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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龍洲遺稿 卷十一 / 序《玄谷集》序/《漢陰先生文集》序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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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狀●

●龍洲遺稿 卷十一 / 序

《玄谷集》序

昌黎氏論文章曰:“水,氣也;言,浮物也。水大而物之浮者大小畢浮。” 蘇長公亦曰:“昌詩不如昌其氣。” 不佞於是迺知文章以氣爲主之說,古今不可易也。吾宗人玄谷翁生當隆、萬盛際,稟氣固厚。才結髮,喜文章,文非先秦、兩漢,不讀也;詩非開、天大家數,不眼之也。其所嚌胾,最深於太史氏及戰國弘辯之說,以助其氣,以資其筆勢。由是名噪一國,人不敢顏行抗其氣。掉鞅藝苑,破的澤宮,名標一頭,殆無虛歲。主司以得失翁爲憂樂,同進之士以莫先翁爲戒。顧坐時命,屢屈公車,至髮種種,乃始得之。然翁則猶然笑之,不少挫其氣。八角磨盤之勇,愈往愈壯。

 

天啓年間,不佞忝入玉署,與翁同儤直,是時翁年過耳順矣。聽其譚論,則河決而峽潰也;視其符彩,則巋然靈光也。叩其竹素之業,則惠施五車,不足當其意也,不佞作而面歎者良久。翁歿十年于茲,嗣子億氏宰南縣,付翁集于剞劂氏,爲不朽計,卷凡九。致禮千里外,徵不佞以序引甚勤。不佞披其編讀之,曰:

 

多乎哉!詞賦上規相如,下襲仲宣。飛章走檄,箋誄銘頌,俱有奇氣。其它庭對大策,步驟鼂、董之域。朝天記行,方丈、蓬萊幽討有韻之作,譬如騏驥脫馽,怒氣橫空。率是以往,累百餘篇,未見其氣之餒而竭而躓。翁之於斯術,可謂盡矣。噫!豐城劍氣出古獄而貫牛斗者,始籍昆吾之鑄,而終借雷煥之眼。觀翁之師友之間,亦猶是也。汀、皐、溪院諸老先生折輩行,許以少友,石洲、東岳、五山車氏以能詩聲最鳴於世,而與翁結爲詩社。磨礱浸灌,婆娑娛嬉,戲咲怒罵,無非養翁之氣而揚翁名也。翁之甚老而疾病也,不佞往造焉。翁已倦於言語,而《資治》一卷,尙在枕邊。隱隱眉睫間,有好氣象不肯泯者,奇哉奇哉!不佞今僭玄晏之序《三都》,則舍翁文氣,無他適也。翁弟玄洲公,亦以文雄竝峙,翁實昌其氣而及於友于哉!

 

현곡집서문玄谷集序

 

창려씨(昌黎氏 한유(韓愈))가 문장에 대해 논하기를,

“물은 기(氣)이고, 말〔言〕은 뜨는 물건이다. 물이 크면 뜨는 물건은 크건 작건 모두 뜬다.”

하였고, 소장공(蘇長公 소식(蘇軾))은 또 말하기를,

“시를 창성하게 하는 것이 그 기를 창성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나는 이에 마침내 문장이 기를 위주로 한다는 설은 고금에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종인(宗人) 현곡옹은 융경(隆慶)과 만력(萬曆)의 성대한 시대에 태어나 천부적인 기질이 원래 두터웠다. 겨우 머리를 묶을 나이부터 문장을 좋아하여 문(文)은 선진(先秦)ㆍ양한(兩漢)이 아니면 읽지 않았고, 시는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연간의 대가(大家)가 아니면 눈에 두지 않았다. 《사기(史記)》와 전국 시대 웅변가의 설을 가장 깊이 있게 읽었는데, 이로써 자신의 기를 북돋우고 필력의 재료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온 나라에 자자하여 사람들이 감히 그의 앞에 서서 그 기에 맞설 수 없었다. 문단에서 재주를 드날리고 시험장에서 솜씨를 발휘하여 이름이 제일 위에 걸린 것이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담당관은 옹을 얻으면 즐거워하고 옹을 얻지 못하면 근심했으며, 같이 진출한 선비들은 옹을 앞선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을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시운에 걸려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다가 머리가 희끗해져서야 비로소 급제하였다. 그러나 옹은 태연히 웃으며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팔각 맷돌과 같은 용기는 갈수록 더욱 씩씩해졌다.

