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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계음집(溪陰集) : 조팽년(趙彭年),1899년, 출생:1549년(명종 4) ~사망:1612년(광해군 4)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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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주봉서원(胄峰書院) (tistory.com)

 

전남 강진. 주봉서원(胄峰書院)

주봉서원(胄峰書院)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5호(2004.11.01) 전남 강진군 옴천면 장강로 1785-3 (영산리 381-16) 주봉서원(胄峰書院)은 옴천면 영산리 계원마을에 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를 지낸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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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음집(溪陰集)조팽년(趙彭年),1899년, 출생:1549년(명종 4) ~사망:1612년(광해군 4)

■號 : 경로(景老), 계음(溪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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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로(景老), 호는 계음(溪陰)이다. 할아버지는 조안식(趙安植), 아버지는 조세걸(趙世傑)이고, 어머니는 김은혁(金殷赫)의 딸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부인은 이천서씨(利川徐氏)와 원주이씨(原州李氏)가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3년(선조 6) 생원이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 전의현감으로 재임하다가 조망(躁妄)하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99년 여산군수(현재의 전북 익산시 여산면 지역)로 재임하던 중에 정사를 아전에게 맡겨 요역이 고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쇄마(刷馬)로 개인의 짐을 운반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강진의 주봉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계음집(溪陰集)』이 전하고 있다.

 

[구성과내용]

본집은 6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899년에 奇宇萬이 지은 서문이 있다.

■권1에는 詩 169제가 실려 있다. 1592년 義州에서 지은 시를 비롯하여, 倭亂 중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읊은 시와 명나라 장수 駱尙志, 劉綎과 統制使 李舜臣, 體察副使 韓應寅 등에게 올린 시 등 왜란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이 중 〈龍灣述懷〉는 선조를 호종하며 義州에 있을 때 지은 시로 임금에 대한 충성과 가족을 그리는 내용이며, 〈述懷〉는 임금이 욕을 당하고 국운이 위태했던 왜란을 술회하며 지은 것이다.

권2에는 詩 42제가 실려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지은 시와 〈將鑑博議諸將贊詩〉이다. 〈장감박의제장찬시〉는 戴溪가 편찬한 「歷代將鑑博議」에 실린 94명의 中國歷代 名將 가운데 전국시대의 孫武부터 五代의 郭崇韜까지 62명을 뽑아 이들에 대해 각각 1수씩 七言絶句로 지은 贊詩인데, 이 중 王濬, 祖逖 두 사람은 시 내용이 없다. 끝에 七言古風長句 2제가 附記되어 있다.

권3은 賦 15편이다. 〈木覓山賦〉는 1572년 성균관의 輪次에서 장원한 것으로 수도 서울을 호위하는 南山의 위용과 王業의 무궁함을 기리는 내용인데, 제목 아래에 “木覓은 枸杞인데 남산에 구기자가 많아서 목멱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색다른 주석이 달려 있다. 〈龍灣述懷賦〉는 1592년 11월 선조를 호종하여 義州에 머물 때 지은 것으로 왜란 중의 분개한 심정을 읊었고, 말미에는 노래로 부른 가사 내용이 첨부되어 있다. 〈南歸賦〉는 평양성 전투를 승리한 뒤에 御駕가 義州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지나온 곳과 所懷를 읊은 것으로, 예전에 지은 〈述懷〉에 賡韻하여 1593년 7월에 지은 것이다. 이 두 편은 저자의 다른 賦 작품과 달리 본문에 상세한 주석이 달려 있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권4에는 論 2편이 실려 있다. 〈范純仁論救蔡確論〉은 王安石의 무리로 舊法을 문란하게 한 채확의 허물을 용서한 범순인의 일에 대해 논한 글이며, 〈謝安矯情鎭物論〉은 晉나라 재상 사안이 秦나라 군사가 쳐들어와서 이들을 물리친 보고서가 올라와도 바둑을 두면서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등, 아무리 위급한 때에도 몸가짐을 태연히 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는 내용이다.

권5에는 箋 2편, 書 3편 등 9편이 실려 있다. 전은 大殿의 誕日과 正朝에 올린 賀箋이며, 서는 李後白의 서원을 康津에 세울 것을 청하는 편지, 왜적의 방어에 필요한 康津의 兵營을 長興으로 옮기지 말도록 士民을 대신하여 체찰사에게 올린 편지 등이다. 이 밖에 擬表와 祈晴文, 저자가 살던 金陵(康津) 黃谷 인근의 泉洞 시냇가에 세운 溪陰亭에 대한 기문, 그리고 순서대로 정밀하게 책을 읽는 것이 독서의 요체가 된다는 등 저자의 독서론을 피력한 〈讀書綱要〉가 실려 있다.

■권6에는 崔時弼ㆍ李毅敬이 지은 行狀, 洪良浩가 지은 墓表 등의 묘도문자, 徐希信이 지은 〈扈聖功臣都監呈文〉과 「湖南節義錄」, 「倡義錄」 등에서 뽑은 저자 관련자료 등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1899년에 지은 후손 趙冕衡의 後序가 있는데, 후서 말미에 本集이 1899년 영암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사실을 알려 주는 ‘己亥仲春靈巖開刊’이라는 刊記가 판각되어 있다. 이어 본집의 간행에 참여한 인물의 명단을 기록한 有司錄이 실려 있다.

계음집(溪陰集)

溪陰集序

●溪陰集序[奇宇萬]

先生遺文。垂三百年未行。非直爲雲仍私慨。士林與有責焉。及今始謀剞劂。余曰遲之哉。曩日國家崇奬節義。靡幽不闡。使此集得行。則詩足以領在樂官。文足以裨補風化。而見今黑齒搶攘。庶僚依阿。伏節死義之風。掃地盡矣。此等文字。便作越人章甫。何益矣。旣而曰速之哉。亂極思治。天理固然。家讀戶誦。又安知不爲慷慨思奮之一苗脉也哉。先生以經術之士。遭龍蛇之變。扈駕龍灣。應接軍務。累被天奬。大僚推讓。至使天將歎滯下僚。而知東國不競。先生之爲先生。可知已。及味其忠憤諸作。雖謂日月爭光。非過語也。第其龍灣述懷。尤令志士霑襟。其詩曰主辱臣當死。時危敢顧私。腰間一長劒。倚馬立西垂。方拈筆寫此。星月爲之動光。恨無望氣者道其事。使先生得行其志。則忠武海上之捷。在其度內。而壯士南江之死。亦其所抱。惜乎。以文武才具。用於應接。而不用於委任。宜乎天將有此歎也。此集之行。莫說其他。上自執政。下至韋布。拈出述懷詩。千遍讀過。則今日事猶可爲也。先生孝友出天。斫指廬墓。子職純至。山猪野雞。物感亦多。內外百行。昭載狀德。此不重述。特書曠感于中者。以弁其卷。來請文者。後孫奉河,喜權。

歲己亥仲春。幸州奇宇萬謹書。

溪陰集卷之一

 

