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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용주연보(龍洲年譜)2014.9.15.발행인 조철원(趙鐵元), 용주연구회(龍洲硏究會)▣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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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연보(龍洲年譜)2014.9.15.발행인 조철원(趙鐵元), 용주연구회(龍洲硏究會)▣

■이 연보는 조선왕조실록과

한양조씨 교공이 엮은 용주공 연보,

미수 허목 선생이 지은 문간공 도비명 등을 참고하여 정리함,

동일 사안에 대하여 연대가 다른 것은 공적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우선함.

 

1586 선조(宣祖) 19년 10월 6일한양 숭교방(崇敎坊) 흥덕동(興德洞, 현 명륜동)에서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휘 翼男)과 어머니 문화(文化) 유씨(柳氏)와의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

자 일장(日章), 호 용주(龍洲).주봉(柱峯).

1590( 5세) 학문(學問)을 시작.

1592( 7세)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족을 따라 홍천을 거쳐 거창으로 피난.

1593( 8세) 할머니 전주(全州) 이씨(李氏) 거창에서 별세.

1595(10세) 소학(小學)을 읽음.

1596(11세) 할아버지(吏判公, 휘 玹) 임실(任實) 현감(縣監)에 임명,

(工曹)좌랑(佐郞)으로 전임, 직산(稷山) 현감(縣監) 부임.

1598(13세) 어머니 문화 유씨 거창에서 별세.

1600(15세) 새 어머니(繼母) 진천(鎭川) 송씨(宋氏) 영입.

1602(17세) 안동김씨(安東金氏, 吏判 孝獻公 瓚<1543~1599>의 따님)와 결혼

1603(18세) 장녀(후에 縣監 李惟楨에 출가) 출생.

1604(19세) 할아버지 직산 현감 사임.

1606(21세) 할아버지 64세로 별세.

1608(23세) 차녀(후에 正郞 李惇臨에 출가) 출생.

1609(24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대제학(大提學)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가르침을 받고 사기(史記)를 읽음.

1612(27세) 사마시(司馬試) 급제, 성균관(成均館) 입학.

1613(28세) 아버지 거창에서 별세, 포천으로 장례모심.

구 유복자(遺腹子)로 출생.

※ 부친 찬성공이 돌아가시기 전 우환 중에 홍시를 찾았으나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공(公)은 생전에 감을 잡숫지 않았고

가신 후에도 공의 양위분 제사에는 지금까지 감을 쓰지 않고 있음.

1616(16세)부친상 3년간의 여막(廬幕)생활을 마치고 성균관에 복학하였으나

이이첨이 광해군의 폭정에 동조, 국사가 어지러워지자

이이첨을 바른길로 이끄는 것이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여러 번 직언(直言)하였음에도 듣지 아니함으로 할 수 없이 그와의 연(緣)을 끊고

과거도 안 볼 결심으로 성균관을 나와 거창에 은거(隱居).

 

1617(32세) 포천에 성묘(省墓).

1618(33세) 3녀(후에 生員 李井徵에 출가) 출생.

1621(36세) 거창 장발촌에서 아드님(휘 威鳳, 應敎公) 출생.

1623(38세) 인조반정 후 초야(草野)의 지조와 재주가 있는 학사(學士)들을 발탁할 때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고창(高敞) 현감(縣監)과

경상도사 (慶尙都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음.

1624(39세) 이괄(李适)의 난(亂)에 임금을 모시고 공주(公州)까지 갔다가

환도 후 형조(刑曹) 좌랑(佐郞)을 거쳐 목천(木川) 현감(縣監) 부임.

1626(41세)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 정언(正言).헌납(獻納) 제수

1627(42세) 사서(司書)로 있을 때 금(金)나라 군사가 침입(胡亂)하여

호패법(戶牌法)으로 민심이 혼란하여지자 문학(文學) 김육(金堉)과 더불어

이를 폐지할 것을 상소하여 호패법을 폐지하게 되었음.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播遷)하고

세자(世子)는 육지에서 군사를 무마케 하였는데 公이 세자를 모셨음.

1629(44세)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황해도 지방의 민정(民情)을 살핌.

1631(46세) 지례(知禮) 현감(縣監) 부임.

1632(47세) 조카 위명(威明, 松泉公) 거창에서 출생.

1634(49세) 사간(司諫)을 배수하고 정온(鄭蘊)의 무죄를 상소.

1635(50세) 집의(執義), 문천군수(文川郡守), 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호남지방의 암행어사로 나감.

1636(51세) 좌의정(左議政) 홍서봉(洪瑞鳳)이 이대하(李大廈)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비리(非理) 등에 대하여 상소.

병자호란으로 호적(胡賊)이 한양까지 침입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 당하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 항전(抗戰)을 독려.

1637(52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渡, 송파 나루)에서 청(淸) 태종(太宗)에게 항복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끌려가고서야 환궁(還宮).

조정에서는 청과의 화친에 반대한 공과 정온(鄭蘊) 등

척화10신(斥和十臣)에 대한 논죄(論罪)가 있었으나

도승지(都承旨) 이경석(李景奭)의 계주(啓奏)로 무사.

1638(53세) 흥해(興海) 부사(府使)로 나감.

1640(55세) 인조가 불렀으나 어머니 병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10조소(十條疏)를 올림

동생 구(糸侯)가 한양에서 27세로 요절(夭折).

1643(58세)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재임 중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13차)임명.

일본 통신사행(通信使行)은 1413년 시작. 사행(使行)의 목적은 조선측은 우호유지,

청조(淸朝) 견제(牽制), 국정(國情)의 탐색(探索)이었고

일본측은 가강(家康)의 탄생 축하와 일광묘(日光廟)의 증축이었음.

통신사행(通信使行) 477명은 4월 27일 부산을 출발, 11월 8일 귀국하였음.

일인(日人)들이 크게 환대하며 온갖 기교하고 음탕한 희롱을 베풀어

환심을 사려 했으나 공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고

관청에서도 선물공세를 폈으나 모두 물리쳐 일인들이 그 결백에 탄복하였음.

특히 일왕(日王)과 덕천정권(德川政權)은

공의 탁월한 학문(學問)과 시문(詩文)에 감동하였고

공은 기행문인 동사록(東槎錄)을 남겼음.

 

※ 일본의 여성 사학자 오다끼 기요꼬(大瀧晴子)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특이하게 청백했던 인상을 느낀 公의 행적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중

1984년 가을 공의 11세손 학윤(學允)씨의 초청을 받고 3박 4일간 문간공 묘소,

별묘別廟), 용연서원 (龍淵書院) 등을 참배하였음.

 

1644(59세)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김제(金提) 군수(郡守)를 거쳐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아갔음.

공은 홀로 된 계수(季嫂), 어린 조카(松泉公, 威明 12살)와 차마 떨어질 수 없어

조정에 청하여 허락을 받고 함께 임지로 갔으나

이때 평소 公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던 판관(判官)이

딸린 식구가 많다는 것을 방백(方伯, 觀察使)에게 일러 바쳐

구설(口舌)을 피해 부임한지 18일만에 사직하고 아산으로 갔음.

1645(60세)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제수.

1646(61세)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형조참판(刑曹參判), 이조참판(吏曹參判),

도승지(都承旨),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배수하고 사양소(辭讓疏)를 올렸으나 윤허를 못받음.

1647(62세) 형조판서(刑曹判書)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음.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내의제조재성청당상(內醫提調裁省廳堂上),

김자점이 죄(罪)로 정승에서 파직되자

공이 복상(卜相, 정승될 사람을 가려뽑아서 추천)되었으나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됨.

1649(64세) 인조 승하, 효종 즉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국장도감(國葬都監)과

장릉(長陵, 인조의 능)의 지문(誌文)을 찬술(撰述).

1650(65세) 장릉지문에 청(淸)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았으므로

청(淸)나라의 압력과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義州)의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安東) 김씨(金氏) 과천에서 별세.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간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을 다시는 조정에 서용(敍用)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귀양살이에서 풀어주라”는 황제의 허락을 전해 왔음.

1651(66세) 백마산성 유배에서 귀환. 신묘 삼권보(辛卯 三卷譜)의 서문을 씀.

1653(68세) 봉친(奉親)을 위하여 회양(淮陽) 군수(郡守)로 나감.

1655(70세) 기로소(耆老所)에 듬.

1656(71세) 효종이 여러차례 월봉(月俸)과 물자를 하사하였으나

책무없이 녹봉(祿俸)을 받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사양하였음.

조카 위명(威明)을 데리고 파주 양경공(良敬公) 묘소 성묘.

1659(74세)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여 효종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음.

1661(76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받고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림.

옥책문(玉冊文, 王이나 王后의 尊號를 올릴 때 德을 칭송하는 글)지을 것을 하명 받음.

1666(81세) 66년간 지성으로 모셨던 계모 진천 송씨 별세.

1669(84세) 현종(顯宗) 10년 2월 5일 졸(卒). 조정 2일간 휴정(休廷)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기록

“청문고절(淸文苦節)로 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총재(冢宰)의 지위에 올랐고 문형(文衡)을 지냈는데,

경인년에 청나라에 죄를 받아 서쪽 변방으로 유배 후, 청의 서용금지.

부모 봉양을 위하여 회양(淮陽) 군수(郡守)를 청하여 나갔는데

얼마 후 포천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나이 80세에 상(喪)을 당하였으나 남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예를 수행.

고령으로 품계가 승급되었고 음식물의 하사도 있었는데

이때 나이 84세로 졸(卒)하였다.

조경의 문장은 고상하면서도 기운이 넘쳐 고문에 가까웠으며,

그의 맑은 명성과 굳은 절개는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린 일 때문에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림을 받아 간사하다고까지 지목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사인(邪人)이 정인(正人)을 간사스럽고 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금상(今上) 병진년(丙辰年) 현종(顯宗)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1676(숙종 2)년 3월 6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어

10월4일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고

1695(숙종 21)년 7월 11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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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簡公은 누구인가.

