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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樹書院, 和順 靜菴 趙光祖 先生 謫廬遺墟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不祧廟▣
●(우) 58153
전남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30
(지번) 능주면 남정리 173-2
●(우) 58147
전남 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1786-45
(지번)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 15-3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달아실길 20-5
(지번주소)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 565
■죽수서원 [ 竹樹書院 ]
[요약]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1986년 9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지정종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지정일 1986년 9월 29일
●관리단체 한양조씨종중
●소재지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1786-45 (모산리)
1986년 9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이 서원은 조광조(趙光祖)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을 배향하고 있다. 1570년(선조 3)에 능성현령 조시중(趙時中)의 협조로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짓고, 죽수(竹樹)라는 사액을 받았다.
조광조는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능성현에 유배되었다. 이때 조광조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함께 했던 양팽손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능성현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자연히 만나 서로 의리를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광조가 유배된 지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받고 죽자, 양팽손은 몰래 시신을 거두어 화순 쌍봉사 골짜기에 장사를 지내고 마을에 초가집을 지어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그러다가 1568년(선조 1)에 조광조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함께 조정에서는 조광조를 향사할 서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지은 것이다.
1613년에 중수하였고, 1630년 유림들과 조정의 김장생(金長生) 등이 뜻을 모아 양팽손도 추배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려 겨우 단 을 마련하여 제향하여 왔다. 1971년 제주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 1983년 다시 한양조씨 조국조(趙國朝)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이 본래의 위치인 모산리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전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989년에 동재를, 1994년에 관리사를 신축하였다.
경내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이 있어 제향(祭享) 구역과 강학(講學)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수서원 [竹樹書院]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화순 정암 조광조 유배지(謫廬遺墟地)▣
전남 화순으로의 문화재 탐방 길에서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유배지를 찾았습니다.
조선시대 개혁정치의 상징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유배지로 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들어오고 애우당(愛憂堂)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적려유허지에 1986년에 세워진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에 가운데 마루를 둔 구조입니다.
애우당(愛憂堂)의 편액으로 후학(後學) 이병현(李炳玹)의 글씨로, 최인호의 소설 "유림" 에서 인용하면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였다"는 문장에서 애(愛)를 가져오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다"는 문장에서 우(憂)를 빌려와 "애우당 (愛憂堂)" 이란 당호를 지었다고 합니다.
애우당(愛憂堂)은 가운데 너른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강단 마루 위에는 정암(靜庵)의 글들이 걸려 있어, 조광조(趙光祖)의 절명시(絶命詩) 편액으로,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 거짓 없는 이내 정성을 환하게 비추리라
조광조는 이 시를 쓰고 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거든 관으로 쓸 나무는 얇은 것으로 하라. 두껍고 무거운 송판을 쓰면 먼 길 가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그러고 나서 조광조(趙光祖)는 곧바로 마당으로 나가 땅에 무릎을 꿇고 사약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광조(趙光祖)의 최후의 진술이 적혀 있는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의 편액으로,
士生斯世 所恃者君心而己 이 세상에 선비로 태어나 믿을사람은 임금님뿐
妄料國家病痛在於利源 올바른정치를하고 기강에 병통이 되는 근원을 제거하기위하여
故慾新國脈於無窮而己 새롭게 무궁한 맥을 찾고자 하는 일 입니다.
頓無他意 여타에 다른 생각이 없음을 머리숙여 말씀 올립니다.
조광조(趙光祖)의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편액도 있어,
誰憐身似傷弓鳥 누가 화살 맞아 상처 난 새의 신세 가련히 여길까
自笑心同失馬翁 말 잃고 허전한 늙은이 같은 마음 스스로 웃노라
猿鶴正嗔吾不返 원학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성화를 해대지만
豈知難出伏盆中 복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애우당기(愛憂堂記)의 편액도 볼수 있습니다. 애우당 앞에는 두개의 협문이 있어, 앞쪽에 있는 조광조 적려 유허비를 찾아 봅니다.
