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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전문(全文)◈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3. 19.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전문(全文)◈


(第一面)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郎剖卵降世生而有聖□□□□□□命駕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郎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號爲永樂大王恩澤洽于皇天武威振被四海掃除□□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弔卅有九寔駕棄國以甲寅年九月廿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五備□遊觀土境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軍□□首攻取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 (第二面)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歸穴□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八年戊戌敎遣偏師觀愼土谷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盡□□□安羅人戌兵新□□□□其□□□□□□□言 (第三面)□□□□□□□□□□□□□□□□□□□□□□□□□□辭□□□□□□□□□□□□□潰□□□□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廿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國駭□□□□□□□□□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民四家盡爲看烟于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訾連二家爲看烟俳婁人國烟一看烟卌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廿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廿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氐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第四面)七也利城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一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太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七閏奴城國烟二看烟廿二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瑑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彡穰城廿四家爲看烟散那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勾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烟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家爲看烟國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羸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洒掃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廿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卅看烟三百都合三百卅家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烟戶不令差錯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1) 6년조 전문(前文) : 1면 8행 34열~9행 24열  이 기사가 1889년 최초 발표 당시부터 일본인들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삼한지배설인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하기 위하여 어떤 글자는 변조하고, 어떤 글자는 쪼아내어 없애고, 어떤 글자는 탁본을 수정한 후, 자기들에게 유리한 자의적 해석을 통해 대륙 침략과 식민지 교육의 역사논리를 만들어서 활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신묘년 기사’로 알려져 있으나 옳지 않다. 연도별로 기술된 비문에서 5년에 비려를 공격하고 돌아왔다는 기사 뒤, 6년 출병 사이에 들어가 있는 기록으로서 호태왕 원년인 신묘년에 일어난 일이나 공적을 기술할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존 학자들의 의견도 다양하고, 연구회의 토의도 매우 치열했으며, 결론은 ‘6년 기사’의 전문(前文)으로서 내용상으로 1면 9행 6열의 글자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倭’자로 읽었으나 이형구만이 ‘後’자로 보았으며, 11~13열도 다른 사람들은 거의 모두 ‘來渡海’로 해독했으나 이형구만 ‘不貢因’으로 읽어 공격의 이유를 ‘조공을 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이를 설명한 그의 책의 내용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사에는 백제만 공격하였으므로 ‘백잔··신라를 파하여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과도 앞뒤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속민’과 ‘신민’이 다르다고 해도 이미 ‘예부터 속민(舊是屬民)’인데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 등이 다소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져 채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17~18열의 글자가 탁본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학자들(김덕중, 서영수~왕건군)은 해독하지 못했고, ‘隨破’(영희, 김택영, 조용은), ‘聯侵’(이덕수, 이유립), ‘倭寇’(이형구)로 다르게 읽었다. 뒤에 나오는 문장과의 연결성 등으로 보아 이유립은 근거 제시가 있고, ‘隨破로 볼 경우 주어는 호태왕이 되는데 그러면 영락 1년조에 들어가야 한다’는 왕건군의 주장에 일리가 있으므로 ‘聯侵’을 취하기로 했다.  다음 19줄 글자(‘羅’자 앞)도 아래 그림처럼 석문에서는 완전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0개의 석문에서 ‘新’자로 판독했고, 광개토태왕광장의 비문과 회여록 석문이 우측에 斤자가 있는 것으로 읽은 점으로 미루어 ‘新’자로 읽는 것이 무난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출병의 이유를 이렇게 하여 1차로 완성한 석문은 다음과 같다.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聯侵[隨破]新羅以爲臣民  이 부분은 일본인들이 1889년 처음 발표할 때부터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신경을 써서 논리적인 반박자료를 모았다. 먼저 일본 측 해석의 시초인 1889년 회여록에 실린 요코이(横井忠直)나 1894년 『단군론』에서의 백조고길 등 일본 측 통설을 알아야 반박을 할 수 있다. 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碑文 중에 日本과 크게 관계된 부분이 있으니 “辛卯年AD 391에 바다를 건너가 百濟와 新羅를 破하고 臣民을 삼았다.”는 몇 구절이 그것이다. 古來로 한국과 中國의 歷史書에는 우리나라(日本)가 나라의 변경을 도적질했다든가 통빙(通聘)했다는 것은 써 왔지만, 백제와 신라가 우리 일본의 臣民이라고 쓴 것은 없다.  2) 6년 백잔 정벌 이유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聯侵[隨破]新羅以爲臣民  a)윤덕원 : 백제와 신라의 예전부터 지금까지 왕을 따르던 사람들은 길로 와서 조공을 바쳤지만 왜는 辛卯부터 수년간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을 바쳐)야 했다.(新羅 百濟는 이미 긴 세월을 조공했고 倭는 辛卯부터 조공했다. 辛卯는 永樂 元年이다.) 百殘□□□(隨破新)羅를 破하여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b)이유립 : 백잔과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이때까지 조공해왔는데 왜가 신묘에 침범해 오니 왕께옵서 바다를 건너가서 깨뜨리시었더니 백잔이 왜를 끌어넣어다가 신라를 침노하게 되었다. 왕께옵서 말씀하시기를 ‘모두 우리의 신민이었다’고 하시면서 

[第三面]
▨▨▨▨▨▨▨▨▨▨▨▨▨▨▨▨▨▨▨▨▨▨▨▨▨▨辭▨▨▨▨▨▨▨▨▨▨▨▨▨潰▨▨▨▨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廿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國駭▨▨▨▨▨▨▨▨▨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民四家盡爲看烟于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訾連二家爲看烟俳婁人國烟一看烟卌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廿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廿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氐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
▨▨▨▨▨▨▨▨▨▨▨▨▨▨▨▨▨▨▨▨▨▨▨▨▨▨辭▨▨▨▨▨▨▨▨▨▨▨▨▨潰▨▨▨▨安羅人戌兵(????????~~~안라인수병)
마모, 멸실, 훼손으로 거의 판독 불가, 신라를 구하고 임나가라 정벌을 완수한 후 점령지역 안정을 위한 행위들을 기재하지 않았을까 추측만 합니다.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上廣開土境好太王 ▨▨▨▨寐錦▨▨僕勾▨▨▨▨朝貢
(석신라매금 미유신래론사 ?국상광개토경호태왕 ????매금??복구????조공)
예전에는 신라왕(매금)이 몸소 와서 국사를 논한 적이 없었는데 국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직접 신라를 구해준 정벌 이후) 신라왕이 왕의 신하로서 조공을 하게 되었도다.(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결정적인 패권 강화와 내정개입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사건으로 추정)

十四年 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石城▨連船▨▨▨
(십사년 갑진 이왜불궤침입대방계?????석성?연선???)
제위 십사년(갑진)에 왜가 무도하게도 대방지역으로 침입하여 ????석성?? 배를 줄지어 ???하였도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전쟁하면 육로로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이처럼 수군을 이끌고 배를 탄 채 바닷길을 거슬러 침투하여 전쟁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음을 알 수 있음)​

王躬率▨▨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斬煞無數
(왕궁솔?? 종평양???봉상우 왕당요절자 왜구궤패참살무적)
이에 왕께서 몸소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지나 ???산봉우리에 이르러 왜와 마주하였는데, 왕이 정예군사로 적의 핵심을 찌르고 베어넘기니 왜구들이 무참히 패하여 참살당한 자가 부지기수로 많았도다.(과장된 표현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당시 왜의 군사력이 배를 타고 오늘날 황해도 지방까지 침범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적지 않은 군사력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백제도 왜의 세력을 끌어들였겠지......)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師▨▨合戰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住城▨城▨▨▨▨▨▨城
(십칠년 정미 교유보기오만?????????사??합전참살탕진 소획개갑일만여영 군자기계불가칭수 환파 사구성, 루성?주성,?성,??????성)
제위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오만을 보내시어 ???????사?? 전투를 벌여 적을 죽이고 완전히 소탕하였는데, 이 때 획득한 갑옷이 일만여벌이요, 각종 군장비들은 셀수 없을정도로 많았도다. 회군하는 길에 사구성, 루성, ?주성 등을 공략하여 함락하셨다.
(이 때 합전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 대규모 회전이 이루어진 듯 하며, 전투의 승리로 획득한 갑옷과 군장비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만큼 큰 전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비 문구의 훼손, 멸실로 상대가 누구였는지 추측할 수 밖에 없으나 대체로 당시 국경을 맞대고 계속 충돌하던 후연 세력이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는 견해가 정설임)

廿年 庚戌 東夫餘 舊是鄒牟王屬民中叛 不貢 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國駭▨▨▨▨▨▨▨▨▨
(이십년 경술 동부여 구시추모왕속민중반 불공 왕궁솔 왕토군 지여성 이여?국해????????)
제위 이십년 경술년, 동부여는 추모왕대부터 속민이었으나 이를 어기며 조공을 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왕께서 직접 정벌군을 이끌고 부여의 수도성에 이르니 크게 놀라 혼란스러워 ????하였다. 

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
(왕은보복어시선환우기모화수관래자미구루압로비사마압로타사루압로숙사사압로???압로범소공파성육십사촌일천사백)
이로부터 왕의 은혜가 동부여 곳곳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으며, 또한 왕의 어지신 정책에 감화하여 돌아오는 길에 함께 따라온 자로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 압로, 숙사사압로, ???압로가 있었다. 무릇 공략한 성이 60이요 1,400여촌이나 되었도다.(동서남북 안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신 광개토대왕님....)

 ===== =============이하 수묘인 관련 해석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守墓人烟戶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民四家盡爲看烟于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訾連二家爲看烟俳婁人國烟一看烟卌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廿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廿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氐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

[第四面]
七也利城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一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太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七閏奴城國烟二看烟廿二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瑑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彡穰城廿四家爲看烟散那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勾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烟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家爲看烟國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羸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洒掃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廿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卅看烟三百都合三百卅家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烟戶不令差錯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 수묘인 관련 비문내용 요약정리
 광개토대왕 이전까지의 선왕들의 묘에는 무덤을 지키는 자들(수묘인)만 있었고, 세월이 흘러 서로 섞이게 되니 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우려하여 생전에 왕께서 직접 명을 내리시기를

"선조왕들과 본인의 묘에 이러한 비석을 각각 세워서 수묘인들이 섞이고 흩어져 묘관리에 차질이 없도록 바로하고, 수묘인들 또한 노예처럼 매매되는 것을 금지시켜 온전하게 고구려 왕실의 종묘가 모셔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니 
부유하거나 권력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함부로 수묘인들을 손댈 수 없게 하고, 이를 어길 시 형벌을 받고 본인이 수묘역할을 하도록 하셨다."

이상 연재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며 마무리 하겠습니다.

1. 애초에 광개토대왕비는 생전에 대왕의 명에 따라 고구려 왕실의 종묘(본인 포함)를 잘 관리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고구려 최초의 묘비였습니다.

2. 따라서 비문의 주된 내용은 고구려 왕실의 우월한 혈통(천제와 하백의 자손)과 추모왕부터 17대손 광개토태왕에 이르는 역대 왕들의 업적과 공훈을 기리는 일종의 홍보(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건립된 것이었구요.

3. 이러한 배경 하에 당시 삼국시대 백제, 신라와의 관계를 고구려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세계관내 속국으로 파악했으며, 태왕의 모든 군사적 행동은 이러한 세계관에 도전하여 외부세력인 왜를 끌어들인 백제를 징벌하고, 속국인 신라를 보호한다는 철저하게 계산되어 만들어진 대의명분 하에 수행된 것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4. 이렇게 과다포장된 내용이나 비문에 담긴 문장 속 숨은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신묘년에 갑자기 등장하는 왜의 군사력을 삼국시대 일정기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허무맹랑한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엉뚱한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삼국시대 사람들도 허풍, 과장과 거짓말을 현대인만큼 잘하였다는 걸 모르다니.........)

5. 개인의 의견이지만, 저는 근초고왕~침류왕대에 이르는 백제의 전성기가 지나며 이후 진사왕의 왕위 계승과정에서 권력간 큰 갈등이 있었고, 점점 국력을 회복해가는 고구려와의 무력충돌에서 매번 패하는 상황까지 겹친 백제가 당시 바다 건너 왜로 망명하였던 아신왕의 외교술로 왜의 군사력을 백제로 끌어들여 백제의 왕위를 가져옴과 동시에 고구려와 신라에 대한 무력수단으로 활용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고구려 입장에서는 천하의 중심 고구려가 속국 따위와 전쟁을 벌인 게 아니라 세계관 밖 이질적 존재와의 싸움으로 본인들 입맛에 맞게 포장한 문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유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 레인타임의 역사야 놀자_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이었습니다. 
[출처]역사야 놀자3_광개토대왕비문 해석 by RainTime|작성자 Raintime

▣광개토대왕 비문 전문 직역▣

■옛적에 시조이신 추모왕이 고구려 나라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모후는 하백의 따님이셨다. 추모왕은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내려오시니 성덕이 높았다. 惟昔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德 유석시조 추모왕지창기야 출자북부여 천제지자 모하백녀랑 부란항세 생이유성덕 

 

☞광개토대왕 비문은 평안도 발음을 사용하는 바, 이를 서울말로 바꾼 것이 번역의 전부임. 장수왕에 관련된 (일부) 글은 함경도 발음을 보이므로, 고구려에서는 적어도 평안도/함경도 2 개 발음을 사용한 것으로 보임. * 유석시조 ---------------------------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지창기야 --------------------- 싸우러 나갈 때는 출자북부여 ------------------------- 어디에서나 천제지자 ---------------------------- 모든 사람이 모하백녀앙 -------------------------- 따라 나서며 부안항세 ---------------------------- 목숨을 아끼지 않고 생이유성덕 -------------------------- 혼신을 다했다. 

