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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집 제18권 / 서(序): 기정진(奇正鎭)■
《산서잡록》 서〔山西雜錄/亂中雜錄 序〕
유서경(柳西坰)이 말하기를 “역사책에는 감분(感憤)을 느끼게 하는 곳이 많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림자와 같은 말이다. 천 년 전의 흥망으로도 오히려 불평스러운 마음을 갖거늘 하물며 몸소 친히 일을 겪으며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기억한 것이야 그 감분의 절실함을 또한 어찌 역사책에 비교하겠는가. 그렇다면 산서(山西)의 이 기록으로 옹(翁)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그 글은 기록한 것이 넓고 말을 갖추어 좌씨(左氏)가 경전(傳經)을 지은 것과 같으니 곧, 역사가가 쓴 한 체제이고, 그리고 그 뜻은 천 년 전의 불평스러운 남은 분노이니 아, 슬프다.
대체로 우리의 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시대에 천하의 일이 많아서 크게는 천지가 번복(翻覆)하여 윤리가 무너졌고, 작게는 생민(生民)들이 다 죽어 피와 살이 땅에 있게 되었으니, 하늘이여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어찌 화액(禍厄)을 내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대저 사람이라면 다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이것은 다만 이미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진정한 군자라면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감분을 느꼈으리니 어찌 이미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산서가 이때의 일에서 느낀 것이 몇 건이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탄식하고 슬퍼하는 마음은 자주 한때 사대부들이 붕당(朋黨)을 나누어 자기 당만 보호한 것에서 발산했으니, 우선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공의 뜻을 밝히고자 한다.
그 당시 천하의 대세가 점점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리 동쪽 나라는 그때 마침 인의(仁義)를 지킨 나라로서 대세의 목구멍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진실로 우리 동방 사람들이 멀리 내다보고 일찍이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여 대소(大小)가 마음을 모아 밤낮으로 자강(自強)했다면, 천리를 가지고 남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듣지 않았으리라. 오직 스스로를 구제할 뿐만이 아니라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피발좌임(被髮左衽)을 면하도록 한 그것이 우리나라에 있었으리라. 그런데 저 사대부들의 동인(東人)ㆍ서인(西人)ㆍ남인(南人)ㆍ북인(北人)은 과연 무슨 명목(名目)인가. 창은 오랑캐를 무찌르는 데 쓰는 것인데, 우리 동방에서는 창을 갈아서 같은 당을 지키고 다른 당은 치려고 하였고, 작전은 적을 제어하는 데 쓰는 것인데, 우리 동방에서는 작전은 공로를 방해하고 다른 사람의 능력은 해쳤다. 또 충성스러운 말과 깊은 책략이 좋은 것이 되지 못한 것은 자기 당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백성을 죽이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이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자기 당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항물(恒物)의 실정은 합하면 강해지고 나누어지면 약해진다. 이제 나라의 논의가 사분오열(四分五裂)된 것이 이와 같으니, 험윤(玁狁)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중국은 이미 전란에 피로해졌다. 하물며 원기(元氣)가 이미 허약해졌다면, 외사(外邪)가 침략하는 것도 차례차례로 따르게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동서로 나누어지자 바다의 왜구가 침략해오고, 군북(群北)들이 싸우자 북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렸다. 미리 대비한다면 대책을 세울 수 있었지만, 미리 대비하지 않았으니 피폐해져 창졸간에 일이 급해지니 관갈(管葛)의 손이 묶인 듯하였다. 충신(忠臣)과 의사(義士)ㆍ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과 뇌를 들판에 널리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주(神州)가 빈 터가 되도록 하였으니, 왕이보(王夷甫) 같은 여러 사람들이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아, 크고 간사한 간신이 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하는 자가 뜰에 가득한 것은 일찍이 문장을 사업으로 삼고 고금 역사에 통달해서이니 초심(初心)이야 어찌 나라를 그르치려고 스스로 기약했겠는가. 어찌 자기에게 동조하는 사람이라서 반드시 다 군자가 아닐 것이며,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라서 반드시 다 소인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겠는가. 또한 어찌 백성과 나라가 편하면 자신의 몸과 집안도 편하고, 편하지 않으면 이와 반대된다는 사실을 몰랐겠는가. 현철한 사람치고 어리석지 않은 이가 없듯이 서로 빠짐에 미칠 뿐이니 그 병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뜻밖의 놀랄 만한 괴이쩍은 일이라 할 만하다.
