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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重修竹樹書院記▣ [영암군수 현주공 조찬한記]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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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修竹樹書院記[綾城靜庵先生書院]

我東之偏且荒久得箕子人始人而箕子之沒二千有餘年矣遺化幾盡索矣斯文幾盡熄矣天乃瞿然眷顧遂生先生以振作之先生生而殉 道自任方中廟勵治之日以朝夕啓沃堯舜我君民爲己責而奸孼傍 構織罔極駭機一發禍網滔天竟竄于茲土不數月而賜死嗚呼先生之被禍其先生之不幸歟其一國一世之不幸歟非先生之不幸乃一國一世之不幸非一國一世之不幸乃我東千萬世無窮之不幸也始天之生先生如有意於我東而竟天之禍先生亦有意於我東生之 者何意而禍之者何意歟蒼蒼乎昧昧乎而不可問而知者非天歟苟 天之佑我東展之以其才享之以其年則所漸者益深所化者益遠矣其爲治化雖不逮於唐虞必不止於今日無疑而非唯不克施竟使不得非唯不得年竟使不得其死則環我東數千里慕而悲者何限而竟 謫于茲土竟沒于茲土則茲土之悲且慕又不啻一國之悲慕旣悲且 慕而築斯院以享之則斯院之築非他州郡築院之可方非鄕先生歿 而可祭者比直與文宣之祀亘萬世而同血矣自仁廟克述先志逮宣 廟而痛滌其斯院之創已有年紀而自火于丁酉之亂廂廡齋廬權創卑略無以肅祀妥靈者十五餘年任其蕪沒而不振曁我侯尹公燧臨民之初慨然以右文爲事思克重敞而未有遂余兄南平縣監趙公維面尹侯曰先生之院若是其陋側非吾與君之羞乎君爲而我爲

尙未克顯侈者人謂公何人謂我何哉卽與通文道內構工繕修而南平實幹之於是旁州列邑無不向風委財以董其役而余之得靈 邑也後不及豫於執事之列惟彼凡人下士尙且悲慕先生況吾兄弟乃先生之姓孫而向學悲慕之誠又出尋常萬萬者乎以主之勤南平幹而能助也不日而功訖蓋其背山面水而紆餘敞赫者先生之盛德遺澤瞻前而在後也榮桷楣不侈不隘丹雘刻合規依度者先 生之威容動靜無不中禮也壘勺籩荊䇺簦各得其品者先生 之遺敎循序也濟濟多士循除鞠躬居常講習祀卽虔惕者先生之餘 化感發也茲足以薰先生之德而沐先生之澤歟遵先生之敎而襲先生之化歟雖然先生之靈如水在地無往而不屆則其感而興起者獨茲院之士而已豈獨茲土之民而已乎靈巖郡守趙纘韓萬曆四十一年八月日

▣죽수서원중수기 -능주 정암선생 서원-▣

우리 동방은 오랫동안 치우치고 거칠었는데, 기자를 얻은 뒤로 사람이 비로소 사람답게 되었다. 그러나 기자가 죽은 지 이천여 년이 지나니 남긴 교화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으며 사문(斯文)도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 하늘이 이에 두려워하여 우리나라를 돌아 보고 드디어 선생을 탄생시켜 사문을 진작시켰다. 선생은 태어나 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자임하여 바야흐로 중종이 정치에 애쓰던 시기에 아침저녁으로 계도하여 우리 임금과 백성을 요순 같은 임금과 요순시대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그러나 간흉들이 옆에서 틈을 엿보다가 더할 나위 없이 치밀한 흉계를 만들어 해기(駭機)89가 한번 발동하자 재앙의 그물 이 하늘까지 덮었으니, 선생은 마침내 이 고을에 귀양 와서 두어 달이 지나지 않아 사사(賜死)되었다. 아아, 선생이 재앙을 당한 것은 선생의 불행인 것인가, 한 나라 한 시대의 불행인 것인가. 선생의 불행이 아니라 바로 한 나라 한 시대의 불행이요, 한 나라 한 시대의 불행이 아니라 바로 우리 동방 천만 대의 무궁한 불행 이다.

