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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일본군의 본영이자 전진기지였던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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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에게 결정타를 날렸던 임진왜란 최대 전투 [ 부산포해전 ]

https://youtu.be/Kd5cP-uMZuo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

임진왜란 초기 1592년 (선조25년) 임진년 9월 1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당시 일본군의 본영이자 전진기지였던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이 해전 한번으로 일본군의 본영이자 전진기지가 크게 타격을 받아 전선 최소 130척이 침몰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 해전 이후 일본군은 본영이자 전진기지인 부산포 조차도 언제든지 조선 수군에게 공격을 받아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나 공포에 벌벌 떨게 되었다. 이 해전에서 전라좌수영 최고의 돌격장 녹도만호 정운이 왜적의 대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스스로에게도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게 이 해전 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매우 만족해하며 임진년의 대첩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해전이었다.

시기 1592년9월 1일
장소 조선 경상도 부산포
원인 일본군의 해상 퇴각로 차단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전라좌수사 이순신 (최고지휘관)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녹도만호 정운
순천부사 권준
광양현감 어영담
낙안군수 신호
사도첨사 김완
방답첨사 무의공 이순신
영등포만호 우치적
장흥부사 황세득
나대용

송희립

이영남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타카
병력 판옥선 74척
거북선
 3척
협선 92척
군함 470척
병력 수천여 명
피해 함대 피해 없음
전사자 6 명
부상자 25 명
군함 128척 침몰
수천명이상으로 추정
결과 조선 수군의 압도적인 승리
영향 일본군의 해상작전 완전 봉쇄 및 보급난 심화

2.1. 꽁꽁 틀어박힌 일본군

8월 중순(음력 7월 초순), 이순신의 3차 출정의 한산도 대첩(8월 14일, 음력 7월 8일)과 안골포 해전(8월 16일, 음력 7월 10일)으로 일본 수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이에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격노한 뒤 일본 수군에게 해전 금지령을 내리고, 일본 수군은 남해안 일대에서 1달 동안이나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일본군의 전라도를 향한 파상공세도 웅치, 이치, 금산 등에서 저지되어, 조선수군은 전라도 육지 방어를 믿고 공세로 전환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2.2. 일본군 물자가 해안에 모이다[편집]

9월 중순(음력 8월 초순), 일본 육군이 한양에 주둔하던 가토, 기무라, 오카모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로 이동시켰다. 병력은 김해로, 물자는 부산으로 주로 운반하였다. 또한 당시 부산포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력부대 8,000명이 함선 470척을 타고 증원되어 해안 요충지에 배치되었다.

조선군은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경상 우도 순찰사 김수가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김해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는 낌새가 현저하다" 라고 하여 해상 도주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한다.

3.1. 이순신의 4차 출정[편집]

9월 6~28일(음력 8월 1~23일),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출정 계획보다 일찍 함대를 연합하여 합동훈련에 들어간다. 일본 본진을 치는만큼 계획과 훈련을 착실히 수행한다.

9월 29일(음력 8월 24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수영 여수 본영에서 출발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다음날인 10월 1일(음력 8월 25일)에 사량에서 합류했다. 연합함대는 도합 판옥선 74척, 협선 92척으로 합계 166척이었다.

9월 30일(음력 8월 25일), 당포에 도착해 1박했다. (오늘날 통영 산양읍)

10월 1일(음력 8월 26일), 비바람이 거세서 정박해 있다가 날이 저물 무렵 거제도 쪽으로 가서 1박했다. 거제 내해를 정찰하며 매복은 없는지 상황을 살폈다.

10월 2일(음력 8월 27일), 좁은 거제 내해를 신속히 통과하여, 원포/안골포에서 1박했다. (오늘날 창원 진해 원포동 케이조선항 / 부산 강서 송정동 부산신항)

10월 3일(음력 8월 28일), 가덕도에 도착하자 일본군이 도망갔다. 가덕도의 천성진성에 거점을 삼았다. (오늘날 가덕도 천성항)

3.2. 쑥대밭이 된 5개 포구[편집]

10월 4일(음력 8월 29일)

장림포 해전 - 6척(대선 4척, 소선 2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사하구 장림동)

장림포는 형세가 좁고 정박하기 어려워, 다시 가덕도로 돌아와서 1박했다.


10월 5일(음력 9월 1일)

첫닭이 울 때 출발했다. 오전 8시경 몰운대(오늘날 다대포해수욕장역 서쪽)를 지날 무렵 큰 돌풍과 풍랑이 일어 함대 수습에 시간을 소요했다.

화준구미 해전 - 5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다대포해수욕장역 동쪽)

다대포 해전 - 8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낫개역)

서평포 해전 - 9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송도해수욕장)

절영도 해전 - 2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영도구 남항동)

새벽부터 출발하였으나 4개 포구에서 해전을 하느라 이쯤엔 벌써 해가 저물 무렵이 되었다.

초량목 해전 - 함대가 부산포를 앞두고 좁은 초량목(오늘날 남포역영도대교)을 통과하기 전 정찰선들을 보내 정찰을 하고 돌아온다. 이들을 뒤쫓아 온 선봉대 안택선 4척을 가뿐하게 파괴했다. 정찰 결과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오늘날 부산항 제7부두) 일본군 400여척이 집결해 있으며, 그 위 해안선을 따라 높은 언덕에 진지를 구축해(오늘날 제7부두 뒤 우룡산 줄기인 '우암동도시숲' 언덕)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했다.

