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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사월공휘임축전단기(沙月公諱任祝天壇記)◈(謹書) 영가(永嘉) 김유헌(金裕憲)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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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공휘임축전단기(沙月公諱任祝天壇記)

(謹書) 영가(永嘉) 김유헌(金裕憲)

영영현(英陽縣)의 동쪽 리 되는 곳에 축천단(祝天壇)이 있으니 고()사월(沙月)조공(趙公)이 하늘에 빌던 곳이다. 어찌하여 히늘에 빌었던고? 국난(國難)이 그치기를 축원(祝願)했음이다.

병자(丙子)년에 청인(淸人)들이 쳐들어와 대가(大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자 청인(淸人)들이 나아가 포위하니, 급보(急報)가 사방으로 날아 영양(英陽)에 이르렀다. 조공(趙公)께서 이미 늙고 병들어 몸소 갑옷 입고 창을 잡아 바삐 큰 소리로 외칠 수없으매, 백씨(伯氏) 수월공(水月公)과 단()을 쌓아 하늘에 축원하기를, 하늘은 우리 나라를 보우(保佑)하사, 이 땅에서 오랑캐를 몰아 내 주시옵소서!하고 밤낮으로 빌어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더니, 하성(下城)의 기별을 듣고 울며 단()에서 내려오배, 영양(英陽)사람들이 지금까지 축천단(祝天壇)이라고 부른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이가 있다고 들었으나, ()이 근왕(勤王)의 일을 할 수 있으며, 빈다고 해서 국난(國難)그치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리오. ()은 일찍이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약관으로 창의(倡義)한 분이니, 젊은이와 늙은이가 사직(社稷)을 지킬 책무가 똑같지는 않지만, 왕기(汪踦)와 이동(李同)과 같은 힘이있으면 지킬 책무가 있어서, 공은 책무를 다해 다행히 죽지 않았다. 불행히도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만나, 힘이 염파(廉頗)와 마원(馬援) 같지가 않아 창의하지 못하니, 공이 단()을 쌓아 하늘에 빈 것은 여기에 비롯된 것이었다.

충신(忠臣)이 나라를 위함은 자기의 힘을 다하는 것이니, 힘이 있다면 그 힘을 다할 것이고, 만일 힘이 없으면 오로지 자기의 정성을 다할 뿐이다. 오늘 향을 피우며 느끼어 우는 정성이, 곧 옛날 말가죽에 시체를 싸고, 깃발 아래 죽으려던 마음이 아니던가! 비록 하늘이 멀다고 하나 이 마음은 통하게 마련인데, 하물며 천리(千里)도 안 되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근왕(勤王)하는 무리들 중에 중로(中路), 한 곳에 머물러 나아가지 않거나 흩어져 도망한 자가 많았는데, 머무르거나 도망하는 것은 곧 근왕(勤王)하지 아니함과 같으나, 이러한 자들과, 단상(壇上)에서 늙은 몸으로 자기 힘을 다한 이와 비교하여 과연 어느 편이 진정으로 근왕(勤王)한 것이라 하겠는가? 어찌 공()만으로 헤아릴 일인가! 부모의 병환이 위중할 때 아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애통하고 절박하여 의원을 부르고 북극성(北極星)에 기도함이 어찌 그 효험이 있고 없음을 헤아려 하는 일이겠는가?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하늘의 도움이다. 칠실(漆室)에서 마음졸이는 정성이 하늘을 꿰뚫어 단()을 쌓 아 축원한 것이 도움이 없지 않다고 함을 어찌 불가하다 하리오!

일찍이 듣건대 공()은 어려서 집상(執喪)을 잘하였고, 백씨 수월공(水月公)을 엄부(嚴父)와 같이 섬겨으며 의()를 숭상하고 재물을 가벼이 하였고, 죽은 스승의 손자를 죄수(罪囚)에서 빼내 주었고, 정묘노란(丁卯虜亂)에는 가재(家財)를 헌납하여 군수(軍需)에 보태고, 여러번 벼슬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산수간(山水間)에 소요하며 홍두곡(洪杜谷) 이창석(李蒼石) 등 제현(諸賢)과 깊이 사귀었다.

갑신(甲申)년에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이 더욱 깊어져 절명시(絶命詩)를 읊었으니 상해(桑海)의 사나운 물결이 북쪽에서 몰아치니, 존주(尊周)하는 마음 한결 같아서 풍천(風泉)의 눈물 흘리노라! 붉은 명정에는 숭정(崇禎) 현호 적혔으니, 남자의 한번 죽음에 부끄러움 없구나!(桑海狂瀾直北飜 尊周一念淚風泉 丹旌帶去崇禎字 無魂男兒一死年 상해광란직북번 존주일념루풍천 단정대거숭정자 무혼남아일사년라 하였다.

