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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조광조,학포양팽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 기해년▣여주 대로사비[大老祠碑]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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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28063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8길 19 
지번 청천면 청천리 산 7-1

홍재전서 제15/ ()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기해년

()이 명 나라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에 출생하여 숙종(肅宗) 기사년(1689, 숙종15)에 말명(末命)을 받았는데, 그해가 숭정(崇禎) 기원 62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 이렇게 네 왕조를 섬겼고, 관직은 의정부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고, 학자들이 우암 선생(尤菴先生)이라고 칭하고 있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뒤에 또 효종의 묘정(廟庭)에 추배(追配)되기도 했다. 공은 일찍부터 유학(儒學)에 종사하여 깊고 깊은 성명(性命)의 이치에 대해 침착하게 파고들어 그 원리를 터득했으며, 안팎으로 수양이 쌓였고 일동일정에 빈틈이 없었다. 적루(積累), 순숙(純熟)의 공정을 거쳐 그 효과가 강의(剛毅), 정밀(精密)로 나타났으며, 게다가 또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존중하여 자연의 섭리를 밝히고, 인간 질서를 바로하고, 중화를 정통으로 하고, 오랑캐를 배격하는 것을 자신이 할 일로 삼았던 것이다.

, 때가 바로 성하(城下)의 수욕을 당했던 때라서 우리 효종대왕이 그 영매한 자질로 자나 깨나 분발하여 그 수욕을 말끔히 씻어 볼 생각으로, 공을 조정(朝廷)에 진출시켜 유악(帷幄)에다 두고 모든 책임을 맡기면서 어느 누구도 그 사이를 엿볼 수 없을 만큼 서로 기밀을 유지하며 계획을 짜 나갔고, 공 역시 그 명을 받고는 몸과 마음을 다해 기어코 실효를 거두고야 말 계획이었던 것인데, 그 뜻을 펴기도 전에 선어(仙馭)가 갑자기 떠나 버린 것이다. , “하늘이 하신 일이거니 어찌하란 말인가.” 했던 옛말이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공의 유의(遺意)에 따라 공의 묘 앞에 비를 세우지 않았다. 그로부터 91년 후인 기해년(1779, 정조3)에 어느 신하가 과인(寡人)에게 아뢰기를, “옛날 제왕(帝王)들이 훈구(勳舊)를 기리기 위해 친히 빗돌에 글을 새긴 일이 있습니다. 더구나 선현(先賢)의 무덤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여, 내 공의 비면(碑面)에 글을 쓰고 이어 공의 사적을 서술했는데, , 그것이 이른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또 나로서는 그야말로 광세지감(曠世之感)이 있는 것이다. 공의 이름은 시열(時烈)이고,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며, 소년 시절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사사했는데, 선생의 학문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연원이라고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여기가 바로 문정이 잠들어 있는 곳이니 / 是惟文正之宅

뒷사람들은 경의를 가질지어다 / 後之人其可式

 

 

文正公宋時烈神道碑銘 幷序己亥

 

公生于大明萬曆丁未獲末命于肅祖己巳是崇禎紀元之六十有二年也事我仁祖孝宗顯宗肅宗四朝官至議政府左議政諡文正學者稱尤菴先生腏食文廟後又追配孝宗室廟庭公夙契儒者之學凡於性命蘊奧靡不潛究力賾外內交修動靜無間其用工也積累純熟其收效也剛毅精密又惓惓於春秋大義以明理正倫尊華攘夷爲己任嗚呼時則丁城下之羞惟我孝宗大王寤寐英豪奮發有刷恥之念進公于朝延寘帷幄俯勤仔肩之託密勿訏謨外人莫有得以知之者公亦受命屛營期效盡瘁之義而仙馭遽昇聖志未伸嗚呼所謂天實爲之謂之何哉者非歟公墓以公遺意封前不立石後九十一年己亥廷臣有言于寡人曰古帝王尙於勳舊躬爲之篆首况先賢之隧乎予乃書公碑面著爲文叙公之蹟嗚呼是謂有時存焉者乎又可謂有曠世之感也歟公名時烈系出恩津之宋少師文元公金長生長生之學自於文成公李珥云銘曰

