의 안내로 일본에 가던 원나라 사신이 풍랑을 맞아 되돌아왔다. 그러자 몽골에 투항한 고려인 조이(趙彝)가 “고려와 일본이 선린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원나라에 공동으로 대적할 뜻을 갖고 있고, 때문에 송군비가 고의로 일본의 사신 행렬을 방해했다.”라고 쿠빌라이에게 보고한다. 송군비가 원나라로 가서 해명했지만, 쿠빌라이는 고려를 불신하며 계속 압박했다.

이듬해에는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쿠빌라이의 친서를 전달하도록 했으나 일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쿠빌라이는 당시 고려 원종에게 조서를 보내 “이제 다시 사신을 보내 반드시 일본에 도달시키려 하니 당신은 마땅히 중신으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고 전과 같이 지체시키고 방해하지 말라.”라고 경고한다.

1268년에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사전(申思佺)과 반부 등의 안내로 일본으로 향하던 원나라 사신 흑적(黑的), 은홍(殷弘)이 대마도에서 일본인 두 명을 사로잡아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에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하며 이들을 일본으로 보내 원나라의 뜻을 전하도록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답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272년 7월, 금주(金州, 김해)에 일본 배가 정박했다. 당시 경상도 안무사(按撫使) 조자일(曹子一)은 고려가 일본과 왕래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원나라에게 문책을 당할 것이 우려되어 일본 배를 은밀하게 돌려보냈다. 이 일을 알게 된 홍다구는 쿠빌라이에게 이를 알리고 조자일을 문초하고 죽여 버린다.

마침내 쿠빌라이는 무력으로 일본을 정벌하기로 결심하고 1274년에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한다. 고려에게는 전함을 건조하고 군사와 쌀을 지원하도록 했다. 전함 건조를 위해 고려인 3만여 명이 징집되기도 했다. 《고려사절요》는 ‘여러 가지 일이 매우 번거롭고 바쁘며, 기한이 급박하여 몰아치기를 바람과 번개 같이 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 하고 적고 있다. 같은 해 2월에는 ‘공사 재물이 모두 고갈되었고 또 배를 건조하는 일로 농사지을 때를 잃게 됐으니 비단으로도 양곡을 사기 어렵지 않을까 두렵다’라는 내용의 표문을 원나라에 보냈다. 하지만 고려의 간곡한 호소도 쿠빌라이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드디어 일본 정벌을 감행한다. 몽골군과 한(漢)군 2만 5,000명, 고려 육군 8,000명과 수군 6,700명으로 모두 4만 명 규모였다. 고려군은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 김방경이 통솔했고, 몽골군은 도원수 홀돈(忽敦)이 이끌었다. 이들은 전함 900여 척에 나눠 타고 합포(마산)를 출발해 대마도(大馬島, 쓰시마 섬)를 장악한 뒤 일기도(壹岐島, 이키 섬)로 나아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000여 명이 몽골이군 우부원수(右副元帥) 홍다구와 고려군 지병마사(知兵馬事) 박지량(朴之亮) 등에 의해 전사했다.

이어서 여원 연합군은 규슈, 하카다 만, 사와라 등지에 상륙해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도 일본군은 연합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내륙 쪽으로 계속 밀렸다. 특히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일본군은 참패를 당했다. 《고려사》는 일본군의 쓰러진 시체가 삼대(삼의 줄기)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지켜본 홀돈은 “몽골인이 잘 싸운다고 하지만, 이 이상 더 잘할 수는 없다.” 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원 세조 쿠빌라이 칸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1271년 원나라를 세우고 연경을 수도로 정했으며, 1279년 중국을 마침내 통일한다. 그는 동북아시아로까지 영토 확장을 꾀하여 고구려를 통해 일본까지 정복하고자 하였다.

날이 저물고 전투가 그치자 연합군 지휘부는 이후 전략을 논의했는데, 여기에서 의견이 서로 엇갈린다. 김방경은 홀돈과 홍다구에게 “적의 땅에 들어와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니, 배수진을 치고 계속 공격해야 한다.”라며 육지에 교두보를 확보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홀돈은 “군사의 수가 적고 피로하니, 많은 적군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 하며 삼랑포에 정박한 전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반박했다. 때마침 몽골군 좌부원수(左副元帥) 유복형(劉復亨)이 일본군의 화살에 맞아 전함으로 향하니, 홀돈의 주장대로 연합군은 삼랑포로 물러났다.

하지만 전함으로 돌아간 연합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밤새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가 내려 삼랑포에 있던 전함 9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이 바위와 벼랑에 부딪혀 침몰했기 때문이다. 고려군 좌군사 김신(金侁)을 비롯해 수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특히 몽골이 일본 정벌을 서두르기 위해 고려에게 전함 건조를 재촉한 나머지 4개월 만에 급조된 전함이어서 피해가 더 컸다. 연합군으로서는 더 이상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셈이다. 이로 인해 연합군은 황급히 귀환하였다.

연합군이 11월 합포로 되돌아왔을 당시 생환하지 못한 군사는 1만 3,500여 명에 이르렀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이 즉위한 지 4개월, 원나라의 거듭된 독촉에 따라 감행된 여원 연합군의 1차 일본 정벌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

〈몽골래습회사〉의 일부로 1274년 여몽 연합군과 일본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다.

1차 원정에 실패한 원나라는 1280년 2차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기구로 개경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정동행성)을 설치한다. 1281년 5월, 여원 연합군은 마침내 다시 일본으로 향한다. 김방경의 고려군과 흔도와 홍다구의 몽골이군 및 한군을 합해 동로군(東路軍) 5만 명이 전함 900척에 나눠 타고 먼저 출동했고, 남만(南蠻)의 범문호(范文虎)가 이끄는 강남군(江南軍) 10만 명이 전함 3,500척과 함께 후발대로 합세했다.

연합군은 먼저 대마도의 일본 수비대를 격퇴한 뒤 일기도를 점령했다. 이어 하카다 만에서 육지로 진격하려던 연합군은 일본이 해안선 20킬로미터를 따라 설치한 높이 2미터 안팎의 방루에 막혀 상륙 작전을 포기했다. 연합군의 1차 정벌 이후 일본은 방어 진지를 구축하며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연합군은 방루를 피해 인근 섬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홍다구의 몽골군이 6월 초 지하도(志賀島, 시카노 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다. 김방경의 고려군은 일본군 300여 명을 죽였지만, 홍다구는 일본군에게 돌파되어 패주하다가, 몽골이군 사령관 왕만호(王萬戶)의 지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연합군은 이튿날 전투에서도 패배한 데다 때마침 군중에 전염병이 돌아 3,000여 명이 죽는 바람에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에 흔도와 홍다구는 회군을 논의했으나 김방경은 “강남군이 도착하면 힘을 합쳐 다시 공격하자.”라며 반대했다.

얼마 뒤 강남군이 전장에 도착하자, 연합군은 다시 전열을 갖춰 하카다 만에 대한 일대 공세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태풍이 연합군의 전함을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강남군이 모두 물에 빠져, 그 시체가 밀물과 썰물에 밀리는 바람에 항구가 막혀 밟고 다닐 정도였다. 이로써 여원 연합군의 2차 일본 정벌도 실패하였다.

일본은 두 차례나 자신들을 지켜 준 태풍을 신풍(神風, 가미카제)이라고 불렀다. 2차 정벌에서 원나라 쪽은 10만여 명, 고려는 7,000여 명이 전사했다. 잇따른 실패에도 쿠빌라이는 1294년 사망할 때까지 일본 정벌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이에 따라 고려의 물질적 피해와 노동력 손실도 계속됐다.

[1차 정벌]

1274년 5월 당시 조선소는 목재가 풍부한 부안의 변산반도와 장흥의 천관산에 소재해 대선 300척과 소선 600척을 합해 모두 900척을 건조하였다. 원정군 지휘부는 총사령관 혼도, 홍다구·유복형을 부원수로, 고려군을 이끄는 김방경은 승상 다음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는 직위가 수여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면 일찍이 신라·백제·고구려 임금들이 수·당의 황제로부터 받은 작위였으나 홍다구·유복형보다는 아래였다. 고려군 부사는 김선 김문비였다. 합포를 출발한 것이 1274년 10월 3일이었다.

 

‘고려사’에는 몽골군이 2만 5천 명, 고려군이 장병 8천 명과 초공(梢工/뱃사공)·인해(引海/바닷길 안내자)·수부(水夫/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 7,700명 등 1만 4,7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총병력은 3만 9,700명이다. 몽골군은 원정군 배후에서 독전대 역할을 하고 선봉은 고려군이 맡았다.

 

병선 900척은 100~300톤 급 선박인 천료주(千料舟) 300척, 상륙용 함정인 발도로 경질주(拔都魯經疾舟) 300척, 음료수를 실은 흡수주(吸水舟)가 300척이었다. 바토르(拔都魯)는 몽골어로 용사라는 뜻이다. 이중 장병과 군량, 말과 기타 군수품을 적재한 천료주가 주력함이었다. 몽골 원정군은 유목민의 전통적인 군사 시스템인 천호제를 취해 그 아래 백호. 십 호로 나누고 각각 지휘관을 두었다. 전함 1척이 각각 상륙정과 흡수주를 거느리고 있었다.

