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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양양수군만호대포영(襄陽水軍萬戶大浦營)【襄陽東溟書院記】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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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angyang.or.kr/yangyang/2014/2014_njd.pdf

양양수군만호대포영(襄陽水軍萬戶大浦營)

【襄陽東溟書院記】

余以中丞.論事過當.斥補于玆土.下車之初.先以興學校育人才爲急務.重創聖廟而大之.改造齋舍而新之.又置學田以爲諸生朝夕之供.而第念校生多有免軍之徒.紛紜雜亂.其中雖有俊秀拔萃之才.

내가 중승(中丞)으로서, 일을 지나치게 논의하다가, 좌천되어 이 땅에 처음 왔다. 먼저 학교를 일으켜 인재육성을 급무로 하고, 향교를 크게 중창, 재사를 새롭게 개조하였으며, 또 제생의 아침저녁의 제공을 위하여 학전을 설치하여 다만 생각하건데 군역을 면제받은 무리가 많이 뒤섞여 어지럽고 그 중에는 비록 재주가 출중한 준수도 있었다.

不得精業於黌齋.以此列邑皆設書院于靜散地.爲多士修養之所.而顧此邑獨無焉.

학교에서 정통의 학업이 부득하니, 이로써 여러 고을에서 모두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 서원을 설립하고 많은 선비를 수양하는바 보니 이 고을에만 유독 없다.

余慨然興喟.鳩材募工.欲效白鹿之舊制矣.

내가 개연히 탄식하고, 재목을 구하고 장인을 모아, 백록동서원의 구제도를 본받고자한다.

適値朝廷革去本府之大浦鎭.軍器軍糧.移于本府.而萬戶所居之館舍.嵬然獨存.勢將毀撤而補用於官家.

마침 조정에서 혁거한 본부의 대포진의 군기군량을 본부로 옮겼으니 만호가 살던 관사만 홀로 우뚝 솟아 있어, 장차 그 형세가 훼철될 것이므로 고쳐서 관가로 쓰고자 한다.

余翻然喜曰.此必天公感余愛士之誠.畀此一館.以爲諸生講學肄業之地.何必毀諸.乃因舊館而額之曰.東溟書院.蓋齋房講堂.儼然維新.一鄕之父老諸生.聚而謝焉.

내가 생각을 바꾸어 기뻐하면서, 이는 필시 하느님이 선비를 사랑하는 정성으로 이 관사를 준 것이라고 나는 느끼고서. 제생이 학문을 강론하고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하고자 하니 어찌 헐겠는가. 이에 구관의 편액을 동명서원(東溟書院)이라하고 재실과 방 강당이 근엄하게 일신시켰다. 일향의 어른들과 제생이 모여 사례한다.

 

■서원(書院)■

사립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동명서원(東溟書院)이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에 위치해 있다. 동명서원은 조선 인조 6년(1628년)에 건립되었다. 당시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조위한(趙緯韓)은 흥학(興學)에 뜻을 두고 그 방안을 강구하던 중 인조 4년(1626년) 병인(丙寅)에 방어위치가 못 된다하여 폐(閉)한 양양부 대포만호영의 군용건물인 만호가 살던 관사가 방치되어 장차 헐리게 될 것을 발견하고이곳을 학사로 전용토록 하였으며, 이것이 서원이 건립되는 단초가 되었다.서원 건립을 위해 숭모(崇慕 : 숭배하고 그리워 함)의 상징이 될 선현으로 정언(正言 : 국정에 대한간쟁과 비평, 관원을 탄핵하는 사간원의 관원)을 지낸 노경복(盧景福)과 사림(士林) 최정립, 이현일 등이 향론(鄕論)으로 양열공(襄烈公) 조인벽(趙仁壁)을 추천하였으며, 이에 조부사(趙府使)의 협조로 강당뒤편에 사당을 건립하여 충현사라 명명하고 조인벽을 봉향하였으며 동명서원으로 현판 하였다. 아울러 부사 조위한은 전답과 소금 굽는 가마와 어선 한척을 지급하여 전속시켜 서원의 운영에 협조하였다. 조인벽의 본관은 한양으로 여말 충목왕(忠穆王)대 이래로 홍건적의 퇴치와 왜구의 격퇴에 지대한 공헌을 한 무관이었으며, 아울러 학문과 덕망을 갖춘 문인이었다. 조인벽은 사도도휘사(四道都揮使)를 거쳐 판의덕부사(判懿德府使)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처남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 회군에도 가담하였고, 그의 봉작(封爵)은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용원부원군(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三重大匡龍源府院君)이었다. 공양왕 2년인 1390년 4월 9일 회군한 신하들의 공을 기록하고 고인(故人) 조인벽 포상의 규정을 유사에서 거행하였고, 조선조 태조 2년인 1393년 7월 22일 고인이 된 조인벽을 2등 공신에 보하고 포상하였다고『고려사』와『조선왕조실록』에 각각 기록되어있다. 동명서원이 창건된 이후 얼마 안 되어 조인벽의 넷째 아들 조사(趙師)가 배향(配享 : 선원에 위패를모심)되었다. 조사는 사적으로 이성계의 생질(甥姪 : 누이의 아들)이었던 관계로 통정대부첨지중추원사(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보였으며, 이에 후인의 사표가 되었으므로 배향될 수 있었다.

 

■『淸청陰음集집』〔16세기 말 ~17세기 초,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權雲卿(권운경)이 양양襄陽에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다!

:이름은 권진(權縉)이다.

 

洛山名刹創前朝낙산명찰창전조 /이름난 절 낙산사가 지어진 건 고려 때로

形勝岧嶤特地高형승초요특지고 /형승 보면 가팔라서 특별하게 드높다네

聞說五更看日出문설오경간일출 /말 듣기로 오경에는 일출 볼 수 있다 하니

白雲壇上俯紅濤백운단상부홍도 /백운단의 단상에서 붉은 물결 굽어보소

仙區終歲絶喧煩선구종세절훤번 /신선의 땅 한 해 내내 시끄러운 일 없는데

納灝孤亭六月寒납호고정륙월한 /외로이 선 납호정은 유월에도 추우리라

氷簟睡醒烏几靜빙점수성오궤정 /찬 자리서 졸다 깨자 오궤안은 고요한데

海風吹落竹皮冠해풍취락죽피관 /바닷바람 불어와서 죽피관을 떨구리라

習家池館久生塵습가지관구생진 /습가지의 누관에는 먼지 오래 쌓였는데

峴首殘碑閱幾春현수잔비열기춘 /현수산의 깨진 빗돌 몇몇 봄을 지내었나

江漢風流秪虛事강한풍류지허사 /강한의 풍류 놀이 모두 헛일 되었으니

鹿門須覓姓龐人녹문수멱성방인 /녹문에서 모름지기 방씨나 찾아보소

時羞簇案進官廚시수족안진관주 /철에 따라 나는 진미 고을에다 올리나니

巨口赬魴八帶魚거구정방팔대어 /입 큰 농어 꼬리 붉은 방어 팔대어도 있네

佳節壽筵何處好가절수연하처호 /좋은 시절 수연 열기 어느 곳이 젤 좋은가

大堤花柳引潘輿대제화류인반여 /긴 제방의 꽃과 버들 반여 끌고 가보시게

童丱相隨各髩蒼동관상수각빈창 /어린 시절 노닐 적엔 모두 머리 검었는데

轉頭時序幾炎凉전두시서기염량 /순식간에 흐른 세월 몇몇 해가 지나갔나

年來萬事休心久년래만사휴심구 /근년 들어 만사 모두 맘 식은 지 오래건만

只有離情老更傷지유리정로경상 /이별 정만 남아 있어 늙어서도 맘 상하네

 

■『玄현谷곡集집』 현곡 조위한(玄谷 趙緯韓 1558~1649)

=大平樓=

危樓奕敞半天央위루혁창반천앙 /중천 가운데에 아름답게 드러난 높은 다락에

落日登臨客恨長낙일등림객한장 /저녁 무렵에 올라보니 나그네의 한도 길구나.

大塊勞生元草草대괴로생원초초 /이 땅에서 괴로운 인생은 원래 바쁜 모양

虛名傳世更茫茫허명전세경망망 /헛된 명예 대대로 전함은 거듭 아득하리다.

東溟若變爲春酒동명약변위춘주 /동해물은 봄에 담근 술로 변한 것 같고

北斗還將作羽觴북두환장작우상 /북두칠성은 돌아서 술잔 되려는 것인가.

浩浩放歌歌激烈호호방가가격렬 /호호탕탕 노래하니 노랫소리 격렬하고

回看塵土一悲傷회간진토일비상 /돌아보니 흙먼지에 슬픈 마음 아프구나...

 

■『白백軒헌先선生생集집』卷권之지十십二이詩시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 1595 ∼1671)

●太平樓 以下襄陽十景爲李太守作(태평루 이하양양십경위리태수작) / 이하는 양양 경10 〔태평루 낙산사 남대천 설악산 천후산 동해사 신흥사 동산 현산 대제(太平樓 洛山寺 南大川 雪嶽山 天吼山 東海祠 神興寺 洞山 峴山 大堤)]을 1658년 이연(李演) 부사를 위해 지었다 .

 

淸夜曾開宴청야증개연 /맑은 밤에 일찍이 연회를 개최하니

朱欄拂綺羅주란불기라 /단청한 난간에 화려한 옷자락 나부끼네.太平眞有象태평진유상 /태평성세의 참모습이 여기에 있으니

看取擁笙歌간취옹생가 /생황소리 노랫소리 취함을 느끼노라.

 

참고로 양양 10경 시문을 소개한다.

●洛山寺(낙산사)

宿霧山山暗숙무산산암 / 짙은 안개가 산마다 자욱하고

人寰處處眠인환처처면 / 곳곳 마을마다 잠들어 있는데

殘宵海底日잔소해저일 / 미명에 바다 밑서 꿈틀대던 해님이

已掛寺樓前이괘사루전 / 어느새 빈일루 앞에 높이 걸렸구나.