1題靖陵典祀廳壁

2泰陵有感

3贈河平澤

4贈延士訥

5次沈應敎餞別鄭金城韻 二首

6漢江口占

7題奉恩寺壁

8倭賊犯順大駕屢遷追隨寧邊力竭不及漂泊渭原乃作詩述懷三首

9龍灣九日和韓景洪公自渭原達于行在時大駕駐龍灣

10龍灣呈洪判書 汝諄

11贈洪羣玉

12戲贈善書韓景洪 三首

13直騎省有感

14次韓景洪

15秋曹有感

16次梧陰尹相國贈義僧將韻

17次岳武穆北伐韻呈駱參將名尙志天將

18龍灣吟

19贈都司管事毛古贒陳繼先毛陳皆皇朝人

20龍灣述懷 四首

21辭賜紬有感

22龍灣次洪羣玉韻別之自注時皇帝遣提督李如松救我朝鮮南士獻疏請大駕幸本道洪羣玉以此遠來

23次劉員外 二首

24次韻上季游擊

25呈劉提督 自注聞提督團束病中賦詩以呈劉名綎皇朝人

26呈昭義將林公案下

27上李統制 舜臣

28上韓體察副使 應寅

29傷時

30回鄕 癸巳秋

31述懷

32上尹月汀 二首

33上鄭松江

34寓歎

35春懷

36又絶句

37呈韓體察

38撥憫

39金寢郞弟來而不來泥雨㥘出必愆佳期走筆戲簡兼示文兄

40戲贈馬弘倫

41聞柳上舍園亭梅發 上舍名訒家羅州

42謝柳上舍

43別柳克甫

44憤吟

45短述

46呈梧陰相國

47小亭短吟

48亭上卽事

49上松隱先生謝過

50遣興

51贈崔榮叔

52卽事

53贈李友

54悼金汝霖寄徐汝一

55自述

56秋日有感

57哀金汝霖戚弟

58細柳廢城有感

59老懷

60秋意

61送崔任實之縣

62贈朴謹禮

63偶吟呈梧陰尹相國

64謝崔榮叔贈刀

65漫興

66呈許參判筬

67養雞

68上梧陰

69奉簡李右相國 明甫兼呈李參判德輝

70伏日

71夏雨

72幽懷

73介山醉吟

74春日卽事

75桃花問答

76梨花

77戲寄李而立

78書事

79戲贈文鄕監兼示金寢郞徐校長

80雨不絶

81贈金弟

82山中書懷

83松隱養眞堂

84贈徐士吉

85謝韓部將慶元來訪

86又贈李而立

87自詠

88示錦城諸生

89戲贈綾城河使君 元龍三首

90和林明府 晛

91春日

92馬上得句

93偶吟

94送金校理赴都

95次金校理閒居自詠

96哭林明府

97寄呈沈尙書 伯順

98香囊

99黌舍戲成

100寄溪翁

101漫興 詩缺

102獨坐

103送洪直長之濟州

104又絶句

105遭讒憤吟

106輓柳司馬

107礪山郡齋

108次唐人韻贈唐人

109淸夜吟

110漫題

111次韓繼貞 二首

112山寺贈韓翁 二首

113孟孫廢墟梨花

114戱簡介山友人

115賀徐公叔姪參發解試 二首

116擬古

117菊花歎

118轉聲變字體二十八斧戲刺年少

119雨中

120江上雜詠贈金以卿

121送婿郞之京

122風高楡柳疎

123送人之京

124光山黌舍池上

125亭上

126贈高汝植

127呈呂牧伯尙夫

128投贈宋景陽兼呈呂牧

129寄宋察訪福汝

130上鄭判書 松江

131輓趙虞候

132輓金校理

133新歲簡賀松隱翁

134縣館次孟襄陽韻

135早朝次賈舍人韻

136哀時

137賦所聞 時國家取武士一千餘人賜及第章甫半於其中故云

138幽居謾詠

139寓懷

140上邊連帥

141題挾仙樓

142酬奉事宋應禮

143春日病中

144題同年具節度自寫墨竹

145集句

146溪陰亭

147言志

148閒情

149題韓正郞 濩 額書後

150送別具節度 四首

151贈德行僧

152贈朴卿彥

153溪亭記事

154贈郭眉叟

155醉示村翁

156讀易有感用溪陰亭韻

157寄金處士

158寄徐汝受

159謝李泰之借梅

160戲贈張天樞朴卿彥

161又和韻

162感興

163再用溪亭韻 三首

164村興

165江行

166病眼

167輓李虞候

168山居卽事

169獅子山下

溪陰集卷之二

1和呂牧伯 公以提督官在光山黌舍

2喜慶樓別呂尙夫

3呈牧伯李丈

4游無等山 十一首

5醉中走筆

6贈人

7靜中作

8次竹亭韻 二首

9戲贈竹亭主人

10和竹亭主人

11雪曉

12答人

13寄棋友金文兩人

14戲贈文仲寬

15溪陰亭記事

16漫成 二首

17月出山書齋賦得月出山呈座中諸贒二首

18戲吟

19月山書舍示諸生

20輓洪參判 湜自注洪謫吾鄕而死

21投贈錦山倅禹同年

22題連帥廳壁上

23寄加浦申僉使

24示朴已能

25示徐國祥

26示丁

27示徐三省

28示姜文吉

29哭同年鄭牧使 渫 黃臨陂 承憲

30寄李察訪景信

31江天暮雪

32歸鳥趍林鳴

33寄李泰之

34溪上偶吟

35病中書懷

36廢寺桃花

37三月雪

38猪食麥

39將鑑博議諸將贊詩

40小亭短吟

七言古風長句

見客似無官

謝李別提相過

溪陰集卷之三

1木覓山賦

2寸草軒賦

3龍灣述懷賦 龍灣義州別號

4南歸賦 幷小序

5擬北山移文寄金處士錦城倡義通文答後

6聽潮樓賦 樓在湖南康津縣今鎭海樓

7登平乘樓賦

8棋賦

9鐵柱杖賦

10易水悲歌賦

11神鷹不顧鳶賦

12遼使問起居賦

13東風不世情賦

14山靜似太古賦

15尙友賦

溪陰集卷之四

1范純仁論救蔡確論

2謝安矯情鎭物論

溪陰集卷之五

1大殿誕日賀箋

2正朝賀箋

3擬漢蘭臺令史孔僖謝幸闕里會講論語表

4苦雨祈晴文

1上邑宰請建李靑蓮書院書

2與金節度書

3上體察使書 代縣士民作

4溪陰亭記

■溪陰亭記■ 

名亭以溪陰。識其地也。蓋古之人。名其亭閣。或有自稱之者焉。或有取其物者焉。或有識其地焉。如醉翁亭野翁亭。乃自稱者也。栢堂竹閣。取其物者也。合江亭岳陽樓。識其地者。余家于金陵之黃谷。谷之乾方有泉洞焉。洞有溪。潺潺而流。錚錚而聲。至家北遇石凹處。匯爲池。復落巖而注下。放乎前川。丙午春。余乃沿流沂源。愛其淸澈。乃買斷丈地。作亭于溪之上。以爲休息之所。欲擇令名而莫能定。夢神謂己曰亭可名以溪陰。余遂以名之。夫山南爲陽。水南爲陰。而亭在于溪之南。故曰名亭溪陰。識其地也。抑又自稱之辭。取物之義。亦在其中。我不在山不在野。而長在乎溪上。則自稱曰陰翁。不其宜乎。若夫取物。亦有兩端焉。仲尼有樂水之稱。孟子有觀瀾之語。是誠取其道理而言者也。有曰溪橋曉溜浮梅萼。桃花流水杳然去。臥看溪南十畝陰。是則只取其興味者也。余昧道瞢學。已不跂於聖贒之域。其能取義理之微旨。反之於吾身而有得焉爾乎。乃若溪之爲物也。夏宜急雨。聞疊鼓聲。冬宜堅氷。作白玉面。秋月照之。光似躍金。春風吹之。紋如織縠。宿契幽人之趣。屢挑騷客之腸矣。而余早脫宦海。晩吟林泉。時時散步於溪畔。悠悠獨吟於亭上。玩四時之光景。忘一身之榮枯。簞瓢空而晏如也。鵬程阻而自得也。其視鄙夫俗子營營區區。亦可謂得江山之興味。知其無可柰何而若命焉者也。雖然父母已沒。而初無兄弟。仰而不能不愧於天。俯而不能不怍於人。旣不得於君子之三樂。溪亭之景致。雖美。肯以外物而動心也歟哉。此正岳陽樓記中不以物喜。不以己悲之意也。然而平生不以山爲囚。不以溪爲愚。洗耳綠池。濯纓淸波。水流縱急而心與境俱靜。是余之可慕可能者矣。雖不望於智者之涬於事理而周流無滯。雖未及於先憂後樂之范公。大川喬嶽之醉翁。聊且識其地。以名吾亭。遂爲之記。萬曆己酉春正月人日。黃谷逸人。書于亭之壁。

5讀書綱要

溪陰集卷之六

●故行礪山郡守贈左承旨溪陰趙公行狀[崔時弼]

溪陰集卷之六

故行礪山郡守贈左承旨溪陰趙公行狀[崔時弼]