공은 산야(山野)에 사는 한낱 선비로 원래 나라의 정사에 참여할 수 없었으나 시국을 근심하고 시속(時俗)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평소 쌓이고 쌓였었다. 정유년(1597, 선조30)의 변란에 의병들을 불러서 몸을 떨쳐 기회를 마련한 김에 오히려 여러 번 왜적의 머리를 부수었으니, 뜻을 크게 펴지 못했던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후로 시사(時事)가 날로 잘못되어 갔지만 울분을 격렬히 호소할 길이 없었다. 이에 이 기록을 서술하여 선조(宣祖) 임오년(1582, 선조15)부터 인묘(仁廟) 신사년(1641, 인조19)까지 60년간에 있었던 하늘의 재변(災變)과 요상한 물상(物象), 조정의 상황과 민간의 풍속, 난중의 문서와 의병의 격문서, 변방의 기사(機事)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다 수집하였으나 그중에 빠진 곳이 있다면, 보고 들음이 다 미치지 못해서이지 일부러 누락시킨 것은 아니었다. 공의 가슴속 혈기는 이 기록에 다 쏟았다.
정진(正鎭)이 약관(弱冠) 시절에 오 충렬(吳忠烈) 공의 유고(遺稿)에서 뒷면에 기록된 한 단락의 말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조산서(趙山西)의 〈대방기문(帶方記聞)〉에서 나와 비로소 이 책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나 아직 보지 못했었다. 그 뒤 30년이 지나서 산서옹의 후손인 조재옥(趙載玉) 군에게서 그 절반을 얻어 보게 되었고, 이제 다시 전부를 얻었다. 그리하여 숙원(宿願)이 통쾌하게 이루어졌으나 서문을 내 어찌 감히 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조군(趙君)의 선친이 잘못 알고 편지로 부탁한 적이 있었고, 조군도 전에 부탁한 것을 거듭 요청하니 아, 양세(兩世)를 어찌 사양하겠는가. 조군은 힘쓸지어다. 천년 뒤에도 나와 같은 심정이리니, 이 책을 전달함에 반드시 책을 덮고 누차 탄식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주-D001] 산서잡록 서 : 《산서잡록(山西雜錄)》은 주로 《난중잡록(亂中雜錄)》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쓴 임진왜란 때의 야사(野史)를 기록한 책이다. 조경남의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선술(善述)이며, 호는 산서(山西) 또는 주몽당(晝夢堂)이다.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였으며, 의병장 조헌(趙憲)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도덕ㆍ의리를 배웠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격장으로 활약하며 10여 차례에 걸쳐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戰功)을 세웠다. 또한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뛰어난 계책으로 전장(戰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에 들어가 산서병옹(山西病翁)이라 자처하며 살았다. 성리학에 능통하고, 병법에 조예가 깊었다. 《난중잡록》 외에 《윤리변(倫理辨)》, 《성리석(性理釋)》, 《오상론(五常論)》 등의 책도 썼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주-D002] 유서경(柳西坰) :
서경은 유근(柳根, 1549~1627)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요, 자는 회부(晦夫)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72년(선조5)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1574년 사가독서를 한 뒤 1587년 이조정랑으로 있으면서 정시(庭試)에서 다시 장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이조 참판에 올랐고, 한성부 판윤에 올라 명나라에 가서 임진왜란 때 파병에 답례하고 돌아와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광해군 때는 은거 생활을 하다가 인조가 왕이 되자 다시 기용되었으나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던 도중 통진(通津)에서 병사하였다. 어릴 때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시문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문집에 《서경집(西坰集)》이 있다.
[주-D003] 그림자와 같은 말 :
허언(虛言)이라는 뜻이다.
[주-D004] 좌씨(左氏)가 …… 것 :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말한다.
[주-D005] 대소(大小) :
지위의 고하(高下)를 말한다.
