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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세계사] (60분) 세계 8대의 기적 진시황릉! 거대한 권력 뒤에 가려진 진시황제의 비밀은? 사마천의 ‹사기›로 알아보는 진시황제🤴
https://youtu.be/fYtsVbLyRa0
[#벌거벗은세계사] (60분) 세계 8대의 기적 진시황릉! 거대한 권력 뒤에 가려진 진시황제의 비밀은? 사마천의 ‹사기›로 알아보는 진시황제🤴
과도기의 사람들은 언제나 괴롭다 -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베리알 2012. 1. 4. 23:18
[간축객서]
◐진나라의 정치가 이사가 축객령을 반대하며 올린 상소문이다.
[전문]
臣聞吏議逐客 竊以爲過矣。昔穆公求士 西取由余於戎 東得百里奚於宛 迎蹇叔於宋 來邳豹 公孫支於晉。此五子者 不產於秦 而穆公用之 並國二十 遂霸西戎。孝公用商鞅之法 移風易俗 民以殷盛 國以富強 百姓樂用 諸侯親服 獲楚 魏之師 舉地千里 至今治強。惠王用張儀之計 拔三川之地 西並巴 蜀 北收上郡 南取漢中 包九夷 制鄢 郢 東據成皋之險 割膏腴之壤 遂散六國之衆 使之西面事秦 功施到今。昭王得范雎 廢穰侯。逐華陽 強公室 杜私門 蠶食諸侯 使秦成帝業。此四君者 皆以客之功。由此觀之 客何負於秦哉!向使四君卻客而不內 疏士而不用 是使國無富利之實 而秦無強大之名也。今陛下致崑山之玉 有隨和之寶 垂明月之珠 服太阿之 劍 乘纖離之馬 建翠鳳之旗 樹靈鼉之鼓。此數寶者 秦不生一焉 而陛下說之 何也?必秦國之所生然後可 則是夜光之璧 不飾朝廷 犀象之器 不爲玩好 鄭 衛之女不充後宮 而駿良駃騠不實外廄 江南金錫不爲用 西蜀丹青不爲採。所以飾後宮 充下陳 娛心意 說耳目者 必出於秦然後可 則是宛珠之簪 傅璣之珥 阿縞之衣 錦繡之飾不進於前 而隨俗雅化 佳冶窈窕 趙女不立於側也。夫擊甕叩缶彈箏搏髀 而歌呼嗚嗚快耳者 真秦之聲也 鄭, 衛, 桑間, 韶, 虞, 武, 象 者 異國之樂也。今棄擊甕叩缶而就 鄭, 衛 退彈箏而取 昭, 虞 若是者何也?快意當前 適觀而已矣。今取人則不然。不問可否 不論曲直 非秦者去 爲客者逐。然則是所重者在乎色樂珠玉 而所輕者在乎人民也。此非所以跨海內 制諸侯之術也。臣聞地廣者粟多 國大者人衆 兵強則士勇。是以太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王者不卻衆庶 故能明其德。是以地無四方 民無異國 時充美 鬼神降福 此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今乃棄黔首以資敵國卻賓客以業諸 使天下之士退而不敢西向。裹足不入秦 此所謂“藉寇兵而齎盜糧”者也。夫物不產於秦 可寶者多 士不產於秦 而願忠者衆。今逐客以資敵國 損民以益讎 內自虛而 外樹怨於諸侯 求國無危 不可得也。
[해석]
신이 듣기로 관리들이 객경[2]들을 내쫓기 위해 논의를 한다던데 생각해보면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옛날 목공께서는 인재를 구해 서쪽으로는 융에서 유여를 얻었고 동쪽으로는 완에서 백리해를 얻었으며, 송나라에서 건숙을 맞아 왔고 진[3]나라에서 비표와 공손지가 왔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 출신이 아님에도 진 목공께서 그들을 등용하여 스무개의 나라를 합병하고 마침내 서융을 재패했습니다. 효공께서는 상앙의 변법을 채택해 풍속을 바꾸니 백성은 번성하고 나라는 부강해졌으며, 백성들은 부림당하는 것을 즐거이하고, 제후들은 친해지고 복종하며 초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사로잡아 점령한 땅이 천 리에 달하여 지금까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습니다. 혜왕께서는 장의의 계책을 받아들여 삼천의 땅을 빼앗고 서쪽으로 파촉을 합병하고 북쪽으로 상군을 거두고 남쪽으로 한중을 취하였으며, 아홉 오랑캐들을 포섭하여 언과 영을 제압하고 동쪽으로 성고의 험난함에 의지하여 좋은 땅을 떼어 받아 마침내 여섯 나라의 합종을 깨뜨려서 이들이 서면하여 진나라를 섬기게 하니 공적이 지금까지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소양왕은 범수를 얻어 양후를 폐하고 화양군을 내쫓아 왕실을 강하게 하고 사사로운 가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았으며, 제후들을 잠식하여 진나라가 제업을 이루게 했습니다. 이 네(4) 군주는 모두 객경들의 공을 얻었습니다. 이런 일로 보건대 객경이 어찌 진나라에 부담이 되겠습니까! 