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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원나라의 일본 1,2차 원정▣=元日戰爭=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3. 22.

▣원나라의 일본 원정▣

=元日战争=

=元日戰爭=

●元寇げんこう, ●文永の役ぶんえいのえき, ●弘安の役こうあんのえき

 

◈1차 일본원정 최종 교전비

2022.11.07 08:25:40
조회 294 추천 8 댓글 2
 

고려사 > 권104 > 열전 권제17 > 제신(諸臣) > 김방경 > 김방경이 합포에서 일본 정벌을 준비하다


여진군이 기한보다 늦자 이내 배를 출발하여대마도(對馬島)로 들어가 격살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키섬[一岐島]에 도착하니 왜병들이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박지량과 김방경의 사위 조변(趙抃)이 그들을 물리치자, 왜는 항복을 청하였다가 다시 와서 싸웠다.

홍차구는 박지량·조변과 함께 1,000여 명을 격살하고


배를 삼랑포(三郞浦, 후쿠오카 사와라구)에 두고 길을 나누어 진군하여 죽인 적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왜병이 돌연 이르러 중군을 공격하였는데, 장검이 좌우에서 교차하고 있었으나 김방경은 나무를 심어놓은 듯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신호용 화살[嚆矢] 하나를 뽑아들고 소리를 내어 크게 꾸짖으니 왜병은 쉽게 허물어져 도망쳤다.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忻)·조변(趙抃)·이당공(李唐公)·김천록(金天祿)·신혁(申奕) 등이 힘써 싸우자 왜병은 대패하였고 누워있는 시체가 삼대[麻]와 같았다. 홀돈이 말하기를, “몽고 사람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고 하나,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제군(諸軍)은 함께 싸우다가 해가 저물자 흩어졌다. 김방경이 홀돈·홍차구에게 일러 말하기를,

“병법에 멀리 떠나와 싸우는 군사[千里縣軍]는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 합니다. 우리 군사가 비록 적지만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와 스스로들 싸우고 있는 것이 바로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 회음(淮陰)이 배수진(背水陣)을 쳤던 것[孟明焚船 淮陰背水]과 같습니다. 다시 싸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에 적은 병력의 군대는 강하더라도 많은 병력의 적군에게 사로잡힌다[小敵之堅 大敵之擒]고 하였소. 피로에 지친 데다 물자도 결핍된 군사를 책동하고는 있지만 적은 나날이 많아지고 있어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함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이때〉 유복형(劉復亨)이 유시(流矢)에 맞자 먼저 배에 올랐고 마침내 군사를 물려 〈배로〉 돌아왔다. 마침 밤이 되자 큰 폭풍우가 일어 전함들이 바위와 절벽에 부딪쳐 많이 손상되었고, 김신(金侁)은 물에 빠져 죽었다.

합포에 당도하여 포로와 무기를 황제와 왕에게 바치자, 왕은 추밀부사(樞密副使) 장일(張鎰)을 보내 위유(慰諭)하였고 김방경에게 명하여 먼저 돌아오도록 하고는 상주국 판어사대사(上柱國 判御史臺事)를 더해 주었다.

고려사 > 권28 > 세가 권제28 > 충렬왕(忠烈王) 즉위년 > 11월

일본 정벌군이 많은 전사자를 내고 돌아오다

기해 동정(東征) 갔던 군사들이 합포(合浦)로 돌아왔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위로하였는데, 돌아오지 못한 군사가 무려 13,500여 인이었다.