 

문과 장원 급제한 문형

좌천·강등·하옥돼도 직간한 청백리

문간공 휘 경(絅)은 한양조씨의 13세조로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峯)이다.

1586년(선조 19년) 10월 6일 한양 숭교방 흥덕동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후에는 모계(茅溪) 문위(文緯)의 문인(門人)으로

1612년(광해군 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광해조(光海朝)의 난세(亂世)에 과거와 벼슬을 단념하고 1616년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고창(高敞)현감(縣監)과 경상(慶尙)도사(都事)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亂)이 평정된 후

형조(刑曹) 좌랑(佐郞)과 목천(木川, 현 천안) 현감(縣監)을 지냈다.

 

162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정언(正言)ㆍ헌납(獻納)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播遷)하고 조정에서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持平)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조(吏曹) 정랑(正郞), 해서(海西)ㆍ호남(湖南) 지방의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간(司諫)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집의(執義)로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淸)나라 군사를 격퇴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문관 전한(典翰) 재임시인 1643년 2월부터 11월까지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오사카(大阪)와 에도(江戶)에서 왕명(王命)을 전하면서

일인(日人)들의 간교한 환대를 물리치고

일왕(日王)과 도쿠가와(德川)정권을 탁월한 시문(詩文)으로 감동시켰다.

1645년부터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홍문관ㆍ예문관 대제학(大提學),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좌참찬(左參贊), 좌찬성(左贊成)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이조판서 재임시 이도(吏道)를 쇄신하고 인재등용에 공정을 기하여 명망을 얻었다.

 

장릉(長陵)의 지석문(誌石文)을 찬술(撰述)하면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사표(謝表)에 청나라 태종의 조문(弔文)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한 까닭과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 요구 등으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1650년(효종 1년)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신묘삼권보(辛卯三卷譜)의 서문을 썼다.

1655년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1661년(현종 2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예송[禮訟,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복상기간을 두고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정권 주도권을 둘러싼 이념논쟁]에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1669년 2월 5일 별세하였다.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安東) 김씨(金氏, 1584-1650)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두었으며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한바위 녹문산에 합장하였다.

별묘(別廟)는 신북면 가채리에 있다.

문정공(文正公) 미수(眉수) 허목(許穆)이 묘지명(墓誌銘)ㆍ신도비명(神道碑銘)ㆍ시장(諡狀)을 지었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ㆍ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ㆍ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에 배향되었다.

글씨에 뛰어났고 『용주집(龍洲集)』과 일본 견문록인 『동사록(東?錄)』을 남겼으며

포천인의 빛나는 발자취를 전하는 사찬(私撰) 군읍지인 최초의『견성지(堅城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76년(숙종 2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1695년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기고 자랑하거나 사치하지 않은 현모양처의 본보기

정경부인 안동김씨 할머니(1584.10.6-1650.11.21)는

 

이조판서를 지낸 효헌공[孝獻公, 휘 찬(瓚), 1543-1599, 자 숙진(叔珍), 호 눌암(訥菴)]의

 

1남 3녀 중 막내 따님이다.

안동 김씨는 본래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중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일본을 정벌한

제2차 여ㆍ원(麗ㆍ元) 연합군[금포옥대(錦袍玉帶)로 유명한

3세조 휘 양기(良琪)가 바로 이 부대의 부원수였음]의 원수였던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 장군이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 혈전(血戰)의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진주목사,

증(贈) 영의정,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충무공(忠武公)]장군도 바로 그 후손이다.

 

장인인 효헌공 휘 찬(瓚)은 1568년 문과 급제, 대사헌, 대사간, 대사성, 경기도 관찰사,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우참찬(右參贊)까지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란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접반사(接伴使)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明)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문장가이면서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명신(名臣)이었다.

 

문간공 신도비명에 의하면 “할머니는 아름답고 순하며 부지런하고 삼가서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고

자랑하거나 사치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임금이 싫어해도 바른 길로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하고

평생을 청렴강직한 삶으로 일관하였기에 여러 차례 월봉과 물자를 하사하였으나

책무없이 녹봉을 받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사양하였던 것으로 보아

할머니의 어려웠을 내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찬성공의 유복자(遺腹子)인 시동생 구[구 1613-1641, 증(贈) 이참(吏參)]가 요절하여

동서(同壻) 경주(慶州) 이씨(李氏)와 한 집 살림을 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김제 군수, 전주 부윤(1644년)으로 나갔을 때 동반가족이 많다는 아전(衙前)들의 구설로

관직을 사임하였을 때에도 조카인 위명(威明)을 친자식처럼 양육하고 훈도하셨던 것으로 보아

할머니의 엄하면서도 후덕하고 자애로운 성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종형 응교공[應敎公, 휘 위봉(威鳳, 호 녹문(鹿門)과 본래부터 정분이 두터웠는데

귀하게 드러남에 이르러서도 조석으로 명령을 받들기를 소년 때와 같이 하였으며

종형께서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연석(宴席)에 가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으셨다.

이 때부터 응교공과 11살 아래인 송천공[松泉公, 휘 위명(威明)] 4촌 형제간의 돈독했던 우애와 의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송천공파에서 지은 가채리의 재실(齋室)도

두 분의 아호(雅號)를 따서 녹송재(鹿松齋)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병자호란 후에는 장릉(長陵)의 지석문(誌石文)을 찬술(撰述)하면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사표(謝表)에 청나라 태종의 조문(弔文)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한 까닭과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 요구 등으로

할아버지는 1650년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주의 백마산성에 유배되었고

할머니는 과천에서 별세하였는데 임금의 특명으로 경기 감영(監營)에서 부의(賻儀)와 물자를 내려

성복(成服)과 매장(埋葬)의 예(禮)를 치르게 하였다.

할아버지는 적소(謫所)에서 풀려나서야 비통한 마음으로

선조인 찬성공, 이판공, 이참공의 성묘 겸 할머니의 묘소를 찾아볼 수 있었다.

문간공은 늘 조정에서 드러난 분으로 귀하기는 구경[九卿, 삼정승(三政丞)과 육판서(六判書)]을 넘었으되

할머니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뒷 날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위해 지은 제문에 이르기를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간 이후로 군현의 수령으로 나간 것이 몇 차례 되었으나

부인은 역시 온전한 옷 한 벌이 없었소.

이것이 비록 부인의 재주가 졸렬한 데에서 말미암은 바이기는 하지만,

역시 성품이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나의 뜻을 잘 따라 주어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소.

또 외람되게도 임금의 은혜를 입음에 미쳐서는 이조판서를 맡게 되었는데

뇌물 꾸러미가 감히 우리 집의 대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일찍이 처족들 가운데 한 사람도 나에게 와서 간청함이 없었오.

나는 지금 이후에야 부인이 안에서 도와주는 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알겠소." 하셨다.

63세에 할머니와 사별하신 후

20년간이나 홀로 지내신 것도 오늘날과는 시대상이 많이 달랐겠지만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정분과 며느님인 초계(草溪) 정씨(鄭氏) 할머니의 어려우셨음을 짐작케 한다.

할머니는 1남 3녀를 낳으셨으니

아드님은 응교공이고

세 분의 사위는 위솔(衛率) 이유정(李惟楨),

정랑(正郞) 이돈림(李惇臨),

생원(生員) 이정징(李正徵)이다. 1584년 갑신생(甲申生),

1650년 경인졸(庚寅卒)로 수(壽) 67세(歲)였다.

 

용주 선생은 사촌매제인 경현공 효건(현감공 근의 장자)과 많은 시문을 주고받으며 조선 중기 문단에 큰 업적을 남기셨다.

 

[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1. 조경(趙絅)의 생애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은 1586년(선조19)에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를 지낸 조익남(趙翼男)과 유개(柳愷)의 따님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일장(日章), 호(號)는 주봉(柱峰)ㆍ용주(龍洲)이다.

조경의 생애는 수학기(修學期)와 사환기(仕宦期), 은퇴기(隱退期)라는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수학기(1589~1623)는 한양의 숭교방(崇敎坊)에서 태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가기까지의 시기이다. 조경은 아주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광해군이 집권했을 때에는 벼슬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경은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문하에서 문장 수업을 받았다. 당시 윤근수의 문하에는 이정귀(李廷龜), 김상헌(金尙憲), 김육(金堉), 김좌명(金左明)과 같은 서인계 인사들이 있어 그들과 교유하는 기회가 되었다.

사환기(1623~1653)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문과에 급제하고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시기이다. 조경은 내직으로 형조 좌랑, 사간원 헌납, 대사간, 대사헌, 양관(兩館)의 대제학, 도승지, 이조 판서, 의정부 좌참찬, 형조 판서, 예조 판서를 역임했고, 외직으로 지례 현감, 목천 현감, 흥해 군수, 김제 군수, 전주 부윤, 회양 부사를 역임했다.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그는 소현세자의 분조(分朝)에 참여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과천의 관악산에서 피란민을 모아 청나라 군대를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인조가 사망한 후 《인조실록》 찬집청(撰集廳)의 당상관을 역임하고 만사(輓詞)를 지었으며, 효종이 즉위한 직후의 반교문(頒敎文)을 작성했다. 1643년에는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왔다.

