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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대광보국숭록대부 용원부원군 양렬공 우계 조선생 신도비명]▣▣[大匡輔國崇祿大夫 龍原府院君 襄烈公 愚溪 趙先生 神道碑銘]▣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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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동명서원앞에세운우계양렬공조인벽신도비문번역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우계(愚溪) 해월정(海月亭)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壁)

[대광보국숭록대부 용원부원군 양렬공 우계 조선생 신도비명]

[大匡輔國崇祿大夫 龍原府院君 襄烈公 愚溪 趙先生 神道碑銘]

선생의 는 인벽(仁璧)이오 는 우계(愚溪)이며, 또 해월정(海月亭)이라한다. 은 조씨(趙氏) 貫鄕은 한양(漢陽)이시다. 시조 지수(之壽)는 고려의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僉議中書事)이시고, 그 아들 ()는 쌍성총관(雙城總管)이시고, 아들 양기(良琪)가 습작으로 총관이 되시어 나이 十三세에 원()나라에 청병하여 동쪽 일본을 정벌(征伐)함에 군사를 온전한 채로 돌아오고 또 합단(哈丹, 원나라의 반란군,●합적온(合赤溫)의 손자 카단(哈丹,합단), 경교도(景敎徒))을 토벌하여 포로를 원나라에 바차니 원세조가 크게 기특히 여겨 비단 도포와 옥띠(漢陽趙氏家寶/●서울시 동산문화재 나1-계13525호●)를 하사하여 장려(獎勵)하니 선생께 조부.증조부가 되신다. 아버지의 는 돈()이신데 처음 처음 는 우()라 하였다. 여진(女眞)의 난을 숙청하고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일등공신으로 책록되시고 삼중대광 용성부원군(三重大匡龍城府院君)으로 봉하셨다. 비위 군부인(郡夫人)은 간성이씨(杆城李氏) 평리 홍복(洪福)의 따님이시다. 선생께서는 용진현(龍津縣,강원도문천시 옥평동일대로 변경)의 세거하시던 댁에서 태어나셨다. 태어나시면서 특이한 바탕이 있으시어 어려서부터 슬기와 도량이 남의 생각밖에 뛰어나셨다. 자란 뒤에 학문과 문장을 겸하고 통하여 능히 부조(父祖)의 유풍을 ㅇ;ㅣ으 시고 공민왕을 섬겨 등주(登州)十二城을 넓혀 平正하시고 또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이방실(李邦實)과 더불어 서경(西京)의 백년 동안 빼앗겼던 땅을 토벌하여 회복시켰다. 공민왕(恭愍王)二十一년엔 안함(安咸변주(邊州북청(北靑) 등지에 도적이 들어 그것을 크게 격파시키고 적 七十首級을 베이고 봉익대부(奉翊大夫)를 배수하였다. 우왕(禑王)五年 己未(1379)에 계림에 도적이 들어옴에 강릉도 도원수 겸 부윤을 배수하고 그곳을 다스렸다. 八年 壬戌(1382)에는 강릉도 상원수가 되셔서 부원수 권현룡[[壬戌辛禑八年大明 洪武十五年]임술신우 8(1382), 대명 홍무 15江陵道上元帥趙仁璧 副元帥權玄龍 與倭戰 斬首三十級。○ 강릉도 상원수 조인벽(趙仁璧)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이 왜적과 싸워 머리 30급을 베었다.]으로 더불어 적을 쳐서 대파하고 적의 머리 三十급을 베었다. 十一年 乙丑에 교주도(交州道)에 도적이 들어옴에 사도 도지휘사(四道 都指揮使)를 배수하셨으니 사실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용원부원군삼사좌사겸판소부시사(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三重大匡龍源府院君 三司左使 兼 判小府寺事)를 하사 하였다. 그런 뒤에 고려의 운수가 종말을 고하니 조선조 태조(太祖 李成桂)께서 등극하여 남매의 情義로써 세 번 부르시고 일곱차례나 벼슬을 제수 하였으나 모두 나서지 않으시고 망복지의(罔僕之義=신하로 되지 않겠다는 의리)를 굳게 지켜서 관동(關東)의 양양(襄陽)의 시상촌(柴桑村)으로 돌아가 누우셔서 여울물을 노련탄(魯連灘)이라 하고, 돌을 도취석(陶醉石)이라 하여 강해 이장년(江海 李長年). 월촌(月村) 정만(鄭槾)으로 더불어 도의의 사귐을 삼아서 바다 위에 작은 집을 짓고 해월정(海月亭)이라 이름하여 바다로 도피한 뜻을 부치고 흰 옷과 백립을 쓰고 거문고 노래를 스스로 즐겨 산수의 사이에 방랑하여 세상밖에 일을 묻지 아니하고 세모의 하늘 아래 혹 대궐을 사랑하고 서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시를 지어 이르기를