公諱彭年字景老。其先漢陽人也。六代祖孝生將仕郞。典涓司參奉。自漢陽南徙于羅州。子曰子山。子山生伯雲。寔公之高祖也。妣尹氏。康津黃谷人仡春之女也。此又移家于黃谷。俱學生。曾祖考諱永發。忠武衛副司直。妣金氏。安東順孚之女。祖考諱安植從仕郞。禮賓寺參奉。妣金氏。同里竹谷哲貞之女。考諱世傑。秉節校尉。以公勳贈通政大夫工曹參議。妣金氏贈淑夫人。籍金海。學生殷赫之女也。公以己酉六月十四日。生于黃谷里第。幼聰明絶人。於書一覽便卽成誦。長而尋師講習。能通大義。壬申游學於泮宮。作木覓山賦。魁于多士。至徹睿覽。遂知名當世。藉藉人爭艶稱焉。是秋講四書于禮部皆通。癸酉春。中生員試。丙子登明經丙科第三人。偶閱大邑都書員田案。誦傳無一錯漏。新曆一覽與人。永不忘一字。誠異才也。葢公之博學好問。參議公勤家累仁之功。至是始著焉。丁丑冬。除會寧府敎授。兩親在堂。辭不赴。四舘不可躐次進薦。凡閱四歲。皆食于家。壬午正月。例拜校書館副正字。鎖直香室。二月兼奉常寺參奉。夏呈辭歸覲。十二月陞正字。癸未三月。再授奉常參奉。四月授著作。未幾以課試不作。解爲司猛。六月薦博士。其在太常。祀事孔明。其在芸閣。讎校惟精。十月奔外憂。甲申荐遭內艱。合窆于坎火之山。遂居廬於其下。朝夕上塚號霣。雖風雨未嘗一日廢焉。當享祀則蠲饎盡愨。自鼎俎至床筵。靡不手適而躬親焉。所食兩度溢米而已。菜醬亦擇其味不甚滋者而強進也。遇諱辰則輒先齋沐。不接賓客。端居一室。未敢言笑。必思其所爲。而冀神爽之相注。逮晨號哭將事。殆若袒免之始。人不忍仰視。而莫不稱服焉。丙戌三月由吉。六月薦授成均館典籍兼南學敎授。九月攝敬差官。監穡事于金浦。爲學田也。俄拜司憲府監察。十一月除全義縣監。地小民殘。邑又累經匪人。衆弊蝟集。下車後銳意櫛爬。其政尤以興學校敦風化爲本。俗多觀感而興起焉。兩造就卞則以公嚴爲案。了不以蹊徑被其鑽刺也。自奉極簡。盤供只數器而已。衣袴仍穿家製。而經年不以新造焉。出入不張蓋。騶傔亦僅數人而止。所騎殆是款段劣容代步者。丁亥春上疏。獲減漕水軍絶戶三十餘額。闕番價布幾三百餘疋。實惠灌洽于一境。咸謳謠而頌也。第其裁束豪右太過。巨室滋不悅。齊瞷參會。煽謗于朝。戊子六月被臺評罷歸。庚寅十月甄敍而拜承文校理。壬辰三月。差贈祭官行事于長興治之東。以兵使卞國榦之卒也。竣事纔還。値倭寇之警。請出內需司布帛以賜南征將士。又請上親御敦化門。下哀痛罪己言。以慰軍民。仍與臣隣以議防禦之策。且手製一疏曰都城雖云闊大難守。宗廟社稷所在。柰何委而去之。固宜鑿斯築斯。與羣下效死。如孟子之言。則猶可爲也。旣奏不省。四月二十九日。以大祝兼典祀官。秖詣于靖陵。是夜大駕避賊西狩。僕夫蒼黃泣請曰自此直下湖南庄所。公發憤叱却曰君父蒙塵。不思奔問。豈忍草間苟活。要以爲全軀保妻子之計乎。有死而已。安敢爲言。翌日與成均典籍徐希信。自陵所還渡江。取道于箭串津。轉向楊州大灘,澄波渡等處。逶迤趲進。備嘗險艱。時京師已陷。宮闕皆燼。且官軍新刳于臨津。賊勢甚盛。夜發長湍。蠒足疾行。初昏始抵松都。乘輿已發矣。五月旣望。追及於平壤。而沿道累被賊陣所攔。其危偪困迫。殆不可殫記。行在僚屬。皆喜公之脫厄。服公之仗義。咸嘖嘖而傳說稱道也。李白沙恒福筵啓曰趙某忠肝節槩。合施褒奬。上卽召入慰諭。命拜禮曹佐郞。時華使絡屬。迎接禮繁。前此爲是官者。連遭非理於上國人。如有時朢李體素春英。至被捽曳於李提督。而公乃受任於齒舌之後。應對周旋。動合機宜。邢軍門謂柳西崖成龍曰海東宜不競也。如趙某尙滯下僚。其可謂能用人乎。大同館中。未曾見此輩矣。上之出平壤。在六月上旬。公臀生毒腫。且値馬瘏而不得扈行。非敢後也勢也。倭入浿城。道路阻絶。追入于渭原,碧潼,昌城之境。七月始達于義州。卽行在所也。又拜承文校理。時八路盡陷賊藪。大駕寄在一隅。擧國所望。只是請兵一事。表啓文字。槐院專管。大提學尹月汀根壽。作一四六奏文以示公。公曰誠盡美矣。某句用事似不襯。某句下語恐有忌。尹公大寤曰君雖有詞翰名。不料其如許矣。合置湖堂選也。他日吾可以剡錄。俄遷刑曹正郞。時寵婭之弟金公諒因紬商不低價杖殺之。臺啓請治公諒。諉諸其奴。欲令代囚焉。公爲該色。請於判書鄭西川崑壽曰直歸於公諒而償命。方可爲立法制夬人心。而轉展爲重恢之階也。鄭公吐舌曰君不畏死。可謂強項令也。又作郞於薛天使都監。主搬運芻粮事。以嫺辭令負幹局也。戶曹判書李坡谷誠中欲薦爲本曹郞曰文士例短才具。而此人何兼備也。癸巳正月。天兵勦走箕都之賊。時廟位主。東宮奉在寧邊府。上命妙簡大祝官。走告賊破。李梧里元翼以冢宰。差以公名。上敎曰此任果得人矣。大駕還次定州,永柔也。仍以刑官從。又疏陳三事。曰備邊司論功之不平也。曰都元帥金命元之當遞也。曰平安節度李潤德之當戮也。諸宰乃於筵中大加非斥曰語多狂妄。不可用也。領相尹梧陰斗壽曰今日諸臣。留在一隅。惟以保全身命賭取官爵。爲得計。未嘗以直截之辭。動觸時諱。而此人獨以滿朝之所不敢言。登諸章奏。甘自陷於逬逐蹭蹬之科。儘可謂鳳鳴朝陽矣。大司憲沈一松喜壽曰臣以都憲。反有愧於刑郞。彼誠有大力量。而臣則爲妾婦之徒也。上數幸肅川,平壤。禮接唐將也。公每躡通禮官。動止進退。極有雅儀。往復應酬。俱合體貌。上敎曰吾以爲具宬善於此任矣。斯人也又不减矣。李提督駐札京城。公呈國咨于軍門。請尾擊倭奴。劉員外留鎭定州。亦以上命往來問候。因奉紫石大硯。嘗以上命就監李統制舜臣軍於南海。以其廉察監陣之故。而三日留陣。備論禦倭獻䤋之策。又細陳覆啓之條。李公稱歎不已。許以大力量大簡局云云。公作詩贈之曰從今要續浯溪頌。莫笑書生迂且狂。又以上命往諭韓體察應寅于臨津。公作詩贈之曰踈慵若使參蓮幕。肯讓燕然作漢銘。盖公雖在下位。旣値否運。思欲以忠義自勵。以樹奇勳。仰報聖恩。而身旣文士。不慣武猷。故動以古人濡染大筆處之。然其志槩激烈素如是。於此亦可見公之所抱負也。公嘗在龍灣。適當竆沍。身無所着。上憐其寒凜。命賜疋帛。力辭不受。仍獻詩句曰一身寒凍猶微事。願作南征將士衣。上敎鄭松江澈曰卿每欲以淸白忠義。自矢于心。此人亦可以匹於卿也。公之忘身憂國。一片丹心。不但受奬於君父。足令人感發於百有餘年之後矣。公在江西。以病遞職。思切南歸。求爲錦城提督官。甲午棄而還家。戊戌十二月。除礪山郡守。己亥春。力疾上任。政尙勞來。流民頗集焉。公曰吾欲以宿昔之志。略試於民社之地。而大饑之餘。閭里創殘。有若巨疾纔愈。眞元漸惙者然。固莫如靜以鎭之。然其所尤無良者。不可以不搏焉。痛繩其土豪數三家。竟被其囑臺官罷之。癸卯四月。拜光山提督官。甲辰錄扈聖原從勳居一等。以負羈絏于關西也。戊申宣廟禮陟。三年不御酒肉。居處一依親亡之時。以盡方喪之制焉。盖公當親之病。而旣斷其指。及親之歿而又泣其血。古所謂忠求于孝者。儘如斯夫。辛亥湖南多士。有以李靑蓮後白將欲俎豆之議。公與白進士振南,金處士應鼎。與夫二三同志者。奔走經始焉。凡論議之際。公皆謙讓未遑也。至於文字。皆出於公之手。其樂道尙賢之誠。有若嗜慾然矣。壬子正月二十四日。考終于寸草軒。葬于先隴之傍。後贈承政院左承旨。配利川徐氏。繼配原州李氏。皆貞夫人。葬同原。有三子。長冬曦參奉。次冬暘主簿。次冬昕參奉。孫曾以下。多不能盡錄。公天性外柔內強。不爲巧言令色一種瞹眛之態。其事親事君。欲以忠信不欺爲主。不諂於勢官。不驕於寒士。自知也明而確。處衆也和而嚴。平生所恨。祿不逮親。且以無他昆季。作爲終身之憾。至於環堵蕭然。簞瓢屢空。心有所不屑也。惟以遇昌期不大施爲。晩暮悒悒焉。雖然起竆裔而翺翔館閣。自末宦而密勿禁闥。上以爲聖主之所嘉賞。下以爲諸贒之所推詡。因以至于中國大人之所慕望而稱引焉。此亦衆人之所難能也。足以破後來位不滿德之疑也夫。公少師愼監司喜男。深究義理之原。洛閩請書。無不精硏。晩得啓蒙易書。讀而好之。欲竆其蘊盡其變。而歎無明師友以啓導之者。築亭于家之北溪上。命名曰溪陰。種竹養花。以爲休息之所。時有質業請益者。則輒敎之奬之。但以黃谷多互鄕之徒。如坐塗炭。獨坐生荊而已。每曰吾以古人所云千百人中只知有我者。把成大樣子。又以推分任運。無求無悶。用以爲一段節度云。有私藁一卷。就其中槩而論之。則所謂寸草軒賦及龍灣述懷等作。備論三春報輝之情。而要殫孝於事親。追記五蛇從龍之蹟。而擬竭忠於報君。所謂范蠡贊與樂毅贊等篇。盖取其養兵棲山而卒致沼吳之功。亦慕其得贒共國。而終成下齊之烈。所謂留侯張良,諸葛孔明等詩。竊自比跡於儒者氣像。三代人物之輩也。所謂鄧司徒,寇穎川,郭子儀,李光弼等詩。豈非寓意於中興殊勳再造偉績之間耶。所謂東風賦。先論漢廷尉之失勢。而至歎貴賤之見情。若夫三月雪詩。遠引宋羣小之稱瑞。而因勉宰輔之調元。所謂謝安矯情論。斥小草之出山。而譏其屐折賭墅之非正。若夫擬北山移文。嗤鳴騶之入谷。而嘲其林慙㵎愧之後黷。所謂金節度書。觀其志則高直不讓於汲黯之亢禮。若夫徐友人論。讀其文則柔忍殆類於相如之引嫌。所謂聽潮軒賦。盛說縣基高占之勝。而要以爲方輿之誌。若夫上體察書。細陳兵營移設之弊。而冀以爲邑子之利。且其壯士一去杳不還而波寒者。所謂易水賦也。悲歌千秋。寓曠感之歎。若其飛將虛老。惜未逢而數奇者。所謂李廣歎也。窃比吾身起同調之恨。且其居靜占閑而取冷煖之手談者。所謂碁局賦也。卽此而可想其雅趣也。若其厭華惡姸而薄妖冶之色態者。所謂梨花詩也。由玆而足驗其高致也。嗚呼。聖人曰誦其詩讀其書而不知其人可乎。今於公。亦宜云然。是爲狀。

聞慶後人崔進士時弼謹狀

 

●故行礪山郡守贈左承旨溪陰趙公行狀[李毅敬]

溪陰集卷之六

故行礪山郡守贈左承旨溪陰趙公行狀[李毅敬]