쓰시마 이키 학살한게 1천명
하카타만 진입 후에는 숫자 없음 (많이 죽였다, 왜병이 대패했다)


◐최종 전투 결과
■일본측 피해 1,000명 이상
■려,몽골측 피해 13,500여 명

 

●황제(皇帝)●
- 쿠빌라이 (忽必烈) 

■총사령관(総司令官)■
●동정도원수(東征都元帥)
- 힌두 (忻都) → 홀돈 (忽敦) 

■몽고(蒙古) · 한군(漢軍)■ 

●동정좌부도원수(東征左副都元帥)
- 유복형 (劉復亨) 

●동정우부도원수(東征右副都元帥)
- 홍다구 (洪茶丘) 

●소용대장군(昭勇大将軍)
- 아랄첨목아(阿剌帖木兒) 

●관군만호(管軍万戸)
- 아무개 

●기타 (소속을 알 수 없음)
- 삼몰합 (三没合) 

■고려군 (삼익군[三翼軍])■ 

●중군(中軍)●
●도독사(都督使)
- 김방경 (金方慶) 

●지병마사(知兵馬事)
- 박지량 (朴之亮)
- 김흔 (金忻) 

●부사(副使)
- 임개 (任愷) 

●좌익군(左翼軍)●
●좌군사(左軍使)
- 김신 (金侁) 전사 

●지병마사(知兵馬事)
- 위득유 (韋得儒) 

●부사(副使)
- 손세정 (孫世貞) 

■우익군(右翼軍)
●우군사(右軍使)
- 김문비 (金文庇) 

●지병마사(知兵馬事)
- 나유 (羅裕)
- 박보 (朴保) 

●부사(副使)
- 반부 (潘阜)

▶과연 신풍(神風 :가미카제)인가? 
▶ 합포를 전초기지로 2차 원정 준비

경남 마산(馬山)항,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이 항구는 수면이 잔잔하고 수심이 깊어 좋은 항구가 들어설 수 있는 천연적인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많은 섬이 거친 파도를 막아주어서 천혜의 군항이 들어선 진해만에서도 육지 쪽으로 무려 9Km나 들어온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마산항은 청일전쟁 이후 고종 광무 3년인 1889년에 개항했다.
개항 이후 134년이 되는 마산항은 좋은 자연 입지 조건 때문에 연 천5백만 톤 이상의 물동량을 처리하는 국제항으로 발돋움했다.
항구로서 마산항의 역할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조창(漕倉)이 설치되기도 했다.
조창이란 배로 실어 나를 곡식을 쌓아두는 곳이다. 

바로 이곳이 여몽 연합군의 1차 일본 원정의 전초기지였던 곳이다.
당시의 이름은 합포(合浦), 1280년, 합포는 많은 군사와 뱃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여몽 연합군의 제 2차 일본 원정이 이곳을 전초기지로 다시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정동행성 설치, 원정 준비 독려
합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배들이 건조되고 있었고 곳곳에서 군사 합동훈련이 실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원정 준비를 지휘한 곳은 합포에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이었다.
정동행성의 정식명칭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바로 일본의 정벌을 상징하는 ‘정동’과 중앙정부의 지방파견 기관을 의미하는 ‘행중서성’이라는 말이 합쳐서 만들어진 기구다.
쿠빌라이는 1280년 일본 정벌을 위한 전방 사령부로 이 기구를 설치했다.  

정동행성이 설치된 곳은 환주산(環珠山)으로 지금 마산의 무학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산이다. 정동행성 터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몽고정(蒙古井)이 나타난다. 정확히 얘기하면 몽골정이지만 과거에는 몽골을 중국이 부르는 대로 몽고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굳어졌다.
3.15 소공원 앞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다.
몽골군이 정동행성 근처에서 주둔했을 때 군마의 식수를 공급했던 우물로 알려진 곳이다.
당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이곳을 기지로 삼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 일본, 재침공 대비 방어진지 구축
같은 시기 일본의 하카다 지역 일대에서도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차 원정 때 여몽 연합군이 상륙했던 이 일대에는 예상되는 적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석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위쪽 해안 지역의 기타큐슈와 혼슈 등지에도 방어망이 구축되고 군사들이 새롭게 포진됐다. 비록 태풍의 덕분이기는 했지만 여몽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일본의 싯켄 도키무네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그래서 다음해 쿠빌라이의 친서를 가지고 방문한 두세충(杜世忠)을 비롯한 몽골의 사절단을 카마쿠라에서 접견한 뒤 모두 처형해 버렸다.
1279년에는 일본과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남송 출신의 주복(周福) 등 시절단이 방문하자 아예 가마쿠라에 들이지도 않고 다이자후에서 처형했다.
하문저(何文著), 사투르 웃딘 등 사신들도 마찬가지로 참형에 처해졌다.
사신을 살해했다는 것은 교전을 불사한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일단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나타난 이상 예상되는 공격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차 때와는 달리 두 번째 격돌 앞두고 쌍방이 충분한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다.
전쟁 준비는 중국 땅 강남에서도 추진되고 있었다. 