은퇴기(1654~1669)는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 포천에서 모친을 모시고 살며 말년을 보낸 시기이다. 조경이 벼슬길에서 물러난 것은 청나라 정부로부터 척화신(斥和臣)으로 지목받아 배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그를 예우하여 계속 월봉(月俸)을 지급했고, 1661년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는 70세가 되던 1655년(효종6)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3년 후에는 김육(金堉), 윤경(尹坰), 윤이지(尹履之), 오준(吳竣)과 함께 기소오로회(耆所五老會)를 만들었다. 효종이 사망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지었고,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나자 윤선도(尹善道)의 설을 지지하여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과 같은 서인계 인사들과 틈이 벌어졌다. 1668년 4월에 품계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까지 올랐고, 1669년(현종10) 2월에 사망하여 포천의 선영 아래에 장사 지냈다. 그는 춘천의 문암서원(文岩書院),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興海)의 곡강서원(曲江書院)에 차례로 배향되었다.

조경의 졸기(卒記)는 《현종실록(顯宗實錄)》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전자는 1677년에 남인이 주도하여 편찬했고, 후자는 1683년에 서인이 주도하여 편찬한 책이다. 두 글을 비교하면 그의 생애에 대한 서술은 비슷하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기해예송에서 윤선도를 옹호한 것을 비판하고 효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가 출향(黜享)된 일을 강조했다. 서인계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행 부호군 조경(趙絅)이 졸하였다. 조경의 자(字)는 일장(日章)이며 청문 고절(淸文苦節)로 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총재(冢宰)의 지위에 올랐고 문형(文衡)을 지냈는데, 경인년(1650)에 청나라에게 죄를 받아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돌아온 뒤에는 서용하지 못하게 하므로 부모를 위해 회양 부사(淮陽府使)를 청하여 나갔는데, 얼마 후 포천(抱川)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지성으로 계모(繼母)를 섬겼는데, 나이 80세에 상(喪)을 당했으나 남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예를 잘 수행하였다. 고령으로 품계가 승급되었고 음식물의 하사도 있었다. 이때 84세로 졸하였다.

조경의 문장은 고상하면서 기운이 넘쳐 고문(古文)에 가까웠으며, 그의 맑은 명성과 굳은 절개는 당세에 추앙을 받았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를 구하는 상소를 올린 일 때문에 크게 시의(時議)에 거슬림을 받아 사특하다고까지 지목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사인(邪人)이 정인(正人)을 가리켜 사특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금상 병진년(1676, 숙종2)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전 판중추부사 조경(趙絅)이 죽었다. 조경의 자는 일장(日章)으로, 인조 초에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화직(華職)과 현직(顯職)을 두루 거쳐, 지위가 총재에 이르렀고 문형을 잡기도 했다. 만년에 이웃 청나라의 떠들어대는 말로 인해 변방에 유배되었고 풀려나서도 거두어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조정에 서지 못했다. 어버이를 위하여 고을 수령을 원하여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고, 체임된 뒤에는 포천에 은퇴하여 돌아갔다. 계모를 효성으로 섬겨 소문이 났고, 나이 80에 상을 만났는데 예를 그래도 부지런하게 지켰다. 기로(耆老)로 조정에서 우대하여 특별히 1품의 품계를 더해주고 월름(月廩)을 하사했다. 이때 이르러 84세로 졸하였다.

조경은 문장이 화려하고 행실이 있어서 세상에 칭송받았지만, 강퍅하고 자신의 의견대로 하였으며 논의가 매우 편벽되었다. 병술년(1646, 인조24) 강씨의 옥사가 있었을 때, 조경은 대사헌으로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를 진달하여 《춘추》의 군친(君親)에게는 반역을 일으킬 수 없다는 의리를 인용하였다. 현저하게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작태가 있어 누차 총애를 입어 발탁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더럽게 여겼다. 경자년(1660, 현종1)에 윤선도가 상소하여 예론을 무함했다가 죄를 얻어 쫓겨났는데, 조경은 상소를 올려 구원하면서 심지어는 효종을 위해 윤선도의 견해에 동의하겠다는 말까지 하였으므로, 온 세상이 비로소 그의 간악한 실상을 믿게 되었다. 갑인년(1674, 숙종 즉위년) 이후 간흉들이 정권을 도둑질하고 조경이 예론에 공로가 있다 하여 묘정에 배향했다. 여론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 여러 해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 정권이 바뀐 이후 공의가 다시 펴져 묘정에서 내쫓겼다.

2. 주변 인물

 

조경의 조부와 부친은 독자(獨子)였으며, 조경 대에 이르러 형제가 태어났다. 조부 조현(趙玹, 1543~1606 자 군미(君美))은 공조 좌랑, 임실 현감, 직산 현감을 역임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했다. 부친 조익남(趙翼男)은 효행으로 사섬시 봉사가 되었다가 1613년(광해군5)에 사망했다. 조익남은 조경이 현달하게 되자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조경의 모친은 두 분이다. 생모(生母)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조경이 13세이던 1598년에 사망했고, 계모인 진천 송씨(鎭川宋氏)는 1665년(현종6)에 사망했다.

조경은 부친이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모친을 봉양하는 데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그는 관리 생활을 하면서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임지를 옮기거나 사직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친을 봉양하는 데에는 아우 조구(趙緱)도 참여했고, 1640년(인조18) 아우가 사망한 후에는 조경이 모셨다.

 

신은 일찍이 아비를 여의고 동생 하나만 있었는데 동생마저 지난해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노모를 보살필 사람이라곤 신 한 사람뿐인데 지금 어미의 병이 이와 같으니, 신의 사정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서둘러 달려가 치료하는 것을 차마 한 시각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훗날 허목은 ‘조경이 70년 동안 정성을 다해 모친을 봉양했고, 80의 나이에도 모친의 장례를 직접 치렀다’고 칭찬했다.

다음은 조경의 가계도(家系圖)이다.

 

삽화 새창열기

조경은 이황에서 김성일, 정구로 이어지는 남인 학통을 중시했다. 그는 이황이 사도(師道)의 엄격함과 유학의 도(道)를 수호한 공덕이 있다고 평가했고, 이황이 남긴 글들을 꼼꼼히 읽었다.

 

선조 대에 이르러 더욱 유술(儒術)을 중시했다. 퇴계(退溪) 이 선생을 도산(陶山)에서 예우로 초빙하여 나라 사람들이 법식으로 삼을 바가 있게 되자 학자들이 각자 분발하여 그 문하로 몰려들었다. 위로 요(堯)와 순(舜)을 이야기하고, 아래로는 상(商)과 주(周)를 이야기하며,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의 공리(功利),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의 패합(捭闔)은 논하지 않고, 도교와 불교의 허무지학(虛無之學)은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도 정(正)에 귀일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았으니, 이 선생의 사도(師道)의 엄격함과 도를 보호하는 공덕이 어떠한가? 나는 항상 그 때에 미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고, 선생의 글과 문도들이 문답한 것을 즐겨보면서 비록 한마디라도 도(道)에 가까운 것을 버리지 않았다.

 

1655년에 조경은 영양에 건립된 영산서원(英山書院)에 이황과 김성일의 위판을 봉안하는 제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황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과 함께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음을 강조하고, 이황과 김성일의 관계를 공자와 그 제자인 자유(子游), 자하(子夏)의 관계에 비유했다. 또한 그는 조선에 전해진 성리학이 이황에 이르러 성대해졌고, 정구는 그 문하를 출입하며 어려서부터 승당(升堂)한 것으로 평가했다.

조경이 서인계 학자였던 윤근수의 문하에 출입하였음에도 남인계 학자로 비정되는 데에는 장인 김찬(金瓚, 1543~1599)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찬은 임진왜란 때 대사헌을 역임했고, 가장 가깝게 지낸 인물은 유성룡과 김성일이었다. 김성일은 1591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김찬에게만 편지를 보내 속내를 털어놓았고, 유성룡은 김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문을 지으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조경이 가깝게 지낸 동료는 이시백(李時白)과 남이웅(南以雄)이었다. 이시백(1592〜1660 자(字) 돈시(敦詩), 호(號) 조암(釣岩))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이귀(李貴)의 아들로 이괄의 난을 토벌하고 영의정을 역임했고, 남이웅(南以雄, 1575〜1648 자(字) 적만(敵萬), 호(號) 시북(市北))도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우고 좌의정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조경은 이들과 50년 이상 친분을 유지했으며, 그들이 사망한 후 제문과 묘표, 신도비명 등을 지어 애도했다. 이중에서 이시백은 성혼, 김장생, 이항복에게 학문을 배운 서인계 인사였다.

허목은 조경 집안의 묘도문자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그는 조경의 부친인 조익남의 묘갈명을 지었고 비의 전서(篆書)를 썼으며, 모친인 진천 송씨의 만시 서(輓詩序)를 지었다. 허목은 조경의 묘지명과 신도비명, 조경의 아우인 조구의 묘지명을 지었다.

조경의 교유 인물을 보면, 초기에는 남인 및 서인계 인사와 두루 교유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남인계 중심으로 변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3. 《용주유고》와 관련 자료

 

조경에 관한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목판본 《용주선생유고(龍洲先生遺稿)》 23권 9책이다. 이 책은 1703년(숙종29) 1월에 조경의 손자인 조구원(趙九畹)이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부임하면서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용주선생유고》를 간행하는 작업은 1703년 8월에 시작하여 그해 12월〔臘月〕에 마무리했고, 문집을 인쇄한 목판은 조계산(曹溪山) 송광사(宋廣寺)에 보관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1671년에 허목은 조경의 ‘문집 10권’이 집안에 남아있다고 했다. 1674년(숙종 즉위년) 10월에 조경의 아들 조위봉(趙威鳳)은 능주 목사(綾州牧使 전남 화순)로 부임하면서 부친의 문집을 정서해 두었지만 결국 간행하지는 못하고 돌아왔다. 현재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본이며(한46-가1182), 규장각, 고려대학교 도서관에도 같은 본이 소장되어 있다.