대개 공()의 행의(行義)와 명정(名節)은 시종 한결 같았는데, 임진년(壬辰年)과 병사년(丙子年)에 공이 보인 행적은 특히 넘쳐 흘러 드러난 것일 따름이니, 어찌 뛰어나다 하지 않겠는가. ! 장장(長江)에 노를 치듯 빠르게 내닫고, 범의 굴에서 창을

곤두세우는 용감함은 지사(志士)가 나라를 위하여 의당 해야 할 일이나, 백발의 병든 몸으로 밤새도록 끊어앉아 단()서 내려오지 않고, 국난(國難)의 평정을 위하여 힘을 다한 것을 보았는가! 어진 사람이 죽어 서원(書院)을 짓고, 빛나는 현판(懸板)을 내거는 것은 보았으나 평지(平地) 한조각 땅에 축천단(祝天壇)이라 이름하여 내어 걸고, 백대(百代)의 맑은 바람을 일으킨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있는가. ! 사월공(沙月公)이야말로 천하의 고절(苦節)이라 할 것이며, 영양(英陽)의 축천단(祝天壇)은 아마 동국(東國)에서도 하나뿐일 것이리라. 공의 후손 정신(楨臣)七十 가까운 몸으로 육백리 길을 발섭(跋涉)하여 단하(壇下)의 돌에 새길 글을 청하니, 내가 그일을 기꺼이 듣고, 늙은 몸으로 조상의 일에 정성을 다하는 그 성의 또한 공의 어진 손자만이 지닌 것이매, 어찌 그청을 거절할 수 있으리오.

()의 크기와 모양 및 좌향(坐向) 같은 것은 내 아직 보지 못했으나, 창황이 땅바닥을 쓸어 깨끗이 하고 설치하였는 것이니, 어느 여가에 계단을 쌓고 제단을 만들었겠는가. 뒷사람들이 봉축(封築)해서 높이 쌓아 터를 만든 것인니, 충신(忠臣)이 절하고 끊어앉던 땅에는 신령스러운 산()과 큰 내(大川)가 반드시 도와서 보호할 것인즉, 이것은 일후(日後)에 단()에 오르고 나서 기록하기로 하고, 아직은 실적(實跡)만을 적고, 또 공의 절필시(絶筆詩)를 차운하여 보내노라!

 

西淵日墜海東飜 서연일대해동번

우연(虞淵)에 해 떨어져 해동(海東) 땅이 뒤집히니,

龍歲遺民淚迸泉 용세유민누병천

용의 해에 유민(遺民)의 눈물이 샘섯듯 하도다!

最是祝天壇下老 최시축천단하노

이 축천단 아래 늙은이가

浩然暝目大明年 호연명목대명년

호연(浩然)히 대명(大明)의 해에 눈감으셨다!

 

영가(永嘉) 김유헌(金裕憲)은 삼가 적는다.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호는 추산(秋山). 1804(순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김유헌[金裕憲, 정조 5(1781)~순조 33(1833)], 자는 치문(穉門), 호는 추산(秋山), 증조는 김변(金忭), 조부는 김성한(金星漢), 아버지는 정랑 김수신(金秀臣), 어머니는 이종오(李宗吾)의 따님 전주이씨, 배위는 좌랑 이주철(李周喆)의 따님 전주이씨, 장남이 우승지 김회명(金會明)이다. 24세인 순조(純祖) 4(1804)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세자익위사 동벽, 양산과 영광군수, 좌승지를 역임하고 53세에 졸하였다.

김유헌 공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재실인 밀양 追遠齋상량문과 문정공 남명(南溟) 조식(曺植) 선생이 거처하던 김해 山海亭()를 찬하고, 조선 후기의 문장가 반계(磻溪) 이양오(李養吾)반계집 서문을 지었다.

이런 연유로 예정에 없던 추원재를 찾아가니 선생의 흉상과 연보비가 있고 일각문 담장 안에 추원재가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니 추원재 뒤편으로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마당에는 감나무와 배롱나무가 옷을 벗고, 우물가 옆으로 향나무 한그루가 푸르름을 자랑한다. 추원재 처마에는 追遠齋현판이, 우물마루 위 천정에는 傳心堂현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檀紀 四三二一年 戊辰 夏 日 密陽郡守 李球燮 謹稿, 靈山後人 辛容玉 謹書하여 붙인 追遠齋重修記後孫 繼善 謹稿, 陜川 李仁榮 謹書傳心堂創建記건너방 문루에 상량문(上樑文)이 있는데 上樑文· · · · · · · ·上之十九年 閏四月 日 梁山倅 金裕憲 撰으로 추원재 상량문은 순조 19(1819) 4월 양산군수 김유헌이 찬하여 현액하였음을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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