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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 이곡(李穀) 가정집(稼亭集)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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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곡(李穀) 가정집(稼亭集)
고려말(高麗末) 원(元)나라 유학파(遊學派) 석학(碩學) 이곡(李穀)


‘이곡(李穀, 1298~1351)’의 ‘가정집(稼亭集)’에는, 고려말(高麗末)의 시대상(時代相)과 통치(統治)를 위한 정치철학(政治哲學)에 대한 논의(論議)가 세밀히 기술되어 있다.
‘이곡’은 당시 세계적(世界的) 패권국(覇權國)이던 원(元, 1271~1368)나라가 차츰 쇠망(衰亡)해가고, 고려(高麗, 918~1392) 역시 쇠퇴(衰退)해가는 시기를 살아냈다.
물론 ‘이곡’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러한 쇠망의 기운이 확연(確然)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곡’이 사망하고서 17년 후에 원나라가 멸망했고, 41년 후에 고려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곡’의 ‘가정집’을 통해, 원나라 말기와 고려 말기의 역사적(歷史的) 상황에 대해 모색(摸索)할 수 있으므로, 참으로 소중한 저작(著作)이다.
‘가정집’과 같은 사적(私的) 저술(著述)들은, 공적(公的) 관점에서 저술되는 자료와 달리, 단지 왕조(王朝)를 우선적(優先的) 중심(中心)으로 해야 하는 프로파간다 역할(役割)로부터 다소 자유(自由)로우므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이씨조선(李氏朝鮮) 이전의 자료들은, 대체로 이씨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철저히 이씨조선 방식으로 재단(裁斷)되었다.
예컨대, 고대사(古代史)와 관련하여, 세조(世祖) 시절 수서령(受書令) 같은 사건이 대표적 사례(事例)로 거증(擧證)될 수 있다.
그러한 상황(狀況)의 유발(誘發)은, 이씨조선을 건국(建國)하면서 천명(闡明)된 친중(親中) 사대주의(事大主義) 선언(宣言)을 공고(鞏固)히 함으로써, 이씨조선 왕권(王權)을 존속(存續)시키려는 의도(意圖)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역사적(歷史的) 정황(情況)을 감안한다면, ‘가정집’과 같은 저작이 일실(逸失)되지 않고 전해져서, 이렇게 독서(讀書)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다행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가정집’을 통해, 비단(非但) 친중(親中) 사대주의(事大主義) 풍조(風潮)가, 왕씨고려(王氏高麗)라고 해서 이씨조선(李氏朝鮮)과 크게 별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아주 인상적(印象的)인 사실이다.
예컨대, 우본국재상서(寓本國宰相書)를 살피면, 고려(高麗)의 국왕(國王)이 원(元)나라 승상(丞相)의 신분이었음이 기술(記述)되어 있다.
그리고 선진국(先進國)이었던 원나라에 유학(儒學)하고, 원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는 일이, 어떤 권능(權能)을 지니는가에 대해서도 여실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고려말(高麗末)에 이르러 고려(高麗)는 원(元)나라의 속국(屬國)이었고, 조선초(朝鮮初)에 이르러 조선(朝鮮)이 명(命)나라의 속국이었음을 방증(傍證)할 수 있다.
이는, 근대(近代) 이후 21세기에 이르도록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문명(西洋文明)의 중심지(中心地)인 미국(美國) 유학이 선호(選好)되는 현상과 별다르지 않다.
다만, 조선말(朝鮮末)에 이를수록, 그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정도(程度)가 더욱 강해졌다고 할 것이다.
이곡(李穀)은, 1298년(충렬왕24)~1351년(충정왕3)까지 생존했던, 고려(高麗)의 문신(文臣)·학자(學者)이다.
자(字)는 중보(仲父)이고, 호(號)는 가정(稼亭)이며,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하략-▣ 목차

◈ 이곡(李穀) 가정집(稼亭集)
고려말(高麗末) 원(元)나라 유학파(遊學派) 석학(碩學) 이곡(李穀)