조경이 작성한 자료에는 필사본 《용주일기(龍洲日記)》도 있다. 여기에는 정유일기(丁酉日記), 을해남정일기(乙亥南征日記), 병정일기(丙丁日記), 경인일기(庚寅日記), 신묘일기(辛卯日記)가 포함되어 있다. 정유일기는 1627년 정묘호란 때의 기록이고, 을해남정일기는 1635년 암행 어사로 전라도를 순찰할 때의 기록이다. 병정일기는 1636~1637년까지 병자호란 때의 기록이고, 경인일기와 신묘일기는 1650~1651년까지 의주의 백마산성에 유배되었던 시기의 기록이다. 《용주일기》의 필사본은 조경의 후손인 조영원(趙永元 호(號) 각산(覺山))의 손자인 조인행(趙寅行)씨가 소장한 본과 조경의 후손인 조국원(趙國元 호(號) 심재(心齋))이 필사한 본이 있다. 이 자료는 최근에 번역이 이루어져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조경의 생애에 관한 자료에는 필사본 《용주조선생연보(龍洲趙先生年譜)》 2권이 있다. 조경의 아들 조위봉이 편찬한 것으로, 후손 조석주(趙錫疇)가 봉사손(奉祀孫)인 조제화(趙濟華)의 집에서 원고를 찾아 간행했다고 한다. 1786년(정조10) 여름에 예조 참판 이헌경(李獻慶)이 그 서문을 썼고, 1859년에 허전(許傳)과 조석주(趙錫疇)가 발문을 썼다. 이헌경은 조위봉의 장인인 이명웅(李命雄)의 4세손이다. 《용주조선생연보》의 권1은 조경의 생애를 연도순으로 정리했고, 권2 부록에는 사제문(賜祭文, 1669), 태묘배향교문(太廟配享敎文, 1676), 용연서원선사사제문(龍淵書院宣賜賜祭文, 1692), 언행총록(言行總錄, 조위봉(趙威鳳)), 묘지명(墓誌銘, 허목(許穆), 1671), 신도비명(神道碑銘, 허목(許穆), 1671), 시장(諡狀, 허목(許穆)), 발문(跋文, 허전(許傳), 1859), 발문(跋文, 조석주(趙錫疇)) 등 조경이 사망한 후에 작성된 글들이 편집되어 있다. 이 자료 역시 최근에 번역이 이루어져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조경의 간찰을 모은 자료로 《용주척독(龍洲尺牘)》 1책과 《문간공간독(文簡公簡牘)》 1책이 있다. 전자는 조경의 친필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한古朝44-다3), 후자는 조국원(趙國元 호(號) 심재(心齋))이 필사한 것이다. 《용주척독》에는 조경이 이경석(李景奭), 허목(許穆), 목내선(睦來善), 윤선도(尹善道), 이연년(李延年) 등에게 보낸 63건의 서간이 수록되었고, 《문간공간독》에는 허목, 목내선, 이경석, 조속(趙涑), 김만중(金萬重), 이명웅(李命雄) 등에게 보낸 180건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용주선생유고》에서 누락된 서간을 모은 것이라 매우 유용한 자료로 판단된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산견되는 자료를 수집하여 수신자가 뒤섞여 있고 시간 순으로 편집되어 있지도 않다. 현재 번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추후 재정리 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조경의 후손 가에는 그가 자제들에게 보낸 서간과 다수의 고문서가 있다. 그중에서 《삼부유병풍화폭시문등본(三釜遊屛風畵幅詩文謄本)》은 1664년(현종5)에 조경과 조위봉 부자, 허목(許穆 전 삼척 부사), 이진(李袗 겸순찰사), 허립(許岦 전 함창 현감), 이회(李襘 전 춘천 부사), 이연년(李延年 철원 부사)이 강원도 철원에 있는 삼부연(三釜淵)을 유람하면서 작성한 글을 베낀 것이다. 허목이 서문을 작성했으며, 조국원이 필사하고 발문을 썼다. 이 자료는 조경의 만년 생활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이다.

4. 《용주유고》의 내용

 

《용주유고》는 23권 9책의 목판본이다. 권두에는 총목(總目)이 있으며 서문이나 발문은 없다.

권1~5에는 630여 수의 시가 편집되어 있다. 권1에는 오언절구(五言絶句) 14수, 칠언절구(七言絶句) 52수, 오언율시(五言律詩) 87수가 있으며, 권2에서 권4까지는 칠언율시(七言律詩) 422수, 권5에는 오언고시(五言古詩) 43수와 칠언고시(七言古詩) 17수가 있다. 일상생활의 느낌이나 여행지의 풍경을 읊은 시가 많고, 《근사록(近思錄)》ㆍ《심경(心經)》ㆍ《이정전서(二程全書)》ㆍ《한집(韓集)》ㆍ《두집(杜集)》ㆍ《동포록(東圃錄)》을 읽은 후에 지은 시가 있다. 시로 교유한 인물에는 정온(鄭蘊), 이경전(李慶全), 김원립(金元立), 민성휘(閔聖徽), 홍응원(洪應元), 허목(許穆), 목내선(睦來善), 신유(申濡), 목대흠(睦大欽), 조속(趙涑), 정구(鄭球), 유희경(劉希慶), 김광욱(金光煜), 양만고(楊萬古), 이정영(李正英), 이경석(李景奭), 채유후(蔡裕後), 남이웅(南以雄), 홍영(洪霙), 이경용(李景容), 민응회(閔應恢), 이명한(李明漢), 홍립(洪雴), 김광현(金光炫), 심동귀(沈東龜), 김육(金堉), 민응형(閔應亨), 정세규(鄭世規), 심택(沈澤), 오준(吳竣), 강백년(姜栢年), 이회(李禬), 정태화(鄭太和), 김효건(金孝健), 홍명하(洪命夏), 이식(李植) 등이 있고, 인조(仁祖), 인평대군(麟坪大君), 남이웅(南以雄), 이성원(李性源), 이명웅(李命雄), 이식(李植), 조익(趙翼), 목서흠(睦敍欽), 민응회(閔應恢), 허휘(許徽), 김염조(金念祖), 최유연(崔有淵), 박길응(朴吉應), 이경여(李敬輿), 이시백(李時白), 목행선(睦行善), 심광수(沈光洙), 최명길(崔鳴吉), 강학년(姜鶴年), 심대부(沈大孚), 신혼(申混), 김주(金周), 민응형(閔應亨) 등의 죽음을 슬퍼하는 만시(挽詩)가 있다. 이를 보면 조경의 교유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권6~22는 문(文)에 해당한다. 권6~10에는 소차(疏箚) 86편과 계사(啓辭) 26편이 연대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여기에는 조경이 형조 좌랑, 지평, 홍문관 교리, 사간, 형조 참의, 대사간, 대제학, 대사헌, 형조 판서, 도승지, 예조 판서, 내의사(內醫司) 제조, 이조 판서, 실록 찬수 당상(實錄撰修堂上), 시책(諡冊) 제술을 사직하는 상소가 있다. 또한 왜인(倭人) 접위관(接慰官)을 거절하거나 응지(應旨)하는 상소,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지방관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는 상소, 재난을 만나 수성(修省)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 원손(元孫) 책봉을 요청하는 상소,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찬진(撰進)하는 상소, 김육(金堉)을 구하고 심대부(沈大孚)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 기민(饑民) 구제를 요청하는 상소도 있다. 계사(啓辭)는 주로 혐의를 피하려는 피혐(避嫌) 계사이다.

권11에는 서(序) 20편과 기(記) 5편이 있다. 서문에는 《한양조씨족보(漢陽趙氏族譜)》ㆍ《학봉선생집(鶴峯先生集)》ㆍ《농암선생집(聾巖先生集)》ㆍ《한음선생문집(漢陰先生文集)》ㆍ《소재선생문집(蘇齋先生文集)》ㆍ《구암집(龜巖集)》ㆍ《육신유고(六臣遺稿)》ㆍ《현곡집(玄谷集)》ㆍ《초암집(初菴集)》ㆍ《동계선생집(桐溪先生集)》에 대한 것이 있고, 기문에는 포천의 선영 사당, 회양향교(淮陽鄕校) 수리, 제주 장수당(藏修堂), 연송재(鍊松齋), 낙전재(樂全齋)에 관한 것이 있다. 서문을 작성한 대상은 주로 동인이나 남인계 인물의 문집이었다.

권12에는 발(跋) 8편, 변(辨) 1편, 설(說) 4편, 잡저(雜著) 9편, 상량문(上樑文) 2편, 시책문(諡冊文) 1편, 죽책문(竹冊文) 1편, 교서(敎書) 2편이 있다. 이 중 발문에는 《죽창집(竹窓集)》, 중간(重刊)한 《주례(周禮)》, 《강정대왕어필첩(康靖大王御筆帖)》, 이언적의 《대학보유(大學補遺)》에 대한 것이 있고, 잡저에 포함된 책문(策問)에는 예(禮), 경전(經傳), 춘추(春秋), 어적지책(禦敵之策)을 주제로 했다. 시책문은 효종의 시책이고, 죽책문은 현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죽책문이다.