[주-D006] 천리를 …… 않았으리라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제나라 사람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취하자, 제후들이 장차 연나라를 구원할 것을 도모하였다. 선왕이 말하였다. ‘제후들이 과인을 정벌할 것을 도모하는 자가 많으니, 어떻게 이들을 대해야 합니까?’ 맹자가 대답하기를, ‘신이 들으니, 70리로 천하에 정사를 한 자는 탕왕이 이 경우이니, 천리를 가지고 남을 두려워했다는 자는 듣지 못하였습니다.’[齊人伐燕取之, 諸侯將謀救燕. 宣王曰:諸侯多謀伐寡人者, 何以待之? 孟子對曰:臣聞, 七十里, 爲政於天下者, 湯是也, 未聞以千里畏人者也.]”라고 하였다.
[주-D007] 피발좌임(被髮左衽) :
머리를 풀고 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 위로 여미는 것으로, 미개한 오랑캐의 풍속을 가리킨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가 말하기를 ‘관중이 환공을 도와 패왕 노릇하여 천하를 한번 바로잡게 하였으니, 백성이 지금까지 그 덕택을 받았다.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가 머리를 풀고 옷섶을 왼편으로 여미게 되었을 것이다.’[子曰:管仲相桓公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 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袵矣.]”라고 하였다.
[주-D008] 험윤(玁狁)이 …… 것 :
험윤은 사나운 오랑캐를 뜻하고, 비여(匪茹)는 자기 분수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시경》 〈유월(六月)〉에 “험윤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서, 초 땅과 호 땅에 정연하게 거처하여, 호와 삭방을 침략하여, 경양에 이르렀다.[玁狁匪茹, 整居焦穫, 侵鎬及方, 至于涇陽.]”라고 하였다.
[주-D009] 군북(群北)들 :
붕당기 당시 북인(北人)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된 것을 말한다.
[주-D010] 관갈(管葛) :
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을 도와 패도(覇道)를 이룩한 관중(管仲)과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이른다.
[주-D011] 백성들 :
원문의 ‘원원(元元)’은 죄 없는 불쌍한 백성이라는 뜻이다. 《사기》 〈효문기(孝文紀)〉에 “천하의 불쌍한 백성들을 보호해야 한다.[以全天下元元之民]”라고 하였다.
[주-D012] 신주(神州)가 …… 있겠는가 :
신주는 중국을 말하고, 왕이보(王夷甫)의 이보는 진(晉)나라 왕연(王衍)의 자이다. 왕연은 재상이 되어 노장의 청담(淸談)만 숭상하고 국가의 실무를 돌보지 않다가, 나라가 외래 민족에게 망하고 자신도 석륵(石勒)에게 잡혀서 죽었다. 이 말은 진나라의 권신 환온(桓溫)이 당시 망해가던 중국 땅을 보면서 분통해하며 했던 말이다. 《진서(晉書)》 권98 〈환온열전(桓溫列傳)〉에 “환공이 낙양으로 들어가 회수와 사수를 지나 북쪽 경계를 점령해 갔다. 여러 관료들과 함께 평승루에 올라 중원을 바라보며 분통해하며 말하기를 ‘드디어 신주가 침몰당하여 백 년 동안 빈터가 되게 하였으니 왕이보 같은 여러 사람들이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가 없다.’[桓公入洛, 過淮泗, 践北境, 與諸僚属登平乘楼, 眺瞩中原, 慨然曰:遂使神州陸沈, 百年丘墟, 王夷甫諸人不得不任其責.]”라고 하였다.
[주-D013] 말을 …… 것 :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서로 제 말이 옳다고 떠들어 대기만 할 뿐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뜻이다. 《시경》 〈소민(小旻)〉에 “말을 하는 자가 뜰에 가득하니, 누가 감히 그 허물을 책임질꼬.[發言盈庭, 誰敢執其咎.]”라고 하였다.
[주-D014] 현철한 …… 뿐이니 :
이 내용은 《시경》의 두 부분을 합한 것이다. 《시경》 〈억(抑)〉에 “치밀한 위의는 덕의 단면이니라, 사람이 또한 말하되 현철한 사람치고 어리석지 않은 이가 없다 하나니, 서인들의 어리석음은 또한 병통 때문이거니와, 철인의 어리석음은 이 상도에 위반되도다.[抑抑威儀, 維德之隅, 人亦有言, 靡哲不愚, 庶人之愚, 亦職維疾, 哲人之愚, 亦維斯戾.]”라고 하였다. 또한 〈상유(桑柔)〉에 “누가 뜨거운 물건을 쥐고서 가 손을 씻지 않으리오, 그 어찌 선할 수 있겠는가 서로 빠짐에 미칠 뿐이로다.[誰能執熱, 逝不以濯, 其何能淑, 載胥及溺.]”라고 하였다.
