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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만휴정상량문(晩休亭上樑文)◈묵계서원창건기(默溪書院剏建記)◈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서당중건기(書堂重建記)◈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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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정상량문(晩休亭上樑文)◈묵계서원창건기(默溪書院剏建記)◈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서당중건기(書堂重建記)◈

◈만휴정상량문(晩休亭上樑文)◈묵계서원창건기(默溪書院剏建記)

◈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서당중건기(書堂重建記)◈

  ◈만휴정상량문(晩休亭上樑文)◈  

=정박(鄭璞)=

세월(歲月)은 가고 물질은 변해도 한담(閒潭)에 운영(雲影)은 영원(永遠)하고 부친(父親)은 떠나시고 자식은 받아 구기(舊基)의 주두(柱頭)는 우뚝하다. 선세(先世)의 선(善)을 계승(繼承)해서 신축(新築)한 집은 훌륭하니 이것은 송암(松岩)의 깊은곳에 있는 보백당(寶白堂)의 별장(別莊)이로다. 심산(深山)에 홍록(紅綠)한 이곳은 무릉(武陵)같은 절경(絶景)이고 고학(古壑)에 원조(猿鳥)가 만나니 드디어 중조(中條)의 은처(隱處)로다. 처음은 세화(世禍)를 멀리 피해서 길이 은거(隱居)할 장소로 했었다. 쌍청(雙淸)으로 별호(別號)를 지으니 주연계(周濂溪)의 마음과 부합(符合)하고 만휴(晩休)로서 동명(洞名)을 하니 도연명(陶淵明)의 고풍(高風)을 상상(想像)하게한다. 선생(先生)의 세대(世代)가 연면(連綿)해 오는데 후손(後孫)의 처사(處士)가 중건(重建)하는데, 흙모아 황무지(荒蕪地)를 막으니 호토(狐兎=여우와 토끼)의 길도 열렸고 돌깍아 산계류(山溪流)를 트이게하니 풍월(風月)의 땅이 열렸도다. 슬프다 인간사는 반도(半道)에서 그만두기도 하고 세업(世業)은 백년동안 버티어 주었는데, 마을터는 동서(東西)로 되었으니 자손들이 감회(感懷)도 많았던거고 서원(書院)은 지척(咫尺)에서 서로 보이니 사림(士林)들도 한탄(恨嘆)을 하였던 것이다. 다행이도 일을하는 남아 있어서 이때 능히 선인(先人)을 욕(辱)되지 않게 하였도다. 너희가 선조(先祖)를 아니 생각하는가 후손(後孫)들이 합의해서 경영(經營)하여 그 공적(功績)을 이루었으니 선비들이 협력(協力)해서 근면(勤勉)하였다. 양공(良工)은 지점(地占)을 했으니 방(房)은 따스하고 헌(軒)은 서늘하게 될 것이고 재목(材木)을 풍족(豊足)하게 했으니 남(南)쪽에 교목(喬木=높은 나무)과 북(北)쪽에 재(梓木=가래나무)뿐만이 아니다. 벌목(伐木)하는 인부(人夫)는 모두와서 일하는데 법도(法度)에 맞게하니 규모(規模)를 이루었다. 나간(欄干)앞에는 개울이 있으니 옥녀(玉女)의 분(盆)을 부감(俯瞰)하고 기와(蓋瓦)이어 암(巖)같으니, 거령(巨靈)의 장(掌)이 곁보인다. 명구(名區)의 물색(物色)은 의구(依舊)하니 흥망(興亡)이 때 있음을 실로 느끼고 고정(古亭)의 현판(懸板)을 개신(改新)하니 구조(構造)가 다른 것을 어찌 말할까? 선인(先人)이 점령(占領)하신 산수(山水)의 사이에 후손(後孫)은 여기서 거처(居處)하노라. 평천(平泉)의 마을로 길이 이어지니 상마(桑麻)에는 우로(雨露)가 애애(藹藹)하고 남강(南康)의 동리(洞里)를 앞에대하니 향사(享祠)하고 독서(讀書)소리 양양(洋洋)하리라. 견민(甄民=백성을 살펴봄)의 사정과 같이해서는 산(山)에올라 묘(墓)를 바라볼 뿐이고, 주(周)나라 때의 가숙(家塾=가정집 글방)을 모방(模倣)해서는 예(禮)익히고 시(詩)배우는 공부(工夫)하리라. 종래에는 교자(敎子)하는 방법(方法)은 시서(詩書)를 부지런하게 배우는 것이 제일인 것이니 진실로 계선(繼善)하는 근본(根本)은 가옥(家屋)이 고명(高明)에만 있지 않은 것이다. 이에 시(詩)로서 칭송 하노니 아이는 불러서 도울지어다. 에헤야! 대들보를 동(東)쪽으로 올려라, 금학(金鶴)이 우는 정상(頂上)에는 아침해 붉어오니 선배(先輩)들이 공부하던 그뜻을 생각하고 선생님의 백세풍(百世風)을 위해서 추모(追慕)한다. 에헤야! 대들보를 서(西)쪽으로 올려라, 석벽(石壁)에 흐르는물 스스로 고저(高低)있게 심연(深淵)에 다다름엔 백척(百尺)을 이루었으니 향로봉(香爐峯)의 폭포(瀑布)는 이것과 같으리라. 에헤야! 대들보를 남(南)쪽으로 올려라, 일곡(一曲)의 난간(欄干)에서 취풍(翠風=시원한 바람)을 만났으니 재화(栽花=꽃을 심음)가 필요없이 만수(萬樹)가 꽃이로다. 춘풍(春風)이 불어오니 자색(紫色)이 드리웠네. 에헤야! 대들보를 북(北)쪽으로 올려라, 벽산(碧山)에 나뭇길이 암곡(岩曲)에 얽혔는데 도사(道士)를 따르려고 구름속에 들어가니 오엽(五葉)의 산삼(山蔘)들을 길에서 얻을 것이다. 에헤야! 대들보를 위(上)쪽으로 올려라, 밤(夜)은 고요한데 밝은 별이 스스로 빛을내니 깊은산에 초목(草木)들은 그목숨이 온전(穩全)하다. 바람 이슬 맑은데에 일기(一氣)로 길러졌네. 에헤야! 대들보를 아래(下)쪽으로 내려라. 석선(石扇)이 열린밖으로 평야(平野)가 펼쳤는데 산(山)앞에 트인 길은 냇물따라 돌아오니 손님은 초동(樵童)에게 길 물을 필요없네. 업드려 바라옵나이다. 상량(上樑)한 뒤에는 마귀(魔鬼)를 쫓아내고산(山)처럼 부동(不動)하고 관동(冠童)들은 공부하느라 쉬지않고 멀리 무우(舞雩)에서 노래하며 돌아옴을 생각하고 부노(父老)들은 짝을지어 갔다와서는 화수(花樹)의 즐거움을 강론(講論)하고 독서(讀書)해서 자신을 격려(激勵)해서는 선조(先祖)의 가르침을 보존(保存)하며 현자(賢者)를 친(親)하여 장자(長者)를 공경해서 길이길이 향토(鄕土)의 명예(名譽)를 보전(保全)하며 궁촌(窮村)에서 풍속(風俗)을 크게 변화(變化)시키고 후예(後裔)들은 문헌(文獻)을 능히 창성(昌盛)하게 하리라.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정박(鄭璞)=()는 국포(菊圃).

