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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현주공파종회유훈:14세조삼휴당(諱休)선조님유훈!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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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공파종회유훈:14세조삼휴당(諱休)선조님유훈!

◐삼휴당(三休堂)諱休후손선산(회장님댁우측)

●한양조씨14세조 삼휴당(三休堂)  조휴(趙休)

공(公)의 휘(諱)는 휴(休)이고 자(字)는 휴휴(休休)이며 자호(自號)는 삼휴당(三休堂)이다. 바로 현주공(玄洲公) 조찬한(趙纘韓)의 맏아들이자 현곡공(玄谷公) 조위한(趙緯韓)의 조카이다. 처음에 현주공 형제가 만력(萬曆) 연간을 당하여 박학(博學)하고 고문사(古文詞)를 잘 지어 명성을 한 시대에 크게 떨쳤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기운(機雲, 진대(晉代)의 문장가들인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형제를 말함)이 다시 나왔다고 칭송하였는데, 공은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8세에 글을 배워 문장이 나날이 성취되었다. 10여 세에 이미 남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말들을 많이 하였고, 종유(從遊)한 자들도 모두 노성(老成)한 선배들이었으며, 16세에 상상(上庠, 성균관을 말함)에 올라 명성과 영예가 성하였다. 그러나 공은 사람됨이 옛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기개(氣槪)를 자부(自負)하여 지향과 절개가 우뚝 빼어났으므로, 이로부터 날마다 선진(先秦)ㆍ서한(西漢) 때의 글들을 읽었는데, 특히 장마(莊馬, 장자(莊子)와 사마천(司馬遷)을 말함)를 비롯한 대가(大家)들의 글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장옥(場屋, 과거 시험장을 말함)의 틀에 박힌 형식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숭정(崇禎)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에 우복(愚伏) 정공(鄭公, 정경세(鄭經世)를 말함)이 전형(銓衡)을 주관하였는데, 정공이 평소부터 공의 재주를 알고 있어서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에 천거하였다. 그 당시 현주공(玄洲公, 아버지 조찬한을 말함)이 선산(善山)의 수령(守令)으로 재임하고 있었으므로 문안을 다니기에 편리한 까닭에 마침내 부임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현주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으며 곧이어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거상(居喪)을 마친 뒤에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는데, 학도(學徒)들을 가르치는 방도가 매우 적절하였으나, 이윽고 벼슬을 그만두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속을 따라 달수를 계산하여 따지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었기 때문이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서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공은 모친을 모시고 발로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피난하였다가 난리가 끝나자 이리저리 떠돌다가 장성(長城)의 토천(土泉)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곧 현주공 형제가 석주(石洲) 권공(權公, 권필(權韠)을 말함)과 연구(聯句)를 지은 곳이었다. 공은 마침내 그곳에 집 한 채를 짓고서 백설헌(白雪軒)이라고 편액(扁額)을 걸고 물길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으며, 꽃과 대나무 등을 뒤섞어 심고 느긋하게 자적(自適)하였다.

이때 마침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의 관소(館所)에서 환국(還國)하여 공을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에 임명하였으므로 공은 조정에 들어가 뵙고서 그냥 돌아왔다. 다시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에 제수되어 인의(引儀)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수부 원외랑(水部員外郞)으로 옮겼다가 다시 판조(版曹, 호조의 별칭)로 옮기었다. 그 뒤에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갔는데, 공의 계씨(季氏)인 조비(趙備)가 이에 앞서 청하 현령(淸河縣令)으로 있었으므로 공의 형제가 임무를 교대하러 오가는 가마가 눈부시게 왕래하였으므로 길에서 보는 자들이 영예롭게 여기었다. 용궁현에는 국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설치는 자가 있어 남의 노비들을 많이 점유하였는데, 공이 부임하여 그를 법으로 다스리자, 그가 마침내 유언비어로 선동(煽動)하였다. 그 당시에 암행 어사(暗行御史)가 경내의 여러 고을 사이를 순행하고 있었는데, 그 자가 어사에게 연줄을 대어 공을 근거 없이 헐뜯고 비방하였다. 그러나 공에게 지적할 만한 죄가 없자, 공이 모친에게 음식을 푸짐하게 바쳤다고 죄안(罪案)을 만들어 공은 마침내 의금부(義禁府)에 나아가 심리를 받았는데, 사건이 중지되어 가라앉자 곧 교하(交河)의 선영(先塋) 아래로 돌아가서 복건(幅巾)과 심의(深衣) 차림으로 한가하게 지내며 뜻을 여유 있게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654년 효종 5년) 가을에 계씨(季氏)가 모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재차 호남(湖南)에 외직으로 나가기를 간청하였으므로, 공은 장차 그곳에 가서 모친에게 문안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선친의 기일(忌日)을 당하여 묘소에 가서 오랫동안 곡(哭)하느라고 풍한병(風寒病)이 호되게 들었다. 병이 낫지 않은 채로 길을 출발하여 모친께 문안을 마치고 백설헌에 돌아가 누워지내다가 11월 8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55세였다. 집의 뒤쪽에 있는 산기슭 사향(巳向)의 묏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은 천성이 참으로 효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나태하지 않았는데, 현주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드시게 하였고, 상(喪)을 당해서는 소금이나 간장조차도 입에 대지 않고 나무 젓가락으로 콩죽만 먹으면서 3년상을 마쳤으며, 아침과 저녁마다 슬프게 곡(哭)을 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복상(服喪)을 마친 뒤에도 남들과 얘기하다가 그 일을 언급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며, 일찍이 유장(遺狀)을 기초(起草)하였으나 끝내 차마 붓을 대지 못하였다.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미리 그달 초하루부터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대부인(大夫人)을 봉양함에 있어 얼굴에 화색(和色)이 물씬 넘치어 슬하(膝下)에서 우스개까지 해보이며 마치 어린애처럼 재롱을 부리기도 하였다. 집안에 사사로운 저축이 없어서 처자식들이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는데도 공은 그것을 덤덤하게 여기었다.

