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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연기대첩비전문(燕岐大捷碑全文)■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3. 22.

https://dldml2xhd.tistory.com/m/15920601
■연기대첩비(燕岐大捷碑)공원■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도신고복로 586
☞주소 : 세종 연서면 용암리 208-5 
●원나라 반란군인 카다안(哈丹賊)과 자신의 아들 싱라카르[勝納哈兒]와 반란을 일으켰을때 무리를 궤멸시킨 대승첩(大勝捷)이였다.



■연기대첩비전문(燕岐大捷碑全文)■ 

●연기(燕岐)는 그 땅이 아름다워 걸출한 인물들이 수없이 배출되었고 오랜 역사의 향기를 전해 주는 문화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이 같은 연기의 역사와 전통은 이 땅위에서 오랜 역사와 함께한 연기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값진 유산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기지역은 忠孝烈의 정신과 인맥이 끊임없이 이어진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충효열의 정신사적 전통은 저 멀리 백제 멸망 직후 국보106호 국보 108호 석불비상을 조성하였던 백제 유민들의 염원에서 비롯되기도 하였을 것이고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던 수 많은 이 지역의 충절 인물들이나 각 가문에서 배출된 효자 열녀 열부의 행적이 바로 그러한 전통을 무르익게 한 원천이었으리라. 어디 그 뿐이랴 또 하나 연기 사람을 자랑하고 자랑할 커다란 역사의 흔적이 우리 앞에 그 웅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연기대첩(燕岐大捷)의 역사요 정신이라 할 것이다. 연기대첩은 고려시대 대표적 역사서인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상세하게 전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고려 충렬왕 17년(1291) 5월에 연기 지역에 침략했던 원나라 반란군인 합단(哈丹)의 무리를 궤멸시킨 대승첩(大勝捷)이었다. 합단의 군대는 고려 충렬왕 16년(1290) 5월 고려의 동북면 지역으로 쳐들어와 함경도와 강원도 경기도를 차례로 유린 약탈과 살상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합단적은 이어 원주와 충주로 진출하였다가 이곳에서 지역민들의 치열한 저항에 직면하여 상당한 타격을 받고 진로를 바꾸어 결국 우리 고장 연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합단적이 우리 연기땅에 발을 내디딘 것은 충렬왕 17년(1291) 4월로 이들은 당시 연기 서면 쌍전리의 정좌산에 주둔하면서 삼남 지역으로 진출을 도모하였으니 참으로 이는 우리 역사상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일대 국난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합단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고려의 한희유(韓希愈), 김흔(金忻), 인후(印侯) 등 삼장군과 원나라의 연합군은 5월 1일 밤 은밀히 목천(木川)을 출발 적의 예상을 뒤엎는 강행군으로 이틑날 새벽 동이 틀 무렵 정좌산에 도착 합단적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고려군의 공격이 부진하였다. 이에 김흔 장군은 장졸들에게 후퇴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독전하니 이석(李碩)과 전득현(田得賢)이 앞장서 나가 적의 적의 선봉을 목베고 이에 힘을 얻은 전군이 합세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자 합단적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달아나는 적을 공주 금강까지 추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30여리에 이르고 물에 빠져 죽은 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날 하루의 전투로 적의 주력은 거의 궤멸되고 날랜 기병 천여기가 강을 건너 도망갔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7일후인 5월 8일에 정좌산 전투에서 패퇴하여 강을 건너 도망갔던 합단적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남면 원수산(元帥山) 방면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적중에는 백발백중으로 활을 잘 쏘는 자가 앞에 버티고 있어 군사들이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을 본 한희유 장군이 긴창을 겨누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진하여 활 잘 쏘는 자를 잡아서 한칼에 참하고 그 머리를 창에 꿰어 적에게 보이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틈에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니 적은 말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그로부터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합단적은 6월 5일 단적 580여명이 한희유 장군에게 투항하므로서 전후 2년에 걸친 합단적의 침입은 우리 연기땅에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연기대첩은 고려에 침입한 합단적으로 하여금 다시는 전세를 회복할 수 없도록 완전 섬멸하여 일대 국난을 극복한 역사적 전투였으며 대첩이었다. 만일 연기대첩으로 합단적을 궤멸시키지 못하였다면 가깝게 충청도 내륙은 물론 전라도 경상도 지역도 그들의 말발굽 아래에서 온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기대첩은 후대의 역사 기록에서 소홀하게 취급되었고 대승첩을 기록할 어떠한 유적도 연기땅에는 남아있지 않운 실정이다. 더욱이 700여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숭고한 연기대첩의 사실마저 올바르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드물고 다만 정좌산 부근의 창고개 전승골 군량골이라든가 원수산의 장군바위와 항서바위등의 지명과 구전만 이 당시 외적을 맞아 의롭게 싸웠던 연기 현민들과 고려군의 용맹 충절 흔적을 아스라하게 느끼게 할 따름이다. 뒤늦었지만 이를 아쉬워하는 연기군민들은 뜻을 모아 잊혀져가는 연기대첩의 역사를 바로 알리고 그 거룩한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곳을 찿는 수많은 연기군민들이 연기대첩 당시의 용전(勇戰)과 충절(忠節)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여 충효열 정신으로 뭉쳐진 도덕적 인간상이 현대와 미래의 연기군민상(燕岐郡民像)으로 정립되기를 기대한다. 