是惟文正之宅後之人其可式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 | 1998

 

 

송자대전 권수 / 비명(碑銘)

어제 묘비명 병서 금상 기해년(1779, 정조3) 御製墓碑銘 幷序今上己亥

 

유명 조선국 좌의정 우암 송 선생의 묘[有明朝鮮國左議政尤菴宋先生之墓] - 어필로 비 앞면에 대자로 쓰다. -

 

공은 명나라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에 태어나 숙묘 기사년(1689, 숙종15)에 명을 마쳤으니 바로 숭정(崇禎) 기원으로 62년이 되던 해이다.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네 조정을 섬기어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학자들은 우암(尤菴) 선생이라 일컬었다.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후에 또 효종 묘정에 추배(追配)되었다.

공은 일찍부터 유학에 뜻이 맞아서 무릇 성명(性命)의 깊은 이치에 대해 잠심하여 연구하고 힘써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신 안팎을 모두 수양하여 행동할 때나 고요할 때나 차이가 없었으니 그 공부가 축적되어 순수하면서 완숙하였고, 그 효과는 굳세고 정밀하였다. 또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성심을 다하여 이치를 밝히고 인륜을 바로잡아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아아, 그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의 항복이란 치욕을 당한 때였다. 우리 효종대왕은 영특하고 호방한 자질로 밤낮없이 분발하여 설욕할 마음을 지니고 공을 조정에 등용해 가까이 맞아들여 두고서 무거운 짐을 맡겼으니, 긴밀한 계획을 바깥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공 또한 명을 받고 황공하여 목숨을 다해 보답하는 의리를 바칠 것을 기약하였으나, 성지(聖志)를 미처 펴 보기도 전에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

슬프다. “하늘이 실로 이렇게 한 것이니 말해 무엇 하랴.”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묘소는 공의 유의(遺意)대로 봉분 앞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그 후 91년이 지난 기해년(1779)에 조정의 신하가 과인에게 말하기를 옛날 제왕은 공을 세운 옛 신하를 높여 몸소 그를 위하여 빗돌 머리의 글을 쓴 일이 있는데, 하물며 선현의 무덤이겠습니까.” 하자, 내가 곧 공의 빗돌 앞면을 쓰고 글을 지어 공의 행적을 서술하였다. 아아, 이것을 두고 다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인가. 또 세상을 함께하지 못한 데 대한 감회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공의 이름은 시열(時烈)이고 계파는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다. 젊어서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사사하였는데 김장생의 학문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서 나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곳이 문정공의 유택이라 / 是惟文正之宅

후세인들은 공경할지어다 / 後之人其可式

 

御製墓碑銘 幷序今上己亥

 

御筆 有明朝鮮國左議政尤菴宋先生之墓 碑面大字

公生于大明萬曆丁未獲末命于肅祖己巳是崇禎紀元之六十有二年也事我仁祖孝宗顯宗肅宗四朝官至議政府左議政諡文正學者稱尤菴先生腏食文廟後又追配孝宗室廟庭公夙契儒者之學凡於性命蘊奧靡不潛究力賾外內交修動靜無間其用工也積累純熟其收效也剛毅精密又惓惓於春秋大義以明理正倫尊華攘夷爲己任嗚呼時則丁城下之羞惟我孝宗大王寤寐英豪奮發有刷恥之念進公于朝延置帷幄俯勤仔肩之托密勿訏謨外人莫有得以知之者公亦受命屛營期效盡瘁之義而仙馭遽昇聖志未伸嗚呼所謂天實爲之謂之何哉者非歟公墓以公遺意封前不立石後九十一年己亥廷臣有言于寡人曰古帝王尙於勳舊躬爲之篆首況先賢之隧乎予乃書公碑面著爲文序公之蹟嗚呼是謂有時存焉者乎又可謂有曠世之感也歟公名時烈系出恩津之宋少師文元公金長生長生之學自於文成公李珥云銘曰

