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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조광조,학포양팽손◑

정암 조광조, 삶에서 이상까지 특별전!!!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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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夫人   贈貞敬夫人李氏祔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    經筵

成均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

府領議政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

秋館觀象監事文正公靜庵趙先生之墓

http://www.newstow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29

 

정암 조광조, 삶에서 이상까지 특별전 - 뉴스타워

최영성(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교양교육원) 이상성(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 교수 진행 용인시 용인문화유적전시관은 오는 10월 12일(토) 오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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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삶에서 이상까지 특별전!!!

전경만 기자 | 승인 2013.10.10 08:26

최영성(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교양교육원)
이상성(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 교수 진행

용인시 용인문화유적전시관은 오는 10월 12일(토) 오후 2시부터 ‘정암 조광조, 삶에서 이상까지’ 특별전을 기념해, 용인역사인물 조광조의 삶과 사상을 되짚어 보는 강연회를 개최한다.

정암 조광조는 향약을 실시해 향촌사회에서도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하고, 소격서 폐지, 현량과 실시 등을 실행한 인물이다. 그의 개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정국공신 중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공신호를 박탈하는 위훈삭제를 단행했다.

이러한 개혁 정치는 유교적 도학(道學)을 실천에 옮긴 올곧은 선비의 정신이었으나 기득권을 쥐고 있던 훈구파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바로 기묘사화로 이어져 조광조의 개혁도 이것으로 끝나는 것 같았으나 후대에 사림의 영수로 추앙되고 도학의 태산북두라 평가받으며 조광조의 이상은 점차적으로 실천되어 왔다.

이번 강연회는 1, 2부로 나누어 진행되며, 1부 ‘한국정신사에서 정암 도학의 위상’(최영성, 한국전통문화학교), 2부 ‘정암 조광조의 삶과 이상’(이상성, 성균관대학교)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한국철학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교양교육원장 겸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유학통사’, ‘한국의 학술연구’, ‘한국철학사상사’외 다수가 있다.

이상성 교수는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 초빙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정암 조광조의 도학사상’, ‘조광조-한국도학의 태산북두’가 있다. 정암 관련 논문으로는 ‘정암 도학의 존재론적 특성’, ‘정암 도학의 역사적 정체성’, ‘정암 조광조의 의리사상’, ‘정암 조광조의 정치지도자론’,‘정암 도학의 종교적 특성’, ‘정암 도학의 교육적 특성’, ‘조광조 도학의 이념적 순정성과 감성의 문제’등이 있다.

전경만 기자  jkmcoma@hanmail.net

출처: https://sugisa.tistory.com/15720042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https://blog.naver.com/ssseoulss/223162982059

 

"정암 조광조 선생 스승님 묘지 신도비 심곡서원 장맛비에 살펴 보았습니다. 제자 평정 지영환"

2023년 7월 북마스터소개글 조광조, 장렬하다! 지영환 역사소설『조광조 별』. 주인공 조광조는 조선 중종 ...

blog.naver.com

[마스터소개글]

조광조, 장렬하다! 지영환 역사소설『조광조 별』. 주인공 조광조는 조선 중종 시대에 활약한 정치가이다. 도덕적 이상 정치를 펼치려다 보수 세력과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끝내 사사되고만 진보적 성격의 성리학자겸 혁명적 정치가로, 당대 최고의 관료에서 사약을 받기까지 그의 정치적 신념과 일생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중종실록이라는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당대 정치적 풍토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북출판사 서평]

조광조 별’의 특장점 : 중종실록을 바탕으로 역사적 고증을 더했다 ‘조광조 별’은 역사소설 세계에 한 획을 그은 의미 있는 소설이다. ‘중종실록’이라는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당대 정치적 풍토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이 소설의 백미다.

▶주류 평론가가 극찬한 탄탄한 스토리! 현재 문단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이미 기성 문인들에게 작품성을 검증받은 바 있다.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실록을 탁월한 해석과 생생한 묘사로 이야기를 풀어낸 저자의 글재주가 돋보인다. ‘조광조 별’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광조의 일생을 돌아보며 오늘날 우리가 삶에서 진실로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1519년에 사약을 마시고 별세한 대석학 정암 조광조는 한국정신사의 순금부위로 평가 받아 수백 년 간 그 빛이 사위지 않는 불멸의 존재 중 한 사람이다. 시인 지영환은 치열한 소명감으로 그를 추적하고 탐색한 끝에 소설『조광조 별』을 펴내었고, 나는 이 작품을 원고 상태에서 읽으면서 감동과 전율에 휩싸였음을 고백한다. 탁월하고 앞서가는 지성들이 당대에선 고립되고 탄압받았으나 후세의 유구한 세월에 있어 거듭 찾아지고 추앙받아 능히 겨레의 불빛과 양식이 되어온 그 하나의 사실을 정제된 문장으로 담아 낸 조광조 일대기 ‘조광조 별’이 부디 수많은 사람의 가슴 속으로 귀하고 절실하게 영입되기를 온 마음으로 소망한다.