권13에는 제문(祭文) 31편과 기우제문(祈雨祭文) 9편, 뇌문(誄文) 1편이 있다. 제문에는 인열왕후(仁烈王后), 목릉(穆陵) 보토(補土), 퇴계(退溪)와 학봉(鶴峰)을 모신 영산서원(英山書院)에 관한 것이 있으며, 이시백(李時白), 채유후(蔡裕後), 한흥일(韓興一), 유백증(兪伯曾), 남이웅(南以雄), 김육(金堉), 이완(李梡)을 추모하는 제문과 관악산신(冠岳山神)과 기우(祈雨) 제문이 있다. 뇌문은 김응조(金應祖)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권14~21에는 묘지(墓誌) 6편, 묘갈(墓碣) 27편, 묘표(墓表) 2편, 신도비명(神道碑銘) 20편을 합하여 총 55명의 묘도문자가 있다. 묘지명에는 인조(仁祖), 정구(鄭球), 김지남(金止男), 김육(金堉), 묘갈명에는 조현趙玹), 정수곤(鄭壽崑), 양사언(楊士彦), 이성중(李誠中), 이시백(李時白), 윤황(尹煌), 정개립(鄭介立), 신도비명에는 김식(金湜), 조식(曺植), 이덕형(李德馨), 정경세(鄭經世), 정온(鄭蘊), 김응하(金應河), 한흥일(韓興一), 권협(權悏), 전식(全湜), 김시양(金時讓), 민응형(閔應亨), 남이웅(南以雄), 이덕형(李德泂)에 대한 것이 있다. 마지막에 홍주청난비명(洪州淸難碑銘)이 있는데 이는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홍가신(洪可臣)의 공을 기리는 것이다.

권22에는 정온(鄭蘊)과 이원익(李元翼)의 시장(諡狀)이 있다.

권23은 동사록(東槎錄)이다. 이는 1643년에 조경이 통신부사의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기록으로, 화루선(畵樓船), 관백(關伯), 왜국(倭國)의 삼도(三都)에 대한 설(說)이 있고, 일본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임라산(林羅山 도춘(道春))과 주고받은 편지가 있다. 또한 조경이 서울을 떠나 부산과 대마도를 경유하여 강호(江戶)와 일광산(日光山)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까지 주고받은 시가 이동경로를 따라 수록되어 있다.

《용주유고》의 편차는 다른 문집과 비슷하지만 서간(書簡)이 전혀 수록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5. 《용주유고》에 나타나는 조경의 활동

 

1) 민생 안정과 대동법 실시 건의

 

조경은 병자호란이 끝난 후 민생의 피폐함을 주목하고 재난과 흉년을 구휼하여 민생을 안정시킬 방책을 제안했다. 1645년(인조23)에 조경은 가뭄이 이어지고 전염병이 잇달아 발생함에 따라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사방을 떠돌며 도적이 되는 상황임을 보고했다.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구휼하며 새벽에 일어나 크게 덕을 밝히기를 반드시 전보다 배나 더하셨는데도 천심(天心)이 화평하지 못하여 재이(災異)가 거듭 내리는 것이 또한 전보다 배나 심합니다. 가뭄이 해마다 이어지고 전염병이 잇달아 발생하니, 마을 밭둑 사이에 보이는 굶주린 사람들의 근심어린 기색을 성상께서는 반드시 다 살필 수 없을 것입니다. 백성이 삼태기와 들것을 서로 끌어가니, 길가 풀숲에 묻은 시체 사이에 들리는 고아와 과부들의 통곡 소리를 성상(聖上 인조)께서는 반드시 다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배가 북쪽으로 가느라 뱃사공들은 전염병에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열에 두셋은 됩니다. 불쌍한 우리 백성은 적의 칼날에 죽지 않으면 전염병에 죽었으며, 굶주림에 죽지 않으면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다행히 살아남은 자들은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647년이 되어서도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 조경은 연이은 흉년과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살길을 찾지 못한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는 정황을 보고했다. 그는 조정에서 효과가 없는 진휼(賑恤) 정책을 펴기보다 지방에서 진상(進上)하는 물품을 줄이거나 백성의 신역(身役)을 감면하는 것 같은 실질적 정책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때를 맞아 크게 하교하여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고 직언을 구하셔야 합니다. 모든 일에 내실이 있는 덕을 쌓기에 힘쓰고 헛된 형식을 제거하기에 주력하며, 진상하는 물선(物膳)이라도 임시로 적절히 줄이며, 고르지 못한 백성들의 요역을 고르게 하고, 감면할 만한 요역을 감하십시오. 그러면 민심이 기뻐할 것이며 백성들의 힘도 얼마간 펴질 것입니다.

 

조경은 1650년(효종1) 4월에 이경석과 함께 척화신으로 지목되어 의주의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2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현지에서 그는 평안도 백성들이 일 년에도 여러 번 왕래하는 청의 사신들을 접대하느라 고역인데다 흉년까지 겹쳐 심각한 상황임을 목격했다. 이때 그는 평안도 지역 관아에 있는 곡식 창고를 개방하여 무상으로 백성들을 구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평안도의 백성은 골수가 말랐습니다. 십수년 이래로 사신을 전송하고 영접한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작년과 금년에는 사신 대여섯에서 일고여덟 무리가 몇 달 동안 이어졌고, 연향(宴享)을 베푸느라 고혈이 다하고 역참(驛站)에서 근력이 다하였습니다. 성근 베로 몸을 가려 손발이 부르트고 얼굴에는 사람 기색이 없으니, 추위를 참고 굶주림을 참는 모습은 모진 사람이 보아도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게다가 참혹한 흉년을 당하여 굶주림 때문에 동요하여 노약자를 지거나 안고 길에 떠도는 자가 그치지 않습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굶어죽은 시체가 도랑에 쌓일 것이 분명합니다.

삼가 들으니, 평안도 여러 고을의 창고에는 아직 10여만 섬의 곡식이 있다고 합니다. 창고를 열어 굶주린 이들을 진휼하는 일을 하루도 늦춰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만약 조적(糶糴)이라는 명목으로 준다면, 은혜가 두루 미치지 못하고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흉년을 만나 창고의 곡식을 모두 내놓아 백성에게 주었던 것이 과연 추수한 뒤에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갚기 바랐던 것입니까.

 

조경은 민생을 안정시키는 최선의 방법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조경은 대동법을 처음 건의한 사람은 이원익(李元翼)이며, 대동법을 시행하면 방납(防納)의 폐단이 없어져 백성들은 이익을 보지만 거가대족(巨家大族)과 재물이 넉넉한 사람, 각 관사의 사주인(私主人)들은 피해를 본다고 했다. 따라서 이들은 대동법을 막으려 갖은 노력을 다하며, 대동법을 시행하는 지역이 경기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도 이들의 농간 때문으로 보았다.

 

광해군이 육경(六卿)을 자택으로 보내어 백성의 일 가운데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묻자, 공(公 이원익)은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청하였다. 그 방법은 매년 봄가을에 백성의 전지 1결마다 여덟 말의 쌀을 거두어 서울의 창고로 운송하고, 때때로 각 관사의 사주인(私主人)에게 나눠주어 공상하는 물건을 알아서 사다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 시장 가격의 높고 낮음을 보아 그 수를 넉넉히 하여 사주인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밖에는 한 자의 베나 한 되의 쌀도 백성에게 추가로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열 배로 방납하는 폐단을 혁파했다. 조목이 정밀하여 오랫동안 시행할 만하였다.

광해군이 먼저 경기에 시험하라고 명하자 거가대족(巨家大族)과 세력이 있고 재물이 넉넉한 백성 및 사주인들은 방납의 큰 이익을 잃게 되었기에 백방으로 저지하였다. 광해군이 누차 혁파하려 하였으나 경기 백성이 다투어 편하다고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공이 처음 대동법을 설행하라고 한 것은 온 나라에 공통적으로 시행하라는 말이었으니 어찌 경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조경은 대동법을 확산시킨 사람은 영의정 김육(金堉)으로 보았다. 조경은 대동법은 정전제의 뜻을 계승하여 균평한 부세를 이루려는 것이며, 김육이 대동법을 확산시킴으로서 조선이 거의 다스려지게 된 것으로 평가했다.

 

(영의정) 임명 받은 초기에 / 拜命之初

균평한 부세를 먼저 아뢰었네 / 平賦首陳

균평한 부세란 어떤 제도인가 / 平賦何制

정전제의 뜻을 계승한 것이지 / 井田遺意

근대의 어진 재상 / 近代賢相

오리공(梧里公)이 이를 창시했고 / 梧里刱此

공이 그 계획 확충하니 / 公廓其猷

동국이 거의 다스려지게 되었네 / 東國庶幾

 

조경은 김육의 제문에서도 백성들이 극도로 피폐한 것은 토지와 조세가 균등하지 않기 때문이며, 백성을 지키는 방법은 대동법을 실시하는 것이라 강조했다.

 

지금 백성의 초췌함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 초췌함의 이유를 궁구해 보면 정지(井地)가 균등하지 못하여 그렇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전토에서 상중하의 척박하고 비옥한 정도가 뒤섞여 경중을 따지지 않고 세금을 부과하는 데다 그 사이에 변통이 끼어드니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마을마다 넘쳐나는 것입니다. 공이 한눈에 간파하고 익숙히 들어 알게 된 것은 반드시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신(重臣)의 책임을 맡아 마침내 백성을 지킬 길을 세웠으니 백성을 지킬 길이란 대동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경은 대동법을 실시하는 것이 전쟁과 전염병, 흉년과 가혹한 세금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판단했다.