주염계(周濂溪)=중국 송()나라 때의 문장가(文章家).

무우(舞雩)=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을 말함, 풍호무우(風乎舞雩)라고 함.

 

◈묵계서원창건기(默溪書院剏建記)◈

=유극화(柳克和)=

근안(謹按)하오니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응계 옥선생(凝溪 玉先生)은 이미 본부(本府)의 통판(通判)으로서 유택(遺澤)이 내린바가 있고 성종조(成宗朝)에 보백당 김선생(寶白堂 金先生)은 또한 묵계(默溪)에 퇴거(退居)하셔서 유풍(遺風)이 있는바가 있었는데 여러번 병화(兵火)를 격고 아직 학교(學校)나 서원(書院)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숙종(肅宗)정묘년(丁卯年)에 한 고을의 사림(士林)이 만송(晩松)과 호담(壺潭)에 서당(書堂)을 세우려는 의논(議論)을 해서 두 서당(書堂)을 분설(分設)하니 강산(江山)의 풍경(風景)은 호담(壺潭)이 기이(奇異)하고 가옥(家屋)의 건존(建尊)은 만송(晩松)이 우량(優良)하도다. 학생(學生)들을 모아서 춘추(春秋)로 강송(講誦)하는데 한 고을의 장노(長老)들이 비로소 양현(兩賢)을 숭배(崇拜)하는 의논(議論)을 해서 이때 호담(壺潭)위에 향사(享祀)하는 장소(場所)를 창건(創建)하는데, 옥세보(玉世寶),김중망(金重望)이 부탁(付託)해서 그 역사(役事)를 하도록 하였다. 기사년(己巳年)봄에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사년(辛巳年)삼월에는 갈암 이선생(葛庵 李先生)이 그의 윤자(胤子)에 밀암 재(密庵 栽)와 같이와서 터를보고 그 강산(江山)의 좋은 경치(景致)를 사랑해서 근체시사운(近體詩四韻)을 짓고서 호담(壺潭)위로 나가서 종용(從容)하게 구경 하고서 또 소시일절(小詩一絶)을 지었으니 자못 일시에 승사(勝事)였다. 그리고 다시 오기를 기약(期約)하였으나 얼마 되지않아 선생(先生)이 갑자기 후학(後學)들을 버리고 돌아가시니 사문(斯文)의 불행(不幸)이 어떠할까? 칠월에 사림(士林)이 일향(一鄕)에 통문(通文)을 하고 비로소 사당(祠堂)을 지을 발의(發議)를 했으니 대략(大略)말하면 「양현(兩賢)의 유적(遺跡)은 세대가 이미 멀어져서 거의 병화(兵火)에 소실(燒失)된 나머지 후손(後孫)집에는 다만 약간(略干)의 문자(文字)가 있을 뿐이니 학문(學問)하고 성덕(成德)하신 행적(行蹟)과 청백(淸白)하고 정직(正直)하신 유풍(遺風)을 볼 수가 있나이다. 응계선생(凝溪先生)은 본부(本府)에서 치민(治民)하신 덕화(德化)가 있었고 보백당김선생(寶白堂金先生)은 묵계(默溪)에 은퇴(隱退)하신 장소(場所)로 하셨는데 그후 수백년이 지났어도 그이 끼치신 향기(香氣)는 지금까지 없어지지 아니하고 일향(一鄕)에서 칭송(稱頌)함이 작일(昨日)같나이다. 본당(本堂)은 바로 양가(兩家)의 자손(子孫)이 강학(講學)하는 장소로서 산천(山川)이 유수(幽秀)하여 가히 서원(書院)으로 할만하니 양현(兩賢)을 존향(尊享)하는 것이 어찌 현덕(賢德)을 숭상(崇尙)하는 성사(成事)가 아닐까요.」라고 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 산장(山長)에 김계강(金啓康)이 원근(遠近)의 사림(士林)과 더불어서 당호(堂號)를 지을 의논(議論)을 하는데 옥진소(玉振韶)가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 서당(書堂)은 묵계(默溪)에 있으니 마땅히 묵(默)자로서 명명(命名)해야만 합니다. 『역경(易經)』에는 <묵(默)해서 성(成)함은 덕행(德行)에 있다.>고 하였고, 『논어(論語)』에는 묵(默)함이 족히 용납(容納)된다.고하였으니, 청(請)하건데 묵계(默溪)라고 이름 하소서.고 하여」 여러 회원(會員)들이 그말에 찬동(贊同)하였다. 그리고 날을 받아서 사당(祠堂)을 짓는데 옥세보(玉世寶)에게 부탁(付託)해서 상량문(上樑文)을 짓고 을유년(乙酉年)사월에 서당(書堂)이 완성(完成)되니 강산(江山)의 경치(景致)가 기절(奇絶) 하였다. 