 

처음에 하늘이 선생을 탄생시킬 때 우리 동방에 뜻을 둔 것 같았는데, 끝내 하늘이 선생에게 재앙을 내린 것도 또한 우리 동네에 뜻을 두어서이다. 태어나게 한 것은 무슨 뜻이며 재앙을 내 린 것은 무슨 뜻인가. 푸르르고 어두컴컴하여 물어도 대답을 들 을 수 없는 것은 하늘이 아닌가. 만약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주 려 하여 그의 재주를 펼치게 하고 제 수명을 누리게 하였다면, 점 차로 교화를 이룬 것이 더욱 심원하였을 것이다. 그 치화(治化)가 비록 당우(唐虞)에는 미치지 못하였겠지만 반드시 오늘 같은 현 실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다만 재주를 펼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끝내 제 수명도 누리지 못하 게 하였으며, 다만 제 수명도 누리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끝내 제 대로 죽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우리 동방 수천 리 온 강토에서 존 모하며 비통하게 여기는 자를 어찌 한량(限量)하랴. 마침내 이 지 역에 귀양와서 끝내 이 지역에서 죽었으니, 이 지역 사람들의 비 통과 존모는 또한 한 나라의 비통과 존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미 비통하고 존모하여 이 서원을 지어 제사를 지내니 이 서원의 설립은 다른 주군(州郡)에서 서원을 설립한 것과 비교할 수 없으 며, 향선생(鄕先生)이 죽어서 제사 지낼 만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다만 문선왕(文宣王) 공자의 제사와 더불어 만 대를 지나도 함께 혈식(血食, 제사)을 받을 것이다.

 

인종이 선왕의 뜻을 잘 받들었고 선조에 이르러 그 원통함을 깨끗하게 씻어버렸으니, 이 서원이 건립된 것도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러다가 정유재란에 불에 타버려서 행랑, 동서무, 재 각, 숙소 등을 임시로 대강 건립하였기에 십오여 년을 엄숙히 제 사 지내 영혼을 모시지 못하고 잡풀에 덮인 대로 놔두어 진작시 키지 못하였다. 우리 목사 윤수(尹燧) 공이 백성을 다스리던 초기 에 개탄하며 학문을 우대하는 것을 중시하여 중건을 생각하였으 나 완수하지 못하였다. 나의 형님 남평 현감 조유한(趙維韓)이 윤 목사를 만나서 “정암 선생의 서원이 이처럼 누추해졌으니 나와 그대의 수치가 아닙니까. 그대가 수령이 되고 내가 이웃 고을에 있는데 아직도 현양하여 화려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공 (公)은 무엇 하는 사람이며 나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할 것입니 다.”라 하였다. 곧바로 도내(道內)에 통문을 띄워 건물을 짓고 수 리하였는데, 실로 남평현감이 주관하였다.

 

이에 이웃의 여러 고을에서 소식을 듣고 재물을 내어주어 그 일을 진행하였는데, 내가 영암의 군수가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라 당시에는 미처 집사의 반열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 평범 한 사람과 낮은 선비라도 오히려 선생에 대해 비통하고 존모하는 데, 더구나 우리 형제는 바로 선생의 족손으로 선생의 학문에 대 하여 비통하고 존모하는 정성이 일반적인 수많은 사람보다 훨씬 깊음에랴. 목사의 부지런함으로써 남평 현감의 주관함을 만나 돕 게 되니 얼마 걸리지 않고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대개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한 넉넉한 공간에 높고 빛나는 이 서원은 선생의 성대한 덕과 남긴 은택이 앞에 보이는 듯 뒤에 있 는 듯하다. 처마, 서까래, 들보, 문미 등이 사치스럽지 않고 조잡하지 않으며, 단청과 깎아내고 새긴 것이 법도에 맞은 것은 선 생의 움직일 때와 고요할 때의 위엄스런 자태가 예절에 맞지 않 음이 없는 것과 같다. 술동이, 제기, 잔대, 술잔, 각종 대그릇 등 도 각각 품격에 맞은 것은 선생이 남긴 가르침을 차례대로 따르 는 것과 같다. 예의 바른 많은 선비들이 섬돌을 따라 몸을 굽히 며, 평소에 강론하고 익히다가 제사에 곧 경건한 것은 선생이 남 긴 교화에 감발한 것이다. 이에 충분히 선생의 덕에 훈화(薰化)되 고 선생의 은택에 무젖을 것이며,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고 선생 의 교화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영령은 물이 땅에 있는 것 같아서 가는 곳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감동을 받아 흥기한 자가 어찌 유독 이 서원의 선비일 뿐이겠는가, 어찌 유독 이 지 역의 백성일 뿐이겠는가.

 

영암군수 현주공 조찬한은 기를 쓴다. 만력 41년 8월 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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