公諱彭年字景老。其先漢陽人也。六代祖將仕郞典涓司參奉孝生。始南徙于羅州。歷子子山。至諱伯雲。又移家于康津縣北之黃谷里。寔公之高祖也。曾祖諱永發忠武衛副司直。祖諱安植從仕郞禮賓寺參奉。考諱世傑贈通政大夫工曹參議。妣淑夫人金海金氏。學生殷赫之女。公以嘉靖己酉六月十四日。生于黃谷里第。幼極聰悟。每課雖累百行。讀纔一遍。便卽成誦。新曆一覽與人。終不錯一字。偶閱年分書員文案。而後因誤見燒。請誦傳無詿誤。誠異才也。才學日就。文章夙成。其師愼監司喜男亟稱譽不容口。天賦至孝。稚齡亦能行定省之節。志色忠養之方。無不殫誠而盡力。嘗有山猪野雞入孝廚。見者莫不異之。親嘗疾篤。醫者反走。公急斫指以血進。因得復甦。至於游學遠離。雖非所欲。而重違親旨。亦復勉從也。歲壬申。鼓篋泮宮。作木覓山賦。魁多士。至徹睿覽。又講四書于禮部。通明經義。名聞藉甚。人爭稱艶焉。癸酉春中生員高等。丙子歲。登明經丙科第三人。丁丑冬。除會寧府敎授。以遠違兩親。辭不赴。四館例不爲躐次進薦。以故家食凡四歲。其於事親之節。爲學之方。得益盡誠而專意焉。壬午春。始補校書副正字兼奉常參奉。夏呈辭歸覲。冬陞正字。癸未四月。陞著作。以課試不作。遞付司猛。六月陞博士。其在太常。祀事孔明。在芸閣。讎校惟精。是歲十月。奔赴外憂。翌年正月。荐遭內艱。合窆于所居東數里地名感化之山。遂居廬於其下。晨夕上塚號霣。雖風雨未嘗一日廢也。至於饋食蠲饎之間。亦致其誠愨。自鼎俎至床筵。靡不手適而躬親焉。所食只兩次疏糲而已。遇諱辰。齋沐不接賓客。必思其平日所爲。庶幾僾愾之相感。逮晨將事。號哭殆若袒括之初。人莫不感歎稱道焉。丙戌三月由吉。六月受成均典籍兼南學敎授。九月攝敬差官。監穡事于金浦。爲學田也。俄授司憲監察。十一月除全義縣監。地𥕂民殘。邑又累經匪人。衆弊蝟集。下車銳意爬櫛。政以興學校敦風化爲本。民多觀感而興起焉。自奉極簡。盤供只數器。衣袴仍穿家製者。經年不以新造。出入不張盖。所騎劣容代步。騶傔亦僅數人而已。丁亥春。上疏獲減漕水軍絶戶三十餘額。闕番價布幾三百疋。實惠灌洽。閤境謳謠。第其裁束豪右太過。巨室滋不悅。因造謗于朝。戊子夏。竟被臺評罷歸。庚寅冬。甄敍授承文校檢。壬辰三月。差贈祭官。行祀于長興治之東。以兵使卞國幹之卒也。竣事纔還。値倭寇之警。卽上疏請上親御敦化門。下哀痛罪己言。以慰軍民。仍與諸臣參議防禦之策。又云都城雖云闊大難守。宗廟社稷所在。奈何委而去之。固宜築斯鑿斯。與羣下效死。如孟子言則猶可爲也。又請出內需司布帛。以賜南征將士。旣奏不省。四月二十九日。以大祝兼典祀官。祇詣靖陵。聞是夜大駕避賊鋒。已蒼黃西狩。僕夫執鞚泣請公自此直下湖南庄所以避之。公叱之曰君父蒙塵。爲臣子者。不思奔問。忍作草間苟活。爲全軀保妻子計乎。吾有死而已。汝勿復爲言。遂與成均典籍徐希信。自陵所還渡江。取道于箭串。轉向楊州大灘,澄波渡等處。逶迤趲進。時京城已失守。宮闕皆灰燼。且國兵新刳于臨津。賊勢益熾。道路梗塞。遂夜發長湍。蠒足疾行。備嘗艱險。間關至松都。則乘輿已發矣。五月旣望。始乃追及於平壤。沿路累被賊兵所抄截。幾死者累。其危偪困迫。殆不可狀言。行在諸臣僚咸服公之仗義。喜公之脫危。無不嘖嘖稱歎也。白沙李公恒福筵啓曰趙某忠肝節槩。合施褒奬。上卽召入而慰諭。命授禮曹正郞。上之出平壤。在六月上旬。公適臀生毒腫。且値馬瘏。不得扈從。而賊入浿城。前路復阻。遂迤入渭原,碧潼,昌城之境。七月始達于義州行在所。復授承文校檢。時八路盡陷賊藪。乘輿寄在一隅。擧國所朢。惟是皇朝請兵一事。而奏請文字。槐院專管。大提學月汀尹公根壽作奏文一通以示公。公曰誠盡美。但某句用事似不襯。某句下語恐有忌。尹公大悟曰君雖有詞翰名。不料其如許矣。如公合置湖堂選。他日吾可以剡錄。俄遷刑曹正郞。時寵姬之弟金公諒恃恩驕恣。以紬價不低。杖殺商人。臺啓請治公諒。諉諸其收。欲令代囚。公爲該色。憤請於判書西川鄭公崑壽。直以公諒置法償命。方可以立法制夬人心。而亦足展轉爲重恢之階。鄭公吐舌曰君不畏死。可謂強項令也。公時又帶薛天使都監郞官之任。主搬運芻糧事。以其嫺辭令負幹局也。戶判坡谷李公誠中嘗欲遷爲本曹郞曰文士例踈於事務。而此人何其才幹兼備也。癸巳正月。天兵勦走箕城賊。時東宮奉廟社主在寧邊府。上命簡大祝官走告賊破之由。冢宰梧里李公元翼以公名應。上以得人爲敎。大駕還次定州永柔也。公仍以刑官從。又疏陳三事。一備邊司論功之不平也。二都元帥金命元之當遞也。三平安節度使李潤德之當戮也。諸宰乃於筵中大加非斥曰。語多狂妄不可用也。惟領相梧陰尹公斗壽以爲今日諸臣。留在一隅。惟以保全身命。賭取官爵爲得計。未嘗以直截之辭。一觸時諱。而此人獨以滿朝之所不敢言者。登諸章奏。甘自陷於逬逐蹭蹬之科。可謂鳳鳴朝陽矣。大司憲一松沈公喜壽之啓則曰臣爲都憲。反有愧於刑郞。彼誠有大力量。而臣則爲妾婦之道也云。上數幸肅川,平壤。禮接唐將。公每攝通禮官。動止進退。極有儀度。往復應酬。俱合節次。上敎曰予以具宬爲善於此任矣。趙彭年又不减矣。時華使絡屬。迎接禮繁。前此爲是官者。連遭非理於上國人。雖盛有時望者。亦或至被捽曳於庭。公則應對周旋。動合機宜。邢軍門嘗謂西崖柳公成龍曰東國宜不競也。如趙某者。尙滯下僚。其可謂能用人乎。大同館中。未曾見此輩矣。李提督之駐札京城也。公呈國咨于軍門。請尾擊奔倭。劉員外之留鎭定州也。公奉命往來問候。進紫石大硯。嘗以繡衣就監李統制舜臣軍於南海。亦以上令往諭韓體察應寅軍於臨津。皆出特簡。而俱能宣布主上德意。一軍無不感奮而思效焉。其在南海。美其忠義凜烈。而贈詩曰從今要續浯溪頌。莫笑書生迂且狂。其在臨津。許其軍律整齊。而有詩曰踈慵若使參蓮幕。肯讓燕然作漢銘。公雖沈屈下僚。値時孔艱。思欲以忠義自勵。以樹奇勳報主恩。而世皆謂文士不慣武猷。其見期許者。亦不過以古人所云濡染大筆者處之而已。然其所抱負之不草草。於此亦足見其一段也。嘗在龍灣。衣袍弊盡。上憐其寒凜。命賜疋帛。公力辭不受。仍獻詩。有曰一身寒凍猶微事。願作南征將士衣。上敎松江鄭公澈曰卿常以淸白忠義。自矢于心。今趙某亦足亞於卿也。公之忘身憂國。一腔丹血。早已見知於君父者。盖亦如此。公在江西。以疾遞職。因思南歸。求爲錦城提督官。甲午復棄而還家。戊戌冬。除礪山郡守。力疾上任。政尙勞來。流民頗集焉。公曰吾宿昔之志。聊可試於民社之地。而大創之餘。閭里凋弊。有若大病纔愈。元氣澌綴者然。固莫如煦濡摩附之爲得。然至於巨猾大奸。亦不可以不搏逐。痛繩土豪數三家。竟被囑臺官而罷之。公歸家。環堵蕭然。簞豆時或不繼。而處之而安焉。不少以爲意。惟取閩洛諸書而讀之。硏幾極深。尤喜易啓蒙。遂得以竆其蘊而盡其變。有質業請益者。各因其材而導迪之。俾底於成就者多。嘗築亭北溪之上。以爲藏修之所。種花栽竹。兼寓晩暮之賞。而命名曰溪陰。一方之章甫後生。稱爲溪陰先生。盖以此也。癸卯春。除光山提督官。甲辰錄扈聖原從功一等。以負羈絏于關西也。戊申二月。宣廟禮陟。公哀痛至深。廢內寢不御酒肉。居憂之節。一依親亡時。以畢方喪三年之制。自玆以後。當光海政亂。雖有除命而一不起就。後來人始服公見識之明節操之確焉。公且嘗與白松湖振南,金處士應鼎。倡建靑蓮李公後白祠宇。其往復通諭文字。皆出公手。士論翕然從之。事竟底成。其爲一時士類之所推重。此亦可見也。歲壬子正月二十四日。考終于寸草軒。卜葬于感化山先隴之傍子坐之原。後仁廟臨御。追贈公承政院左承旨。配利川徐氏。繼配原州李氏。皆貞夫人。葬同原。有三子。長冬曦參奉。次冬暘主簿。次冬昕參奉。孫曾以下多不能盡錄。盖公生稟異質。聰穎絶人。文詞贍逸。下筆立就。而平生用力。尤在聖賢之書。忠孝至誠。原於天賦。其事親也。常致力於愛日養志先意承顔之間。而左右無方。不專以口體之奉爲能焉。其事君也。尤效誠於直節忘身淸忠謇諤之地。而亦不以職次之微有間焉。仕官則不以貴勢而諂屈。不以沈滯而慼嗟者。是公之志操也。𦲷民則雖以風化敎導爲本。而裁束豪右。亦不以巨室而少饒者。是公之政績也。其在關西行在所也。當國事板蕩之辰。奉使旣數稱旨。隨事無不恢遊。上則爲聖主之嘉賞。下復爲同朝諸鉅公之所推許。因至於天朝大人。極加華褒。至以尙滯下僚爲慨。則於此亦可見公才諝幹局。大有所抱負者。而後之位不稱德。雖爲可慨。然亦何足以此爲公之輕重耶。若就公一生行誼。撮而論之。文章極贍博。而是公餘事也。學術儘高明。而公不自居焉。才局雖兼備。而一不得大用焉。山猪野雞入孝廚。人謂之誠感。而公則以爲偶然。親癠而斫進指血。迓續垂絶之命。親歿而泣血廬墓。以盡哀慕之誠者。在他人亦罕聞。而在公則爲疏節也。最是壬辰黑齒之凶鋒猝逼。去邠之行蒼黃。當時朝士之名位稍顯。而平居頗以節義自任者。亦或以事出倉卒。徊徨不知所爲。亦不能一一執羈靮以從也。惟公以一箇微官。旣與大駕隔絶。且賊勢鴟張。道路阻塞。而公忠義奮發。旣不愛惜軀命。又不顧戀妻子。叱斥家奴南下之懇。徒行蠒足。涉危險穿荊棘。萬死一生。間關轉進。如水之萬折必東。竟得奔問于播越之間焉。則如公忘身愛君之忠。誠可謂貫日月而質鬼神。惟此一事。眞可以垂光于竹帛。輝映乎千古。起立乎後人也。至若方喪三年。致哀無間者。亦人所難及。而昏朝除命。一不起膺者。尤可想公節槩之卓然也。公有遺稿一卷。詩賦雜著幷五百餘篇。率皆寓然而發。非若文人謾浪吟咏者。若寸草軒賦及龍灣述懷等賦。備論三春報輝之誠。而要殫孝於愛親。追記五蛇從難之蹟。而擬竭忠於報君者也。若范蠡,樂毅等贊。盖取其養兵棲山。卒致沼吳之功。慕其得賢共國。終成下齊之烈者也。若張子房,諸葛孔明,鄧司徒,寇穎川,郭汾陽,李司徒等詩。或窃自比於儒者三代人物之流。或寓深感於中興殊勳。再造偉績之間者也。且夫壯士一去杳不還而波寒者。易水賦也。飛將虛老。惜未逢而數奇者。李廣歎也。此亦悲歌千秋。寓深歎於曠世。略比吾身。起遐想於同調者也。以公之孝之忠。其所表見於文字間者。固當如此。至若兼抱濟世才具。而竟不得一展其所蘊。裨替匡恢大業。少答聖上知遇之恩。則其所忠憤感慨援古而自傷者。擊節吟諷。亦足令人有想像而慨歎者矣。趙觀運,奎運昆弟。卽公之玄孫而文行士也。一日袖故進士崔時弼所記公行錄一卷及他遺事略干條。來示毅敬。因起身言曰吾先祖行誼卓絶。而行狀墓文之屬。尙未得大手之發揮。窃恐從此日就湮滅而無傳。以重吾殘孫不肖之罪也。執事倘賜就加繤述。以惠我來裔則幸甚。余惟公吾同郡先輩名流也。因父老所稱。稔聞其忠孝節義之槩。且以趙君兄弟從遊之舊誼。有不可固辭者。謹就諸識錄。略加節次。爲一編文字而歸之。以俟當世立言君子之採擇。然因此窃有所慨然者。公遺集當刊之論。盛行士林間。而第緣力綿。早晩未可卜。祠宇合建之意。亦有一方章甫之公議。而亦以朝有禁令。難於擅行。則顧此十數行寂寥文字。亦安能闡發其德行風烈之萬一。俾得垂徽光於後世無竆也。誠欲公忠義節孝。表章於世。永作後人之矜式。則其道何由。此余所以撫卷而增歎者也。