육월에 옥세보(玉世寶)가 응계선생(凝溪先生)의 유적(遺蹟)을 가지고 참봉 이보(參奉李簠)에게 행장(行狀)을 부탁(付託)하고 시월에는 김중망(金中望)이 서애선생(西厓先生)의 영모록(永慕錄)과 구전 김중청(苟全 金中淸)이 가장(家藏)한 연보(年譜)를 가지고 보백당선생(寶白堂先生)의 유사(遺事)를 또한 참봉 이보(參奉李簠)에게 부탁하였다. 그래서 본서원(本書院)을 경영(經營)하기 위해서 선찰(仙刹)절에서 회의(會議)를하는데, 참봉(參奉)인 이보(李簠),유만휘(柳萬輝), 진사(進士)인 유경휘(柳慶輝),이구징(李龜徵),김방희(金邦熙), 김항중(金恒重),권수한(權秀韓)등이 참석(參席)하였다. 그래서 여럿이 말하기를, 「양현(兩賢)의 청직(淸直)하신 덕(德)은 경앙(敬仰)한지가 이미 오래 되였으나 존향(尊享)하는 전례(典禮)는 아직도 못 이루었음이 진실(眞實)로 후학(後學)의 흠사(欠事)이니 명년(明年)봄에 대례(大禮)를 거행(擧行)할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병술년(丙戌年)봄에는 이보(李簠),김방희(金邦熙),유맹휘(柳孟輝),김방달(金邦達)등이 본당(本堂)에 들어가서 봉안(奉安)하는 절차(節次)를 결정(決定)하고 각교원(各校院)에다가 통문(通文)을 내는데 기일(期日)은 십일월 십삼일 중정(中丁)으로 정(定)하였다. 유생(儒生)에 권처겸(權處謙)이 봉안문(奉安文)을 교리(校理)인 김세흠(金世欽)에게 청(請)하고, 시월에는 비안현감(比安縣監)김시택(金時澤)이 선생(先生)의 방손(傍孫)이라고 해서 서당(書堂)에 들어가 대례(大禮)의 절차(節次)를 도왔던 것이다. 사림(士林)들은 송정(松亭)에서 개좌(開座)를하고 임원(任員)을 분정(分定)하는데, 도집례(都執禮)에는 진사(進士)인 이구징(李龜徵),공사원(公事員)에는 김익련(金益鍊),홍우석(洪禹錫)이며 제주(題主)에는 김소(金소)였다. 그런데 도집례(都執禮)는 김세갑(金世鉀)으로 바꾸어서 묘내(廟內)에 들어가 양선생(兩先生)의 위패(位牌)에 제주(題主)를 하여 교의(交倚)에다가 봉안(奉安)하고 의식(儀式)을 연습(練習)을 하는데 읍양(揖讓)하고 주선(周旋)하는 예의(禮儀)가 양양(洋洋)하였다. 사당(祠堂)의 현판(懸板)에는, 「청덕사(淸德祠)」라 하고 사원(祠院)의 명호(名號)는「묵계서원(默溪書院)」이라고 하였다. 기축년(己丑年)삼월에는 산장(山長)의 김삼중(金三重)이 사림(士林)을 모아서 재루(齋樓)를 건존(建尊)하는 일을 의논(議論)하는데 상량문(上樑文)은 밀암이공(密庵李公)에게 청(請)하였고. 팔월에는 참봉(參奉), 김태중(金台重), 밀암이재(密庵李栽), 진사(進士), 이후천(李厚天), 권찬(權贊), 김세겸(金世鎌)이 호담(壺潭)과 송정(松亭)에 와서 놀았고, 경인년(庚寅年)사월에는 시회(詩會)를 하였다. 신묘년(辛卯年)칠월에는 산장(山長)의 김세현(金世鉉)이 방백(方伯)에게 진정서(陳情書)를 보내서 본서원(本書院)에 조력(助力)해주기를 요청(要請)하는데 밀암이재(密庵李栽)가 그 글을 지었다. 임진년(壬辰年)에는 재루(齋樓)에 신주(神廚)와 문장(門墙)이 모두 완성(完成)이 되니, 루(樓)는「음청루(揖淸樓」라하고, 재(齋)는「극기재(克己齋)」라하며,당(堂)은「입교당(立教堂)」이라하고, 문(門)은 「진덕문(進德門)」 이라고 하였다. 동(東)쪽에는 호담(壺潭)을 끼고 서(西)쪽에는 송암(松岩)이 있어 경물(景物)이 나열(羅列)함이 구경(求景)할 만하고 청유(淸流)의 여울에는 족히 마음을 씻고 생각을 밝힐만 하니 이에는 반드시 잠심(潛心)해서 묵회(默會)함이 있을 것이니 이것을 기록(記錄)해서 고사(故에 대비(待備)하는 바이다.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유택(遺澤)=죽은 뒤에까지 남아 있는 은혜(恩惠).

중정(中丁)=음력으로 그 달의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

 

