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431년 전 웅치를 흔들었던 호국의 함성…웅치전투 승전기념 추도식!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0. 10.
반응형

남원의병장 조경남(趙慶男, 1570~1641)선생의 전쟁일기인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웅치전투의 전말을 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592년 7월 7일 웅치에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끄는 1만 여 일본군이 출현하며, 전투가 개시됩니다. 7월 7일 1차 방어선이 압도적인 적의 전력에 밀려 뚫렸으나, 2차 방어선에서 나주판관 이복남 장군 등이 죽기로 싸워 버티는데 성공합니다.

7월 8일, 해가 뜨면서 전투가 개시되어 오전에만 다섯 차례 전투가 벌어졌는데 모두 적을 물리쳤답니다.  방어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장렬공 정담 장군이 백마를 타고 돌진해오는 적장을 직접 활로 쏘아 죽이며 그렇게 독전하여 결국은 버텨냈지요.

이미 웅치의 전투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고,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어서 물러나야 겠지만.. 10배나 되는 전력으로 이기지 못하고 물러서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고, 나아가자니 조선군의 저항이 너무 거세어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적장 안코쿠지 에케이는 난감하고, 초조했습니다.

안코쿠지 에케이가 퇴각을 고민하다가, 결국 퇴각을 결심하려는데.. 7월 8일 저녁 즈음에 조선군의 화살이 소진 되었음을 알아 채고는, 다시 군을 되돌려 웅치의 조선군 진영을 공격하여, 최후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결국 의병장 황박과 나주판관 이복남 장군은 안덕원으로 퇴각했지만, 정담 장군과 휘하 장병은 웅치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었답니다.

안코쿠지 에케이는 결국 웅치를 넘어서 전주로 향해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전주를 공략할 수 없었습니다. 웅치에서 너무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고.. 전주에선 조선군과 의병이 방비를 갖추었으며, 이치에서의 전투도 이롭지 못하고, 금산의 본진이 위험하다는

소식도 들려와 결국은 군사를 되돌릴 수 밖에 없었죠. 철수하면서 전주의 코 앞인 안덕원에서 조선군에게 반격을 당해 또다시 패하기도 했습니다.

 

웅치전투 발굴현장

안코쿠지 에케이는 후퇴할 때 다시 웅치를 지나며..그곳에서 산화했던 우리 조선군의 시신을 한데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그 무덤 앞에 早朝鮮國忠義肝膽(조조선국충의간담, 조선군의 충의를 기린다.)이란 표식을 세워 추모했다고 합니다.

장렬공 정담 장군과 1천 용사의 충의와 용맹은 그 잔인무도한 일본군 조차도 감복시키고 그들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게 했던 것이죠.

자, 지금까지 돌아본 웅치전적지와 웅치전투 이야기는 어떠하였습니까?

웅치전적지로 드는 초입, 웅치골 신덕마을로 향하는 삼거리에 펼쳐진 현수막에서는 "나라를 구한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이라고 했습니다.  웅치전투를 재평가하고, 그 뜻을 높이려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합니다만..이는 사실과도 다르고 과장된 표현이죠.

어떠했든..웅치전투는 끝까지 웅치를 지키지 못하고 뚫렸으니 군사적으로 이 전투는 패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렬공 정담 장군이 의도했듯..1/10의 병력과 전력으로 이틀을 버티고, 적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어 전쟁 수행능력을 꺾었고, 그들의 의지도 꺾어 전주를 지키고 호남을 보전하였습니다. 이로써 장렬공 정담 장군의 전략, 전술적 의도는 충족되었습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표현이 있지 않나요? "졌으나 지지 않은 전투"

실제 웅치 전투가 벌어진 곳과는 거리가 떨어진 곳이지만..웅치옛길의 산능선 상에 웅치전적비가 있습니다. 이전에 진안 모래재를 찾았을 때..이곳을 찾은 바 있죠.

전쟁(戰爭, war)이란 무엇일까요.

몸과 몸이 부딪히고, 피와 살이 튀기고..삶과 죽음이 갈리며, 인간의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면을 볼 수 있는..가장 참혹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 전쟁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전 웅치전투에서 그 감동을 느낍니다.  오직 피와 살을 튀기며 삶과 죽음이 갈리는 그 참혹한 모습이 아니라.. 장렬공 정담 장군과 1천의 용사들이 웅치에서 보여준 충의와 죽음을 초월한 그 용기와 의지 때문입니다.

일본의 침략군, 사무라이들에게 전쟁은 오직 칼로 눈 앞의 사람을 베고, 죽이는..살육과 파괴.  그 이상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의(大義)가 없어요.