  1. - 김남조(국민원로회의 공동의장·시인·대한민국예술원 회원·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역사소설이란 무엇이던가?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뿌리와 줄기로 하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재창조한 문학의 한 갈래이다 지영환의 ‘조광조 별’은 바로 그러한 대체 역사소설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조광조, 그는 또 누구이던가? 조선 중종 조, 도덕적 이상 정치를 펼치려다 보수 세력과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끝내 사사되고만 진보적 성격의 성리학자겸 혁명적 정치가가 아니었던가. 지영환의 이 작품은 진행형 인물로서 조광조의 삶과 비극을 통해 역사란 과연 무엇이고, 진실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이 바람직한 인간의 길이고 가치 있는 삶의 길인가를 묻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작가 자신이 자신의 직업 자체에 충실하면서도 꾸준히 문학의 길, 학문의 길, 새로운 창조의 길로 나아가려 노력하고 있는 진행적, 형성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조광조별’은 작가에게 하나의 상징적 멘토일 수 있으리라. 이 점에서 지영환의 ‘조광조 별’은 오늘날과 같은 급변의 시대, 격동하는 전환기에 처한 우리 모두에게 한 역사의 거울이자 현실의 반영이고,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시금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 김재홍(문학평론가 ·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광조 별’은 인물탐구서이다. 사실(史實)과 고증을 토대로 조광조의 성리학적 이상 국가 건설의 꿈과 개혁과정을 살피고 있다. 조광조의 꿈은 실패로 끝난 듯했지만, 우리는 이 작품에서 그의 부활을 확인한다. 수백 년 세월을 뛰어넘어 선현과 교제하며 그 일편단심의 꿈을 ‘별’로 내면화한 작가 지영환의 진면목도 엿볼 수 있다. 꿈을 계승한 이들의 아름다운 꿈! 그 꿈의 ‘나비효과’를 기대해 볼 만하다.

- 차준영(세계일보 편집국장 · 現 경영지원본부장)

세계일보 사장

 

조선 중기 풍운의 정치가 조광조의 공직 개혁 의지를 되살려낸 작가의 열정이 놀랍다. 500년 전의 역사가 소설 ‘조광조 별’을 통해 이토록 오롯이 비춰지고 있으니 말이다. -구본영(서울신문 편집국 수석부국장 · 現 수석논설위원) 시인, 박사에 이어 소설가란 또 하나의 타이틀을 추가한 지은이의 글을 읽는 맛이 예사롭지 않다. 딱딱하지 않게 그러나 진중하게……. 조광조와 그의 꿈을 반추하게 한다.

-정환보(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수도권I] [라이프 인 경기] "낮잠 자다 꿈속에서 옛 선비를 만난 게 계기" (chosun.com)

 

[수도권I] [라이프 인 경기] "낮잠 자다 꿈속에서 옛 선비를 만난 게 계기"

수도권I 라이프 인 경기 낮잠 자다 꿈속에서 옛 선비를 만난 게 계기 라이프 인 경기 역사소설 조광조 별 출간한 지영환 경위 그의 삶과 비극을 현대인에 물어 틈 나면 공부 석·박사 경관 3만권

www.chosun.com

"2005년쯤 광교산 아래에 16.55㎡(5평) 크기 주말 농장을 분양받아 쉬는 날이면 찾곤 했다"며 "어느 날 농장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속에 갓 쓴 선비가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위엄이 있었다"고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주말농장 근처를 둘러보다 불과 70m 정도 떨어진 곳에 조광조의 묘와 신도비(神道碑·종2품 이상의 관원 무덤이 있는 큰 길가에 세운 석비)가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꿈속에 나타난 선비가 조광조 선생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며 "정치학을 공부했고 국가적 업적을 이룬 인물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조광조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집필 활동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막상 집필을 시작하자 조광조의 일생을 소설로 써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조광조가 역사 인물인만큼 작가의 상상력과 역사 왜곡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그는 중종실록에서 중종과 조광조의 대화를 그대로 소설화하기도 했고, 조광조를 다룬 책들을 모두 참조해가며 소설에 일일이 참고문헌에 대한 각주를 달았다.

그는 "일반 소설에서 참고문헌에 대해 세세하게 각주를 표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며 "비록 출판사와 협의 끝에 출간 때는 각주 부분을 많이 빼긴 했지만 소설의 정확성을 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김재홍(63·경희대 국문과) 교수는 "'조광조 별'은 조광조의 삶과 비극을 통해 역사·진실·가치있는 삶 등에 대해 묻고 있다"며 "작가도 창조의 길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진행형 인물이라는 점에서 조광조가 상징적 스승일 수 있다"고 말했다.

5년 만에 첫 소설을 완성한 그는 이미 두번째 역사소설인 '광개토대왕'을 쓰고 있다. 모두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소설은 현재 4권까지 집필을 끝낸 상태다.

 

[출처] "정암 조광조 선생 스승님 묘지 신도비 심곡서원 장맛비에 살펴 보았습니다. 제자 평정 지영환"|작성자 지영환 JI YOUNG HWAN

[출생 및 관직]

본관 한양(漢陽). 자 효직(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사림파의 거두로 역할]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파와 정쟁]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다. 위훈삭제가 단행된 이후 사흘만의 일이었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조광조의 사상과 영향]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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