流自銀河注유자은하주 은하수 물길 / 처럼 절로 흘러서

波連碧海深파련벽해심 동해 / 바다 깊숙이 파도에 연하고

朝宗不暫息조종불잠식 / 잠시도 쉬지 않고 바다에 흘러들어正

似戀君心정사련군심 / 순순히 연모하는 님의 마음 같구나.

●설악산(雪岳山)

迥立含雲氣형립함운기 / 운기를 머금고 높이 솟아

層巓逼紫霄층전핍자소 / 첩첩 산이 하늘에 겹치고

應知太始雪응지태시설 / 태초부터 알고 있었던 눈

六月不曾消륙월불증소 / 유월이 되어도 녹지 낳네.

●천후산(天吼山)

空穴雷聲吼공혈뢰성후 / 하늘의구멍에서우렛소리불어대니

高標日馭回고표일어회 / 고상한풍치에해를몰고도는도다.

炎天佛骨冷염천불골랭 / 여름날 부처님도 춥다하는데

風自廣寒來풍자광한래 / 달의 궁전에서 바람 불어오네.

●동해사(東海祠)

肅肅靈壇靜숙숙령단정 / 엄숙하고 정결한 영단

蒼蒼松桂長창창송계장 / 오래도록 새파란 솔밭

千年香火地천년향화지 / 천년이어 향불 피는 여기

天闊海茫茫천활해망망 / 열린 하늘 바다 끝없어라.

●신흥사(神興寺)

山深多爽氣산심다상기 상/ 쾌한 기분이 넘치는 깊은 산

骨冷不成眠골랭불성면 / 뼈가 시려 잠도 이를 수 없는데

半夜風泉響반야풍천향 / 한밤에 바람소리 샘물소리 일어

今猶在耳邊금유재이변 / 오히려 언제나 귓가를 울리누나.

●동산(洞山)

沙路緣滄海사로연창해 / 푸른 바닷가에 인연한 모랫길

瑤岑鎖碧霞요잠쇄벽하 / 푸른 노을에 잠긴 아름다운 봉

追思欹枕夜추사의침야 / 아 옛날에 묵던 밤이 그리워지고

一夢到仙家일몽도선가 한/ 낱 신선이 사는 집에 이른 꿈.

●현산(峴山)

我學山翁醉아학산옹취 / 부사의 취한 꼴을 내가 따르니

兒童笑似泥아동소사니 아/ 이들은 내 꼴보고 웃어댄다.

風流今尙在풍류금상재 / 풍류는 오히려 이제부턴데

爭唱白銅鞮쟁창백동제 / 백동제 다투어 노래하누나.

●대제(大堤)

江水拍山去강수박산거 / 강물은 소리 내며 산을 떠나니

處處芳草多처처방초다 / 곳곳에 방초는 많고도 많구나.

明月照官路명월조관로 / 밝은 달은 밤마다 관아 길을 비추는데

女郞連袂歌여랑연몌가 / 여아 남아 손에 손 잡고 노래 부르네.

 

●해월정 (海月亭)

▪ 소재지 양양 : 양양읍 조산리 10-1

▪ 연 혁 : 조인벽( ) 趙仁璧 은 양양으로 낙향한 이후 이곳에 해월정을 짓고 산수간을 소요 하면서 대자연과 (逍遙) 함께하는 시예 로 소일하였으며 후진을 양성하면서 학문과 도덕을 일깨워 이 지방의 풍속 순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여러 유생들과 . (강학 학문을 講學: 닦고 연구함)을 즐겼으며, (月村 鄭漫)월촌 정만과 강해 이장년(江海 李長年) 그리고 도사 혜선 등과 시우 로(道師 慧禪 詩友) 지냈던 것으로 파악된다. 본래 호를 우계(愚溪)라고 하였으나 이 곳 해당에 정자를 짓고 해월정(海月亭)이라고 현판하고, 자신의 아호도 海月亭이라 하고 詩友들과 詩를 짓고 뜻을 풀며 시흥으로 소일하였다. 강해는 말하기를 “ 나의 벗 조인벽의 시는 질탕(跌蕩)하고 호매(豪邁)하여 속세의 먼지가 묻지 않았다 ” 라고 하였으며 혜선도사는 조선생은 인간 “ 세계 사람이 아니라 그 절개가 고귀하기가 진나라 도연명에 비유 된다 ”고 하였다. 그 당시 이 고장은 왜구를 방어하는 군관들의 수자리〔국경을 지 키던 일〕촌락으로 지극히 영세한 곳으로서 풍속과 문물이 크게 폐허화 되었다. 조인벽이 학문과 도덕을 일깨워서 풍속을 순화 시키면서 자신도 시예로 소일하기도하고 혹은 짝지〔 지팡이의 방언 〕를 집고 산수 간에도 거닐며 때로는 도롱이를 걸치고 낚시를 하기도 하며 세상을 잊은 듯이 지냈다. 그리하여 수백 년 후에까지 선생의 덕망이 전해져 오고 있다. 조인벽 선생의 시 한수가 낙산사 의상대에 있던 것을 동명서원으로 옮기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 또한 선생의 마음과 생활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월정 위치 해월정 옛 터: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210-1

시문 ▪ 海해月월亭정遺유詩시

〔해월정 조인벽(海月亭 趙仁璧 1330~1393) 〕

蝶翅勳名薄접시훈명박 /공훈과 명예는 나비 날개와 같이 얇기만 하고

龍惱富貴輕용뇌부귀경 /용뇌 같이 여기는 부귀는 가볍기만 하더라.

萬事驚秋夢만사경추몽 /모든 일은 싸늘한 가을 밤 꿈에 놀다 깨는 것이니 다 잊고

東窓海月明동창해월명 /동창에 비칠 바다의 달이나 쳐다보세

淡淡西山月담담서산월 /서산에 걸친 달은 희끄무레하고

靄靄空中雲애애공중운 / 공중에 구름이 길게 뻐쳤네.

山人不畏虎산인부외호 / 산사람이 범도 두려울 것 없어

永野不庵門영야불암문 / 밤새도록 문도 닫지 않네.

 

■『玄현谷곡集집』〔詩〕 현곡 조위한(玄谷 趙緯韓, 1567~1649)

●하조대(河趙臺)

仙臺縹緲接蓬壺선대표묘접봉호 /선대는 아득하니 봉래산과 접하고

二子遐蹤問釣徒이자하종문조도 /두 아들이 멀리 와서 낚시꾼에게 물렀다.

落日獨登招海若낙일독등초해약 /해질녘에 혼자 올라 해신을 부르니

臨風長嘯響山都임풍장소향산도 /휘파람이 바람을 타니 산이 울렸다.

東南無際迷封域동남무제미봉역 /동남이 무한하니 봉역은 미혹하고

上下皆空沒宇區상하개공몰우구 /상하가 모두 비었으니 집터 잠겼네.

憐我杳然如一粟연아묘연여일속 /아득하고 멀어 내 가련하니 한 알의 좁쌀 같고

不知何處着微軀부지하처착미구 /천한 이 몸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玄현谷곡集집』卷권之지七칠[현곡 조위한(玄谷 趙緯韓)1567∼1649]

●의상대(義湘臺)

亭亭突起寺東南정정돌기사동남 /낙산사 동남에 아름답게 우뚝 솟은 곳

俯視扶桑手可探부시부상수가탐 /동해를 굽어보며 가히 손으로 더듬는다.

一色微茫天海接일색미망천해접 /일색으로 흐릿하게 하늘 바다 붙어있고

三精倒燭日星涵삼정도촉일성함 /일월성신의 빛 이 지면 해와 별이 잠긴다.

神蹤仿佛餘龍象신종방불여룡상 /신통한 자취 어렴풋이 용상이 남아있고

異事流傳記釋曇이사류전기석담 /석담부의 기록에 이상한 일이 전해진다.

何處飛來雙白鶴하처비래쌍백학 /짝을 지은 백학들은 어느곳서 날아오나

長鳴似欲挽歸驂장명사욕만귀참 /돌아가는 행차 막으려니 울음소리 길구나

 

