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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6세조 安靖公(諱候)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2월 4일 신묘 1번째기사 1422년 명 영락(永樂) 20년]●태상왕의 딸을 봉하여 숙진옹주(淑眞翁主)라 하다.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9. 24.

▣6세조 安靖公(諱候) 조선왕조실록▣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

배위(配位) 정경부인한양조씨지묘(貞敬夫人漢陽趙氏之墓)

(妻父 안정공 조후(趙侯), 조부 조인벽의 3자)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관리 산71번지

父:하성부원군 정흥인(鄭興仁)묘: 부여군 능산리 산 30-1
祖父:찬성사(贊成事) 정을귀(鄭乙貴)묘: 남양주 퇴계원
子:정광조(鄭光祖)

 

"朝鮮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院相

河東府院君文成公鄭隣趾配位貞敬夫人漢陽趙氏之墓"
"조선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원상

하동부원군문성정정인지배위정경부인한양조씨지묘"

 

 

 

 

 

 

 


후배위 : 정경부인 경주이씨(묘소는 괴산에 있다)

 

 

 

 

■朝鮮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院相河東府院君文成公鄭隣趾配位貞敬夫人漢陽趙氏之墓■

■조선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원상하동부원군문성정정인지배위정경부인한양조씨지묘■

 

조부 : 정을귀(鄭乙貴)

부 : 정흥인(鄭興仁, 1363년 - 1436년)

모 : 진씨(陳氏) - 진천의의 딸

누나 : 정씨 - 정분의 처

출처: https://sugisa.tistory.com/entry/정인지(鄭麟趾)-배위-정경부인한양조씨-묘(妻父-안정공-조후(趙侯)%2C-조인벽의-3자)

[晛溪亭(현계정):sugisa:티스토리]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2월 4일 신묘 1번째기사 1422년 명 영락(永樂) 20년]

●태상왕의 딸을 봉하여 숙진 옹주라 하다

태상왕의 딸을 봉하여 숙진 옹주(淑眞翁主)라 하였으니, 곧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간 사람이다. 이씨(李氏)는 신순 궁주(愼順宮主)가 되었으니, 곧 이직(李稷)의 딸이다. 이직으로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을 삼고, 정효전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 일성군(日城君)을 삼고, 이맹균(李孟畇)으로 예조 참판을 삼고, 조후(趙候)로 경창부 윤(慶昌府尹)을 삼고,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심보(沈寶)를 파면하였다. 심보는 일찍이 공신 도감사(功臣都監使)가 되어 관청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일이 발각되었으나, 공신의 아들이므로 다만 그 관직만 파면시켰다

○辛卯/封太上王女爲淑眞翁主, 卽適孝全者也。 李氏爲愼順宮主, 卽之女也。 李稷星山府院君鄭孝日城君李孟畇禮曹參判, 趙候慶昌府尹, 罷判江陵大都護府事沈寶。 嘗爲功臣都監使, 濫用官物, 至是事覺, 以功臣之子, 只罷其職。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2월 13일 병신 1번째기사 1422년 명 영락(永樂) 20년]

●이순몽·정진·오승·정초 등을 제수하다

●이순몽(李順蒙)으로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삼고, 정진(鄭津)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오승(吳陞)을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로, 정초(鄭招)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하연(河演)을 병조 참판으로, 황상(黃象)을 공조 참판으로, 조완(趙琬)을 우군 총제(右軍摠制)로, 조후(趙侯)를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이천(李蕆)을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유장(柳暲)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최관(崔關)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최부(崔府)를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조서로(趙瑞老)를 승정원 지신사(承政院知申事)로, 조종생(趙從生)을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김자(金赭)를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성억(成抑)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신개(申槪)를 황해도 도관찰사로, 이맹균(李孟畇)을 경기도 도관찰사로, 황자후(黃子厚)를 충청도 도관찰사로, 김겸(金謙)을 평안도 도관찰사로, 심보(沈寶)를 충청도 도절제사로, 송희미(宋希美)를 전라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로, 배소(裵素)를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삼았다.

○丙申/以李順蒙爲中軍都摠制, 鄭津漢城府事, 吳陞 開城府留後, 鄭招禮曹參判, 河演兵曹參判, 黃象工曹參判, 趙琬右軍摠制, 趙侯左軍同知摠制, 李蕆右軍同知摠制, 柳暲慶昌府尹, 崔關 漢城府尹, 崔府仁壽府尹, 趙瑞老承政院知申事, 趙從生右副代言, 金赭同副代言, 成抑 全羅道都觀察使, 申槪 黃海道都觀察使, 李孟畇 京畿都觀察使, 黃子厚 忠淸道都觀察使, 金謙 平安道都觀察使, 沈寶 忠淸道都節制使, 宋希美 全羅道水軍都按撫處置使, 裵素司諫院右正言。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 2월 28일 경진 2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전 첨지돈녕부사 조후의 아내에게 부의로 곡식을 내리다

■전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事) 조후(趙候)의 아내에게 쌀·콩 합계 20석을 부의(賻儀)로 내려 주었다.

○賜賻前僉知敦寧府事趙候妻, 米豆共二十石。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10일 무인 5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호조에서 공법에 대한 여러 의논을 갖추어 아뢰다

●호조에서 중외(中外)의 공법(貢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논을 갖추어 아뢰기를,

"서울의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안수산(安壽山)·총제 이천(李蕆)·동지총제(同知摠制) 박규(朴葵)·전 총제 이순몽(李順蒙)·전 동지총제 이희귀(李希貴)·전 도관찰사 이정간(李貞幹)·전 판목사(判牧事) 김사청(金士淸)·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남실(南實)·전 동지총제 최견(崔蠲)과, 3품 이하 현재 재직 중에 있는 2백 59명과, 전함(前銜) 4백 43명 등은 가하다고 하고, 전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전 판목사(判牧事) 황자후(黃子厚) 등은 아뢰기를, ‘신 등이 옛 사람들의 나라 다스리는 법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양민(養民)에 있었고, 양민(養民)의 정사란 백성으로부터 취함에 있어 법도(法度)가 있었으니, 삼대(三代)에서 공(貢)·조(助)·철(撤)의 법을 시행한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토질이 척박한 데다가 산길이 험조(險阻)하기 때문에 조(助)·철(撤)의 법은 시행할 수 없는 형편이고, 이제 사전(私田)에 10분의 1의 세(稅)를 부과한 것은 곧 삼대(三代)의 공법(貢法)을 본뜬 것입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건국하시면서 맨 먼저 백성들의 폐해부터 제거하시고, 농사를 실패한 백성에게는 고을에다 소장(訴狀)을 내게 하시고 다시 고을 아전에게 소장을 낸 전지를 답사해 살펴 세금을 감하게 하시니, 그 법이야 말로 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백성들 중에 혹시 어떤 사정이 있어서 소장을 내는 기간을 놓쳐 버리게 되면 전지가 비록 묵거나 재해를 입었더라도 세금의 징수를 면치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것 역시 가탄할 일입니다. 우리 태종(太宗)께서 그러한 사정을 깊이 이해하시고 주(周)나라 때에 농정을 맡은 관원이 들을 순회하면서 농작의 실태를 관찰하던 법에 의하여, 모든 전지를 순회 심찰하여 손실에 따라 세금을 감면하는 법[隨損給損法]을 제정하여 시행하시니, 백성을 사랑하시고 기르시는 뜻이 또한 지극하셨다 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순회 심찰할 때에 조관(朝官)을 나누어 파견하기도 하고, 감사와 수령에게 위임하기도 하는데, 그 조관과 수령이 다 답사하지 못하고 위관(委官)을 나누어 보내고 있습니다. 이 위관이란 자는 거의가 각 고을의 일수(日守)·서원(書員)의 무리로서, 배운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어, 성상께서 백성을 사랑하여 법을 세우신 본의를 본받지 못하고, 손(損)이나 실(實)의 분별이 모두 그 중정(中正)을 잃기 때문에, 농민들은 여러 날을 두고 그들의 대접에만 바쁠 뿐 실제로는 아무런 혜택도 입지 못하는 실정이니, 이는 다년간의 통환(通患)이었습니다. 이제 호조에서 그 폐단을 알아차리고 공법의 실시를 청하였습니다. 예로부터 토지 제도를 바로잡아 민생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은 정치 중에 가장 어려운 것으로 되어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夏)에서는 농부 1명에 50무(畝)의 농경지를 주어 공법(貢法)을 썼고, 은(殷)에서는 70무를 주어 조법(助法)을 썼으며, 주(周)에서는 1백 무를 주어 철법(徹法)을 썼사온데,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주나라에서는 향수(鄕遂)에게는 공법(貢法)을 쓰고 도비(都鄙)에게는 조법(助法)을 썼는데, 그 이하로 내려오면서 한대(漢代)의 한전(限田)·명전(名田)과 당대(唐代)의 조(租)·용(庸)·조(調)의 법은 비록 삼대(三代)에는 미치지 못하나, 또한 각기 그 시대의 사정에 알맞게 제정한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어리석은 생각으로 청하고 있는 공법은 오늘의 현실로 보아 행함직한 것으로 봅니다. 신이 민간에서의 가부의 의논을 듣자오니, 평야에 사는 백성으로 전에 납세를 중하게 하던 자는 모두 이를 즐겨서 환영하고, 산골에 사는 백성으로 전에 납세를 경하게 하던 자는 모두 이를 꺼려 반대하고 있사온데, 이는 각기 민심의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길이란 마땅히 민심을 따라야 할 것이니, 옛날 하우씨(夏禹氏)의 공법도 토지에 따라 적당히 하였으되, 구주(九州)의 부세가 다른 등급과 서로 어긋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좋다고 말하는 백성들에게는 그 뜻에 따라 공법(貢法)을 행하고, 좋지 않다고 말하는 백성들에게는 그 뜻에 따라 전대로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을 행하소서. 한 고을 한 마을의 백성으로서 좋다는 자가 많은데도 어느 한 사람이 전지를 많이 잡고 번갈아 묵혔다 경작했다 하면서 이를 꺼려해서 반대하는 경우에, 다수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면 전에 전지가 없던 자도 모두 전지를 얻게 되어 전답도 더 넓어질 것이요, 호구(戶口)도 더 늘 것입니다. 또 원래 세포(細布)를 납입하던 전답은 세금이 본래 가벼웠사온데, 이제 10부(負)에 10두(斗)를 납입하는 예에 따라 다시 논의가 된다면 너무 가볍다는 논의가 뒷날에 반드시 생길 것이오니, 유사(有司)가 이를 적당히 참작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 같습니다. 신 등은 또 듣자오니, 두 창고[兩倉]에 군자(軍資)로 바치는 세에는 모두 본색(本色)150) 으로 5가를 제해 주고, 오직 각품의 과전(科田)의 세에는 5가를 경작자에게 납입하게 하기 때문에, 경기(京畿)의 백성들이 그 과중한 부담에 고통을 겪고 있사오니, 이제부터는 과전의 세도 역시 다른 예에 의하도록 하소서.’ 하고,