是惟文正之宅後之人其可式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 | 2019

 

송자대전 권수 / 비명(碑銘)

어제 어필 대로사 묘정비명 병서 ○ 금상 정미년(1787, 정조11) 〔御製御筆大老祠廟庭碑銘 幷序○今上丁未〕

대로사비[大老祠碑] - 임금이 쓰신 전자(篆字)를 비 표면에 대자로 쓰다. -

천하의 큰 가르침 다섯 가지 중에 선현을 제사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현자는 교화가 흥기하게 되는 유래이니, 전향(羶薌)을 태운 향기로 그의 정기(精氣)에 보답하고, 빈번(蘋蘩)과 온조(薀藻)로 그의 덕에 보답하고, 보궤(簠簋)와 변두(籩豆)로 그의 문장에 보답하고, 정성스럽고 황홀한 마음으로 그의 공경에 보답한다. 그렇게 한 뒤에야 현자의 정령이 돌아보고 흠향할 것이다. 그러나 제사에는 반드시 의의가 있으니, 그 의의는 이뿐만이 아니다. 주공(周公)의 사당을 반드시 낙양에 세우고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사당을 반드시 영안(永安)에 가까이 둔 경우와 같은 것이니, 이것을 의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은 1000년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성인으로서 극심한 국가 위기를 만나 고달픈 백성들을 돌보면서 은밀히 궁중에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때 뜻이 맞는 신하가 있어 물고기와 물이 서로 의탁하듯이 하며 《춘추》의 도를 가지고 앞뒤에서 이끌어 주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왕을 따라 떳떳한 가르침으로 인도한 이가 바로 선정(先正) 송우암(宋尤菴)이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선정은 홀로 서서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왕릉을 여주(驪州)로 옮겨 모실 때 능 자리 가까이에서 송백(松柏)을 바라보고 눈물지으며 떠난 임금을 못 잊어 하는 마음을 부쳤기에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적하며 뜻이 맞았던 군신(君臣) 사이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선정이 떠난 지도 어언 100년이 되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공부하고 수양하던 곳, 학문을 전수받은 곳, 발자취가 머물던 곳에서 오직 선정만을 향사하기도 하고 배식(配食)하기도 하였으니, 도를 닦고 덕을 밝혀 현인을 높이고 보답하는 전례에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지적하던 여주의 그곳은 지난 을묘년(1735, 영조11)에 사우(祠宇)를 세우려다가 곧 조정 논의가 어지러워지는 바람에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무릇 사원(祠院)의 설립은 본래 옛날의 상서(庠序)의 유제에서 나온 것으로, 원(院)에 반드시 사우를 둔 것은 실로 미름(米廩)으로 고종(瞽宗)에서 제사하던 뜻을 취하였으니, 이 사람을 이곳에서 제사하는 것은 진실로 정밀한 의리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선정과 영왕(寧王 효종)의 관계는 주공이 성왕(成王)을 돕고 무후가 소열제(昭烈帝)을 보좌했던 것과 같으니, 어디에든 있는 영령이 단 하루라도 하늘을 오르내리시는 영왕의 신령 곁에 있으려 하지 않겠는가. 아, 다른 곳의 사당을 그만둘지언정 여주의 사당만은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즉위한 지 3년째인 기해년(1779)에 길일을 물어 영릉(寧陵)을 배알하고 여주 청심루(淸心樓)에 머물 때 많은 선비들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선정의 사우를 세우자고 간청하기에 즐거이 듣고 허락하였다. 7년 후인 을사년(1785)에 사우가 비로소 낙성되어 그제야 선정의 영령을 그 사우에 모시고 ‘대로사(大老祠)’라 명명하였다. 또 3년 후인 올해 정미년(1787)은 선정이 탄생한 지 세 주갑(周甲) 되는 해이기에 뜰에다 비를 세우고 그 제사 지내는 의의를 갖추어 이르는 것이다.