●宋子大全卷一百六十五 / 碑

玄谷趙公神道碑銘 幷序

玄谷趙公卓詭嵬岸早歲蒙難蠖屈遭遇明時又率意言事用舍相半焉論者曰歐濮議與諸賢殊異至被彭公重繳然不以是後世少韓歐公諱緯韓字持世漢陽人其遠譜與靜庵先生同曾祖邦彥官參判祖玉縣令考揚庭不仕贈判書能以禮法治家妣韓氏某官某之女公生數歲祖母吳夫人愛其誦書朗然曰此吾耳邊絲竹也十歲作詩已有思致十有六歲徧讀先秦古文場屋屢居上游己丑丁憂才殯殮而母夫人疾革嘗泄痢又割指進血甲午喪母夫人踰禮辛丑中司馬試癸卯除重林察訪平遷至主簿監察遂登己酉第先是十餘年間倭寇猶未平嘗從金將軍德齡試軍旅事天將有愛公者公欲隨入中朝博觀天下朝中先輩知公遺落世事並與權石洲韠除官以縻之旣闡大科則光海主初卽位群小益橫以公嘗上疏訟鄭松江黃芝川也怒且忌公才抑置宂閒猶處以製敎奉命朝天畢使卽出爲北靑判官未幾罷歸無何値國舅誣獄公與諸名卿同被逮囚廢錮時廢母議張甚戊午大歸南原地有和陶辭以見志又作流民歎一篇極道人民愁苦邦家顚覆狀主見而惡之物色之不得後修光海實錄時史臣收入爲信史仁廟反正收用賢俊公自司成歷尙衣正入憲府爲掌令執義凡除拜公頗引却及被湖堂選則不復辭也公以新化擧措頗未厭人心多所爭論又駁椒親鄭百昌言雖行而上亦不悅遞正尙衣院因出守襄陽李适反領兵至京師願與王師討賊主將以文吏不許丙寅從遠接使金公瑬往迎詔使丁卯又赴寇難聞寇退解兵歸未幾罷歸敍復舊踐自是屢入筵席盡心啓沃亦論勳貴之失上將崇奉私親朝議力爭其不可公獨以爲今事與漢之定陶宋之濮園不同遂與諸公凹凸誚謗四起而公不顧也因虹變與諸僚上箚請納諫諍息聚斂去奢侈戒偏私益勵初心懋加克復上嘉納壬申由執義陞承旨有臺章上不許蓋臺臣疑公以私親議當上心也歷兵曹參知復爲承旨上疏自劾移兵曹參議自是數年之間不離政院兵禮曹丙子與政院諸僚因災異上言曰殿下誠能以至誠對越上帝以至公赫臨下土振肅頹綱激勵群工則朝廷正而人心悅天地和而災沴消政令不期擧而自擧修攘不期盡而自盡此不在殿下一念之間乎嗚呼幽獨雖深不謹則影響於外殿下旣已知之其於修身治國之道思過半矣上又善之以病辭遞虜變猝遽公以命先往江都 上改轍入御南漢城公自中路追赴不得入竄伏奔遑備經危險事定從舊職壬午特陞工曹參判 上念耆老久淹也丙戌以八袠陞資憲知中樞府事己丑正月公曰昔先君以是年棄世矣今歲行適逼我其殆乎竟以其廿一日終焉上聞驚悼停朝市祭賻皆如例三月葬于坡州七井里公俊偉雄豪眼空一世善謔以諧然又尊賢取友律己制行自有規度孝友出於天性年已耆艾語及父母必嗚咽涕下至使受業者廢蓼莪篇與兄弟大被燕嬉不忍相舍有時出入履發相從家人時失其所在疫癘死喪之威其所行人方之庾衮而有餘矣牛溪成先生嚴重莊肅然善公家行終始親愛之名公鉅卿前後擧其實行遂有棹楔之旌常有不忍之心倭寇時適見戰士無辜就戮者多以布衣請見元帥而活之爾瞻將加罪於癸丑七臣公亦就見力爲之地可比之弔豎全邦之功矣及其出身隨事納約傅以經義當宁傾聽裨益甚多惟其不立崖岸油油以相處兼且無虛口人不甚畏憚然其中自有理致聽之者多所警發蓋其意象超脫胸懷坦夷亦無屈首風塵之趣而可以遊神於事物之表者固爲諸公之所推許而其憂愛慷慨惻怛感發之誠則固非他人之所可窺測也光海時遊楓嶽夢侍宣祖大王詳陳衷曲覺吟近體一篇有萬死孤臣淚千峯獨夜心之句而枕上有斑斑處也淸陰文正公嘗爲群小所慍因倂治其儕流公聞之悲咤憂憤殆乎成病公爲文詞主於莊戰國少陵而以下則不屑也故其所作雄渾峻發如河海涵泓山岳停峙論者謂如其爲人權石洲韠嘗曰吾於詩家軌度粗有得焉而其根基恢拓氣焰盛大則何敢望某黃芝川廷彧贈公曰風霆歷覽無窮際王伯論才更著高又有天下奇男王適至之句然則公之見推於人者不止於詞藻已也嘗曰東人不喜溫公通鑑晦菴綱目是以墻面也其老年所編拔奇一書則又主於六經而下及諸子也夫人洪氏學生纘之女早沒繼娶佐郞宋耇女生二男三女長倚有文行早夭事見公祭其文次億工曹佐郞女長適尹確次適朴濰皆士人次適府使沈榥夫人性慈仁溫惠有識有行纔就姆母夫人沒執喪奉祭一如成人稍長繼母頗莊嚴以臨夫人敬謹罔懈及嫁情禮省獻久而益虔繼母晩乃感悟愛之反愈己出事公甚嚴事雖細微亡敢自遂從公出入中外數十年不以私囑干公娣姒之間亦不無難處者又能以調娛焉公官位俸祿稍隆未嘗有居積豐侈之念曰吾視向時窮陋拮据時則已多矣聞人患難疾苦爲之動心傷歎敎子女待衆妾恤窮匱皆循道理以故公至老相莊每歎以爲雖古之君子有不可及者佐郞男任重得重萬重益重女歸朴泰成金萬墡外孫曰時亨時亮尹出也曰應敎壽亮沈出也余於公未嘗納拜公以世誼寄意勤厚仍譽場屋之文余有羞澁意不敢掃門覿德今朴公世采和叔以公家狀屬以墓文余不敢以不文辭蓋悔前日之失而思贖於萬一也遂據狀第錄而因爲之說曰公以高才偉器當仁廟淸明之世特以私廟之議見疑於儕流坎坷以沒其世然此出於所見之適然而自信其心也非如嘉靖之張桂也銘曰

謂公徒是文章之士則實政可以範世而警俗謂公遭逢而利見龍飛則於進途劣容其足寔因心而爲行亦眇世而肆謔蓋卓犖而奇偉不屑於規度繩墨斯爲一世之雄豪百夫之禦特凡後之要知公者盍亦觀其述作

▣조위한 신도비명(碑銘) 번역

현곡조공신도비명 병서

현곡(玄谷) 조공(趙公, 조위한)은 행실이 탁절(卓絶)하고 우뚝 빼어나서 젊은 나이에 어려움을 당하였고, 다시 몸을 펴서 밝은 세상을 만나서도 또 뜻을 따라 일을 말하였으니, 그 용사(用捨)가 서로 반반이었다. 논자(論者)가 말하기를, “한구(韓歐)의 복의(濮議)는 여러 선현(先賢)들과 자못 달랐기 때문에 심지어 팽공(彭公)에게 무거운 탄핵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한구를 하찮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공은 휘(諱)가 위한(緯韓)이고, 자(字)는 지세(持世)이며, 본관(本貫)은 한양(漢陽)으로, 그 원대(遠代)의 계보(系譜)는 정암 선생(靜庵先生, 조광조(趙光祖))과 같다. 증조(曾祖)는 조방언(趙邦彦)으로 참판(參判)을 지냈고, 할아버지는 조옥(趙玉)으로 현령(縣令)을 지냈다. 아버지는 조양정(趙揚廷)으로 벼슬하지 않았고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예법으로 집안을 잘 다스렸다. 어머니는 한씨(韓氏)로 청안현감(淸安縣監)) 한응성(韓應星))의 딸이다.

공이 태어난 지 서너 해 되었을 때 할머니인 오부인(吳夫人)이 그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한 것을 좋아하여 말하기를, “이 소리는 내 귓가에 들리는 사죽(絲竹, 관현악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10세 때에 시를 지었는데 그 나이에 벌써 사치(思致)가 있었고, 16세 때 선진(先秦)의 고문(古文)을 두루 읽었으며, 장옥(場屋)에서 누차 상등(上等)을 차지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상(喪)을 당하여, 겨우 염빈(殮殯)을 하자마자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공은 모부인의 대변[泄痢]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고 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모부인에게 드렸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보다 더욱 슬퍼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중림 찰방(重林察訪)에 제수되었으며, 평천(平遷)하여 주부(主簿)와 감찰(監察)에 올랐고 마침내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에 앞서 10여 년 동안에 왜구(倭寇)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김덕령(金德齡) 장군을 따라 군려(軍旅)의 일을 시험하였는데, 명(明)나라 장수 중에 공을 사랑하는 자가 있어서 공은 그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천하를 두루 구경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선배(先輩)가 공이 세상일을 유락(遺落)하려는 것을 알아채고서 공을 석주(石洲) 권필(權鞸)과 함께 관직에 제수함으로써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옭아매었다.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나자 광해주(光海主)가 막 즉위하여 뭇 소인배들이 더욱 설쳐댔다. 소인배들은 공이 일찍이 상소하여 정 송강(鄭松江, 정철(鄭澈))과 황 지천(黃芝川, 황정욱(黃廷彧))을 논핵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또 공의 재주를 시기하여 용한(冗閑)한 벼슬에 억눌러 두었는데, 오히려 지제교(知製敎)를 맡는 자리에 있게 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어 명나라에 갔다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즉시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얼마 뒤에 국구(國舅)의 무옥(誣獄,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의 옥사(獄事)를 말함)을 당하여 공은 여러 명경(名卿)과 더불어 함께 감옥에 갇히어 폐고(廢錮)당하였고, 그 당시에 폐모(廢母)의 논의가 한창 거세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는 남원(南原) 땅으로 영영 돌아갔는데 도연명(陶淵明, 진대(晉代)의 은사(隱士)인 도잠(陶潛). 연명은 자(字)임)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운(和韻)하여 글을 지음으로써 자기의 뜻을 나타냈고, 또 유민탄(流民歎) 1편(篇)을 지어 인민(人民)들이 고통을 겪고 나라가 뒤엎어지려는 상황을 극력 말하니, 광해주가 그 글을 보고서 미워하여 누가 지었는지 찾아내도록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뒤에 광해(光海)의 실록(實錄)을 수찬할 때 사신(史臣)이 그 글을 거두어 넣어 신사(信史)로 삼았다.