1. 정치(政治)란 무엇인가, 원수한(原水旱)
2. 충효(忠孝)는 시의적절(時宜適切)해야 한다, 조포충효론(趙苞忠孝論)
3. 계집종 간통(姦通) 무고(誣告) 사건, 석의(釋疑)
4. 결혼(結婚)한 여자(女子)의 도리(道理), 절부조씨전(節婦曺氏傅)
5. 홍범구주(洪範九疇) 식화(息化)와 중국(中國) 형법(刑法), 책문(策問)
6. 알코올중독이 되어버린 죽씨(竹氏) 부인(婦人), 죽부인전(竹夫人傳)
7. 재수가 좋아서 천자(天子)가 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배갱설(杯羹說)
8. 임금의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잠시 빌린 것이다, 차마설(借馬說)
9. 임금을 교육하는 제왕학(帝王學), 사설(師說)
10. 신하(臣下)의 도리(道理), 신설(臣說)
11. 천지만물(天地萬物)에 이름이 붙여지는 까닭, 내옹설(乃翁說)
12. 여자를 사고파는 여사(女肆)와 법규를 농락하는 이사(吏肆)와
사람을 사고파는 인사(人肆), 시사설(市肆說)
13. 순(舜)임금과 도척(盜跖)의 부지런함은 다르다, 제근설후(題勤說後)
14. 인맥(人脈)이 있어야 출세(出世)할 수 있다,
여동년조중서최헌납서(與同年趙中書崔献納書)
15. 고려(高麗)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원(元)나라로 끌려가는 상황에 관하여,
대언관청파취동녀서(代言官請罷取童女書)
16. 재물(財物)이 능력(能力)이고 권세(權勢)가 지혜(智慧)라고 한다,
우본국재상서(寓本國宰相書)
17. 나를 선발(選拔)해 주세요, 상정당계(上政堂啓)
18. 존경스런 불교(佛敎) 승려(僧侶)를 전송하며, 송수정장로서(送水精長老序)
19. 북쪽 중국(中國)에서 유학(遊學)하는 까닭,
송김동년동양유상국서(送金同年東陽遊上國序)
20. 능력(能力)과 공적(功績)에 관하여, 응거시책(應擧試策)
21. 경제(經濟)와 인구(人口)에 관하여, 향시책(鄕試策)
22. 황(皇)과 제(帝)와 왕(王)과 패(覇)의 차이(差異)에 관하여,
정시책(廷試策)
23. 왕기(王沂)가 지은 가정(稼亭)에 대한 기록, 가정기(稼亭記)

책리뷰

저자소개

엮은이 탁양현

왕기(王沂):가정기(稼亭記)

稼亭雜錄

稼亭記[王沂]

 

李君中甫世家三韓山陽。居有桑麻秔稌之饒。賓婚燕祭之用取具。題其亭曰稼。請余記。三韓去京師數千里。重江複關之阻。海隅障徼之聚。襏襫鉏耒於衍沃之野。視晨昕以作止。候寒暑以發斂者。風雨時若。田出以倍。抱鼓之警不聞。室家之樂怡如也。可不知其所自耶。而况釋耒耟而軒冕者。又可不知其所自耶。聖朝薄海內外。罔不臣妾。德之所幷容徧覆。恩之所涵煦生養。聲敎之所漸被。田畊井飮者。固與草木 

昆蟲游泳太和。莫知其然。士而軒冕者。可不知所以報耶。夫王事惟農是務。粢盛於是乎出。供給於是乎在。於以興和協輯睦。於以成敦厖純固。夫知慕義於天朝。可不出於此歟。彼籯齎槖負。航浮手筰。以修貢職。特事上之常典耳。必也鐵以鎛釤鉏斸而不以兵。民尙田作而恥末技。士之未仕。其恪恭于農。旣仕。必嗇民力。必重民時。糓祿受於己。其思耨穫之勤勞。政令加諸人。毋忽田壄之利病。以繩墨自馭。以愛利爲行。庶乎其可也。中甫始由其鄕歌鹿鳴而來。戰藝春官。策于天子之庭。中乙科。授承事郞翰林國史院檢 

閱官。已而遷掌故徽政院。未幾。擢征東行丞相府員外郞。逢辰休嘉。方施其所學。入從出藩。亦可謂榮矣。視其名亭。若將與耘夫蕘叟相從於隴畒之上。庸詎不忘民事之囏。其知所以報者夫。至元三年秋九月望。承直郞國子博士王沂。書于神州之官舍。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가정기(稼亭記)