 

2) 대명의리론과 국방강화책 건의

 

조경은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바탕으로 청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척화신을 표창하자고 했다. 1631년에 그는 명과 조선은 군신, 부자의 관계에 있으며, 명이 구원병을 요청하면 조선은 이해나 성패를 따지지 말고 의리로 달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은 청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는 천조(天朝 명)에 대해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고 부자(父子)의 도리가 있습니다. 지금 오랑캐가 영원(寧遠)을 침략한 것도 부족하여 우리 서쪽 땅을 유린하며 가도(椵島)를 공격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가도의 백성은 천자의 백성이고, 가도의 장수는 천자의 명을 받은 관리입니다. 우리의 도리로서는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말고 마땅히 갑옷을 말아들고 서둘러 달려가고 갓끈을 동여맬 겨를도 없이 구원하여야 합니다. 강약은 말할 바가 아니고, 이해는 논할 바가 아니며, 성패는 고려할 바가 아닙니다. 의리가 달려있는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중략) 우리나라가 비록 동편에 치우쳐 있어 언어가 중화(中華)와 같지 않고 의관을 비롯한 문물이 중화에 훨씬 못 미치지만, 군신과 부자의 도리는 중화에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중화의 도리를 가장 깊이 체득하여 열성(列聖)이 스스로를 다스린 것은 오직 충(忠)과 효(孝)를 근본으로 하였으니, 온 나라가 이에 교화되어 비록 비천한 자나 농투성이라 할지라도 우리 왕이 대국을 섬기는 성심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조 대왕께서 성심껏 천자를 섬겨 결국 황조(皇朝)의 힘에 의뢰하여 번방(藩邦)을 거듭 부흥시켰으니, 지금까지도 칭송하는 노래 소리가 장로들의 입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두려워하며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병자호란이 끝나자 조경은 대명의리를 지킨 인물을 표창하자고 했다.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 때 무과에 급제하여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역임했고, 병자호란 때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참전했다가 용인의 험천(險川)에서 전사한 무장이었다. 조경은 최진립의 공적이 1618년(광해군10) 심하(深河) 전투에서 사망한 김응하(金應河)의 공적에 비길 만하며 그의 공적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경은 병자호란 때 척화신이었던 윤황(尹煌)의 공적도 중시했다. 그는 윤황이 청과의 화친을 배척한 것은 조선이 충분한 군량과 병력을 갖출 것을 건의한 이후의 일이고, 청에서 척화신을 내 놓으라고 할 때 윤황이 제일 먼저 나서는 기개를 보인 것을 평가했다.

조경이 가장 표창하려고 한 인물은 정온(鄭蘊)이었다. 조경은 정온의 행적을 거론하며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해치는 것을 반대했다가 반년동안 옥에 갇히고 10년 동안 제주도에 안치되었으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扈從)한 것을 평가했다. 조경은 조선이 청에 항복했을 때 정온이 자기 배를 칼로 찌른 것은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의리를 실천한 것이고, 정온과 김상헌(金尙憲)은 평생의 절개를 지킨 행적이 동일하므로 그 충절(忠節)을 포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정온은 1652년(효종3)에 이조 판서로 추증되고, 1657년에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조경은 청과 일본의 재침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고 요충지의 방어를 강화할 것을 건의했다. 1640년(인조18)에 조경은 병자호란 때 사망한 사람들의 자제를 모아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하고, 재상이나 장령(將領)의 자제 중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통솔하게 하면, 청을 방어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백성과 사족(士族) 및 공사천(公私賤) 가운데 호란(胡亂)에 죽은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들의 고아나 형제들 중에 원통한 생각으로 창을 베고 자는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하나의 군대를 만들되, 그들 가운데 재상이나 장령(將領)들의 자제로 장수(將帥)가 될만한 사람을 뽑아 통솔하게 하여 위급할 때 쓸 수 있게 하면, 죽음을 돌보지 않는 의열(義烈)을 어찌 보통 사람과 비교하겠습니까. 선조 때의 복수 의병(復讐義兵)이 바로 이것입니다.

 

1647년(인조25)에 조경은 서북 지역과 남해안의 방어를 강화하자고 건의했다. 그는 부산, 동래와 통영 사이는 뱃길로 300리가 넘어 유사시 연합하기 어려우므로 전선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곳에 소속된 수군과 격졸(格卒)들이 변장(邊將)의 포악함 때문에 원한을 품고 이반하려는 상황임을 지적하고, 강직한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탐학하고 무능한 변장을 제거하고 청렴한 사졸 가운데 인심을 얻은 사람을 발탁해야 한다고 했다.

1648년에 조경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천연의 요충지로 보고, 이곳의 방어력을 키우자고 했다. 그는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이곳을 지키지 못한 것은 전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외적의 재침을 막으려면 군사의 숫자를 늘려 훈련시키고 전함, 화포, 궁시(弓矢)의 비축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가 보장(保障)으로 삼을 곳은 강화도와 남한산성뿐인데, 남한산성은 외부의 지원이 끊어지기 쉬운 곳입니다. 강화도로 말하면 삼남으로 가는 뱃길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나루도 험하니 참으로 하늘이 내린 험지입니다. 병자년(1636)에 지키지 못한 것은 땅의 죄가 아니라 사람의 꾀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찌 한 번 목이 메었다는 이유로 식음을 전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앞일을 경계삼아 뒷일을 삼가며 진양(晉陽 국가의 방비를 강화한다는 뜻)에 전념할 때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비해 군사를 늘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예전보다 전함을 더 만들었다는 말도 듣지 못했으며, 화포(火砲)와 궁시(弓矢)를 준비하고 군사를 선발하여 훈련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요해처의 방비가 고려 말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런데도 보장이라 하면 헛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청이 북경을 장악한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경은 청이나 일본이 조선을 재침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는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대비를 촉구했다.

3) 일본과의 협력 구상과 외교활동

 

병자호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맺고 자신들이 명을 공격할 때 구원병을 보내라는 압력을 넣었다. 조선과 명이 협력하여 청의 후방을 공격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였다. 1638년(인조16) 5월에 조경은 일본의 협조를 받아 청을 공격하자는 독특한 주장을 했다. 일본은 조선과 30년간 우호를 유지해 왔고 명과도 협력할 가능성도 있으므로, 조선의 구원 요청을 하면 들어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은 명과의 공식 외교를 단절했지만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원수를 갚고 치욕을 푸는 데에는 반드시 이웃의 도움에 힘입었습니다. 우리의 이웃나라는 일본뿐인데 서로 성신(誠信)으로 사귀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들으니 천조(天朝 명)가 일본과 서로 통한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으나 그럴 이치가 없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저들(일본)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중원(中原)에 쓰이게 될 것입니다. 이때 만약 재변(才辯) 있는 사람을 택하여 행장을 꾸리고 가서 정세를 탐지하고 우리의 실상을 알린다면 저들은 삼십 년간 사귀어온 나라인데 어찌 와서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640년에도 조경은 일본의 위세를 빌어 청에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이 청에 곤욕을 당하고 있음을 알리면 일본이 조선을 도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이 힘을 합쳐 청을 공격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과 일본이 협력 관계에 있음을 청에 과시함으로써 청이 조선을 다시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일본은 이미 우리와 국교를 맺었으니 처음으로 우호를 도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심과 신의로 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약 한 차례 사신을 보내어 우리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하는 상황을 분명히 알린다면, 일본은 우리나라를 돕겠다고 허락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일본은 믿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오랑캐는 믿을 만하단 말입니까? 오랑캐를 섬기거나 일본과 교린하는 것은 모두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모두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이미 화친을 맺은 형세를 이용하여 오랑캐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신의 계책은 오직 성세(聲勢)에 보탬이 되게 하자는 것일 뿐, 왜병(倭兵)을 청해 우리와 함께 쳐들어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 오랑캐도 항상 왜사(倭使)가 왔는가를 묻으며 ‘우리도 사신을 일본에 보내려 한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을 꺼려서입니다. 참으로 이런 사정을 몰래 일본에 알려 그들로 하여금 오랑캐에게 한 장의 글을 보내 우리 이웃의 우호를 해친 것을 따지게 합니다. 오랑캐들은 비록 처음에는 우리가 그렇게 시켰다고 화를 낼 것이나 우리가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고 끝내 가볍게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른바 그들의 관건을 제압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경은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청에 대항할 것을 구상했지만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1643년(인조21)에 조경은 통신부사(通信副使)의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동행한 상사(上使)는 병조 참의 윤순지(尹順之)였고, 종사관(從事官)은 이조 정랑 신유(申濡)였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관백(關白) 원가광(源家光 덕천가광(德川家光))이 아들〔源家綱〕을 낳자 이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는 매우 미묘했다. 청의 우세가 계속되자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고, 청은 북경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일본과의 우호를 유지해야 했다. 남북 양쪽에 적을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조선 정부는 몇 가지 민감한 사안을 의논했다. 관백의 사당이 있는 일광산(日光山)에서 제사하는 절차와 약군(若君), 즉 관백의 아들을 대면할 때의 의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의 쇄환이 문제였다. 약군을 대면하는 절차에 대해, 조경은 이미 관백에게 절을 한 후 강보에 쌓인 어린아이를 만나는 것이므로 관대(冠帶)를 갖추지 않은 사람은 그냥 만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인조는 일광산 제사가 끝나고 저들이 수충(秀忠)의 원당(願堂)을 들리자고 하면 들어주고, 약군을 만날 때 재배(再拜)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심각한 요구가 아니면 수용하여 우호 관계를 유지하자는 입장이었다.

현지에 도착한 통신사는 약군을 만나지 못했고 복귀할 때 데려온 포로는 14명에 불과했다. 왜란이 있은 지 60년이 지나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이미 사망했거나 현지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조경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했다.

조경은 《동사록(東槎錄)》이란 여행기를 통해 일본의 실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정세를 판단했다. 조경은 조선의 국서를 받는 관백은 산성주(山城主 천황(天皇))의 신하임이 분명하며, 외국에 서계(書契)를 보낼 때만 ‘국왕(國王)’이라 쓴다고 했다. 그는 이런 관백에게 조선 국왕이 항례(抗禮)를 인정하고 명에서 일본의 국왕이라 지칭한 것은 교활한 오랑캐의 농간에 빠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관백이 비록 높지만 명위(名位)는 아직 제신(諸臣)의 반열에 있다. 비록 등원(藤源)씨처럼 세습하고, 원뢰조(源賴朝)처럼 강대하며, 평청성(平淸盛)처럼 전권을 행사하고, 평수길(平秀吉) 같은 걸물이라도 북면(北面)하여 모두 산성주(山城主)를 섬겼다. 감히 나라 안에서 왕이라 일컫지 못하고 이웃 나라와 서계(書契)를 통할 때에만 ‘국왕’이라 쓴다. 이웃 나라에서 왕과 대등한 예로 허락하여 이웃 나라의 대신으로 대우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어느 대(代)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이웃 나라만 그랬을 뿐 아니라 중국 천자의 존엄으로도 새서(璽書)를 내릴 때에는 일본 국왕 양회도의(良懷道義)라 하였다. 이는 온 천하가 모두 교활한 오랑캐의 농간에 빠지고도 깨닫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조경은 일본의 세 도읍으로 산성주(山城州 경도(京都)), 대판(大坂 난파(難波)), 강호(江戶)를 꼽았다. 그 중 산성주는 험난한 지형이 없어 용무(用武)의 땅이 되기 어렵고, 대판은 성곽이나 해자가 뛰어나지만 서쪽에 치우친 결점이 있으며, 강호는 지형적 조건이 뛰어나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는 바탕이 된다고 평가했다.