인조[仁廟]가 반정(反正)하여 현준(賢俊)들을 수용(收用)하자 공도 사성(司成)으로부터 상의원 정(尙衣院正)을 거쳐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 장령(掌令)과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무릇 관직에 제배(除拜)될 때마다 공은 자못 핑계를 대고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서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신화(新化)의 거조(擧措)들이 자못 인심에 들어맞지 않자 공이 쟁론(爭論)한 바가 많았고 또 (인렬왕후(仁烈王后, 인조의 후비(後妃)) 한씨(韓氏)의 형부인) 초친(椒親, 왕비의 친척) 정백창(鄭百昌)을 논박(論駁)하여 그 말이 시행되었는데 임금이 또한 기뻐하지 않았으므로, 체직되어 상의원정(尙衣院正)이 되었다가 그 일로 인하여 양양수령(襄陽守令)으로 나갔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에 가서 왕사(王師)와 함께 역적을 토벌하겠다고 청원하였으나 주장(主將)이 공을 문리(文吏, 문관 출신의 수령을 말함)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는 원접사(遠接使)인 김유(金瑬)공을 따라 조사(詔使)를 영접하러 갔고,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또 구난(寇難)에 달려갔다가 노적(虜賊)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군대를 해산하여 돌아왔다. 얼마 뒤에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서용(敍用)되어 예전의 관직에 복직되었으며, 이로부터 누차 연석(筵席)에 들어가서 마음을 다하여 임금을 계옥(啓沃)하였고 또한 훈귀(勳貴)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임금이 장차 사친(私親)을 숭봉(崇奉)하려고 하니 조정 신하들의 논의가 그 불가함을 극력 쟁집(爭執)하였는데, 공은 홀로 “이번 일은 한(漢)나라의 정도왕(定陶王)이나 송(宋)나라의 복원(濮園)과는 같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제공(諸公)들과 의견이 서로 다르자 공을 비방(誹謗)하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공은 돌아보지 않았다. 홍변(虹變)으로 인하여 여러 동료들과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에게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과 취렴(聚斂)을 종식시킬 것과 사치(奢侈)를 없앨 것과 편사(偏私)를 경계할 것과 초심(初心)을 더욱 면려하여 극복하는 일에 힘쓰도록 청하자,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집의(執義)를 거쳐 승지(承旨)로 승진하였는데 대간(臺諫)의 논핵이 있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체로 대신(臺臣)이 공을 사친(私親)에 대한 논의로써 임금의 마음에 맞춘 것으로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병조참지(兵曹參知)를 거쳐 다시 승지가 되자 상소하여 자핵(自劾)하였으므로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이임(移任)되었다. 이로부터 수년 동안에 승정원과 병조, 예조를 떠나지 않았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승정원의 동료들과 함께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지성(至誠)으로써 상제(上帝)를 대하시고 지공(至公)으로써 하토(下土)에 임어(臨御)하시어 무너진 기강을 진숙(振肅)시키고 뭇 신하들을 격려(激勵)시키면, 조정이 바로 서고 인심이 기뻐하며 천지(天地)가 조화되고 재이(災異)가 사라질 것이며, 정령(政令)은 수거(修擧)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수거될 것이고, 재앙을 물리치는 일은 재앙이 없어지기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니, 이는 전하의 일념(一念) 사이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오호(嗚呼)라, 유독(幽獨)이 비록 깊지만 삼가지 않으면 밖에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곧장 드러나는 법이니, 전하께서 이미 그것을 아셨다면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방도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이 넘은 셈입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또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어 병 때문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그해 겨울에 노적(虜賊)의 변고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공은 어명을 받고 먼저 강도(江都, 강화(江華))로 갔는데, 임금이 길을 바꾸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공은 중도에서 뒤따라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적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나 숨느라고 온갖 위험을 겪었으며, 사태가 진정되자 예전의 관직에 복직되었다.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에 특명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승진하였는데, 대체로 임금께서 공이 기로(耆老)로써 오랫동안 엄체(淹滯)되어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나이가 80세가 된 까닭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 정월에 공이 말하기를, “예전에 선군(先君)께서 이해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지금 세행(歲行)이 마침 핍박하니, 나도 올해가 위태롭구나.”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그달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부음(訃音)을 듣고서 깜짝 놀라 애도하여 조시(朝市)를 정지하였고 제전(祭奠)과 부의(賻儀)를 전례(前例)에 맞게 내려 주었다. 그해 3월에 파주(坡州)의 칠정리(七井里)에 장사지냈다.

공은 사람됨이 준위(俊偉)하고 호걸스러워 안중(眼中)에 일세(一世) 사람들을 허여(許與)하지 않았으며 곧잘 우스개로 농담을 하였다. 그러나 또 현인(賢人)을 존경하고 벗을 취하는 일과 자기 몸을 닦아서 행실을 조심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그 규도(規度)가 있었다. 효성과 우애가 천성으로부터 나왔으니, 나이가 이미 노인이 된 뒤에도 얘기하다가 부모에 대한 말이 나오면 반드시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심지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육아편(蓼莪篇, 효자의 효심을 읊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임)을 폐(廢)하게 하였다. 형제들과 더불어 큰 이불을 함께 덮고 자면서 즐겁게 지냈고 차마 서로 떨어지지 못하였으며, 출입할 때에도 항상 형제들과 함께 길을 나섰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때때로 그가 있는 곳을 잃기도 하였다. 돌림병이 돌아 죽어가는 때에 공이 행한 것은 사람들이 유곤(庾袞)에게 견주어도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은 장중(莊重)하고 엄숙(嚴肅)하였으나 공의 가행(家行)을 착하게 여기어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친애하였고, 명공(名公)과 거경(巨卿)들도 전후로 공의 실행(實行)을 천거하여 마침내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항상 불인지심(不忍之心)이 있었으니, 왜구(倭寇)가 침입하였을 때 마침 전사(戰士)가 죄 없이 죽게 된 것을 보고서는 공이 포의(布衣)로써 원수(元帥)에게 뵙기를 청하여 그를 살려 준 일이 많았다. 이이첨(李爾瞻)이 장차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의 일곱 신하들에게 죄를 가하려고 할 때에도 공이 또한 그를 찾아가서 일곱 신하들을 위하여 애를 써주었으니, 이야말로 조수(弔豎)가 나라를 온전하게 한 공로에 견줄 만하였다. 급기야 출신(出身)하게 되어서는 일에 따라 납약(納約)하고 경의(經義)로써 가르치어 당저(當宁)가 귀를 기울여 들었으므로 도와준 것이 매우 많았다.

생각건대, 공은 날카롭게 애안(崖岸)을 세우지 않고 남들과 부드럽고 매끈하게 처하였으며, 또한 아울러 빈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다지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스스로 이치가 있어서 듣는 자들을 경계하고 깨우치는 것이 많았다. 대체로 그 의상(意象)이 초연(超然)하고 흉회(胸懷)가 탄이(坦夷)하여 또한 풍진(風塵)에 머리를 숙이는 취미가 없었으며, 사물(事物)의 너머에 유신(游神, 마음을 즐겁게 함)할 수 있었으므로, 진실로 제공(諸公)들에게 추허(推許)를 받았고 그 우애(友愛)가 강개(慷慨)하고 측달(惻怛)하여 감발(感發)하는 성의는 진실로 다른 사람이 엿보거나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광해(光海) 때에 풍악산(楓嶽山)에 유람하러 갔다가 꿈속에서 선조 대왕(宣祖大王)을 모시게 되었는데 자신의 진심을 상세히 진달하고서, 꿈에서 깨어난 뒤에 근체시(近體詩) 한 편(篇)을 읊었는바, “만 번 죽음을 무릅쓴 외로운 신하가 눈물을 흘리고, 일천 개 산봉우리는 홀로 밤을 지새우는 마음일세.[萬死孤臣淚 千峰獨夜心]”라는 구절이 있었고, 베개에 눈물을 흘린 얼룩이 있었다.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일찍이 뭇 소인들에게 밉보인 까닭에 그 제류(儕流)들까지 싸잡아서 다스렸는데, 공은 그 소식을 듣고서 슬프게 탄식하고 걱정하고 분개하느라고 거의 병이 날 지경이었다.

공은 문사(文詞)에 있어서는 장자(莊子), 이소(離騷), 한유(韓愈), 사마천(司馬遷), 전국책(戰國策), 소릉(少陵, 당대(唐代) 두보(杜甫)의 호)을 위주로 삼았으며 그 이하로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글들은 웅혼(雄渾)하고 준발(峻發)하여 마치 하해(河海)처럼 드넓고 산악(山岳)처럼 우뚝하였으므로, 논하는 자들은 공의 글이 그 사람 됨됨이와 같다고 말하였다. 석주(石洲) 권필(權鞸)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시가(詩家)의 궤도(軌度)에 조금 터득한 것이 있으나 그 근기(根基)가 넓고 기염(氣焰)이 성대함은 어찌 감히 조모(某, 조위한)를 따를 수 있으랴?”고 하였고,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도 공에게 시를 지어 증여하기를, “바람과 천둥을 무궁하게 겪을 때에 왕패를 논한 재주 더욱 훌륭하네.[風霆歷覽無窮際 王伯論才更着高]”라고 하였으며 또 공을 “천하의 기이한 남자 왕적이 이르렀네.[天下奇男王適至]”라고 칭찬한 싯구도 있었으니, 그렇다면 공이 남들에게 추중(推重)받은 것이 단지 사조(詞藻)에만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온공(溫公, 송대(宋代)의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과 회암(晦庵,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담장을 마주한 것과 같다.”고 하였고, 그가 노년에 편집한 ≪발기(拔奇)≫라는 책은 또 육경(六經)을 위주로 하고 아래로 제자(諸子)에게까지 언급한 것이었다.