이군 중보(李君中甫)는 대대로 삼한(三韓)의 산양(山陽)에서 살아왔다. 거주하는 곳에 뽕과 삼과 벼 곡식 등이 넉넉해서 손님 접대와 혼인과 잔치와 제사 등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정자를 가(稼)라고 이름 짓고는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삼한은 경사(京師)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다. 강과 산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 바다 모퉁이 외진 변두리에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기름진 들판에서 도롱이를 걸친 채 밭을 갈고 김을 매면서, 아침과 저녁을 살펴 일하고 그치며, 추위와 더위를 살펴 가꾸고 수확하는데, 때에 알맞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논밭에서는 갑절이나 더 곡식이 생산된다. 이처럼 경보(警報)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는 일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즐기고 있으니, 그렇다면 이런 낙을 누리게 된 그 이유를 알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더군다나 쟁기를 손에서 놓고서 수레를 타고 관을 쓴 벼슬아치라면 더더욱 그 이유를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성조(聖朝)는 해내와 해외 어느 곳이든 신첩(臣妾)으로 삼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는 은덕으로 모두 포용하여 보살펴 주고 은택으로 적셔 길러 주면서, 그 풍성과 교화가 세계 끝까지 번져 가고 입혀지게 하였다. 자기 밭을 갈아서 밥을 먹고 자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 자들이야 원래 초목, 곤충과 똑같이 태화(太和)의 기운 속에서 유영하면서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선비로서 수레를 타고 관을 쓴 벼슬아치가 된 자라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대저 왕사(王事)는 오직 농사를 제대로 짓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는 바이다. 왜냐하면 제사에 올리는 자성(粢盛)이 여기에서 나오고, 생활하게 하는 물자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 함으로써 협동하고 화목하는 기풍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요, 아, 이렇게 함으로써 돈후하고 순일한 풍속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천조(天朝)에 대한 의리를 사모할 줄 아는 자라면 바로 여기에 입각해서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 번방(藩邦)에서 광주리에 담고 전대에 싸서 배를 띄우고 부교(浮橋)를 건너 조공하는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단지 위를 섬기는 일상적인 의전(儀典)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따라서 반드시 쇠로는 낫이나 호미 등 농기구를 만들게 하고 무기는 만들지 말게 해야 할 것이요, 백성들은 밭에서 일하는 것을 숭상하고 그 이외의 말기(末技)는 수치로 여기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비의 경우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에는 농사를 경건하게 여기며 힘쓰고, 일단 벼슬한 뒤에는 반드시 백성의 힘을 아끼고 백성의 농사철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곡록(穀祿)이 돌아올 때에는 김매고 거두어들인 농부의 수고를 생각해야 할 것이요, 사람들에게 정령(政令)을 행할 때에는 논밭의 이해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엄한 법도로 자신을 단속하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해 주려는 정신으로 일을 행한다면 거의 옳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보(中甫)는 당초에 향리에서 녹명(鹿鳴)을 부르며 올라왔다. 그리하여 춘관(春官 예부(禮部) )에서 기예를 겨루고 천자의 뜰에서 책문에 응한 결과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사랑(承事郞)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을 제수받았다. 그리고 조금 뒤에 장고 휘정원(掌故徽政院)으로 옮겨졌으며, 얼마 있다가 정동행승상부 원외랑(征東行丞相府員外郞)에 발탁되었다. 아름다운 시대를 만나 그동안 배운 실력을 발휘하면서 시종으로 들어왔다가 번방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만하다. 그리고 그가 정자를 이름 지은 것을 보건대, 장차 밭두둑 위에서 김매는 농부나 꼴 베는 늙은이와 서로 어울려 지낼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니, 그렇다면 농사짓는 어려움 같은 것이야 어찌 잊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하면 보답할 바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원(至元) 3년(1337, 충숙왕 복위6) 9월 보름에 승직랑(承直郞) 국자감 박사(國子監博士) 왕기(王沂)는 신주(神州)의 관사(官舍)에서 쓰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7

