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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조덕린)선생문집1,2,3권▣
<1권목차>
1. 해제
玉川 趙德隣의 시문집. 18권 9책. 목판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연대와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문집에는 방대한 양의 詩와 편지, 그리고 상소문과 행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저자가 유람하면서 본 경치와 저자의 심회를 읊은 것들도 있지만, 輓詩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행장도 많이 집필하고 있다. 그가 쓴 만시와 행장을 보면 당시 소론과 남인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는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이들을 분석해도 마찬가지이다. 洪宇遠, 洪萬朝, 權大運, 李徽逸, 金邦杰, 沈檀, 李眞望, 權榘, 李光庭, 金聖鐸, 李栽 등이 그들이다. 아울러 편지에는 朴師洙·吳命恒·朴文秀 등 무신란을 평정하기 위해 활약하던 정부 관리들과 적정의 동태에 대한 토론과 토벌에 관해 구체적으로 상의한 내용까지 담고 있다. 이외에 저자가 지은 행장과 묘갈명 등을 보면 당시 남인의 주요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상소는 대부분 사직소인데, 특히 1725년에 올린 「辭司諫院司諫疏」가 주목된다. 이 상소는 이후 중앙정계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아울러 저자로서는 영욕이 함께한 상소이기도 하다. 소론과 남인 사이에서는 정도를 걸은 인물로 평가되는 반면, 노론 측으로는 극히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처럼 『옥천집』을 보면 노론과 소론·남인 간의 정권교체와 갈등이 극심한 시기에 저자가 차지했던 정치적 위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李旭)
1658∼1737(효종 9~영조 13). 字:宅仁, 號:玉川·滄洲, 本貫:漢陽, 父:頵, 母:豊山柳氏, 居:英陽.
어려서 부친이 별도로 지은 學舍에서 맏형과 함께 공부하였고, 葛庵 李玄逸에게 사사하였다. 1678년(숙종 4) 진사에 올라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당시 柳世鳴은 당대의 好學者로 저자 형제를 꼽았고, 權大運은 저자를 당대 최고의 학자로 칭송하였다. 이후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08년 江原道 都事가 되어 현실에 맞는 量田을 감사에게 건의하였다. 1721년 양역변통논의가 진행될 때에는 양역 변통 이전에 재정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1725년 司諫의 관직을 사양하면서, 저자가 생각하는 당면 과제 10가지 조목을 상소하였는데, 당시 정국과 관련해 민감한 사안(신임의리와 영조의 처신 등)을 다루었다가 종성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이 일어남으로써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에 3년간의 유배가 끝나고 30여세의 나이로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 3월 戊申亂이 일어나자 嶺南上道號召使에 제수되어 의병을 규합하였다.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었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후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滄洲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 노론에 의해 다시 한 번 1725년의 상소와 연관되어 탄핵을 받아 추국을 당하였으나 결국 무죄라는 판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제자들이 저자의 무고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졸하였다. 부인 안동권씨와의 사이에 3남 1녀가 있다. 1725년의 상소는 소론들이 재집권을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일으켰던 亂言·壁書事件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玉川集』 18권이 있다.
2. 1권
- 시
3. 2권
- 시
4. 3권
- 소, 양조 교 비 연설, 전문, 장
5. 색인
6. 영인
<2권목차>
1. 5권
- 서
2. 6권
- 서
3. 7권
- 잡저, 서
4. 8권
- 기, 발, 명
5. 9권
- 상량문, 축문, 제문, 애사
6. 10권
- 비, 묘갈명
7. 색인
8. 영인
<3권목차>
1. 11권
- 묘갈명
2. 12권
- 묘갈명
3. 13권
- 묘갈명
4. 14권
- 묘표, 묘지명
5. 15권
- 행장
6. 16권
- 행장
7. 17권
- 행장
8 18권
- 부록
9. 색인
10. 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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