조경은 강호에서 태학두(太學頭)로 있는 임라산(林羅山)과 그의 두 아들을 만났고, 이들과 시와 편지를 왕래하며 교유했다. 조경은 임라산의 두 아들이 승려처럼 머리를 깎은 것을 보고 관혼상제의 예를 제대로 실천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때 조경은 조선이 정주학을 숭상하면서 기자 이후로 관혼상제의 예를 실천함을 자랑했고, 조선의 대표적 학자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거론했다. 정주학을 학문의 기반으로 삼고 《주자가례》의 실천을 중시했던 그의 태도는 일본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용주유고》는 조선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에 중앙 관리와 외교관으로 활동한 조경의 행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자료이다. 이와 별도로 조경의 행적을 기록한 《용주일기(龍洲日記)》와 《용주조선생연보(龍洲趙先生年譜)》의 완역본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 《용주선생유고》의 완역본이 간행됨으로써 그의 행적을 더욱 정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앞으로 관련 연구자들의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2015년 4월 30일

[주-D001] 조경의 …… 되었다 :

鄭敬薰, 〈龍洲 趙絅의 文學觀에 대한 硏究〉 《韓國漢文學硏究》 34, 2004, 319~321쪽.

[주-D002] 사환기는 …… 세웠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祭閔尙書應亨文〉(1652).

[주-D003] 효종이 …… 지었고 :

《孝宗實錄》 卷末, 〈諡冊文〉.

[주-D004] 1668년 …… 배향되었다 :

龍洲硏究會, 《漢陽趙氏系譜》.

[주-D005] 행 부호군 …… 배향되었다 :

《顯宗實錄》 권16, 顯宗 10년 2월 戊辰(5일).

[주-D006] 전 판중추부사 …… 내쫓겼다 :

《顯宗改修實錄》 권20, 顯宗 10년 2월 己巳(6일).

[주-D007] 조부 …… 모집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5, 〈祖考贈吏曹參判行工曹佐郞府君墓碣陰記〉.

[주-D008] 신은 …… 없습니다 :

《龍洲先生遺稿》 권7, 〈請覲病親疏〉.

[주-D009] 다음은 조경의 가계도(家系圖)이다 :

진하게 표시한 이름은 조경의 문집 및 자료를 편집한 인물이다.

[주-D010] 선조 …… 않았다 :

《龍洲先生遺稿》 권11, 序, 〈龜巖集序〉.

[주-D011] 1655년에 …… 비유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英山書院退陶鶴峯兩先生奉安祭文〉 ; 〈英山書院春秋享文〉.

[주-D012] 조선에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祭茅溪文先生緯文〉

[주-D013] 조경이 …… 한다 :

《龍洲先生遺稿》 권15, 〈吏曹判書訥庵金公墓碣幷序〉.

[주-D014] 조경은 …… 애도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祭延陽李相敦詩文 時白〉(1660) ; 권16, 〈延陽府院君李公墓表〉 ; 권13, 〈祭南相公以雄文〉(1648) ; 권21, 〈左議政春城府院君市北南公神道碑銘 幷序〉.

[주-D015] 허목은 …… 썼으며 :

《記言別集》 권24, 丘墓文, 〈贈左贊成趙公墓碣銘〉.

[주-D016] 조경의 묘지명과 신도비명 :

《記言》 권40, 〈龍洲神道碑〉.

[주-D017] 조구의 …… 지었다 :

《記言別集》 권21, 丘墓文, 〈趙君士晉墓銘〉.

[주-D018] 이 책은 …… 한다 :

규장각본 《龍洲先生遺稿》에는 “歲在昭陽恊洽(1703)之正月 孫九畹 蒙恩授順天府使 八月始役 臘月工訖 藏板于府之曹溪山松廣寺”라는 간기(刊記)가 있다.

[주-D019] 현재 …… 있다 :

金成愛, 〈龍洲遺稿 해제〉.

[주-D020] 조경이 …… 간행되었다 :

조경 지음, 권오영 옮김, 《용주일기》, 용주연구회, 2014.

[주-D021] 조경의 …… 간행되었다 :

조위봉 엮음, 정선용 옮김, 《용주연보》, 용주연구회, 2014.

[주-D022] 전하께서 …… 하였습니다. :

《龍洲先生遺稿》 권7, 〈辭大諫仍陳所懷疏〉(1645).

[주-D023] 신의 …… 것입니다 :

《仁祖實錄》 권48, 仁祖 25년 4월 丙子(5일).

[주-D024] 지금 …… 것입니까 :

《龍洲先生遺稿》 권8, 〈還朝後疏〉(1651) ; 《承政院日記》 孝宗 2년 2월 18일.

[주-D025] 광해군이 육경(六卿)을 …… 뿐이었겠는가 :

《龍洲先生遺稿》 권22,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주-D026] 조경은 대동법을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耆老所祭潛谷相公文〉.

[주-D027] 지금 …… 무엇이겠습니까 :

《龍洲先生遺稿》 권13, 〈祭金相公堉文〉.

[주-D028] 우리나라는 …… 되겠습니까 :

《龍洲先生遺稿》 권6, 〈玉堂時斥和箚〉(1631).

[주-D029] 최진립의 …… 주장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5, 〈工曹參判貞武崔公墓碣銘幷序〉.

[주-D030] 윤황이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6, 〈大司諫八松尹公墓碣銘幷序〉.

[주-D031] 정온의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9, 〈桐溪鄭先生神道碑銘幷序〉 ; 권22, 〈贈吏曹判書桐溪鄭公諡狀〉.

[주-D032] 조선이 …… 주장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8, 〈褒忠節疏〉(1652) ; 《孝宗實錄》 권9, 孝宗 3년 11월 辛巳(13일).

[주-D033] 정온은 …… 받았다 :

鄭蘊 사후의 追崇 논의에 대해서는 이기순, 〈鄭蘊에 대한 追崇과 평가〉 《南冥學》 16, 2011, 215~230쪽.

[주-D034] 우리나라의 …… 이것입니다 :

《仁祖實錄》 권40, 仁祖 18년 5월 己丑(9일).

[주-D035] 1647년에 …… 했다 :

《仁祖實錄》 권48, 仁祖 25년 4월 丙子(5일).

[주-D036] 우리나라가 …… 아니겠습니까 :

《龍洲先生遺稿》 권8, 〈憲府修省箚〉(1648).

[주-D037] 예로부터 …… 있겠습니까 :

《仁祖實錄》 권36, 仁祖 16년 5월 乙亥(13일).

[주-D038] 저 오랑캐도 …… 아니겠습니까 :

《仁祖實錄》 권40, 仁祖 18년 5월 己丑(9일).

[주-D039] 1643년에 …… 신유였다 :

《仁祖實錄》 권44, 仁祖 21년 1월 辛丑(6일).

[주-D040] 이미 …… 판단했다 :

《龍洲趙先生年譜》 권1, 癸未 - 先生五十八歲.

[주-D041] 현지에 …… 때문이다 :

《仁祖實錄》 권44, 인조 21년 1월 辛丑(6일) ; 1월 戊午(23일) ; 2월 甲申(20일) ; 10월 己丑(29일) ; 11월 癸巳(3일).

[주-D042] 관백이 …… 있겠는가 :

《龍洲先生遺稿》 권23, 東槎錄, 〈關白說〉.

[주-D043] 조경은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23, 東槎錄, 〈倭國三都說〉.

[주-D044] 조경은 …… 거론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23, 東槎錄, 〈重答林道春書〉.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김문식 | 2015

 

용주유고 제12권 / 시책문(諡冊文)

효종 대왕 시책문〔孝宗大王諡冊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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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생각건대 광중(壙中)을 손질하는 일을 이미 다 마쳤고 봉분을 만들 때가 다가왔기에, 한 가지 선행으로 대표하여 시호를 정하고 이름을 높이는 책문(冊文)을 아뢰게 되었습니다. 해와 달 같은 광휘를 그려내기 어려우니, 그저 숭앙하여 받드는 정성을 펼칠 뿐입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는 깊은 근심을 지니고 성업(聖業)을 여셨으니 아름다운 기운이 일어나고 상서로움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시대가 중흥(中興)을 맞이하여 계력(季歷)이 태왕(太王)의 명(命)을 받았으니 지성(至性)이 차이가 없어 동해(東海)에 중륜(重輪)의 광채가 빛났습니다. 구가(謳歌)와 역수(曆數)가 귀의하였고 종묘사직과 여러 사람들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엄숙하고 부지런하게 종묘의 제사를 공경스레 받들었고, 온화하고 기쁜 마음으로 긴 세월 온청(溫凊)의 효도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정일(精一)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요 임금을 갱장(羹墻)에서 보듯 선왕을 사모하고, 때로 형제간의 친함을 펼치시어 보옥(寶玉)을 두루 나누어 주셨습니다. 긴 베개에 커다란 이불 덮고 형제가 다정히 함께 주무시니 꽃송이가 피어 서로 비추듯 우애가 빛나고, 성대한 미색과 간사한 소리는 고요히 멈추어 있는 면류관 아래 저 멀리 내치셨습니다.

