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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한계산성(寒溪山城)◈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2. 24.

1259년(고려 고종 46) 원나라 "「고려등처군민총관(高麗等處軍民總官)(현재의 홍콩총독, 고려사절요엔 「쌍성총관부( 雙城總管府)」라 기록함)"인 조휘(왕준)가 원나라 군사를 이끌고 한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당시 한계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군(夜別抄軍)을 거느리고 원나라(고려군민총관군)적을 습격해 전체적으로 섬멸 하였다.

[연혁]

한계산성(寒溪山城)은 한계령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해발 1,430m 안산(鞍山)의 남쪽 계곡을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한계산성은 신라 경순왕 때 축조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부흥운동을 할 때 성을 수축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이야기가 구비전승(口碑傳承)된다. 그러나 산성이 초축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후기에 몽고와 홍건적 등 이민족의 잦은 침입 때문에 인근의 주민들이 입보(入保)를 위하여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어 중세 시기 한계산성의 활용 방식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한계산성은 대몽항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고려가 승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1259년(고종 46)  원나라에 볼보로 간 『왕준이 (고려등처군민총관(高麗等處軍民總官,조휘)』가 되여 원나라 군사를 이끌고 한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당시 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군(夜別抄軍)을 거느리고 적을 습격해 거의 전부 섬멸하였던 것이다. 당시 중부 내륙 지역이 몽고의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고려 공민왕이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자 한계산성을 확장하면서 크게 개축한 것은 바로 대몽고전에서 승전했던 역사적 경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형태와 특징]

한계산성은 중세 시기 험지 위주로 지어진 산성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산성은 확장된 성곽, 별설(別設)의 돈후(墩堠) 등 중세 산성의 특징적인 형태를 잘 보여준다.

한계산성은 크게 상성(內城)과 하성(外城)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성은 해발 850∼1050m인 안산 동남쪽의 능선부 절벽 위에 있다. 상성에는 천제단이라 부르는 제단터와 대궐터라 부르는 건물지(建物址) 그리고 우물터가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문지가 남아 있다. 하성은 안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흘러내린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생긴 큰 골짜기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발굴경위 및 결과]

한계산성의 둘레는 원래 1,800m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상성의 둘레는 약 1.7km이며, 하성은 약 6km 정도의 규모인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내탁식으로 축조하였으나 지형에 따라서 협축식(夾築式)으로 만들었으며, 능선부를 석재로 메워 단순하게 쌓아 올린 곳도 있다. 성벽의 하단부는 가로 50∼70cm, 세로 20∼40cm 정도의 치석(治石)된 장방형(長方形) 돌로 쌓았고, 위로 올라 갈수록 작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성벽 위에는 높이 약 1m, 두께 0.7∼0.8m 정도의 평여장(平女牆)을 외벽과 잇대어 만들었는데, 이 평여장은 타(垜)의 구분없이 축조하였다.

하성 내에는 18개소의 건물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사용된 기와와 도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특히 계곡 동편의 건물지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그 가운데 ‘지정십팔년삼월(至正十八年三月)’의 연대가 새겨진 기와가 다수 발견되어 이 건물지가 1358년(공민왕 7)에 건립 혹은 보수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성의 건물지에서 서문으로 가파르게 오르는 길의 중간부터는 매우 좁은 길이 나 있다. 이 좁은 길의 초입에는 길이 9m, 너비 5m 정도의 돌출된 좁은 공간에 석축 시설물이 들어 서 있다. 이 시설물이 바로 돈후이다. 돈후는 상성으로 올라오는 적을 감시하는 시설로 상성 서문으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거나 지연시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계산성의 돈후는 다른 산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시설물이다.

한계산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4가지가 있는데, 그중 옥녀탕 계곡을 따라 하성의 남문지에 이르는 길이 조선 후기에 탐방로로 이용되었다.

한계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성(古城)’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까지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https://youtu.be/UEz2IY0PtHA?t=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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