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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갑(趙秉甲=양주조씨, 1844. 5. 15~1912. 5. 23)
조선이 망하게 된 원인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별 것 아닌 것 같은 송덕비도, 그 원인 중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철종 14년(1863년)에 관직에 올라 천안·함안·김해 등 여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수령을 역임하는 동안, 수많은 탐학(貪虐=탐욕, 착취, 학대가, 포악하고 잔인함.) 행위를 저질렀던 조병갑(趙秉甲)이란 자가 있었다.
조병갑은 1892년(고종29년) 4월에 전라도 '고부군수'가 되어 부임했다.
<고부군의 위치도>
고부군(古阜郡)은, 현재의 전북 정읍시 일원과 부안군 일부지역을 포함했던 조선시대 말기까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백제 때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을 통일신라 때 경덕왕이 고부(古阜)로 고쳤는데,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영주(瀛州)로 칭하고 안찰사를 두었으며, 광종 때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종 때 다시 고부군으로 고치고, 충렬왕 때에는 영광군에 병합되었으나 곧 복구되었으며, 그 후 조선시대 내내 전주부(全州府)에 속한 고부군(古阜郡)으로 불렀다.
그러나 일본에게 멱살을 잡혀 강제병합된지 4년만인 1914년에, '행정구획통폐합시행'으로, 고부군의 백산면, 거마면, 덕림면은 부안군으로, 그 밖의 전 지역은 정읍군에 통합되는 바람에 고부군이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고부군의 행정중심지였던 곳을, 1914년 이후부터는 고부면(古阜面)으로 부르고 있다. (참고; 두산백과--두피디아)
아무튼 조병갑은 1892년 4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했지만, 흉년이 들어 살아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는데도, 이듬해인 1893년 농민들에게 강제로 고액의 세금을 징수했다. 부유한 농민들을 잡아들여 갖가지 죄명을 씌워 2만냥 정도의 재물을 빼앗았으며, 이전에 태인현감을 지냈던 아버지 조규순(趙奎淳)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1,000냥 정도를 거두어 챙기기도 하였다.
그외 조병갑의 강탈적인 탐학행위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나라를 망친 '송덕비'에 대해 쓰기 때문에, 모두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필자는 조병갑이 "태인현감을 지냈던 아버지 조규순(趙奎淳)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1,000냥 정도를 거두어 챙기기도 하였다."라는 대목에 주목하려고 한다.
송덕비에 대하여
전국에 산재해 있는 비석에 새겨진 글씨에는, 비석에 따라 주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 등등으로 쓰여 져 있는데, .이는 모두가 똑같은 뜻으로, 백성들을 선하고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영구히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석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공덕을 칭송하는 문자를 새긴 비석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이들 모두를 송덕비(頌德碑)라고 총칭한다. 그래서 필자는 설명하는 과정에서 '불망비' · '선정비'라 하지않고, 편의상 모두 '송덕비'로 표현할 것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송덕비란? 백성들을 선하고 어질게 다스리다가 임기가 다되어 떠나가는 수령을, 후세 사람들이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위해, 수령이 재임시에 이룬 공적들을 새겨서,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역 주민들이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그러나 송덕비가 원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변질되어, 수령들의 과시적인 업적의 척도로 인식이 조성되면서, 아예 재임 초기부터 지역 유지들에게 암묵적 지시로 비석의 건립을 강요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지역 유지에게는 당연히 이권(利權)이 생기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라서, 수령의 앞잡이 노릇을 안할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송덕비 폐해는 전국적으로 심각했다.
조선 초기부터 송덕비는 드문드문 있어 왔지만, 문제가 될 만큼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처음 송덕비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반정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른 조선시대 인조임금 때였다. [인조실록] 인조9년(1631년) 12월 12일조에 따르면, “근래에 들어 조금도 공적이 없는 지방관들이, 나무나 돌로 비석을 만들어 세우고 있어 문제”라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인조 조정(朝廷)은 이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나, 현종 때인 1663년 왕명으로 송덕비 건립에 대한 금지령이 처음으로 떨어졌고, 그 후 [숙종실록] 1684년 8월 3일조에 따르면, “1663년 현종이 금했던 어명을 어기고 몰래 세웠던 송덕비를, 모조리 없애라”라고 엄명을 내리기도 했으며, 그 후 영조가 “송덕비를 세우면, 아예 '왕명거역죄'로 엄히 다스리겠다”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그 숫자는 더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던 조선 말기, 정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는 가운데, 송덕비가 거의 대부분 외관직 관리들이나 현감·군수들의 재임기간 중에 많이 세워졌던 것이다.
