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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坡西公(諱順生)과 그 後孫 ===
公의 諱(휘)는 順生(순생)이요 坡西(파서)는 공의 호이다. 한양 조씨 7세이시다. 공의 할아버지는 5세 휘 仁沃(인옥). 호는 君啓(군계)이시며 개국 일등 공신이시며 벼슬이 자헌대부 이조판서이시고 한산부원군에 봉하였고 시호는 忠靖(충정)이시다. 태조 묘정에 배향 되어 부조의 은전을 부여 받았다. 아버지 6세 휘는 賚(뢰) 호는 栢灘(백탄)이시며 문과에 급제하여 자헌대부 예조판서와 지돈녕 부사로 시호는 節孝(절효)이시다. 지극한 성품이 있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사에 시묘살이 6년을 함에 효자라는 칭송이 나라에 자자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곳을 侍墓谷(시묘곡)이라 이름 하였다. 坡西公은 이와 같이 명문가에서 태여나 세종 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형과 호당을 내리 맡으며 집현전 교리 시강원 한림관 통정대부 이조참의요 문장과 덕망이 세상의 추존하는 바가 되었다. 때론 바둑을 잘 두어 세종대왕과 문종이 자주 불러 바둑을 두기도 하였고 단종 초에 이르러 안평대군 장소 용과 영의정 忠定公(충정공) 황보인과 좌의정 충익공 김종서와 우의정 충장공 정본으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돕고 호위하다가 마침내 화를 입으시니 즉 癸酉靖難(계유정난)勳(훈)이 곧 그것이다. 계유년 10월 13일 병신에 전교해 말씀하기를 정본. 조순생외 12인을 변방 고을로 안치시키라하여 공은 고성으로 유배되었다. 동월 17일 경자에 전교해 말하기를 그들은 간사한 무리로 안평대군의 집에 출입하였으니 직첩을 추탈하라 하고 11월7일에 좌의정 정인지와 우의정 한확 등이 궐내에 들어가서 몰래 의논하고 나와서 도승지 최항으로 더불어 전지를 반포함에 안치한 곳에 나아가서 인하여 노비를 삼으라 하였다. 갑술 8월 9일 府院(부원)의 啓議(계의)를 따라서 15일 그들을 교수에 처하도록 명하고 아울러서 노비의 律을 거두게 하였다. 공이 사형시키는 명령을 받은 뒤에 두 아들 銘(명)과 銓(전)을 금산으로 귀양 보내고 손자 伯亨(백형)은 온양으로 귀양 보냈다. 세조 원년 9월7일 공의 부인 貞夫人 原州 元氏(정부인 원주 원씨)는 몰수하여 공신가의 집에 주게 하였으나 원주 원씨는 義殉(의순)하시였다. 공의 숙부 6세 휘 賡(갱) 호 사평공과 6세 휘 貫(관) 호 판사공은 남해로 귀양 가고 조카 銛(섬) 또 한 남해로 숙부들과 함께 귀향 같다. 그날을 상고하니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 단종께서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라 숙부 수양대군의 침탈로 보위 보전이 어려워지자 안평대군은 懿親(의친)으로서 왕자를 호위하는 책임이 중하였고 세 정승은 오랜 덕인으로서 중진에 자리에 거하였다. 종사의 존망이 진실로 여기에 있어서 삼정승과 함께 파서공이 그 党(당)의 원조가 되었은즉 그 화가 미쳐왔다. 안평과 세 정승의 靖忠大節(정충대절)를 가릴 수가 없으나 파서공에게 죄주는 것은 족히 천추의 말이 있을 수 있다. 단종조에 죽음으로 섬긴 사람은 六臣이 으뜸이 되고 公 等은 그 자취는 비록 다르나 그 마음은 마찬가지이다. 正祖(정조) 신해년에 이르러서 죽은 여러 신하들을 追錄(추록)해서 함께 영월 장능 옆에 忠臣壇(충신단)을 설단 하여 제사지내고 뒤에 또 이조참판 홍문제학을 증직하고 공주의 三相書院(삼상서원)에 배향되었다. 肅慕殿(숙모전). 충남 공주군 계룡면 동학리. 忠烈祠(충열사). 충남 천안군 갈전면 백전리. 孝忠祠(효충사). 충북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에 배향되시였다. 묘는 실전이였다가 정부인 원주 원씨를 전북 금산군 부리면 기물리에서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로 이장 하고 파서공도 합묘하고 유표석이라. 서기 1454년 갑술 8월 15일 졸. 파서공의 장남 8세 휘는銘(명)이요. 자는 警之(경지) 호는 仁村(인촌)이다. 인촌공은 세종 조에 문과 급제하여 병조정랑이고 문학으로 일컬음이 있었다. 계유년 화를 만나서 처음에는 금산에 유배 되었다가 오래되어 목천으로 옮기니 인촌공이 화를 입음으로부터 낮이나 밤이나 울부짖고 통곡하여 거의 그 生을 온전히 할 수가 없다가 목천에 이거하여 세성산 아래에 집을 마련하여 사시는 곳의 뒤에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 東方(동방)을 향해 四拜(사배)하고 남으로 향해 곡하며 再拜(재배)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동쪽은 단종의 시신이 묻힌 곳이 영월이고 남쪽은 파서공께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곳이 고성에 있기 때문이다. 사시는 數里에 우둑한 대에 올라 초하루와 보름날에 朝服(조복)을 입고 홀을 잡고 대 위에 서서 절하고 꿇어앉기를 조정에서의 예와 같이 하고 눈물을 흘리고 날이 다한 뒤에 떠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봉우리를 정랑봉이라 하고 그 대를 망경대라 하고 그 사시는 마을을 多仁村(다인촌)이라 칭하였다. 후세 관원들이 목천고을을 지나다가 감동하여 한 절 귀를 읊기를 端廟乾坤只一峰(단묘건곤지일봉)이라 한곳이 그 곳이다.
오래도록 죄적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공신의 적장자로 특별히 사면되었다. 파서공의 차남 8세 휘 銓(전)은 세종 조에 등 문과하여 통훈대부 예조정랑하다. 단묘계갑화에 금산으로 유배되었다. 광해군 갑신에 용서받았다. 손자 9세 휘 伯亨(백형) 자는 子通(자통)이시고 단묘 계갑화에 온양으로 유배되시였다. 금구현령으로 죄가 풀린 뒤에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세조가 병이 걸려 온양온천으로 행할 때 할아버지의 사면을 위하여 피 눈물을 흘리며 원통함과 충정공의 적장자 임을 상소하여 특별히 父子 赦免(사면)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자손이 계갑화에 연류되여 그 내려감이 12세 휘 經(경) 할아버지 대까지 내려감을 짐작할 수 있다. 가세가 빈곤하여 외가에 찾아 가셨으나 역적의 자손이라고 문 밖으로 홀대하여 지금의 금왕읍 상유촌에 움박을 짖고 처음 터를 잡으시니 오늘의 그 자손이 번창하여 금왕읍과 전국 각지에 많이 살고 있고 충정공 不祧廟(부조묘)도 그 곳에 있다.
파서공은 나의 19대 祖(조)이시다.
한양조씨대종회 수석부회장 겸 충정공파종회 회장
이십육세 호 덕산(德山) 조 성 계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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