서기 2000년 4월 15일 

건 립 자 연기군수  홍순규
연기대첩비건립추진위원회
위 원 장 조치원문화원장  장   영
사실고증 연기향토사연구소고문  김재붕
글 공주대학교사학과교수  이해준
글 씨 송암  민복기
조 각  박대순

 

●대몽항쟁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고려의 원종(元宗)은 몽골제국의 패권을 놓고 이루어진 쿠빌라이 칸과 아리크 부케와의 대결에서 쿠빌라이의 편을 들었다.

그 무렵, 원제국의 황제가 된 쿠빌라이 칸도 다른 문제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Khaidu)와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대 중앙아시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카이두는 카간을 칭하고 쿠빌라이에 대항했으며, 1277년 그는 알말릭에서 카라코룸으로 진격하여 쿠빌라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에 쿠빌라이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명장 바얀(伯顔)을 중국 땅에서 소환했다. 과연 바얀은 적대세력의 인물인 시라기 등을 오르콘에서 패배시키고 이르티쉬까지 몰아내었다.

헌데 이러한 실패를 맛본 카이두는 포기하지 않고 1287년 새로운 동맹을 구성하여 다시 한번 쿠빌라이에 대항했다. 이때 카이두(Khaidu)가 끌어들인 방계 몽골 지파들의 지도자들은 나얀(乃顔), 식투르, 그리고 카다안(哈丹) 등이었다. 징기스칸의 막내아우 테무게 옷치긴(鐵木哥斡赤斤)과 이복 아우 벨구테이의 후손인 왕자 나얀은 만주 지역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으며, 식투르는 징기스칸의 큰아우 카사르의 손자였고, 카다안은 둘째아우 카치운(合赤溫)의 손자였다. 이들의 세력은 동몽골, 만주 지역이었는데 카이두(Khaidu)의 서방 세력과 결합한다면 쿠빌라이에겐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쿠빌라이가 선택한 패는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장수인 바얀이었으며, 쿠빌라이는 바얀에게 카이두(Khaidu)를 저지하도록 시키고 72세였던 자신은 직접 나얀과 전투를 치러 그를 패배시키고 나얀을 사로잡아 죽였다.[1]

한편, 이 전란동안 눈치를 살피던 충렬왕은 1287년 5월 12일 장군 유비(柳庇)를 파견하여 반란 토벌에 한몫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쿠빌라이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에 한희유(韓希愈) 등의 장수들과 충렬왕 본인이 직접 원나라로 향하기도 했다

헌데 아직 남아 있는 반란 세력으로 카다안의 군대가 있었다. 테무르 울제이투(Temur Oljeitu)는 이 카다안(哈丹)의 반란 세력을 격파했는데, 남은 잔당들은 이후 다시 세력을 일으키려 했으나 나이만다이(那蠻歹)에게 패배해서 더 이상 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일으키긴 힘들었다. 카다안(哈丹)의 세력은 그렇게 되자……고려를 공격했다.

https://blog.naver.com/samo2001/22329465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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