◈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

=방후손 김양근(傍後孫 金養根)=

직묵(直默)과 원남(院南) 두 산(山)사이 계곡위에 임해서 넙죽하게 새로지은 집은 바로 대사간(大司諫)이신 보백당김선생(寶白堂金先生)의 만휴정(晩休亭)이다. 선생(先生)은 우리 선조(先祖)이신 판관공(判官公)에게는 좋은 아우이신데 일찌기 묵계(默溪)의 천석(泉石)을 사랑하시어 별장(別莊)을 짓고 왕래(往來)하시면서 시(詩)나 짓고 만년(晩年)을 보내려 하시었다. 연산군(燕山君)이 정사(政事)가 혼란(混亂)하니 조정(朝廷)에 계시기를 싫어 하시어 홀연(忽然)히 사직(辭職)을 하고 남(南)쪽으로 돌아오셔서 송천(松川)의 암상(岩上)에다 집을짓고「쌍청헌(雙淸軒)」이라고 명명(命名)하였으니 수(水)와 월(月)이 청(淸)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지금의 만휴정(晩休亭)이 그 옛터다. 그 먼저 사제(笥堤)의 보백당(寶白堂)은 실로 정사년(丁巳年)지은 것인데 환향(還鄕)하신 뒤에 신유년(辛酉年)까지의 사이에는 더욱 시국(時局)이 날로 잘못돼 가는 것을 보시고 오히려 산(山)이 깊지 못함을 걱정하시어 송암(松岩)에 폭포구경(瀑布求景)을 가시었던 뜻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구경(求景)하기만 위해서 하신 것일까? 상류(上流)는 전의곡(全義谷)인데 여기서부터 냇물은 동(東)쪽으로 흘러서 십리허(十里許)를 굴곡(屈曲)해 가다가 문득 평활(平闊)한 대석(大石)이 산(山)과 계(溪)의 사이에 고저(高低)한데 있는데 또한 모두 웅긋중긋해서 흰 방석을 포개놓고 흰눈이 쌓여있는 것과 같고 그 상에서 물이 모여서 산세(山勢)에 따라 굽이 흐르니 사죽(絲竹)소리도 나는 것이다. 그 원류(源流)가 멀어져가니 골짜기는 점점(漸漸)낮아져가니 한쪽으로는 천류(泉流)가 몰아쳐서 층폭(層瀑)이 되였는데 떨어지는 곳이 삼홍(三泓)이란 것이니 그 홍(泓)이란 것은 가마 같은 형상(形狀)을 말한 것이다. 그 홍(泓)위에는 또 석대(石臺)가 천작(天作)으로 되었는데 수백인(數百人)이 앉을만한 반석(盤石)인 것이다. 이 정자(亭子)는 실로 제삼(第三)의 홍(泓)에 임해서 지었으니 하나의 별천지(別天地)인 것이다. 그런데 만휴정(晩休亭)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은 선생(先生)이 당시에 청일(淸逸)하신 풍치(風致)로서 지락(至樂)하심은 산수(山水)에다 부치시고 행지(行止)하심은 천기(天機)로서 징험(徵驗)하시어 물외(物外)에 소요(逍遙)하시며 세사(世事)도 부운(浮雲)으로 아셨음이 가히 상상(想像)되는 것이다. 시간(時間)이 가서 종(鍾)이 울고 봉(鳳)이 늙어서 지(池)에 있음을 보았으니 과연(果然)얼마나 소쇄(蕭灑)하셨던가. 지금의 동남(東南)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오히려 많이 지점(指點)울 하였는데 중간에 기백년이나 폐(廢)해졌음을 상상(想像)하여 후에 이르러 영씨(泳氏)가 개연(慨然)해서 복구(復舊)할 뜻을 가지고 이미 돌을 모아서 획정(劃定)하고 또한 힘을 모아 경영(經營)을 하다가 공사는 성취(成就)하지 못하고서 불행(不幸)하고, 그의 윤자(胤子)에 동도 덕일군(東道德一君)이 이때 문내(門內)소장(少長)들과 마침내 그 선인(先人)의 뜻을 성취하여 건물(建物)이 일신(一新)하게 되어 산천(山川)의 경치(景致)가 달라졌다. 이때는 경술년(庚戌年)모월(某月)모일(某日)이니 선생(先生)이 이 가신뒤에 정자(亭子)가 황폐(荒廢)된지 몇년이나 지나 재목(材木)을 가지고 중건(重建)하기를 어찌 감히 하루인들 잊을 것인가. 삼세나 (三世)나 경영(經營)하다가 이제 비로소 성취(成就)가 된것은 흥폐(興廢)하는 운세(運勢)에 소관(所關)인 것이다. 나는 일찌기 주인(主人)으로 인해서 그 지형(地形)이 방불(彷彿)함을 알게되니, 소위<옥녀분(玉女盆)에 거령(巨靈)이 석선(石扇)을 장악(掌握)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호사자(好事者)의 명언(名言)이지만 북(北)으로는 내설산(來雪山)의 송림(松林)을 바라보니 푸르기가 둔운(屯雲)같고 남(南)으로는 황학산(黃鶴山)이 있으니 편연(翩然)하게 누상(樓上)에 올라 가려는듯 한데, 또 계명산(鷄鳴山)의 여러 봉(峯)은 동천(東川)에 울연(蔚然)히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보기 싫어하지 않게하는 곳이다. 그리고 또 청덕사(淸德祠)를 참배(參拜)하고 읍청루(揖淸樓)를 배회(徘徊)하면서 위에서 십장(十丈)앞을 부감(俯瞰)하며 호담(壺潭)에 푸른 하늘이 맑게 비치니,『시경(詩經)』에는「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고 하였는데 하물며 판관공(判官公)의 후예(後裔)되는 나일까?

아아!! 조만(早晩)은 시기(時期)고 덕행(德行)은 의리(義理)니 시기(時機)가 일할만 하면 권세(權勢)에 거슬리는 말을 다해서 기피(忌避)하지 않았음은 선생(先生)이 조년(早年)에 가히행(行)할 것을 행(行)하신 것이고 의리(義理)에 불가(不可)하면 독봉(毒鋒)이 닥쳐와도 가상(加常)하게 보아 셨음은 선생(先生)이 만년(晩年)에 쉴만해서 쉬신 것이다. 호호(皓皓)한 암면(岩面)에도 월색(月色)이 낮 같은데 석간(石間)에 솟아나는 샘 소리는 옥(玉)을 깨는 듯 하니 선생(先生)의 풍(風)을 듣고서 완부(頑夫)는 염(廉)하고 유부(儒夫)는 입(立)해지지 않는자가 있을까? 이 정자(亭子)에 올라서 유적(遺蹟)을 어릅쓰면 반드시 천고(天苦)를 부앙(俯仰)하는 감(感)이 있는데 하물며 중호(仲浩)일까? 중호(仲浩)의 이름은 이선(履善)이니 바로 덕일씨(德一氏)의 차남(次男)인데, 나에게 이 정자(亭子)의 전말(顚末)을 적으라는 심(甚)한 요청(要請)에 드디어 내마음에 느낀 것을 적는 바이다.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고산(高山)처럼 우러르고 큰 길처럼 행()하도다.