 

10월 5일(음력/이하 모두 음력) 쓰시마 섬 사스우라(현재의 고모다 지역)에 상륙했다. 쓰시마 섬 도주 소 스케구니(宗助國)는 일족 80여 명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지만 모두 죽음으로 결사항전을 하였다. 이즈하라군을 전멸시킨 여몽연합군은 휴식을 취한 후 10월 14일을 이키 섬에 상륙해 히츠메 성을 함락하였다. 성주 다이라노 가게다카는 성을 지키지 못해 최후에 자결하였다. 10월 19일 일부 병력이 하카타 만의 서부 해안 이마즈에 발도로경질주를 진격시켜 우선 외곽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 다음날 하카타 만의 중앙부 사와라가와 어귀에 위치한 모모치바라, 이키노하마(지금의 오키노하마), 하코자키 해안 등 3개 방면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이 전개됐다.

 

일본 측 사료 ‘본토방위전사’ 기록을 보면 ‘10월 19일 이마즈 해안에 상륙한 일부 몽골 부대는 감시대를 밀어내고 성을 빼앗았다. 그중 일부는 다음날 모모치바라 해변에 상륙할 주력군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동진해 모모치바라의 남방 소하라산을 점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원구기략’에 기록된 일본 측 병력은 5,375기(騎)였는데 사무라이 한 명에 적어도 종자 1명이 따랐기 때문에 총병력은 1만 750명 이상이었다.

 

몽골 병사들은 거창하게 갑주를 차려입은 일본 사무라이와 달리 가능한 경장(輕裝)을 했으며 머리에 얇은 철제 투구를 쓰고 가죽 갑옷과 장화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무기는 손에 단궁(短弓) 혹은 장창(長槍)을 들고 허리에는 곡도(曲刀. 휘어진 칼) 혹은 도끼를 찼다.

1.5미터 길이의 단궁은 탄력성이 강해 사정거리가 200미터에 달했는데 이 무기를 지닌 병사들은 화살 통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었다. 기타 무기로는 투척용 석탄과 폭렬탄이 있었다. 이는 쇠 혹은 도자기로 만든 둥근 용기에 화약을 집어넣은 것으로 점화해 투척하면 공중에서 작렬하여 엄청난 굉음을 냈다. 여몽연합군은 또 석궁을 가지고 있어 일본 배에는 치명적이었다. 석궁은 석탄(石彈)을 두레박 식 용기에 담아 날리는 투석기로 크기가 사람 머리만 해 일본 병선은 소형배라 맞으면 격침되었다.

 

일본은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고 무기로는 긴 일본도와 활을 들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백병전을 중시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백병전보다는 단궁을 주 무기로 적의 접근을 봉쇄했기에 일본도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 활은 몽고보다 길었는데 사정거리가 100미터인데 몽골 활은 사정거리가 200미터였다. 유목민 몽골은 활을 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속사(速射)가 가능해 일본군이 한번 쏘는 동안 세발이 가능하였다. 더구나 몽골은 화살촉에 독을 묻혀 치명적이었다. 일본군 전투 방식은 여전히 삼국지연의 시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우선 무사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적진에 우는 살을 한 발 쏘아 개전 신호를 알린다. 전투가 개시되면 적장과 맞서 “나로 말하면....”이라고 운을 떼며 자기 가문의 내력, 이름, 벼슬, 전적 등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다음 1 대 1 대결을 통해 용력을 뽐낸다. 그러고는 화살 싸움이 벌어지고 마지막으로 돌격 백병전으로 승패를 결정짓는다.

이런 고전적 방식과 달리 몽골군은 집단 밀집대형으로 큰 북을 치며 돌격해오는 몽골군 전법과 현격하게 후진적이었다.

 

일본의 ‘팔번우동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몽골군은 수백 병이 대오를 정렬하여 화살을 비 오듯 쏘는 데다 창이 길고 갑옷도 빈틈이 없었다. 그들은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면 중앙을 활짝 열어 안으로 몰아넣은 다음 양쪽에서 포위 공격했다. 갑옷은 가볍고 말도 잘 탔으며 힘도 강했다. 용맹하기 짝이 없었고 임기응변도의 진퇴에 강했다. 물러날 때는 철포로 철환을 발사했다. 발사하기만 하면 사방에 화염과 연기가 치솟아 주위를 모두 덮어버렸다.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10월 20일 하카타 항의 하코자키 지구 전투에서 일본군은 여몽연합군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일본군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용맹했다. 자기 땅을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잇쇼켄메이(一所懸命)은 가마쿠라 무사들에게 최고의 덕목이었다. 전장에서 비겁하게 도망친 무사는 막부에 의해 영지가 삭감되거나 몰수당해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있었던 당시 일본 사회의 시스템이 발휘를 한 것이다.

 

몽골군은 하카타 만에 상륙하면 곧장 다자이후로 진격해서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어느덧 일몰 시간이 다가온 데다 지리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10월 20일 전투에서 주력 병기인 단궁의 화살이 다한 게 진짜 이유였다.

 

10월 20일 밤 여몽연합군은 승세에도 불구하고 육상 교두보에서 야영하지 않고 상륙정을 타고 하카타 만에 떠 있던 주력 함대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숙영하지 않았던 이유는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야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함대로 복귀한 후 여몽연합군 수뇌부는 김방경이 하카타 교두보에서 숙영한 후 다음날 일본군과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한 반면 총사령관 혼도와 부원수 홍다구는 아무리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하니 이쯤에서 철병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던 차에 화살을 맞은 몽골군 부원수 유복형이 배에 오르자 혼도는 결심을 굳히고 군사를 거두었다.

 

10월 20일 심야에서부터 21일 새벽에 하카타만에 몰아닥친 폭풍우로 큰 타격을 받는다. 전함끼리 부딪쳐 200여 척이 침몰했고 고려군 부사 김선은 익사했다. 결국 여몽연합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고려사에는 돌아오지 못한 자가 1만 3,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합포에 11월 20일 귀환했다.

 

-------

*국제신문 기자 재직 중 80년 5공에 의해 강제 해직당하고 나중 월간 경향 차장 월간중앙 주간을 역임한 정순태씨의 역작입니다. 꼼꼼한 답사와 사료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대해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읽기를 권합니다.

참고로 일본 측 주장은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로 인해 왜구가 생겼다고 합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이후 왜구는 고려와 중국 해안을 강탈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관련 저의 블로그 글(2020.09.13) '나를 따르라 vs 돌격 앞으로'를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제1차 원정]

1265년 몽골 제국의 5대 칸 쿠빌라이 칸은 남송 정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남정복의 계획을 주위에 묻던 중 고려 출신인 조이(趙彛)[2]가 남송과 교역하는 밀접한 나라로 일본이라는 곳이 있다면서 남송을 고립시키려면 일본을 초유(불러서 타이름)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게 좋다 고 진언했다.

이것이 쿠빌라이 칸이 일본 정복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66년 쿠빌라이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고려 재상 이장용(李藏用)은 이것이 고려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것임을 예견했고 사신들이 바다에 어두운 점을 이용, 일부러 바다가 험난하고 풍랑이 심하다는 등 겁을 잔뜩 주었고 이 계략은 제대로 먹혀 사신들은 겁에 질려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거제도까지만 간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쿠빌라이가 아니었으니, 이듬해인 1267년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려에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했고 이번에는 할수 없이 반부(潘阜)라는 관리를 사신으로 삼아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했다.

 

사신은 다자이후에 도착해 국서를 전달했고 당시 대륙의 정세를 전해줬으나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유사 이래 한번도 외침을 당한적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데다 교토의 덴노를 힘으로 누르고 있는 가마쿠라 막부에선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사신을 5개월동안이나 다자이후에 머물게 하며 박대했다.[3]

 

사신은 고려로 귀환했고 고려에선 다시 이를 몽골에 보고했는데 쿠빌라이는 보고 내용을 불신하며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사신 일행은 쓰시마 섬까지만 가서 섬사람 두명만 잡아서 돌아왔다. 빈손으로 가면 질책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듯.

 

쿠빌라이는 섬 사람 두 명을 잡아온것에 대해 크게 기뻐했고 사신들을 치하한 뒤 섬사람 두 명은 다시 돌려보냈다.

 

섬사람 두명을 돌려보낸 고려는 다시 다자이후에 국서를 전달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은 무시로 일관했다.[4]

 

1268년에 쿠빌라이는 남송을 공격할 거라고 하며 고려에 병선의 건조와 군량 비축을 명했다.[5]

 

1270년에 쿠빌라이는 고려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했다. 물론 목적은 일본 침공이었다. 이 둔전 정책은 고려 백성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듬 해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글을 올려 가을까지 군량과 말먹이는 힘이 닿는데까지 조달할 것이니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해줄 것을 호소했다.

 

1271년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번 사신인 조양필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대외창구인 다자이후에 가서 교토의 덴노와 직접 교섭을 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불과 18세에 불과한 호죠 토키무네였는데 호죠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서일본의 슈고(지방관)와 지토(슈고보다 하위 계급)들에게 수비를 강화하라고 명했다.

 

결국, 쿠빌라이는 일본이 말로는 도저히 안된다는것을 알게 되었고 즉각 고려에 병선 건조와 징병을 명했다.

 

1272년, 일본 원정에 방해가 되던 삼별초를 토벌했다.

 

1273년, 마지막 초유사가 귀환했고 쿠빌라이는 삼별초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을 모아 일본 원정을 결의했다.

 

1274년 홍다구(洪茶丘)[6]의 악랄한 독촉으로 불과 4개월만에 전함 900척이 건조됐다.[7]

 

지휘관은 측은 몽골인 흔도, 귀화한 고려인 홍다구, 송나라 유복형이었고 고려 측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몽골군이 2만 5천, 고려군은 전투병 8천에 뱃사공, 바닷길 안내자, 수부 6천 7백으로 총 1만 4천7백이었다.