조규순 송덕비, 동학농민봉기 원인.
<전북 사진의 죄측에서 우측으로 , 첫 번째가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의 송덕비이다.>
전라북도 정읍시 관내에 흩어져 있는 송덕비들을 한데 모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556-2번지 호남 제일의 정자인 보물 제289호 피향정(披香亭) 경내에 나열한 것으로, 조병갑(趙秉甲)의 아버지 조규순(趙奎淳)의 송덕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현감조후규순영세불망비(縣監趙侯奎淳永世不忘碑)>
위 비석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그의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이다. 앞의 피향정(披香亭) 경내에 나열된 비석중에서, 맨 좌측에 세워진 비석이다. 멀쩡하게 서있던 비석을 없애고 값비싼 오석(烏石=빛깔이 검고 광택이 반들반들 나는 고급 바윗돌)으로 새 비석을 만든 후, 비각(碑閣)의 건립 명목으로 군민들에게 1000냥 정도를 뜯어내 만든 비석이다. 이는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된다.
전봉준 동학농민봉기를 일으키다.
조병갑의 탐학행위에 분노한 고부군민들이 반발하여, 1894년 2월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교세활동을 넓혀 나가고 있던 동학접주인 전봉준(全琫準=1855.01.10~1895.04.24)을 영도자로 추대하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접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동학농민군은 서울 도성으로 진격하기로 결정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동학농민군을 도저히 진압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고종은,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했고, 덩달아 일본군도 청나라와 맺었던 '텐진조약'을 핑계로, 벼락같이 군사를 파견하여 잽싸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주동자와 가담자들을 검거하였다. 1894년 6월에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사실상 손아귀에 넣게 되었고, 이듬해인 1895년에는 계략적으로 민비(민자영=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체포될 때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 걷지를 못해 가마로 이송시키고 있는 장면>
전봉준은 5척(152cm) 단신의 왜소한 체구지만, 담력이 산같이 컷고 명석한 두뇌를 가졌었다. 1895년 2월 27일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고 조선의 법무아문으로 이감될 때에 찍힌 사진이다. 사진에서 가마에 타고 있는데, 이는 체포될 때 다리를 몽둥이에 맞아 걷기가 힘들 정도로 다쳤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옛 부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동학농민운동을 같이했던 지도자급 동지인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김덕명과 함께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음력 1895년 3월 30일(양력 4월 24일 새벽 2시)에 서울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의 나이가 만 40세였다.
한마디로 말해, 전국적으로 만연했던 송덕비가 조병갑을 낳았고, 조병갑은 탐학행위로 동학농민들의 봉기를 키웠으며, 동학농민군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을 끌어 들여, 결국에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즉, '송덕비' 와 조병갑의 과도한 욕심 때문이었다.
일부 학자들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한 사람의 지방관리가 여러 곳의 수령을 지냈기에, 여러 개의 송덕비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지방관리를 지냈던 많은 수령의 무덤 숫자보다, 송덕비 숫자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피력하면서, "당시 조선은 '송덕비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즉, 시대의 흐름에 있어 오늘날과 비교해 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겠지만, 그러나 자신의 공덕을 내세우는 송덕비는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는, 참으로 유감스럽고도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자기 개인이나 가문을 빛내고, 가문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자 수단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일부 사람들은 고부군수 조병갑이가 세운 그의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를 "강물에 던져 버리자"라고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은 꿀떡같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러한 송덕비를 앞으로는 만들지 말아야 하겠지만, 이미 만들어진 역사물은 그대로 보존이 되어야 한다. 이는 미래에 국민들이 알아야 할 "잘못된 역사적 산물"이기에, 교육용 목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조병갑이 세운 그의 아버지 조규순의 비석과, 조선의 현감들이나 군수 등 국가 공직자들의 행태를 대충이나마 짚어 보았다. 그런데 탐학행위를 일삼았던 조병갑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고부 농민들이 동학접주 전봉준을 영도자로 추대하고, 1894년 2월에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접수했는데, 그 이전에, 이미 빠져나가 도망친 조병갑은 전주로 가서 관찰사 김문현(金文鉉)에게 사태를 보고하였다.그러나 동학농민봉기의 직접적인 계기는, 조병갑의 강탈적인 여러 탐학행위로 밝혀졌다. 그리하여 조병갑은 파직당하고, 전라도 남쪽에 있는 고금도로 유배에 처해졌다.