稼亭詞[謝端]

詹農祥之晨正兮。嚶九扈其和鳴。躬錢鎛以俱往兮。日與雞而俱興。甘雨至而及時兮。嘉苗起而懷新。乃芟蕪而立良兮。寧塗潦之勞吾身。竢堅實以一飽兮。猶有虞於乾溢。庶徵時而不忒兮。始不負其勤力。黍 

稌坌其登塲兮。信秋成之可樂。必勞勩而後得兮。可一日之不作。余昔偃於田廬兮。樂與苦其相參。何釋耒而紆緩兮。視力田而有慚。齒髮颯其衰莫兮。盖欲歸而無所。子方興而致用兮。遽遐思於農畒。屹環堵之危亭兮。期作勞以自營。奉菽水而怡顏兮。或高廩之可盈。彼老農之爲智兮。非聖人之不如也。念民事之艱難兮。不敢怠而逸居也。又爲之歌曰。東海之壖。子所田兮。出作入息。樂有年兮。非帝之力。孰我安兮。彼君子兮。不素餐兮。

謝端

가정사(稼亭詞)

농상이 신정할 때에 이르면 / 詹農祥之晨正兮
구호가 서로 부르며 정답게 노래하나니 / 嚶九扈其和鳴
농기구 손에 들고 밭으로 나가면서 / 躬錢鏄以俱往兮
날마다 닭 소리와 함께 일어난다오 / 日與鷄而俱興
단비가 제때에 알맞게 내리면 / 甘雨至而及時兮
곡식 싹들이 푸릇푸릇 돋아나는데 / 嘉苗起而懷新
잡초를 제거하고 양곡을 세우노라면 / 乃芟蕪而立良兮
진창에서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흐뭇하다오 / 寧塗潦之勞吾身
곡식이 영글어서 한번 배불리 먹을 때까지는 / 竢堅實以一飽兮
아직도 가뭄과 홍수의 걱정이 있나니 / 猶有虞於乾溢
서징이 때에 맞아 어긋나지 않아야만 / 庶徵時而不忒兮
힘들게 노력한 공이 헛되지 않게 된다오 / 始不負其勤力
기장과 벼를 모두 거두어들인 뒤에야 / 黍稌坌其登場兮
추수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터 / 信秋成之可樂
반드시 열심히 수고한 뒤에야 얻는 법이니 / 必勞勩而後得兮
하루라도 일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 可一日之不作
내가 옛날 시골집에 칩거할 적에 / 余昔偃於田廬兮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맛보았는데 / 樂與苦其相參
어찌하여 쟁기를 버리고 인끈을 두르고서 / 何釋耒而紆綬兮
농부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는고 / 視力田而有慙
치아와 두발이 모두 쇠한 늘그막에 와서 / 齒髮颯其衰莫兮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라 / 蓋欲歸而無所
그대는 이제 몸 일으켜 세상의 쓰임이 되는 때에 / 子方興而致用兮
이렇게 빨리도 고향의 전원을 멀리 생각하시는가 / 遽遐思於農畝
농가 옆에 정자를 높이 우뚝 세운 것은 / 屹環堵之危亭兮
직접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결의일 터 / 期作勞以自營
숙수의 봉양을 하며 기쁘게 해 드리노라면 / 奉菽水而怡顔兮
커다란 창고가 가득 차서 넘칠 수도 있으리 / 或高廩之可盈
저 노농이 가진 지식보다도 / 彼老農之爲智兮
성인이 못한 것이 결코 아니었나니 / 非聖人之不如也

농사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생각하면 / 念民事之艱難兮
감히 무시하며 편히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네 / 不敢怠而逸居也
또 가정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 又爲之歌曰
동쪽 바다 저 토지는 / 東海之壖
그대가 농사짓는 곳 / 子所田兮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쉬면서 / 出作入息
풍년의 즐거움을 장차 누리리라 / 樂有年兮
임금님의 힘이 아니고서야 / 非帝之力
어떻게 이 몸이 편안하리오 / 孰我安兮
우리를 다스리는 저 사람이여 / 彼君子兮
하는 일 없이 얻어먹지 않는도다 / 不素餐兮

사단(謝端)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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