 

1274년음력 10월 5일 여몽연합군은 출항 이틀째인 쓰시마 섬 남단의 사스우라에 상륙해 2시간만에 막부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했다.

 

음력 10월 14일, 이키 섬에 몽골군이 상륙했고 이 소식은 즉각 이키 섬의 슈고 대리인 다이라노 가게다카에게 전해졌다. 다이라노 가게다카는 가신 100명을 이끌고 출전했고 연합군과 조우해 싸웠으나 병력, 무기, 전투 방식의 열세로 인해 참패했다. (아래 무력차 항목 참조) 다이라노 가게다카는 이키 섬의 본거지인 히츠메 성으로 달아나 농성을 시작했지만 병력의 차이가 너무 커 결국 함락됐고 그는 다자이후에 전령을 보내 위급함을 알린뒤 목을 매고 자결했다.

 

음력 10월 17일, 여몽연합군은 다카시마의 아오우와 후네가라쓰에 상륙했다. 막부 무사들도 급히 다카시마에 상륙해 산성을 구축하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전황은 모든 것이 일본에 불리했다. 일본 무사들의 개인 전법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집단 전법, 몽골군이 쓰는 철포(鐵砲)의 위력에 막부군은 압도당했다. 이어 여몽연합군은 겐카이나다(玄海灘, 현해탄)를 지나 하카타 만으로 향했다.

 

음력 10월 19일, 여몽연합군의 일부 병력이 하카타 만 서부 해안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했고 다음날 모모치바라, 이키노하마, 하코자키 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다자이후의 총사령관 쇼니 쓰네스케는 이미 쓰시마 섬과 이키 섬에서 전한 급보를 듣고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에 급사를 전했고 규슈 내의 슈고, 지토 및 고케닌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하카타 지구에는 총사령관의 동생 쇼니 가케스케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력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병력은 대략 1만 7천명 이상이었다.

 

음력 10월 20일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삼랑포(現 사와라)를 거쳐 내륙으로 진격하며 닥치는대로 적군을 쓰러뜨렸다. 몽골군 지휘관 흔도조차 감탄할 정도였던 고려군은 선봉에서 크게 활약했고 몽골군 주력부대 또한 막부군을 패퇴시킴으로서 막부군의 하카타 만 해안방위선 30km가 전부 붕괴되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코자키 지구에선 제법 막부군이 선전을 했으니 전선 사령관 쇼니 가케스케는 맹렬히 연합군에 항전했는데 화살을 쏴 몽골군 장수를 낙마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9]

 

패배한 막부군은 다자이후의 서쪽 관문 미즈 성에 집결했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는데 어쩐 일인지 연합군은 추격을 해오지 않았다.

 

음력 10월 20일 연합군은 함대로 귀환해 차후 전투 계획을 논의했다.[10] 그런데....

 

음력 10월 20일과 21일 사이 새벽, 하카타 만에 대폭풍이 몰아쳤고 이는 연합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900척의 전함중 200척이 하룻밤 사이 침몰했다. 전투의 지속여부는 의미없었고 오직 철수뿐이었다.

 

참고로 Discovery 채널에서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가 나온 적이 있는데,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너무 빨리 배를 건조하는 데 발생한 내구도 문제와, 배가 부족한 나머지 항해에 부적합한 강가용 배를 징발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11]

 

태풍 덕이었지만 어찌됐든 일본은 승리했다.

麗蒙연합함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5일(이하 麗蒙연합군의 日本정벌 관련 날짜는 모두 음력) 오후 4시경, 對馬島 아랫섬의 사스우라(佐須浦)에 상륙했다. 사스우라가 바로 지금의 코모다이다. 對馬島의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는 아랫섬의 「中央山地」를 가운데 둔 반대측 북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八幡愚童記」(팔번우동기)라는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앞바다를 뒤덮은 異國船(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이즈하라의 國府館(국부관)에 외적의 침입을 고했다. 당시 對馬島主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武士였다. 그는 즉각 一族郎黨 80여 騎를 이끌고 그날 밤중에 사스우라로 진발했다. 뒤따랐던 一族郎黨 중에는 助國의 아들 宗右馬次郞이라는 소년무사로부터 宗甲斐六郞이라는 칠순의 노인도 섞여 있었다. 이 80여 騎는 이즈하라 주둔 武士團의 총력이었다고 한다.

다음날인 10월6일 오전 2시경, 코모다에 도착한 助國은 오전 6시 眞繼男이라고 하는 통역을 넣어 해안에 상륙해 있던 몽골군 지휘관에게 그 來意를 물었지만, 몽골군은 雜談(잡담) 제하고 화살부터 메뚜기떼처럼 날렸다.

「宗氏家譜」에 따르면 助國은 부하들을 독전하며 300명의 상륙부대를 일단 바다로 물러나게 했지만, 麗蒙軍은 다시 전함 7, 8척으로부터 약 1000명의 軍勢를 상륙시켜 맹공을 가했다. 전투는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對馬島軍은 전멸했다.

助國은 戰死 직전에 郎黨의 小太郞과 兵衛次郞을 불러 「전장으로부터 탈출하여, 危急을 다자이후(大宰府)에 고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당시 大宰府는 규슈(九州)를 통괄지휘하는 鎭西奉行(大宰)의 政廳(정청) 소재지였다. 鎭西奉行은 히젠(肥前)國의 守護(수호: 가마쿠라 幕府 시대의 지방장관)인 쇼니 츠네쓰케(小貳經資)였다.

助國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진두에서 용전했지만, 그것은 螳螂拒轍(당랑거철: 사마귀가 수레 앞을 막아 섬)이었다. 敗할줄 뻔히 알고도 회피하지 않고 출진한 것이라면 그건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는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武士의 역할」을 완수했다.

「對馬島史」에는 연합군의 主力은 對馬 중앙부 아소우(淺茅)灣에 집결, 그 일부가 코모다에 내습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코모다 이외에 對馬의 주요 거점들인 히타카츠(比田勝), 미네우라(三根浦), 카시우라(加志浦) 등지에도 상륙, 거기서도 在地武士들과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군은 이후 열흘 가까이 對馬島에 머물며 약탈을 감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투의 끝머리란 으레 그러한 것― 더구나 勝者가 악명 높은 몽골軍임에랴…. 살아남은 주민들은 모두 깊은 산 속으로 피난했을 터이었다.

지금의 코모다는 필자가 이제껏 방문했던 일본의 浦口들 가운데 가장 쓸쓸하고 가난한 곳이란 느낌을 받았다. 「對馬島의 젖줄」이었던 한반도와 가까운 코모다―帆船(범선)시대엔 휘영하게 번영했을 것이다. 코모다 해변의 古戰場을 걸었다. 해변에는 宗助國을 모시는 「코모다하마 神社」가 쇠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자기 나라를 지키려다 전몰한 宗助國의 石碑(석비) 앞에서 敬意를 표했다.

神社로부터 약 200m 정도 남방의 해안에는 宗助國의 부하인 사이토 스케사다(齊藤資定)라는 勇士가 분전하다가 최후엔 스스로 자기 머리를 바위에 쳐박아 죽었다는 현장도 표시되어 있다. 勇士의 최후란 이처럼 東西古今과 彼我(피아)를 막론하고 悲壯美(비장미)가 있다.

이곳 사스가와(佐須川)를 따라 내륙부로 들어가면 「카시네」라는 작은 마을 있다. 이곳 法淸寺에는 助國의 「胴塚」(동총)이 있다. 목 없는 몸만 묻었던 무덤이다.

이즈하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카미자카(上見坂) 전망대에 올랐다. 여기서 내려다본 아소우(淺茅)灣은 일본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육지의 침강에 의해 생성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그 돌출부들이 문어발처럼 얽히고설켜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 麗蒙연합군의 大함대가 정박했다. 아소우만을 경계로 對馬島는 윗섬과 아랫섬으로 나눠진다.

對馬島까지 와서 百濟人(백제인)들이 만든 일본 最古의 성터인 카네타노키(金田城)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에서 「朝鮮式山城」으로도 불리고 있는 이 城은 663년 백제부흥군-倭軍의 연합군이 白村江(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羅唐연합군에게 패전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百濟 유민들과 왜인들이 羅唐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667년에 축조한 것이다. 성벽은 높이 2∼5m, 길이 5.4km. 이후 金田城은 大陸의 동향을 살피는 日本의 최전선 기지로 활용되었다.

카네타山城은 對馬공항에서 코모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필자는 코모다에 들어서기 전에 택시를 잠시 세워놓고 카네타山城의 성돌이 빤히 보이는 지점까지 올랐다가 갈 길이 바빠 下山했다. 대마공항-카네타城-이즈하라 중심가 코스를 일주한 후 필자가 지불한 택시요금은 1만5080엔이었다.

對馬島를 정복한 연합군은 이즈하라港 등지에서 약 열흘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 공격목표인 이키시마(壹岐島)로 진발한다. 여기서 잠깐,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몽골(大元)의 황제 쿠빌라이는 왜 日本원정을 감행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元史」 日本傳에 『至元 2년(1265), 고려사람인 趙彛(조이) 등이 일본국과 通해야 한다고 아룀으로써 使臣을 뽑았다』는 구절이 있다. 바로 이것이 世祖 쿠빌라이가 일본침공을 결의하는 동기였다고 한다.

즉, 쿠빌라이가 南宋의 정복에 한창 분망할 때 趙彛가 『高麗의 동방 해상에 日本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南宋과 교역하는 밀접한 관계인 만큼 (南宋을 고립시키려면) 일본을 招諭(초유)하여 (몽골 편으로) 끌어들이면 좋다』는 계책을 내 놓았다는 것이다.