 

천계(天啓) 연간에 나는 홍문관에 들어갔다가 옹과 함께 숙직을 서게 되었다. 이때 옹의 나이는 예순이 넘었다. 그의 담론을 들으니 마치 강물이 터지고 협곡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우뚝한 영광전(靈光殿)과 같았다. 공부한 서책에 대해 물어보니 혜시(惠施)의 오거서(五車書)도 그 뜻을 당해내기 부족하였다. 나는 일어나 그 앞에서 한참동안 탄복하였다.

 

옹이 돌아가신 지 지금 십 년이 지났는데, 장자 억(億)이 남쪽 고을의 현감이 되어 옹의 문집을 간행하여 세상에 길이 전하려고 하니, 모두 9권이다. 천 리 밖에서 예를 갖추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는 것이 매우 부지런하였다. 나는 문집을 펼쳐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훌륭하구나. 사부(詞賦)는 위로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본받고 아래로 중선(仲宣 왕찬(王粲))을 따랐다. 상주문과 격문(檄文), 전(箋), 뇌(誄), 명(銘), 송(訟)은 모두 빼어난 기가 있으며, 그밖에 조정에 아뢴 대책(大策)은 조조(鼂錯)와 동중서(董仲舒)의 수준에 다다랐고, 중국으로 사신 가며 여정을 기록하고 방장산(方丈山)과 봉래산(蓬萊山) 깊은 곳을 유람하며 지은 시는 비유하자면 천리마가 고삐를 벗고 노기가 충천하는 듯하다. 대체로 이후의 수백여 편의 글에서 기가 부족하거나 고갈되거나 꺾이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옹은 이 기술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아, 풍성(豐城)의 검기가 옛 감옥에서 나와 두우(斗牛)를 꿰뚫었으니, 처음에는 곤오산(昆吾山)에서 주조되었지만 결국 뇌환(雷煥)의 눈을 빌렸다. 옹의 사우(師友)들을 보면 이와 마찬가지이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동고(東皐 최립(崔岦)), 계원(溪院) 등 여러 노선생께서 나이를 접어두고 어린 벗으로 인정해주셨고, 석주(石洲 권필(權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오산(五山) 차씨(車氏 차천로(車天輅))는 시에 능하기로 세상에 명성이 매우 높았는데 옹과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절차탁마하여 젖어들고 한가로이 노닐며 희롱하고 성내는 것이 모두 옹의 기를 북돋고 옹의 명성을 드날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옹이 몹시 늙어 병이 위독해졌을 때 내가 찾아가 뵈었다. 옹은 이미 말씀하시기 힘들었는데도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권을 항상 베갯머리에 두셨다. 미간에 은은하게 좋은 기상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내가 지금 분수 넘치게 현안(玄晏)이 〈삼도부(三都賦)〉의 서문을 쓴 일을 하려 한다면 옹의 문기(文氣)가 아니고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옹의 아우 현주공(玄洲公 조찬한(趙纘韓))도 문호로 나란히 우뚝하니, 옹이 실로 자신의 기를 창성하게 하여 아우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이리라.

 

龍洲遺稿 卷十一 / 序

《漢陰先生文集》序

不佞絅,甲辰歲,猥撰先生墓隧之碑。其后五年,先生賢孫戶部郞象鼎氏遣其子允迪以告曰:“祖父文集鋟梓旣,弁首之文,執事不可以辭。” 不佞復曰:“前日杜撰樂石也,狗馬之齒已滿八,況進虖五載,則恃粥而生,亦甚差事,奚論文字上?今世薦紳先生,其無壯年健筆當之者乎?”