공의 부인은 홍씨(洪氏)로 학생(學生) 홍찬(洪纘)의 딸인데 일찍 요절하였다. 계취(繼娶)는 좌랑(佐郞) 송구(宋耈)의 딸인데,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조의(趙倚)는 문학과 행실이 있었으나 요절하였으며 그에 관한 일은 공이 지은 그의 제문(祭文)에 보인다. 차남은 조억(趙億)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이다. 장녀는 윤확(尹確)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박유(朴濰)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막내딸은 부사(府使) 심황(沈榥)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성품이 인자(仁慈)하고 온혜(溫惠)하였으며 식견도 있고 행실도 있었다. 부인은 겨우 유모(乳母)에게 나아갈 나이에 모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상례를 치르고 제사를 모시는 일을 모두 어른처럼 해내었고, 조금 자라서는 계모(繼母)가 자못 장엄(莊嚴)하게 대하였으나 부인은 공경하고 조심하면서 게으르지 않았으며, 시집을 와서도 정성과 예절로써 살피고 모시어 오래 지날수록 더욱 경건하게 하였으므로, 계모도 만년에야 느껴 깨닫고서 도리어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욱 부인을 사랑하였다. 부인은 공을 섬김에 있어서도 매우 엄격하여 일이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감히 자신이 나서서 해버린 적이 없었으며, 공을 따라 중외(中外)에 출입한 지 수십 년 동안에 공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않았고 시누이와 동서 사이에도 또한 난처한 일이 없지 않았으나 또 능히 조정(調停)하여 즐겁게 지냈다. 공의 관위(官位)와 봉록(俸祿)이 조금 높아지더라도 재물을 쌓아 풍요롭고 사치하려는 마음을 한 번도 갖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지난날에 궁색하고 가난하게 살 때와 비하면 이것도 이미 많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환난(患難)과 질고(疾苦)를 들으면 그들을 위하여 마음으로 놀라며 가슴 아파하고 한탄하였다. 자녀를 가르치고 중첩(衆妾)들을 상대하고 궁색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들을 모두 도리에 따랐으니, 이 때문에 공이 늙어서까지 서로 공경하면서 매양 탄식하기를, “비록 옛날의 군자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좌랑(佐郞) 조억(趙億)의 아들은 조임중(趙任重), 조득중(趙得重), 조만중(趙萬重), 조익중(趙益重)이고, 딸은 박태성(朴泰成)과 김만선(金萬墡)에게 시집갔다. 외손(外孫) 중에 윤시량(尹時亨)과 윤시양(尹時亮)은 윤확의 소생이고, 응교(應敎) 심수량(沈壽亮)은 심황의 소생이다.

나는 공을 찾아뵌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공이 세의(世誼)로써 나에게 근후(勤厚)하게 뜻을 부치었고 이어 내가 장옥(場屋)에서 지은 글을 칭찬하였는데,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감히 공의 집에 찾아가 덕(德)을 바라보지 못하였다. 지금 박세채(朴世采) 화숙(和叔) 공이 공의 가장(家狀)으로써 나에게 묘문(墓文)을 부탁하였는데,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었다. 대체로 그 까닭은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만분의 일이라도 속죄(贖罪)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가장을 토대로 하여 차례대로 기록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공은 높은 재주와 훌륭한 기도(器度)로써 인묘(仁廟, 인조)의 청명(淸明)한 세상을 당하여 다만 사묘(私廟)에 대한 논의 때문에 제류(儕流)들에게 의심을 받고 불우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것은 그 소견이 때마침 그러하여 그 마음에 자신(自信)한 것에서 나온 일이었으니, 가정(嘉靖) 연간의 장계(張桂)와는 같지 않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謂公徒是文章之士 /

공이 한갓 문장을 잘한 선비라고 말한다면,

則實政可以範世而警俗 /

실제의 정사가 세상에 모범이 되고 세속을 깨우칠 만하였고,

謂公遭逢而利見龍飛 /

공이 시대를 잘 만나서 용이 날아오른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則於進途劣容其足 /

진도(進途)에는 그 발을 집어넣는 것이 졸렬하였네.

寔因心而爲行 /

진실로 마음을 인하여 행동을 하였고,

亦眇世而肆謔 /

또한 세상을 흘겨보아 거침없이 농담하였네.

蓋卓犖而奇偉 /

대체로 탁월하고 기위(奇偉)하여

不屑於規度繩墨 /

규도(規度)와 승묵(繩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네.

斯爲一世之雄豪 /

이야말로 일세(一世)의 웅호(雄豪)이고

百夫之禦特 /

백부(百夫) 중에 뛰어난 인물일세.

凡後之要知公者 /

후세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盍亦觀其述作 /

어찌 그가 지은 글을 살펴보지 않겠는가?

우암 송시열 지음.

 

♥묘소 : 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산 75-23번지

37°53'44.1"N 126°46'29.7"E

♥묘소 : 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산 75-23번지

♥묘소 : 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산 75-23번지

♥묘소 : 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산 75-23번지

♥묘소 : 경기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산 75-23번지

●南溪先生朴文純公文外集卷第十五 / 行狀

▣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狀代趙南平作○癸卯六月二十二日

(※趙南平는 실제 족보에는 없는 인물임!)