趙彛는 경남 咸安 출신으로서 그곳이 일본에의 門戶(문호)인 合浦 및 金海에 가까워 일본사정에 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 몽골군에 붙어 몽골로 들어가 관료가 되었는데, 進士試에 합격할 정도의 수재였는 데다 여러 나라 말을 구사했으며 행정수완도 제법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곧 두각을 나타내어 쿠빌라이의 知遇(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런 그가 쿠빌라이로부터 『어떻게 南宋을 제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위와 같이 답변했다는 것이다.

趙彛의 獻策(헌책)에 따라 世祖 쿠빌라이는 日本에 「정중한」 國書를 보내 通交를 요구했다. 그 國書가 비록 정중한 형식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 골자는 물론 일본에 대해 服屬(복속)을 촉구하는 것으로서, 만약 그것을 거부하면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점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었다.

이같은 通交 요구가 무력행사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일본이 끝내 服屬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고려 정부는 처음부터 몽골의 일본원정을 저지하려고 부심하고 있었다. 일본원정을 강행할 경우 인적·물적으로 피해가 가장 큰 나라는 高麗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일본 招諭(초유)와 그 원정을 저지하려고 비상하게 노력했던 인물은 당시 고려의 재상 李藏用(이장용)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蒙使(몽사)의 일본行부터 막으려고 했다.

趙彛의 진언이 있었던 다음해인 1266년 11월, 쿠빌라이는 병부시랑(국방차관) 黑的과 예부시랑(문교차관) 殷弘을 日本招諭使(일본초유사)로서 고려에 파견했는데, 그들이 고려국왕 元宗에게 전달한 詔書(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그대 나라 사람 趙彛가 와서 일본은 그대 나라와 가깝다고 말했다. (中略) 漢·唐 이래 일본은 중국과 (사신을) 통했다. 故로 지금 黑的 등을 일본에 보내 통교하려 한다. 卿(경: 고려 국왕 元宗)은 사신이 갈 수 있도록 길을 열도록 하라. (中略) 風濤險阻(풍도험조)를 이유로 사양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 초유사는 일본에 보내는 쿠빌라이의 國書도 휴대했는데, 그 國書의 말미에 『서로 通好하지 않는 것을 어찌 一家의 이치라 하겠는가. 兵을 사용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것 누구에게 좋으랴. 王은 그것을 깊이 생각하라』고 쓰여 있었다.

李藏用은 이 國書의 내용을 알고 쿠빌라이의 욕망이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을 내다보았다. 有史 이래 한 번도 외침을 받지 않았다는 프라이드―더구나 유화적인 京都(교토)의 天皇조정을 힘으로 찍어누르고 실질적으로 日本을 지배하는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그같은 위협적인 언사에 굴복해서 招諭에 응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난처해지는 것은 高麗다. 결국 몽골이 일본원정을 감행할 것이고, 그럴 경우 高麗가 그 선봉을 강요당해 상당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李藏用은 蒙使의 일본行을 저지하기 위해 하나의 연극을 연출했다. 黑的 등 蒙使에게 『일본 招諭가 有害無益(유해무익)하고, 도중의 바다는 험난하기 때문에 결코 일본에 건너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黑的과 殷弘은 출발 직전 李藏用의 편지를 읽었다. 바다에 약한 그들은 겁을 집어먹었던 것 같다. 일단 蒙使 일행은 고려의 樞密院副使 宋君斐(송군비)의 안내로 合浦를 경유하여 巨濟島에까지 내려갔지만, 거기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蒙使 일행은 『風濤險阻 때문에 귀국하게 되었다』고 쿠빌라이에게 보고했다. 물론 李藏用이 연출한 「연극」이 일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때 李藏用도 쿠빌라이에게 다음 내용의 辨明書를 보냈다.

<巨濟島에 이르러 멀리 對馬島를 바라보니 大洋萬里, 風濤가 하늘을 치고 (中略) 어찌 上國의 사신을 받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가볍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설사 對馬島에 이를지라도 그 풍속이 완고하고 추악해서 예의가 없습니다. 만약 不軌(불궤)가 있으면 장차 이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이러하여 모두 두려워함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본래 小邦(소방: 고려)과 通好(통호)하지 않고, 다만 對馬島人이 때때로 무역의 일로 金州(金海)를 왕래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야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266년의 제1차 일본 초유에 이어 1267년 제2차 초유, 1268년의 제3차 초유, 1269년의 제4차 초유를 거듭 시도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혀 응답을 보이지 않았다.

1270년 제5차의 사신 趙良弼(조양필)은 일본이 朝貢(조공)하지 않으면 출병한다는 쿠빌라이의 의도를 통고했다. 趙良弼은 陜西路宣撫使(섬서로선무사)를 역임한 女眞人이었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 본초유사를 자원했던 거물급이다. 그는 이전의 4차에 걸친 초유사와는 달리 교토(京都)行을 주장했다. 가마쿠라 幕府와 京都 조정을 은근히 갈라놓으려는 책략을 구사하려고 했을 것이다.

西部 일본의 통괄기관이었던 大宰府가 그의 수십 회에 걸친 요청을 거부하자 그는 國書의 寫本(사본)을 만들어 가마쿠라 幕府에 보냈다. 이때 가마쿠라 幕府의 최고권력자인 「執權」(집권)은 나이 불과 18세의 청년 호조 토키무네(北條時宗·1251~1284)이었다. 時宗은 단호하게 朝貢(조공)을 거부하고 京都 조정의 타협적인 태도를 억누르는 다음, 西國의 守護·地頭(지두: 우리나라의 현감 정도의 벼슬)들에게 방위 준비를 下命했다.

쿠빌라이는 제5차 초유의 실패 이후 일본이 위협만으론 결코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쿠빌라이는 高麗에 대해 兵船 900척의 건조와 병사의 징발을 명했다.

答書도 받지 못한 趙良弼은 1272년 1월 고려의 수도 開京을 경유하여 燕京으로 되돌아갔다. 그때 그는 大宰府의 동의를 얻어 일본인 12명을 동행시켜 그 체면치레를 하려고 했지만, 쿠빌라이는 그 접견을 허락하지 않고 즉각 일본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명했다.

이리하여 1272년 4월, 일본인 12명의 송환을 겸하여 파견된 제6차의 초유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의 正使도 趙良弼이었다. 그는 이후 약 1년간 大宰府에 머물면서 日本의 國政·官制 및 州郡의 명칭 혹은 지리·풍속·산물 등을 견문한 보고서를 작성해 쿠빌라이에게 올렸다.

이때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의 장애로 되고 있던 고려의 三別抄(삼별초)를 토벌하고 일본에의 출병을 결의하면서 趙良弼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趙良弼은 쿠빌라이의 뜻에 영합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그 무모함을 諫言(간언)했다.

<臣, 일본에 머문 지 歲餘, 그 民俗을 보니 狼勇(낭용: 이리처럼 용맹함)하여 죽이기를 좋아하고 君臣·父子·上下의 禮를 알지 못합니다. 그 땅은 山水가 많아, 耕桑(경상)의 利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얻어도 도움이 되지 않고, 그 땅을 얻어도 富가 더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舟師(주사)가 바다를 건너는 일은 海風으로 기약할 수 없고, 禍害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有用의 民力을 가지고 無窮(무궁)의 巨壑(거학: 큰 구덩이)을 메우는 것과 같습니다. 臣 생각건대, (일본을) 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1273년 5월, 최후의 일본 초유사 趙良弼이 귀국함으로써 쿠빌라이는 일본의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쿠빌라이는 제주도의 三別抄를 평정한 뒤 開京으로 개선한 장수들을 元(몽골)의 大都(北京)에 소집, 회의를 열고 일본 정벌을 명했다.

원정군의 지휘부는 흔도·洪茶丘(홍다구)·劉復亨(유복형) 및 고려의 장수 金方慶의 4인으로 구성되었다. 총사령관은 흔도. 홍다구와 유복형은 右副元帥와 左副元帥였다. 고려군을 이끄는 金方慶에게는 丞相(승상) 다음의 지위인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라는 작위가 수여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면 일찍이 신라·백제·고구려 임금들이 隋·唐의 황제로부터 받은 작위이다.

金方慶은 황제로부터 『拔群(발군)의 戰功을 바란다』는 격려와 金製 안장과 綵服(채복: 비단옷)을 받고 귀국했지만, 그 마음을 결코 밝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병사 8000명, 뱃사공·水夫 1만5000명을 차출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40여 년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 3년에 걸친 삼별초의 반란으로 고려는 황폐화해 있었다. 고려 백성들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국왕 元宗은 쿠빌라이에게 간청하여, 동원병력을 병사 6000명, 뱃사공·水夫 6700명으로 하향조정했다.

이러한 일본 원정의 전략을 세운 쿠빌라이는 2만 명의 自國兵을 동원했다. 그중 5000명은 高麗에 주둔하던 屯田兵(둔전병)이었고, 나머지는 신규로 징발한 몽골족·여진족·漢族의 장병들이었다. 이밖에 수천 명의 뱃사공·水夫도 따로 징발되었다. 여기에 고려군과 합치면 4만 명에 가까운 병력이었다. 그들은 1274년 5월부터 잇달아 고려의 合浦에 도착, 그 일대에 집결했다.

드디어 洪茶丘가 高麗의 工匠(공장)·役夫(역부) 3만여 명을 무자비하게 닥달해서 건조한 군함 900척도 合浦에 집결했다. 출정의 시기가 7월로 정해졌다.