 

■추모왕은 모후의 명을 받아 동부여를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추모왕은 나루터에서 말하였다. “황천의 아들이오,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 왔다. 나를 위하여 갈대배를 만들어 띄워라.” 자라가 듣고 즉시 갈대배 만들어 건너게 해주어 추모왕이 강물을 건넜다. 鄒牟王 奉母命駕 巡幸南下路 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爲我連葭 浮鼈應聲 卽爲連葭浮鼈 然後造渡 추모왕 봉모명가 순행남하로 유부여엄리대수 왕임진언왈 아시황천지자 모하백녀랑 추모왕위아련가 부별응성 즉위련가부별 연후조도 

 

추모왕 봉모 ----------------------- 전투에서 명가 순행남 ----------------------- 광개토대왕은 하오 유부여엄이 ------------------- 언제나 앞에서 대수 왕임진언 --------------------- 공격하여 왈 아시황천지 --------------------- 모든 곳에서 자 모하백여랑 추 ------------------ 싸움을 모왕위아년가 부 ------------------- 유리하게 하여 별응성 즉위년가 ------------------- 전투를 부별 연후조도 --------------------- 이겼다

 

황천은 하늘에 대한 극존칭이다. 즉, 천손을 강조한 것이고 하백은 물의 신이다.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 엄호수, 엄사수 등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개사수라고도 했는데 고대에는 개사수, 혹은 엄리대수라고 불렀다. 지금의 통유현通楡縣 곽린하霍林河다. (3부 2장 2절 참조) 동부여에서 고주몽의 모후인 유화柳花부인 묘(통유현 전장포毡匠鋪 고묘 추정)를 개사수에 세우니 훗날 엄니(=어머니)대수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한단고기-북부여기]에서는 유일하게 분릉수岔凌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송화강의 지류 나린하拉林河의 난릉蘭凌 부근을 의미하며 나린하는 내린천으로서 보통 부여의 중심 물이름이다. 나린하 상류에 서란舒蘭이 있고 고주몽이 태어난 곳이라고도 전한다.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에 의해 동북으로 쫓겨난 북부여가 세워진 동부여 위치로서 나린하는 타당하다. 동부여가 가섭원 또는 분릉하에 세워졌다는 [한단고기-가섭원부여기]에 의하면 가섭원의 중심이 분릉수였다.[광개토왕 비문]에서 고주몽이 태어난 곳이 북부여인데, 즉 천산의 북부여 출발지로부터 흑룡강성 나린하도 북부여였고, 그리고 위나라 때는 눈강嫩江 동쪽 흑수지역까지 북부여다. 따라서 고두막한 졸본부여에 의해 천산에서 밀려난 북부여는 흑룡강성 나린하에 자리잡았다가 고주몽이 태어난 후에 조남시 부근으로 돌아왔고, 고주몽이 그곳에서 말지기를 하다가 도망쳤고, 그후 동부여는 대무신왕 때에 망하여 다시 흑룡강성으로 옮겨간 것으로 고려된다. 

 

■옛적에 시조이신 추모왕이 고구려 나라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모후는 하백의 따님이셨다. 추모왕은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내려오시니 성덕이 높았다. 惟昔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德 유석시조 추모왕지창기야 출자북부여 천제지자 모하백녀랑 부란항세 생이유성덕 

광개토대왕 비문은 평안도 발음을 사용하는 바, 이를 서울말로 바꾼 것이 번역의 전부임. 장수왕에 관련된 (일부) 글은 함경도 발음을 보이므로, 고구려에서는 적어도 평안도/함경도 2 개 발음을 사용한 것으로 보임. * 유석시조 ---------------------------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지창기야 --------------------- 싸우러 나갈 때는 출자북부여 ------------------------- 어디에서나 천제지자 ---------------------------- 모든 사람이 모하백녀앙 -------------------------- 따라 나서며 부안항세 ---------------------------- 목숨을 아끼지 않고 생이유성덕 -------------------------- 혼신을 다했다. 

 

■추모왕은 모후의 명을 받아 동부여를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추모왕은 나루터에서 말하였다. “황천의 아들이오,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 왔다. 나를 위하여 갈대배를 만들어 띄워라.” 자라가 듣고 즉시 갈대배 만들어 건너게 해주어 추모왕이 강물을 건넜다. 鄒牟王 奉母命駕 巡幸南下路 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爲我連葭 浮鼈應聲 卽爲連葭浮鼈 然後造渡 추모왕 봉모명가 순행남하로 유부여엄리대수 왕임진언왈 아시황천지자 모하백녀랑 추모왕위아련가 부별응성 즉위련가부별 연후조도 

추모왕 봉모 ----------------------- 전투에서 명가 순행남 ----------------------- 광개토대왕은 하오 유부여엄이 ------------------- 언제나 앞에서 대수 왕임진언 --------------------- 공격하여 왈 아시황천지 --------------------- 모든 곳에서 자 모하백여랑 추 ------------------ 싸움을 모왕위아년가 부 ------------------- 유리하게 하여 별응성 즉위년가 ------------------- 전투를 부별 연후조도 --------------------- 이겼다

 

황천은 하늘에 대한 극존칭이다. 즉, 천손을 강조한 것이고 하백은 물의 신이다.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 엄호수, 엄사수 등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개사수라고도 했는데 고대에는 개사수, 혹은 엄리대수라고 불렀다. 지금의 통유현通楡縣 곽린하霍林河다. (3부 2장 2절 참조) 동부여에서 고주몽의 모후인 유화柳花부인 묘(통유현 전장포毡匠鋪 고묘 추정)를 개사수에 세우니 훗날 엄니(=어머니)대수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한단고기-북부여기]에서는 유일하게 분릉수岔凌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송화강의 지류 나린하拉林河의 난릉蘭凌 부근을 의미하며 나린하는 내린천으로서 보통 부여의 중심 물이름이다. 나린하 상류에 서란舒蘭이 있고 고주몽이 태어난 곳이라고도 전한다.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에 의해 동북으로 쫓겨난 북부여가 세워진 동부여 위치로서 나린하는 타당하다. 동부여가 가섭원 또는 분릉하에 세워졌다는 [한단고기-가섭원부여기]에 의하면 가섭원의 중심이 분릉수였다.[광개토왕 비문]에서 고주몽이 태어난 곳이 북부여인데, 즉 천산의 북부여 출발지로부터 흑룡강성 나린하도 북부여였고, 그리고 위나라 때는 눈강嫩江 동쪽 흑수지역까지 북부여다. 따라서 고두막한 졸본부여에 의해 천산에서 밀려난 북부여는 흑룡강성 나린하에 자리잡았다가 고주몽이 태어난 후에 조남시 부근으로 돌아왔고, 고주몽이 그곳에서 말지기를 하다가 도망쳤고, 그후 동부여는 대무신왕 때에 망하여 다시 흑룡강성으로 옮겨간 것으로 고려된다. 

 

■비류곡에 이르러 홀본의 서성, 산상에 성을 지어 도읍을 삼았다. 그러나 불락한 때에 황룡이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산 위에서 용머리에 올라타고 승천하였다. 於沸流谷 忽本西城 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龍負昇天 어비류곡 홀본서성 산상이건도언 부락세위 천견황룡래하영왕 왕어홀본동강 황용부승천 

 

어비유곡 홀본서 --------------- 만주를 넘어 성 산상이건도언 부악 ---------- 나아가는데 세위 천견황용애 --------------- 주민의 호응을 얻어 하영왕 왕어홀본 --------------- 적들을 동강 황용부승천 --------------- 항복시켰다 

 

■추모왕이 정했던 세자 유리왕은 도덕정치로서 다스려 나라가 흥하였다. 대무신왕은 뒤를 이어 더욱 번성하게 하였다. 주류왕의 십칠세 후손왕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즉위하여 연호를 영락이라 정했다. 태왕의 은택이 세상에 두루 미치고 그 위엄은 사해에 떨쳤고 악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고 업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오곡이 풍족하였다. 태왕은 39세에 붕어하셔서 떠나시게 되었다. 414년 9월29일에 산릉을 완성하여 옮기시게 되었다. 왕릉위에 비석을 세워 태왕의 훈적을 새겨 두니 이를 후세에게 전하는 바 아래와 같다.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乘基業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 太王 恩澤 洽于 皇天 威武 橫被四海 掃除○○庶寧 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三十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 九月二十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積 以示後世 焉其詞曰 고명세자유류왕 이도흥치 대주류왕 소승기업 답지십칠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이구등조 호위영락 태왕 은택 흡우 황천 위무 횡피사해 소제○○서영 기업 국부민은 오곡풍숙 호천불조 삼십유구 연가기국 이갑인년 구월이십구일을유, 천취산릉 어시립비 명기훈적 이시후세 언기사왈 

 

고명세자유유 ------------------- 많은 사람이 왕 이도흥치 대 ----------------- 하나같이 주유왕 소승기업 ---------------- 도와 답지십칠세손 국 ---------------- 성을 쌓고 강상광개토경평 ----------------- 해자를 안호태왕 이구등 ---------------- 파 조 호위영악 태왕 --------------- 수비를 견고히 하여 은택 흡우 황천 위 -------------- 안전을 무 횡피사해 소제 --------------- 확보하였으며 ○○(부부)서영 기업 국부민 ---- 젊은이들은 은 오곡풍숙 호천 --------------- 싸울 때 불조 삼십유구 연 --------------- 일심동체로 가기국 이갑인년 ---------------- 싸우니 구월이십 ------------------------ 매우 구일을유, ------------------------ 많은 천취산응 어시입 ----------------- 전공을 비 명기훈 ----------------------- 세워 적 이시후세 언기사왈 ----------- 귀감을 보였다

 

대무신왕의 17세 후왕인 광개토왕은 二九세, 즉 18세에 즉위하였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을미년395년이 영락 5년, 병신년396년이 영락 6년이었다는 기록에 의하면 그의 즉위년도는 391년 신묘년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재위 22년에 붕어하였는데 겨울 10월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왕의 즉위년도가 392년으로, 붕어년도는 413년으로 각기 1년씩 뒤로 미루어져 있다. 이는 장수왕長壽王의 즉위년도까지 1년 늦추어 놓았고 그 이후 장수왕의 붕어년도부터 다시 맞는다. 414년이 되는 갑인년 9월29일에 광개토왕릉이 완성되었고 그날 천장遷葬하였다. 장수왕長壽王 즉위 3년이 되는 해이다. 

 

■영락5년 395년에 태왕은 비려가 안정하지 못하므로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을 나가, 부산, 부산을 돌아 염수 위에 있는 근거지를 깨트리고, 여섯 개의 대부락과 칠백 개의 마을을 쳐부수고 빼앗은 소와 말, 양들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이 많았다. 태왕은 거기서 군사를 돌려 환국하시었다. 이때, 태왕은 [망]평도를 지나가기 위해 동쪽으로 오는 길은, [유]성, 력성, 북풍성 등을 거쳤다. 대왕은 미리 사냥을 준비하여 국경도 둘러보시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오셨다. 維昔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爭又 躬率往討 回富山負山 至鹽水上破其丘, 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 [望-형태로서 추정]平道 東來,[柳-우변 일부만 보인다.]城,力城,北豊. 王備獵游觀土境田獵而還 유석 영락오년세재을미 왕이비려부식쟁우 궁솔왕토 회부산부산 지염수상파기구, 부락육,칠백영, 우마군양부가칭수 어시선가 인과 [망-形態로서 墜穽]평도 동래,[유-右邊 一夫만 보인다.]성,역성,북풍. 왕비엽유관토경전렵이환 

 

유석 영악오연세 ---------------- 장수를 뽑을 때 재을미 왕이비여 ---------------- 무엇보다도 부식쟁우 궁솔왕 ---------------- 인덕을 토 회부산부산 지 --------------- 중요하게 여겨 염수상파기구, 부 --------------- 덕망을 악육,칠백영, 우마 -------------- 가진 자를 군양부가칭수 어 ---------------- 선발하여 시선가 인과망평 ---------------- 화합을 도 동애,유성,역성, -------------- 도모하면서 북풍. 왕비엽유관 --------------- 질서를 토경전엽이환 ------------------- 확립하였다

 