原州後人李毅敬謹狀

贈承旨溪陰趙公墓表[洪良浩]

贈承旨溪陰趙公墓表[洪良浩]

湖南趙奎運。文行士也。以其高祖溪陰公有忠孝大節。持多士狀辭。請於朝。屢上言不報。末乃汪然出涕曰吾先祖之名行。而不能表顯於世。吾父吾兄嘗有志而未就。至於不肖之身。遊京師數十年。終不克有成。是吾罪也。願得當世立言之家。有以不朽吾祖。則庶可以歸拜先墓矣。遂賚桐岡李公毅敬所爲狀。來屬於余。余與趙君有同門之誼。感其誠而不敢辭。謹按公諱彭年字景老。其先漢陽人。六世祖參奉孝生。始南徙于羅州。數世又徙康津。祖安植參奉。考世傑贈參議。妣金海金氏殷赫之女。公以嘉靖己酉生。聰慧絶倫。讀書一過輒背文。嘗觀里胥檢田文案。後偶燒其卷。公卽誦傳不錯。人皆敬異。稍長學於愼監司喜男。文藝贍蔚。弱冠魁課試。癸酉中生員。丙子登文科。差會寧府敎授。以遠違親辭不赴。補校書正字。陞著作博士。間兼奉常參奉。癸未奔父喪。甲申又遭母憂。公素有至行。侍病晝夜不離。忽有野雞自入廚以供親。方革割指灌血。及荐喪。廬於墓側。晨夕上哭。雖甚風雨不廢。丙戌服畢。授成均典籍南學敎授。遷司憲府監察。冬除全義縣監。邑小歲荒。損己裕民。庚寅敍復承文校檢。壬辰倭警急。公上疏言都城是廟社所在。宜繕守禦之備。效死勿去。且請出內帑布帛。賜南征將士。四月以大祝詣靖陵。夜聞大駕西。僕執鞚泣請歸湖南以避。公叱曰君父播越于外。乃不奔問。忍草問苟活。保妻子乎。遂與典籍徐希信。還渡江。向楊州大灘。時賊鋒已逼京城。道路梗。晨夜間關。追及於平壤。李公恒福請奬之。上召見特授禮曹正郞。已而車駕向義州。公病甚。追躡。復授校檢。時將乞援於皇明。大提學尹公根壽製奏文以示公。公摘論數句。尹公大悟曰君雖有詞翰名。不料其如此。眞湖堂才也。尋遷刑曹正郞。時寵姬之弟金公諒恃恩驕縱。杖殺商人。臺官執奏。公諒諉其奴。欲代囚。公憤之。抗言於判書鄭崑壽曰。方今國步板蕩。命令不行。亟置公諒於法。然後人心可服而亦可爲恢復之機矣。鄭公吐舌曰君不畏死耶。旋差都監郞。運芻粮於薛天使。事皆辦。戶曹判書李誠中稱之曰文士多踈於事務。夫人幹局何如是也。癸巳正月。天兵破走平壤賊。東宮奉廟社主住寧邊。上命選大祝官馳告捷。冢宰李公元翼擧公以遣。大駕還次永柔。公仍以刑官從。疏陳三事。曰備邊司論功不平也。都元帥金命元當遞也。平安兵使李德潤當戮也。時議皆目以狂妄。領相尹公斗壽歎曰今諸臣聚寄一隅。厭厭不能出氣。惟志全軀命取官爵而已。此人獨能言人所不敢言。可謂鳳鳴朝陽矣。大司憲沈喜壽言于上曰臣爲風憲之長。反有愧於刑郞矣。上數幸肅川平壤。禮接天將。公每攝通禮官。進退有儀。酬答無滯。上喜曰予嘗謂具宬善於此任。今彭年無遜矣。當此時。華使絡屬。迎接禮繁。上國人意少不愜。輕加折辱。雖有位朢者。或至捽曳於庭。公應對周旋。動合機宜。邢軍門玠謂柳公成龍曰東國宜不競也。如趙某者尙滯下僚乎。李提督之駐師京城也。往呈國咨。請尾擊奔倭。劉員外留鎭定州也。承命往候。嘗監統制使李舜臣軍於南海。往諭體察使韓應寅軍於臨津。皆出特簡而能宣布德意。一軍無不感奮。公雖屈於郞曹乎。遭時艱危。慷慨自誓。常思立奇功報國恩。而時人視以文士不嫺武略。遇知明主。而終未能大施。識者恨之。亂少定。以病解官。因思南歸。求爲錦城提督官。甲午還鄕。戊戌起爲礪山郡守。公到官曰新經大創。雖主拊摩蘇息。兵難之後。民不知法。亦宜董之以威。遂痛繩土豪數三族。竟以劾去。自是閉戶不出。取讀洛閩諸書。尤喜易啓蒙。竆其蘊奧。築室於北溪之上。種花栽竹以自老。學者多從之請業。稱溪陰先生。甲辰錄扈聖原從功一等。戊申宣廟上賓。公不御酒肉。廢內寢盡三年。及光海嗣位。有除不一起。後人服其高識。壬子正月二十四日終。仁廟登極。贈承政院左承旨。配利川徐氏。繼配原州李氏。皆貞夫人。葬感化山枕子之岡。有三子。長冬曦參奉。次冬暘主簿。次冬昕參奉。公起自遐遠。力學成名。文辭節行。足以華國。誠孝至於感物。固可謂豪傑之士。而至若叱馭勤王。負羈絏犯干戈。不顧萬死之危。奔走兵間。忠義奮發。尙令人激感。然而生不得展布。沒無所表揚。惜哉。其在龍灣。衣袍盡弊。上念其寒。賜之疋帛。公辭不受。獻詩曰一身寒凍猶微事。願作南征將士衣。上謂相臣鄭徹曰卿嘗以淸忠自許。某也殆亞於卿矣。有遺稿幾卷。余嘗讀寸草軒賦。知公之孝。見龍灣述懷賦。知公之忠。嗚乎。是可以不朽公矣。

正憲大夫原任禮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五衛都揔府都揔管洪良浩撰。

●扈聖功臣都監呈文 [徐希信]

扈聖功臣都監呈文

典籍徐希信。爲公伸狀。 [徐希信]

 