그런데 그 출정을 앞둔 6월 중순에 高麗 국왕 元宗이 재위 15년에 타개했다. 元의 大都에서 세자 諶(심)과 황녀 쿠츠르가이미시(쿠빌라이의 딸인 齊國大長公主)의 결혼식이 거행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세자 諶(忠烈王)의 즉위식전과 元宗의 服喪(복상)이 잇달아 거행되는 바람에 출정의 시기가 연기되었다. 원정군이 合浦를 출항한 것은 元宗의 유해가 開京 교외 소릉에 안장된 9월12일의 다음 달, 즉 1274년 10월3일이었다.

제1차 원정군의 병력은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高麗史」에는 몽골군은 2만5000명이고, 고려군은 장병 8000명과 梢工·引海(바다길 안내자)·水手 6700명 등 1만4700명이다. 이를 모두 합치면 연합군의 軍勢는 3만9700명이다. 고려군의 지휘부는 三翼軍 中軍都督使 金方慶, 副使는 左軍이 김선, 右軍이 金文庇(김문비)로 구성되었다.

몽골군은 원정군의 배후에서 督戰隊(독전대)의 역할을 하고, 선봉의 역할은 고려군이 감당해야 했다. 원정군의 편성은 千戶制(천호제)를 취해 그 아래로 百戶, 十戶로 세분, 제각기 지휘자를 두었다. 이것이 유목민족국가의 전통적 시스템이다.

合浦를 출항한 병선 900척은 100∼300t급의 千料舟(천료주)가 300척, 상륙용 주정인 拔都魯輕疾舟(발도로경질주)가 300척, 음료수를 싣는 吸水舟(흡수주)가 300척이었다. 이 중 장병과 軍糧, 말과 기타 군수품을 적재한 것은 천료주로서 이것이 주력함이었다. 상륙정 앞에 붙은 「拔都魯」(바토르)라는 말은 「용맹하다」는 뜻의 몽골어이다. 따라서 전함 1척이 제각기 상륙정과 흡수주를 거느리고 있는 셈인 만큼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기동부대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의 병사들은 日本兵과 달리 가능한 한 輕裝(경장)으로서 머리에 얇은 철제의 투구를 쓰고, 가죽製의 갑옷과 장화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무기는 손에 短弓(단궁) 혹은 長槍(장창)을 들고 허리에는 曲刀(곡도) 혹은 도끼를 찼다. 短弓은 길이 1.5m의 활로서 탄력이 있고, 사정거리가 200m에 달했는데, 그것을 지닌 병사들은 제각기 화살통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었다.

기타 무기로서는 투척용 石彈과 爆裂彈(폭열탄)이 있었다. 이것은 鐵 혹은 도자기로 만든 둥근 容器(용기)에 화약을 집어넣은 것으로서 점화하여 투척하면 공중에서 작열하여 엄청난 굉음을 냈다.

연합군은 진지를 구축하면 거적이나 대나무로 만든 방벽으로 주위를 굳히고, 공격할 때는 鼓笛(고적)을 울려 사기를 북돋게 했다.

12월2일 8시에 출항하는 이키시마(壹岐島)의 아시베港으로 가는 쾌속선 「비너스」에 승선(요금 4540엔)했다. 아시베港은 麗蒙연합군 함대가 규슈 공략을 앞두고 집결했던 곳이다. 쾌속으로 운항한 비너스는 바닷길 68km를 출항 1시간만에 주파, 오전 9시 정각 이키시마의 동쪽 항구 아시베港에 기항했다.

帆船시대의 이키시마라면 對馬島와 더불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갈 때 반드시 거쳤던 「징검다리」이다. 麗蒙연합군 원정 때도 주요 공략목표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절의 260년 동안 12회에 걸쳐 訪日한 朝鮮通信使들도 모두 이곳을 거쳐갔다. 아시베港에 상륙한 필자는 곧장 전화로 택시를 호출하여 타고 이키시마의 북쪽 항구인 가쓰모토(勝本)를 향해 달렸다.

對馬島를 초토화하고 출항한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이키시마 북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74년 10월14일 오후 4시경이었다. 大船 2척으로부터 약 400명의 몽골군이 상륙하자 가쓰모토의 村人들은 이를 세도우라(지금의 아시베港)의 후나카쿠죠(船匿城)에 급보했다. 城主는 이키의 守護代인 다이라노 케이류우(平景隆)였다. 가쓰모토에 상륙한 麗蒙연합군은 하카타(博多)港 공격에 편리한 세도우라를 점령하려고 동쪽으로 진격해 갔다.

세도우라에서 平景隆은 일족의 郎黨(낭당: 武家의 家臣) 100기를 이끌고 서쪽의 가쓰모토를 향해 출진했지만, 中途의 히츠메城(勝本町 新城) 앞에 이르면 연합군의 대부대와 조우하게 된다. 景隆은 古來의 戰場儀式(전장의식)에 따라 휘하의 1騎에 명해 鳴鏑(명적: 소리 내며 나는 화살)을 쏘아 開戰의 신호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古代의 開戰 의식 따위는 아예 무시했다. 그리고는 鍾과 징을 요란하게 치면서 자신의 家系와 이름·戰績 등을 길다랗게 외치며 뛰어나오는 이 日本 무사를 에워싸고 개 패듯 때려 죽여버렸다.

「이건 無法 아닌가」라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400여 명의 몽골군은 短弓에 毒화살을 매겨 난사하고 창을 휘두르며 육박해 갔다. 이키軍도 응전, 격전이 벌어졌다.

드디어 해가 지고 연합군은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창과 毒화살로 상처를 입은 일본군의 피해는 컸다. 景隆은 부하의 거의 80%를 잃었다. 남은 병력은 겨우 20여 騎에 불과했다. 그는 히츠메城에 들어가 하룻밤을 밝혔다. 당시의 히츠메城은 急造(급조)의 방어시설이었기 때문에 大軍의 공격에는 버티기 어려웠다.

다음날인 10월15일, 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히츠메城을 포위, 맹공을 가했다. 景隆은 부하를 독려하여 분전하다 최후의 순간, 郎黨인 宗三郞을 불러 大宰府에 급함을 고하도록 명하고 할복자결했다. 宗三郞은 적의 포위망을 돌파, 세도우라의 船匿城(후나가쿠시)로 달려가 敗戰을 먼저 고한 후 하카타港을 향해 쪽배를 저어갔다. 船匿城에서는 城主인 景隆의 妻가 아이들을 먼저 찌르고 난 다음에 그녀 역시 老母와 함께 자결했다.

가쓰모토로 가는 도중에 들른 히츠메城 유적에는 新城神社가 들어서 있다. 경내에는 「元寇(원구)기념비」 및 平景隆의 묘가 있다. 일본인들은 麗蒙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元寇」라고 부른다. 城跡(성적)으로부터 50m 떨어진 동쪽에 히츠메橋가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千人塚(천인총)이 있다. 지금은 「文永의 役 新城古戰場」이라고 하는 큰 충혼탑이 천인총 위에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는 麗蒙연합군의 제1차 정벌(1274)을 「文永의 役」(분에이노에키)이라고 한다. 7년 후의 제2차 정벌(1281)은 「弘安의 役」(코안노에키)이라고 한다. 이키島엔 「弘安의 役」 관련 현장도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 호에 쓸 것이다.

이키島에는 「元寇」와 관련한 무덤이 숱하게 산재하고 있어 당시의 비참함을 전하고 있다. 다음은 「文永의 役 古戰場」에 관한 「勝本町通史」의 기록이다.

『이키에 상륙한 몽골군은 섬사람들을 보는 대로 죽였다. 남녀와 아이의 구별없이 극도로 잔인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살육은 곳곳에서 확대되었다. 예컨대 乳兒(유아)의 가랭이를 찢는다든지, 남자를 붙잡으면 귀·코를 자른다든지 했다. 또 여성을 잡아 한데 모아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엮어서 끌고 다니고, 드디어는 軍船의 뱃전에 매달아 익사시켰다』

이러한 잔학행위를 되풀이한 몽골軍의 통과 후에는 섬사람들의 시체가 겹쳐 쌓였는데, 이것을 매장했던 것이 千人塚이다. 新城 천인총 이외에 浦海·本宮·立石·射場原 등지에도 유사한 무덤들이 현존한다고 한다.

당시 이키島 사람들의 다수는 산으로 도피했지만, 對馬島와는 달리 숲이 깊지 않아서 곧 발견되었다. 「산으로 도망쳤어도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의해 발각되어 모두 학살되었다」는 傳承(전승)도 있다.

이 때문에 「무고이」(잔혹하다)라는 일본말은 이 「무쿠리」(몽골), 「고쿠리」(고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傳承을 이키島 등 도서·연안지역에 남기고 있다. 떼를 쓰며 우는 아이에 대해 『무쿠리, 고쿠리가 왔다』고 겁을 주어 달랜다고 한다.

몽골군은 野戰 능력에 있어 世界戰史上 冠絶(관절)했지만, 그 잔혹함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었다. 원래, 그들은 落城(낙성) 때까지 항전한 城民들에 대해선 入城 후에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몽골군의 西征史를 보면 이런 몽골군의 흉폭함에 관한 소문이 一波萬波(일파만파)로 번져 싸워보지도 않고 開城해 버리는 城市가 적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위력적인 心理戰(심리전)이긴 했다.

그러나 이키島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숨은 것만 아니라는 사실은 몽골 측의 기록 「心中大義」에 『倭人(왜인), 이리(狼)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 것에 의해 실증되고 있다. 일본인의 용맹성에 대한 驚異(경이)로움이 아니었겠는가.