[주-D015] 뜻밖의 …… 일 :
원문의 ‘돌돌괴사(咄咄怪事)’의 ‘돌돌’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소리이다. 《진서(晉書)》 권77 〈은호전(殷浩傳)〉에 “은호가 조정에서 쫓겨났으나 입으로 원망의 소리를 하지 않고 구신에게 운명을 맡겨 이야기 하고 읊조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 자기 식구들도 그 쫓겨난 것에 대한 유감의 기색을 볼 수가 없었으나 다만 하루 종일 허공에다 돌돌괴사 넉자만 쓸 뿐이었다.[浩雖被黜放, 口無怨言, 九神委命, 談詠不輟. 雖家人, 不見其有流放之慼, 但終日書空, 作咄咄怪事四字而已.]”라고 하였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山西雜錄序]
柳西坰言史書苦多感憤。此影子語也。千載興亡。尙爲之不平。况身親經歷。耳目之所睹記。其感憤之親切。又豈史書比耶。然則山西此錄。翁之心可見已。其文則廣記備言。若左氏傳經之爲。乃史家之一體。其義則千載不平之餘憤。嗚呼欷矣。葢我宣仁之際。天下多事。大者天地翻覆。彝倫斁絶。小者生靈糜爛。血肉塗地。天乎仁愛下民。胡爲崇降不祥。至此極也。夫人而皆爲之痛哭流涕。然此特其已然處。若夫君子先事之感憤。豈已然之謂乎。山西之所感於時事者。未知其有幾件節拍。而歎息悲慨。累發於一時士夫分朋護黨。請姑以此一節。明公之意焉。當時天下大勢駸駸然趨於陸沈。而吾東適以仁義之邦。據大勢之咽喉。苟使吾東之人。遠見而早爲之圖。大小協心。夙夜自強。則千里未聞畏人。不惟可以自救自拔。使天下免於被髮左衽。其在吾邦歟。其在吾邦歟。彼士大夫之東西南北。果何名目也。戈矛所以殲胡也。吾東礪戈矛於黨同伐異。籌策所以制敵也。吾東運籌策於妨功害能。忠言深謀未爲賢。以其不出吾黨也。戕民病國未爲罪。以其出吾黨也。恒物之情。合則強。分則弱。今國論之四分五裂如此。不待玁狁之匪茹。而中國已疲於兵革矣。况元氣旣虛。則外邪之橫侵。亦次第事。是以東西歧而海寇至。羣北鬨而朔警急。豫則立。不豫則廢。倉卒事急。管葛束手。徒使忠臣義士無罪之元元。肝腦蔭野草。神州丘墟。王夷甫諸人。安得辭其責乎。嗚呼。巨奸奰慝不常有。發言盈庭者。固嘗業文章通古今。初心豈遽以誤國自期。豈不知同我者未必皆君子。異我者未必皆小人。豈不知民國安則身家亦安。不安則反是。靡哲不愚。載胥及溺。其病根安在。可謂咄咄怪事矣。公布衣山野。旣不得參涉國論。傷時悶俗。蓄積有素。丁酉之變。唱徒奮挺。設機乘便。猶足以累碎賊首。其不克大有所伸。非氣義不足而然也。嗣是以往。時事日非。憂憤激烈。控訴靡階。乃述此錄。起宣祖壬午。止仁廟辛巳六十秊間。天菑物妖。朝象民風。亂中文移尺檄。以及邊外機事。俱蒐傡蓄。其有疎漏處。聞見之未周。非故欲畧之也。公之腔血盡此矣。正鎭弱冠歲。閱吳忠烈遺稿。有後錄一段語。出趙山西帶方記聞。始知有此書而未之見。後三十秊。蒙山西後孫趙君載玉示以半部。今又獲全帙焉。夙願始快愜矣。弁卷吾豈敢。趙君先大人誤以書見托。君又申前請。噫兩世矣。何忍辭。君勉乎哉。千載在後。與我同情。是書之傳。必有掩卷而累欷者矣。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3