전 동지총제 박초(朴礎)는 아뢰기를, ‘공법이 비록 좋긴 하오나 전지의 비옥(肥沃)과 척박(瘠薄)을 분별하지 않고 전부 행한다면, 백성들 사이에는 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걱정하는 사람이 자연 있게 될 것입니다. 각도에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를 나누어 보내어 그 전지를 심사하여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이를 분류해서 지적(地籍)을 만든 뒤에, 공법을 시행할 만한 전지에는 공법을 시행하고, 그 나머지의 척박한 산전(山田)으로 공법을 시행하기에 부적당한 전지는, 매년 반드시 경작자의 신고를 상고한 후에 작황을 답사하고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을 시행하여, 두 가지 법을 겸행토록 하소서.’ 하고,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鄭麟趾)는 아뢰기를, ‘먼저 경기(京畿)의 한두 고을에 시험한 다음 각도에 모두 시행토록 하소서.’ 하고,

직제학 유효통(兪孝通)은 아뢰기를, ‘상·중전 외에 하전(下田)을 다시 2등으로 나누어 1결(結)마다 부수(負數)를 더 주거나, 혹은 10두(斗)를 감하거나 하게 하소서.’ 하고,

직전(直殿) 안지(安止)는 아뢰기를, ‘먼저 산골과 평야 각 수십 개의 고을에 그 가부(可否)를 시험하게 하소서.’ 하고,

봉상시 주부 이호문(李好文)은 아뢰기를, ‘2등의 전지를 다시 조사해 정할 것 없이 매 등급마다 또 3등으로 나누어서 9등을 만들고는, 상상전(上上田)의 세는 1결마다 조(租) 16두(斗)를 수납하게 하고, 한 등급에 1두씩을 체감(遞減)하면 하하전(下下田)에 가서는 다만 8두를 거두게 될 것이요, 평안·함길도는 다만 6등으로 만들고 상상전의 세를 1결에 11두를 거두고, 한 등급에 1두씩을 체감하면 하하전에 가서는 6두를 거두게 되어 거의 알맞게 될 것입니다.’ 하고,

집현전 부제학 박서생(朴瑞生)·전농 소윤 조극관(趙克寬)·형조 정랑 정길흥(鄭吉興) 등은 아뢰기를, ‘답험하여 손실에 따라 세액을 감면하는 법[踏驗給損法]은, 수많은 위관(委官)을 다 옳은 사람으로 얻을 수 없어, 혹은 정실에 흘러 중정(中正)을 잃는 예가 십상팔구(十常八九)이온데, 경차관(敬差官)·차사원(差使員) 등도 곳곳을 순시 적발할 도리가 없어 국가에 손실을 가져오고, 백성들은 그 폐해만을 받아 온 그 유래는 너무나 오랫동안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공법은 그 시행에 앞서 먼저 상·중·하 3등으로 전지의 등급을 나누지 않으면, 기름진 땅을 점유한 자는 쌀알이 지천하게 굴러도 적게 거두고, 척박한 땅을 가진 자는 거름을 제대로 주고도 세금마저 부족하건만 반드시 이를 채워 받을 것이니,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어, 그 폐단이 다시 전과 같을 것이오니, 먼저 3등의 등급부터 바로 잡도록 하소서.’ 하고,

도관 정랑(都官正郞) 유지함(柳之涵)·좌랑(佐郞) 윤처공(尹處恭)·권준(權蹲) 등은 아뢰기를 ‘다만 척박한 산전(山田)은 반드시 매년 경작하지 못하고 서로 번갈아 묵히고 하는데, 평야 지대의 전답의 예와 같이 논한다면 실로 큰 폐단이 될 것이오니, 의당 수령에게 먼저 전답주의 신고를 받고 친히 경작 여부를 답사한 연후에 조세(租稅)를 거두도록 하소서.’ 하고,

도관서 영(䆃官署令) 김달성(金達成)·승(丞) 원내인(元乃仁) 등은 아뢰기를, ‘공법은 공사(公私)간에 모두 편리하여 실로 좋은 법입니다. 그러하오나 강원·황해도는 땅들이 자갈이 많고 토품도 다른 도와 같지 않사오니, 평안·함길도의 예에 의하여 차등을 두어 조세를 거둔다면, 백성들에게도 편리하고 국가에서 새로 법을 세우는 본래의 미의(美意)에도 거의 위배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 좌랑 조수량(趙遂良)·좌랑 남간(南簡) 등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전토는 기름지고 척박한 것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달라서, 상전(上田)은 1결에 조세로 10두를 징수하여도 받는 것이 너무 적은 편이나, 하전(下田) 1결에 조세를 역시 10두를 징수한다면 이는 받는 것이 너무 많으므로, 백성들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크게 다르오니, 전토의 등급을 나누어 9등으로 하고 조세도 역시 9등으로 정하여 민생의 편익을 주소서.’ 하고,

여산 부원군(礪山府院君) 송거신(宋居信)·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여천 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판돈녕부사 한장수(韓長壽)·동지 부사 이교(李皎)·조후(趙候)·대사헌 이승직(李繩直)·병조 판서 조계생·참판 이중지(李中至)·도총제 원민생(元閔生)·총제 신장(申檣)·조치(趙菑)·이춘생(李春生)·동지 총제 김을신(金乙辛)·홍이(洪理)·이수(李穗)·유한(柳漢)·인수부 윤(仁壽府尹) 민의생(閔義生)·영돈녕으로 치사(致仕)한 권홍(權弘)·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이귀령(李龜齡)·전 도총제 권희달(權希達)·전 판목사 문계종(文繼宗)·전 총제 노원식(盧原湜)·전 호조 참판 한상덕(韓尙德)·전 동지 총제 권천(權踐)·전 부윤(府尹) 이흥(李興)·이육(李稑)·전 절제사 김소(金沼)·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권손(權遜)·유귀수(兪龜壽) 및 3품 이하 현직자 3백 93명과 전직자 1백 17명은 불가하다고 하고, 의정부 좌의정 황희(黃喜)·우의정 맹사성(孟思誠)·찬성 허조(許稠)·참찬 오승(吳陞)·이맹균(李孟畇) 등은 아뢰기를, ‘경전(經傳)에 이르기를, 「전지를 다스리는 데는 조법(助法)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며, 공법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고 하였사오나, 우리 조선이 개국한 이래 조세(租稅)를 거둘 적에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을 제정(制定)하니, 이는 실로 고금을 참작한 만대라도 시행할 만한 좋은 법인지라 경솔히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전지를 계정(計定)할 때에 모든 창고(倉庫)와 공수(公須)·아록(衙祿)·참역(站驛) 등의 전토를 참작해 헤아려서 숫자를 정한 것이온데, 이제 만약 조세를 감한다면 반드시 그 2배를 더 주어야만 원액(元額)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군자전(軍資田)이 아마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비옥한 전토를 점유하고 있는 자는 거의가 부강(富强)한 사람들이며, 척박한 전토를 점거하고 있는 자는 거의가 모두 빈한한 사람들이온데, 만약 호조(戶曹)에서 신청한 공법에 의해 시행한다면, 이는 부자에게 행(幸)일 뿐, 가난한 자에게는 불행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더욱이 함길·평안도의 전지의 조세는 다른 도의 수량보다 이미 감한 것인데, 이에서 또 감한다면, 만약 군병의 동원이나 큰 흉년이 있을 경우 이를 감당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실시하기 어려울 것 같으오니, 조종조(祖宗朝)에 이루어 놓으신 법에 의하여 전대로 시행하는 것이 편하고 유익하지 않을까 하오며, 그 폐단을 구제 방지하는 조건을 아울러 기록하여 아뢰나이다.

1. 손실 경차관(損實敬差官)은 곧 옛날의 군수 찰방(軍須察訪)으로 그의 임무가 심히 중한 것이온데, 근래에 와서는 용렬하고 경험 없는 자를 임명해 보내어 중정(中正)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곤 하니, 실로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이제부터 대간(臺諫)을 제외하고는 시임(時任)·산직(散職)에 구애 없이 명망(名望) 있는 자를 선택하여 임명해 보내도록 하소서.