 

象鼎氏猶執不改,數數然請不置。且曰:“惟我祖父錯質于國,夷險節,帷幄運籌,造膝晉謨外,不遑其他,絶無置稿傳後之計。今不肖等縱不能襲訓趾美,惟念祖父左右宣廟,克成中恢功業,載之惇史足矣。眇末子孫,何暇一二譚?至若祖父平生種學績文,兀兀窮年,發爲著述,猶恐有聞者,其可任其湮滅不稱哉?不肖家嚴昆弟用是爲懼,迺於囊篋中閱舊書,䵝昧就滅,居什二三。適有天幸,先嚴與季父相後先守尙、善,迺附剞劂氏,卷凡四。唯以不全爲歉,補苴罅漏,不得不待異日。

 

其後堂弟象震爲起居注,謄出《銀臺日記》,頗得祖父遺文。又幸李松齡爲尙牧,松齡我之自出也,不待吾家勖厲,自祗力文集事,幾乎刊行,不意松齡卽世。奈何乎天?天豈不欲乎使吾先祖咳唾精神,復顯於此世耶?不肖等相與惋恨,而歸咎無處。遂相與單心力,鳩成此集。雖曰泰山毫芒,抑可見天不慳祕寶,而少貰不肖等責矣。”

 

於是不佞薰盥而窺其集,有韻之文三百有奇,表、箚、啓、辭、敎書百一十有奇,獻議、呈文如干有奇,書、牘九十有奇,與唐將書七,答倭奴七,碑誌、祭文、雜著一冊,此非大集而何?大冶鑪邊,失二三點金何傷?世之專精爲文,歲磨月鍊,不失隻字者,較其富有,不知孰與多也。

 

漢陰先生文學,性也。卓然早成,二十登上第,掉鞅藝苑,人無不辟三舍。迨立之年,主盟文鼎,天下聞者不獨艶其詞藻,願一見其丰儀之盛,詎不韙歟?當龍蛇大難,竭忠盡智,惟命之從。楊鎬經理,至貴倨也,曰:“得李尙書,吾濟矣。” 雀立秦庭,《無衣》之賦,不竢終日。以是觀之,先生之嫺於詞,何讓屈、左徒?燕、許大手,徒浮誇耳。

 

甲午八條獻策,實再造吾東之藥石梁肉也。宣廟奬以有過人之智,明君知臣信。古人之言曰:“充才曰學,趣識曰才。” 識非知之府耶?自古大人君子功業顯著者,孰不爲文?論利害達事情,舍智奚適?漢陰先生閑閑之智,際會宣廟,朝暮遇也。不佞嘗耳剽先進談先生之文,文出六經,而《資治》、《春秋》爲準繩,洛、建諸老言爲飣餖,詩自有德人深致,自成一家云。傳言三不朽者,吾於《漢陰先生集》得之。

 

한음선생문집서문漢陰先生文集序

나 조경은 갑진년(1664, 현종5)에 외람되이 선생의 신도비문을 지었는데, 그 후로 5년 뒤에 선생의 현손 호조 낭관 상정(象鼎)씨가 아들 윤적(允迪)을 보내 알리기를,

“조부의 문집이 판각이 끝났습니다. 서문을 써주시는 일을 집사께서 사양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지난 날 비문을 두찬(杜撰)할 때가 내 나이 이미 팔십이었는데, 더군다나 지금은 5년이 더 지났다네. 그렇다면 죽으로 연명하고 있는 것도 매우 괴이한 일이거늘 어찌 글을 짓는 일을 논하겠는가. 지금 세상에 벼슬하는 사대부들 중에 이를 감당할 만한 젊고 필력이 웅건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하였다. 상정씨가 그래도 뜻을 꺾지 않고 고집하며 여러 차례 부탁하며 그만두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우리 조부께서는 나라에 몸을 바쳐 태평할 때나 험난할 때나 변함없는 절의로 유악(帷幄)에서 계책을 세우고 임금에게 나아가 생각을 아뢰는 일 이외에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에 글을 남겨 후세에 전할 계획이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비록 가르침을 계승하고 아름다움을 이어갈 수는 없지만, 생각건대 조부께서 선조(宣祖)를 보필하여 중흥의 공업을 완성한 일은 돈사(惇史)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으니, 아득하고 보잘것없는 자손이 어느 겨를에 한 두 마디 말을 붙이겠습니까.