적려 유허비는 조선 시대 능주목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길가에 있는데,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장에 방풍판을 달았으며,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로, 조광조 적려 유허비는 비각을 건립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1979년 8월 3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습니다.
맞배 기와집의 보호각 안에 있는 화순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和順 靜菴 趙光祖 先生 謫廬 遺墟碑)으로, 높이 295cm이며, 귀부의 높이 164cm, 귀부 너비 81cm, 귀부의 두께 29cm, 이수의 높이는 71cm로, 조선 중종 때 학자로 개혁 정치를 추구했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았는데 1667년(현종 8) 능주목사 민여로(閔汝老)가 유배지에 유허비를 세웠습니다.
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글씨를 썻으며 비문의 전서는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1630~1687)의 글씨이며 거북 형상의 좌대에 비몸을 올리고 이수형의 비머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적려(謫廬)란 유배되어 간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 두는 비를 말합입니다. 비(碑)의 앞면에 1행 내려쓰기로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라 붉은 글씨로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윗부분에 전서체로 정암 조선생 추모비(靜菴趙先生追慕碑)라 가로로 쓰고, 아래 부분에는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기(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記)와 내용을 내려쓰기로 음각 하였습니다.
비기의 내용은 비석을 세운 곳이 적거하던 집이고 명을 마친 옛터(遺址)라는 점,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지 149년째가 되어서도 선비들이 흠모가 이어지며, 정포은(鄭圃隱)과 김한훤(金寒暄)이 있었지만 정호와 주희의 연원을 계승하고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으로서 학문의 표준을 삼은 것은 선생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정암의 출자와 급제, 대사헌 재임 때인 11월 기묘사화와 유배, 관노 문후종의 집에서의 적거, 12월 20일의 사약에 의한 죽음, 금상 정미년(1667, 현종 8)에 능주 목사 민여로가 비를 세웠다는 내용에 이어 끝에 명(銘)으로 마무리하고 있으며 비 본문과 구별 없이 연이어 연대와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 전서를 쓴 사람의 관직명과 성명을 새겼습니다.
조광조 적려 유허비 뒤에는 영정각(影幀閣)있어, 조광조(趙光祖)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影幀閣)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1986년 강당인 애우당과 함께 건립하였습니다. 영정각(影幀閣)의 현판이며, 내부에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어 배향할수 있으며, 정암 조광조 영정은 도화서의 화원 출신으로 주부(注簿)를 거쳐 내시교수(內侍敎授)와 중림찰방(重林察訪)을 지냈던 조선 후기의 화가 국오(菊塢) 정홍래(鄭弘來, 1720 ~ 미상)의 작품입니다. 영정각에 새로 그린 영정이 있는데, 남농화화백 아산 조방원 화백과 무궁화화백으로 유명한 후손 조동희 화백이 정홍래 영정 작품을 보고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 개혁정치의 상징인 조광조(趙光祖,1482~1520)는,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도학정치를 주창해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한 정치가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습니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으며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하였습니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습니다.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 ) 중 한 사람으로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는 인물로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에 들었으며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에 들었습니다.
복원해둔 초가집의 적중거가(謫中居家)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유배생활을 할 때 기거하던 처소로, 방 두 칸, 부엌 한 칸의 세 칸짜리 초가집으로 유배 당시의 누옥을 재현하여 근자에 복원해 두었습니다. 귀양 중에 살았던 초가의 기둥 윗부분에 "謫中居家"라는 조그만 현판을 볼수 있어, 1519년(중종 14년) 발생한 기묘사화로 그해 11월 25일 능주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25일 동안 귀양생활을 했으며, 눈보라 치는 날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받고 37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을 도와 유교 정치의 이상향을 실현하는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실시한 조광조는 도교 사당인 소격서의 철폐, 향약 실시, 토비와 노비 하사의 특권을 인정받았던 훈구공신의 명부인 훈적 삭제 등 왕도정치의 이상 세계 구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엿으나 약 2년여 동안의 무리한 급진정책은 기존 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무엇보다 그의 강력한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야 할 중종이 중국의 요, 순 임금에 버금가는 성군을 만들려는 조광조의 열정을 부담스러워 하였습니다. 결국 나뭇잎의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역성 혁명을 꾀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를 떠나게 되어 개혁 세력 모두 축출된 당시의 사건은 기묘사화로 불리고 있습니다. 강당과 작은 비각, 전각, 복원된 초가집이 전부인 유적지 이지만, 조선 중기 이상적인 개혁정치를 꿈꾸었던 그의 노력과 37세 짧은 생의 마지막을 담고 있는 뜻 깊은 곳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생애와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 했던 그의 정신을 돌아 볼수 잇는곳으로 전남 화순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유배지입니다.