趙彭年壬辰四月二十九日。以承文院校理。差靖陵五月朔典祀官。敬受祭具。往于陵所。是夜大駕西遷。翌日亭午。始得聞之。還越漢江。艱難追隨。五月望後。得達平壤行在所。六月初。拜禮曹正郞。天朝二丁夜之來也。接待于大同舘。厥後扈駕偕出平壤。而其入義州則稍後。八月中。改除承文校理。屢勘事大文書。十月轉刑曹正郞。仍參都監郞僚。接薛天使。掌搬運遼陽蒭艸。秣唐人之馬。其間累參外任內職。癸巳正月。天兵攻破箕都之賊。于時廟社主在寧邊府。往行告祀。作大祝官。由定州而永柔。仍爲秋官郞。受君命問安于劉員外。贐以紫石大硯。帳殿頻臨於肅川平壤。禮接諸唐將也。每攝通禮之任。李提督之駐兵京城也。賚咨文請尾擊倭人。及其隨輦於江西也。以病遞職。乃付羅州提督官不去云云。

●扈聖功臣都監呈文[再呈] [徐希信]

扈聖功臣都監呈文[再呈]

[徐希信]

 

趙彭年扈從首末。已爲呈狀于都監矣。窃聞都監議以爲此狀。皆有公文可考。庶參於原從一等。但七月晦前事無證據處。須待正勳公論云云。彭年艱苦扈從之狀。如左相 沈,漢城判尹申 磼,江原監司朴 東亮 三宰相最知之詳焉。伏惟都監稟定施行。且以事理推之。彭年六月旣爲正郞。見賊揚旗放銃於大同之上。扈駕而出至寧邊。聞賊兵入平壤城。上下大小蒼黃奔忙之際。彭年筋力澌盡。顚仆粮絶。差後入義州。而不逾於七月之晦。八月乃遷於校理。則當從五六月扈從之列。錄其勤勞可也。今欲捨平壤直以義州爲據。則不幾於忘前而記後者乎。其爲冤枉甚矣。雖曰不載於料記。聞其文書元有闕漏。後多散失。分明受料人員。亦不懸錄者頗多云云。此乃盡信書則不如無書之類也。抑有一說焉。彭年湖南康津之人。而靖陵向南直路也。其以南方無事。而妻子在家。若思鄕之念重。而向君之誠輕。則安有自靖陵還渡漢水之理乎。旣已足追及。列於應宿之官。則雖至於刲服。亦所甘心。又安有爲甚事中路故落之理乎。其跡其情。大略如此。更乞都監細考彭年前後事狀。參以公卿論議。倘蒙一等之錄。不待懸書之號。允合於賞典。

●扈聖原從功臣錄券傳旨

扈聖原從功臣錄券傳旨

前郡守趙彭年

萬曆三十三年四月初五日。行都承旨臣申欽。敬奉傳旨。人臣效忠而戮力。本無大小之殊。王者賞功而酬勞。寧有貴賤之別。葢率百王之舊。非循一人之私。顧眇末之寡躬。嗣艱大之洪業。綢繆迨未雨。念詎弛於侮予。憂懼若隕淵。戒恒存於臨汝。何圖賊虜之猖獗。未免神器之流離。幸賴皇威之遠揚。尙克寶命之無墜。斯不忘于修扞。因以紀夫旂常。惟玆卿士大夫。越爾吏胥下賤。或陪扈而奔走。或鞅掌而馳驅。凡係前後協贊之徒。悉皆載錄原從之列。爰擧盛典。庸示寵章。

 

湖南節義錄

胄峯書院祝文

倡義錄

溪陰集後序

溪陰集後序[趙冕衡]

[溪陰集刊記]

溪陰集有司錄

有司錄

 

강진 옴천면 영산리 주봉서원에 시비석이 3개가 세워저 있은데,

1)선조임금에 올린 시

2)한석봉선생에게 보낸 시

3)암행어사행시 관련 내용 시로

알고만 있습니다!!!

1624년 주봉산 아래에 위치한 기좌리 좌척마을 조평년의 유허지에 건립되었다. 1868(고종 5)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

계음(溪陰) 조팽년(趙彭年)1549(명종 4)~1612(광해군 4)

1)戲贈善書韓景洪(희증선서한경홍) 三首

글씨 잘쓰는 한경홍(석봉)에게 장남삼아 시는 써 주다. 한호(韓濩 1543~1604)

君詩高似昌黎伯(군시고사창려백)

그대의 시 고상함 한퇴지 같은데,

我筆荒蕪愧子昂(아필황무괴자앙)

내글씨 거칢 조맹부 부끄럽다!

昔在周時同相晉(석재주시동상진)

옛날 주나라때 진나라 정승인데,

如今同志又同房(여금동지우동방)

현재는 뜻같고 함께 합격하네!

계음(溪陰) 조팽년(趙彭年)1549(명종 4)~1612(광해군 4)

黎伯能詩書不妙子昂能筆未聞詩君今才藝兼韓趙料得芳名萬古垂

右軍神妙今君得擧世爭看玉索明由來筆陣無人敵請掃箕都十萬兵

2)上李統制 舜臣(上李統制 舜臣)

이통제에게 올리다(이순신:1545~1598)

喪亂孤殘兩可傷상란고잔량가상

친상과 국란 두일 슬프나,

對公便覺意差強대공편각의차강

만나니 문득 든든함 알았다!

傍船彩鷁隨風舞방선채익수풍무

뱃머리 깃발 바람에 춤추고,

橫海長鯨見劒藏횡해장경견검장

바다의 왜적 칼보고 숨는다!

塞上水軍飛俊鶻새상수군비준골

변경의 수군 매가 날 듯,

腰間羽箭射天狼요간우전사천랑

허리춤 화살 빛나별 쏘겠다!

從今要續浯溪頌종금요속오계송

이제는 요컨대 나라를 구함이니,

莫笑書生迂且狂막소서생우차광

몰라서 졸렬한 미친이라 말게!

계음(溪陰) 조팽년(趙彭年)1549(명종 4)~1612(광해군 4)

3)辭 賜紬有感(사 사주유감)

선조께서 비단 옷감을 주시이 감동받으면서 사양하다!(선조 1552~1608, 재위1567~1608)

微臣當此天傾日未有絲毫可紀功

聖主忽念寒透骨輕紈一匹出行宮

臣拜受之思結草신배수지사결초

절하고 받으면서 은혜 생각에,

物非爲美美人貽물비위미미인이

사물의 예쁨은 남에게 주는것!

一身寒凍猶微事일신한동유미사

한몸의 추위는 하찮은 일이니,

願作南征將士衣원작남정장사의

군인 옷 만들어 따습게 하소서!

 

●溪陰集卷之六 / 胄峯書院祝文

●溪陰趙先生春秋享祀時祝文

勤家勤國。盡孝盡忠。文學並著。永世垂功。祔享。

德林趙先生春秋享祀時祝文

誠著曾傳。學符羲經。淵源有正。標人準程。謹具牲幣。式陳明薦。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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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陰集卷之三 / / 寸草軒賦

昔人之慕父母也曰寸草難報三春暉此平日遊子之吟心之悲尙不能自支矧余夙殞乎靈根軒之名盍取於斯覽微莖於郊原遇秋霜而易衰谷風吹兮習習漸欣欣而知時好雨過兮燒痕錦茵生兮水湄厚如織兮露煖更靑兮和烟芳與澤其雜糅不可名兮綿綿將數寸之脆質煦九十之麗日誰知陽春之無私澤亦及於微物伊感荷而欲報信昊天之罔極東君去兮堂堂挹韶光兮難及若有人兮山之中幾年徒抱寸草情當棘心之夭夭凱風南兮長成晨昏手中之線寒暑身上之衣采中原之有菽勤敎誨而似之令讀書而應擧家不患於屢飢竟折桂而揚名庶沾祿而獲養嗟我罪之伊何風不止於樹上歲癸甲而連逝林烏啼兮有血思詩人之不卒詠蓼莪之含恤相於坎火之山葬於先塋之側食專城於湖邑全義礪山 起負米之餘慼官忽罷而歸來遷墓下而卜築開小軒於斷崖對若堂之荒凉寓寸草之微誠望彼楸而涕滂履霜露而悽愴想容顔於墻羹愁觸鹿之詵詵麾樵客之丁丁追因家於王崇繼思亭於甄君豈不得而熟中希永慕於終身嗚呼德如春而至大親何歸兮恨與草而俱深子失依兮孝有不及愧彼南陔命軒之義其遠矣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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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암(冠巖) 홍경모(洪敬謨)1774(영조 50)~1851(철종 2)

冠巖全書冊二 / 茶墨餘言 / 德林趙丈 奎運七十七歲西遊箕城駕未回而卒于旅舍詩以吊之

樗翁門下早摳衣坐了春風覿德歸片語能窺畫前理安排河洛玩玄機

七旬強半在山水神化如今又別區練光亭上三更月遙想尻輪夜夜遊

六出花飛白日陰迢迢丹旐下江南頎然傲骨埋何處山月蒼凉照德林

[-D001] 七十七歲 : 저본에 삭제 표시 있음[-D002] 駕未回而 : 저본에 삭제 표시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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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103, 영조 40310辛酉 4번째기사 1764년 청 건륭(乾隆) 29

3도 유생 조규운 등이 박세채의 문묘 종향의 청을 거듭 아뢰다

3도 유생 조규운(趙奎運) 등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문묘 종향의 청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三道儒生趙奎運等, 復申文純公 朴世采從享文廟之請, 上不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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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7년 계묘(1783) 123(을묘)

07-01-23[01] 성정각(誠正閣)에서 대신, 약방 제조(藥房提調), 예조 당상, 여러 승지를 소견하였다.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우의정 김익(金熤), 약방 제조 이성원(李性源), 예조 판서 정상순(鄭尙淳), 참판 심염조(沈念祖), 참의 유의양(柳義養), 승지 오재순(吳載純)이경양(李敬養)이재학(李在學)조정진(趙鼎鎭)박천행(朴天行)이 입시하였다.