사우는 고을 관아에서 몇백 보 떨어져 청심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릉과의 거리는 2리 정도로 가깝다. 뒤로는 1000길이나 되는 낭떠러지의 우뚝한 학록(鶴麓)이 버티고 서서 지키고, 앞으로는 만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는 도도한 여강(驪江)이 휘감아 흐르며, 남쪽에는 하봉(霞峯)과 순택(蓴澤)이 손 모아 읍하듯 기이한 경치를 드러내고 있고, 북쪽에는 연탄(鷰灘)과 용문(龍門)이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듯이 둘러싸고 있으니, 그 자리의 뛰어난 형세가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이 더욱 빛을 내고 있다.

그렇지만 선정의 사우를 지키고 선정의 학문을 강론하는 우리가 진실로 해와 별처럼 빛나는 대의(大義)를 가슴에 새기고 낙민(洛閩)의 통서(統緖)를 살펴보고 감화되지 못하여 진퇴와 읍양(揖讓)을 하는 데 겉만 의젓하고 마음은 태만하거나 사시사철에 따라 시(詩)와 예(禮)를 익히는 데 시작만 부지런히 하고 끝에 가서 흐지부지해 버린다면, 어찌 그것이 선정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길이겠으며, 향사하는 의의도 거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자를 향사하는 것이 가르침이 되는 까닭은 그 의의를 생각하기 때문이니, 제생(諸生)은 그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불세출의 인재는 / 命世之出
반드시 성왕을 기다리는 법 / 必待聖王
명군과 양신이 기뻐하고 흥기하여 / 喜起明良
예로부터 한자리에 모였었지 / 自古一堂
우리 영인을 돕고 / 佑我寧人
우리 선공(先公)을 도와 / 錫我宗公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르듯 / 雲龍風虎
성대하게 법도에 부합하였네 / 蔚焉合章
저 중국 형세를 돌아보면 / 睠言神京
만사가 그저 답답할 뿐이라 / 萬事於悒
무엇으로 밝혀야 하겠는가 / 何以明之
《춘추》의 대의(大義) 수십 가지라 / 春秋數十
돌아가신 선왕을 붙잡을 길 없어 / 龍髥莫攀
담비 갖옷은 습의(襲衣)가 되었네 / 貂裘在襲
노신은 피눈물 흘리며 / 老臣血淚
여강에서 노를 젓노라니 / 驪江之楫
창오가 한눈에 들어와서 / 蒼梧入望
그 모습 잡힐 듯 가깝구나 / 耿光孔邇
산에는 개암이요 펄에는 도꼬마리라 / 山榛隰苓
그 누구를 그리는가 / 伊誰云思
남기신 자취 없어지지 않아 / 不沫遺躅
선비들이 유풍에 감동받아 / 風動多士
발자취가 머물던 곳마다 / 杖屨攸止
사우가 우뚝이 들어섰네 / 有祠特起
청심루 갠 하늘의 달빛이여 / 淸心霽月
선정의 덕스러운 모습과 비슷하구나 / 彷彿德容
학문은 주자의 학문과 부합하고 / 學符紫陽
연원은 율곡의 학통을 이었도다 / 派接栗翁
오직 곧을 직 자를 진결로 삼아 / 直字眞訣
몽매한 무리에게 은택을 끼쳤으니 / 衣被群蒙
이 세상 모든 군자들이 / 凡百君子
어찌 축종으로 삼지 않으리 / 曷不祝宗
한결같이 밝게 제사 모시니 / 一體明禋
백대를 두고 그 공이 빛나리라 / 百代敉文
전생의 인연으로 마음이 통하여 / 昭融宿契
길이 제향(祭香)을 가까이하게 되었네 / 長近苾芬
남달리 내가 광세지감 느낀 것은 / 偏予曠感
일찍부터 그 가르침에 심복해서라 / 早服典訓
이 비를 우뚝이 높이 세워 / 岌峙牲石
새긴 글 후세에 보여 주리라 / 刻示無垠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19