本貫漢陽郡曾祖諱邦彥禮曹參判妣貞夫人魯氏祖諱玉綾城縣令贈吏曹參判妣贈貞夫人奇氏吳氏考諱楊庭贈吏曹判書妣贈貞夫人韓氏公諱緯韓字持世初名紹韓後改今名而持世卽牛溪先生所命也自號玄谷一號素翁本高麗僉議中書事諱之壽之後再世而有諱良琪年十三襲爵雙城摠管嘗討哈丹獻俘于元大爲世祖所奬賜錦袍玉帶又三世而有諱溫入我朝事太祖太宗錄開國定社佐命功臣官至議政府左贊成事漢川府院君贈諡良節公又三世而有諱壽昌護軍 贈戶曹參判實公高祖也參判公故爲中宗朝名臣綾城公以文學節槩聞當世不幸坎壈蚤卒判書公屢屈公車晩以詩酒自娛有四丈夫子訓迪甚嚴家法少長日必晨興盥櫛拜謁唯謹有少失儀則公輒不降色其他多類此以故諸子擧能銜訓懋學卒有所成就公於兄弟爲叔以隆慶元年丁卯七月戊寅生生稟秀異已有出群之氣甫數歲受學文理大闡誦讀琅然吳夫人素鍾愛必引置左右曰此吾耳邊絲竹也萬曆丁丑遘癘疾幾危而甦作詩送判書公所辭語懇惻出於自然人尤異焉比十五六歲已誦諸經遍覽先秦古文聲譽蔚然自是數歲以後屢魁試屋己丑丁外艱旣殯韓夫人患痢公迎醫診視侍藥晝夜不解帶醫言當嘗糞以驗差劇公如其言疾愈甚乃斷手指調藥以進數日遂瘳甲午丁內艱間嘗流寓湖南屬倭寇未靖邊陲用兵公遂從義兵將金德齡陣中又及天朝將士遊欲入江浙間放跡不果辛丑始中司馬試癸卯拜重林察訪公少與石洲權公才名相埓蓋自辛壬禍亂憂傷發憤傲視當世月汀尹公根壽素知其意幷除權公敎官使少降其守云丙午調繕工監直長丁未春旱甚宣廟下敎求言公上疏大抵以伸雪冤枉爲消弭之道略曰自殿下中興以來庶政日新與國更始不念舊惡而況此遇災之日所當洞開獄門銷融罪籍使刑餘之喘絏縲之徒亡不遍被聖澤普回天怒而奈何綸音纔下有司弄法以雷雨渙沛之典爲市恩鬻權之地此豈天地好生之心帝王赦過之德哉今之抱冤之臣不可一二遍擧而姑以最痛冤者言之成渾林泉抱病篤學自修本不嬰情於世事而不幸爲時論所中反覆顚沛至蒙以無據之罪鄭澈剛方疾惡斷無他腸按獄之際雖或有所差失而討逆之罪反深於爲逆之律此則其人與骨皆已朽矣而名猶存於丹籍目不瞑於黃泉冤枉之極孰有加於此乎至於黃廷彧父子流離陷賊保護王子險阻艱難終始一心而不圖爲宿嫌所中枉加臣子亡窮之惡受刑竄謫已過十四年之久尙在覆益之下不得共列於疏放惟臣妄意旱魃爲虐未必非此人之冤氣爲祟也臣目覩冤枉不知忌諱論別是非觸犯天威衷情所激言不知裁伏乞聖慈天地父母快釋此三臣者上答天譴下洩幽冤則霖雨之滂沱豈特千里而國家億萬年無彊之休殆基於此矣冬陞南部主簿未幾遷司憲府監察己酉登增廣殿試第二名拜成均館典籍移工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庚戌陞禮曹正郞知製敎秋充謝恩使書狀官如京師翌年春復命尋除北靑判官蓋爲群小所忌也壬子罷歸亡何延興獄起時賊臣爾瞻將廢 母后以國舅爲禍本誘怵武人鄭浹歷擧一時巨公名臣盡之一網公與諸公遂被逮居數日而釋自此禁錮戊午捲家還南原有終焉之計復次淵明歸去來辭以見志其辭曰歸去來兮世不我知可以歸自古不遇者非一吾何爲乎傷悲仰孤雲之高標邈淸風之難追瞻頭流之幽邃絶人間之是非催潘岳之秋興拂張翰之征衣涉漢水之浩洋辭終南之翠微浩然而歸策馬南奔朝發京華夕至衡門玉堂金馬非我思存可以供老樂我瓢尊念疇昔之嬰禍羌魄悸而汗顏食同魚而滅耳豈人心之所安饕薄祿而營生縱驅命之所關較得失於平生盍遐擧而大觀矧年老而多病可卷懷而求還世雖棄乎君平道卽存於蜺桓歸去來兮聊卒歲而優游臥一壑之煙霞竟何慕而何求當梁肉於晩食替榮華於無憂古人先我而實獲欽往迹而爲疇顏闔鑿坏管寧浮舟或潛身於滄海或絶響於林丘雖出處之異路蓋明哲之同流顧余志之異是但有意於歸休已矣乎人生富貴在何時歲月如流不可留吁嗟乎舍此將安之唐虞不復見巢許非所期甘終身而倘佯趁春耕而夏耔遡長風而放歌迎素月而哦詩旣得所而定居肯從詹尹決所疑及目見賦役煩重餓孚載塗乃以俗諺作流民歎辭意悲惋曲盡情態一時膾炙見者欲涔然泣下以此流入宮中至於光海使人物色中外幾不免奇禍後當修史白江李公特爲採見其事云至天啓癸亥仁祖反正收召屛黜拜成均館司成命太學士申公欽別選知製敎將置湖堂儲養之地公亦與焉移尙衣院正司憲府掌令陞拜執義兼春秋館編修官會闕中因宮人徐氏有交通外人之迹仁城君珙驕恣無狀又與監察爭馳道詆憲府醜甚公慮新化椒禁不嚴王子已橫首論之時當鼎革民初聞蠲戶役罷內司無不懽忭而旋有徵督之擧加以號牌抄軍管餉一時並行怨咎漸興自元惡腹心長第受誅政刑已正而好峻議者毋論䝱從失志之徒一切繩以重律且逆獄繼起人心尤疑懼不定公以爲今日之議當待民優恤用法寬輕包容鎭定以收人心以定國勢繇此公在憲府數月所駁爭率持是意不變秋鄭百昌察貢士於忠淸左道處事失宜以致罷場而京試亦有擧子不持講帖者議者將論其事公啓言國家待儒生本宜示以優容之道況乃犯法者至尠抱冤者甚多而渾被削榜恐其益失士心也因論百昌之失曰臣等請罷試官以慰多士而殿下終不聽焉殿下之心出於至公臣實知之若遠方儒士不曉以爲百昌殿下椒掖之臣必乃以此有所顧藉此甚不幸也今見宋海等疏其言苟涉誣罔則已萬一近似百昌之罪惡得薄乎 上始罷百昌職而兼指公爲苟且之論矣遞拜尙衣院正俄除襄陽都護府使憲府論遞數日而止蓋坐前事也公在郡數歲政淸訟息一境安堵又留意於興學育才親自訓課勤至又立考試法別置學田以勵之文風自此稍振丙寅翰林檢討姜曰廣給事中王夢尹頒詔東來遠接使金公瑬啓公優有華國手請以製述官帶職往還公至都隨迓詔使于關西丁卯虜寇至公領郡兵星夜赴難比聞行在議和同諸路罷歸崇禎戊辰病重不赴試官監司李顯英啓罷之未幾敍拜掌樂院正遷承文院判校選拜弘文館副校理改尙衣院正尋復拜副校理自是數歲昵侍經幄討論文義殆無虛月裨益弘多嘗因講書經至嗚呼曷歸進曰此章所說雖千載之下可以隕淚人君若失人心而至於蹙蹙靡騁則更何及哉此殿下所當戒者也我國田賦頗輕而獨軍布極爲煩重故至有散而之四方者非特使民室廬蕭條田疇荒頓甚則生子棄而不擧推此以往可知其愁怨之情也凡徵價布本爲分給捧足而三人所出堇及一人臣意姑罷此法使四人輪回立番庶無偏苦之患上曰初爲游兵之多以有徵布其弊終至於此公曰此非國制爲然實梁淵判兵曹時所創也且聞本曹胥徒多至數十百人廩食甚多以浚血剝膚之資而卒用飽養此輩尤可痛心久之移司諫院司諫還拜校理一日講至皇天眷佑有商俾嗣王克終厥德傳曰蓋天命眷商陰誘其衷故嗣王能終其德進曰蔡氏此註恐未安夫太甲於桐處仁遷義者專由伊尹匡救之力尹乃不敢自以爲功歸之皇天所以示勸戒之意也今不及此義而只有云云是人之遷善改過不在用力之如何而必待天誘其衷然後克從厥德不幾於使世主皆曰我生不有命在天作善作惡皆上帝之所畀而無意克己悔過者乎皇天無親克敬惟親人君若恐懼修省則天必眷佑若怠慢暴棄則天必厭斁豈有無道之君而可得陰誘其衷之理上亟然之其高識類此時議以崔公鳴吉爲進賀使蓋泛海之役也延平府院君李貴進曰此事甚無謂蔑待勳臣如此故屢致逆變若不倚重勳臣則外戚宦官孰不可倚重公駁曰貴之言過矣勳臣雖可倚重凡立殿下之朝者其忠君憂國之誠豈下於此輩而必以是爲言邪且外戚宦官之說尤不敢出諸口者也貴瞿然稱謝因講接下思恭進曰向日臨筵自上有狗彘之敎事甚未安今見此語人君待下之道不可如是慢侮者其意益明白矣唯上留念焉上曰爾言甚當蓋欲言不公之事而致有此失不勝赧然先是金公堉以阻金世濂銓郞被罪李貴又爲論救甚力上乃敎以同黨雖若狗彘薦之猶恐不及異己者雖有可用之才擯棄如遺故公於是及焉嘗進曰近者臨筵自上務爲淵默使下情不能上達然則臣等雖欲畢忠盡言於前而其道末由此匹夫匹婦所以不獲自盡者也又曰人君苟能安不忘危以圖其始則豈有亡國之理乎詩曰靡不有初鮮克有終此在恒人猶以爲難況人君耶殿下臨御以來將至十年雖無大段隳失而若復恐懼兢業虛心納諫得賢制治則善矣反復不已上皆深謝之後値講丕平富公進曰夫民者國之根本而必欲使斯民丕平富聖人爲國之道也今日國家所以民窮財匱一至於此者良由奢侈之習漸甚衣服飮食務極豐美故也至於市井則皆以文錦爲袴而法司不能禁豈不寒心若殿下能從儉約則此弊不患不祛矣臣聞勝國之末此習亦甚我太宗大王問祛弊之道於黃喜對曰自 上不御錦繡小臣亦着木綿此習當自止也累世傳爲美談惟殿下察焉上甚然之公久在詞掖應製館課屢居魁褒賞至是天朝逆帥劉興治擅殺都督陳繼盛朝廷方議進討椵島上命公製進檄文辭甚嚴厲有曰三軍錯愕血濺宋義之頭絶嶼蒼茫悲甚田橫之客世爭傳誦歷執義判校成均館直講尙衣院正復拜判校辛未以推考敬差官赴湖南冬兼侍講院輔德拜修撰轉校理會以啓覆入侍時鍾城人羅守男等有越境殺人攘奪之罪上以此問左右公進曰虜賊方欲敗盟若以此執言生釁其禍無窮昔者兩女爭桑尙爲吳楚興兵之端況此人所犯於法罔赦者乎宜正其罪以杜後患上從之 章陵禮議十年未決擧朝力爭以爲不可行公素於此議意見有異實難苟合故曾在癸亥初與朴潛冶知誠論辨相符久而無所變者蓋謂仁祖旣非以旁支入承大統如定陶濮國故事則不可稱叔又不可別廟故也至是玉堂當陳箚請 止追崇而公適在直無可代者不得已略陳不敢強屈素見以循時論之意因請罷免上優旨不許會有白虹貫日之變公偕同僚上箚請納諫爭息聚斂祛奢侈愼偏私益勵初心懋加克復上嘉納壬申復由執義陞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諫院以公前辭校理時疏意有涉干幸論罷批曰形諸文字希冀恩澤雖趨附時論圖占美爵者猶所不爲爾等勿以此致疑於此人遞歷兵曹參知拜右副承旨上疏辭略曰臣愚不識忌諱動輒得咎欲爲盡禮人以爲諂衆訽漂山式月逢彈臣旣得罪於時論欲加之罪何患無辭而橫駕汙衊於無情文字之間雖欲彊顏冒恥出謝新 