그러나 조부께서 평소 학식과 문장을 기르고 쌓으며 부지런히 일생을 보내시어 저술하시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세상에 알려질까 염려하셨으니 이런 저술이 매몰되어 일컬어지지 않게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저희 아버지 형제분들이 이것을 두려워하셔서 책 상자를 열어 옛 글들을 살펴보시니 열의 두셋은 글이 퇴색되어 없어졌습니다. 마침 천행으로 선친과 계부께서 선후로 상주 목사(尙州牧使)와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어 판각을 맡기셨으니, 모두 4권이었습니다. 다만 완전히 갖추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결락을 보완하는 일은 훗날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사촌 동생 상진(象震)이 기거주(記居注 주서(主書))가 되어 《은대일기(銀臺日記)》를 등사하면서 조부의 유문을 꽤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다행이 이송령(李松齡)이 상주 목사가 되었는데, 송령은 나의 생질입니다. 저희 집에서 독려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문집을 간행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거의 간행을 앞두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송령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의 뜻을 어찌하겠습니까. 하늘은 어찌 우리 선조의 말씀과 정신을 다시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까. 저희들은 서로 한탄하면서도 탓을 돌릴 곳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마음과 힘을 다하여 조부의 글을 모아 이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으니, 비록 태산 속의 터럭과 같이 미미하지만 하늘이 귀중한 보물을 끝내 감추지 않음을 볼 수 있고 조금이나마 저희의 책임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향을 피우고 손을 씻은 후 문집을 살펴보니, 시가 3백여 수, 표(表)ㆍ차(箚)ㆍ계(啓)ㆍ사(辭)ㆍ교서(敎書)가 110여 편, 헌의(獻議)ㆍ정문(呈文) 약간 편, 서(書)ㆍ간독(簡牘) 90여 편, 명나라 장수에게 준 편지 7통, 왜노에게 답한 편지 7통, 비지(碑誌)ㆍ제문(祭文)ㆍ잡저(雜著) 1책이었다. 이것이 대집(大集)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큰 대장간의 화롯가에서 한두 점의 금을 잃는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세상에서 온 정력을 쏟아 글을 지으면서 해마다 달마다 연마하여 한 글자도 잃지 않는 자들과 그 풍부함을 따져보면 어느 것이 더 대단한지 알지 못하겠다.

한음 선생의 문학은 타고난 것이다. 탁월하게 일찌감치 성취하여 스물에 높은 등수로 급제하여 문단에서 기량을 발휘하니 선생에게 크게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서른 살이 되어 문단의 맹주가 되니, 명성을 들은 천하 사람들이 선생의 문장만 부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성대한 위의(威儀)를 한 번 보고 싶어 하였다.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임진년 왜란 때에 충성과 지혜를 다 바쳐 오직 명을 받들었다.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매우 존귀하고 거만하였는데, “이 상서를 얻었으니 우리의 일이 성사되겠다.”라고 말하였다. 중국 조정에 꼿꼿하게 서서 구원을 요청하자 하루가 지나기 전에 〈무의(無衣)〉시를 읊어 주었으니, 이로 보건대 선생이 문사에 능숙한 것을 어찌 굴원(屈原)이나 좌사(左思)의 무리에게 양보하겠는가. 연허대수필(燕許大手筆)도 한갓 과장일 뿐이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올린 8조목의 계책은 실로 우리나라를 중건하는 약석(藥石)이자 좋은 음식이다. 선조께서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지혜라 칭찬하셨으니, ‘현명한 군주는 신하를 알아본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다. 옛 사람의 말에, “재주를 채우는 것을 ‘학문’이라 하고, 지식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재주’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지식은 지혜의 창고가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공업(功業)이 크게 드러난 대인(大人)과 군자 중에 누가 문장을 하지 않았는가. 이해를 논하고 사정(事情)에 통달하는 데에 지혜를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한음 선생의 넉넉한 지혜가 선조를 만났기에 짧은 시간에 알아본 것이다.

내가 선배들이 선생의 문장에 대해 나누는 말씀을 얻어 들으니 선생의 문장은 육경(六經)에서 나와 《자치통감》과 《춘추》를 표준으로 삼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등의 노유들의 말씀을 안배해 나열하였으며, 시는 덕을 지닌 자의 깊은 풍치가 있어 따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좌전》에서 말한 ‘삼불후(三不朽)’를 나는 《한음선생문집》에서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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