수신제가의 도가 이미 넉넉하고 다스리기 위한 조건이 모두 펼쳐졌습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의관을 찾으시어 의지할 데 없는 백성들을 돌보려는 생각을 이부자리에서도 하셨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어진 이를 그리워하시어 산림에까지 폐백(幣帛)을 보내셨습니다. 마음은 삼대(三代)의 앞 시대를 노닐어 오경(五經)의 심오한 의미를 강학하셨습니다. 몸소 올바름을 행하시니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셨고 실속에 힘쓰시고 겉치레는 싫어하셨습니다. 자신을 희생삼아 스스로 책망하니 때맞춰 내린 비가 며루와 황충의 피해를 씻어내었고, 변변치 못한 음식을 괘념하지 않고 드시어 바닷가 고을에서 대합조개와 참조개를 진상하는 일이 일절 없도록 하였습니다.

신문고와 정려문을 설치하니 아름다운 말씀이 숨겨지는 일이 없게 되었고, 토지를 측량하여 부세를 정함은 어진 정치에서 우선시하는 바였습니다. 사방의 들판에서는 홍안(鴻雁)의 노래가 잠잠해졌고, 삼면(三面)으로 거미줄 같은 가혹한 법망이 풀리었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봄기운처럼 따스하여 거의 집집마다 표창할 사람이 있을 정도로 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문왕(文王)의 밝은 빛을 뵙는 것으로도 오히려 스스로 충분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무왕(武王)의 대열(大烈)을 드날리니 현묘하여 규정할 수 없었습니다.우림(羽林)의 고아를 돌보아 건원(建元 한 무제의 연호)의 제도를 정비하여 밝혔고, 신책군(神策軍)의 장수로는 산서(山西)의 양장(良將)이 출입하였습니다. 뭇사람들의 마음이 견고한 성채를 이루었으니 어찌 용맹한 군사가 지킬 겨를이 있겠습니까. 태평의 조짐이 보이고 수많은 복이 올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부지런히 애쓰다가 결국 열고(烈考 황고)께서 모진 병이 들게 되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90리를 절반으로 삼는 법인데 원대한 계획은 어디에 의지합니까. 큰 덕을 지니고도 중년(中年)도 살지 못했으니 천도(天道)는 묻기가 어렵습니다.

얼어붙은 겨울과 불타는 여름에도 간수(干隧)의 공훈이 마음에 자리 잡았고, 마른 길에 배가 가고 물길에 수레가 가야 할 상황에서도 계연(計然)의 계책을 손바닥에 보였습니다. 완성한 계책이 몹시 훌륭했는데 어찌 그리 바삐 세상을 염증 내어 떠나신 것입니까. 부질없이 정호(鼎湖)의 활만 남았고 헛되이 화옥(華玉)으로 꾸민 영궤(靈几)만 펼쳐져 있습니다. 깊은 산속 외진 골짝에서도 아버지를 잃은 듯한 슬픈 통곡이 들려오고 금군(禁軍)의 병사들과 갓을 쓴 선비들도 날마다 대궐을 에워싸고 매달려 통곡합니다.

돌아보건대 소자(小子)가 감히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았으나 침침한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할 뿐 닿을 수 없을 것 같고, 슬픔에 마음이 아득하고 어두워 간절히 찾아도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장사를 지낼 날짜가 정해져 도궁(塗宮 재궁(梓宮))을 바야흐로 거두려 하니 이에 옛 법전을 따라 시호를 바칩니다. 이는 일국의 공론에 부합하는 것으로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논의하는 것이 아니니, 백행(百行)의 근원인 효는 그 생각이 변함없는 것입니다.

삼가 신(臣) 의정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를 보내어 옥책(玉冊)을 바치게 하오니 존시(尊諡)는 선문장무신성현인(宣文章武神聖顯仁)이요, 묘호(廟號)는 효종(孝宗)입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성령(聖靈)께서는 굽어 비추시고 강림하소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예(禮)를 받으시어 상제의 뜰에 빛을 드날리시고, 저 아래의 백성들에게 음덕을 내려주시어 그 복이 후예(后裔)에까지 흘러 전하게 하여 주소서. 아, 슬프도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주-D001] 한 …… 높이는 : 《예기》 〈표기(表記)〉에 “공자가 말하기를 ‘선왕은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되, 한 가지 선행을 대표하여 지으니, 이름이 행실보다 지나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주-D002] 계력(季歷)이 …… 받았으니 : 효종(孝宗)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우로서 임금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주(周)나라의 태왕(太王)이 첫째 아들 태백(太伯)과 둘째 아들 우중(虞仲)을 제쳐두고 막내 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사를 인용하여 한 말이다. 《論語 泰伯》[주-D003] 중륜(重輪) : 태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광채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대에는 태자(太子)를 이에 비유하였다.[주-D004] 구가(謳歌)와 역수(曆數) : 구가란 찬양하는 노래이고, 역수란 천자가 되는 순서를 말한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백성들이 우(禹)의 아들인 계(啓)에게 모두 귀의하여 구가(謳歌)하면서 “우리 임금님의 아들이다.”라고 칭송하였다는 내용이 나오고, 《논어》 〈요왈(堯曰)〉에 요 임금이 순에게 선양하면서 “아, 그대 순이여, 하늘의 역수가 그대의 몸에 있게 되었으니, 중도를 진실로 지켜 행하도록 하오.〔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厥中.〕”라고 당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편 두보의 시에 “혼란기에 당태종(唐太宗) 같은 영웅이 일어났나니, 백성의 구가와 하늘의 역수가 그에게 돌아왔다오.〔草昧英雄起, 謳歌曆數歸.〕”라는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5 重經昭陵》[주-D005] 온청(溫凊)의 효도 :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은 부모님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한다.〔冬溫而夏凊〕”라는 말이 나온다.[주-D006] 정일(精一) : 정밀하게 이치를 살피고 전일(專一)하게 실행을 한다는 뜻으로,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천하를 양위할 때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묘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07] 갱장(羹墻) :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지극히 앙모(仰慕)한 나머지 국그릇에서도 요 임금을 보고 담장에서도 요 임금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연유한 단어로, 사후에 간절히 흠모하는 마음을 뜻한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주-D008] 꽃송이가 …… 비추듯 : 형제의 화목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효종과 인평대군의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던 것을 가리킨다. 《시경》 〈상체(常棣)〉의 “아가위 꽃송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 지금 어떤 사람들도 형제만 한 이는 없지.〔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주-D009] 자신을 희생삼아 : 원문은 ‘영묘(嬰茆)’인데, 띠 풀로 묶는다는 뜻이다. 탕(湯) 임금이 오랜 가뭄에 비를 빌면서 흰 수레에 백마를 타고 흰 베옷을 입고 흰 띠 풀로 자신을 묶어 스스로를 희생으로 바쳤다. 《尸子 卷上》[주-D010] 홍안(鴻雁)의 노래 : 피난민이나 이재민이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말한다. 홍안은 큰 기러기이다. 《시경》 〈홍안(鴻雁)〉에 “큰 기러기 날아간다, 쉬익쉬익 날개 치며. 먼 길 가시는 그 님, 들판에서 온갖 고생 다하시네.〔鴻雁于飛, 肅肅其羽. 之子于征, 劬勞于野.〕”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주-D011] 문왕(文王)의 …… 없었습니다 : 《서경》 〈입정(立政)〉에 “문왕의 밝은 빛을 뵈오며 무왕의 큰 업을 드날리소서.〔覲文王之耿光, 以揚武王之大烈.〕”라는 말이 나온다.[주-D012] 우림(羽林)의 고아를 돌보아 : 한 문제(漢文帝) 때 우림기(羽林騎)를 설치하였는데 종군했다가 전사한 자의 자손을 뽑아 우림군으로 양성하였다. 《漢書 卷19 百官公卿表上》[주-D013] 신책군(神策軍) : 본디 당(唐)나라 금군(禁軍)의 명칭으로 여기서는 금군을 말한다.[주-D014] 산서(山西)의 양장(良將) : 《한서(漢書)》 권69 〈조충국전(趙充國傳)〉에 ‘산동 지방에서는 재상이 나오고 산서 지방에서는 장수가 나온다.〔山東出相, 山西出將.〕’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산은 화산(華山)을 가리키고, 관은 함곡관(函谷關)을 가리킨다.[주-D015] 간수(干隧)의 공훈 : 청나라에 복수설치한다는 말이다. 간수는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생포한 곳이다.[주-D016] 계연(計然) : 성은 신(辛)이고 자는 자문(子文)으로 춘추 월(越)나라 사람이다. 범려(范蠡)의 스승으로 암산(暗算)에 능하였고 치부(致富)의 술(術)이 뛰어났으며, 월왕 구천(句踐)에게 재물을 축적하는 이재(理財)의 묘리를 가르쳐 오패(五霸)의 하나가 되게 하였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주-D017] 정호(鼎湖)의 활 : 정호는 옛날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호수를 말한다. 그 옛날 황제가 형산 아래에서 솥〔鼎〕을 주조하여 완성하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를 태우고 승천하였는데, 이때 신하와 후궁 70여 명이 용을 타고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용의 수염을 잡으니, 수염이 뽑히면서 황제의 활이 함께 떨어졌다. 이에 남은 백성들은 그 활과 뽑힌 수염을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주-D018] 저 …… 내려주시어 : 《서경》 〈홍범(洪範)〉 첫머리의 “하늘이 하민에게 보이지 않게 덕을 내려 그들의 삶을 돕고 화합하게 한다.〔惟天陰騭下民, 相協厥居.〕”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장유승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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