이런 상념에 젖어 있던 중 불현듯 이번 답사에 앞서 잠시 통화한 江原大 사학과 周采赫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일본 무슨 절엔가 보존된 사료에는 「몽골이 침략해 왔다」고 하지 않고 「무쿠리가 왔다」고 쓰여 있다고 합디다. 그렇다면 「Mogol」의 原音이 貊高麗(맥고려)·貊槁離(맥고리)일 수 있습니다. 「Mogol」을 아프가니스탄에선 「모골」, 印度에서는 「무갈」이라 했고, 시베리아 쿠르테킨의 돌궐碑文(비문)에는 「Bo¨kli」(뵈크리)라고 했는데, Bo¨kli는 학자들의 논문에서는 대체로 貊高麗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가쓰모토港에 들러 우선 관광안내소를 방문했다. 관광안내소의 56세 여성 계장은 한국에서 찾아온 기자를 珍客(진객)으로 대접했다. 기자로부터 몇 가지 질문을 받은 그녀는 『대답을 못한 부분에 대해 보충설명해 줄 「元寇」 전문가가 있다』면서 전화를 걸어 마을의 교육위원까지 불러왔지만 갈길이 바빠 곧 일어섰다.

기자는 다시 아소베港으로 되돌아가 오전 11시15분에 출항하는 하카타行 페리호에 맨 꼴찌 승객으로 승선했다. 출항 2시간30분 만에 하카타港에 상륙한 기자는 다시 인근 뱃머리로 옮겨 오후 3시 시카노시마(志賀島)行 연락선을 탔다. 시카노시마는 하카타港을 바깥바다(玄界灘)로부터 보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는 섬이다.

출항 30분 만에 연락선은 시카노시마 부두에 닿았다. 이 뱃머리에서 남쪽 해안도로를 따라 2.4km를 西進하면 조그마한 구릉 하나가 나온다. 이곳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전쟁 때 쟁탈의 요지였다. 가파른 계단을 걸어 구릉 위에 오르니 하카타港의 모습이 정면으로 다가온다.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절묘한 관측고지다.

이곳에는 몽골군의 寃魂(원혼)을 위로하는 供養塔(공양탑)이 後世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건립되어 있다. 이 공양탑은 1274년의 제1차 정벌 때 大폭풍우로 인해 본대와 떨어져 이 섬에 표착했다가 일본군의 토벌로 섬멸당한 몽골兵 220명의 유해를 묻은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키島를 초토화시킨 麗蒙연합군은 이어 肥前(히젠: 지금의 나가사키縣) 마쓰우라(松浦)郡의 다카시마(鷹島)를 습격했다. 일본 측 기록인 「日蓮註畵讚」(일련주화찬)에는 『肥前國 松浦黨 수백인이 戰死했다. 이 섬의 백성과 남녀가 당했던 참사는 對馬와 같다』고 했다.

마쓰우라(松浦)는 다카시마 對岸의 지역이다. 그런데 왜 유별나게 그 지역의 部隊名에만 「黨」(도우)字를 붙인 것일까? 바로 이 점을 필자는 평소 궁금하게 생각해 왔다. 「松浦黨」에 대한 필자의 의문은 다카시마에 가서야 비로소 풀리게 된다.

松浦黨은 「海商집단」을 자처했으나 실은 한반도 연안에 출몰하여 갖은 약탈행위를 일삼던 倭寇(왜구)의 중심세력이었다. 다카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서 「松浦黨硏究」라는 논문집을 잠시 읽어 보니 그들은 자신들이 「松浦黨」이라고 불리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고 한다. 松浦黨이라면 바로 악명 높은 倭寇가 聯想(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史書(高麗史)에서 「倭寇」라는 존재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高宗 10년(1223)이었다. 倭寇는 대개 일본 사회의 변동으로 몰락한 무사들이 주동이 되었다. 이들의 노략질은 갈수록 격화되어 고려 말기에는 우리나라 동·남 연안뿐만 아니라 江華·喬洞·禮成江口로 출몰하여 수도권까지 위협하게 된다. 다카시마는 倭寇의 본거지 이마리(伊萬里)灣과 松浦港의 입구에 위치, 外海의 풍랑을 막아 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11월29일 오전 8시에 필자는 다카시마를 향해 숙소인 하카타 그린호텔을 나섰다. 하카타驛에서 메이노하마까지는 지하철, 메이노하마에서 가라쓰(唐津)까지는 철도, 가라쓰에서 다카시마行 연락선의 부두가 있는 호시노(星賀)港까지는 택시(요금 4500엔), 호시노港에서 다카시마의 히비(日比)港까지는 연락선(선임 200엔)을 탔다. 히비港에 상륙한 후엔 택시를 호출하여 타고 다카시마역사민속자료관으로 달렸다.

다카시마는 麗蒙연합군의 제1차·제2차 원정 때 모두 對馬島-이키島에 이어 세 번째로 점령을 당한 섬이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馬山-對馬島-이키島-다카시마가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카타港에 상륙해 大宰府를 함락시키려 했던 麗蒙연합군으로선 다카시마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戰列(전열)을 가다듬는 집결지로서 필요한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1274년 10월17일, 麗蒙연합군은 다카시마(鷹島)로 침입, 이 섬의 阿翁과 船黨津의 해안으로부터 상륙했다. 한편 松浦黨의 무사들도 다카시마의 殿浦에 상륙, 남방의 곶(岬)에 日本山城을 구축하여 내습하는 麗蒙연합군에 항전했지만,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전황은 갈수록 일본군에게 불리했다. 松浦黨 무사를 비롯한 규슈의 御家人(고케닌: 가마쿠라 막부의 직속 무사)들은 크게 분전했지만, 日本 騎馬무사의 개인전법에 대한 연합군의 집단전법, 그리고 당시 일본인으로선 상상하지도 못한 鐵砲(몽골語로 「데츠하우」라고 발음함)의 위력에 압도당했던 것이다.

특히 다카시마 해역은 제2차 원정 때의 主戰場이었다. 지금도 다카시마 해역에선 麗蒙연합군의 유품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다카시마역사민속박물관과 倂設(병설)된 매장문화재센터에선 현재 엄청난 수의 발굴유물을 보존처리·분류·연구하고 있다. 그곳은 水中고고학의 「천국」이었다. 발굴유물에 관해서는 이 기사의 순서 때문에 다음 2월호에 소개할 것이다.

麗蒙연합군은 이어 大宰府 공략을 위해 하카타灣으로 진격한다. 연합군 함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玄界島(겐카이도)의 西水道를 거쳐, 하카타灣에 그대로 침입했다. 6차례의 蒙使 파견, 특히 두 번에 걸친 趙良弼의 장기체재에 의해 규슈의 지리·풍속 등을 사전에 탐지해 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10월19일, 우선 일부 병력은 하카타灣의 서부 해안 이마쓰(今津)에 拔都魯輕疾舟를 대고 상륙하여 외곽에 거점을 확보했다. 다음날인 10월20일, 여명과 함께 하카타灣의 중앙부인 早良川(사와라가와)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 이키노하마(지금의 오키노하마), 하코자키(箱崎)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

大宰府의 총사령관 츠네쓰케(少貳經資)는 對馬島의 전령 小太郞 및 兵衛次郞, 그리고 이키島로부터 달려온 宗三郞의 보고에 의해 麗蒙연합군의 내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가마쿠라(鎌倉)막부와 교토(京都)의 로쿠하라단타이(六波羅探題)에 急使(급사)를 날렸다. 로쿠하라단타이는 가마쿠라 幕府의 京都 조정에 대한 감시기관이다.

츠네쓰케는 또 규슈 管內의 슈코(守護: 지방장관)·지토우(地頭: 고을원)를 비롯한 고케닌(御家人: 막부 직속 무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원래부터 御家人(막부의 직할 무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즉각 하카타灣으로 집결, 미리 정해진 대로 각 부서에 착임했다.

하카타 지구에는 前線사령관이며 츠네쓰케의 동생인 쇼니 케이쓰케(少貳景資)가 지휘하는 주력부대가 배속되었다.

그 병력은 守護인 少貳·오토모(大友)·시마즈(島津)씨의 각 隊가 500騎씩이었고, 각 地頭·御家人의 평균병력이 125騎, 그 地頭·御家人의 수는 31家였기 때문에 합계 3875騎. 여기에 守護 3家의 1500騎를 더하면 총계 5375騎였다. 이는 일본 측 사료 「元寇紀略」(원구기략)에 기록된 숫자이다.

다음은 역시 일본 측 사료 「本土防衛戰史」에 기록된 하카타 방어전의 모습이다.

10월19일 이마쓰(今津) 해안에 상륙한 몽골군 支隊는 이마쓰의 監視隊를 밀어내고 포진, 그 일부가 다음날 하카타灣 중앙부인 모모치(百道) 해변에 상륙할 主力軍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東進하여, 모모치하마의 남방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했다. 그때 祖原지구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하라다(原田) 一族과 마쓰우라(松浦)黨이었는데, 몽골군의 集團戰法과 新兵器의 위력 앞에 무참히 패퇴했다. 지금은 공원화한 소하라山에는 「元寇戰跡」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 麗蒙연합군의 本陣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10월20일, 드디어 金方慶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메이노하마(姪浜) 앞 小戶海峽을 항행하여, 여명과 더불어 사와라가와(早良川)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早良川의 지금 이름은 무로미가와(室見川)이다.

고려軍이 상륙한 지점에는 현재 초현대식 건물 「후쿠오카(福岡) 타워」(높이 123m에 전망대가 있음)가 들어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그 바로 남쪽에는 후쿠오카 박물관, 동쪽엔 일본 프로야구단의 하나인 「다이에 호크스」의 홈그라운드인 「후쿠오카 돔」이 이웃해 있다.