부감(俯瞰)=높은 곳에서 멀리 아래를 굽어보는것.부관(俯觀)

옥녀분(玉女盆)=중국 산동성 영선현(迎仙峴)화루봉(華樓峯),석두산(石頭山)에 있는 분(=화분)를 닮은

천연동굴(天然同窟)로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딸들이 목욕을 했다고 옥녀분(玉女盆)이라고 했다함.

왕석극(王錫極)이라는 문인(文人)이 옥녀분(玉女盆)에 반해서 쓴 시()가 있다.

 

絶頂盆池終古留 절정분지종고류

산꼭대기 샘은 아직도 남았는데

相傳玉女洗雲頭 상전옥녀세운두

옥녀가 구름을 씻던 곳이라하네

當年譜下娥眉樣 당년보하아미양

당시에는 아미산도 이보다 못했다더니

水底靑泉月一鉤 수저청천월일구

물이래 달은 갈고리 처럼 떠 있구나

 

김양근(김양근)=1734~1798는 선오(善吾),는 동야(東埜),삼당공 영(三塘公 瑛)11대손(代孫)으로 안동소산(安東素山),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자순(字淳)의 양자(養子), 1761년 사마시 장원(司馬試 壯元)그해 증광시 급제(增廣試 及第), 성균관 전적,병조좌랑,사헌부지평(成均館 典籍,兵曹佐郞,司憲府持平)등을 역임

 

◈서당중건기(書堂重建記)◈

=김도화(金道和)=

안동부(安東府)의 남(南)쪽 길안현(吉安縣)에 있는 묵계서원(默溪書院)은 고 장령(故 掌令)에는 응계옥선생(凝溪玉先生)과 대사성(大司成)이신 보백당김선생(寶白堂金先生)의 영령(英靈)을 모시는 곳이다. 그 양 선생(兩 先生)의 청직(淸直)하신 명절(名節)은 국사(國史)에 실려 있어서 탁연(卓然)하게 일국(一國)에서 존모(尊慕)하는 바인즉 존사(尊祀)함이 어디인들 마땅하지 않을까 만은 반드시 묵계동(默溪洞)의 유벽(幽僻)한 곳으로 한 것은 무슨 때문인가 하면 일찌기 고적(古籍)에 고증(考證)을 하검데 옥선생(玉先生)은 정계(政界)의 청관(淸官)으로서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어 가는곳마다 치화(治化)가 있어 음악(音樂)으로 정사(政事)를 하여 동향백성(同鄕百姓)들은 백년 뒤에도 잊지 않으니 그의 애민(愛民)하시던 치화(治化)가 인심(人心)에 새겨 졌음은 숙자(叔子)가 현산민(峴山民)에서와 같았던 것이다. 김선생(金先生)은 경연(經筵)의 명유(名儒)로서 임금의 마음을 선화(善化)시키는 임무(任務)를 자부(自負)하였는데 무오사화(戊午史禍)를 격고서는 편연(翩然)하게 멀리가서 향리(鄕里)에 은거(隱居)하시어 오직 강학(講學)으로 교훈(敎訓)해서 후생(後生)들을 깨우치는 도(道)로하고 효우(孝友)하고 청백(淸白)함을 가정(家庭)에 전해주는 보물(寶物)로 하셨다. 산(山)이 막히고 물 구비에 초목(草木)도 채체(精彩)를 입었고 집에는 시(詩)와 마을에는 체(體)로 금조(禽鳥)로서 그의 음악(音樂)에 화(化)하였음이 지금까지 수백년이 흘렀어도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오히려 없어지지 않는바가 있으니 어찌 소위 사사(祠社)에서 해야만 하지 않는가. 일찍부터 일반선배(一般先輩)들이 양가(兩家)의 본손(本孫)들과 더불어서 발상(發想)해서 획책(劃策)하여 건축(建築)하는데 협력(協力)하였으니 현덕(賢德)을 숭상(崇尙)하는 소이(所以)가 길이 후생들의 긍식(矜式=자랑을 함)하는 바가 될 것이다. 이 서당(書堂)은 숙종신사년대(肅宗辛巳年代)에 창건(創建)해서 후현(後賢)이 계기(繼起)가 되어 건물(建物)이 점점증축(漸漸增築)되였으니 가옥(家屋)의 제도(制度)가 찬연(燦然)하게 구비(具備)되고 재루(齋樓)의 설계(設計)가 정연(整然)하게 질서(秩序)가 있는데 이에 제존(祭尊)을 하고 이어서 배례(拜禮)를 하니 사류(士類)는 모두 의앙(依仰)해서 존모(尊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도(天道)에는 명암(明暗)이 있어서 불행하게도 고종 경오년(高宗 庚午年1870)에 서원(書院)을 훼살(毁撒)하는 국령(國令)이 파급(波及)해서 폐허(廢墟)가 되어 황초(荒蕉)한 초목(草木)이 청풍(淸風)에 동요(動搖)되고 있으니 원근(遠近)의 신사(紳士)들이 동문(洞門)을 지나는 자가 어찌 떠떳하게 지나고서 방황(彷徨)하고 처량(凄凉)하지않을까? 그후 이십여년이 지난 을미년(乙未年)에 많은 선비들이 그 옛터에 찾아와서 다시 여러칸의 건물(建物)을 지었으니 당(堂)의 방(房)이 약 천칸이니 존봉(尊奉)하는 도리(道理)는 사당(祠堂)으로 숭봉(崇奉)하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서적(書籍)을 독송(讀誦)하고 그 도리(道理)를 강론(講論)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선생(先生)의 시대(時代)가 멀어저서 후손들에게도 징거(徵據)할 것이 없어도 국조(國朝)에 청백사(淸白史)의 명부(名簿)와 서애선생(西厓先生)이 소편(所編)한 영모록(永慕錄)에서 징거(徵據)할 수 있으니 막연(漠然)만 할수 없으니 이 지방에 사는 여러 군자(君子)는 징거(徵據)할 수 있고 징거(徵據)할 수 없는 그것을 상상(想像)해서, 선생(先生)의 심법(心法)을 체념(體念=깊이 생각함)하고, 선생(先生)의 풍절(風節)을 숭상(崇尙)하여 청백(淸白)으로서는 그 자신(自身)을 가지고, 충직(忠直)으로서는 그 인군(人君)을 섬겨서 더욱 수양(修養)을 한다면 이것이 소위 <불보(不報)의 보(報)>가 될 것이니, 제군(諸君)은 어찌 서로 면려(勉勵)하지 안해서 될 것일까? 선생(先生)의 예손(裔孫)인 김병호(金炳昊),병자(炳字),병선(炳璿),옥노환(玉魯煥)과 사인(士人)에 유벽호(柳璧鎬),김진모(金鎭模)등과 더불어서 그의 공사(工事)를 관장(管掌)해서 나에게 그의 전말(顚末)을 적어 달라고 부탁(付託)하기에 위와 같이 기술(記述)하는 바이다.