만약 네 분의 군주가 객경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고, 선비들을 멀리 하고 중용하지 않았다면, 이는 부유한 나라를 만들거나 이익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을 것이고, 진나라가 강대하다는 이름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곤륜산의 옥[4]과 화씨의 옥새를 가지고 명월 구슬[5]을 드리우고 태아를 차셨으며, 섬리말을 타시며 취봉의 깃발을 세우고 악어의 가죽으로 만든 북[6]까지 지녔습니다. 이 여러 보물들은 단 하나도 진나라에서 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는 이를 좋아하시니 어째서입니까?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야 되는 것이어야 한다면 야광구슬로 조정을 꾸밀 수 없을 것이고 코뿔소의 뿔이나 상아로 만든 그릇들을 즐길 수 없으며, 정나라와 위나라의 미녀는 후궁에 채울 수 없고 결제[7]와 같은 뛰어난 말로 마구간을 채울 수 없으며, 강남의 금과 주석도 사용할 수 없고, 서촉의 단청으로 채색할 수 없을 것입니다. 후궁을 꾸미고 진열해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하고 귀와 눈을 기쁘게 하는 것도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면 완의 진주 비녀와 모난 구슬 귀고리, 아호의 옷과 촉의 장식 비단도 폐하의 앞에 바쳐지지 못하며, 풍속에 따라 우아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얌전한, 조나라 여자도 폐하 곁에 서지 못합니다. 무릇 물독을 치고 질그릇을 두드리며 쟁[8]을 타고 넓적다리를 두드리면서 목청을 돋운 노래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진나라의 소리이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상간, 소, 우, 상, 무는 다른 나라의 음악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진나라 땅의 물독을 두드리고 질그릇을 치던 음악을 버리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탕하고 사치스러우며 듣기 좋은 음악을 가져다 쓰고, 진나라의 쟁을 타는 것을 바라지 않고 소, 우를 취하는데,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외국의 음악이 마음을 즐겁게 하고, 귀와 눈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쓸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 아니하고, 옳고 그름와 곧고 굽음을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진나라 출신이 아니라면 제거하고 외국의 인사면 내쫓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중히 여기는 것은 색과 음악과 주옥에 있고, 가벼이 여기는 것은 사람들에 있는 것이니, 이는 천하를 지배하고 제후에 군림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신이 듣자하니 땅이 넓으면 생산되는 양식이 많고, 나라가 크면 사람이 많고, 군대가 강하면 병졸이 용감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산은 한 줌의 흙더미도 사양하지 않았기에 그 높음을 이룰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 깊이를 이룰 수 있었으며 왕은 여러 무리를 버리지 아니하므로, 그의 덕행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땅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지 아니하고, 백성은 외국을 문제로 삼지 아니하고, 사시는 아름다운 것을 가득 채우고, 귀신은 복을 내리는데, 이것이 바로 다섯 제와 세 황[9]에게 적이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 백성을 버리면 적국을 돕는 것이고 객경을 물리치면 제후들에게 종사할 것이며, 천하의 선비들을 물러나게 하면 감히 서쪽[진나라]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고, 발을 묶어서 진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바로 “외적에게 무기를 빌려 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보내는” 행동입니다.