필자는 후쿠오카 취재 첫날인 11월28일 오후, 맨 먼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후쿠오카 타워」의 전망대로 올라갔다(입장료 800엔). 여기에 오르기만 하면 후쿠오카 全지역이 一目瞭然(일목요연)할 뿐만 아니라 730년 前 하카타 상륙작전의 모습이 파마노라마처럼 연상된다.

하카타 地區 前線사령관인 카게쓰케(景資)는 고려軍의 상륙작전을 보고 아카자카(赤坂)지구를 맡고 있던 菊池武房에 출격을 명했다. 그럴 때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하고 있던 몽골軍 부대가 고려軍의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가운데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軍은 白道原을 완전히 확보하고 東進하여 현재 후쿠오카의 중심부인 鳥飼·別府·赤坂를 강습했다. 하카타의 이키노하마 앞바다로 침입한 몽골軍의 主力도 이키노하마와 하코자키(箱崎)에 상륙하여 少貳·大友·島津의 부대를 패퇴시켰다. 이로써 일본군 측의 하카타灣 해안방위선 30km가 모두 붕괴되었다.

그때까지의 전황에 대해 高麗史에는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壹岐島에 이르러 1000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倭人이 퇴각 도주하였는데, 죽어 넘어진 시체가 삼대 쓰러진 것처럼 많았으며, 날이 저물 무렵에 포위를 해제하였다>

烽火(봉화)체제 및 驛馬(역마)제도가 미숙했던 탓이었겠지만, 교토(京都)와 가마쿠라(鎌倉)에서는 初戰 패전의 상황을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야 파악할 수 있었다. 大宰府로부터 교토의 六波羅로 파발마가 달려가 麗蒙연합軍의 對馬 내습을 보고했던 날짜가 10월17일이었다. 10월19일과 20일에 하카타灣에서 合戰이 있었다는 것은 물론 이키島가 점령당했다는 것조차도 10월28일이 되어서야 보고가 들어갔다.

따라서 幕府가 추고쿠(中國) 以西의 守護大名에게 『몽골軍이 공격해 오면 御家人뿐만 아니라 朝廷 公卿 관할하의 非어가인도 소집해서 방어전을 하라』고 하명한 것은 이미 전투가 끝나고 열흘이나 지난 11월1일이었다. 朝廷에 대한 보고는 더욱 뒤늦어 그 다음날 11월2일에 가메야마(龜山) 上皇이 외적 격퇴를 기원하는 친필을 역대 御陵(어릉)에 봉헌하고 있다.

가마쿠라 幕府는 몽골황제 쿠빌라이의 국서를 처음 받았던 1268년부터 西國守護들에게 몽골 습래에 대비해 경계를 엄중히 하도록 지령했다. 그 후에도 거듭된 사절의 來日에 위협을 느낀 막부는 異國警固番役(이국경고번역)의 제도를 정했다. 이것은 치쿠젠(筑前)·肥前(히젠), 兩國 연안의 요충을 규슈 諸國의 地頭·御家人에게 윤번으로 수비케 하는 것이었지만, 1271년에 이르면 규슈에 所領을 가진 關東 거주의 御家人들에게도 규슈로 내려와서 定住하도록 명했다.

다시 1272년이 되면 幕府는 諸國의 守護들에게 영내의 地頭·御家人의 所領뿐만 아니라 社寺領·公領에 대해서도 그 地名, 전답의 넓이와 領主 이름을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명했다. 이것은 닥쳐올 국난에 대비하여 總動員令을 발하기 위한 긴급조치였다. 그러나 1274년에 對馬·壹岐·鷹島가 차례로 침공되었을 때까지 하카타의 방위태세는 충분하지 않았다.

막부가 西國의 守護에게 그 領內의 本所一圓地의 非御家人에 대해서도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은 對馬·壹岐 침공의 소식이 幕府에 도착한 후였다. 本所一圓地라는 것은 莊園領主(장원영주) 등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所領을 말하는 것인데, 그 영내의 武士는 非어가인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非어가인들도 가마쿠라 幕府가 임명하는 守護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北條(호조)씨 得宗(득종: 호조씨의 嫡統)에 의한 전제지배체제는 이러한 거국일치의 비상조치 속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對馬島와 壹岐島로부터 몽골군 내습의 급보가 大宰府에 도착했을 때 하카타와 大宰府의 주변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은 異國警固番役(이국경고번역)의 책임을 진 가문인 쇼니(少貳)씨와 그 지배하의 하라다(原田) 일족, 그리고 시마즈(島津)씨와 그 一族 및 오토모(大友)씨와 그 일족이었다. 총사령관인 鎭西奉行으로서 규슈 所在 9개 國과 2島를 통괄 지휘한 인물은 少貳經資였다.

9개국의 守護 밑에는 地頭·고케닌(御家人)이 있어서 제각기 이에노코(家子: 武家의 子弟), 로우도우(郎黨: 武家의 家臣), 잡병인 所從들을 지휘했다. 일본군은 麗蒙연합군처럼 통일적으로 편성된 부대가 아니라 本家·分家라고 하는 血族(혈족)을 단위로 하여 끌어모은 조직이었기 때문에 병력수가 명확하지는 않다.

「元寇紀略」(원구기략)에 기록된 각 씨족의 騎兵병력을 합계하면 5300騎가 된다. 그것에 從士 1騎당 從者 1인으로 가산해서 少貳經資 휘하의 일본군은 대략 1만600명이었다는 것이 「육상자위대 후쿠오카修親會」의 견해이다.

다음으로 장비에 대해서 말하면 일본군은 各人이 비교적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고, 무기는 일본도와 長弓 및 長刀를 들고 다녔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白兵戰을 중시했다. 백병전이 벌어지면 일본도와 長刀가 주종이었지만, 몽골군이 短弓을 주요무기로 삼았기 때문에 화살戰의 귀추가 승패를 결정했다. 史書에 의하면 이 短弓의 사정거리는 2丁, 즉 약 200m였다. 일본군이 보유한 長弓의 화살은 몽골의 短矢(단시)보다 크긴 했지만, 그 사정거리는 100m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몽골軍의 화살촉에는 毒이 묻어 있었다. 맞기만 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短弓인 까닭에 速射(속사)가 가능하여 일본군이 長弓으로 화살을 한 번 날리는 사이에 몽골군은 3회의 화살을 쏘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장비면에서도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戰鬪作法(전투작법)은 아직도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1인의 무사가 앞으로 나서 敵陣에 鳴鏑(명적: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신호용 화살) 한 발을 쏘아 開戰의 신호로 삼았다. 전투가 개시되면 피아 1騎씩 나서 『나로 말하면…』이라고 운을 떼면서 자기의 家門 및 이름·벼슬·戰績 등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1대1 대결을 통해 서로의 勇力을 뽐내었다.

그런 절차를 거친 후에야 弓矢(궁시)의 合戰이 벌어졌고, 최후로 돌격을 감행, 백병전으로 승패를 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 방식은 조직적인 集團密集隊形(집단밀집대형)으로써 징과 太鼓(태고)를 치면서 돌격해 오는 몽골군과의 戰法에 비해 현격하게 후진적인 것이어서 처음부터 승패가 뻔했다. 그것은 近世的 군대와 中世的 군대의 合戰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20일의 하카타의 하코자키 지구 전투에서는 상륙한 麗蒙연합군을 島津久經의 부대가 용감하게 맞싸웠고, 하카타의 이키노하마의 전투에서도 少貳景資(經資의 동생으로 前線사령관)의 부대는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몽골군에게 밀리면서도 힘껏 항전했다. 그는 스스로 長弓을 쏘아 몽골군의 副元帥(부원수)를 馬上으로부터 추락시켰다. 다음은 「八幡愚童記」 관련 기록이다.

<少貳景資는 부하들과 함께 力戰했으나 불리하여 퇴각하고 있던 바, 키 7척, 수염을 배꼽 부근까지 늘어뜨린 푸른 갑옷의 대장이 葦毛(위모: 갈대처럼 생긴 털)의 말에 올라 14, 15騎와 80人의 잡병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景資는 馬術의 명수였기 때문에 퇴각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長弓에 화살을 먹여 쏘았는데, 그 화살은 선두로 달려오는 대장의 胸板(흉판)에 꽂혀 대장이 낙마했다. (中略) 주인을 떨어뜨린 葦毛의 말은 金覆輪(금복륜)의 안장만 붙어 있는 상태로 (戰場에서) 돌아다녔는데, 후에 그 말의 주인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것은 征東左副元首(정동좌부원수) 劉復亨이었다>

「八幡愚童記」는 국난 극복의 상황을 愚童(어리석은 아이)도 알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저술한 古書인 만큼 일본 무사들의 滅私奉公(멸사봉공)과 「神國日本」에 대한 神佛의 加護(가호)를 유별나게 강조하여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투장면과 彼我의 力量관계 등을 놀랄 만큼 리얼하게 서술하고 있어 後世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하카타灣岸에 있어서 양군의 主力戰은 10월20일 새벽부터 일몰까지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 있어서 일본군은 그 편성·장비·전투법의 어느 면에 있어서도 연합군보다 열등했다. 다음은 「八幡愚童記」의 기록이다.