▶ 천주만 일대의 대규모 선박 건조
남송을 접수하면서 항주와 광주, 복주, 천주 등 해안 지역을 손에 넣은 몽골은 이 지역을 이용해 배를 건조하고 인원을 충당함으로써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준비된 배는 3천 5백여 척, 원정군은 10만 명이었다.
강남을 접수한 지 5년 만에 10만의 원정군을 한꺼번에 출진시킨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겉모습과 달리 허점이 있었다.  

그들은 정예부대가 아니라 전투력이 결여된 잡군(雜軍)이었다.
늙은 병사와 소년 병사, 실업자 등이 대부분으로 어느 정도 전투력을 발휘할지가 의문스러웠
다.
그들은 바로 접수된 남송 병사들 가운데 가장 전투력이 쳐지는 하급 군인과 잡부들이었다. 

 

▶ 대부분 약졸로 구성된 강남 원정군
남송을 접수하면서 거의 전투도 없이 그냥 몽골의 그늘 아래로 들어온 남송 병사들은 백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그 가운데 우수한 병사들을 뽑아 황궁 친위대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분쟁지역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배치했다. 

그래도 아직 많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일본 원정군으로 선발된 병사들은 남아 있던 사람들로 대부분 약졸(弱卒)이었다.
몽골로서는 대거 보내면서도 그들을 잃어도 별 손해가 없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지휘관으로 별 이름도 없는 중급 장수를 내세운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강남군은 ‘버리는 카드’의 성격이 짙었다.
그렇다고 보면 역시 주력부대는 ‘동로군’이라고 부르는 합포에서 출발하는 여몽 연합군이었다. 정예부대인 이들이 먼저 일본을 공격하면 강남군이 합류해 힘을 보탠다는 것이 대략의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일본 저항으로 상륙하지 못한 채 고전
1281년 5월, 4만의 동로군과 9백 척의 선박이 합포를 출발했다.
1차 때보다 원정군의 숫자가 다소 많아졌지만 보급 요원 등이 많아 전력은 1차 때와 비슷했다. 이어서 항주 바깥 경원항(慶元港)에서 10만 명을 태운 3천여 척의 함대가 출발했다.
신안 유물선이 일본을 향해 출발했던 바로 그 항구, 지금의 영파(寧波:닝보)다.
함대의 편성 내용이 어떻게 됐건 전례 없는 초대형 함대로 바다로 나서는 장관을 짐작할 만하다. 

하카다에 도착한 동로군은 이번에는 쉽게 상륙하지 못하고 물 위에서 싸워야만 했다.
일본군은 미리 돌로 구축한 방어진지 뒤에서 뭍에 오르는 것을 강력히 저지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물 위에 배를 띄운 채 고전했다.
6월 기타큐슈에 도착한 강남군은 전투력이 약했기 때문에 더욱 접근이 어려웠던 것은 당연했다.
4천 척이 넘는 배들이 일본 앞 바다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시간만 보내는 상황이 빚어졌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7주나 됐다. 