■비려碑麗는 선비족 후연에 복속당한 거란족의 중심 지방 이름으로 추정된다. 영락 5년은 395년으로서, 선비鮮卑족 모용씨의 후연국後燕이 중산中山에 근거하던 때다. 광개토왕은 즉위하던 해인 391년의 백제, 거란 정벌 이후에는 환도성을 침략했던 선비족의 연나라에 대한 복수가 과제였다. 따라서 그 배후인 비려 지역, 노합하 상류 지역을 먼저 복속한 것이다. 모용외慕容廆는 도하徒河 청산靑山 아래 대극성大棘城을 건설하여 전연의 최초 수도로 두었다. [한단고기]에서 [통지-씨족략]을 들어서 치우씨蚩尤氏의 고향이 대극성大棘城이라고 하였다. 치우의 고향은 부신시 자도대紫都臺 평정산 석성로서 망우하牤牛河 변이다. 위만조선 시대 연나라 요서군 도하徒河는 전한시대 유성, 양락 등과 관련되어서 육주하六州河 부근으로 고려되는데, 기자箕子의 수유성須臾城이 육주하에 있었으니 기자의 무리로 인해 도하徒河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손탁이 자립하여서 요동국을 만들 때에 기존의 후한 요서에서 훨씬 동쪽에 요서군이 새로 만들어진다. 한무제시대 요동군에서 밀려난 후한시대 요동군 양평성은 소릉하 대집둔에 있던 연나라 시대 요동군 양평성인데, 이를 바탕으로 공손탁이 새로 만든 요동국 양평성은 금주시 의현 북전성자고, 그때 요동군을 갈라서 만든 요서군의 도하는 그 서북쪽 자도대 부근이라서 치우의 고향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한편 이때 만들어진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오늘날의 조양시 유성이고 그 이전의 전한시대, 연나라 유성, 양락 등은 모두 육주하 서쪽이다. 모용황皝은 342년에 화룡성和龍城(=조양시朝陽市)에 도읍하였고, 357년에 모용준儁은 중산中山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업성鄴城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전연은 370년 전진의 부견苻堅에게 패망하였다. 이후 부견이 383년 동진과 전쟁에서 패전하자 모용수垂가 독립하여서 386년에 중산中山에서 후연국後燕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나 396년 모용수가 죽으면서 탁발선비 위나라에 밀려서 대릉하大凌河 화룡성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모용보寶가 모용수의 뒤를 이었으나 3년만에 살해되어 모용성盛이 이었고 모용성도 2년만에 죽었다. 이 뒤 399년에는 모용희熙가 이었고 407년에는 모용운雲이 뒤를 이었다. 모용운은 342년 모용황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킬 때 고구려에서 끌려간 고씨高氏의 후예로서 고운高雲이라고도 하며 광개토왕과 한 종족의 교분을 맺었다. 한편 395년은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와 북위北魏 탁발규拓跋珪간에 산서성과 하북성에서 전쟁이 치열하였다. 이 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선비족 모용씨의 배후 근거지 화룡성까지 쳤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우회하였다. 부산富山은 170년경 공손탁이 정벌을 나간 곳이며, [원일통지]에서 대녕로 용산현 남쪽 130리에 부산富山이 있고 용천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양시 건평현建平縣 부산향富山鄕이다. 공손탁은 170년에 현도소사였고, 당시 후한의 현도가 노룡-유성지간盧龍- 柳城이니 하북성 무녕현撫寧縣 부근이다. 뒤에 요동태수가 되었던 후한의 요동군 양평은 소릉하小凌河의 대집둔臺集屯 고성이다. 이곳 건평현의 부산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구려 서부 서요하西遼河에서 노합하老哈河로 내려가야 한다. 부산負山은 알 수 없다. 염수상鹽水上 파기구破基邱했는데 염수鹽水로 추정하는 서요하西遼河변의 통료시通遼市 개로현開魯縣 지역으로 고려된다.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은 전연국의 두 번째 수도이자 후연국의 수도가 된 유성柳城, 즉 화룡성을 치기 위해 고구려의 서쪽 국경을 넘지 않고 북쪽으로 돌아서 노합하를 타고 우회한 것이다. 광개토왕은 391년 거란 정벌로서 서요하를 이미 확보하였고, 395년에는 서요하西遼河에서 서남진하여 유성의 서부를 먼저 장악하고서 동쪽으로 귀환하면서 유성을 쳤다. 이때 유성을 지키던 후연국의 창려태수 최휼이 죽었다. 그의 묘비가 조양에서 발굴되었는데 395년 사망하였다. 그 묘비는 단 15자로서 아래와 같다. “연건흥십년(395년), 창려태수(조양시, 즉 비문의 유성) 청하동무성(최휼의 본향) 최휼 / 燕建興十年 昌黎太守 淸河東武 崔遹” 다음으로 력성, 북풍은 요동군에 속했으며 의무려산醫巫閭山 부근이 되고, 고구려의 영토다. 역성은 여양閭陽으로 고려된다. 대개 신창현과 평곽현 사이에서 소개되는데 여양현이 그 사이다. 북풍北豊은 전한의 양평으로 고려되는데 흑산현黑山縣 부근이다. 

 

■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어서 조공을 하여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 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 隨破新羅 以爲臣民 以六年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이 왜이신묘년 래도해파 백잔 수파신라 이위신민 이육년 

백잔신아 구시속 --------------- 성채의 민 유애조공이 왜 -------------- 수비가 이신묘년 애도해 --------------- 철저해서 파 백잔 수파신아 -------------- 적들이 이위신민 이육년 --------------- 감히 치질 못했다

 

왜국이 백제를 깼다는 것은 391년에 근구수왕(응신천황)의 명령으로 진사왕을 사로잡아간 일을 말한다. 391년에 고구려에 패전한 백제는 왕위를 찬탈한 진사왕을 바꾸어 아신왕으로 다시 세우고 왜군의 지원까지 받아서 고구려를 쳤다. 

 

■영락6년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조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수○ 18)○○ 19)○○ 20)분이야라성 21)○성 22)○○ 23)○○ 24)○○ 25)두노성 26)비○, 27)○리성 28)미추성 29)야리성 30)대산한성 31)소가성 32)돈발성 33)○○ 34)○○ 35)루매성 36)산나성 37)○루성 38)세성 39)모루성 40)우루성 41)소○성 42)연루성 43)석지리성 44)암문지성 45)임성 46)○○ 47)○○48)○○ 49)○○ 50)취추성 51)○○○ 52)고모루성,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양성 56)○○ 57)○○○라성 58)구천성 등을 쳐서 빼앗았다.

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1)壹八城 2)臼模盧城 3)若模盧城 4)幹弓利城 5)○○城 6)閣彌城 7)牟盧城 8)彌沙城 9)古舍(조)城 10)阿旦城 11)古利城 12)○利城 13)雜彌城 14)奧利城 15)勾牟城 16)古須耶羅城 17)頁○18)○○19)○○ 20)分而耶羅城 21)○城 22)○○23)○○24)○○ 25)豆奴城 26)沸○ 27)○利城 28)彌鄒城 29)也利城 30)大山韓城 31)掃加城 32)敦拔城 33)○○34)○○ 35)婁賣城 36)散那城 37)○婁城 38)細城 39)牟婁城 40)于婁城 41)蘇○城 42)燕婁城 43)析支利城 44)巖門至城 45)林城 46)○○ 47)○○48)○○ 49)○○ 50)就鄒城 51)○○○, 52)古牟婁城, 53)閏奴城, 54)貫奴城, 55)三穰城 56)○○ 57)○○○羅城 58)仇天城口口 口其國城 殘不服

병신 왕궁 솔수군 토리 잔국군 ○○수공취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調)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혈○18)○○19)○○ 20)분이야라성 21)○성 22)○○23)○○24)○○ 25)두노성 26)비○ 27)○리성 28)미추성 29)야리성 30)대산한성 31)소가성 32)돈발성 33)○○34)○○ 35)루매성 36)산나성 37)○루성 38)세성 39)모루성 40)우루성 41)소○성 42)연루성 43)석지리성 44)암문지성 45)임성 46)○○ 47)○○48)○○ 49)○○ 50)취추성 51)○○○, 52)고모루성,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양성 56)○○ 57)○○○라성 58)구천성구구 구기국성 잔부복 

병신 왕궁 솔수군 --------------- 병사들이 토이 잔국군 ○○ (모성) -------- 전투 준비의 수공취 1)일팔성 2)구 ---------- 모든 면에서 모오성 3)약모오성 -------------- 철저하기에 4)간궁이성 5)○○(진정)성 ------ 오로지 6)각미성 7)모오성 8)미 --------- 불굴의 투지로 사성 9)고사(調)성 10)아단 ------ 싸울 수가 있어 성 11)고이성 12)○(반)이성 ----- 임전무퇴로 13)잡미성 14)오이성 15)구 ----- 적과 싸우니 모성 16)고수야아성 -------------- 싸우는 족족 17)혈○18)○○19)○○ 20)분 -- 이야라성 21)○성 22)○ --------- ○23)○○24)○○ 25)두노 ------ 성 26)비○ 27)○리성 28)미 ---- 추성 29)야이성 30)대산 --------- 험난한 산에서 한성 31)소가성 32)돈발 --------- 두려워하지 않고 성 33)○○34)○○ 35)루매 ----- 성 36)산나성 37)○(막)누성 ----- 밤에 이동할 수 있었고 38)세성 39)모누성 40)우누 ----- 언제나 철두철미하게 성 41)소○(관)성 42)연누성 ----- 대형을 짜기에 43)석지이성 44)암문지 ---------- 야간 전투에서 성 45)임성 46)○○ 47)○○ ---- 48)○○ 49)○○ 50)취추성 ----- 51)○○○, 52)고모루성, ---------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 ---- 지치지 않고 양성 56)○○ 57)○○○ --------- 아성 58)구천성 구구 ------------- 적진을 향해 구기국성 잔부복 ------------------ 나아갔다

 

■중국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의 전설에 봉황성은 영락태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참고하여야 한다. 《만주지리풍속지》에서 봉황산성은 “영락대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기록이 있다. 비문 중의 위 기록에서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오십사성을 공취하였다. 반면에 백팔성은 비문에서 광개토대왕이 처음 공격한 일팔성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백팔성은 108이란 근거가 없고, 고대의 일팔성이 백팔성으로, 다시 백팔성의 하나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58성에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을 첫번째로 포함시켜야 한다. 그후 백제가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는데, 이 백제 한수는 대동강이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대동강 대산한성(북한산성=근초고왕성)까지 내려온 것으로 확실시된다. 아신왕은 북한산성이 포위당하여서 탈출하고, 한수(대동강) 남쪽 한산성에서 항전하였던 것이다.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왕성(30.대산한성=북한산성)을 함락하였으나, 백제왕은 항복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현재 대동강)를 건너고, 장수를 (한산성)에 보내어 성을 압박하라고 하니, (단기로 쳐들어가서 백제왕에게 항복하고 백성들이 편히 살라고 하여)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 而殘主因逼獻 (上)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八年戊戌 敎遣 기감출(백)전 왕위혁노 도아리수 견자박성 횡○○○○(충직당이) 편국성 이잔주인핍헌 (상)남녀생구일천인 세포천필 (귀)왕, 자서종 금이후영위노객 태왕은사 선미지건 록기후순지성, 어시 취오십팔성 촌칠백 장잔주제 병대신십인 선사환도 팔년무술 교견

기감출(백)전 왕위 --------------- 전투 상황에서 혁노 도아이수 견 ---------------- 과감하게 자박성 횡○○○(충직당) --------- 정면으로 ○(이) 편국성 이잔주 ------------ 나아가니 인핍헌 (상)남여생 --------------- 아무도 구일천인 세포천 ----------------- 막을 수 없었다 필 (귀)왕, 자서종 금 ------------ 전쟁에서 이후영위노객 태 ----------------- 머뭇거리지 않고 왕은사 선미지건 ----------------- 돌진하니 녹기후순지성, 어 ---------------- 어느 때나 시 취오십팔성 촌 ---------------- 압도적으로 칠백 장잔주제 병 ---------------- 이겼고 대신십인 선사환 ----------------- 전장을 도 팔연무술 교견 ---------------- 신속하게 처음부터 친정을 나왔던 태왕이 건너간 아리수는 지금의 대동강으로 고려된다. 대산한성, 즉 북한산성이 함락되고서 고구려군은 대동강 서쪽의 여러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용강의 횡악성과 성천의 홀골산성등은 그대로 백제 영역이었다. 아무튼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로 요동반도와 대동강 이북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지배권이 넘어간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의 비정은 위의 본문 중에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군은 본계소시 부근에서 출정하여, 봉성현을 치고 수암현을 친 다음에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쳐내려가서 대동강을 경계로 진격을 멈추었다. 이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백제는 대동강 이북땅을 고구려에 내주었다. 백제 아신왕은 396년 7월 대동강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였는데 광개토왕의 정벌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아신왕은 397년 한산漢山의 북책까지 올라가다가 돌아왔는데 이는 대동강을 따라서 한산의 동북쪽에 있는 순천시 은산殷山까지 올라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개로왕이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사성을 수리하고 사성의 북쪽 숭산崇山까지 방죽을 쌓았는데 이 숭산도 순천시 은산의 숭화산崇化山이고 사성은 개천시 고사산산성이다. 즉 당시 고구려 백제의 경계가 남쪽으로 대동강이며 동북쪽으로도 대동강의 가지인 영원군 성룡강成龍江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로왕은 말기에 동북의 말갈국과 함께 고구려를 같이 치기로 협상한 사실이 [위서-물길전]에 나온다. 