 

蝶趐勳名薄 (접혈훈명박)

龍腦富貴輕 (용뇌부귀경)

나비의 날개처럼 공명은 얄팍하고,

용의 뇌인 부와 귀도 가벼이 여기노라!

萬事驚秋夢 (만사경추몽)

東窓海月明 (동창해월명)

만사가 가을 꿈에 놀라듯 사라지고,

동창엔 바다 달이 밝게도 비쳐온다.

라 하고 또 이르기를

淡淡西山月 (담담서산월)

靄靄空中雲 (애애공중운)

맑고 맑은 서산의 달이며,

상하게 일어나는 공중의 구름이라!

山人不畏虎 (산인불외호)

永夜不掩門 (영야불엄문)

산 사람 호랑이 두려워 아니하니,

긴긴 밤에 사릿문 닫지 않네!

라고 읊으니 세상에서 선생의 시는 질탕하고 호매하여 세간의 때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청풍(淸風)과 높으신 절개(節槪)는 당시의 삼은(三隱 = 圃隱 鄭夢周 牧隱 李穡 冶隱 吉再를 말함)으로 더블어 나란히 아름다움을 같이하여 모진 이도 청념해지고 게으른 이도 서게 하였다. 동해의 황벽한 고을이 화하여 추로(鄒魯=孔孟이 사시던 곳)의 예악학문이 있는 고을이 되었으니 선생의 풍도는 산고수장(山高水長=덕화가 높고 긴 것을 말함)하다할 것이다. 태종조에 추성양절익위 보리좌명공신 보국숭록대부 문하좌정승 판도평의시사 영경연사(推誠亮節翊衛 輔理佐命功臣 輔國崇綠大夫 門下左政丞 判都評議寺事 領經筵事)贈職하고, 한산백(漢山伯)하고 諡號는 양렬(襄烈)이라 下賜하였다. 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하동정씨(河東鄭氏)一男 一女를 낳으니 아들 온()은 개국정사좌명의 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이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으로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繼配 정화공주(貞和公主)는 조선 환조대왕(桓祖大王)의 따님으로를 六男二女를 낳으셨다. 아들 연()은 좌명일등공신(左命一等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이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다음 후()는 지돈령(知敦寧)으로 시호는 안정(安靖)이고 사()는 별호(別號)를 가천재(嘉川齋)라 하는데 예에 따라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중추부사(僉中樞府使)를 제수(制守)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양양(襄陽)에 가서 양렬공(襄烈公) 모시니 정종(正宗께서 충()과 효()의 두 가지를 온전히 하였다하는 교시(敎示)가 있으셨다. ()는 동지돈령(同知敦寧)이고, ()와 백()은 무후(無後)하다. 세 따님은 선공감정(繕工監正) 황길원(黃吉源)과 내부부령(內部副令) 임맹양(林孟陽)과 소윤(小尹) 곽왕보(郭王輔)에게 출가(出家) 하였다. 큰 아드님의 손자 의()는 첨지(僉知)이고, ()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한풍군(漢豊君)을 봉()하였고, ()는 도제(都制), ()은 참판(參判)이오, ()은 의영고사(義盈庫使)이다. 둘째 아드님()의 손자 모()는 총제(總制), ()는 돈령(敦寧)이오, ()는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시호는 공안(恭安)이오, ()은 동지돈령(同知敦寧) 병조참판(兵曹參判)이다. 