젊었을 때 비록 문장을 좋아하여 옛 작자(作者)의 법도를 추종(追從)하였으나, 또한 능히 이치와 의리로써 스스로 기뻐하였다. 상중(喪中)에 독례(讀禮)하는 여가(餘暇)에도 손수 성현(聖賢)의 훈계(訓戒) 중에 자기에게 절실한 것을 초록(抄錄)하여 그 책의 이름을 ≪치기진경(治己眞經)≫이라고 짓고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은 채로 마치 엄한 스승을 마주하고 있는 듯이 하였으며, 거상(居喪)하는 기간이라고 하여 조금도 게을리 지내지 않았다. 그러한 까닭에 무릇 득실(得失)ㆍ비탄(悲歎)ㆍ영욕(榮辱)ㆍ이해(利害) 따위에 조금도 그 속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운명하던 날에는 부녀(婦女)들에게 손짓하여 가까이 오지 말라고 내보내고서 자리에 똑바로 누운 채 베개를 옮기고 서거(逝去)하였으니, 평생 동안 수양한 것을 또 대략 알 수가 있다.

공은 평소에 재능을 갖추어서 관직에 재임하게 되면 매우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이치를 잘 분별하기로 일컬어졌다. 청암역(靑巖驛)으로 말하자면, 역졸(驛卒)들이 오래 지난 뒤에도 공의 선정(善政)을 그리워하였으니, 공의 어진 마음씨가 남들을 감동시킨 것이 깊었던 것이다.

공은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기풍이 웅건하고 언사(言辭)가 풍부하여 선대의 법도를 충분히 계승하였으며, 현주공(玄洲公)도 일찍이 말하기를, “정밀하게 도달한 곳은 나로서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였을 정도이다. 공이 저술한 것들은 난리로 인하여 산일(散逸)되었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단지 그중의 극히 적은 분량이니, 더욱 애석한 노릇이다.

조씨(趙氏)는 한양(漢陽)을 근원(根源)으로 삼아 명덕(名德)이 서로 잇달아 배출되었는데,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壁)과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에 이르러 계속하여 국초(國初)에 현달(顯達)하였다. 공의 증조(曾祖)는 조옥(趙玉)으로 현령(縣令)을 지냈다. 할아버지는 조양정(趙揚庭)으로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곧 현주공으로,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공의 부인은 원성 원씨(原城元氏)로 우윤(右尹)을 지낸 원황(元鎤)의 딸인데,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인 조두상(趙斗祥)은 참봉(參奉)이고, 차남인 조규상(趙奎祥)은 진사(進士)이며, 딸들은 감역(監役) 박순(朴錞)과 이항(李恒)ㆍ윤세징(尹世徵)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이 낳은 아들로서 조유상(趙柳祥)과 조오상(趙五祥)이 있다. 손지(孫支, 손자를 비롯한 후손들을 말함)가 영체(零替)하여 겨우 약간 명이 있다.

나는 공이 살아있을 때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였는데, 공이 나를 보잘것없다고 무시하지 아니하여 여러 번 공과 더불어 토론(討論)을 하였으니, 지금 이 일을 맡게 되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옷소매를 적시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문장은 심오하였고 행실은 진지하였으며, 학문은 박식하였고 정사는 느긋하였네. 세상에 드문 인물이었으나 아! 생명이 길지 못하였으니, 이 분의 명을 지어 지나는 자들이 공경하게 하노라.

[네이버 지식백과] 조휴 [趙休]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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