1. 경차관을 파견하면 감사(監司)가 자기의 임무가 아니라 해서 혹은 전념해 보지 않고, 경차관을 보내지 않으면 감사는 사무가 번다(煩多)한 탓으로 정밀하게 살펴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제부터는 반드시 경차관을 파견하거든 감사와 함께 이를 상의하여 처리하되, 그 손실 답험(損實踏驗)은 번다한 일이 아니오니 각 고을의 수령은 모든 잡무를 없애고 오로지 답험에 힘을 기울이게 하고, 감사와 경차관은 순행하며 이를 고찰하도록 하소서.

1. 손실 위관(損實委官)은 일찍이 현달한 직질[顯秩]을 경력한 자로서 택하여 임명한다고 《육전(六典)》에 실려 있사온데, 근래에 와서는 다만 시골의 미천(微賤)한 무리들로 임명해 충당하기 때문에 일찍이 현달한 직질을 지낸 사람들이 위관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여러 모로 이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위관을 답험관(踏驗官)이라 개칭하고 반드시 3품 이하의 현달한 직질을 지낸 자나, 국가 고시에 합격한 자로 선택하여 정하되, 경기(京畿)에는 일찍이 현달한 직질을 지낸 자로 시골에 물러와 사는 자가 희소하오니, 이조(吏曹)에서 성중관(成衆官)이나 수전패(受田牌)로서 감당할 만한 자를 선택하여 임명하도록 하소서.’ 하고,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허조(許周)는 아뢰기를, ‘전지의 조세(租稅)는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개국 초에 처음 경계(經界)를 바로잡고 고금의 사정을 참작하여 이것으로 법을 세우고는 오늘까지 내려왔사온데, 다만 분심관(分審官)이 현량하지 못하여 중정을 잃는 폐단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일찍이 드러난 직질을 경력한 자로 택하여 임명한다는 제도가 비록 《육전(六典)》에 실려 있기는 하오나, 각 고을 수령들이 시기를 어기지 않는 데만 힘쓰고, 대체(大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문서와 계산에 능한 자만을 선발하여 모두 서리(胥吏) 출신으로 위관(委官)을 임명하기 때문에, 외방의 품관(品官)으로 명성과 지조 있는 자들이 위관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그 시기에 임박하여 이유를 댄다든가, 혹은 서울로 올라와 회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각 고을 수령들이 할 수 없이 언제나 용렬한 자들에게 이를 위임하여 그러한 폐단을 이루었으므로, 오늘날 세제 개혁의 논의가 있게 된 것이오니, 현질(顯秩)을 지낸 자로 선택 임명하게 하고, 또 엄중한 규제법을 세워 회피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비록 외방에 있으면서 그 임무를 받았을 때라도 관문(官門)에 진퇴(進退) 영송(迎送)하는 예절은 기사년에 있었던 양전관(量田官)의 예에 의하여 하게 하고, 또 군수 찰방(軍須察訪)의 고제(古制)에 의하여 대간(臺諫)과 육조의 관원으로서 명망이 있는 자를 택하여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손실(損實)의 조사가 잘 되고 있는지 못 되고 있는지를 고찰하게 하면 전날과 같은 폐단은 거의 없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나라 전지의 세제가 거의 십일법(十一法)과 비슷해서 전지의 주인이 아주 욕심많고 인색한 자라 할지라도 역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실태를 답험(踏驗)할 때, 또는 세곡을 수납할 때에, 간사한 아전들이 뇌물을 쓰거나 연줄을 타서 출세하려고 마구 침범하기 때문에 공사(公私)의 곡식이 모두 탕진되어, 백성들은 그 해를 지낼 양식이 부족하고, 나라에는 3년간 먹을 식량의 저축마저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폐단을 길이 염려하시어 다시 전지의 세법을 제정하사 영구히 대대로 전하실 법도로 삼으시려고 하시는데 1결의 토지세를 단지 10두나 7두를 거둔다면 그 세액이 어디서 다 나오겠습니까. 신은 아마도 성조(聖祖)께서 제정하신 세제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은 전세(田稅)로써 포화(布貨) 한 가지 일에 대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수전(水田) 50부(負)에 오승포(五升布) 1필(匹)을 납입하게 하고 그 값을 쌀 15두로 결정하고 있사온데, 만약 이번의 세율에 의하면 수전 1백 50부라야 베[布] 1필을 당하고, 한전(旱田)은 이의 배나 되며, 그 밖에 면주(緜紬)·면포(綿布)·저포(苧布)·면자(綿子)·유밀(油蜜) 등의 세금 이외에, 녹전(祿田)·군자전(軍資田)에서 수납되는 수량도 반드시 전보다 줄어들게 되어,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저축이 10중 8, 9는 없어질 것이니, 만일에 어떤 불의의 사변이라도 일어난다면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대비하려 하십니까. 신은 아마도 이익은 한두 가지도 되지 않는데 손해는 이에 열 가지 백 가지나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신이 일찍이 우공(禹貢)의 글을 보니, 그 전지의 토품(土品)이 다르기 때문에 그 부세의 등급에 차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도 사방의 전토가 각기 비옥하고 척박한 차이가 있사온데, 그 비옥하고 척박한 가운데서 감하는 바가 다만 하전(下田)과 사석전(沙石田)에서 혹은 3두, 혹은 5두만 된다면 성인(聖人)의 유의(遺意)에 별로 위배되지 않을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그 해 전조(田租)의 절반을 감해 내려 준 법에 의거하시와, 한전(旱田)·수전(水田)을 막론하고 그 해 농작의 풍흉(豐凶)에 따라, 혹은 반량을 감하여 손실 답험(損實踏驗)의 폐해(弊害)를 개혁하게 하시고, 만일 서리를 맞았거나 우박을 맞아 재해를 입었을 경우에는 감사(監司)가 이를 친히 심찰하여 밀봉하여 보고하게 하시고, 전하께서 이를 재량하사 적당히 감면하게 하소서.’ 하고,

이조 판서 권진(權軫)·정랑 이승손(李承孫)·신기(愼幾)·좌랑 민효환(閔孝懽)·나득강(羅得康)·안질(安質)·종부시 소윤 안완경(安完慶)·판관 이중(李重)·직장(直長) 송복원(宋復元)·도관 주부(䆃官注簿) 최수(崔脩)·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배둔(裵屯)·정(正) 허척(許倜)·부정(副正) 황보규(皇甫規)·정자(正字) 임중(任重) 등은 아뢰기를, ‘전지를 답험(踏驗)할 때 그 증감(增減)을 적중(適中)하게 하지 못하는 폐단과 〈그에 따른〉 분주한 접대의 노고 등 실로 호조에서 아뢴 바와 같은 것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전지에는 비척(肥瘠)의 차이가 있고, 연사에도 풍흉(豐凶)이 바뀌는 수가 있어, 가령 좋은 전답 1결을 경작하는 자가 풍년을 만났다면, 비록 전체가 잘된 것으로 보고 조세를 받더라도 조금도 과할 것이 없지만, 10두만 거두고 만다면 국가의 세입이 줄어들 것이요, 만약 척박한 땅 1결을 경작하는 자가 수재(水災)나 한해(旱害)를 당하여 겨우 몇 부(負)의 작물 밖에 된 것이 없는데도 전체적인 감손은 아니라 하여 10두를 다 채워 받는다면 반드시 꾸어서 보태어 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인민들은 곤란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법(貢法)의 폐해는 앞으로 답험(踏驗)의 폐단보다도 더 심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최윤덕(崔潤德)·도총제 문효종(文孝宗)·유은지(柳殷之)·박실(朴實)·총제 성엄(成揜)·동지총제 이사후(李師厚)·공조 판서 성억(成抑)·참의 신포시(申包翅)·예문관 제학 윤회(尹淮)·직제학 신인손(辛引孫)·봉교 최윤중(崔允中)·대교(待敎) 권자홍(權自弘)·검열(檢閱) 어효첨(魚孝瞻)·김문기(金文起)·강맹정(姜孟卿)·경창부 윤(慶昌府尹) 박신생(朴信生)·소윤(少尹)·양후(楊厚)·전농 판사(典農判事)·박안의(朴安義)·직장(直長) 박회(朴回)·유삼(柳𥊀)·상호군(上護軍) 하영(河永)·대호군(大護軍) 주진자(朱嗔紫)·호군(護軍) 장치온(張致溫)·진성간(陳成幹) 등은 아뢰기를, ‘한 동네의 전지도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같지 않고, 한 해의 곡식도 잘 되고 못 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부유한 백성들의 전지는 좋은 것이 많고, 빈한한 백성들의 전지는 척박한 것이 허다하온데, 좋은 땅에 10두를 징수하는 것은 너무 경하고, 척박한 땅에 10두를 징수하는 것은 너무 중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익은 모두 부유한 백성에게 돌아가고, 빈한한 백성들만이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은 우리 나라의 옛날부터 시행해 오던 세제(稅制)이오니, 구제(舊制)에 의하여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김자지(金自知)·참판 정연(鄭淵)·병조 정랑 강진덕(姜進德)·조서안(趙瑞安)·좌랑 이백검(李伯黔)·양계원(楊繼元) 등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토지가 그 비옥하고 척박함이 각각 달라서 상·중·하와 이갑(二甲)·삼신(三申)의 토품을 일찍이 조사 측량하여 그 고하(高下)를 정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거기에 심은 벼와 곡식이 그해의 가뭄 또는 장마에 따라 풍작 흉작이 달라지고, 또 모래와 자갈로 된 척박한 밭들은 몇 해 뒤에 바로 묵어 버리는 것이 상례이온데, 만약 이를 답험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공법을 시행하여 세금을 거둔다면 잔약한 백성들 중에 어찌 원망하고 탄식하는 자가 없겠습니까. 또 위관의 답험이 잘되지 않고 수령들이 다 심찰하지 못한다 하여 갑자기 옛법을 변경한다는 것도 역시 온당치 않습니다.’ 하고,