 

■영락8년 398년에 장수를 보내어 숙신의 터전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가태라곡과 남녀 삼백명의 포로를 얻어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숙신도 조공하고 고구려를 섬겼다. 偏師 觀 肅愼土谷 因偏抄得 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來朝貢○事. 九年己 편사 관 숙신토곡 인편초득 막○라성, 가태라곡 남녀삼백여인 자차래조공○사. 구년기 

편사 관 숙신토곡 --------------- 정리하였고 인편초득 막○(가)아 ------------ 사태를 성, 가태라곡 남여 -------------- 큰 사상자 없이 삼백여인 자차애 ---------------- 마무리 지으니 조공○(애)사. 구년기 ----------- 모두가 좋아했다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 동황성에서 하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하였다. 태왕은 신라가 충성함을 치하하고, 사자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해 백잔위서 여왜화통. 왕순하평양 이신라견사 백왕운 왜인만기국경 궤파성지 이노객위민 귀왕청명 ○○○기국충성○견사환고이○○ 해 백잔위서 여왜 --------------- 적이 쳐들어 오면 화통. 왕순하평양 --------------- 모두가 나서 이신아견사 백왕 ---------------- 맞서니 운 왜인만기국경 ---------------- 쳐들어 온 궤파성지 이노객 ---------------- 적이 도망을 하였다 위민 귀왕청명 ○(사) ---------- 살벌한 ○○기국충성○ ----------------- 견사환고이○○(병친) -----------

 

■장수들이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협보유리왕 때 남한으로 감의 후예인 안라인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昔 新 십년경자 교견보기오만 왕구신라 종남거성 지신라성, 왜만기중 관군방지왜적퇴 ○○○○○○○○래배 급추지 임나가라 종발성 성즉귀복 안라인술병○(=어)신라성 농성 왜구○궤성○○○○○○○○○○○○○○○○○○○진○(=경)수래안라인술병○○○○○기○○○○○○○언○○○○○○○○○○○ ○○○○○○○○○○사○○○○○○○○○○○○궤○○○○안라인술병석 신 

십년경자 교견보 ---------------- 적군과 싸울 때 기오만 왕구신아 ---------------- 두려워 함이 없이 종남거성 지신아 ---------------- 언제나 앞장 서니 성, 왜만기중 관군 -------------- 모두가 좋아해 방지왜적퇴 ○○(병초) ---------- 따라 나서고 ○○○○○○래 ----------------- 배 급추지 임나가 --------------- 바람이 불고 아 종발성 성즉귀 --------------- 눈보라 쳐도 복 안아인술병○(=어) ---------- 머뭇거리지 않고 신아성 농성 왜구 --------------- 저돌적으로 ○궤성○○○○ ----------------- ○○○○○○○ ----------------- ○○○○○○○ ----------------- ○(박)진○(=경)수애안아 ------- 일을 할 때는 인술병○○○○ ----------------- ○기○○○○○ ----------------- ○○언○○○○ ----------------- ○○○○○○○ ----------------- ○○○○○○○ ----------------- ○○○사○○○ ----------------- ○○○○○○○ ----------------- ○○궤○○○○ ----------------- 안아인술병석신 -----------------

참을 수 없어 399년 백제가 반격해오자 광개토왕은 먼저 신라를 구원하고 대마도를 점령하여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후손인 안라인으로 다스리게 했다.

 

■아직 신라왕이 직접 고구려 도성을 찾아와 태왕을 알현하지 않아 불러들였다. 국강상광개토경평호태왕 앞에 신하로서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羅寐錦未有身來,○○○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新羅寐錦○○僕勾○○○○朝貢 十四年甲 라매금미유신래,○○○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신라매금○○복구○○○○조공 십사년갑 나매금미유신애, ----------------- 분연히 일어나 ○○○국강상광 ----------------- 개토경평안호태 ----------------- 압도적으로 왕○○(오조)신아매금 ---------- 우세하니 ○○복구○○○ ----------------- ○(합)조공 십사년갑 ------------

뿔뿔이 흩어졌다 신라 매금은 문맥상으로 신라왕의 호칭이 된다. <광개토왕 비문> 중에서 백제나 신라에는 왕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고 백잔주百殘主로 폄하하고 신라 매금으로 폄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록이 [한단고기]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기록에도 나온다.

 

■신라의 매금과 백제 어하라와 남평양에서 만나서 조공의 양과 국경 수비군의 수를 정하였다. 又與 新羅 寐錦 百濟 於瑕羅 會于 南平壤 約定 納貢 戌兵之數.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부른 것은 고주몽이 소서노를 책립하여 부른 것이 최초 기록이다. 또한 중국의 [북사] 등에서도 백제는 자기들의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백제 어라하와 상대되는 신라 매금은 신라왕의 호칭인데 신라 자체의 왕호인 마립간의 변형이다. 

 

■영락14년 404년 갑진년에 이르러,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 ○○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十七年丁未敎

 

진 이왜 부궤 침입 대방계 ○○○,○○, 석성 [위]연선[백잔] ○○솔[수군지]평양 [왜구선]봉상우 왕당 요절 탕자 왜구궤패 참살무수 십칠년정미교 진 이왜 부궤 침입 ----------------- 적진을 공격할 시에 대방계 ○○○,○ ------------------ ○(비), 석성 [위]연선[백 ---------- 하나 같이 잔] ○○(아자)솔[수군지] ---------- 쳐들어 가니 평양 [왜구선]봉상 ----------------- 방어하던 적들은 우 왕당 요절 탕자 ----------------- 어쩔 줄 볼라 왜구궤패 참살무 ------------------- 도망을 갔다 수 십칠년정미교 -------------------

 

■항상 백제의 반격을 받은 광개토왕은 고구려 평양성에서 이를 분쇄하고 아신왕을 퇴위시켰다.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佳城,○○○○○○, 나○성 등을 다시 깨트렸다. 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二十年庚 戌 견 보기 오만○○○○○ ○○○○사○○합전 참살탕진 소획 쇄갑 일만여 영군자기계 부가칭수 환파 사구성, 루성, ○가성,○○○○○○, 나○성, 이십년경 술 견 보기 오만○○(구성) --------- 훈련을 하니 ○○○ ○○○○ ---------------- 사○○(지저)합전 참살 --------- 의견이 분분할 때는 탕진 소획 쇄갑 일 -------------- 열심히 만여 영군자기계 --------------- 설득하고 부가칭수 환파 사 --------------- 서로의 의견을 구성, 누성, ○(판)가성, --------- 조절하니 ○○○○○○, 나 ---------------- ○(아)성, 이십연경 술 ----------- 나라가 평화로왔다 

 

■영락20년 410년에 동부여가 본래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도중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으므로 태왕이 직접 정벌을 나가 여성에 이르렀더니 여성국의 해왕이 항복하므로 태왕은 용서하고 돌아왔다. 또한 고구려를 존경하여 관리를 보내어 항복한 자들이 있었으니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등이다. 이 원정에서 64성과 1400부락을 깨트렸다.

東夫餘 舊是 鄒牟王 屬民 中叛 不貢 王躬率 往討軍到餘城 而餘城國駭○○○○○○○○○ 王恩普○於是旋還 又其 慕化 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木耑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守墓人烟戶, 賣

동부여 구시 추모왕 속민 중반 불공 왕궁솔 왕토군도여성 이여성국해○○○○○○○○○ 왕은보○어시선환 우기 모화 수관래자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목단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범소공파 성육십사 촌일천사백 수묘인연호, 매 동부여 구시 추모 --------------- 좋지 않은 상황에서 왕 속민 중반 불공 -------------- 굴하지 않고 왕궁솔 왕토군도 ---------------- 맞서 여성 이여성국해 ---------------- 성공적으로 ○○○○○○○ ----------------- ○○ 왕은보○어 ---------------- 시선환 우기 모화 --------------- 막강한 세력으로 수관애자 미구우 ---------------- 밀고 나가니 압노, 비사마압노, --------------- 속수무책으로 목단사누압노, 숙 --------------- 어쩔 줄을 몰라 사사○○(=압로), ○○○ ------ 압노 범소공파 성 -------------- 도망을 가 육십사 촌일천사 --------------- 추적을 하여 백 수묘인연호, 매 ------------- 궤멸시켰다

 

■태왕의 묘를 지키는 수묘인가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매구여민 국연2가 간연 3가, 동해매 국연3가 간연 5가, 돈성민 간연4가, 간성 간연1가, 비리성 간연2가, 평양성민 국연1가 간연10가, 거련 간연2가, 배루인 국연1가 간연 43가, 양곡 간연2가, 안부련 간연22가, 개곡 간연3가, 신성 간연3가, 남소성 국연 1가,

句余民 國烟二 看烟三, 東海賈 國烟三 看烟五, 敦城民 四家爲看烟, 干城 一家爲看烟, 碑利城 二家爲國烟, 平穰城民 國烟一家 看烟十, [車]連 二家爲看烟, 俳蔞人國烟一 看烟四十三, 梁谷 二家爲看烟, ○城 二家爲看烟, 安夫連 二十二家爲看烟, 改谷 三家爲看烟, 新城 三家爲看烟, 南蘇城 一家爲國烟. 新來韓

구여민 국연이 간연삼, 동해가 국연삼 간연오, 돈성민 사가위간연, 간성 일가위간연, 비리성 이가위국연, 평양성민 국연일가 간연십, [거]련 이가위간연, 배루인국연일 간연사십삼, 양곡 이가위간연, ○성 이가위간연, 안부련 이십이가위간연, 개곡 삼가위간연, 신성 삼가위간연, 남소성 일가위국연. 신래한 

 

구여민 국연이 간 -------------- 동쪽으로 연삼, 동해가 국연 ------------- 추격하여 삼 간연오, 돈성민 ------------- 동해에 다다르고 사가위간연, 간성 -------------- 남쪽으로는 일가위간연, 비이 -------------- 살수에 도착하고 성 이가위국연, 평 ------------- 서쪽으로 진격해 양성민 국연일가 --------------- 돌궐을 좇아 내고 간연십, [거]연 이가 ---------- 위로 위간연, 배누인국 -------------- 말갈을 좇아 내 연일 간연사십삼, -------------- 평화를 양곡 이가위간연, -------------- 확립했다 ○(조)성 이가위간연, ---------- 많은 나라에서 안부연 이십이가 --------------- 조공을 받쳐 위간연, 개곡 삼가 ------------- 재물이 위간연, 신성 삼가 ------------- 남아돌 정도로 위간연, 남소성 일 ------------- 모두가 가위국연. 신애한 -------------- 풍족했다 새로온 수묘인은 다음과 같다. 

 

■한예사수성 국연1가 간연1가, 모루성 간연2가, 두비압령한 간연5가, 구모객두 간연2가, 구저한 간연1가, 사조성한예 국연3가 간연21가, 고모야라성 간연1가, 막고성 국연1가 간연3가, 객현한 간연1가, 아단성-잡진성 합쳐서 간연 10가, 파노성한 간연9가, 구모로성 간연4가, 약모로성 간연2가, 모수성 간연3가, 간궁리성 국연2가 간연3가, 미추성 국연1가 간연 7가, 야리성 간연3가, 두노성 국연1가 간연2가, 오리성 국연2가 간연8가, 수추성 국연2가 간연5가, 백제남거한 국연1가 간연5가, 대산 한성 간연6가, 농매성 국연1가 간연7가, 윤노성 국연1가 간연 22가, 고모루성 국연2가 간연 8가, 탕성 국연1가 간연8가, 미성 간연6가, 취자성 간연5가, 삼양성 간연24가, 산나성 국연1가, 나단성 간연1가, 구모성 간연1가, 어리성 간연8가, 비리성 간연3가, 세성 간연3가.