대로사(大老祠)라고 사액(賜額)하고 : 대로사는 경기도 여주(驪州)에 있는 사당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대로는 송시열의 존칭이다. 《일성록(日省錄)》 같은 날 기사에 송시열의 원우(院宇) 건립을 마쳤다는 경기 감사 서유방(徐有防)의 장계(狀啓)에 대해 정조가 “대로사로 액호(額號)를 정하라.”라고 하교하였다. 《日省錄 正祖 9年 9月 5日》    여주읍 하리 200-1번지

御製御筆大老祠廟庭碑銘 幷序今上丁未

御篆 大老祠碑 碑面大字

天下之大敎五。祀賢與居一焉。賢者。敎之所由起也。故燔燎羶薌。以報其精。蘋蘩薀藻。以報其德。簠簋籩豆。以報其文。洞屬恍惚。以報其敬。然後庶乎其顧歆焉。然祀必有義。其義則不寧是也。若周公之祠。必建于東洛。武侯之廟。必隣于永安。此之謂義。我孝宗大王。以千一之聖。値百六之運。懷保瘡痍之民。密勿帷幄之謨。而時則有同德之臣。契托魚水。道秉春秋。用能先後疏附。迪彝敎於窮宙。卽先正宋尤菴是已。及夫孝廟賓天。先正獨立無所歸。當仙寢之移奉于驪也。嘗密邇珠丘。泣瞻松柏。以寓其烏號不忘之思。人到今指點其地。而想君臣之際矣。今去先正之沒。且一百年。其生長之鄕。藏修之處。淵源之所自來。杖屨之所曾遊。或專享。或配食。以修以明。殆無憾於崇報之典。惟是驪上指點之地。刱祠於乙卯間。旋爲朝議之橫潰。毀撤而止。夫祠院之設。本出庠序之遺制。院必有祠。實取於米廩之祭瞽宗。則是人之祀是地。固莫不有精義存焉。況先正之於寧王。亦周公之相成王。武侯之佐昭烈。其如水在地之靈。尙肯一日不在於於昭陟降之傍乎。嗚呼。他祠寧可已。驪上之祠。不可以不設也。予於踐阼三年己亥。諏吉祇謁于寧陵。駐驆于驪之淸心樓。多士齊籲。以先正之祠爲請。予樂聞而許之。後七年乙巳。祠始成。乃妥靈于祠。命名曰大老祠。越三年丁未。以先正降生之三周甲。豎碑于庭。具道其祀之之義。祠在州治數百步淸心樓西。距寧陵二里而近。鶴麓鎭其背。巖巖千仞之壁立。驪江控其襟。滔滔萬折之必東。南有霞峯蓴澤。拱揖以呈奇。北有燕灘龍門。繞繚以爭姸。地之形勝。若有待而益章焉。雖然。凡我守先正之祠。講先正之學者。苟不能服膺乎日星之義。觀感乎洛閩之統。進揖退讓。色莊而心慢。春詩冬禮。始勤而終怠。則豈所以體先正之敎而祀之義不幾泯乎。祀賢之所以爲敎者。思其義也。諸生勉乎哉。遂爲之銘曰

命世之出。必待聖王。喜起明良。自古一堂。

佑我寧人。錫我宗公。雲龍風虎。蔚焉合章。

眷言神京。萬事於悒。何以明之。春秋數十。

龍髥莫攀。貂裘在襲。老臣血淚。驪江之楫。

蒼梧入望。耿光孔邇。山榛隰苓。伊誰云思。

不沫遺躅。風動多士。杖屨攸止。有祠特起。

淸心霽月。彷彿德容。學符紫陽。派接栗翁。

直字眞訣。衣被群蒙。凡百君子。曷不祝宗。

一體明禋。百代敉文。昭融宿契。長近苾芬。

偏予曠感。早服典訓。岌峙牲石。刻示無垠。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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