판한성부사 서선(徐選)·부윤 고약해(高若海) 등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 옛 제도에 의하여 경작자가 수재·한재나 바람·서리·황충(蝗蟲) 등의 재해를 신고하면, 수령이 직접 현지를 답사하여 재해의 정도에 따라 조세를 감면해 주게 하고, 경차관은 파견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동부 훈도관(東部訓導官) 이보흠(李甫欽)은 아뢰기를,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전지를 다스리는 데 있어 조법(助法)보다 좋은 것이 없고, 공법보다 나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중국과 같은 광대한 땅에 대우(大禹)의 법제인 공법의 시행으로도 폐해를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동방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란 반 걸음 한 걸음 사이도 서로 달라서 비옥한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별로 인력을 들이지 않고도 1결의 논에서 1백 석을 거둘 수 있고, 척박한 땅을 짓는 자는 인력을 다 들여도 1결의 소출이 10두에 지나지 않사온데, 정말 이렇게 10두의 세를 정해 받는다면 비옥한 토지를 받아 가지고 경작하는 자만이 혜택을 누리게 되고, 척박한 땅에다 거름을 줘가며 지은 자는 빚을 얻어 충당하는 억울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런 공법을 어떻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또 더욱이 흉년에 백성들은 기근(飢饉) 속에 허덕이고 있는데도 기어코 10두를 다 받는다면 과중하여 중용을 잃는 결과가 될 것이요, 풍년에 곡식이 지천할이만치 많은 수확을 보았는데도 10두만을 거둔다면 이는 너무 경하여 역시 중용을 잃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공용이 이 때문에 혹 말라버리기도 할 것이요, 민생도 이 때문에 생활을 이루어 나가지 못할 것이니 시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신이 초야(草野)에 살고 있삽기에 여염(閭閻)의 일들을 모르는 것이 없사온데, 오늘날 당면한 문제는 농작물의 손실(損實)에 대한 위관들의 불공평한 심사만이 아닙니다. 그 집의 식구를 참작하여 농경지의 다과(多寡)를 정하고, 권력 있고 부강한 자가 밭두둑을 연접해서 많은 전지를 강점하는 폐단을 없애어 외롭고 약한 영세민에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업을 얻게 한 후에, 손실법(損實法)을 거듭 밝혀 불평의 탄식 소리가 없게 한다면 실로 국가의 무궁한 이익이 아닐까 합니다.’ 하고,

좌사간 변계손(卞季孫)·우사간 권맹손(權孟孫)·좌헌납 이장손(李長孫)·우헌납 이사맹(李師孟)·우정언 윤미견(尹彌堅)·동부 교수관(東部敎授官) 채윤(蔡倫)·중부 교수관 정종본(鄭宗本) 등은 아뢰기를, ‘이번에 정하신 공법은 실로 좋은 법제입니다. 다만 토품의 비옥 척박을 분별하지 않고 1결에 대한 세금을 10두로 한정한다면 경중(輕重)의 구별을 어지럽게 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오니, 양전(量田)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다시 수납할 세량을 정하여 공사간에 모두 편리하게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하고,

총제 하연(河演)은 아뢰기를, ‘예전에 대우씨(大禹氏)가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한 데 따라 부세(賦稅)의 차등을 제정하니, 재화(財貨)를 맡은 관원들이 이를 잘 운영하여 모든 일이 다 잘 다스려졌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에는 높은 산과 큰 강이 서로 얽혀 험하게 막혀 있고, 기후와 풍토의 관계로 차고 더운 기온의 차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사방의 토질과 오곡의 생산도 달라서 인민의 생업이 일정하지 않고 빈부의 차가 심한 것의 주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경상·전라도와 같은 연해 지대의 논에는 1, 2두의 볍씨를 뿌리면 그 소출이 10석이 달하여, 1결의 소출이 많으면 5, 60석을 넘고 적어도 2, 30석을 내려가지 않으며 밭도 역시 아주 비옥하여 소출이 매우 많은 데 반하여 경기·강원도와 같은 산을 의지해 이루어진 고을들은 비록 1, 2석의 볍씨를 뿌린다 해도 소출이 5, 6석에 불과하오니, 일률적으로 조세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전조(前朝)로부터 다만 상·중·하의 3개 등급으로 법식을 정해 왔사온데, 농부의 손 이지(二指)로 열 번을 재서 상전척(上田尺)으로 삼고, 이지(二指)로 다섯 번 재고, 또 삼지(三指)로 다섯 번을 재서 중전척(中田尺)으로 삼고, 삼지(三指)로 열 번을 재서 이를 하전척(下田尺)으로 삼고는, 〈이 자[尺]를 사용하여〉 6척(尺)을 1보(步)로 치고, 둘레 3보(步) 3촌(寸)을 1부(負)로 치며, 25보(步)를 1결(結)로 쳐서 계산하고, 거두는 조세는 모두 30두를 받고 보니, 3개 등급의 전세의 차이가 그리 많지 않으며, 또 상등전(上等田)은 오직 경상·전라도 등에 1천 결에 겨우 1, 2 결이 있고, 중등전(中等田)도 역시 1백 결에 1, 2 결이 있을 뿐, 그 밖에 각도에는 다만 중등전이 역시 1천 결에 겨우 1, 2 결이 있는 정도입니다. 이는 대개가 땅의 비옥과 척박을 분별하지 않고 모두 하등전(下等田)으로 친 것이니, 옛 법을 어긴 것이며, 손실을 답험함에 있어서 아무 경력도 없는 용렬한 자들이 마음대로 감세 조치[給損]를 해 준다는 것도 또한 온당치 않사오니, 우공(禹貢)의 제도에 의하여 사신(使臣)을 보내서, 높고, 낮고, 메마르고, 습하고, 비옥하고, 척박한 것 등으로 땅을 구별하여 9개의 등급으로 정하고는, 전에 상전(上田)·중전(中田)으로 측량한 전답은 모두 하전척(下田尺)으로 다시 측량하여 지적(地籍)에 올리게 하시고, 조세를 징수하는 법도 《원전(元典)》에 실려 있는 한전(旱田)·수전(水田)을 막론하고 1결에 벼 30두의 수량을 징수하는 법을 써서, 상상전(上上田)은 벼 30두를 거두어 들이고, 상중전(上中田)은 25두를, 상하전(上下田)은 20두를, 중상전(中上田)은 17두를, 중중전(中中田)은 15두를, 중하전(中下田)은 13두를, 하상전(下上田)은 10두를, 하중전(下中田)은 7두를, 하하전(下下田)은 5두를 거두게 하되, 경기(京畿)는 바로 왕도(王都)에 예속한 지역으로 요역(徭役)의 번거로움이 다른 도에 비할 바 아니오니, 우공(禹貢) 기주(冀州)의 예대로 그 조세의 수납에서 모두 한 등씩을 낮추어 받아 서울을 귀중하게 알도록 하고, 위의 각도에서도 만일 수해·한해·바람·우박 등의 재해를 입으면, 감사가 그 손상의 정도를 심찰하여 분수를 작정해 올려 조정의 급손법(給損法)에 따르도록 하고, 특지(特旨)로 분수를 감하여 감손에 따른 감면 조치를 해 주는 것으로 일정한 법식을 삼게 하면 세법도 적의(適宜)함을 얻을 것이요, 일국의 백성도 고루 성은(聖恩)을 입게 되어 대우씨(大禹氏)가 공법을 제정한 본의와 거의 합치할 것입니다.’ 하고, 참판 유계문(柳季聞)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 토지의 품질이 같지 않아서 경상·전라도 등의 연해 지대의 논은 1, 2두의 볍씨만 뿌려도 그 소출이 거의 10석에 달하는데, 경기·강원도와 같은 산골의 논들은 1, 2석의 볍씨를 뿌려도 소출은 겨우 7, 8석에 불과합니다. 토지의 품질이 같지 아니한 것이 이 정도였는데도, 전조에서 다만 농부의 손 이지(二指)로 열 번 재서 상전척(上田尺)을 삼고, 이지(二指)로 다섯 번 재고, 삼지(三指)로 다섯 번 재서 중전척(中田尺)으로 삼고, 삼지(三指)로 열 번 재서 하전척(下田尺)을 삼아서 3등급을 정하고는, 1결에 대한 조세는 모두 30두로 수량을 정하였던 것이니, 이는 옛 제도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개국하신 뒤에도 이내 그 법으로 각도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였던 것인데, 해마다 손실을 조사할 때에 지각 없는 용렬한 무리들이 눈대중으로 마구 감해 주는 등 그 극심한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어, 이제 공법의 편리 여부를 널리 중외(中外)에 물어 다년간의 폐단을 제거 혁신하고 올바른 제도를 세우시려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사이에 꼭 말씀 드릴 것이 있으니, 이는 토지의 등급은 아직도 전일의 폐단을 그대로 따르면서 조세의 액수를 정하는 것만을 일괄적으로 공법에 따른다면, 상전(上田)을 점유하고 있는 자는 길이 그 혜택을 누릴 것이나, 척박한 땅을 얻어 가지고 있는 자는 대대로 우수(憂愁)와 한탄을 안게 되어, 한 나라의 백성으로 그 고락(苦樂)의 현격함을 차마 좌시(坐視)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하오니 우공(禹貢)의 제도에 의하여 사신(使臣)을 각도로 나누어 보내서 토지의 낮고 높고, 건조하고 습하고, 기름지고 착박한 것 등을 하나 하나 관찰한 뒤에, 9등급으로 나누어 조세를 거두는 세제를 정하시와 인민의 바라는 바를 위무(慰撫)하시고, 만약 수재·한재나, 바람·우박 등의 재해를 만날 경우에는 감사(監司)가 직접 손상에 따른 감면의 분수(分數)를 살펴서 아뢰게 하시와 조정과 역대(歷代)로 행하여 오던 급손법(給損法)을 따르도록 하시고, 특별히 손상에 따라 분수를 감하시는 명령을 내리시는 것으로서 영원한 법전으로 삼으소서.’ 하고, 유후사(留後司)의 품관(品官)·촌민(村民) 등 1천 1백 23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71명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오며, 유후(留後) 이종선(李種善)·단사관(斷事官) 최규(崔揆)·경력(經歷) 강만로(姜蔓老)·도사(都事) 송거(宋柜) 등은 아뢰기를, ‘공법에 의하여 조세를 거두는 것은 실로 좋은 법입니다. 그러하오나 우리 나라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중국과 다르오니, 구제대로 하는 것이 편리하지 않을까 하옵니다.’ 하고,

