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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조선 제16대 인조 파주 장릉과 장렬왕후 휘릉◈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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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6대 인조 파주 장릉과 장렬왕후 휘릉◈

khi5040 ・ 2022. 9. 6. 16:07

조선 제16대 인조 파주 장릉과 장렬왕후 휘릉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경기도 파주시에 소재한 장릉(長陵)은 제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의 합장릉(合葬陵, 왕과 왕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 입니다.

 

#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는 제 14대 왕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의 손자이자 추족 원종(元宗, 1580~1619)의 아들로, 1623년에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과 당시 집권당인 대북파를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재위 중에 이괄의 난(인조 2년, 1624)을 수습하였고, 정묘호란(丁卯胡亂, 인조 5년,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인조 14년, 1636)을 겪었습니다.

이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 수비를 위한 군조직)과 수어청(守禦廳, 남한산성을 지키기 위한 군조직) 등을 신설하였고, 북변(함경도 변두리)과 연해(육지 가까이 있는 바다)의 방위를 위하여 여러곳에 진(鎭)을 설치 하였습니다.

 

 

#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1635)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로 광해군 2년(1610)에 인조와 혼인하여 인조 1년(1623)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6남 1녀를 낳았으며, 인조 13년(1635)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주 장릉 종합안내도

▲조선왕릉 세계유산 표지석

▲능참봉(陵參奉,9급서기)이 머물면서 왕릉을 지키고 제례를 준비하던 공간인 재실(齋室)

능참봉의 집무실 겸 제례를 준비하는 중심 건물인 재실(齋室)

재실 앞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아늑한 담장이 아름다운 재실 모습

▲신성한 영역의 시작을 알리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홍살문(紅箭門)

파주 장릉의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향•어로의 양 옆으로 신하들이 걸었던 변로(邊路)가 있습니다.

▲파주 장릉 설명문

▲제례(祭禮) 공간인 정자각(丁字閣)

▲정자각과 비각 사이로 능침이 보입니다.

▲능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碑)

===조선국(朝鮮國) 인조대왕장릉(仁祖大王長陵)

인열왕후부좌(仁烈王后祔左)===

▲정자각의 정전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제례진설도

▲장릉은 합장릉(合葬陵)으로 봉분이 하나라서 정자각 뒤쪽의 신문(神門)을 통해서 중앙에 능침이 보입니다.

▲사초지(莎草地) 위쪽으로 보일락 말락 하는 능침 영역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능침

▲왕릉 숲길

=장릉 능내에는 숲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산책을 하기가 좋게되어 있습니다.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돌려주세요!!!

▲참나무 6형제

#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내에는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의 휘릉(徽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1688)는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1638년(인조 16)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현종 재위기간에 있었던 예송논쟁(禮訟論爭, 효종과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머니가 되는 장렬왕후가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입니다.

 

휘릉 능침의 혼유석(魂遊石)을 받치 는 고석(鼓石)은 4개가 아닌 5개가 배치된 것이 특이합니다.

 

 

# 능역(陵域)과 속세(俗世)를 구분하는 물길을 건너는 금천교(禁川橋)를 건너면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입니다.

▲휘릉(徽陵) 설명문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의 홍살문(紅箭門)

▲왕이 능역으로 들어서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공간인 판위(版位)

▲제향을 지낼 때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향로(香路)와 제향을 올리는 임금이 다니는 낮은길인 어로(御路)

▲제향(祭享)을 드리는 정자각(丁字閣)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건물인 수복방(守僕房)

▲휘릉의 정자각은 특이하게 정전(正殿) 양쪽으로 익랑(翼廊)이 덧붙어 있습니다.

▲익랑을 통해서 바라본 능침 영역

▲정자각과 비각 사이로 보이는 능침 영역

▲정자각 뒤쪽으로 보이는 능침

▲사초지(莎草地) 위쪽으로 석물들이 살짝 보입니다.

▲곡장(曲墻)으로 둘러싸인 능의 석물들이 살짝 보입니다.

▲정자각 뒤 좌측에는 제례 후 축문을 태우고 뭍는 예감(瘞坎)이 자리합니다.

▲능의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表石)을 보호하는 비각(碑閣)

 

▲조선국 장렬왕후휘릉(朝鮮國 莊烈王后徽陵)

▲석양으로 변해가는 능상영역의 완만한 곡선이 아름답습니다.

# 인조 13년(1635) 첫 왕비인 인열왕후가 산후병으로 죽자 3년상이 끝난 후 당시 43세의 인조보다 29살이나 어린 15살의 양주조씨를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입니다.

계비 장렬왕후가 입궁시 인조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소용조씨의 기세가 등등하여 장렬왕후는 인조의 관심에서 멀어져서 별궁인 경덕궁으로 거처가 옮겨지게 됩니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되어 18대 현종 때 예송논쟁이 일어납니다.

효종보다 5살이나 어린 계모 자의대비는 남편(인조), 아들(효종), 며느리(효종비), 손자(현종), 손자며느리(현종비), 증손자며느리(숙종비 인경왕후) 등 여섯 차례나 상복(喪服)을 입는 비운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 예송논쟁(禮訟論爭)

'예송'이란 '예(禮)에 관한 다툼(訟)'이라는 뜻으로,

 

첫 번째 예송은 현종1년(1659)에 발생한 기해예송(己亥禮訟)은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장렬왕후(자의대비)가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할 것인지를 두고 일어났습니다.

당시 지배적 이념인 성리학의 '주자가례'에 따르면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그 자식이 적장자이면 3년, 차자 이하의 경우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효종은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죽고 차남이었던 봉림대군 이었다가 왕이 되었으므로, 적장자가 아니므로 종법에 따라 1년만 입어야 한다는 송시열 등 서인의 주장과,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장자의 예우로 3년을 입어야 한다는 윤후, 허목 등의 남인간의 논쟁이었습니다.

현종이 19세로 막 즉위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이 이겨서 남인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두 번째 예송은 현종 15년(1673)에 발생한 갑인예송(甲寅禮訟)은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가 죽자 다시 일어났습니다.

서인은 둘째 며느리 기준으로 9개월, 남인은 첫째 며느리 기준으로 1년을 주장하였으나 등극 후 15년이 지난 현종은 아버지 효종을 차남으로 대우하는 서인세력을 제거하고 남인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이로써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은 몰락하였으나 숙종6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재집권을 하게 됩니다.

 

# 자의대비 상복 입는 기간이 뭐길래 서인과 남인 정권이 십 수년간 피터지게 싸웁니다.

요즘 말로 "뭣이 중헌디?"

 

[출처] 조선 제16대 인조 파주 장릉과 장렬왕후 휘릉 |작성자 khi5040

조선 제16대 인조 파주 장릉과 장렬왕후 휘릉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조선 제16대 인조 파주 장릉과 장렬왕후 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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