진나라에서 나지 않는 물건이라도 보배라 할 만한 것이 많고, 진나라 출신이 아닌 인재라도 충성하려는 자가 많습니다. 지금 객경을 축출하는 것은 적국을 돕는 것이고, 백성이 줄어들고 적국의 인구가 늘어나면, 안으로는 저절로 비게 되고 밖으로는 제후들의 원망을 사게 되어 나라를 구하고 위태로움을 없애려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약]
진나라 선대의 명군들께서는 모두 동방 육국 출신의 재상들을 기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했습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그들을 배척했다면 진나라가 지금처럼 강대해질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나라가 현재 즐거이 누리는 여러 보물들과 말, 기녀, 음악 등은 거의 모두가 외국에서 온 것들입니다. 진왕께서는 이렇듯 외국의 산물들은 마음을 즐겁게 한다며 기꺼이 가져다 쓰시면서 사람을 쓸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 않고, 옳고 그름과 곧고 굽음을 이야기하지 않고, 진나라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내쫓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나라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색과 음악과 보물이고, 가볍게 여기는 것은 사람들이니, 이래서는 천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황하가 작은 지류의 물줄기들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에 큰 강이 되었듯이, 왕은 여러 무리들을 버리지 않으므로 덕을 밝힙니다. 지금 외국 출신 신하들을 쫓아내는 것은 외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보내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진나라의 산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보물이 많듯이, 진나라 출신이 아니더라도 진에 충성하는 인재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기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국 적을 돕게 될 것이니 나라를 위태롭게 할 뿐입니다.
[1] 다만 진시황은 정작 천하통일 이후에는 감싸줘야 할 6국의 백성들을 누구보다 열심히 차별했고, 이사 본인 또한 천하통일로 만인지하 일인지상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어 이런 행태를 묵인함으로써 본인의 죽음과 국가의 멸망을 자초했다.
[2] 다른 나라 출신으로서 진나라의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
[3] 晉,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과는 다르다.
[4] 곤륜산에 위치한 우전(지금의 호탄خوتەن)에서 생산된 옥은 춘추시대부터 청나라 이전까지 일대의 옥 중 최상급이었다.
[5] 명월 구슬은 춘추시대 수나라의 임금인 수후가 가지고 있던 진귀한 구슬이다.
[6] 진나라 땅에는 악어가 살지 않는다.
[7] 駃騠, 옛 중국의 마종으로 버새와는 다르다.
[8] 금琴이나 슬瑟에 비해 소박한 현악기.
[9] 참고로 시황제 이전에 황(皇)과 제(帝)는 개념이 분리되어 있었다. 자세한 것은 황제 문서 참조.
한비와 이사, 라이벌?
앞의 얘기를 토대로 사마천의 전을 정리해 보자. 전에서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다. 한비가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 말더듬이로 글을 잘 썼다는 점, 그리고 진나라에서 죽었다는 사실. 마지막 이야기는 널리 전해 온다. 마지막 사실이 한비의 생애를 압축한다는 점에서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사와 한비의 관계를 이야기하면 이사의 처지에서 한비의 생애를 다르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사를 얘기하는 게 순서에 맞을 것이다.
한비열전을 다시 읽어보자. 사마천은 한비가 “이사와 함께 순자에게서 배웠다”[與李斯俱事荀卿]고 했다. 이 말은 한비와 이사가 동기동창인 걸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현대 중국의 걸출한 역사가 전목[錢穆]은 「이사한비고」[李斯韓非攷, 『선진제자계년』先秦諸子繫年 소재]에서 이사와 한비를 비슷한 연배로 가정했다.) 한비는 공족(公族)으로 지체 높은 신분이었고 이사는 보잘 것 없는 천민이었다. 이 둘이 순자의 문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문자 그대로 읽어 전국시대 신분이 와해되는 증거로 읽을 수 있다. 허나 신분이 흐트러지는 와중이라 해도 둘이 너나들이하면서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 다른 문장을 보자. “어떤 사람이 한비의 글을 전해 진나라에까지 알려졌다. 진왕이 「고분」(孤憤)·「오두」(五蠹)의 글을 읽고서는, ‘아, 과인이 이 사람과 만나 함께 노닐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이사가 말했다. ‘이는 한비가 쓴 글입니다.’ 진나라가 이 말에 급히 한나라를 공격했다.”