경기(京畿)의 수령(守令) 29명과 품관(品官)·촌민(村民) 등 1만 7천 76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5명과 품관·촌민 합계 2백 36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고, 도관찰사 최사의(崔士儀)·도사(都事) 양수(楊修)·수원 부사(水原府使) 윤처성(尹處誠)·원평 부사(原平府事) 오영로(吳寧老)·해풍 군사(海豐郡事) 황득수(黃得粹)·이천 현사(利川縣事) 김훤(金咺)·고양 현령(高陽縣令) 유흥부(柳興阜)·가평 현감(加平縣監) 김위(金偉) 등은 아뢰기를, ‘전답의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일정하지 않아서, 좋은 토지를 부치고 있는 자는 10두의 조세가 너무 경하고, 나쁜 땅을 부치고 있는 자는 10두의 조세가 비록 적다해도 오히려 그 수량을 충당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각 관사(官司)의 위전(位田)과 외방 관서의 늠록전(廩祿田) 등 1년의 경비를 참작해 헤아려서 이를 떼어 주어서 풍년으로 보고 조세를 거두어도 오히려 부족한 실정이온데, 공법을 시행할 것 같으면 반드시 2분(分)은 늘어나게 되어 군국(軍國)의 수용량이 이로 말미암아 삭감될 것이니, 종전대로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만일 다시 공법을 정하려 하신다면 토지의 비옥 척박을 변별하여 3등급으로 나누게 하소서.’ 하고,

양주 부사(楊州府使) 진중성(陳仲誠)은 아뢰기를, ‘비록 한 고을 안이라 해도 토지의 품질이 같지 않사온데, 좋은 토지를 부치고 있는 자가 연사의 풍흉을 막론하고 1결마다 10두의 세를 납부한다면 이는 너무 경하고, 척박한 토지를 부치는 자가 역시 그 해의 풍흉을 막론하고 1결마다 10두를 바친다면 이는 너무 과중하오니, 이제부터 토지의 품질을 3등급으로 나누는데, 〈가령〉 모인(某人)이 경작하는 원전(元田) 몇 결(結)을 상·중·하 3등으로 나누어 놓고, 풍년(豐年)에는 상등(上等)은 1결에 20두, 중등(中等)은 15두, 하등(下等)은 10두를 거두고, 중년(中年)에는 상등은 1결에 15두, 중등은 10두, 하등은 7두를 거두며, 흉년(凶年)에는 상등은 1결에 10두, 중등은 7두, 하등은 3두를 거두어 그 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서 세를 거두게 하고, 오랫동안 묵은 전지를 더 경작할 경우에는 전주(田主)의 신고장을 받아 묵은 땅과 더 개간 경작하는 면적은 직접 답사하여 그 토지도 등급을 나누어 지적에 등록하도록 하소서.’ 하고,

평안도의 수령 6명과 품관·촌민 등 1천 3백 26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관찰사 조종생(趙終生)과 수령 35명, 그리고 품관·촌민 등 2만 8천 4백 74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황해도의 수령 17명과 품관·촌민 등 4천 4백 54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17명과 품관·촌민 합계 1만 5천 6백 1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충청도의 수령 35명과 품관·촌민 6천 9백 82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관찰사 송인산(宋仁山)과 도사(都事) 이의흡(李宜洽)과 수령 26명과 그밖에 품관·촌민 등 1만 4천 13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강원도는 수령 5명과 품관·촌민 등 9백 39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수령 10명과 품관·촌민 등 6천 8백 88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고, 관찰사 조치(曹致)·도사 윤무(尹務)·원주 판목사(原州判牧使) 전흥(田興)·판관 이수량(李守良)·춘천 부사(春川府使) 이안경(李安敬)·회양 부사(淮陽府使) 이원비(李原備)·간성 군수(杆城郡守) 이사임(李思任)·평해 군사(平海郡事) 김포(金布)·평창 군사(平昌郡事) 김유보(金兪甫) 등은 아뢰기를, ‘땅의 비옥함과 척박함이 각기 다르고, 묵히기도 하고 개간하기도 하는 등 산 위에 화전(火田)의 경작이 몹시 많으므로, 전대로 손실에 따라서 조세를 거두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함길도에서는 수령 3명과 품관·촌민 등 75명은 모두 가하다 하고, 관찰사 민심언(閔審言)과 수령 14명, 그리고 품관·촌민 등 7천 3백 87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경상도에서는 수령 55명과 품관·촌민 등 3만 6천 2백 62명은 모두 가하가 하고, 수령 16명과 품관·촌민 3백 77명은 모두 불가하다 하오며, 경주 부윤(慶州府尹) 조완(趙琓)·판관 김자이(金自怡)·안동 부사(安東府使) 정환(鄭還)·판관 윤미로(尹彌老)·영천 군사(永川郡事) 서진(徐晉)·진성 현감(珍城縣監) 이자유(李自濡) 등은 아뢰기를, ‘1결의 전지에서 조세 10두를 거둔다면 세금을 경하게 하여 인민의 생계를 넉넉하게 해주는 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매년 3분의 2를 감하고 〈그 남는〉 1분만을 조세로 거둔다면 국가의 재정이 부족할 것이니 장래가 염려되옵니다. 더욱이 비옥한 전지는 열에 한둘에 불과하고, 척박한 전지는 열에 여덟아홉이나 되니 좋은 전답을 경작하는 자는 크게 다행할 것이나, 나쁜 전답을 경작하는 자는 불행한 일로서, 실로 고르지 못한 바가 있사오며, 비록 풍년이라 할지라도 농사철을 당하여 종군(從軍)하게 된다든가, 혹은 온 가족이 급성 전염병에 걸려 겨우 씨만 뿌리고 김매어 가꾸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을, 그 손실은 답험하지도 않고 원전(元田)의 수량으로 조세를 거둘 경우, 모든 재산을 다 기울여 내놓아도 오히려 부족하여 빚을 내어 충당하게 하여 그 수량을 채워 받는다면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장차 크게 일어날 것이며, 공법에 따른 폐단은 〈옛날에〉 용자(龍子)가 자세히 논한 바 있습니다. 한 가지 법을 세우면 한 가지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통환(通患)이오니, 구제(舊制) 그대로 그해의 풍흉에 따라, 공평 청렴하고 정직한 무리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현지를 답험하게 하고, 실(實)한 분수를 취하여 인민의 편익을 도모하고 국가의 재정을 충족케 하소서.’ 하고,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흡(李洽)·선산 부사(善山府使) 이길배(李吉培)·함창 현령(咸昌縣令) 황영(黃永)·의성 현령(義城縣令) 김속(金續)·지례 현감(知禮縣監) 정옹(鄭雍)·문경 현감(聞慶縣監) 노임(盧任) 등은 아뢰기를, ‘이제 이미 지나간 해의 조세 수납량을 연도 별로 고찰하여 보니, 손(損)이 6분에 이른 해가 드물었습니다. 그러하온데 지금 한전(旱田)·수전(水田)을 통틀어 1결마다 6분의 예로 10두의 조세를 거둔다면 부세의 수납이 너무 경하여 국가의 재정이 허소(虛疎)하게 될 것입니다. 토지의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도무지 같지 않아서 좋은 전답을 부치고 있는 자만 이익을 누리고, 나쁜 땅을 부치고 있는 자는 폐해를 받고 있으며, 혹시 재해로 말미암아 완전히 농사를 실패한 자에게는 국가에서 비록 그 조세를 전량 면제해 주려 하여도, 수령들이 사무가 번다하여 제때에 답험(踏驗)하지 못하므로, 실정에 따라 조세를 감해 주기는 어려울 것이요, 허다한 요역(徭役)의 추렴을 모두 실(實)한 분수에 준하여 분정(分定)한다면 국가의 재정이 넉넉지 못할 거이니, 매년 그 실(實)한 분수만을 가지고 변통 가감하는 각 위전(位田) 같다면 모르거니와, 수량을 정하여 면세해 준 풍저창(豐儲倉)·광흥창(廣興倉)·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봉상시(奉常寺)·인수부(仁壽府)·인순부(仁順府)·의영고(義盈庫)·군자감(軍資監) 등의 각 관사(官司)와 외방 각 고을의 아록(衙祿)·늠급(廩給), 그리고 문선왕(文宣王)·향교(鄕校) 등 유수한 전지에서도 1결에 10두의 조를 거둔다면, 전에 절급(折給)한 수량에 비하여 반드시 갑절이나 더 계정(計定)해 떼어 준 후에 비로소 당초에 차등을 두어 나누어 준 수량에 상당할 것이니, 유한(有限)한 전지를 가지고 더 준다는 것도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대우씨(大禹氏)가 공법을 세울 적에도 반드시 먼저 〈토품을〉 9등급으로 나누었으니, 지금도 역시 한두 주현(州縣)에다 토지의 품질을 심사하여 등급을 정하고 〈이에〉 공법을 시행하되, 몇 해 동안만 시험한 뒤에 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관찰사 심도원(沈道源)·도사(都事) 이사증(李師曾) 등은 아뢰기를, ‘공법을 세워 시행하고 손실(損實)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던 구법을 폐하시려는 것은 실로 아름다운 뜻이온 줄 아옵니다. 그러하오나 민간에서의 고르지 못하다는 한탄과 국가의 경비 부족의 폐단 등은 아마도 위에서 수령들이 말한 바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재해로 인하여 농사를 실패한 전지에 조세를 면제해 준다면, 묵고 황폐한 땅도 역시 면세(免稅)되어야만 할 것이요, 재해를 입은 전지, 묵고 황폐한 토지들을 신고에 의하여 면세를 허용한다면, 지난날 손실법(損實法)의 폐단을 능히 다 개혁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이미 다 개혁하지 못하고, 또 불공평하고 부족한 폐단이 있다면, 이는 아마 완전(完全)한 법이 아닐 것입니다. 반드시 주장관(主掌官)에게 원전(元田)에서 들어오는 수량과 중년(中年)에 실전(實田)에서 수입되는 수량을 계산하고, 또 국가 경비의 남고 모자람과 민간에서 납부하는 세입의 많고 적은 것을 감안하여 가지고 다시 논의하도록 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전라도에서는 수령 42명과 품관·촌민 등 2만 9천 5백 5명은 모두 가하다고 말하고, 낙안 군사(樂安郡事) 권극화(權克和)는 아뢰기를, ‘만일 현재 경작하는 전지[起田] 1결에 10두만을 거둔다면 너무 경하고, 경작하는 전지와 묵어 있는 토지를 분별하지 않고 모두 10두씩을 거둔다면, 일찍이 척박한 전지를 부치다가 마지 못하여 묵혀 버린 자는 사실 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8월을 당하여 전주(田主)가 묵히고 경작하는 곳을 신고하면, 수령이 직접 이를 심찰하여, 묵혀져 있는 수량을 제외하고 다만 경작한 전지 중에서 풍년에는 15두를 거두고, 중년(中年)에는 10두를 거두고, 흉년에는 7두를 거두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풍년에 너무 적게 거둬들이는 불만과 흉년에 너무 많이 거둬들이는 한탄이 다 없어질 것입니다.’ 하고, 관찰사 신개(申槪)·도사(都事) 김치명(金致明), 그리고 수령 12명과 품관·촌민 등 2백 57명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옵는데,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백 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백 49명입니다."