문소 김도화 근기(聞韶 金道和 謹記)

(苟全公 14世孫 金台東 옮겨씀)

 

[註]

김도화(金道和)=는 달민(達民),는 척암(拓菴),참판 굉(參判 宏)의 아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경학(經學)이에 깊고 학식이 해박하여 영남사림에 명성이 있어서 전국의 선비들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치(旗幟)를 들어 궐기할때 유림(儒林)의 추대로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었고 토왜(討倭 五賊臣斬刑)을 상소(上疏).

 

 

[원문(原文)]

◈만휴정상량문(晩休亭上樑文)◈

=정박(鄭璞)=

星移物換 閒潭之雲影悠悠 父菑子堂 先址之柱頭矗矗 繼述之善 輪奐之新 繄玆松巖奥區 實惟寶白別業 深山之紅綠開落

성이물환 한담지운영유유 부치자당 선지지주두촉촉 계술지선 윤환지신 예자송암오구 실유보백별업 심산지홍록개락

幾作武夷之天荒 古壑之猿鳥逢迎 遂爲中條之晩隱初因世禍之遠避 永矢碩薖之弗諼 雙淸揭號同符茂叔之胷次 晩休名洞

기작무이지천황 고학지원조봉영 수위중조지만은초인세화지원피 영시석과지불훤 쌍청게호동부무숙지흉차 만휴명동

可想元亮之高風 自先生世代之旣緜 有後孫處士之重拓 輦土修圯榛莽 開孤兎之蹊 剗石疏流溪山 回風月之境 嗟人事奄

가상원양지고풍 자선생세대지기면 유후손처사지중척 연토수이진망 개고토지혜 잔석소유계산 회풍월지경 차인사엄

忽於半道 而世業委棄於百年 村墟密邇於東西 子孫幾多齎感 院宇相望於咫尺 士林亦爲興磋 何幸幹蠱之有兒 乃能所生

홀어반도 이세업위기어백년 촌허밀이어동서 자손기다재감 원우상망어지척 사림역위흥차 하행간고지유아 내능소생

之無忝 無念爾祖 雲仍合謨而經營克成厥功 章甫幷力而興勤 良工度地 允宜暖室而凉軒 衆木呈材 不但南喬而北梓 斤者

지무첨 무념이조 운잉합모이경영극성궐공 장보병력이흥근 양공도지 윤의난실이량헌 중목정재 부단남교이북재 근자

斧者 役力咸趨 約之度之 規模畢擧 朱欄帶水 俯瞰玉女之益 翠甍齊巖 旁矚巨靈之掌 名區之物色依舊 良感興廢之有時

부자 역력함추 약지도지 규모필거 주란대수 부감옥녀지익 취맹제암 방촉거령지장 명구지물색의구 양감흥폐지유시

古亭之扁號重新 何論結構之殊制 先人之某久某水 後孫之爰處爰居 徑連平泉之村 桑麻雨露之藹藹 門對南康之洞 爼豆

고정지편호중신 하론결구지수제 선인지모구모수 후손지원처원거 경연평천지촌 상마우로지애애 문대남강지동 조두

絃誦之洋洋 同甄氏之思亭非但登壠而望墓 倣周代之家塾亦爲肆禮而學詩 從來敎子之方 莫如詩書之勤有 固知繼善之本

현송지양양 동견씨지사정비단등롱이망묘 방주대지가숙역위사례이학시 종래교자지방 막여시서지근유 고지계선지본

不在堂構之高明 善頌在玆 兒唱是助 兒郞偉抛樑東 金雞頂上日輪紅 想來前輩藏修意 爲慕先生百世風 兒郞偉抛樑西

부재당구지고명 선송재자 아창시조 아랑위포양동 금계정상일윤홍 상래전배장수의 위모선생백세풍 아랑위포양서

盤陀流水自高低 到得深淵成百尺 香爐飛瀑此堪齊 兒郞偉抛樑南 一曲欄干接翠嵐 不待栽花花萬수 春風到水紫口口

반타유수자고저 도득심연성백척 향로비폭차감제 아랑위포양남 일곡난간접취람 불대재화화만수 춘풍도수자口口

兒郞偉抛樑北 碧山樵路縈巖曲 欲隨道士入雲深 五葉人蔘行可得 兒郞偉抛樑上 夜靜明星光自放 深山草木全其天 風露

아랑위포양북 벽산초로영암곡 욕수도사입운심 오엽인삼행가득 아랑위포양상 야정명성광자방 심산초목전기천 풍로

湛湛一氣養 兒郞偉抛樑下 石扇開外鋪平野 山前一逕逐溪回客來不必問樵者 伏願上樑之後其棘似矢不動如山 童冠皷篋

담담일기양 아랑위포양하 석선개외포평야 산전일경축계회객래불필문초자 복원상량지후기극사시부동여산 동관고협

而聯翩 遠追雩壇之詠 父老扶杖而盤礴 時講花樹之歡 讀書勑躳 無墜祖先之訓 親賢敬長 永保鄕黨之譽 風俗丕變於窮村

이련편 원추우단지영 부로부장이반박 시강화수지환 독서래궁 무추조선지훈 친현경장 영보향당지예 풍속비변어궁촌

獻克昌於後裔

헌극창어후예

毛+監=口? 毛+參=口?