穢沙水城 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嶺韓 五家爲看烟, 句牟客頭 二家爲看烟, 求底韓 一家爲看烟, 舍蔦城韓穢 國烟三 看烟二十一, 古模耶羅城 一家爲看烟, 莫古城 國烟一 看烟三, 客賢韓 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 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 九家爲看烟, 臼模盧城 四家爲看烟, 若模盧城 二家爲看烟, 牟水城 三家爲看烟, 幹弓利城 國烟二 看烟三, 彌鄒城 國烟一 看烟○○○○七, 也利城 三家爲看烟, 豆奴城 國烟一 看烟二, 奧利城 國烟二 看烟八, 須鄒城 國烟二 看烟五, 百殘南居韓 國烟一 看烟五, 大山韓城 六家爲看烟, 農賣城 國烟一 看烟七, 閏奴城 國烟一 看烟二十二, 古牟婁城 國烟二 看烟八, 湯城 國烟一 看烟八, 味城 六家爲看烟, 就咨城 五家爲看烟, 彡穰城 二十四家爲看烟, 散那城 一家爲國烟, 那旦城 一家爲看烟, 勾牟城 一家爲看烟, 於利城 八家爲看烟, 比利城 三家爲看烟, 細城

예사수성 국연일 간연일, 모루성 이가위간연, 두비압령한 오가위간연, 구모객두 이가위간연, 구저한 일가위간연, 사조성한예 국연삼 간연이십일, 고모야라성 일가위간연, 막고성 국연일 간연삼, 객현한 일가위간연, 아단성, 잡진성 합십가위간연, 파노성한 구가위간연, 구모로성 사가위간연, 약모로성 이가위간연, 모수성 삼가위간연, 간궁리성 국연이 간연삼, 미추성 국연일 간연○○○○칠, 야리성 삼가위간연, 두노성 국연일 간연이, 오리성 국연이 간연팔, 수추성 국연이 간연오, 백잔남거한 국연일 간연오, 대산한성 육가위간연, 농매성 국연일 간연칠, 윤노성 국연일 간연이십이, 고모루성 국연이 간연팔, 탕성 국연일 간연팔, 미성 육가위간연, 취자성 오가위간연, 삼양성 이십사가위간연, 산나성 일가위국연, 나단성 일가위간연, 구모성 일가위간연, 어리성 팔가위간연, 비리성 삼가위간연, 세성 

 

예사수성 국연일 --------------- 언제 어디서나 간연일, 모누성 이 ------------- 싸울 수 있도록 가위간연, 두비압 -------------- 무장하고 영한 오가위간연, -------------- 다니니 구모객두 이가위 --------------- 어떤 적도 간연, 구저한 일가 ------------- 선뜻 위간연, 사조성한 -------------- 침입을 예 국연삼 간연이 -------------- 생각지 못 했다 십일, 고모야나성 -------------- 무슨 일이 있어도 일가위간연, 막고 -------------- 무기 없이 성 국연일 간연삼, ------------- 외출을 객현한 일가위간 --------------- 하지 않았다 연, 아단성, 잡진성 ------------ 텅 빈 합십가위간연, 파 -------------- 들판을 노성한 구가위간 --------------- 말을 타고 연, 구모노성 사가 ------------- 달릴 때 위간연, 약모노성 -------------- 방패와 이가위간연, 모수 -------------- 칼을 성 삼가위간연, 간 ------------- 등에 메고 궁이성 국연이 간 -------------- 있었기에 연삼, 미추성 국연 ------------- 겁나지 않았다 일 간연○○○○(무송이천) ----- 달이 없어 칠, 야니성 삼가위 ------------- 어두울 때 간연, 두노성 국연 ------------- 솔방울을 일 간연이, 오니성 ------------- 넣은 국연이 간연팔, 수 ------------- 통에 추성 국연이 간연 -------------- 불을 붙이어 오, 백잔남거한 국 ------------- 들고 다니며 연일 간연오, 대산 ------------- 길을 밝혔다 한성 육가위간연, -------------- 철판을 댄 농매성 국연일 간 -------------- 갑옷을 입고 연칠, 윤노성 국연 ------------- 칼을 차면 일 간연이십이, 고 ------------- 어느 곳에서도 모누성 국연이 간 -------------- 겁이 나지 않았다 연팔, 탕성 국연일 ------------- 동시에 간연팔, 미성 육가 ------------- 활을 쏘기에 위간연, 취자성 오 ------------- 공격하는 적군은 가위간연, 삼양성 -------------- 어찌 할 줄 몰라 이십사가위간연, --------------- 도망가기에 바빴다 산나성 일가위국 --------------- 성을 쌓을 때 연, 나단성 일가위 ------------- 작은 돌을 간연, 구모성 일가 ------------- 채워서 위간연, 어이성 팔 ------------- 받치기에 가위간연, 비이성 -------------- 비가 와도 삼가위간연, 세성 -------------- 무너지지 않는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살아계실 제에 말씀하시기를 “선조왕께서 단지 원근의 고구려구민으로서 묘를 지키고 가꾸게 하셨다. 나는 고구려 구민이 고생할까 염려한다. 내가 죽은 후에 수묘인을 정할 때에는 내가 몸소 다닌 각 부락에서 다 오라고 하지 말고, 한예인들로 수묘를 하도록 준비하라.” 유언이 이와 같으니 오늘 이대로 시행하여서 한예 각 성에 명령을 내려서 220가를 뽑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고구려식 제사법을 모를 것을 염려하여 고구려 구민 110가를 다시 뽑아 배치하니 수묘호는 국연이 30가요, 간연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三家爲看烟 國 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存時 敎言 祖王先王 但敎 取 遠近舊民 守墓 洒掃 吾慮 舊民 轉當 羸劣, 若 吾 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 吾躬巡所 略來 韓穢 令備 洒掃. 言敎如此 是以如敎 令 取 韓穢 二百二十家 慮 其不知法 卽 復取 舊民 一百十家 合 新舊守墓戶 國烟三十 看烟三百 都合三百三十家 自上祖先王以

삼가위간연 국 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존시 교언 조왕선왕 단교 취 원근구민 수묘 세소 오려 구민 전당 리열, 약 오 만년지후 안수묘자 단취 오궁순소 약래 한예 령비 세소. 언교여차 시이여교 영 취 한예 이백이십가 려 기불지법 즉 부취 구민 일백십가 합 신구수묘호 국연삼십 간연삼백 도합삼백삼십가 자상조선왕이 

 

삼가위간연 국강 ---------------- 전략적으로 상광개토경평안 ----------------- 중요한 지점을 호태왕 존시 교언 --------------- 찾아서 조왕선왕 단교 취 --------------- 성을 쌓아 원근구민 수묘 세 --------------- 방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 오여 구민 전당 -------------- 방어 시에 이열, 약 오 만년지 ------------- 봉쇄에 주안을 둬 후 안수묘자 단취 --------------- 퇴로를 차단하고 오궁순소 약애 한 --------------- 협공을 해 예 영비 세소.언교 -------------- 모두를 잡았다 여차 시이여교 영 --------------- 적진을 공격할 때 취 한예 이백이십 --------------- 측면을 쳐 가 여 기불지법 즉 --------------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부취 구민 일백십 --------------- 중앙을 가 합 신구수묘호 --------------- 파쇄한다 국연삼십 간연삼 ---------------- 비바람이 칠 때 백 도합삼백삼십 ---------------- 때를 놓치지 않고 가 자상조선왕이 ---------------- 돌격해 

 

■선조왕 이래로 왕릉 위에 석비를 세우지 않아서 수묘인 연호를 설치하여 관리하는데 착오가 있어 왔다. 따라서 국강상광개초경평안호태왕은 선조왕릉에 비석을 세우고 그 수묘인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도록 하고 수묘인 제도를 제도화 하였다. 이후로는 수묘인들이 논밭을 서로 팔고사는 것을 금하니 법을 어기고 팔고사는 사람은 형벌에 처한다. 이러한 법에 따라서 왕릉을 지켜라

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 差錯 唯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 烟戶 不令 差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扌亶買 其有 違令賣者刑之買人 制令守墓之.

래 묘상부안석비 치사수묘인연호 차착 유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진위조선왕묘상립비 명기 연호 부령 차착 우제수묘인 자금이후 불득경상전매 수유부족지자 역불득수단매 기유 위령매자형지매인 제령수묘지. 

 

애 묘상부안석비 ---------------- 승리로 이끈다 치사수묘인연호 ----------------- 전국적으로 차착 유국강상 ------------------ 준비를 하니 광개토경평안호 ----------------- 빈틈이 없다 태왕 진위조선왕 ---------------- 성을 함락하고 묘상입비 명기 연 --------------- 민심을 수습 할 때 호 부영 차착 우제 -------------- 나이 든 사람을 수묘인 자금이후 ---------------- 선발해 불득경상전매 -------------- ----- 모시면 수유부족지자 역 ----------------- 모두가 따라오니 불득수단매 기유 ----------------- 마음 속에 위영매자형지매 ------------------ 윗사람을 모시는 것을 인 제영수묘지. ------------------- 각인하라

 

■비류곡에 이르러 홀본의 서성, 산상에 성을 지어 도읍을 삼았다. 그러나 불락한 때에 황룡이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산 위에서 용머리에 올라타고 승천하였다.

於沸流谷 忽本西城 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龍負昇天

어비류곡 홀본서성 산상이건도언 부락세위 천견황룡래하영왕 왕어홀본동강 황용부승천 

어비유곡 홀본서 --------------- 만주를 넘어 성 산상이건도언 부악 ---------- 나아가는데 세위 천견황용애 --------------- 주민의 호응을 얻어 하영왕 왕어홀본 --------------- 적들을 동강 황용부승천 --------------- 항복시켰다 

 

■옛적에 시조이신 추모왕이 고구려 나라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모후는 하백의 따님이셨다. 추모왕은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내려오시니 성덕이 높았다.

惟昔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德

유석시조 추모왕지창기야 출자북부여 천제지자 모하백녀랑 부란항세 생이유성덕 

 

광개토대왕 비문은 평안도 발음을 사용하는 바, 이를 서울말로 바꾼 것이 번역의 전부임. 장수왕에 관련된 (일부) 글은 함경도 발음을 보이므로, 고구려에서는 적어도 평안도/함경도 2 개 발음을 사용한 것으로 보임. * 유석시조 ---------------------------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지창기야 --------------------- 싸우러 나갈 때는 출자북부여 ------------------------- 어디에서나 천제지자 ---------------------------- 모든 사람이 모하백녀앙 -------------------------- 따라 나서며 부안항세 ---------------------------- 목숨을 아끼지 않고 생이유성덕 -------------------------- 혼신을 다했다. 

 

■추모왕은 모후의 명을 받아 동부여를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추모왕은 나루터에서 말하였다. “황천의 아들이오,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 왔다. 나를 위하여 갈대배를 만들어 띄워라.” 자라가 듣고 즉시 갈대배 만들어 건너게 해주어 추모왕이 강물을 건넜다.

鄒牟王 奉母命駕 巡幸南下路 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爲我連葭 浮鼈應聲 卽爲連葭浮鼈 然後造渡 추모왕 봉모명가 순행남하로 유부여엄리대수 왕임진언왈 아시황천지자 모하백녀랑 추모왕위아련가 부별응성 즉위련가부별 연후조도 

 

추모왕 봉모 ----------------------- 전투에서 명가 순행남 ----------------------- 광개토대왕은 하오 유부여엄이 ------------------- 언제나 앞에서 대수 왕임진언 --------------------- 공격하여 왈 아시황천지 --------------------- 모든 곳에서 자 모하백여랑 추 ------------------ 싸움을 모왕위아년가 부 ------------------- 유리하게 하여 별응성 즉위년가 ------------------- 전투를 부별 연후조도 --------------------- 이겼다

 

황천은 하늘에 대한 극존칭이다. 즉, 천손을 강조한 것이고 하백은 물의 신이다.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 엄호수, 엄사수 등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개사수라고도 했는데 고대에는 개사수, 혹은 엄리대수라고 불렀다. 지금의 통유현通楡縣 곽린하霍林河다. (3부 2장 2절 참조) 동부여에서 고주몽의 모후인 유화柳花부인 묘(통유현 전장포毡匠鋪 고묘 추정)를 개사수에 세우니 훗날 엄니(=어머니)대수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한단고기-북부여기]에서는 유일하게 분릉수岔凌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송화강의 지류 나린하拉林河의 난릉蘭凌 부근을 의미하며 나린하는 내린천으로서 보통 부여의 중심 물이름이다. 나린하 상류에 서란舒蘭이 있고 고주몽이 태어난 곳이라고도 전한다.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에 의해 동북으로 쫓겨난 북부여가 세워진 동부여 위치로서 나린하는 타당하다. 동부여가 가섭원 또는 분릉하에 세워졌다는 [한단고기-가섭원부여기]에 의하면 가섭원의 중심이 분릉수였다.[광개토왕 비문]에서 고주몽이 태어난 곳이 북부여인데, 즉 천산의 북부여 출발지로부터 흑룡강성 나린하도 북부여였고, 그리고 위나라 때는 눈강嫩江 동쪽 흑수지역까지 북부여다. 따라서 고두막한 졸본부여에 의해 천산에서 밀려난 북부여는 흑룡강성 나린하에 자리잡았다가 고주몽이 태어난 후에 조남시 부근으로 돌아왔고, 고주몽이 그곳에서 말지기를 하다가 도망쳤고, 그후 동부여는 대무신왕 때에 망하여 다시 흑룡강성으로 옮겨간 것으로 고려된다. 

 

■비류곡에 이르러 홀본의 서성, 산상에 성을 지어 도읍을 삼았다. 그러나 불락한 때에 황룡이 왕을 맞으러 내려왔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산 위에서 용머리에 올라타고 승천하였다.