하니, 황희(黃喜)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戶曹具中外貢法可否之議以啓: "京中知敦寧府事安壽山、摠制李蕆、同知摠制朴葵、前摠制李順蒙、前同知摠制李希貴、前都觀察使李貞幹、前判牧事金士淸、前中樞院副使南實、前同知摠制崔蠲, 三品以下時行二百五十九人、前銜四百四十三人等以爲可。" 前兵曹判書趙末生、前判牧事黃子厚等以爲: "臣等歷觀古人爲國之道, 在乎養民, 養民之政, 在乎取於民有制。 三代之所以貢助徹, 良以此也。 然我國家土地塉薄, 山蹊險阻, 故助徹之法, 勢不可行也。 今稅其私田而什一者, 是祖三代貢法之法也。 我太祖龍興, 首除民瘼, 令民之失農者, 納狀於官, 又令官吏就審納狀之田, 而減其稅, 其法可謂至矣。 然民之有故者, 或失納狀之期, 則田雖陳損, 不免收稅, 是可嘆也。 我太宗深知其然, 依成司稼之官, 巡野觀稼之法、巡審都田隨損給損之式, 其愛養元元之意, 亦可謂至矣。 然巡審之時, 或分遣朝官, 或委任監司守令。 朝官守令不能遍審, 而分差委官, 爲委官者, 率多各官日守書員之輩, 不學無知, 不體聖上恤民立法之本意, 或損或實, 皆失其中, 故農民累日支待, 奔走供億, 終無實惠, 是積年之共患也, 今戶曹酌知其弊, 請行貢法。 從古以來, 正田法遂民生, 政之最難也。 故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朱子曰: ‘時鄕遂用貢法, 都鄙用助法。’ 下及歷代, 之限田ㆍ名田, 之租ㆍ庸ㆍ調, 雖不及三代, 是亦各因時宜而制之也。’ 臣愚以爲今請貢法, 爲日之可行也。 臣聞民間可否之議, 平野居民, 前此納稅, 重者皆樂而可之, 山郡居民前此納稅, 輕者皆憚而否之, 是民心之所欲也。 爲國之道, 當順民心。 昔禹貢之法, 任土所宜, 九州之賦, 有錯出於他等者。 曰可之, 民從其可, 而行貢法; 曰否之, 民從其否, 而仍其舊行隨損給損之法。 其或一邑一里之民, 可者衆, 而獨多執田地, 互相陳起者憚而曰否, 從多施行, 則向之無田者, 皆得田而田野闢矣, 戶口增矣。 又其元納細布之田者, 納稅本輕, 令從十負十斗之例而更議, 則過輕之議, 必生於後日。 令有司酌量施行, 似爲益便。 臣等又聞兩倉軍資所納之稅, 皆以本色, 除給五價, 唯各品科田之稅五價, 則令作者納之, 故京畿之民, 苦其賦重, 自今科田之稅, 亦依他例。" 前同知摠制朴礎以爲: "貢法雖善, 不分田之肥磽, 而悉以行之, 則民生自有憂喜矣。 分遣各道廉問計定使, 審其田分善惡, 分類成籍, 可爲貢法之田則以貢法施行, 其餘山田磽塉, 不宜貢法之田, 每年須考佃客告狀, 方許就審, 隨損給損, 兩法兼行。" 集賢殿副提學鄭麟趾以爲: "先於京畿一二州縣試驗, 然後遍行諸道。" 直提學兪孝通以爲: "上中田外, 下田更分爲二等, 每於一結, 或加給負數, 或減十斗。" 直殿安止以爲: "先行於山谷平原各數十縣, 試其可否。" 奉常注簿李好文以爲: "二等之田, 更不改量, 每等又分爲三等, 作九等, 上上田稅, 每一結, 收租十六斗, 每等遞減一斗, 至下下田則只收八斗。 平安咸吉道則只分爲六等。 上上田稅一結, 收十一斗, 每等遞減一斗, 至下下田則收六斗, 庶爲得中。" 集賢殿副提學朴瑞生、典農少尹趙克寬、刑曹正郞鄭吉興等以爲: "踏驗給損之法, 數多委官, 未盡得人, 或挾私失中, 有十常八九。 敬差官差使員等, 亦未得每處糾摘, 國有所損, 民受其弊, 其來尙矣。 然貢法, 不先分上中下三等田品, 則占膏田者, 粒米狼戾, 而寡取之, 得塉田者, 糞其田而不足, 則必取盈焉。 富者益富, 貧者益貧, 弊復如前。 先正三等田品。" 都官正郞柳之涵、佐郞尹處恭權蹲等以爲: "唯塉薄山田, 必不得每年而耕, 互相陳荒, 而與平田例論, 則實爲巨弊。 宜令守令先取田主告狀, 親審起陳, 而後收租。" 䆃官署令金達成、丞元乃仁等以爲: 貢法便於公私, 實爲良法。 然江原黃海道, 地皆磽确, 而土品不如他道, 依平安咸吉道例, 差等收租, 則庶可便於民, 而不戾於國家立法之美意矣。" 禮曹佐郞趙遂良、佐郞南簡等以爲: "本朝土田, 膏塉不同。 上田一結收租十斗, 其取之也過少, 下田一結, 收租亦十斗, 則其取之也過多, 故民之好惡大不同。 願分田品爲九等, 租稅亦定爲九等, 以便民生。" 礪山府院君 宋居信谷山府院君 延嗣宗驪川府院君 閔汝翼、判敦寧府事韓長壽、同知府事李皎趙侯、大司憲李繩直、兵曹判書趙啓生、參判李中至、都摠制元閔生、摠制申檣趙菑李春生、同知摠制金乙辛洪理李穗柳漢、仁壽府尹閔義生、領敦寧仍令致仕權弘、右議政致仕(李龜齡)〔李貴齡〕 、前都摠制權希達、前判牧事文繼宗、前摠制盧原湜、前戶曹參判韓尙德、前同知摠制權踐、前府尹李興李稑、前節制使金沼、檢校漢城尹權遜兪龜壽、三品以下時行三百九十三人、前銜一百十七人等以爲不可。 議政府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贊成許稠、參贊吳陞李孟畇等以爲: "傳曰: ‘治地莫善於助, 莫不善於貢。’ 國朝制爲收租之際, 收損給損之法, 此實參酌古今, 萬世可行之良法, 不可輕改。 且田地計定之時, 諸倉庫及公須衙祿站驛等田, 酌量定數, 今若減租, 必須加給二倍, 乃充元額。 然則軍資之田, 恐無遺矣。 大抵占膏腴田者, 率多富强之人, 占塉薄田者, 類皆貧乏之人。 若依戶曹所申貢法, 則富者之幸, 貧者之不幸, 況咸吉平安道田租, 旣減於他道之數, 而又減之, 則如有軍旅凶荒, 無以支當, 臣等竊謂似難擧行。 乞依成憲, 仍舊施行, 庶爲便益。 今幷錄救弊條件以聞。 一。 損實敬差官, 卽古軍須察訪, 其任甚重。 近來以闒茸不更事者差遣, 以致不中, 實爲未便, 自今除臺諫外, 不拘時散, 擇有名望者差遣。 一。 遣敬差官, 則監司謂非己任, 或不專心顧慮, 不遣敬差官則監司因事煩不能精察, 自今須遣敬差官, 監司與之同議區處。 其損實踏驗, 不多事也, 各官守令, 一除雜事, 專爲踏驗, 監司與敬差官巡行考察。 一。 損實委官, 擇曾經顯秩者差定, 載諸六典, 近來但以鄕曲猥瑣之徒差定, 故曾經顯秩者, 恥爲委官, 多方規避。 自今委官, 改稱踏驗官, 必以曾經顯秩三品以下及國試入格者擇定, 京畿則曾經顯秩, 而退居者罕少, 令吏曹擇成衆官及受田牌可當者差定。" 前判漢城府事許周以爲: "田地收租, 莫善於隨損給損。 國初始正經界, 參酌古今, 以此立法, 垂至今日, 但分審官不良, 以致不中之弊。 曾經顯秩者差定之制, 雖載《六典》, 各官務欲及時, 不慮大體, 只取文算, 皆以吏典出身者, 差爲委官, 故外方品官有名節者, 恥爲委官, 臨時托故, 或至上京規避, 故各官不得已每委庸流之手, 以成其弊, 有今日改制之議。 願改委官之號, 而擇任曾經顯秩者, 又嚴立法程, 使之不得規避。 雖居外方, 受任時官門進退迎送之禮, 依己巳年量田官例, 又依須察訪古制, 擇臺諫六曹有名望者, 分遣各道, 以察損實能否, 庶無前日之弊。 本朝田賦之制, 庶幾乎什一之法, 佃客雖極貪吝者, 亦慊焉。 然而踏驗之際、收租之時, 姦吏夤緣而妄冒, 公私以之俱竭, 民乏卒歲之用, 國無三年之畜。 殿下深念其弊, 更定田賦之法, 永爲垂世之規, 而一結田賦, 只收十斗與七斗, 其稅自何而出也? 臣恐未合於聖祖田賦之制也。 臣請以田稅布貨一事言之, 水田五十負, 納五升布一匹, 以其價準米十五斗。 若以今之制賦準之, 則水田一百五十負, 乃當布一匹, 旱田則倍之矣。 其他緜紬ㆍ緜布ㆍ苧布ㆍ綿子ㆍ油蜜之稅之外, 祿轉軍資所納之數, 必減於前日, 州府郡縣之儲, 十喪八九。 如有緩急, 將何以備之? 臣恐利未一二, 而害已十百。 臣嘗觀禹貢一書, 厥田之品不同, 故厥賦之等有差。 吾東方四方土田, 各有肥塉之異, 其於肥塉之中所減, 唯於下田及沙石田或三斗或五斗, 則庶不謬於聖人之遺意。 伏望殿下, 依 文帝賜今年田租之半之法, 旱田水田, 隨歲豐凶, 或減十分七分之一, 或五分三分之一, 或減半, 以革損實踏驗之弊。 如有霜雹之災, 監司親審實封以聞, 取自上裁, 量宜蠲免。" 吏曹判書權軫、正郞李承孫愼幾、佐郞閔孝懽羅得康安質、宗簿少尹安完慶、判官李重、直長宋復元、䆃官注簿崔脩、軍資判官裵屯正許倜、副正皇甫規、正字任重等以爲: "田地踏驗之際, 增減失中之弊、奔走供億之勞, 誠有如戶曹所啓矣。 然田有肥塉, 歲有豐歉, 假如耕良田一結者, 値歲豐稔, 則雖以全實收租, 亦不爲過, 而止取十斗, 則國用減矣。 若耕薄田一結者, 又値水旱, 僅有數負之實, 而謂非全損, 取盈十斗, 則必有稱貸而益之, 民生困矣。 如是則貢法之弊, 將有甚於踏驗之弊矣。 判府事崔潤德、都摠制文孝宗柳殷之朴實、摠制成揜、同知摠制李師厚、工曹判書成抑、參議申包翅、藝文提學尹淮、直提學辛引孫、奉敎崔允中、待敎權自弘、檢閱魚孝瞻金文起姜孟卿、慶昌府尹朴信生、少尹楊厚、典農判事朴安義、直長朴回柳𥊀、上護軍河永、大護軍朱嗔紫、護軍張致溫陳成幹等以爲: "一洞之田, 肥塉不同; 一年之穀, 登歉不一。 且富民之(曰)〔田〕 多良, 貧民之田多塉, 以良田而收十斗太輕, 以塉田而收十斗太重。 然則利歸富民, 而貧民獨受其害, 況隨損給損, 本國舊制也, 乞令依舊。"