셋째 아드님의 손자 득수(得壽)는 사정(司正)이오, 넷째 아드님의 손자 맹발(孟發)은 김화현령(金化縣令)이오, 중발(仲發)은 장성현감(長城縣監)이오, 계발(季發)은 녹사(錄事)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의 산소는 개성 흥교면 사관리의 축좌(丑坐) 언덕에 계시다. 사패지(賜牌地:공신에게 주는 땅)의 산판(山坂)이 있으며, 묘비(墓碑)가 있으시다. 정화공주(貞和公主)의 산소는 장단 진서면 전제리 취적교(吹笛橋)의 동북방 리 자좌(子坐) 언덕에 있고, 역시 사패지(賜牌地) 산판(山坂)이 있으시다. 아아! 우리 선조의 성덕(聖德)과 끼치신 음덕(陰德)으로 자손에게 유택(幽宅)이 흘러서 그 수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도학(道學) 문장(文章)과 이름난 공경들이 면면하게 대를 이어서 동국(東國)의 대성(大聖)이 되었다. 그리고 문정공(文正公) 별호 정암(靜菴)과 같은 분은 오현(五賢)의 으뜸으로 동방(東方)의 사표(四表)가 되시니, 이 또한 선생의 끼치신 덕이 아니겠는가?양양(襄陽) 옛 고을의 수석(水石)의 성지(聖地)를 추상하니 선생의 발자취가 이르지 낳은 곳이 없었으나 세상이 멀고 사람이 없어져서 무성한 풀과 보리()가 성하는 탄식이 있을 따름이다. 지난 인조 무진년에 후손 부사 위한(玄谷 緯韓)이 마침 이 고을에 임하여 선세의 자취를 찾아 계술(繼述)하고 동명서원(東冥書院)을 세우니, 고을의 선비들이 또 선생의 큰 절의를 추모하여 서원의 북쪽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우고 조두(俎豆=祭器祭物)를 베풀어서 향사(享祀)하고 가천재공(嘉川齋公)을 배향(配享) 하였다. 대개 향선생이 몰하심에 향사하는 의리이었다. 병화를 여러 차례 겪어서 세웠다 폐했다하기를 수차 있었는데 정종조 병오년에 순흥(順興)으로 옮겨 세웠다가 고종조 신미년(辛未年)에 이르러 온 나라의 사우를 모두 훼철시켰다. 그 후 무술년(戊戌年)에 후손 관찰사 종필(鍾弼)이 양양의 옛 터에 비[東溟書院遺墟碑]를 세우고 각을 세웠다. 철훼된지 이미 백여년(1982)이 되었는데 광복함에 미쳐서 경향의 종친들이 서원을 복원할 생각을 가지고 여러 차례 상의하고 사림들에게 통해 알리고 아울러 성균관(成均館)에 통고(通告)하니, 당시 관장 이재서(李載瑞)가 선생의 대절(大節)을 크게 사모하여 성의를 같이 하고 협조하여 드디어 옛 터에 다시 세웠다. 시작한 지 년만에 준공을 고하니 사우가 거듭 새로워졌다. 이에 국내의 진신들이 모두 모여서 분주히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가천재공(嘉川齋公)을 배향(配享)하였다. 다만 그러나 산소는 이북 땅에 있어서 여러 후손들이 성묘(省墓)하거나 향사(享祀)를 할 수 없으니, 맺힌 한이 극진(極盡)하다. 이러므로 모두가 의론하여 말하기를 양양(襄陽) 땅은 선생의 끼친 자취뿐 만이 아니라 후학들이 사우를 세우고 해마다 향사하는 곳이니 마땅히 여기에 단을 마련하여 묘제의 의식을 겸행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하여 드디어 터를 닦고 비를 세우고 아울러 신도비문(神道碑文)을 마련함에 존중의 여러 선비들이 중형(中衡)으로 하여금 명()을 하라하니 돌아보건대 불초한 후손이 지식이 적고 학문이 없으니 어찌 능히 성한 덕과 큰 행실에 손을 쓸 수 있겠는가. 굳이 사양타 못해서 드디어 그 참남됨을 잊고서 명()을 하였다. 이르되

송악(松岳)은 높고높고

용진(龍津)은 맑고맑다.