於沸流谷 忽本西城 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龍負昇天

어비류곡 홀본서성 산상이건도언 부락세위 천견황룡래하영왕 왕어홀본동강 황용부승천 

 

어비유곡 홀본서 --------------- 만주를 넘어 성 산상이건도언 부악 ---------- 나아가는데 세위 천견황용애 --------------- 주민의 호응을 얻어 하영왕 왕어홀본 --------------- 적들을 동강 황용부승천 --------------- 항복시켰다 

 

■추모왕이 정했던 세자 유리왕은 도덕정치로서 다스려 나라가 흥하였다. 대무신왕은 뒤를 이어 더욱 번성하게 하였다. 주류왕의 십칠세 후손왕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즉위하여 연호를 영락이라 정했다. 태왕의 은택이 세상에 두루 미치고 그 위엄은 사해에 떨쳤고 악을 제거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고 업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오곡이 풍족하였다. 태왕은 39세에 붕어하셔서 떠나시게 되었다. 414년 9월29일에 산릉을 완성하여 옮기시게 되었다. 왕릉위에 비석을 세워 태왕의 훈적을 새겨 두니 이를 후세에게 전하는 바 아래와 같다.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乘基業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 太王 恩澤 洽于 皇天 威武 橫被四海 掃除○○庶寧 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三十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 九月二十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積 以示後世 焉其詞曰

고명세자유류왕 이도흥치 대주류왕 소승기업 답지십칠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이구등조 호위영락 태왕 은택 흡우 황천 위무 횡피사해 소제○○서영 기업 국부민은 오곡풍숙 호천불조 삼십유구 연가기국 이갑인년 구월이십구일을유, 천취산릉 어시립비 명기훈적 이시후세 언기사왈 

 

고명세자유유 ------------------- 많은 사람이 왕 이도흥치 대 ----------------- 하나같이 주유왕 소승기업 ---------------- 도와 답지십칠세손 국 ---------------- 성을 쌓고 강상광개토경평 ----------------- 해자를 안호태왕 이구등 ---------------- 파 조 호위영악 태왕 --------------- 수비를 견고히 하여 은택 흡우 황천 위 -------------- 안전을 무 횡피사해 소제 --------------- 확보하였으며 ○○(부부)서영 기업 국부민 ---- 젊은이들은 은 오곡풍숙 호천 --------------- 싸울 때 불조 삼십유구 연 --------------- 일심동체로 가기국 이갑인년 ---------------- 싸우니 구월이십 ------------------------ 매우 구일을유, ------------------------ 많은 천취산응 어시입 ----------------- 전공을 비 명기훈 ----------------------- 세워 적 이시후세 언기사왈 ----------- 귀감을 보였다 대무신왕의 17세 후왕인 광개토왕은 二九세, 즉 18세에 즉위하였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을미년395년이 영락 5년, 병신년396년이 영락 6년이었다는 기록에 의하면 그의 즉위년도는 391년 신묘년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재위 22년에 붕어하였는데 겨울 10월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왕의 즉위년도가 392년으로, 붕어년도는 413년으로 각기 1년씩 뒤로 미루어져 있다. 이는 장수왕長壽王의 즉위년도까지 1년 늦추어 놓았고 그 이후 장수왕의 붕어년도부터 다시 맞는다. 414년이 되는 갑인년 9월29일에 광개토왕릉이 완성되었고 그날 천장遷葬하였다. 장수왕長壽王 즉위 3년이 되는 해이다. 

 

■영락5년 395년에 태왕은 비려가 안정하지 못하므로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토벌을 나가, 부산, 부산을 돌아 염수 위에 있는 근거지를 깨트리고, 여섯 개의 대부락과 칠백 개의 마을을 쳐부수고 빼앗은 소와 말, 양들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이 많았다. 태왕은 거기서 군사를 돌려 환국하시었다. 이때, 태왕은 [망]평도를 지나가기 위해 동쪽으로 오는 길은, [유]성, 력성, 북풍성 등을 거쳤다. 대왕은 미리 사냥을 준비하여 국경도 둘러보시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오셨다.

維昔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爭又 躬率往討 回富山負山 至鹽水上破其丘, 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 [望-형태로서 추정]平道 東來,[柳-우변 일부만 보인다.]城,力城,北豊. 王備獵游觀土境田獵而還

유석 영락오년세재을미 왕이비려부식쟁우 궁솔왕토 회부산부산 지염수상파기구, 부락육,칠백영, 우마군양부가칭수 어시선가 인과 [망-形態로서 墜穽]평도 동래,[유-右邊 一夫만 보인다.]성,역성,북풍. 왕비엽유관토경전렵이환 

 

유석 영악오연세 ---------------- 장수를 뽑을 때 재을미 왕이비여 ---------------- 무엇보다도 부식쟁우 궁솔왕 ---------------- 인덕을 토 회부산부산 지 --------------- 중요하게 여겨 염수상파기구, 부 --------------- 덕망을 악육,칠백영, 우마 -------------- 가진 자를 군양부가칭수 어 ---------------- 선발하여 시선가 인과망평 ---------------- 화합을 도 동애,유성,역성, -------------- 도모하면서 북풍. 왕비엽유관 --------------- 질서를 토경전엽이환 ------------------- 확립하였다 비려碑麗는 선비족 후연에 복속당한 거란족의 중심 지방 이름으로 추정된다.

 

영락 5년은 395년으로서, 선비鮮卑족 모용씨의 후연국後燕이 중산中山에 근거하던 때다. 광개토왕은 즉위하던 해인 391년의 백제, 거란 정벌 이후에는 환도성을 침략했던 선비족의 연나라에 대한 복수가 과제였다. 따라서 그 배후인 비려 지역, 노합하 상류 지역을 먼저 복속한 것이다. 모용외慕容廆는 도하徒河 청산靑山 아래 대극성大棘城을 건설하여 전연의 최초 수도로 두었다. [한단고기]에서 [통지-씨족략]을 들어서 치우씨蚩尤氏의 고향이 대극성大棘城이라고 하였다. 치우의 고향은 부신시 자도대紫都臺 평정산 석성로서 망우하牤牛河 변이다. 위만조선 시대 연나라 요서군 도하徒河는 전한시대 유성, 양락 등과 관련되어서 육주하六州河 부근으로 고려되는데, 기자箕子의 수유성須臾城이 육주하에 있었으니 기자의 무리로 인해 도하徒河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손탁이 자립하여서 요동국을 만들 때에 기존의 후한 요서에서 훨씬 동쪽에 요서군이 새로 만들어진다. 한무제시대 요동군에서 밀려난 후한시대 요동군 양평성은 소릉하 대집둔에 있던 연나라 시대 요동군 양평성인데, 이를 바탕으로 공손탁이 새로 만든 요동국 양평성은 금주시 의현 북전성자고, 그때 요동군을 갈라서 만든 요서군의 도하는 그 서북쪽 자도대 부근이라서 치우의 고향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한편 이때 만들어진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오늘날의 조양시 유성이고 그 이전의 전한시대, 연나라 유성, 양락 등은 모두 육주하 서쪽이다. 모용황皝은 342년에 화룡성和龍城(=조양시朝陽市)에 도읍하였고, 357년에 모용준儁은 중산中山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업성鄴城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전연은 370년 전진의 부견苻堅에게 패망하였다. 이후 부견이 383년 동진과 전쟁에서 패전하자 모용수垂가 독립하여서 386년에 중산中山에서 후연국後燕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나 396년 모용수가 죽으면서 탁발선비 위나라에 밀려서 대릉하大凌河 화룡성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모용보寶가 모용수의 뒤를 이었으나 3년만에 살해되어 모용성盛이 이었고 모용성도 2년만에 죽었다. 이 뒤 399년에는 모용희熙가 이었고 407년에는 모용운雲이 뒤를 이었다. 모용운은 342년 모용황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킬 때 고구려에서 끌려간 고씨高氏의 후예로서 고운高雲이라고도 하며 광개토왕과 한 종족의 교분을 맺었다. 한편 395년은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와 북위北魏 탁발규拓跋珪간에 산서성과 하북성에서 전쟁이 치열하였다. 이 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선비족 모용씨의 배후 근거지 화룡성까지 쳤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우회하였다. 부산富山은 170년경 공손탁이 정벌을 나간 곳이며, [원일통지]에서 대녕로 용산현 남쪽 130리에 부산富山이 있고 용천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양시 건평현建平縣 부산향富山鄕이다. 공손탁은 170년에 현도소사였고, 당시 후한의 현도가 노룡-유성지간盧龍- 柳城이니 하북성 무녕현撫寧縣 부근이다. 뒤에 요동태수가 되었던 후한의 요동군 양평은 소릉하小凌河의 대집둔臺集屯 고성이다. 이곳 건평현의 부산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구려 서부 서요하西遼河에서 노합하老哈河로 내려가야 한다. 부산負山은 알 수 없다. 염수상鹽水上 파기구破基邱했는데 염수鹽水로 추정하는 서요하西遼河변의 통료시通遼市 개로현開魯縣 지역으로 고려된다. 광개토왕의 고구려군은 전연국의 두 번째 수도이자 후연국의 수도가 된 유성柳城, 즉 화룡성을 치기 위해 고구려의 서쪽 국경을 넘지 않고 북쪽으로 돌아서 노합하를 타고 우회한 것이다. 광개토왕은 391년 거란 정벌로서 서요하를 이미 확보하였고, 395년에는 서요하西遼河에서 서남진하여 유성의 서부를 먼저 장악하고서 동쪽으로 귀환하면서 유성을 쳤다. 이때 유성을 지키던 후연국의 창려태수 최휼이 죽었다. 그의 묘비가 조양에서 발굴되었는데 395년 사망하였다. 그 묘비는 단 15자로서 아래와 같다. “연건흥십년(395년), 창려태수(조양시, 즉 비문의 유성) 청하동무성(최휼의 본향) 최휼 / 燕建興十年 昌黎太守 淸河東武 崔遹” 다음으로 력성, 북풍은 요동군에 속했으며 의무려산醫巫閭山 부근이 되고, 고구려의 영토다. 역성은 여양閭陽으로 고려된다. 대개 신창현과 평곽현 사이에서 소개되는데 여양현이 그 사이다. 북풍北豊은 전한의 양평으로 고려되는데 흑산현黑山縣 부근이다. 

 

■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국이어서 조공을 하여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 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 隨破新羅 以爲臣民 以六年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이 왜이신묘년 래도해파 백잔 수파신라 이위신민 이육년 

백잔신아 구시속 --------------- 성채의 민 유애조공이 왜 -------------- 수비가 이신묘년 애도해 --------------- 철저해서 파 백잔 수파신아 -------------- 적들이 이위신민 이육년 ---------------

 

감히 치질 못했다 왜국이 백제를 깼다는 것은 391년에 근구수왕(응신천황)의 명령으로 진사왕을 사로잡아간 일을 말한다. 391년에 고구려에 패전한 백제는 왕위를 찬탈한 진사왕을 바꾸어 아신왕으로 다시 세우고 왜군의 지원까지 받아서 고구려를 쳤다. 

 

■영락6년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조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수○ 18)○○ 19)○○ 20)분이야라성 21)○성 22)○○ 23)○○ 24)○○ 25)두노성 26)비○, 27)○리성 28)미추성 29)야리성 30)대산한성 31)소가성 32)돈발성 33)○○ 34)○○ 35)루매성 36)산나성 37)○루성 38)세성 39)모루성 40)우루성 41)소○성 42)연루성 43)석지리성 44)암문지성 45)임성 46)○○ 47)○○48)○○ 49)○○ 50)취추성 51)○○○ 52)고모루성,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양성 56)○○ 57)○○○라성 58)구천성 등을 쳐서 빼앗았다.