[人或傳其書至秦. 秦王見孤憤五蠹之書, 曰:“嗟乎, 寡人得見此人與之游, 死不恨矣.” 李斯曰:“此韓非之所著書也.” 秦因急攻韓.] 「고분」·「오두」 두 책만을 언급했지만 이에 앞서 사마천은 한비의 주요 글로 두 작품 외에 「내외저」(內外儲)·「설림」(說林)·「세난」(說難)을 들면서 10여만 언(여기서 言은 字라는 말이다. 10여만 글자나 되는 거작을 썼다는 뜻이다. 중국은 글자 수로 작품의 사이즈를 말한다)이라 했다. 한비의 글 가운데 「고분」·「오두」가 가장 유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진시황이 읽고 감탄했다. 아마 당시 글은 지금처럼 완성된 단행본 책의 형태가 아니라 한 편 한 편씩 유통되는 형태였을 것이다. 편(篇)의 형태가 더 일반적이어서 당대인은 아무도 『한비자』로 묶은 방대한 한 권짜리 온전한 책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진나라는 이미 상앙(商鞅)을 통해 법가의 전통이 굳건하게 뿌리내린 터라 통치에서건 사상에서건 법가의 주장에 익숙했다. 더구나 진시황이 축객령(逐客令)을 반포했을 때 이사가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써서 축객령을 철회시키고 두각을 나타내는데 이사의 글이 명문이다. 한비의 글을 읽고 감탄했다는 말은 진시황의 높은 안목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진나라가 이 말에 급히 한나라를 공격했다”는 다음 문장 역시 사실(史實)로 읽기보다는 한비의 글에 대한 사마천의 애정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된 것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진시황 본기」나 「진세가」(秦世家) 「이사전」(李斯傳)의 사실(史實)과 견주어 보면 한나라를 공격한 시기와 계기는 한비와 관성련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한비에 매혹되었다 한들 총명한 임금이 책의 저자 때문에 한나라를 공격했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마천은 「세난」(說難)의 전문을 옮겨 적어 한비의 글에 존경을 표했지만 「고두」와 「오분」이 명문 중에 명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사의 반응. 이사는 한비가 쓴 글이라고 했다. 진시황은 처음 읽는 글인데 비해 이사는 그 글을 이미 읽었다는 말이다. 진시황이 읽기 전, 한비가 뛰어난 작가로 유명해지기 이전에 이사는 한비의 저작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한 가지 추론을 해보자. 이사와 한비는 나이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순자 문하에서 같이 공부했다고는 하나 한비가 선배가 아니었을까. 사마천의 진술은 같은 시기에 배운 걸로 잘못 읽을 소지가 있지만 동고동락하며 한솥밥 먹는 사이가 아니라 순자 문하 사람이었다는 일반 진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순자가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시기는 초나라에서 벼슬을 얻어 난릉령(蘭陵令)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난 이후로 알려졌다. (난릉은 남방이 아니라 현재 산동성山東省에 있다.) 순자 말년이다. 순자는 장수한 인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근거가 있다. 이 부분은 순자를 다루는 글에서 얘기하기로 하자. 『순자』(荀子) 「의병」(議兵) 편에 이사가 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실려 있다. 이사 나이 20여 세 즈음으로 추정한다. 이사가 순자 문하를 떠나 진(秦)나라에 들어간 것이 30여 세 가량. 한비는 한왕(韓王) 안(安) 6년에 진나라에 사신을 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는데 이사가 진나라에 머문 지 15년이 된 때였다. 한비가 세상을 떠날 해는 이사의 나이를 45세 즈음으로 볼 수 있다. 한비의 나이는? 『한비자』 「문전」(問田) 편과 「외저설(外儲說) 우상(右上)」 편에 당계공(堂谿公)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한비가 당계공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때 한비의 나이를 20세 정도. 당계공은 한(韓)나라 소후(昭侯) 때 사람으로 한비를 만났을 때 이미 90여 세였다. 당계공의 나이를 기준으로 한비의 출생년을 역산해(한韓 리왕釐王 초년으로 계산할 수 있다) 죽은 해(진시황 14년)를 따져보면 한비의 나이는 65세쯤 된다. 추정치이긴 하지만 이를 받아들인다면 이상은 전목(錢穆), 「이사·한비고」(李斯韓非攷), 『선진제자계년』(先秦諸子繫年, 河北敎育出版社, 1965/2000)과 진기유(陳奇猷), 「한비생졸년고」(韓非生卒年考), 『한비자신교주』(韓非子新校注, 上海古籍, 2000/2008)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이사와 한비는 20세 가량 나이 차이가 있는 셈이다. 이사가 순자문하에서 수업하던 시절 한비는 이미 자신의 학문이 어느 정도 정립된 시기였고 이때 사마천이 명문으로 꼽은 「고분」·「오두」 등의 글을 썼고 늦어도 이사가 진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한비의 글을 읽었다고 상상해도 무방하리라.
