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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양절공-한풍군파-가산공파-현주공파보화보중에서....(편집)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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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산 8

(도로명)전남 나주시 다시면 절구길 56

◉경기 파주시 탄현면 열살미길 230

(지번)경기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 634-2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비홍로 1178-19

◉(지번주소) 남원시 주생면 정송리 산 10-7

左承旨玄州先生趙公遺墟婢文 黃州人 산암(汕巖) 변시연(邊時淵. 1922~ 2006)謹撰

노강 박래호(78) 동양학연구원장

[左承旨玄州先生趙公遺墟婢文]

◎노강(蘆江) 박래호(朴來鎬.78) 동양학연구원장 번역

●左承旨玄州先生趙公遺墟婢文 黃州人 산암(汕巖) 변시연(邊時淵. 1922~ 2006) 謹撰

 

옛날 이조시대의 선조와 인조 임금 시대에 좌승선 玄洲선생 한양조공 纘韓이 문장과 經術로 온 세상에 크게 울렸으니 그 문하인중 李白軒 愼 索隱은 선생의 문장을 左馬 楊王 李杜 韓柳에게 비하였고 친구인 澤堂 李文靖公은 위로 중국 전후 漢나라의 학문을 밟았으며 아래로 六朝의 문장과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이제 태어나 천견박식한 나로서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리요만은 그러나 선생을 어찌 가히 문장으로써만 말할 수 있으랴. 선생은 문무의 재략을 겸항였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으며 벼슬에 있을적에 충성을 다하였고 조정이 혼란하게 되니 外職을 구하여 자기의 절개를 지켰고 또 鄭遇伏 金淸陰같은 어진분들과 뜻을 같이하고 의리를 합하여 서로 往來하였으며 훌륭하게 당시의 큰 學者가 되었으니 朴玄石 先生이 저술한 墓碣銘을 보면 가히 그의 學文과 天性의 순직함을 증거할 것인즉 정신적인 근본 교육이 아니면 밖으로 나타난 학문이 이같이 從 橫奔放하고 高朗瑰瑋 할수 있을손가. 선생이 일찍 長城고을의 남쪽 土泉마을(現 광산구 광산동 五龍마을)에 살으실적에 배운자를 가르치되 게을리 아나하시어 성공을 많이 시켰으며 權石洲 및 선생의 仲氏玄谷公이 가끔 찾아와 塤(壎)이란 음악과 塤篪(壎篪相和훈지상화)의 놀음처럼 서로 화답하여 돌아감을 잊었다하니 이제 土泉이란 詩句 千數百의 말을 읽어보면 가히 그 당시 風流 아조가 조금의 티끌이 없음을 상상할 수 있다。 슬프도다 세월이 오래되매 物華가 변천하여 平泉의 꽃과 돌처럼 그 옛모양을 지키기 어려울 것인즉 선생의 遺墟에 살고 있는 子孫들이 어찌 계힉한바 없으리요. 詩傳에 말하기를 내 뒷 자손이 있어 나의 터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土泉을 두고 할말이라 하겠다. 내 일찍 그 마음을 지날제 꽃이며 돌이며 풀잎이며 나무가 선생이 좋아하시여 詠嘆하신 것인즉 마땅이 효자자손으로 차마 그대로 버려둘 쏜가。 이리하여 큰 돈을 내어 큰 비석을 세워 내세에 무궁하도록 전하기 위하여 十代孫 二元 三元과 十參代孫 成喆이 문중의 논의를 따라 나에게 글을 부탁하니 슬프다。토천이 세상에 이름난 것이 이 샘이 달다 함이 아니여, 땅이 비옥하다함도 아니요, 산이 아름답고 물이 고운 것만이 아니라 오직 선생께서 끼쳐놓은 터이기 때문이다。 모두 선생의 후손이 된 자는 오직 선생을 존경하여 그 門中의 대대로 지킨 덕업을 떨어치지 아니한즉 어진 정승이며 나라를 빛낼 문장이 이 땅에 계속 이을 것이다。 이리하여 토천이 어진 주인을 만나 천하에 이름을 축하 하노라。

 

을묘 二月 黃州人邊時淵 지음。

密城人朴來鎬 번역。

http://blog.daum.net/hanyangcho/15718089

백촌거사 2020.04.27 12:58

현주선조님의 필묵은 소동파의 전적벽부 마지막 구절 之既白에서 시작해 ~~~ 후적벽부 앞에서부터 已而歎까지의 초서임을 고전 번역원에 계신 선생님으로부터 지식을 얻었습니다.

 

肴核旣盡 杯盤狼藉 相與枕籍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효핵기진 배반낭자 상여침적호주중 부지동방지기백

 

고기와 과일 안주가 이미 다하고 술잔과 소반이 어지럽네. 배안에서 서로 함께 포개어 잠이드니,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네.

 

◈ 후 적벽부(後 赤壁賦) -

 

- 소 식 (蘇 軾) -

 

是歲十月之望, 步自雪堂, 將歸於臨皐, 二客從予過黃泥之坂.

시세시월지망, 보자설당, 장귀어림고, 이객종여과황니지판.

 

그 해 시월 망일(望日)이었다. 설당(雪堂)에서 나와 임고정(臨皐亭)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두 사람의 객(客)과 함께 황니(黃泥) 고개를 넘고 있었다.

 

霜露旣降, 木葉盡脫, 人影在地, 仰見明月, 顧而樂之 行歌相答.

상로기강, 목엽진탈, 인영재지, 앙견명월, 고이락지 행가상답.

 

벌써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뭇잎은 모두 떨어져 있었다. 대지 위에 어른대는 사람의 그림자, 고개를 들어보니 둥두렷 밝은 달! 사위를 둘러보다 문득 즐거워진 마음에 걸으며 노래를 부르니, 객(客)들도 함께 따라 불렀다.

 

已而歎曰: “有客無酒, 有酒無肴; 月白風淸, 如此良夜何.”

이이탄왈: “유객무주, 유주무효; 명백풍청, 여차량야하.

 

그러나 잠시 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귀한 손이 오셨건만 마실 술이 없구나! 마실 술은 있다하되 안주거리 없구나! 하얀 달에 맑은 바람, 이리도 좋은 밤을 어인 수로 보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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