또 강진(康津)의 충신 조팽년(趙彭年)의 일을 읽어 아뢰었다. 내가 이르기를,

본조의 초계에서 어째서 제외되었는가?”

하니, 정상순이 아뢰기를,

조팽년은 호종 공신(扈從功臣)으로 이미 증직되어 중첩해서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이복원이 아뢰기를,

조팽년의 후손 조규운(趙奎運)이 매양 비국(備局)에 혈서(血書)로 정소(呈訴)하여 충과 효로 각각 표창하는 은전을 받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다시 해조로 하여금 상고할 수 있는 문적을 살펴본 뒤 대신에게 나아가 의논하고 나서 결론을 지어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又讀奏康津忠臣趙彭年事予曰何爲見漏於本曹抄啓乎尙淳曰彭年以扈從功臣已爲贈職不可疊施故耳福源曰彭年之後孫奎運每以血書呈訴於備局而欲以忠孝各受褒典云矣予曰更令該曹參閱可考文蹟後就議大臣指一稟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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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10년 병오(1786) 226(경자)

10-02-26[17] 상언(上言) 152건을 각 해사(該司)에 판하(判下)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진(康津)의 유학 조규운(趙奎運)의 상언에, ‘고조인 증 좌승지 조팽년(趙彭年)의 효행에 대해 정포를 시행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계묘년(1783, 정조7) 정월에 조팽년을 정포하는 일에 대해, 대신과 의논해서 품처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그 당시 본조(本曹)의 초기에, 당초 조정이 호성(扈聖)의 공로로 이미 좌승지를 증직하였고 또 그의 효행은 별로 뛰어난 것이 없으니, 어느 모로 보나 그대로 두소서.’ 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정려하는 것은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으니, 그대로 두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又啓言康津幼學趙奎運上言以爲其高祖贈左承旨 彭年孝行請施旌褒矣癸卯正月有趙彭年旌褒事就議大臣稟處之命而其時本曹草記內當初朝家以扈 聖之功旣贈在承旨且其孝行別無卓異以此以彼置之事蒙允矣旌閭一款不可輕議請置之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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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欽欽新書 卷十 / 剪跋蕪詞 二 / 康津縣趙奎運爲子復讐案批評 一獄兩檢

 

 

評曰 咽者食嗓也喉者氣嗓也頷頦在外咽喉在內。《無冤錄仰面圖列書咽喉者或値刺殺之獄欲驗刃入深淺及嗓筒之或連或斷也至如毆打外傷之屍其屍帳目錄不當開列咽喉今此檢帳乃云咽喉食氣嗓等處靑黃色相雜皰胗亂起嗟乎异哉爲檢官者苟無秦越人之銅鏡何以見咽喉之上有靑黃色相雜皰胗亂起乎且咽喉旣有此形色氣嗓又有此形色乎有檢眼突之屍者書之曰兩眼突出兩目又突出未有不呵呵大笑者夫檢狀者人命死生之判也隻字片言不宜放忽而其鹵莽蔑裂如此不亦難乎檢官委之胥吏監司委之裨將蒙然而報之蒙然而題之順且無事習以爲常不亦荒乎

評曰 食氣嗓又有靑紫色血癊乎頦在下頷在上則謂之頦骨可也頸在前項在後則謂之頸間可也。《無冤錄頦在喉骨之上古文自剄之人每稱刎頸則內曰喉而外曰頦內曰嗓而外曰頸可知也混沌文字每云氣嗓有血癊不亦謬乎

總評曰 一獄兩檢比比有之乃謂之前所罕聞起一句已驗生手且凡實因執定之法雖四肢百體都有傷痕必其中選執一處以作致命之傷此法例也雖其傷痕不重若係要害之處則執之雖其部位不重若受猛毒之傷則執之雖其外傷不重若有內損之驗則執之執之之時正要凝神壹慮默運權衡錙銖毫釐較量輕重此案獄之法也今混淪說去曰肋脇臍肚之諸般痕損俱是猛打之致天下有如是檢狀乎且凡手打不足以殺人非以壯士之拳正著弱男之胸未有當下而致斃者馬八之行兇器仗旣無所指告者亦無所拾得者則是手打而已手打之獄宜論手勢手勢之所不便非手之所能打也頰可打也腦可打也脊背可打也䏩膊可打也而臍肚肋脇之際非手之所必及也且據招辭始打腮鬢終又舂撞而舂撞之時手執頭髮則所謂舂撞者足踢而脚踏之也足踢脚踏而死者圇書之曰被打致死天下有如是檢狀乎豈被打二字爲拳毆足踢之總名乎今觀屍帳臍肚間四寸之痕右脇上八寸之痕固爲致命之傷而腎囊浮高尤是要緊之證則趙城得之被踢致死明白無疑而舂撞二字不分手足一言以蔽之曰被打致死其可乎且凡內損之法必五臟受損然後方爲速死腸部之損古所未聞特以臍肚非五臟之所在故改臟爲腸然腸之爲物柔能勝剛非舂撞之所能損也內損腸部抑又何說?○馬八之爲此屍正犯固無疑矣然若以結縛懸掛之時無一言自明爲馬八之斷案則抑又冤矣當奎運結縛之初群拳亂飛衆足交踢雖蘇秦復生固不能一言而死況其懸掛之時氣已塞矣魂已飛矣雖有徹天之冤能一言哉?○金升甲脚戰之說旣無一人之公證則柳召史之招自歸虛妄雖然方其納招之初金升甲三字不免升降出入於正犯之目天下有以擬議於正犯者移之爲看證者乎大凡看證人執定之法必以無疵無瑕至公至平秦不關楚不屬之人用之爲證以決其獄正犯擬議之人何可爲看證乎身陷正犯之科圖免正犯之目者其又有公心公言哉憶在先朝令賤臣審理楊州民咸奉連之獄乃其初檢以正犯擬議者降之爲看證賤臣執而奏之聖上特降明旨焚其案而滅之此可驗也以此獄言之崔再龍李德喆眞是堂堂看證舍此不用必取金升甲而爲證者抑何義哉金升甲眞所謂詞連者也

評曰 約正何罪也雖儕友之間父報子讎如虎失彪人莫敢嬰其鋒者況趙奎運土豪也姜益輝里氓也馬八之縛何以解之且凡干證之名非必有罪者當之苟其目擊親切則雖無罪犯可以爲看證也如其傳聞依俙則雖有罪犯不可爲干證也今也盛論姜益輝之罪而罰之曰干證懸錄有若校生有罪而罰定軍役者然文理其宜然乎若夫傷處之無所指的實因之通稱被打前旣言之矣又何譏焉?【右跋詞之評

評曰 馬八妻子不救馬八之罪豈可如是而止乎君顚不扶此逆臣也兄難不衛此悖弟也況於父子況於夫婦哉當馬八被縛之時其疾痛急迫冀援望救者豈有過於妻與子者哉當此之時顧乃竄身匿影惟恐餘波之或濺袖手熟視不欲絲毫之出力論其勢力雖若以鄒而敵楚揆之倫義何忍如越之視秦傷天理而薄人紀未有甚於此者也每見獄官凡係屍親輒以惻傷之意多從寬假之典此所謂闇於大體也題辭中不擧金升甲三字亦太疎矣。【右題辭之評

此乾隆辛亥四月事也偶見其案紕繆甚多戲爲此評。○此獄初檢狀兩屍各爲一狀大違格例故刪之只取覆檢狀評之

[-D001] : 新朝本에는 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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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촌(樗村) 심육(沈錥)1685(숙종 11)~1753(영조 29)

영조 28 1752 임신 乾隆 17 68 1, 좨주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3, 懿昭世孫挽章을 짓다. ○ 〈成德論을 짓다.

樗村先生遺稿卷之三十六 / 雜著 / 書與趙奎運文甫 壬申三月

文甫勉之哉以君之志苟能思奮用力發強剛毅以鞠躬盡瘁自勵則何古人之不若而第恐路頭之有錯爾只當以晦翁所稱入德之門爲第一義諦必欲卽物而窮其理因其已知者而益窮之凡於十二時中常切照管不容翣時少忽由是而進進不已則畢竟所到之地未知其何如也病伏中神識昏翳不能道其一二而但見文甫有好善之色心甚愛重妄以此意相勉倘不以病悖之說而忽之則幸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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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文甫 壬申九月

所謂立志須如壁立千仞底氣像常懷彼丈夫我丈夫之志一此不懈無容自沮則將來必不作明道希文以下人物而第其年紀晼晩平日自待之重已不及古之人則猝不可以第一義責之祗當隨分猛省自拔於同流合汚之中耻作俗下平常之類自心自省常切照管勿令翣時放過則亦可以免爲淺丈夫之歸矣

知行並進之說不須多言但從目下所接之地一一省察知其爲善則莫論細大而驀直行之知其爲不善則便將一刀兩段凡於日用行住坐卧語默動靜之際不敢少忽雖在沒緊要處亦宜隨地詳察勿使此心少時間斷及其眞積力久之後自將有割然貫通之妙而爲善去惡眞如惡臭好色豈復有自欺欺人之患乎

人之被血氣所勝者極多盖不知以理率氣而然也孟子曰氣之帥也軆之光也志至焉氣次焉持其志無暴其氣此卽養氣之說也章句雖訓曰心之所之謂之志而西銘乃曰天地之帥吾其性此則以志爲氣之帥夫爲氣之帥者非理而何苟於理氣之辨能分曉則凡爲血氣所使者可知已故曰志勝氣者爲君子氣勝志者爲小人苟能會省察則自可以洞見源頭一念初動之幾所謂天君泰然百軆從令云者初不外是矣