▶ 다시 덮친 태풍으로 원정 실패
8월 초 다시 한번 불청객, 태풍이 이들을 덮쳤다.
거대한 풍랑 속에 수많은 배들이 부서지고 엄청난 사람들이 물속에 수장됐다.
이때 잃은 병력은 거의 10만에 육박했다.
주로 강남군이었고 주력부대인 여몽 연합군과 전함들은 대부분 무사했다.
어차피 버리려 했던 카드가 버려진 것이어서 이때의 상실에 몽골이 별로 상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두 번에 걸친 일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것도 두 번 모두 직접적인 원인은 태풍이었다.
일본은 이를 두고 하늘이 보낸 바람이라고 해서 ‘신의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을 붙였다.
과연 그게 ‘신의 바람’일까? 

▶ 태풍 만난 것 당연한 결과
8월 초에 큐슈 앞 바다로 태풍이 지날 확률은 4% 정도 된다고 한다.
한 시점을 놓고 보면 확률이 낮아 보이지만 여름철 한 달 이상을 바다에서 오고 가지도 못했다면 태풍을 만날 확률은 엄청나게 높아진다.
지난 50년 동안의 통계를 보면 1년에 평균 27개 전후의 태풍이 발생했다.
7월에서 9월 사이에 발생하는 태풍이 그 가운데 70%가량 된다.
그 태풍이 가장 많이 지나는 지역이 일본이다.
태풍과 장마와 지진이 많은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정군이 태풍을 만난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거의 태풍에 몸을 내놓고 ‘날 잡아 잡수’ 한 꼴이었다.
오히려 바다 위에서 7주를 보낼 때까지 용케 태풍을 만나지 않고 버티었던 것이 신기할 정도다. 

▶ 잘못된 신화 가미카제
그런데도 일본이 주장하는 가미카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지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태풍의 덕으로 적을 물리친 일본으로서는 외적 격퇴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일 법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1281년 2차 원정■

●원나라 황제(皇帝)
- 쿠빌라이 (忽必烈) 

●총사령관
일본행성좌승상(日本行省左丞相)
- 아라칸 (阿剌罕) → 아타카이 (阿塔海) 

●동로군(東路軍)
동정도원수(東征都元帥)
- 힌두 (忻都)
- 홍다구 (洪茶丘) 

●정일본도원수(征日本都元帥)」
- 김방경 (金方慶) 

●동정좌부도원수(東征左副都元帥)
- 아랄첨목아(阿剌帖木兒) 전사 

●관고려국정일본군만호(管高麗国征日本軍万戸)
- 박구 (朴球)
- 김주정 (金周鼎) 

●관군만호(管軍万戸)
- 예스다르 (也速䚟兒)
- 왕모 (王某) 

●관군천호(管軍千戸)
- 다이타셰 (大塔失)
- 이행리 (李行里)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증조할아버지로, 이성계 즉위 후 익조[翼祖]로 추존됨) 

●관군상백호(管軍上百戸)
- 장성 (張成) 

●낭장(郎将)
- 강언 (康彦) 전사
- 강사자 (康師子) 전사 

●강남군(江南軍)
일본행성우승(日本行省右丞)
- 범문호 (范文虎) 

●일본행성좌승(日本行省左丞)
- 이정(李庭) 

●도원수
- 낭갸다이 (囊加歹)
- 하라다이 (哈剌䚟)
- 장희 (張禧) 

●관군만호(管軍万戸)
- 카라다이 (葛剌歹)
- 여덕표 (厲徳彪) 

●관군부만호(管軍副万戸)
- 케이다락다이 (刑答剌忽台) 

●수춘부만호(寿春副万戸)
- 오안민 (呉安民) 

●관군총관(管軍総管)
- 초정 (楚鼎) 

 

●초토사(招討使)
- 왕국좌 (王国佐) 

●수수총관(水手総管)
- 육문정 (陸文政) 

●지주총파(池州総把)
- 마하마드 (馬馬) 

소속불명
●초토사(招討使)
- 쿠두하스 (忽都哈思)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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