하지만, 장렬공 정담 장군과 웅치의 1천 용사들이 보여준 것은..충의(忠義)와 용기를 창검삼아 싸우는 정신입니다.  자신은 죽어 나라와 백성과 이웃, 가족을 살리려는 그 마음..이걸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하죠.

이것이 제가 게속해서 웅치를 찾고, 매번 감동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이 산하(山河)를 사랑하고, 그 터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이 겪어오고 만들어가는 역사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이곳을 많이 알게 되고, 또 다같이 감동을 느껴보면 어떨까 합니다.

 

웅치(熊峙)전적지와 창렬사(彰烈祠)에서..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에서 감동을 느끼는 이유..

모래재 메타세쿼이아길 걷고 점심예약시간까지 시간이 아직 남았습니다. 이왕 이곳에 온 김에 바로 코 앞에...

blog.naver.com

 

431년 전 웅치를 흔들었던 호국의 함성…웅치전투 승전기념 추도식

전라북도-완주군-진안군 공동 주관…순국 장군·의병 후손들 참석

김대홍 기자, 황영 기자(=전북)  |   2023.08.23. 13:48:46

임진왜란 당시 호남을 지켜낸 웅치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기리는 추도식이 23일 전북도청 대강당에서 열렸다.

전라북도와 완주군, 진안군이 공동 주관한 ‘임진왜란 웅치전투 승전기념 추도식’에는 당시 참전했다 순국한 장군과 의병의 후손을 비롯해 기관 단체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임진왜란 웅치 전투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선조들을 기리고 추모하는 헌화와 묵념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웅치전투의 승전을 기념하는 퍼포먼스와 정담장군의 유서 낭독, 임진왜란 웅치전적 향후 계획 보고 등이 이어졌다. 

특히, 이번 추도식에는 웅치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황박 장군과 정엽 종사관, 의병으로 참여한 김수․김정 형제의 후손들이 참여해 웅치전투의 살아있는 가치를 대대손손 증명하는 뜻깊은 자리가 됐다. 

'임진왜란 웅치 전적'은 임진왜란 초기(1592년 7월) 전라도를 침략한 왜군에 맞서 관군 및 의병이 민관 합동으로 호남을 지켜낸 ‘웅치 전투’가 발생한 곳으로 호남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조선군이 결국 승전하게 되는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 평가된다.

 

웅치’는 완주군과 진안군 사이 고갯길의 지명으로 웅치 일대의 옛길은 전주와 전라도 동부지방인 진안 등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선조실록' 등 여러 문헌에 기록된 ‘웅치’는 ‘웅현’, ‘웅령’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는 ‘곰티’ 또는 ‘곰치’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전투가 일어난 지리적 위치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난 7월 개봉한 영화‘한산’을 통해 재조명된 웅치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격해오던 왜군을 진안과 전주의 경계였던 웅치 일대에서 막아서며 전개되었다. 왜군은 결국 웅치를 넘어 전주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나 전투 과정에서 많은 전력을 상실하여 전면적인 공격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전주를 공격하여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자 했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승패를 떠나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서 의미를 가진다.

웅치전투로 인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임에도 구체적 사료 증명과 실제 전투지 고증의 어려움으로 인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에 전북도를 비롯해 완주군과 진안군이 협업을 통해 지속적인 학술연구용역과 발굴조사 등을 실시해 왔으며 지난해 12월 그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임진왜란 웅치 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왜군과 전투를 벌였던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일원에서부터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일원을 말한다.

1592년 7월 8일 새벽,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왜군이 전주로 진출하기 위해 웅치를 공격,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들은 웅치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왜군과 혈전을 벌여 결사적으로 맞섰지만, 최후 방어선인 웅치 정상부에서 정담을 비롯한 많은 군사가 장렬히 전사했다. 

이후 7월 9일 웅치를 넘은 왜군은 안덕원(전주시 산정동 일원) 근처까지 진출했지만 웅치 전투에서의 심각한 전력 손실로 인해 안덕원 전투에서 패한 뒤 7월 10일 진안으로 철수함으로써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대 점령에 실패했다.

▲웅치 문화재 구역 ⓒ

이는 결과적으로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아 전쟁 물자를 확보함으로써 조선군이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전하는 국난 극복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 

김관영 도지사는 “임진왜란 웅치전적의 사적지정을 계기로 도내 호국선열들의 고귀한 헌신과 업적을 기억하는 선양사업 추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며 “임진왜란 웅치전적의 보존 및 활용방안을 위해서 종합계획연구용역 수립 등 웅치전적지가 호국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