刑曹判書金自知、參判鄭淵、兵曹正郞姜進德趙瑞安、佐郞李伯黔楊繼元等以爲: 我國土地, 肥塉各異。 其上中下及二甲三(申)〔甲〕 之品, 則已曾打量, 定其高下, 然其所種禾穀, 則隨歲旱潦, 登歉不同, 又其沙石磽薄之田, 數歲之後, 隨卽荒穢。 若不踏審, 槪以貢法抽斂, 則殘劣之民, 豈無怨咨? 且以委官之踏驗不中、守令之未得遍審, 遽變成憲, 亦爲未便。" 判漢城府事徐選、府尹高若海等以謂: "依本國舊制, 佃客告水旱風霜蟲蝗之災, 守令親驗, 隨損給損, 勿遣敬差官。" 東部訓導官李甫欽以爲: "孟子曰: ‘治地莫善於助, 莫不善於貢。’ 夫以中國之土、大禹之制, 貢法之行, 未免不善, 況我東方土地之肥塉, 跬步相異, 耕田沃饒者, 不費人力, 而一結之田, 可取百石; 治其塉薄者, 雖費人力, 而一結之出, 不過十斗, 苟或定取十斗之稅, 則受田沃饒者, 獨享其利, 糞其塉薄者, 未免稱貸, 其可必行貢法乎? 又況凶年民或飢饉, 而必取十斗, 則失之重; 樂歲粒米狼戾, 而只取十斗, 則失之輕。 國用以之而或竭, 民生由是而不遂, 不可行必矣。 臣居草澤, 閭閻之事, 靡所不知, 當今之患, 不惟損實之不均, 莫若計其一家之人口, 而定其耕田之多寡, 使其豪强無連阡之田, 寡弱得生生之業, 然後申明損實之制, 使無不平之(歡)〔歎〕 , 則實國家無疆之利。" 左司諫卞季孫、右司諫權孟孫、左獻納李長孫、右獻納李師孟、右正言尹彌堅、東部敎授官蔡倫、中部敎授官鄭宗本等以爲: "今定貢法, 誠爲美制, 但不分地品膏塉, 一結收租, 限以十斗, 則不無輕重失宜之弊。 伏望待其量田之後, 更定收租之數, 以便公私。" 摠制河演以爲: "在昔大禹因土地之膏塉, 制貢賦之差科, 六府孔修, 而庶事咸治。 惟我國家, 大山大川相繆險阻, 風氣所偏, 寒燠各異, 故四方之地, 五穀之生, 民生之不一。 貧富之參差, 職此之由。 如慶尙全羅沿海水田, 種稻一二斗, 而所出或至十餘石, 一結所出, 多則逾五六十石, 少不下二三十石, 旱田亦極膏腴, 所出甚多。 若京畿江原道依山州郡, 則雖種一二石, 所出不過五六石, 不可以一體收租明矣。 自前朝只以上中下三等定制, 將農夫手二指計十爲上田尺, 二指計五、三指計五爲中田尺, 三指計十爲下田尺, 六尺爲一步, 以三步三寸, 四方周廻爲一負, 二十五步爲一結而打量, 其收租則皆取三十斗, 三等之田, 差等不遠。 且上等之田, 惟慶尙全羅等道, 於千結僅有一二結焉, 中田, 於百結亦有一二結焉, 其餘各道, 只有中田, 亦於千結僅有一二結焉。 是則大槪不分地之膏塉, 皆以下等之田打量, 有違於古制。 每當損實之際, 庸夫任意給損, 亦爲未便。 乞依禹貢之制, 差遣使臣, 分其卑高、燥濕、膏腴、瘠薄之地, 定爲九等, 而曾量上中田, 則竝以下田尺, 改量付籍。 其收租之法, 用元典所載, 旱田水田每一結, 收租三十斗之數, 上上田則收租三十斗, 上中田二十五斗, 上下田二十斗, 中上田十七斗, 中中田十五斗, 中下田十三斗, 下上田十斗, 下中田七斗, 下下田五斗。 京畿, 直隷王都之地, 徭役煩劇, 非他道比。 以禹貢 冀州之例, 其收租, 每除一等, 以尊京師。 上項各道, 如遇水旱風雹之災, 則監司審其損傷, 分數以啓, 遵依朝廷給損之法, 特旨減分給損, 以爲恒式, 則貢賦得宜, 而一國之民, 均蒙聖恩, 庶合於大禹制貢之義。" 參判柳季聞以爲: "我國土地之品不同。 如慶尙全羅等道沿海之田, 種稻一二斗, 而所出幾至十石, 若京畿江原等道山谷之田, 種穀一二石, 而所出不過七八石, 其田品之不同如此。 前朝但以農夫手二指計十爲上田尺, 二指計五、三指計五爲中田尺, 三指計十爲下田尺, 定爲二等, 一結收租, 竝以三十斗定數, 有違古制。 開國以來, 仍此法改量各道之田, 每歲損實之際, 庸劣之輩, 眼量給損, 其弊之極, 不可勝言。 今以貢法便否, 訪問中外, 欲革積年之弊, 而立中正之制也。 然其間有可言者, 土田等第, 尙循前弊, 而收租定額, 一遵貢法, 則占上田者, 長享其利, 得薄田者, 世抱愁歎, 一國之民, 苦樂懸絶, 不忍坐視。 乞依禹貢之制, 分遣使臣各道, 相其地之卑高、燥濕、膏腴、塉薄, 定九等收稅之制, 以慰民望。 如遇水旱風雹之災, 則監司親審損傷分數以啓, 仰遵朝廷及歷代給損之法, 特下隨損減分之令, 以爲永世之典。" 留後司品官村民幷一千一百二十三人, 皆以爲可, 七十一人, 皆以爲不可。 留後李種善、斷事官崔揆、經歷姜蔓老、都事宋秬等以爲: "依貢法收租, 實爲美法, 然我國土田膏腴塉薄, 不與中國同, 依舊爲便。" 京畿守令二十九、品官村民一萬七千七十六人皆以爲可, 守令五、品官村民幷二百三十六人皆以爲不可。 都觀察使崔士儀、都事楊修水原府使尹處誠原平府使吳寧老海豐郡事黃得粹利川縣事金晅、高陽縣令柳興阜加平縣監金偉等以爲: "田地膏塉不一, 執良田者, 十斗之租過輕, 執薄田者, 十斗之租雖少, 猶未充數。 且各司位田與外方公衙廩祿田, 一年經費, 酌量折屬, 從實收租, 尙且不足, 若行貢法, 則必加二分, 軍國之需, 由玆以減, 莫若仍舊。 如欲更定貢法, 則辨其土地膏塉, 分爲三等。" 楊州府使陳仲誠以爲: "雖一邑之內, 地品不同, 執良田者, 不論歲之豐凶, 每一結納十斗, 則過輕, 執塉田者, 亦不論歲之豐歉, 每一結納十斗, 則過重。 自今分地品三等, 某人所耕元田幾結, 分上中下三等。 豐年則上等一結二十斗, 中等十五斗, 下等十斗; 中年則上等一結十五斗, 中等十斗, 下等七斗; 凶年則上等一結十斗, 中等七斗, 下等三斗, 隨其歲之豐凶以收稅。 加耕久陳田, 則取田主告狀, 親審陳及加耕之數, 分其地品, 續錄於籍。" 平安道守令六、品官村民幷一千三百二十六人, 皆以爲可, 觀察使趙終生及守令三十五、品官村民幷二萬八千四百七十四人, 皆以爲不可。 黃海道守令十七、品官村民幷四千四百五十四人, 皆以爲可, 守令十七、品官村民幷一萬五千六百一人, 皆以爲不可。 忠淸道守令三十五、品官村民幷六千九百八十二人, 皆以爲可, 觀察使宋仁山、都事李宜洽、守令二十六、品官村民幷一萬四千十三人, 皆以爲不可。 江原道守令五、品官村民幷九百三十九人, 皆以爲可, 守令十、品官村民幷六千八百八十八人, 皆以爲不可。 