하지만 조병갑의 집안은 상당히 짱짱했다. 조병갑은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趙斗淳=1796~1870)의 서질(庶姪=이복형제의 아들)이었고,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조병식(趙秉式)은 사촌간이었다.
여기서 잠깐, 서질(庶姪)이란?
배다른 이복형제가 낳은 아들인 조카를 말할때, 서질(庶姪)이라고 한다. 또는 양반과 양민 여성(女性)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서자(庶子)라 하고, 그 서자가 낳은 아들을 서질(庶姪)이라고도 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양주조씨(楊州趙氏) 집안에 조진익(趙鎭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진익은 제1부인에게서 조두순(趙斗淳)을 낳았고, 제2부인에게서는 조규순(趙奎淳)을 낳았으며, 그리고 조규순은 조병갑을 낳았으니, 사서(史書)에서는 조병갑을 조두순의 서질이라고 쓰는 것이다.
조병갑은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아무튼 어쨌거나 조병갑은 상당히 탄탄한 가문의 자손이었기에, 언제나 정치에 끈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친일파 내각에 줄을 이었다.
조병갑은 유배된지 얼마되지 않은 청일전쟁 직전에 친일파 내각에서 석방시켜 주었고, 그 친일파 내각이 붕괴된 후에도 고종황제로부터 중요직책에 임용되었는데, 1898년 대한제국 고등재판소 배석판사가 되어,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었다. 그 후 계속하여 친일행보를 거치면서 뻔뻔스럽게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1912년에 죽었다.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는 것인데, 뭣 때문에 그렇게 욕심을 부리면서 살았을까?!
참고로, 조병갑의 할아버지 조진익(趙鎭翼), 조병갑의 큰아버지 조두순(趙斗淳),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趙奎淳)과 그리고 조병갑의 송덕비를 모두 합치면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여기에서는 모두 생략하기로 하고 조병갑의 송덕비에 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현재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병갑의 송덕비는 현재 2기가 남아있는데, 경남 함양군 함양읍 '역사인물공원'에 있는 것과, 2009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에서 새로 발견된 비석이 바로 그것이다.
함양 송덕비 표지석에는 "조병갑이 유민들을 편하게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주었으며, 마음이 곧은 자세로 정사에 임했기에 그러한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24년(1887년)에 이 비석을 세웠다."라고 하는 내용으로 쓰여져 있다. 즉, 엉터리로 업적을 작성하여 터무니없이 한껏 부풀려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에서 발견된 송덕비는 마모가 너무 심하여, 글자 판독이 너무 어려워서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이 송덕비 2기는, 조병갑이 고부군수(1893년)에 부임하기 전인 함양군수(1880년)와 천안군수(1882년) 재임 중의 시기에, 해당지역 유지들에 의해 세운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함양군의회 군의원들은 “선조들의 충효와 선비정신, 위민과 애민사상이 깃들어 있는 '역사인물공원' 안에, 동학혁명의 도화선이라고 할 수 있는 조병갑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은, 지역 주민들의 자존심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라서, 조속히 철거해야 한다"라고 주장을 했다.
그리고 충남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에는 조병갑의 무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만 묘가 있는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조병갑과 그 가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조병갑이 아무리 간학스런 탐관오리라고 해도, 지금은 연좌제가 실시되는 조선시대가 아니므로, 필자의 생각으로는 조상이 저질렀던 시대상의 죄업 때문에 탐학과는 전혀 무관한 후손들이, 대를 이어 가면서까지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유전적으로 흐를 수 있는 조병갑의 강탈적인 탐학(貪虐)과 같은 피는 반드시 걸러내야 하고, 그의 후손들은 항상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행동할 때, 국민들도 서서히 그들이 감수하는 인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참고]
(두산백과--두피디아)
동학농민혁명답사기
http://blog.naver.com/hdcho4104/30189265215
[출처1] 영월부사 홍병도
http://blog.naver.com/bohakdang123/222686254871
[출처2] 탐관오리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영세불망비|작성자 푸른비
http://blog.naver.com/iwishtour/222486483232
[출처3] 박종인의 땅의 歷史
http://www.chosun.com/opinion/column/2020/10/07/P7PCNKPTZ5H65AOXBP3NL26QLM/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병갑(趙秉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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