 

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1)壹八城 2)臼模盧城 3)若模盧城 4)幹弓利城 5)○○城 6)閣彌城 7)牟盧城 8)彌沙城 9)古舍(조)城 10)阿旦城 11)古利城 12)○利城 13)雜彌城 14)奧利城 15)勾牟城 16)古須耶羅城 17)頁○18)○○19)○○ 20)分而耶羅城 21)○城 22)○○23)○○24)○○ 25)豆奴城 26)沸○ 27)○利城 28)彌鄒城 29)也利城 30)大山韓城 31)掃加城 32)敦拔城 33)○○34)○○ 35)婁賣城 36)散那城 37)○婁城 38)細城 39)牟婁城 40)于婁城 41)蘇○城 42)燕婁城 43)析支利城 44)巖門至城 45)林城 46)○○ 47)○○48)○○ 49)○○ 50)就鄒城 51)○○○, 52)古牟婁城, 53)閏奴城, 54)貫奴城, 55)三穰城 56)○○ 57)○○○羅城 58)仇天城口口 口其國城 殘不服

 

병신 왕궁 솔수군 토리 잔국군 ○○수공취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調)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혈○18)○○19)○○ 20)분이야라성 21)○성 22)○○23)○○24)○○ 25)두노성 26)비○ 27)○리성 28)미추성 29)야리성 30)대산한성 31)소가성 32)돈발성 33)○○34)○○ 35)루매성 36)산나성 37)○루성 38)세성 39)모루성 40)우루성 41)소○성 42)연루성 43)석지리성 44)암문지성 45)임성 46)○○ 47)○○48)○○ 49)○○ 50)취추성 51)○○○, 52)고모루성,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양성 56)○○ 57)○○○라성 58)구천성구구 구기국성 잔부복 병신 왕궁 솔수군 --------------- 병사들이 토이 잔국군 ○○ (모성) -------- 전투 준비의 수공취 1)일팔성 2)구 ---------- 모든 면에서 모오성 3)약모오성 -------------- 철저하기에 4)간궁이성 5)○○(진정)성 ------ 오로지 6)각미성 7)모오성 8)미 --------- 불굴의 투지로 사성 9)고사(調)성 10)아단 ------ 싸울 수가 있어 성 11)고이성 12)○(반)이성 ----- 임전무퇴로 13)잡미성 14)오이성 15)구 ----- 적과 싸우니 모성 16)고수야아성 -------------- 싸우는 족족 17)혈○18)○○19)○○ 20)분 -- 이야라성 21)○성 22)○ --------- ○23)○○24)○○ 25)두노 ------ 성 26)비○ 27)○리성 28)미 ---- 추성 29)야이성 30)대산 --------- 험난한 산에서 한성 31)소가성 32)돈발 --------- 두려워하지 않고 성 33)○○34)○○ 35)루매 ----- 성 36)산나성 37)○(막)누성 ----- 밤에 이동할 수 있었고 38)세성 39)모누성 40)우누 ----- 언제나 철두철미하게 성 41)소○(관)성 42)연누성 ----- 대형을 짜기에 43)석지이성 44)암문지 ---------- 야간 전투에서 성 45)임성 46)○○ 47)○○ ---- 48)○○ 49)○○ 50)취추성 ----- 51)○○○, 52)고모루성, --------- 53)윤노성, 54)관노성, 55)삼 ---- 지치지 않고 양성 56)○○ 57)○○○ --------- 아성 58)구천성 구구 ------------- 적진을 향해 구기국성 잔부복 ------------------ 나아갔다

 

중국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의 전설에 봉황성은 영락태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참고하여야 한다. 《만주지리풍속지》에서 봉황산성은 “영락대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기록이 있다. 비문 중의 위 기록에서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오십사성을 공취하였다. 반면에 백팔성은 비문에서 광개토대왕이 처음 공격한 일팔성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백팔성은 108이란 근거가 없고, 고대의 일팔성이 백팔성으로, 다시 백팔성의 하나로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58성에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을 첫번째로 포함시켜야 한다. 그후 백제가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는데, 이 백제 한수는 대동강이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대동강 대산한성(북한산성=근초고왕성)까지 내려온 것으로 확실시된다. 아신왕은 북한산성이 포위당하여서 탈출하고, 한수(대동강) 남쪽 한산성에서 항전하였던 것이다.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왕성(30.대산한성=북한산성)을 함락하였으나, 백제왕은 항복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현재 대동강)를 건너고, 장수를 (한산성)에 보내어 성을 압박하라고 하니, (단기로 쳐들어가서 백제왕에게 항복하고 백성들이 편히 살라고 하여)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 而殘主因逼獻 (上)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八年戊戌 敎遣

기감출(백)전 왕위혁노 도아리수 견자박성 횡○○○○(충직당이) 편국성 이잔주인핍헌 (상)남녀생구일천인 세포천필 (귀)왕, 자서종 금이후영위노객 태왕은사 선미지건 록기후순지성, 어시 취오십팔성 촌칠백 장잔주제 병대신십인 선사환도 팔년무술 교견 

 

기감출(백)전 왕위 --------------- 전투 상황에서 혁노 도아이수 견 ---------------- 과감하게 자박성 횡○○○(충직당) --------- 정면으로 ○(이) 편국성 이잔주 ------------ 나아가니 인핍헌 (상)남여생 --------------- 아무도 구일천인 세포천 ----------------- 막을 수 없었다 필 (귀)왕, 자서종 금 ------------ 전쟁에서 이후영위노객 태 ----------------- 머뭇거리지 않고 왕은사 선미지건 ----------------- 돌진하니 녹기후순지성, 어 ---------------- 어느 때나 시 취오십팔성 촌 ---------------- 압도적으로 칠백 장잔주제 병 ---------------- 이겼고 대신십인 선사환 ----------------- 전장을 도 팔연무술 교견 ----------------

 

신속하게 처음부터 친정을 나왔던 태왕이 건너간 아리수는 지금의 대동강으로 고려된다. 대산한성, 즉 북한산성이 함락되고서 고구려군은 대동강 서쪽의 여러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용강의 횡악성과 성천의 홀골산성등은 그대로 백제 영역이었다. 아무튼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로 요동반도와 대동강 이북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지배권이 넘어간 것이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의 비정은 위의 본문 중에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군은 본계소시 부근에서 출정하여, 봉성현을 치고 수암현을 친 다음에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쳐내려가서 대동강을 경계로 진격을 멈추었다. 이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백제는 대동강 이북땅을 고구려에 내주었다. 백제 아신왕은 396년 7월 대동강 한수 남쪽에서 열병하였는데 광개토왕의 정벌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아신왕은 397년 한산漢山의 북책까지 올라가다가 돌아왔는데 이는 대동강을 따라서 한산의 동북쪽에 있는 순천시 은산殷山까지 올라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개로왕이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사성을 수리하고 사성의 북쪽 숭산崇山까지 방죽을 쌓았는데 이 숭산도 순천시 은산의 숭화산崇化山이고 사성은 개천시 고사산산성이다. 즉 당시 고구려 백제의 경계가 남쪽으로 대동강이며 동북쪽으로도 대동강의 가지인 영원군 성룡강成龍江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로왕은 말기에 동북의 말갈국과 함께 고구려를 같이 치기로 협상한 사실이 [위서-물길전]에 나온다. 

 

■영락8년 398년에 장수를 보내어 숙신의 터전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가태라곡과 남녀 삼백명의 포로를 얻어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숙신도 조공하고 고구려를 섬겼다.

偏師 觀 肅愼土谷 因偏抄得 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來朝貢○事. 九年己

편사 관 숙신토곡 인편초득 막○라성, 가태라곡 남녀삼백여인 자차래조공○사. 구년기 

편사 관 숙신토곡 --------------- 정리하였고 인편초득 막○(가)아 ------------ 사태를 성, 가태라곡 남여 -------------- 큰 사상자 없이 삼백여인 자차애 ---------------- 마무리 지으니 조공○(애)사. 구년기 ----------- 모두가 좋아했다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 동황성에서 하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하였다. 태왕은 신라가 충성함을 치하하고, 사자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해 백잔위서 여왜화통. 왕순하평양 이신라견사 백왕운 왜인만기국경 궤파성지 이노객위민 귀왕청명 ○○○기국충성○견사환고이○○ 

해 백잔위서 여왜 --------------- 적이 쳐들어 오면 화통. 왕순하평양 --------------- 모두가 나서 이신아견사 백왕 ---------------- 맞서니 운 왜인만기국경 ---------------- 쳐들어 온 궤파성지 이노객 ---------------- 적이 도망을 하였다 위민 귀왕청명 ○(사) ---------- 살벌한 ○○기국충성○ ----------------- 견사환고이○○(병친) -----------

 

■장수들이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협보유리왕 때 남한으로 감의 후예인 안라인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昔 新

십년경자 교견보기오만 왕구신라 종남거성 지신라성, 왜만기중 관군방지왜적퇴 ○○○○○○○○래배 급추지 임나가라 종발성 성즉귀복 안라인술병○(=어)신라성 농성 왜구○궤성○○○○○○○○○○○○○○○○○○○진○(=경)수래안라인술병○○○○○기○○○○○○○언○○○○○○○○○○○ ○○○○○○○○○○사○○○○○○○○○○○○궤○○○○안라인술병석 신 십년경자 교견보 ---------------- 적군과 싸울 때 기오만 왕구신아 ---------------- 두려워 함이 없이 종남거성 지신아 ---------------- 언제나 앞장 서니 성, 왜만기중 관군 -------------- 모두가 좋아해 방지왜적퇴 ○○(병초) ---------- 따라 나서고 ○○○○○○래 ----------------- 배 급추지 임나가 --------------- 바람이 불고 아 종발성 성즉귀 --------------- 눈보라 쳐도 복 안아인술병○(=어) ---------- 머뭇거리지 않고 신아성 농성 왜구 --------------- 저돌적으로 ○궤성○○○○ ----------------- ○○○○○○○ ----------------- ○○○○○○○ ----------------- ○(박)진○(=경)수애안아 ------- 일을 할 때는 인술병○○○○ ----------------- ○기○○○○○ ----------------- ○○언○○○○ ----------------- ○○○○○○○ ----------------- ○○○○○○○ ----------------- ○○○사○○○ ----------------- ○○○○○○○ ----------------- ○○궤○○○○ ----------------- 안아인술병석신 -----------------

 

■참을 수 없어 399년 백제가 반격해오자 광개토왕은 먼저 신라를 구원하고 대마도를 점령하여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후손인 안라인으로 다스리게 했다. 아직 신라왕이 직접 고구려 도성을 찾아와 태왕을 알현하지 않아 불러들였다. 국강상광개토경평호태왕 앞에 신하로서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羅寐錦未有身來,○○○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新羅寐錦○○僕勾○○○○朝貢 十四年甲

라매금미유신래,○○○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신라매금○○복구○○○○조공 십사년갑 나매금미유신애, ----------------- 분연히 일어나 ○○○국강상광 ----------------- 개토경평안호태 ----------------- 압도적으로 왕○○(오조)신아매금 ---------- 우세하니 ○○복구○○○ ----------------- ○(합)조공 십사년갑 ------------뿔뿔이 흩어졌다

 

■신라 매금은 문맥상으로 신라왕의 호칭이 된다. <광개토왕 비문> 중에서 백제나 신라에는 왕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고 백잔주百殘主로 폄하하고 신라 매금으로 폄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록이 [한단고기]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기록에도 나온다. 신라의 매금과 백제 어하라와 남평양에서 만나서 조공의 양과 국경 수비군의 수를 정하였다.

又與 新羅 寐錦 百濟 於瑕羅 會于 南平壤 約定 納貢 戌兵之數.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부른 것은 고주몽이 소서노를 책립하여 부른 것이 최초 기록이다. 또한 중국의 [북사] 등에서도 백제는 자기들의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백제 어라하와 상대되는 신라 매금은 신라왕의 호칭인데 신라 자체의 왕호인 마립간의 변형이다. 

 

■영락14년 404년 갑진년에 이르러,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 ○○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十七年丁未敎

진 이왜 부궤 침입 대방계 ○○○,○○, 석성 [위]연선[백잔] ○○솔[수군지]평양 [왜구선]봉상우 왕당 요절 탕자 왜구궤패 참살무수 십칠년정미교 진 이왜 부궤 침입 ----------------- 적진을 공격할 시에 대방계 ○○○,○ ------------------ ○(비), 석성 [위]연선[백 ---------- 하나 같이 잔] ○○(아자)솔[수군지] ---------- 쳐들어 가니 평양 [왜구선]봉상 ----------------- 방어하던 적들은 우 왕당 요절 탕자 ----------------- 어쩔 줄 볼라 왜구궤패 참살무 ------------------- 도망을 갔다 수 십칠년정미교 -------------------

항상 백제의 반격을 받은 광개토왕은 고구려 평양성에서 이를 분쇄하고 아신왕을 퇴위시켰다.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佳城,○○○○○○, 나○성 등을 다시 깨트렸다. 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二十年庚 戌 견 보기 오만○○○○○ ○○○○사○○합전 참살탕진 소획 쇄갑 일만여 영군자기계 부가칭수 환파 사구성, 루성, ○가성,○○○○○○, 나○성, 이십년경 술

 

견 보기 오만○○(구성) --------- 훈련을 하니 ○○○ ○○○○ ---------------- 사○○(지저)합전 참살 --------- 의견이 분분할 때는 탕진 소획 쇄갑 일 -------------- 열심히 만여 영군자기계 --------------- 설득하고 부가칭수 환파 사 --------------- 서로의 의견을 구성, 누성, ○(판)가성, --------- 조절하니 ○○○○○○, 나 ---------------- ○(아)성, 이십연경 술 ----------- 나라가 평화로왔다 

 

■영락20년 410년에 동부여가 본래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도중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으므로 태왕이 직접 정벌을 나가 여성에 이르렀더니 여성국의 해왕이 항복하므로 태왕은 용서하고 돌아왔다. 또한 고구려를 존경하여 관리를 보내어 항복한 자들이 있었으니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등이다. 이 원정에서 64성과 1400부락을 깨트렸다.