其於物議何其於廉隅何臣在玉堂時偶閱唐人辭職表有曰年迫懸車位纔執戟臣愛其對精巧剽竊引用於乞解之章若曰古今異宜如此侈曼之語何敢塵瀆於君父云則臣亦何言至於駁之以幸恩干澤臣之冤抑次於骨髓是將愈久而愈深矣臣讀書五十年尙未解蒙曾不省八字之中含蓄許多意思而誤爲使事臣之瞢闇無識至此尤極也上優旨不許吏判李公貴亦上箚伸救未幾遷兵曹參知陞參議尋以立馬見頉奪告身乙亥敍拜左副承旨陞右承旨歷禮曹參議丙子復移左副承旨時有雷雨之變公偕同僚啓陳消弭之策略曰殿下誠能奮發爲大警動大振作之擧無事文具無事末節以至誠對越以至公赫臨振肅頹綱激勵群工則朝廷正而人心悅天地和而災沴消政令不期擧而自擧修攘不期盡而自盡此不在殿下一念修省之間乎嗚呼幽獨雖深不謹則影殿下旣已知之其於修身治國之道思過半矣上嘉納病辭遞冬虜報猝急上預命朝臣之老病者先往江都蓋以 大駕將幸彼故也公行到安山聞上已回向南漢山城卽以單騎追至南門爲伏兵所阻又與沈參議之源數人再進東門而不利仍痛哭奔竄欲由海道復入江都會値其陷敗遂止亂平奔問于京城自是數歲累拜承旨刑工禮三曹參議壬午特命陞拜嘉善大夫工曹參判蓋公久在玉堂銀臺恩遇備至至是上念公年踰耆艾尙勤職事不憚劇易故有是除乙酉轉禮曹參判翌年光海君卒于濟州公職當泛海護喪事西歸朝議以爲此役甚巨不可煩耆宿遂啓遞之秋以壽登八帙命陞資憲階遂入耆老社丁亥拜知中樞府事嘗曰往在己丑吾喪嚴君今歲行在此吾其殆乎竟以己丑正月二十一日疾終于正寢訃聞上驚悼命輟朝市賜祭賻並如例以是年三月二十七日葬于坡州津村七井里坤坐艮向之原公性資直亮而孝友出天風流篤厚而氣槩邁世旣以博聞多藝早有聲名而又能尋師取友備識大義貞確之操久著於昏亂之朝廉謹之節不間於衰晩之日蓋其義雖切於徇國奉公而顧其趣常在於湖山花鳥之外也平生處心行事以直情不欺爲本持論以平易明白爲準其在見守所到雖被挫揠淪斥無所回撓是以立朝論議雖與世時有牴牾而君子不以此病公若其嫺飾設爲名高者則公亦未嘗以爲屑也少事父母愛敬俱至愼終追遠誠禮無違每授門生詩經至蓼莪篇反復再三實有不忍讀者是以請業者廢其篇以爲常逮于晩歲語及兩親悲傷感歎不覺泣下沾襟因誦姜晉山希孟送曹大虛序中數語嗚咽久之誠可謂耆耋而爲嬰兒慕者也己丑喪中以指血己韓夫人疾厥後月汀公在同里聞之以其實狀轉報禮曹至孝宗時又因李公景奭具列于朝遂命掉楔其門兄弟四人自爲知己昕夕相樂情愛藹然死喪之畏哀戚殊至季氏玄洲公常自湖南赴試至都猝遘疾甚異欲歸而難於獨行公聞其意立與南轅往返千里殆周數月時公夫人在高陽田舍堇一舍而近實未知有行也癸丑仲兄僉知公與夫人患唐疫疾革方毒氣流行遘之者輒底死亡故親戚莫敢顧視公身爲救護其疾晝夜不懈及並不幸手執殯斂誠禮益備時毋論同室比隣率被其傳染而獨公終始得免人咸異之以爲庾衮不啻也其友愛之隆如此當拆產公慮老姊貧窶無依特以所當得者推與之亡所吝僉知公身後只有一孫遭丙子之亂爲賊兵所掠公聞之悲痛甚切卽走僕虜中捐重金求索竟不得只買其妹而歸公終身以爲恨其訓子弟率循先法如見小失必擧古今臧否法家遺事以爲勸戒其同宗之在外者造請千謁戶屨常滿其待之疏戚遠近無不各得其意公素忠厚坦易綽有前輩長者之風人有篤行高才未嘗不咨嗟賞譽猶不及至於窮鄕晩生苟有質問則輒誠心誘掖多至成名若夫州縣疵政同朝過失則罕爲稱說如有所恥然其是非黑白辨於心者蓋晢然也少時不羈旣而通達世情不欲爲崖異又善諧謔其所言雖若出於戲嬉而莫不各有理致聽者解頤故或觸忌諱人亦不怨也其氣象高邁胸懷恢蕩本無屈首風塵之趣而可以遊神於八極之表者固爲諸公所推許然其戀主急難感奮跌宕之意隨事發見常遊楓岳夢宣廟爲說衷曲甚詳覺而於悒枕上淚痕猶班班也公感作一詩曰暮宿吉祥寺雲山深復深飛湍豗大壑落月隱西岑萬死孤臣淚千峯獨夜心無端憶君夢驚斷曉鍾音蓋其時適當昏亂豈亦有所相感而然耶癸巳適聞戰士八九人無辜將騈首就戮公時以布衣在帶方卽見元師權公慄以解之八九人遂得不死丁巳之禍爾瞻將復罪受遺諸臣會公與縱臾者邂逅遂力爲之緩頰已而訪玄軒申公柳川韓公於郊外申公迎謂公曰吾聞公近所爲殆所謂爲人排患釋難解紛而無取者也公其爲今日之魯仲連乎韓公亦深自致謝不已讀書至忠臣烈士遇難慷慨舍生取義與夫奇釁險阻抱冤莫伸者輒三復悲歎至如賢邪進退之機憂傷感激義形于色嘗於戊寅年間群小惎淸陰金文正公甚公聞之悲吒不豫者累日公於文章自未成童業已誦習經籍淹通子史復從佛頂洪老人至誠屢質肯綮多所解悟弱冠所取友如鳴皐任公竹窓具公石洲權公東岳李公體素李公皆與之磨礲浸灌揚扢今古赤幟詞林自此聞見日博結纂益精於書好讀南華戰國離騷昌黎至如司馬氏少陵尤所服膺而不舍故其所樹立雄渾峻發如河海涵泓山岳停峙行其所無事而出之不窮論者以爲其氣酷類之云至於博士家業尤稱典雅時承隆萬升平文學英俊林立然每値公入禮圍同試者微視公操觚行墨沛然無不嚴憚之而及拆號公名常占其首及文出章甫多取以爲法黃公廷彧尹公根壽崔公岦俱愛公才稱爲後來巨擘黃公贈公詩曰風霆歷覽無窮際王伯論才更著高又曰天下奇男王適至人間仙客李膺來然則其所推非止爲詞藻已也石洲公嘗與黃公語黃公曰君平生自視與某甫何如權公曰鞸區區所自奇者特於作詩軌度有小見得耳若其根基恢拓氣燄盛大稱其家數者何敢望某甫黃公亟然之曰老夫恐後之篤論者將以此掩君詩名也平生手不釋卷又能強記及至晩歲慮精力未逮爲編一書曰古文拔奇蓋自易經以下中採左國莊騷以至呂氏博義幾十數家常置几案點閱不住尤喜看溫公資治晦翁綱目雖到耆耋而猶然也文集十四卷行于世少而有志於學壬辰亂後訪牛溪成先生公於流離中往返請問者蓋屢矣而先生答書亦勖以勉學擇友未幾易簣其在帶方與崔石溪命龍友善往還講論久而無斁至於沙溪金公自少從遊每稱其忠信好學實有前賢未易及者嘗以兄禮事之而金公亦加愛重到經義難解處必以咨詢歸正焉公在阨窮金公或守外郡謂公盍以物納官取直少濟其急公辭謝不敢金公曰此特與官家交易耳非有甚害於義也其情摯類此朴公知誡與之同閈見其稚年志學後頗稱賞及癸亥禮議所見相合以此至蒙世之訕訾而不恤也公雖雅以文章名世寓言老莊若其所志顧跂慕者深在於爲己之學故旣以忠孝自厲而復以禮法訓家樂善愛士老而冞深其果騷人逸士脫略名敎詆排儒學者所趣異矣素善梧陰尹文靖公白沙李文忠公俱見以國士待之及白沙謫圽北靑公以二詩哭之語甚悲惋李公榮元林公懽及其弟㤞宋公邦祚李公命後或以同學或以氣節相結平生交誼甚篤無愧古人其他知舊遊好俱一時名勝雖至白首存沒未有一人相失者若其救菑恤患急人之義雖當時諸公皆自謂不及也光海旣廢母后公卽南歸築室于蓼水之上日與一二故人賦詩觴詠翛然與世相忘其所以潔身遠遯婆娑丘園以待淸明所操者審矣居家衣服飮食一任家人所給不復點檢若其遭亂流徙飢寒困苦人所不堪而處之晏如朝天之日以太僕恩賜盡買書籍已無他溷也其罷官而歸行橐無所嬴其周流諸曹只仰食俸祿之入而一切世俗生產宂瑣非唯不爲抑亦內絶其心也雖及暮歲率是無變一室蕭然凝塵滿席而已子卯之變公在東郡聞難首諸州勤王至丙子仁祖遽入南漢公狼狽道路慟哭抆血誓死從駕悲動傍人其立朝所言如恤民祛奢推誠愼終略具於前而至論兵制則欲分農戰論學校則欲加勸課論法祖則請以 仁廟爲師論治道則又謂當隨時損益以救其弊不可徒守舊法推其所知無不羅列陳白冀動主聽其當官奉公以勤愼二字爲主司無誤事人無汙舌夙夜之勞每以身先燥濕之際一無所擇世以爲難性好山水少與諸公詩酒游戲於西湖以爲樂也及罹癸丑之禍東遊楓岳極幽妙奇詭之觀未幾南歸登頭流山訪孤雲遺跡以散其湮鬱不平之氣繼而佩符襄陽日探嶺海之勝至是詞句益妙氣韻愈雄蓋亦所謂得江山之助者也晩歲酷好菊花遍求諸種用意栽培常到九秋以後欲使一庭渾然成金海且作石假山雜植花卉四時紅碧相映幷於堂傍引水爲方塘常偃仰其間以寓臥遊之意至或諷詠終夕時時慷慨曼聲爲悲歌數闋聲調高朗辭氣激烈蓋時丁變故公亦老羸暇退不復有意於當世欲以此自悅而終其天年然則其地偏心遠微意可知矣最公生當宣廟盛際未及通顯晩始釋褐而値光海昏亂禁錮流遯殆十數年至于仁祖更化首被召用屢遷臺憲似若可以有爲者又與時論相左斥補外郡後雖出入經幄而公年已至遭罹兵亂懷思就閒矣天之畀公固不可謂不美而用非其才位未充其德豈所謂時命之不諧耶痛矣痛矣公娶南陽洪氏學生纉之女以萬曆乙酉歸于公後十三歲丁酉卒贈貞夫人葬于高陽城山先壟下甲坐庚向之原生一女壬辰之亂夭死無他子繼娶鎭川宋氏佐郞耇之女以萬曆庚子歸于公後四十六歲崇禎乙酉卒封貞夫人葬于坡州公墓之後夫人性慈仁溫惠有識有行纔就姆母尹夫人歿夫人執喪奉祭一如成人稍長繼母崔夫人頗嚴莊以臨夫人事之敬謹罔懈及嫁情禮省獻久而益虔無一不本於衷者崔夫人晩乃感悟愛之反愈已出事公甚嚴事雖微細亡敢自遂其意從公出入中外數十年不以私囑干公爲夫子羞娣姒之間亦有相責望妨礙之端夫人處之尤以和順無拂卒見解釋公之未達也其窮陋亡狀夫人左右拮据奉君子育幼稚無甚闕逮乎官位俸祿稍隆其衣食亦務爲儉約未嘗有居積豐侈之念曰吾視向時豈不大奢乎如珍寶玩物婦人所好弄者夫人視之與布菽日用無異也其不惑異物如此其泛愛惻怛迥出常倫聞人患難疾苦爲之動心傷歎敎子女不置或勸課學業或戒奢侈遵禮度靡有不至待衆妾非但不加色辭久則恩禮無間咸欲感戴御臧獲優其恩而約責其功雖有罪過輒以溫辭諭之俾有所改公與夫人至老相莊每歎夫人賢以爲雖古之君子有不可及者生二男三女男長倚有文行年堇十六而夭事見公祭文次億工曹佐郞女長適士人尹確次適士人朴濰次適鍾城府使沈榥億娶大司憲李楘女生四男二女長任重次得重次萬重次益重女長適幼學朴泰成次適生員金萬墡尹確生二男二女男長時亨次時亮女長適士人李攀龍次適士人李厚遠朴濰早卒無子沈榥生一男一女男壽亮女適幼學李泰朝嗚呼公之言行本多可擧而其遡靖社已上非億所及者雖由此以降進而經席敷奏臺省言議固不遑細聞若其家庭所覩記亦豈無一二可采者而億又不敏不足以深識之也日月逾逝而事蹟逾就微昧爲是大懼謹以家譜所錄幷考文集掇其平生志行之大略有所敍次間或自知其不敢僭論而亦不敢不詳書以備財幸總之所謂掛一而漏萬者不孝之罪誠難逃避惟望當世立言之君子俯賜矜察闡發幽光具載豐碑以賁泉塗云爾不肖孤億泣血謹狀