▣전남문화관광재단 르네상스탐사단 화순제주양씨학포공파 학포종가 학포선생부조묘 전남 화순 여행▣
유네스코네서 2000년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화순고인돌공원 인근에는 화순제주양씨 학포공파 학포종가와 화순제주양씨 참봉공파 양용필종가의 파조이자 종가조인 학포선생을 모신 부조묘가 자리잡고 있다.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관리에 등용된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인 학포 양팽손선생(1488~1545/성종19년~인종1년)은 1519년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삭탈관직 되어 고향인 전라도 능성현 쌍봉리로 귀향하여 학포당을 짓고 은둔에 들어갔다. 학포 양팽손선생이 학포당에 은거하면서 그린 산수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산수도에 본인의 심경을 표현한 시가 함께 적혀 있어서 눈길을 끈다.
유고집으로 학포유집 2책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학포 양팽손선생은 1630년(인조8년) 능주 죽수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 용강서원에 추향되었으며 화순 도곡면 달아실길에는 1631년(인조 9)에 학포 양팽손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부조묘가 세워졌으나 고종 때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었다.
학포 양팽손선생의 후손들이 1947년 훼철되었던 부조묘를 다시 복원하였고 1990년중수 하였으며 정문을 들어서서 왼쪽에 자리잡은 경장각은 월곡리 513번지에 있던 건물을 옮겨와 1992년 새로 중수하였고 가장 최근에는 2007년 중수하여 그 기념비가 정문 옆에 세워졌다. 제주 양씨 후손들이 음력 8월 18일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는 학포 선생 부조묘 제일 안쪽에는 장방형의 돌담장을 두른 공간안에 학포선생을 모신 사당이 자리잡고 있고 돌계단 한단 아래 학생들을 가르키는 강당과 경모재가 좌우로 자리잡고 있다. 학포 양팽손선생의 부조묘가 자리잡고 있는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 달아실 마을은 학포 양팽손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중요 민속자료 제152호로 지정된 양동호가옥과 중요 민속문화재 제154호로 지정된 학재고택(양승수가옥)이 자리잡고 있다.
학포 양팽손선생 부조묘 맞은편에 자리잡은 중요 민속자료 제152호로 지정된 양동호가옥은 조선시대인 18세기에 지어진 건축물로 정문 오른편에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안마당을 마주하고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남도 양반주택의 인위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양동호가옥 안채는 약 18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남방식으로서 5칸 -자형 전후퇴집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19세기 말경에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989년 안채와 사랑채를 보수하였다. 양동호가옥은 후손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중국에서 사업을 하게 되면서 조형식 선생이 2013년에 매입하여 2014년부터 한국관광공사 인증 우수한옥체험숙박시설인 한옥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중요 민속문화재 제154호로 지정된 양승수가옥이라고도 불리는 학재고택은 양승수선생의 손자가 관리하고 있는데 2017년 7월30일부터 2017년 9월30일까지 문간채 지붕 해체보수 작업 중이다.
전라남도 화순 종가 여행
화순제주양씨학포공파 학포종가 학포부조묘
전남 화순군 도곡면 달아실길 20-5 (월곡리 56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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