東夫餘 舊是 鄒牟王 屬民 中叛 不貢 王躬率 往討軍到餘城 而餘城國駭○○○○○○○○○ 王恩普○於是旋還 又其 慕化 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木耑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守墓人烟戶, 賣

동부여 구시 추모왕 속민 중반 불공 왕궁솔 왕토군도여성 이여성국해○○○○○○○○○ 왕은보○어시선환 우기 모화 수관래자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목단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범소공파 성육십사 촌일천사백 수묘인연호, 매 

 

동부여 구시 추모 --------------- 좋지 않은 상황에서 왕 속민 중반 불공 -------------- 굴하지 않고 왕궁솔 왕토군도 ---------------- 맞서 여성 이여성국해 ---------------- 성공적으로 ○○○○○○○ ----------------- ○○ 왕은보○어 ---------------- 시선환 우기 모화 --------------- 막강한 세력으로 수관애자 미구우 ---------------- 밀고 나가니 압노, 비사마압노, --------------- 속수무책으로 목단사누압노, 숙 --------------- 어쩔 줄을 몰라 사사○○(=압로), ○○○ ------ 압노 범소공파 성 -------------- 도망을 가 육십사 촌일천사 --------------- 추적을 하여 백 수묘인연호, 매 ------------- 궤멸시켰다 태왕의 묘를 지키는 수묘인가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매구여민 국연2가 간연 3가, 동해매 국연3가 간연 5가, 돈성민 간연4가, 간성 간연1가, 비리성 간연2가, 평양성민 국연1가 간연10가, 거련 간연2가, 배루인 국연1가 간연 43가, 양곡 간연2가, 안부련 간연22가, 개곡 간연3가, 신성 간연3가, 남소성 국연 1가,

句余民 國烟二 看烟三, 東海賈 國烟三 看烟五, 敦城民 四家爲看烟, 干城 一家爲看烟, 碑利城 二家爲國烟, 平穰城民 國烟一家 看烟十, [車]連 二家爲看烟, 俳蔞人國烟一 看烟四十三, 梁谷 二家爲看烟, ○城 二家爲看烟, 安夫連 二十二家爲看烟, 改谷 三家爲看烟, 新城 三家爲看烟, 南蘇城 一家爲國烟. 新來韓

구여민 국연이 간연삼, 동해가 국연삼 간연오, 돈성민 사가위간연, 간성 일가위간연, 비리성 이가위국연, 평양성민 국연일가 간연십, [거]련 이가위간연, 배루인국연일 간연사십삼, 양곡 이가위간연, ○성 이가위간연, 안부련 이십이가위간연, 개곡 삼가위간연, 신성 삼가위간연, 남소성 일가위국연. 신래한 

구여민 국연이 간 -------------- 동쪽으로 연삼, 동해가 국연 ------------- 추격하여 삼 간연오, 돈성민 ------------- 동해에 다다르고 사가위간연, 간성 -------------- 남쪽으로는 일가위간연, 비이 -------------- 살수에 도착하고 성 이가위국연, 평 ------------- 서쪽으로 진격해 양성민 국연일가 --------------- 돌궐을 좇아 내고 간연십, [거]연 이가 ---------- 위로 위간연, 배누인국 -------------- 말갈을 좇아 내 연일 간연사십삼, -------------- 평화를 양곡 이가위간연, -------------- 확립했다 ○(조)성 이가위간연, ---------- 많은 나라에서 안부연 이십이가 --------------- 조공을 받쳐 위간연, 개곡 삼가 ------------- 재물이 위간연, 신성 삼가 ------------- 남아돌 정도로 위간연, 남소성 일 ------------- 모두가 가위국연. 신애한 -------------- 풍족했다

 

새로온 수묘인은 다음과 같다. 

■한예사수성 국연1가 간연1가, 모루성 간연2가, 두비압령한 간연5가, 구모객두 간연2가, 구저한 간연1가, 사조성한예 국연3가 간연21가, 고모야라성 간연1가, 막고성 국연1가 간연3가, 객현한 간연1가, 아단성-잡진성 합쳐서 간연 10가, 파노성한 간연9가, 구모로성 간연4가, 약모로성 간연2가, 모수성 간연3가, 간궁리성 국연2가 간연3가, 미추성 국연1가 간연 7가, 야리성 간연3가, 두노성 국연1가 간연2가, 오리성 국연2가 간연8가, 수추성 국연2가 간연5가, 백제남거한 국연1가 간연5가, 대산 한성 간연6가, 농매성 국연1가 간연7가, 윤노성 국연1가 간연 22가, 고모루성 국연2가 간연 8가, 탕성 국연1가 간연8가, 미성 간연6가, 취자성 간연5가, 삼양성 간연24가, 산나성 국연1가, 나단성 간연1가, 구모성 간연1가, 어리성 간연8가, 비리성 간연3가, 세성 간연3가.

穢沙水城 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嶺韓 五家爲看烟, 句牟客頭 二家爲看烟, 求底韓 一家爲看烟, 舍蔦城韓穢 國烟三 看烟二十一, 古模耶羅城 一家爲看烟, 莫古城 國烟一 看烟三, 客賢韓 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 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 九家爲看烟, 臼模盧城 四家爲看烟, 若模盧城 二家爲看烟, 牟水城 三家爲看烟, 幹弓利城 國烟二 看烟三, 彌鄒城 國烟一 看烟○○○○七, 也利城 三家爲看烟, 豆奴城 國烟一 看烟二, 奧利城 國烟二 看烟八, 須鄒城 國烟二 看烟五, 百殘南居韓 國烟一 看烟五, 大山韓城 六家爲看烟, 農賣城 國烟一 看烟七, 閏奴城 國烟一 看烟二十二, 古牟婁城 國烟二 看烟八, 湯城 國烟一 看烟八, 味城 六家爲看烟, 就咨城 五家爲看烟, 彡穰城 二十四家爲看烟, 散那城 一家爲國烟, 那旦城 一家爲看烟, 勾牟城 一家爲看烟, 於利城 八家爲看烟, 比利城 三家爲看烟, 細城

예사수성 국연일 간연일, 모루성 이가위간연, 두비압령한 오가위간연, 구모객두 이가위간연, 구저한 일가위간연, 사조성한예 국연삼 간연이십일, 고모야라성 일가위간연, 막고성 국연일 간연삼, 객현한 일가위간연, 아단성, 잡진성 합십가위간연, 파노성한 구가위간연, 구모로성 사가위간연, 약모로성 이가위간연, 모수성 삼가위간연, 간궁리성 국연이 간연삼, 미추성 국연일 간연○○○○칠, 야리성 삼가위간연, 두노성 국연일 간연이, 오리성 국연이 간연팔, 수추성 국연이 간연오, 백잔남거한 국연일 간연오, 대산한성 육가위간연, 농매성 국연일 간연칠, 윤노성 국연일 간연이십이, 고모루성 국연이 간연팔, 탕성 국연일 간연팔, 미성 육가위간연, 취자성 오가위간연, 삼양성 이십사가위간연, 산나성 일가위국연, 나단성 일가위간연, 구모성 일가위간연, 어리성 팔가위간연, 비리성 삼가위간연, 세성 

 

예사수성 국연일 --------------- 언제 어디서나 간연일, 모누성 이 ------------- 싸울 수 있도록 가위간연, 두비압 -------------- 무장하고 영한 오가위간연, -------------- 다니니 구모객두 이가위 --------------- 어떤 적도 간연, 구저한 일가 ------------- 선뜻 위간연, 사조성한 -------------- 침입을 예 국연삼 간연이 -------------- 생각지 못 했다 십일, 고모야나성 -------------- 무슨 일이 있어도 일가위간연, 막고 -------------- 무기 없이 성 국연일 간연삼, ------------- 외출을 객현한 일가위간 --------------- 하지 않았다 연, 아단성, 잡진성 ------------ 텅 빈 합십가위간연, 파 -------------- 들판을 노성한 구가위간 --------------- 말을 타고 연, 구모노성 사가 ------------- 달릴 때 위간연, 약모노성 -------------- 방패와 이가위간연, 모수 -------------- 칼을 성 삼가위간연, 간 ------------- 등에 메고 궁이성 국연이 간 -------------- 있었기에 연삼, 미추성 국연 ------------- 겁나지 않았다 일 간연○○○○(무송이천) ----- 달이 없어 칠, 야니성 삼가위 ------------- 어두울 때 간연, 두노성 국연 ------------- 솔방울을 일 간연이, 오니성 ------------- 넣은 국연이 간연팔, 수 ------------- 통에 추성 국연이 간연 -------------- 불을 붙이어 오, 백잔남거한 국 ------------- 들고 다니며 연일 간연오, 대산 ------------- 길을 밝혔다 한성 육가위간연, -------------- 철판을 댄 농매성 국연일 간 -------------- 갑옷을 입고 연칠, 윤노성 국연 ------------- 칼을 차면 일 간연이십이, 고 ------------- 어느 곳에서도 모누성 국연이 간 -------------- 겁이 나지 않았다 연팔, 탕성 국연일 ------------- 동시에 간연팔, 미성 육가 ------------- 활을 쏘기에 위간연, 취자성 오 ------------- 공격하는 적군은 가위간연, 삼양성 -------------- 어찌 할 줄 몰라 이십사가위간연, --------------- 도망가기에 바빴다 산나성 일가위국 --------------- 성을 쌓을 때 연, 나단성 일가위 ------------- 작은 돌을 간연, 구모성 일가 ------------- 채워서 위간연, 어이성 팔 ------------- 받치기에 가위간연, 비이성 -------------- 비가 와도 삼가위간연, 세성 -------------- 무너지지 않는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살아계실 제에 말씀하시기를 “선조왕께서 단지 원근의 고구려구민으로서 묘를 지키고 가꾸게 하셨다. 나는 고구려 구민이 고생할까 염려한다. 내가 죽은 후에 수묘인을 정할 때에는 내가 몸소 다닌 각 부락에서 다 오라고 하지 말고, 한예인들로 수묘를 하도록 준비하라.” 유언이 이와 같으니 오늘 이대로 시행하여서 한예 각 성에 명령을 내려서 220가를 뽑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고구려식 제사법을 모를 것을 염려하여 고구려 구민 110가를 다시 뽑아 배치하니 수묘호는 국연이 30가요, 간연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三家爲看烟 國 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存時 敎言 祖王先王 但敎 取 遠近舊民 守墓 洒掃 吾慮 舊民 轉當 羸劣, 若 吾 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 吾躬巡所 略來 韓穢 令備 洒掃. 言敎如此 是以如敎 令 取 韓穢 二百二十家 慮 其不知法 卽 復取 舊民 一百十家 合 新舊守墓戶 國烟三十 看烟三百 都合三百三十家 自上祖先王以

삼가위간연 국 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존시 교언 조왕선왕 단교 취 원근구민 수묘 세소 오려 구민 전당 리열, 약 오 만년지후 안수묘자 단취 오궁순소 약래 한예 령비 세소. 언교여차 시이여교 영 취 한예 이백이십가 려 기불지법 즉 부취 구민 일백십가 합 신구수묘호 국연삼십 간연삼백 도합삼백삼십가 자상조선왕이 

 

삼가위간연 국강 ---------------- 전략적으로 상광개토경평안 ----------------- 중요한 지점을 호태왕 존시 교언 --------------- 찾아서 조왕선왕 단교 취 --------------- 성을 쌓아 원근구민 수묘 세 --------------- 방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 오여 구민 전당 -------------- 방어 시에 이열, 약 오 만년지 ------------- 봉쇄에 주안을 둬 후 안수묘자 단취 --------------- 퇴로를 차단하고 오궁순소 약애 한 --------------- 협공을 해 예 영비 세소.언교 -------------- 모두를 잡았다 여차 시이여교 영 --------------- 적진을 공격할 때 취 한예 이백이십 --------------- 측면을 쳐 가 여 기불지법 즉 --------------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부취 구민 일백십 --------------- 중앙을 가 합 신구수묘호 --------------- 파쇄한다 국연삼십 간연삼 ---------------- 비바람이 칠 때 백 도합삼백삼십 ---------------- 때를 놓치지 않고 가 자상조선왕이 ----------------

 

■돌격해 선조왕 이래로 왕릉 위에 석비를 세우지 않아서 수묘인 연호를 설치하여 관리하는데 착오가 있어 왔다. 따라서 국강상광개초경평안호태왕은 선조왕릉에 비석을 세우고 그 수묘인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도록 하고 수묘인 제도를 제도화 하였다. 이후로는 수묘인들이 논밭을 서로 팔고사는 것을 금하니 법을 어기고 팔고사는 사람은 형벌에 처한다. 이러한 법에 따라서 왕릉을 지켜라

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 差錯 唯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 烟戶 不令 差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扌亶買 其有 違令賣者刑之買人 制令守墓之.

래 묘상부안석비 치사수묘인연호 차착 유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진위조선왕묘상립비 명기 연호 부령 차착 우제수묘인 자금이후 불득경상전매 수유부족지자 역불득수단매 기유 위령매자형지매인 제령수묘지. 

 

애 묘상부안석비 ---------------- 승리로 이끈다 치사수묘인연호 ----------------- 전국적으로 차착 유국강상 ------------------ 준비를 하니 광개토경평안호 ----------------- 빈틈이 없다 태왕 진위조선왕 ---------------- 성을 함락하고 묘상입비 명기 연 --------------- 민심을 수습 할 때 호 부영 차착 우제 -------------- 나이 든 사람을 수묘인 자금이후 ---------------- 선발해 불득경상전매 -------------- ----- 모시면 수유부족지자 역 ----------------- 모두가 따라오니 불득수단매 기유 ----------------- 마음 속에 위영매자형지매 ------------------ 윗사람을 모시는 것을 인 제영수묘지. ------------------- 각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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