一旬內

溫繹二日太極圖說西銘中庸首章四勿箴尊德性求放心心箴

出入一日

課進七日

書諸冊衣上

天理仁義禮智之捴名仁義禮智便是天理之件數其未發也敬爲之主而義已具其已發也必主於義而敬行焉則何間斷之有哉

理之所在卽是中道惟窮之不深則無所準則而有過不及之患

此心瑩然全無私意是則寂然不動之全軆其順理而起順理而滅斯乃所以感而遂通天下之故者云爾

伊川云灑掃應對便是形而上者理無大小故也故君子只在謹獨灑掃應對是事所以灑掃應對是理事卽理理卽事

若事上有毫髮蹉過則理上便有間斷欠闕

窮理者欲知事物之所以然與其所當然者而已知其所以然故志不惑知其所當然故行不惑

未發之前不可尋覔已覺之後不容安排平日莊敬涵養之功至而無人欲之私以亂之則其未發也鏡明水止而其發也無不中節矣此是日用本領功夫至於隨事省察卽物推明亦必以是爲本而於已發之際觀之則其具於未發之前者固可默識

心則知覺之在人而具此理者也

劉康公曰民受天地之中以生所謂命也能者養之以福不能者敗以取禍

盖所謂性卽天地所以生物之理所謂維天之命於穆不已大哉乹元萬物資始者也

樂記曰人生而靜天之性也感於物而動性之欲也物至知知上知字是軆下知字是用然後好惡形焉好惡無節於內知誘於外不能反躬天理滅矣

人生之初未感於物一性之眞湛然而已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人與物受之者謂之性主於一身者謂之心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靈底是心實底是性

仁者人之所以爲人之理也然仁理也人物也以仁之理合於人之身而言之乃所謂道也

人之所以得名以其仁也言仁而不言人則不見理之所寓言人而不言仁則人不過是一塊血肉耳必合而言之方見得道理出來

仁則性而已矣道則父子之親君臣之分見於人之身而尤著者也

情則性之動而有爲才則性之具而能爲者也性無形象聲臭之可形容也故以二者言之誠知二者之本善則性之善必矣

西山曰善者性也而能爲善者才也性以軆言才以用言

便似天子便似將誥勑付與人便似人所受職事便似親臨這職事便似去動作行做許多事已上觀善錄

讀書只且立下一箇簡易可常底程課日日依此積累功夫不要就生疑慮旣要如此復要如彼枉費思慮言語下梢無到頭處昔人所謂多歧亡羊者不可不戒也已上乹坤經

知其病而欲去之則只此欲去之心便是能去之藥出入起居無非事者正以待之則先事而迎忘則涉乎去念助長則近於留情

昔聞之師以爲當於未發已發之幾默識而心契焉然後文義事理觸類可通莫非此理之所出不待區區求之章句訓詁之間也

夫其心儼然肅然常若有所事則雖事物紛至而沓來豈足以亂吾之知思而宜不宜可不可之幾已判然於胸中矣

因其良心發見之微猛省提撕使心不昧則是做工夫底本領本領旣立自然下學而上達

人生而靜雖天之性感物而動亦性之欲若發而中節欲其可欲則豈甞離夫性哉

大抵敬字是徹上徹下之意格物致知乃其間節次進步處耳

敬字須該貫動靜看方得夫方其無事而存主不懈者固敬及其應物而酬酢不亂者亦敬也

樂以治心禮以治躬

心莊則軆舒心肅則容敬

看取道理軆面涵養德性本原

敬則內欲不萌外誘不入

有主則虗虗謂邪不能入無主則實實謂物來奪之整齊嚴肅則中有主而心自存非是別有以操存乎此而後以敬名其理也

持守純固講誦精熟兩事皆以專一悠久爲一二三間斷爲敬

格物窮理有一物便有一理窮得到後遇事觸物皆撞着這道理事君便遇忠事親便遇孝

湛然純一之謂齋肅然警惕之謂戒已上名言雜取

性者人所禀受之實道者事物當然之理

率性之謂道道則散在事物而無緖之可尋若求之於心則其理之在是者皆有定軆而不可易卽所謂性

仁是此心之德纔存得此心卽無不仁如說克己復禮亦只是私欲去後此心常存爾

卽心之至妙處

又是氣之精妙處到得氣又是麄

精又麄形又麄說魂說魄皆說到麄處

是具是非之理知識便是識察得這箇物事好惡德者得於心而不失諸書未及改較行道而有得於心牢固已上讀書錄

孔子溫良恭儉讓

欽明文思安安允恭克讓

濬哲文明溫恭允塞

聲爲律身爲度左準繩右䂓矩

齊聖廣淵

文王徽柔懿恭穆穆亹亹

[주봉서원에 주련이 없었는데, 세로이 걸렸군요!!! 4개의 주련도 번역을 해야겠습니다!!!]

조봉규&편소아의 후예들 - Daum 카페

한양조씨의 시조는 고려때 중서사를 지낸 조지수(?)를 시조로 한다.

이후 조선이 개국하자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주해 세족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지수의 독자 아들 휘는 쌍성총관부(함경남도 이북을 통치하던 기관)총관으로

씰성총관부 지역을 100여년간 통치했다.

휘의 아들 양기는 부원수로 일본정벌에 참여했고 합단의 난을 평정해 원나라 세조로부터

금비단과 옥혁대를 하사받았다.

 

조지수의 4대손인 돈에 이르러 개성에서 한양조씨는 더욱 번창하게 된다.

돈은 홍건족을 대파한 일등공신으로 공부상서 (3품벼슬), 예의판서등 요직에 오르게 되고

후에 용성군이란 시호를 내리게 된다.

돈은 4명의 아들을 두었고 이들이 모두 높은 벼슬에 올라 가문을 빛내게 된다.

첫째아들 인벽은 홍건족을 물리치고 수차례에 걸쳐 왜구를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후배로 정화공주와 결혼해 이성계와 매부가 된 인벽은 후에 양렬공이란 시호를 받게 된다.

이것은 후손들이 한산백자손 양렬공파의 파조에 해당되게 된다.

인경과 인규도 각각 검찬성고파와 검한성공파의 파조가 된다.

막내아들 인옥은 이조판서를 거처 개국1등공신에 오르게 되고

시호를 충정공을 받아 세조 종묘에 배향되며, 충정공파의 파조가 된다.

 

관내에 생활하고 있는 한양조씨의 대부분은 충정공파의 후손이 차지한다.

인옥의 아들은 뢰는 예조판서등을 지녔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삼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효성을 나타내 절효공이라는 시호를 받게된다.

뢰의 셋째아들 효생은 단종의 화를 면하기 위해 전남 나주로 이주했고

손자 백운이 옴천면 황곡마을이 이주하면서 강진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백운의 5세손인 조팽년(13대 선조님)은 임진왜란시 한양조씨에서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다.

생원시에서 수석을 차지한 팽년은 임진왜란때 왕의 피난길을 직접 호위하는등

주요요직에서 근무했다. 팽년은 노년에 여산군수를 끝으로 벼슬을 거사하고

고향 황막리에서 계음정을 짖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쓰게 된다.

팽년은 또 암행어사로 후손들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이 중상모략으로 남해에서 백의종군하고 있을때 임금이 직접 팽년을 불러들였다.

팽년에게 암행어사의 신분으로 이순신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팽년은 전장에서 활약하는 이순신의 상황을 사실대로 왕에게 알렸고

이후 이순신은 다시 복직하게 된다.

 

팽년은 다섯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 동희의 후손들은 옴천면에 집단 세거했고

둘째 동양의 후손들은 옴천면 좌척마을, 영암지역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셋째 동흔은 영암군 학송, 강진 작천등에 후손들이 생활하며

넷째 동요의 후손들은 나주시 세지면에 살고 있다.

다섯째 동후의 후손들은 보성, 작천면, 완도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이후 후손중에는 효성과 학문으로 알려진 규운이 있다.

규운은 어린나리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마져 세상을 떠나자

자식된 도리를 못했다며 6년간의 시묘살이를 하는 효성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 일찍이 동강선생에게 글을 배우면서 학문에도 높은 경지에 올라

고위직의 자녀들을 가르쳤던 태학관 교관으로 임명됐다.

옴천면 영산리 계산마을 입구에는 주봉서원이 위치해 있다.

조팽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12년 옴천면 좌척마을에 사당을 짓고 후손들이 뜻을 기렸다.

하지만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 모습을 감췄으나

유림들의 발의로 지난 65년 다시 터전을 마련하게 됐다.

주봉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15일 지역유림들이 찾아와

조팽년과 조규운의 업적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후손들은 옴천면 동막마을에 마련된 선조들을 모시고 매년 음력 1015일 시제를 모시고 있다. 한양조씨의 후손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선조들의 유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특히 유물의 대부분은 많은 업적은 남겼던 조팽년의 유품이 차지한다.

현재 후손들에게는 조팽년이 이순신장군을 만나기 위해 지녔던 5두 마패.

뱃길을 알기위해 지녔던 반원모양의 나침반. 임금으로 하사받은 교지등

수많은 국보급 유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한양조씨 출신으로는 작천면장을 지냈던 조병옥씨, 강진경찰서에 근무했던 조윤형씨,

신전면 군의원을 지냈던 조권신씨, 강진군청 해양수산과 조정일계장,

친환경농산과 조상언계장등이 있다.

 

옴천면 개산마을앞에 위치한 주봉서원(강진군 옴천면 영산리 381-15번지)

30여년째 책임관리하고 있는 조경철(65)씨를 만났다.

조씨는 조팽년 선조는 지역에서 생활한 한양조씨중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며

후손들이 조팽년 선조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주봉서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조씨는 조상들의 유품이나 업적을 후손들에게 보전하고 알리는 것이 할일이라며

다양한 자료를 정리해 후손들에게 알릴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품에 대해 조씨는 과거에는 조팽년 선조의 낙관이나 혁대등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한국전쟁으로 분실된 유품을 지금은 찾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조씨는 또 현재 후손들에게 남아있는 유품을 원형대로 최대한 보존하고

더 이상 분실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제에 대해 조씨는 옴천면 동막마을 인근에 모셔진 선산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

묘소가 분실된 선조는 제단을 만들어 음력 1015일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종친에 대해 조씨는 젊은 사람들의 시제나 종친모임의 참여율이 차츰 줄어드는 것을 보면

아쉽다후손들이 종친에 대해 관심을 높일수 있도록 종친들과 협의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할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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