<몽골은 太鼓와 징을 두들겨 신호했는데, 그 소리가 엄청났다. 일본 말들은 모두 이에 놀라 미쳐 날뛰었는데, 그렇게 허둥대는 바람에 적의 화살을 맞았다. 몽골의 화살은 짧았지만, 화살촉에 毒을 발라 맞으면 중상을 당했다. 몽골군은 수백인이 矢先(시선)을 정렬하여 화살을 비오듯 쏘는 데다 창이 길고, 갑옷도 빈틈이 없었다.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중앙을 열어 몰아넣은 다음에 兩端(양단)으로 포위하여 무찔렀다. 갑옷은 가볍고 말도 잘 탄다. 힘도 강하다. (中略) 豪勢勇猛自在(호세용맹자재)하기 짝이 없고, 임기응변의 진퇴에 능하다.

대장은 高地에 올라 (형세를 관망하고) 太鼓를 쳐서 부대를 생각대로 진퇴시킨다. 특히 물러날 때는 (적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鐵砲(철포)의 鐵丸(철환)을 발사한다. 명중하면 사방에 화염과 연기가 치솟아 주위를 덮어 버린다. 또 그 소리, 우레와 같아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이런 전술 때문에 일본군의 장병들은 魂魄(혼백)이 빠져 방향감각조차 잃어 버리고 말았다. 소바라로부터 赤坂에 이르는 戰場에서는 鳥飼瀉 부근이 습지대였던 것이 일본군에겐 다행스러워 한동안 연합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카타 지구에서는 少貳·島津 부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일거에 동남방이 뚫렸다. 몽골군은 奉行所를 습격, 하카타町의 민가와 氏神을 모신 쿠시다(櫛田: 즐전)神社를 불태웠다.

특히 大友賴泰가 수비하고 있던 하코자키(箱崎)지구가 뚫리자 鎭西軍 전체가 大宰府의 최종 防衛라인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퇴각했다. 이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이 최고로 숭배하던 武神을 모신 신사 하코자키구우가 兵火로 소실되었다.

소바라 및 아카자카(赤坂) 지구에 있어서 일본군의 善戰에도 불구하고 하코자키(箱崎) 지구에서 劣勢(열세)에 처한 大友·島津 부대의 패퇴에 의해 일본군은 하카타灣으로부터 50여 리 밖 大宰府의 서쪽 방벽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일제히 철퇴했다. 후쿠오카 일대는 방어전을 전개할 만한 요새지가 별로 없는 평야지대이기 때문이었다. 「本土防衛史― 元寇」의 제2장 「文永의 役」 제4절의 「군사적 고찰」에서는 하코자키 지구에서 일본군이 먼저 철퇴했던 것은 병력의 열세였던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즉, 소바라·赤坂지구에서 양측의 병력비가 1.72 대 1, 하카타 지구가 1.77 대 1인 것에 비하여 하코자키 지역에서는 2.67 대 1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바다를 건넌 麗蒙연합군과는 달리 언제든 충원이 가능했던 것 아닌가.

이 오토모(大友)·시마즈(島津), 양군의 철퇴에 따라 하코자키팔번궁의 宮司는 御神體를 받들어 宇美(粕屋郡 宇美町)의 極樂寺로 피란했다. 그 직후 일본 3大 社殿의 하나인 하코자키神社는 몽골군에 의해 불탔다.

몽골군은 하카타灣에 상륙하면 곧장 大宰府로 진격해서 이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몽골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일몰인 데다 地理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10월20일의 전투에서 主力병기인 短弓의 화살이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본군은 왜 미즈키(水城)로 퇴각했던 것인가.

麗蒙연합군의 공략목표가 大宰府에 있었는데, 그 主방위진지가 이 水城이었기 때문이다. 이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大宰府가 연합군에 점령되어야 비로소 일본군이 完敗를 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1월29일, 필자는 다자이후(大宰府)와 水城을 차례로 답사했다.

다자이후 政廳(정청) 유적을 찾아가려면 현재의 太宰府市를 관통하는 西鐵의 도후사쿠라마에(都府櫻前)驛에서 내려 동쪽으로 15분 쯤 걸으면 된다. 다자이후는 백제부흥군-일본군 연합군이 663년 白村江(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羅-唐연합군에게 패한 이후 日本조정이 설치한 西部 일본 지역의 최상급 사령부인 동시에 대외교섭의 창구였다. 지금도 다자이후의 位相과 규모를 말해 주는 礎石(초석) 등이 남아 있다.

다자이후 政廳 유적을 둘러본 후 미즈키(水城)로 찾아갔다. 水城은 도후사쿠라마에역에서 西鐵을 타고 후쿠오카 쪽으로 두 정거장째인 下大利역에서 내려 25분쯤 걸으면 된다. 그 규모는 길이 1.2km, 基底部(기저부)의 폭 80cm이다. 이 土城 역시 羅唐연합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이다. 水城이란 이름은 하카타 쪽을 향해 폭 60m, 깊이 4m의 호를 파서 물을 저장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日本書紀에는 『츠쿠시(筑紫)에 大堤(대제: 큰 둑)를 쌓고, 물을 저장했는데, 이름하여 水城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지금도 내측과 외측의 호를 연결하는 목통의 흔적이 남아 있어 文字 그대로 水城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大宰府는 北의 오노(大野)城, 南의 사이城이라는 山城에 의해 방위되고, 西方 하카타灣을 향한 正面에는 이 水城이 막아서 있었다. 하카타灣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없었던 일본의 鎭西軍은 어쩔 수 없이 水城까지 철퇴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이 鎭西軍의 최후 저지선이었던 것이다.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함 후 연합군 수뇌부는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作戰會議(작전회의)를 열었다. 「東國通鑑(동국통감)」과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이 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忽敦(홀돈=흔도)가 말하기를 『우리 軍勢는 전투엔 習熟(습숙)하고 있지만, 종일 싸워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무기를 거두었다. 내일도 또 전투를 할 것인가』라고 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우리 兵들이 이미 敵陣에 침입해서 잘 싸우고 있어 「지금부터 一步」라는 상황에 있다. 옛날 秦(진)의 명장 孟明(맹명)은 (상륙 후에) 스스로 (타고 온) 배를 불태웠고, 漢의 淮陰侯 韓信(회음후 한신)은 背水陣(배수진)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故事에 따라 決戰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에 忽敦이 말하기를, 疲兵(피병: 피로한 병사)을 가지고 大敵과 싸우더라도 完勝을 얻지 못할 것이니 물러서는 것이 좋다』고 했다 >

高麗의 사령관 金方慶은 하카타 교두보에서 野營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총사령관 흔도와 右副元首(우부원수) 洪茶丘는 이 이상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큼 철병해야 할 것이라고 거부했던 것이다.

일본 측 사료들을 보더라도 그때까지 일본군이 부대 단위의 전투에서 이긴 사례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일본무사의 개인적인 용맹이 드러나는 대목만 더러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東征都元帥(동정도원수) 흔도로 하여금 철수 쪽으로 결심을 굳혀 가게 했던 요인은 무엇일까.

사실, 연합군에게도 상당한 약점이 있었다. 몽골의 강요로 출전한 고려군이 士氣를 떨칠 리 없었고, 洪茶丘가 다그쳐 불과 6개월 만에 急造한 900척의 戰船들도 대체로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자기 땅에서 싸우는 일본군에 비해 연합군은 병력충원과 병참부분에서 弱勢일 수밖에 없었다. 少貳景資의 화살을 맞아 부상한 左부원수 劉復亨도 이미 戰意를 잃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 무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용맹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의외로 강경했고, 병력도 만만치 않았다.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敵은 원래 무서운 법이다.

一所懸命(잇쇼켄메이: 한 곳을 목숨을 걸고 지킴)은 가마쿠라 武士들에 있어선 최고의 德目이었다. 전장에서 비겁했던 무사는 幕府에 의해 領地가 삭감되든지 몰수당해 가난을 代물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일본 사회의 시스템이었다. 그렇다면 一家를 위해서는 자기 한 목숨이 오히려 가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데서 연유한 一所懸命이 현대에 와서는 一生懸命(잇쇼켄메이: 평생 목숨을 걸고 일함)으로 바뀌었다. 一生懸命은 세계적 經濟大國을 이룩한 현대 日本의 밑천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元寇」는 일본의 국민의식 형성에 깊게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지휘부의 견해가 엇갈린 상황에서 歸艦(귀함)한 麗蒙연합군은 10월20일 심야로부터 21일 새벽에 이르는 사이에 하카타灣으로 몰아닥친 大폭풍우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高麗史에는 『때마침 밤중에 폭풍우가 일어나서 戰艦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침몰하였고, 金銑(김선)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람에 날려 바다로 떨어져 익사한 金銑은 고려군의 左軍副使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하룻밤 사이에 900여 척의 연합군 함대 중 200여 척이 침몰했다. 연합군은 서둘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0월21일 아침, 戰禍로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하카타灣에는 연합군의 전함은 한 척도 없었다. 이것은 일본의 神들이 진노해 神風을 일으켰던 것도, 龍神의 逆鱗(역린)을 건드려서 파도를 일으킨 것도 아니라 최고지휘관의 판단 잘못으로 自招(자초)한 결과였다. 만약, 연합군이 10월20일 중에 하카타 해안에 교두보를 설치, 이후 공격에 대비한 병력·물자를 상륙시켜 놓고 宿營(숙영)했더라면 그후 전개된 역사의 向方은 사뭇 달라졌을 터이다.

결국, 일본군의 승리였다. 비록 그들이 10월20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연합군에게 가마쿠라 무사의 용맹성을 과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에겐 조국방위전쟁이었던 만큼 사기도 높았다. 「元史」 日本傳에서도 『겨울 10월 其國(일본)에 들어가 패했다. 官軍도 정비되지 못했고, 화살도 다했다』고 敗戰을 인정하고 있다.

高麗史에는 『이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의 총수가 무려 1만3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병력은 꼭 한 달 후인 11월20일 合浦로 귀항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