 

[원문(原文)]

◈묵계서원창건기(默溪書院剏建記)◈

=유극화(柳克和)=

謹按我 世宗朝凝溪玉先生旣通判本府遺澤之攸及 憲宗朝寶白堂金先生又退休默村餘韻之攸存 而屢經兵燹 未有學塾書

근안아 세종조응계옥선생기통판본부유택지유급 헌종조보백당김선생우퇴휴묵촌여운지유존 이누경병회 미유학숙서

舍矣 肅宗丁卯一縣士林 議建書堂于晩松及壺潭 分設兩書堂 江山景物壺潭奇 輪奐制作晩松優焉 聚學子春秋講誦矣

사의 숙종정묘일현사림 의건서당우만송급호담 분설양서당 강산경물호담기 윤환제작만송우언 취학자춘추강송의

一鄕長老始有崇奉兩賢之議 及於壺潭上剏立爼豆之所 屬玉世寶金重望 幹其事己巳春 始事 辛巳三月 葛庵李先生 與其

일향장노시유숭봉양현지의 급어호담상창입조두지소 속옥세보김중망 간기사기사춘 시사 신사삼월 갈암이선생 여기

胤子密庵栽 來審其址愛其江山勝槩 吟成近體四韻 步出壺潭上 從容翫賞 又吟小詩一絶 頗爲一時勝事 期以再會未幾

윤자밀암재 래심기지애기강산승개 음성근체사운 보출호담상 종용완상 우음소시일절 파위일시승사 기이재회미기

先生遽棄後學 斯文之不幸 爲如何哉 七月士林 裁書于一鄕 始定建廟之議 誦告于一鄕士林 其略曰兩賢遺蹟 世代已遠

선생거기후학 사문지불행 위여하재 칠월사림 재서우일향 시정건묘지의 송고우일향사림 기약왈양현유적 세대이원

幾失於兵火之餘 其後孫家 只有略干文字而亦可見爲學成德之行 淸白正直之風而凝溪先生 於本府有文翁之化 寶白堂

기실어병화지여 기후손가 지유약간문자이역가견위학성덕지행 청백정직지풍이응계선생 어본부유문옹지화 보백당

先生 於默村爲莬裘之所 雖過數百餘年 而遺芬餘馥 至今不泯 鄕邦誦之如昨日焉 本堂 卽兩家子孫講學之所 而溪山幽秀

선생 어묵촌위면구지소 수과수백여년 이유분여복 지금불민 향방송지여작일언 본당 즉양가자손강학지소 이계산유수

可以藏修則兩賢腏享 豈非崇德尙賢之盛事乎 壬午 山長金啓康 與遠近士林 議立堂號 玉振韶進曰此堂在默村 宜取默字

가이장수즉양현철향 기비숭덕상현지성사호 임오 산장김계강 여원근사림 의입당호 옥진소진왈차당재묵촌 의취묵자

命名 易曰默以成之 存乎德行 傳曰其默足以容 請名默溪僉曰善 卜日建廟 屬玉世寶製上樑文 乙酉四月書堂成 江山景致

명명 역왈묵이성지 존호덕행 전왈기묵족이용 청명묵계첨왈선 복일건묘 속옥세보제상량문 을유사월서당성 강산경치

殊絶 六月玉世寶以凝溪遺蹟 請行狀于參奉李簠 十月金重望 以西厓先生永慕錄及苟全金中淸家藏年譜 請寶白堂遺事亦

수절 유월옥세보이응계유적 청행장우참봉이보 시월김중망 이서애선생영모록급구전김중청가장연보 청보백당유사역

參奉李簠 以經畵本堂事 定會仙刹寺參奉李簠柳萬輝進士柳慶輝進士李龜徵金邦照金恆重權秀韓 來叅 僉曰兩賢淸直之

참봉이보 이경화본당사 정회선찰사참봉이보유만휘진사유경휘진사이구징김방조김항중권수한 래참 첨왈양현청직지

德景仰久矣 爼豆之儀迄今未擧 誠爲後學之欠事 能行大禮於明春耶 丙戌春參奉李簠金邦照柳孟輝金邦達入 本堂定奉安

덕경앙구의 조두지의흘금미거 성위후학지흠사 능행대례어명춘야 병술춘참봉이보김방조유맹휘김방달입 본당정봉안

節次 發通于校院 以十一月十三日中丁爲定 儒生權處謙請奉安文于校理金世欽 十月比安倅金時澤 以先生傍孫 入書堂

절차 발통우교원 이십일월십삼일중정위정 유생권처겸청봉안문우교리김세흠 시월비안쉬김시택 이선생방손 입서당

以大禮經紀優助 士林開座于松亭 爬錄任員 都執禮進士李龜徵公事員金益鍊洪禹錫題位版金소都執禮遞金世鉀進廟內

이대례경기우조 사림개좌우송정 파록임원 도집례진사이구징공사원김익연홍우석제위판김소도집례체김세갑진묘내

題兩先生位版奉安于交倚上 行習禮揖讓周旋禮儀洋洋 廟號以淸德祠 院號以默溪 己丑三月山長金三重會士林 議齋樓營

제양선생위판봉안우교의상 행습예읍양주선예의양양 묘호이청덕사 원호이묵계 기축삼월산장김삼중회사림 의재루영

建事 請上樑文于密庵李公 八月參奉金台重密庵李栽進士李厚天進士權贊金世鏞來遊壺潭及松巖 庚寅四月設接 辛卯

건사 청상량문우밀암이공 팔월참봉김태중밀암이재진사이후천진사권찬김세용래유호담급송암 경인사월설접 신묘

七月 山長金世鉉 呈文于方伯 永助本院 密庵李公實製其文 壬辰 齋樓神廚及門牆俱成 樓曰揖淸 齋曰克已 堂曰立敎

칠월 산장김세현 정문우방백 영조본원 밀암이공실제기문 임진 재루신주급문장구성 루왈읍청 재왈극이 당왈입교

門曰進德東挾壺潭西控松巖景物森列 可賞翫而淸流激湍 足以洗心澄慮則於此必有潜 心默會者矣玆記之 以備故事云爾

문왈진덕동협호담서공송암경물삼열 가상완이청류격단 족이세심징려즉어차필유잠 심묵회자의자기지 이비고사운이

유극화 근기(柳克和 謹記)