이사는 자신이 한비보다 못했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자신 못난 위인이 아니었음에도 한비에게 열등감을 가졌던 걸 보면 인간이란 사회적 지위나 권세, 명예나 부富가 전부가 아니라 다른 욕망을 품는 모양이다. 호사가들은 이사가 실제 한비를 죽였다고 보고 질투에 따른 살해라고 해석한다. 썩 구미에 당기는 해석은 아니지만 그들의 말에 동의한다면 이사가 한비를 부러워했던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출출처: https://bookdramang.com/2853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티스토리]
얼마전 서점에서 중국사 관련 책들이 뭐 나왔나 둘러 보다가,
페이지 스르륵 넘기다가 그대로 제자리에 고이 박아 넣은 책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 고대 신화전설의 시대에서 신해혁명까지
...라는 책인데, 내가 이 책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원위치에 넣어 버린건
무슨 허접한 내용이 적혀 있거나 이상한 내용이 적혀 있거나,
혹은 중국의 공정을 돕거나 찬양하는 그런 내용이 보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난 이 책 내용을 제대로 안 봤기 때문에, 실제로 책에 저런 내용들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
내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원위치 시킨 이유는 단 하나... 인명 + 지명 표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중국어권 인명과 지명 표기는 "개판"이라고도 하고,
"과도기"라고도 할 수 있다.
대충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이전은 그냥 한자 발음을 우리식으로 읽고 적고( 공자 -> 공자),
이후는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읽고 적는 식이다(공자 -> 쿵쯔).
덕분에, 주윤발이나 장만옥, 장예모 등등 수많은 추억의 인물들은 세상에서 사라져버렸고,
그 자리를 외계어로 된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채우고 있다.
그런데 저런 기준이 있다고 해서 100%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대충 저런 기준이 있고, 특히 고전 역사의 인물들은 예전 방식대로 하고 있어서
그나마 혼란이 덜했는데... 이 책은 거기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이 책은 고대의 인물들도 전혀 가리지 않고 모조리 새로운 표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우리가 익히 아는 전국시대의 영정이나 공자, 이사, 상앙 등등은 이 책에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편의를 위해서 인물이 처음 등장할 때는 병행 표기한다는 식으로 혼란을 줄이는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별 의미는 없어 보였다)
쿵쯔가 어디의 뭐하는 놈이여!!!...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랄까.
덕분에, 내용을 제대로 볼 생각은 광속이 아니라 워프로 안드로메다로 사라져 버리고,
책은 바로 손에서 놓아 버렸다.
물론, 난 지금 이런 방식이 내 취향에 안 맞는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지,
이런 방식 자체가 그렇게 가치가 없고 형편없는 방식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도 서문에서 왜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하는 표기법이 있는데도
굳이 일부러 저렇게 다 신식으로 표기를 했는지에 대해 이유를 밝히고 있고,
그 이유가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사실, 저 표기법 자체가 웃기는 것이다.
기준이 납득이 가는 것도 아니고, 시점을 기준으로 이름을 다르게 읽는다는 자체도 웃긴다.
물론, 저런 표기법의 절충을 생각해낸 사람들의 고충을 아예 모르겠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이유들에 납득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
주윤발과 장만옥, 장국영 등과 함께 시간을 달려온 사람의 한사람으로서,
난 그런 신식 표기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신식 표기법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 인물의 이름 표기에 있어서 심각한 괴리를 초래하는 기존 표기법은
어떤 식으로든 개선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단지 난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다.
그래서 난 저 책의 내용이 어떤지조차 파악하고 싶지 않았을 정도로
기분이 이상해져 버렸던 것...
물론, 난 저 책의 저자나 내용에 대해서 폄하하거나 나쁘게 말할 의도는 전혀 없다.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왈가왈부 한다는 게 이상한 거고...
난 어디까지나 그냥 저 방식 자체가 내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저런 개선 방식이 정말로 개선인가...라는 궁극적인 의문이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다른 언어끼리의 교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이 문제는 강자 위주로 돌아가는 현실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동양은 보통 성 + 이름으로 표기한다. 서양은 보통 이름 + 성으로 표기한다.
한국에서 서양 연예인이나 인물을 표기할 때는 그네들 식을 반영한다.
톰 크루즈를 크루즈 톰이라고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쪽에선 다르다. 박찬호는 찬-호 팍이다.
국력이 약하면 이렇게 알아서 기어야 하나? 아니면 이런 것도 전통의 사대주의인가?
중국어 인명과 지명 표기도 마찬가지다.
나라마다 발음과 표기에 개성과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외국의 것을 표현하려면
제약이 따르고 그에 따라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경우 자국인들의 입장과 편의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중국 인물과 지명을 한국인의 입장과 편의를 무시하고
무조건 원어에 가깝게 한답시고 생노력하는 게 과연 그럴싸한 것일까.
암튼 평소 저렇게 생각하고 있던 나였기에...
역사책에서 난데없이 쿵쯔가 튀어 나오니 잠시 눈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랄까.
점점 세상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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