觀察使曺致、都事尹務原州判牧使田興、判官李守良春川府使李安敬淮陽府使李原備杆城郡守李思任平海郡事金布平昌郡事金兪甫等以謂: "地之膏塉各異, 或陳或起, 山上火耕甚多, 宜仍舊損實收租。" 咸吉道守令三、品官村民幷七十五人, 皆以爲可, 觀察使閔審言、守令十四、品官村民幷七千三百八十七人皆以爲不可。 慶尙道守令五十五、品官村民幷三萬六千二百六十二人, 皆以爲可, 守令十六、品官村民幷三百七十七人, 皆以爲不可。 慶州府尹趙琓、判官金自怡、安東府使鄭還、判官尹彌老、永川郡事徐晉、珍城縣監李自濡以爲: "一結之田, 收租十斗, 可謂薄斂厚民之意。 然每歲減三分之二, 收租一分, 則國用不足, 將來可慮。 況膏腴之田, 十常一二; 塉薄之田, 十常八九, 耕良田者之大幸, 而薄田者之不幸, 實有不均。 雖在樂歲, 或當農從軍, 或擧家疾疫, 僅能耕種, 而未得耘耔, 因以失農。 若不踏驗損實, 只以元田之數收租, 則雖罄盡財産, 尙且不足, 稱貸益之, 以足取盈之數, 怨咨將興, 貢法之弊, 龍子論之詳矣。 大抵一法立、一弊生, 古今通患。 願仍舊制, 隨歲豐歉, 擇公廉正直之輩, 使之踏驗, 取以實數, 以便民生, 以足國用。" 星州牧使李洽善山府使李吉培咸昌縣令黃永義城縣令金續知禮縣監鄭雍聞慶縣監盧任等以爲: "今考已往各年收租之數, 損至六分之歲, 罕矣。 今於旱田水田, 每一結以六分之例, 收租十斗, 則賦斂過輕, 國用虛疎。 大抵田之膏塉不同, 而執良田者獨享其利, 占薄田者獨受其弊。 其或因災傷全失農者, 國家雖欲專免其租, 守令事煩, 未能及期踏驗, 從實減租難矣。 多般徭賦, 皆準實數分定, 則國用不贍矣。 若其每年以實數推移加減, 如各位田, 則已矣, 其定數折給, 如豐儲廣興倉、內資、內贍、奉常寺、仁壽、仁順府、義盈庫、軍資監等各司及外方各官衙祿廩給、文宣王鄕校等有數之田, 一結收租十斗, 則比前折給之數, 必倍蓰計折, 然後與當初差等分給之數相準, 以有限之田加給, 亦難矣。 大禹之立貢法也, 必先分爲九等, 今亦於一二州縣, 審定地品, 以行貢法, 期以數年試驗, 然後行之可也。" 觀察使沈道源、都事李師曾等以謂: "立貢法、革損實, 誠美意也。 然民間不均之嘆, 國用不足之弊, 恐或如上項守令所言也。 災傷失農之田, 旣免其租, 則陳荒之地, 亦當免稅。 災傷陳荒之田, 盡聽陳告分揀, 則向者損實之弊, 不能盡革矣。 旣不能盡革, 而又有不均不足之弊, 則恐非萬全之法也。 宜令主掌官, 計元田所入之數及中年實田所收之數, 計國家用度盈縮、民間所納多少, 更議施行。" 全羅道守令四十二人、品官村民幷二萬九千五百五人, 皆曰可。 樂安郡事權克和以爲: "若於起田一結, 只收十斗, 則過輕, 若不分起陳, 幷收十斗, 則曾執塉田, 不得已陳荒者, 實有慊焉。 自今當八月, 田主告其陳及加耕處, 守令親審, 除其陳荒之數, 只於起田, 豐年則收十五斗, 中年則十斗, 凶年則七斗。 如是則樂歲寡取之嫌、凶年多取之嘆, 可兩除矣。" 觀察使申槪、都事金致明、守令十二人、品官村民幷二百五十七人等, 皆以爲不可。 〔可〕 者, 凡九萬八千六百五十七人, 否者, 七萬四千一百四十九人, 命從喜等議。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8월 13일 을축 2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권맹손·이사관·배환·조후·황치신·유효통·구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맹손(權孟孫)으로 예문관 제학을, 이사관(李士寬)으로 한성부 윤을, 배환(裵桓)으로 공조 참의를, 조후(趙候)로 행 첨지중추원사를, 황치신(黃致身)으로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를, 유효통(兪孝通)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삼고, 유복아간의 아들 구난(仇難)으로 의흥사 중령 호군(義興司中領護軍)을 삼고, 인하여 관대(冠帶)·옷·신 등을 하사하였다.

○以權孟孫爲藝文提學, 李士寬 漢城府尹, 裵桓工曹參議, 趙候行僉知中樞院事, 黃致身 京畿都觀察使, 兪孝通 江原道觀察使。 又以劉卜兒看仇難爲義興司中領護軍, 仍賜冠帶衣靴。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 7월 10일 정사 5번째기사 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지돈녕부사 조후의 졸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조후(趙候)가 졸하였다. 후(候)는 한양(漢陽) 사람으로 어머니는 곧 환조(桓祖)의 딸이다. 처음에 진흥궁(賑興宮) 녹사(錄事)에 임명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돈녕부사에 이르렀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68세이다. 시호를 안정(安靖)이라고 하였으니, 화(和)한 것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음을 안(安)이라고 하고, 부드럽고 정직하여 명대로 살다가 죽은 것을 정(靖)이라고 한다. 아들 이름을 조득수(趙得壽)라 한다.

○知敦寧府事趙候卒。 漢陽人, 母卽桓祖女也。 初授賑興宮錄事, 歷官至知敦寧府事, 至是卒, 年六十八。 諡安靖, 好和不爭安, 柔直考終靖。 子曰得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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