정기와 영기을 모아

선생을 탄강케 하였도다.

성한 시대 충성스런 신하로

나라 호위 간성(干城)되었다.

등주(登州)를 확대하고

서경(西京)을 회복했다.

백년토록 침노(浸怒)한 땅

일조(一朝)에 되찾았다

요순(堯舜)임금 이루었고

당우(唐虞)세상 만들었다.

왕명으로 작()봉하니

삼중(三重)이요 대광(大匡)이라.

고려(高麗) 운수 다해가니

양양(襄陽)으로 은퇴(隱退)하다.

외로운 신하 나라 망하니

전 임금 잊지 못해.

서산에서 고사리 꺾고

시상촌(柴桑村)서 국화 먹네.

충성심은 해와 달을 꾀어 뚫고

의리는 감상을 중히 한다.

두 임금 섬지기 아니하고

스스로 다스리며 높이 나른다.

홀로서 충성심 보존하고

푸른 저 하늘에 보답한다.

곧은 충성 높은 절개

늠름하기 상설(霜雪)같다.

하늘같이 솟은 빗돌

길가에 세웠도다.

산이 평파하고 바다가 마르도록

만세(萬世)토록 길이길이 창성(昌盛)하리.

 

단군기원 四千三百十年 정축 월 유화절에 二十세손 中衡은 손을 씻고 삼가 碑文을 짓고 誠力으로 建立하다.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17세손 종업(鍾業)은 번역하다.

[飜譯文影印:嘉川齋公-縣監公派 24世孫 晛溪 趙炳龍]

[2021.03.22.21:00.斗井軒에서.....]

태종실록 5, 12, 13, 형조 정랑(刑曹正郞),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조사(趙師):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제수(制守)받았으나, 부친(父親)을 모시러 양양(襄陽)으로.....동명서원(東溟書院)충현사(忠賢祠)에 부친과 배향(配享).

태종실록 5, 태종 354庚辰 3번째기사 1403년 명 영락(永樂) 1

형조 정랑 조사를 회안 대군에게 보내다

형조 정랑(刑曹正郞) 조사(趙師)를 회안 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에게 보내었으니, ()는 곧 임금의 표제(表弟)이다. 그러므로 가인(家人)의 소식을 전하고 문안하게 한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2521A국편영인본1264

분류왕실-종친(宗親)

遣刑曹正郞趙師于懷安大君 芳幹, 上之表弟也, 故授以家人消息問安

태백산사고본2521A국편영인본1264

분류왕실-종친(宗親)

 

태종실록 12, 태종 61110丙寅 2번째기사 1406년 명 영락(永樂) 4

사헌부와 사간원의 갈등 좌헌납 곽덕연을 공주로 귀양보내다

 

좌헌납 곽덕연(郭德淵)을 공주(公州)로 귀양보냈다. 처음에 곽덕연이 가기(家忌)로 인하여 윤사영·김위민의 피핵(被劾) 사건에 끼이지 않았었는데, 이날 본원(本院)에 출근하여 장령(正郞) 조사(趙師)를 핵문(劾問)하고, 사헌부와 형조가 서로 사사(私私)로이 보복(報復)하기 때문이라고 상소문을 초()하여, 헌사(憲司)의 죄를 청하려 하였다. 대사헌 이원(李原)이 이 말을 듣고 먼저 예궐(詣闕)하여 곽덕연을 탄핵하고 서리(書吏)와 소유(所由)로 하여금 사간원을 에워싸 지키게 하여 상소(上疏)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곽덕연이 신 등을 그르다 여겼었다면, 사간원이 속산(屬散)되기 전에 신 등의 죄를 신청(申請)하였어야 하는데, 그때에는 한마디도 이에 대해서 언급(言及)이 없다가 동료가 속산된 뒤에 홀로 사간원에 앉아서 본부(本府)를 핵문(劾問)하니, 이로써 본다면, 사헌부와 형조가 서로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곽덕연이 정말 보복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간원의 행수(行首) 장무(掌務)가 속산(屬散)된 뒤로 곽덕연은 이를 관망(觀望)하면서 나오지 아니하여, 오랫동안 생기(省記)를 감신(監申)하는 것을 궐()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곽덕연도 속산의 예()에 들었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공공연하게 본원(本院)에 출근하니, 신이 이 때문에 곽덕연을 탄핵하는 것입니다. 곽덕연은 폐문(閉門)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본부에서 보낸 소유(所由) 2명을 가두었으니,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글을 갖추어 아뢰라."