[-D001] 蜺桓:鯢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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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浦渚先生集卷之一 / 詩○挽詞 六十三首

趙知事緯韓挽

自獲肩隨後如今四十年淸談思宿昔離闊隔山川及此桑楡暮何知霧露先可嗟那復見徒爾涕漣漣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2

 

■南溪先生朴文純公文續集卷第二十二 / 墓表

知中樞玄谷先生趙公墓表 八月十七日

皇朝自弘正之際文道再興北地爲之首駸駸東漸于海外至我宣祖時詩有芝川黃公專學杜詩文有月汀尹公倡崇馬史寔爲同文之化其能游二公門特被奬許又與石洲東岳諸公結詩杜以鳴國家之盛者故知樞玄谷先生趙公是已公諱緯漢字持世漢陽府人高麗摠管良琪之後逮我朝襄烈公諱仁璧良節公諱溫並以隱德大勳顯曾祖諱邦彥參判祖諱玉縣令贈參判考諱楊庭贈判書妣淸州韓氏生公於隆慶丁卯天性篤考母夫人疾革出指血以進之遂愈比喪孺慕益至詞業蚤成顧多厄于有司萬曆辛丑始登上庠年已三十五歲尋除重林督郵陞少府監直長値上因天災求言乃上疏訟牛溪成先生松江鄭公洎芝川公冤時議韙之陞至殿中御史光海初載中文科第二名旋授國子監職再轉禮部郞中贊价朝京師還通判北靑府時賊臣爾贍導主惡將廢母后先起國舅大獄舊臣鉅公幾無脫者公亦遭鄭浹誣下吏俄釋禁錮之數歲大歸南原之蓼川築室爲終焉計嘯詠山水間天啓三年仁祖靖社起拜司成兼知製敎再遷爲掌令陞中丞首論宮掖宗室越法之罪無何因事出知襄陽府會帥适叛公得報忠義舊發卽督府兵赴難爲諸道倡旣而檢討姜曰廣給事中王夢尹奉詔至差製述官迓于境明年丁卯建州虜東創復率兵入覲崇禎建元遞拜掌樂正選入玉堂爲副校理校理修撰自是不離經幄者累歲裨益甚多間歷司諫兼春坊輔德復由中丞超拜銀臺同副承旨値時議齮齕力辭不許李忠定公貴亦上章直之歷禮兵諸部右侍郞拜左副承旨會朝廷斥虜和因天災陳啓極言修省之道嘉納是冬虜再創承敎先向江都聞上改幸南漢城衝賊陣入覲不得達亂平奔問復歷銀臺及諸部久之擢拜工部左侍郞轉移禮部尋以壽秩陞知中樞府事入耆老社卒于己丑正月二十一日壽八十有三命輟朝賜祭公天資直亮風流篤厚平生自樹於忠孝大節濟以素履貞潔卓偉言行去取未嘗苟合雖見挫揠淪斥而不悔視世嫺飾者蔑如也與兄弟友愛季弟玄洲公嘗自湖南至京道病公察其不能獨歸立共南駕幾數千里家人猶不知也仲氏夫婦患毒疫繼亡公至誠救護比不幸仍手爲殯斂而終無它聞者異之處朋友信而義白首存沒未有相失者光海時同禍諸公將罹竄謫乃銳爲求解不憚險艱至後金文正公尙憲被群奸搆捏益加憂憤義形于色惟其才高氣豪俯視濁俗常有超世軼塵之志白沙李文忠玄軒申文貞二公每以國士待之其爲文章旣致力於龍門少陵又酷好南華國策昌黎諸大家以溯六經百氏亡不浸淫咀嚼是故其所成就雄渾奇峻如海岳渟峙出之不窮要其韻格綽有升平前輩之風非可以操觚小家論或謂石洲讓其氣東岳讓其文識者以爲知言也少志于學嘗於壬辰亂後訪牛溪先生往返請問先生亦重之與金沙溪長生朴潛冶知誠相善慕許特至樂義好禮老而不舍此又豈一時文苑諸賢所能得者耶嗚呼盛哉初月汀公以公孝行聞於朝至孝宗時因李公景奭申白命棹楔其門有詩文幾卷行於世公凡再娶前爲南陽洪氏纉宗之女後爲鎭川宋氏佐郞耇之女婦德甚備皆先卒宋氏生二子長倚有文行蚤夭次億郡守三女適尹確朴濰沈榥承旨內外孫曾總如干人世采幼出繼公壻朴公鞠于公家殆十餘年常侍筆硏後雖不免歸宗愈切感慕顧其盛業卓行不可泯沒于後茲以公孫得重請掇其大略俾刻之墓石少效區區平日之忱云歲玄默涒灘八月甲午門下小子潘南朴世采謹述

 

 

■南溪先生朴文純公文續集卷第二十二 / 行狀

養妣孺人趙氏行狀 癸酉六月十一日

孺人姓趙氏其先漢陽府人有諱良琪年十三討哈丹獻俘於元世祖賜錦袍玉帶以奬東人至今道之不衰至襄烈公諱仁璧良節公諱溫父子當勝國革除之際或處或出各行其志名德勳閥並爲世稱焉曾祖諱玉縣令贈參判以節行聞祖諱揚庭不仕贈判書考諱緯韓知中樞文章行誼有大名于宣仁兩朝妣鎭川宋氏佐郞諱耇之女婦德甚備孺人以萬曆己酉正月二十一日生幼已端莊貞淑有絶人之姿知樞公鍾愛之甫數歲承事父母無違則發言處事動出意表時孺人弟倚亦夙悟善學知樞公訓以經史諸書孺人從旁誦習不學而能盡通大義知樞公尤奇之選所以宜配者乃以甲子冬歸于觀海公實爲潘南大族會知樞公方守襄陽府而舅錦溪公坐事流竄于康津遂行禮於府衙內外儷美一府交賀明年乙丑姑閔夫人歿于謫所孺人自東府千里赴喪仍下湖南見于錦溪公哀誠並盡無不中度錦溪公書報知樞公曰今此佳婦姸靜穎秀益恨不得使逝者及見也又明年丙寅觀海公遘疾日谻竟卒于廬次孺人號天哭擗痛不獨全水漿罕入於口所以致毀傷生者甚棘而幸無他從喪營葬于坡州閔夫人壟下又明年丁卯綿溪公量移于扶安旣卒喪猶不御肉膳者十餘年蓋以觀海公之歿以不勝喪也未幾知樞公罷東府而歸自是孺人往來省覲于漢師歲辛未觀海公仲兄中峯公始生次男曰世采錦溪公卽貽書孺人俾爲觀海公後未過數月孺人取而鞠之殷勤益至焉後五年乙亥錦溪公卒於西湖明年丙子西虜再創孺人從知樞公家屬舟下湖南己卯遂得北歸居于太平洞後六歲甲申中峯公卒時先兄世來前已十四歲而夭門議以爲世采不可舍本宗而後叔父遂令服喪孺人重加哀惋然亦克以義自安也晩徙敦義門外仍出住玄石村乃以庚戌七月二十四日捐世世采依國典服朞年申心喪並觀海公墓權厝于錦溪公壟下後幾年月日三遷于其北亥坐巳向之原嗚呼痛哉孺人生于名閥少已涵揉德美而復得君子爲之配是宜受祿于天享有百世矣卒乃荐以喪禍奇蹇無一可以自解者是遵何道哉蓋其性行貞固識慮明達每於歷代治亂人物臧否瞭然若目睹要其歸趣當求之古賢男子有非一時閨範所拘則知樞錦溪二公如遇大事必爲之咨詢自喪所天分死不顧晝哭四十年奉几涖祀靡一不盡其心齋潔具脩必誠必敬至或流徙中外輒使觀海公乳母不離其側凡待親黨之際無不皆然至一家所行有違於奉先追遠之節者必爲之痛言歸正或聞處事乖當者亦然其曙於大義如此長姒貞安翁主莊肅有法度而小姑李夫人明睿達事理常愍孺人賢而早寡招邀論說往往商略古今得失益加敬服相爲知己焉以此一門遠近知孺人事者亦多聞風愛慕素喜書史未嘗開卷伊吾唯亂後寓南原時通讀論語數十遍以爲聖賢之書無以加此晩歲常看綱目以及春秋四傳適世采爲緬禮預置棺材而一家有欲貸用者乃曰以季文子虧姑成婦之失觀之汝之不許爲是其高識類此平生以吟詠述作爲至戒其訓世采鉅細表裡無微不及自八九歲時常謂士於科擧之外實有聖賢正學苟不知此亦只是俗儒耳以洎先儒言行可法者指諭甚詳雖以世采氣昏識卑不果有所樹立其初感發於此事皆孺人之敎也自後家道旁落奉養之具恒乏孺人一無幾微見色此尤婦人所難能者至御婢僕治財產必察其人心行委任責成得其死力雖値凶荒俾無凍餒之患此其大較也世采旣不獲承後晩請改卜他嗣孺人不肯命以次子某攝祀嗚呼可勝痛哉今年六十三歲矣大疾幾危幸偸少間忍死追述此狀以示子姓神氣眩憒掛一漏萬尤增血泣罔極之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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