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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사평공파 정절사 계유정란 시 남해로 유배, 함평 정절사에 배향!!!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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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공파 정절사 계유정란 시 남해로 유배, 함평 정절사에 배향!!!

한양조씨 충정공파 정절사(靖節祠) 6世祖司評公(諱賡), 6世祖判事公(諱貫)

번지명)전남 함평군 대동면 운교리 970, 971번지

도로명)전남 함평군 대동면 학동로 1088

  掌隷院司評漢陽趙公諱賡遺蹟靖節壇碑  

  崇祿大夫中樞府判事漢陽趙公諱貫追慕碑  

지난 2013년 4월 12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운교리 정절사에서 사평공(휘 賡, 6세, 충정공파)과 판사공(휘 貫, 6세)의 춘계향사 봉행 후 지역 유림과 후손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적 정절단비 제막 고유제가 있었다. 오랜 염원이었던 유적비는 판사공파(회장 誠根, 26세)에서 2,000여만 원의 경비일체를 헌성함으로써 선조님의 유업을 기리는 유적비를 후손들의 마음을 담아 건립하게 되었다.

 

고려말 조선초 명신 사평공 단종에 대한 충절로 계유정란 시 남해로 유배, 동학사 숭모전과 함평 정절사에 배향 사평공(司評公, 휘 賡, 6세, 충정공파) 선조님은 조선조 개국 일등공신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충정공(忠靖公, 휘 仁沃, 5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공께서 평소 절의를 숭상하셨고 세종(世宗)조에 장례원 사평(掌隷院 司評)으로 출사하여 전보승진 봉직하신 것 외에 일생을 유배지에서 사셨는데, 할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얼마나 팍팍하셨을까? 가슴이 아프다. 문종(文宗)이 승하하고 어린 단종(端宗)이 왕위에 오르자 1453(단종1)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정의 고명대신과 반대파들을 참살하고 정권을 전횡하자 장조카인 이조참의 파서공(坡西公, 휘 順生)이 정도가 아님을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간당으로 몰려서 1454(단종2)년 귀양을 갔다가 순절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과 공의 아우인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 판사공(判事公, 휘 貫)이 남해로 유배되었고, 종손(從孫)인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휘 섬(銛)마저 남해로 유배되는 등 일가문에서 아홉 사람이 참화를 입었다. 공께서는 유배지에서 단종이 해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 쪽을 향해 통곡하며 충절을 변함없이 지키면서 초어생활(雄魚生活)을 하다가 순절하여 일생을 마치셨으나 안타깝게도 묘는 실전되었다.

 

1468(세조14)년에 14년의 장구한 유배에서 사면되었으나 아우 판사공으로 하여금 종사와 선영을 돌보도록 하고, 절의를 굽히지 않고 절망과 암흑의 유배지에서 홀로 해양(海洋, 現 남해) 노량강(露梁江, 現 섬진강)가에 머물며 고기잡이와 나무꾼들 속에 섞여 운명할 때까지 흰옷을 입고 정절을 지키셨다. 후세 사람들은 해양정절(海洋靖節)이라고 호칭하였으며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봉안(奉安)되 셨다. 이후 향촌의 유림들이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운교리에 정절사(靖節祠)를 세우고 아우인 판사공과 함께 봉안하여 매년 음력 3월 3일에 유림과 후손들이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아들 휘 서(瑞)는 통정대부 현감이고 손자 휘 원기(元基)는 진사이며 증손에 이르러서야 휘 맹생(孟生)이 이조정랑(吏曹正)을 역임하시고 이조참판에 추증됨으로서 명문거족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이후 가세가 번성하여 전라도 함평현으로 이거하였고, 후손들이 무안현(務安縣) 등으로 가세를 넓혔다. 공의 많은 것이 궁금한데 묘도 실전되고,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서 안타깝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는데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있는 고향으로 왜 돌아오지 않으셨을까? 할머니는 누구일까? 타향에서 세상을 뜰 때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감히 공의 높은 정신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직계 후손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나마 선조님의 유훈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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