하였다. 이원이 즉시 아뢴 말을 불러 글장을 만들고, 글장 끝에 더하기를,

"직첩(職牒)을 거두고 그 죄를 국문(鞫問)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곽덕연을 공주(公州)에 부처(付處)하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41234A국편영인본1379

분류사법-행형(行刑)

流左獻納郭德淵于公州, 德淵以家忌, 不與思永爲民被劾之事是日赴院, 劾問掌令趙師, 以司憲府與刑曹私相報復之故草疏, 將請憲司之罪大司憲李原聞之, 先詣闕劾德淵, 令書吏所由, 圍守諫院, 使不得上疏, 且啓曰: "德淵若以臣等爲非, 則當於司諫院未屬散之前, 申請臣等之罪當其時, 曾無一言及此, 至同僚屬散之後, 獨坐諫院, 劾問本府由是觀之, 非特憲府刑曹相報復也, 乃德淵眞報復也況諫院行首掌務屬散之後, 德淵觀望不出, 久闕監申省記臣意德淵與於屬散之例矣, 今乃公然赴院, 臣以此劾問德淵, 德淵閉門不納, 囚本府所遣所由二名, 甚爲不當" 上曰: "然則具狀以聞" 原卽以所啓之言, 口占爲狀, 狀尾益以乞收職牒, 鞫問其罪, 上命德淵於公州付處

태백산사고본41234A국편영인본1379

분류사법-행형(行刑)

 

태종실록 13, 태종 726辛卯 1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

동교에서 매사냥을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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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구경하는데 마침 큰 바람이 불어서 진토(塵土)를 휘몰아치므로, 환가(還駕)하여 흥인문(興仁門) 안에 이르니,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조사(趙師)가 졸지(猝地)에 길에서 만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창황(蒼黃)히 말에서 내려 말에 의지하고 숨었다. 임금이 바라보고 말하기를,

"저게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 무례(無禮)한가?"

하니, 좌우(左右)에서 말하기를,

"장령(掌令) 조사(趙師)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마음이 풀리어 빙긋이 웃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언(上言)하기를,

"듣건대 이달 초6일에 대가(大駕)가 동교(東郊)에 거둥하시었다가 돌아와 도성(都城)에 이르렀는데, 시종(侍從)하는 신하들이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호위하니, 비록 무지(無知)한 무리라 할지라도 승여(乘輿)의 소재(所在)를 알 것이온데, 장령 조사가 의위(儀衛)를 바라보며 곧장 대가 앞에 이르러서 말에 의지하여 숨었으니, 그 동지(動止)가 착란(錯亂)하여 이미 군상(君上)을 공경하는 예()가 없고, 또 풍헌(風憲)의 의절(儀節)을 잃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주상(主上)께서 재가(裁可)하시와 그 직책을 정파(停罷)하여 신자(臣子)의 인군(人君)을 공경하는 마음을 권()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5138A국편영인본1385

분류왕실-행행(行幸) / 인사-임면(任免)

辛卯/觀放鷹于東郊, 適大風揚塵, 乃還至興仁門內, 司憲掌令趙師卒遇諸塗, 不及避, 蒼黃下馬, 依馬而隱上望見曰: "彼何人也, 乃爾無禮乎?" 左右曰: "掌令趙師也" 上意解而哂之司諫院上言: "竊聞今月初六日, 大駕行幸東郊, 還至都城, 侍從之臣, 導前在後, 雖無知之輩, 亦知乘輿之所在掌令趙師, 望見儀衛, 直到駕前, 倚馬而隱, 其動止錯亂, 旣無敬上之禮, 又失風憲之儀伏望上裁, 停罷其職, 以勵臣子敬君之心" 從之

태백산사고본5138A국편영인본1385

분류왕실-행행(行幸) / 인사-임면(任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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