3.3. 쑥대밭이 된 부산포

조선 수군은 장사진, 즉 1렬의 종대 대형으로 초량목을 통과해 부산진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조선 수군에 압도된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아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 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 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하여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의 전선들을 향해 각종 총통을 사용해 집중적으로 포격하였다.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였고 지리 조건도 일본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지만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적군에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으나, 거듭된 패전으로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다는 점이 이런 불리한 면을 보완하였다.

일본군이 사기가 높았다면, 옥포 해전 당시 도도 다카토라나 한산도 대첩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처럼 전 함대를 동원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병력이 해안과 산 언덕에 숨어서 바다로 나오지 않고 조총과 활, 그리고 노획 및 보급 등으로 확보한 각종 화포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전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이다. 이미 앞서 5개 포구에서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맞닥뜨릴 때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기 바빴다.[4] 또한 방어 목적만 두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육상에서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여 해상의 적 선박에 대응하는 방식은 상당히 강력한 해상 거부 전략이었다.

부산포 해안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부산성을 목전에 뒀지만 이순신은 육지로 일본군을 추격하거나 상륙 작전을 통해 부산성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이른바 "단병 접전", 즉 현대어로 표현하자면 "근접 백병전"에서 조선 수군의 기량이 일본군에 비해 불리했으며[5] 부산까지 항해하는 바람에 병사들도 많이 지친데다, 지금까지 조선 수군이 화력에서 우세했기에 이겼던 것이지 병력에서 우세했던 것은 아니며 일본군과 달리 말이 없었기에[6] 육전을 하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는 녹도 만호 정운을 비롯하여 전사 6인, 부상자 25인이었으며, 전투 후 이순신은 가덕도에 이르러 3도 수군을 해진하고 그날로 귀항하였다. 수치로만 보면 적군에 비해 피해가 거의 없는 수준의 대승이었지만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한 타격이 컸는데, 전라 좌수군이 지휘관급 인물을 잃은 것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특히나 정운은 평범한 장수가 아니라 조선 수군 제일의 맹장으로 늘 돌격대장을 맡아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웅포 해전 당시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활약으로 상륙해 웅포를 점령할 수 있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4. 의의

이순신이 지금껏 해왔던 승전 중에서도 가장 높이 평가했던 승전으로써 스스로에게 제일 엄격했던 이순신이 이 정도로 만족하며 장계를 올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투임은 두 말할 것 없으므로 대첩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전혀 과함이 없다.

다음은 이순신이 쓴 승전 장계이다.

전후 네 차례 열 번의 접전에서 번번히 승전을 거두었으나 장수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해전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적선의 수효가 많아야 70여척을 넘지 못했사온데 이번에는 적의 소굴에 470여 척의 전선이 늘어선 가운데에서도 (우리 수군이)위풍 당당하게 뚫고 들어가 하루 종일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격파했습니다. 그래서 적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고 목을 움츠리게 하여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비록 수급을 취하진 못하였으나[7] 힘써 싸운 공로는 지난 전투에서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부산포파왜병장]


이 단 한 번의 해전[8]으로 하삼도의 일본군은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후 1597년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기 전까지 일본군은 그 어떤 곳에서도 단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평양까지 승승장구하며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대로 평양에 주저 앉아 있다가 조명 연합군에 밀린 것도 이순신에 의해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또 호남 역시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있었다. 이 전훈을 일본군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유재란 때에는 전혀 다른 전략[9]을 세우게 된다. 가히 조선군의 대반격이라 할 것이다.

또한 부산은 임란이 터진 직후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 기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부산이 조선 침략에 있어서 중요한 요지였다는 것이다. 또한 부산은 일본군의 본진이기 때문에 조선 수군이 쉽사리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부산포 해전은 적의 본진을 바다에서 타격한 전투였고, 이로 인해 본진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는데 이것은 엄청난 전과이다.

본진이 적에게 위협받는데 함부로 많은 병력을 출정 시킬수도 없거니와 본진을 구원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작전 범위도 좁혀질 것이며 이미 출정한 병력들 또한 마음껏 싸울 수 있을리가 없다. 또한 해상로는 전투의 목적 뿐만 아니라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수송로도 겸하고 있는데 본진 앞바다까지 적이 쳐들어온다? 물자 걱정은 물론 본국으로 돌아갈때가 매우 염려되고 걱정되었을 것은 너무도 뻔하다.[10] 따라서 최근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을 끝낸[11] 결정적인 전투를 이 부산포 해전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 해전의 승리를 기려, 1592년 음력 9월 1일을 양력 10월 5일로 환산하여 부산광역시는 10월 5일을 '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5. 후대의 인용

체스터 니미츠 해군원수가 원수계급이 부여되기 2달 전인 1944년 10월 9일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무패 선전을 언론. 최소 10월 10일 뉴욕 타임스에 올려지는 인터뷰에서 정황상 이 해전을 언급하며, 이순신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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