王+素=

 

[원문(原文)]

◈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

=방후손 김양근(傍後孫 金養根)=

直默院南兩山之間 有翛然新構臨于溪上者 卽故大司成寶白堂金先生晩休亭也 先生 於吾祖判官公爲難弟 嘗愛默溪泉石

직묵원남양산지간 유소연신구임우계상자 즉고대사성보백당김선생만휴정야 선생 어오조판관공위난제 상애묵계천석

置別業 往來吟賞 爲晩年計 喬桐主政亂 不樂在朝 忽棄紱南還 家于松川巖上 軒曰雙淸 葢取水與月 今晩休其舊址也

치별업 왕래음상 위만년계 교동주정난 불락재조 홀기불남환 가우송천암상 헌왈쌍청 개취수여월 금만휴기구지야

先時笥堤之寶白堂 實作於丁巳 還鄕之後而至辛酉年間則益見時事 日非 猶恐入山不深 松巖翫瀑之行其意在耳何但爲景

선시사제지보백당 실작어정사 환향지후이지신유년간즉익견시사 일비 유공입산불심 송암완폭지행기의재이하단위경

物役也 上流爲全義谷 自此溪之東馳遙遙者 屈曲十許里 而輒有大石如場 陂陀乎山溪之會 又皆鑿鑿齒齒 無異素氊之疊

물역야 상류위전의곡 자차계지동치요요자 굴곡십허리 이첩유대석여장 피타호산계지회 우개착착치치 무이소전지첩

積白雪之平 鋪水於其間 因勢縈廻 琮琮作絲竹聲 及其源旣遠 而谷漸低下焉 則一道飛泉遂奮迅激射 噴爲증瀑 而三泓者

적백설지평 포수어기간 인세영회 종종작사죽성 급기원기원 이곡점저하언 즉일도비천수분신격사 분위증폭 이삼홍자

承其落處 俗謂泓爲釜以其形也 泓之上又石臺天成 可受數百人盤礡而亭之築 實當第三泓葢溪山別一天也 亭以晩休名

승기낙처 속위홍위부이기형야 홍지상우석대천성 가수수백인반박이정지축 실당제삼홍개계산별일천야 정이만휴명

可想先生當日淸逸之致 至樂寓之山水 行止驗之天機 倘佯物外 浮雲世事 其視漏盡種鳴 老鳳蹲池者 果何等蕭閒 何等

가상선생당일청일지치 지락우지산수 행지험지천기 당양물외 부운세사 기시누진종명 노봉준지자 과하등소한 하등

灑落也 至今東南行過者 尙多指點 而想像中廢幾百年 後承泳氏 慨然有意復舊 旣累石爲範圍 又蓄力經紀之 役未就而

쇄락야 지금동남행과자 상다지점 이상상중폐기백년 후승영씨 개연유의복구 기누석위범위 우축역경기지 역미취이

不幸 其胤子東道德一甫 爰曁門內長少 克卒先志輪奐一新 山水爲之改觀 時則庚戌月日也 葢自先生去後 亭之蕪廢幾

불행 기윤자동도덕일보 원기문내장소 극졸선지윤환일신 산수위지개관 시즉경술월일야 개자선생거후 정지무폐기

年矣 撫梓瞻喬 何敢一日忘肯構三世 而始就者 廢興之關大數也 余嘗因主人 指顧得其地形之彷彿 所謂玉女盆 巨靈掌

년의 무재첨교 하감일일망긍구삼세 이시취자 폐흥지관대수야 여상인주인 지고득기지형지방불 소위옥녀분 거령장

石扇也者 無非好事者名言 而北望來雲之松蔥 翠如屯雲 南有黃鶴之山 翩然欲上訢樓碎 又雞鳴諸峯蔚然於天東 殊令人

석선야자 무비호사자명언 이북망래운지송총 취여둔운 남유황학지산 편연욕상흔루쇄 우계명제봉울연어천동 수령인

相看不厭旣又祇拜淸德祠 徘徊揖淸樓 上俯瞰十丈壺潭暎澈空碧 詩曰高山仰止景行行止 矧余爲判官公後乎 噫早晩時也

상간불염기우기배청덕사 배회읍청루 상부감십장호담영철공벽 시왈고산앙지경행행지 신여위판관공후호 희조만시야

行休義也 時値可爲 則嬰鱗折角 盡言不避者 先生之早而可以行而行也 義在不可 則駭機毒鋒 恬若坦途者 先生之晩而可

행휴의야 시치가위 칙영인절각 진언불피자 선생지조이가이행이행야 의재불가 칙해기독봉 념약탄도자 선생지만이가

以休而休也 皓皓巖面 月色如晝 潺潺石間 泉聲瀉玉 聞先生之風 而其不有廉焉 立焉者乎 登斯亭而拊遺蹟者 必亦有俛

이휴이휴야 호호암면 월색여주 잔잔석간 천성사옥 문선생지풍 이기불유렴언 입언자호 등사정이부유적자 필역유면

仰千古之感 況仲浩乎 仲浩名履善 卽德一氏第二郞也 要余記顚末甚勤 遂書其感于中者

앙천고지감 황중호호 중호명리선 즉덕일씨제이랑야 요여기전말심근 수서기감우중자

방예손 양근 근기(傍裔孫 養根 謹記)

=방후손 김양근(傍後孫 金養根)=

尸+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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