■東岡先生遺稿卷四 / 序■
[山西雜錄後序]
山西雜錄者。故進士趙公慶男善述之所作。山西其號也。其先漢陽人。判中樞惠之後。戶曹判書崇進之玄孫也。其考司直璧娶于南原梁氏。因居于府東元川里。以隆慶庚午生公。天賦穎悟。纔能學語。已誦花笑檻前月到天心等句。司直喜其奇俊。撫愛特甚。乙亥司直歿。公在姆背。悲不自勝。見者爲之感動。七歲始入學。一聞輒誦。己卯秋。就傅于柳上舍仁沃。始有製述。而語輒驚人。上舍大加奬許。讀書之暇。揉木爲弓。剪杻爲箭。進退踊躍。射法工妙。咏歌舞蹈。體韻淸絶。父老噓唏咸稱有先世風。壬午公年十三。見三陽幷出。雙虹疊貫。知世大亂。乃記時事。雜錄之修自此始。癸未梁夫人沒。公奄失怙恃。而外祖母許氏無他子女。自是祖孫二人。更相爲命。丁亥往謁于重峯趙先生。得聞道德之諷。壬辰島夷猖蹶。國事罔極。公恃其有膂力善騎射。義檄之來。輒有奮裾先登之志。旋念祖母年老無依。而且病𢈱。難於絶裾而行。乃含忍而止。及自行朝有罪已之敎。見而大慟曰爲臣民者。見此敎而不慟哭。則無人心者也。作詩以 b046_517d見志。丁酉春。以勇武被選。爲軍門贊畫。終以祖母情勢辭歸。負老避兵于智異山中。日日遇賊。奮身擊逐搜山。諸賊莫敢相抗。偸攘之徒。亦畏而不敢恣行。從公者三百餘人。無一傷缺。山谷避竄之人。皆賴而全活。乃與同志。聚衆討賊。累立奇勳。佛隅之全勝。弓藏之鏖戰。山洞之夜斫。河東之追斬。竹田之奇計。炭窖之迫逐。山陰之火攻。蟹峴之突圍。皆是戰功之表著者也。復讎將鄭以吉報於元帥曰趙慶男以一書生。募聚義士。誓以同死。累次殲賊。爲國之誠。宜速褒啓云。而公以爲臣子之義。爲君父討賊。以洩其憤 b046_518a而已。不可以獻醎要功。雖轉闘山野。前後斬伐。不知其累百數。而終無一資半級之賞。其恥於自衒如此。戊戌遭許祖母喪。服未闋。本道兵使李光岳署致幕下。義不敢辭。遂負羽轅門。倭橋之戰。爲劉都督綎前鋒。竭力射賊。發無不中。天將李兪甚嘉之。副緫李芳春憂捷遲。題詩送李帥。李帥使公和之。大得其稱賞焉。嗚呼。公於是役。庶幾雪國恥成己願。而天不助順。大軍左次。賊亦渡海。竟未遂大志。其亦李廣之數奇歟。庚子有惡虎橫行湖嶺界。咬殺人數百餘。白晝大道。人不得任意行。防禦使元愼至被拿鞠。新防禦李思命又欲措捕而不敢發。公出方略設潛機。虎果中弩走入家南山藪。負隅咆哮。公奮臂直前。射而貫之。虎躑躅而斃。卽曳致防禦。防禦大喜曰昔日倭亂。爲國殲賊。今年虎患。爲人除害。誠忠義有功之人也。乃重賞之。公辭曰射殺一虎。何賞之有。如欲施賞。願减一面田結之加數。以惠衆人。防禦曰此非防禦所可擅便。乃减十石。幷其賞賜之。壬寅公年三十三。有百歲三分已一分之句。盖歎其功名晼晩而日月流邁也。戊申鶴城君金完爲本府判官。訪公于虎谷。坐於天使臺。柳上舍諸人。皆會酒未進。有大獐自長法山。下于稻田。鶴城曰可惜趙兄老矣。若獲此獐。可代蘓仙之赤壁得魚。公卽把羅將棍。下臺搜逐不及五六十步。獐入掌握。生致臺上。鶴城大喜。賀其不衰。府伯成令公安義歎曰吾以某只謂文章巨擘。豈料其有此逐獸之勇。昨日之獐。不啻文萬戶之虎也。己酉中鄕解兩塲。屈於禮部。丁巳又貫三塲。時李許當國。見其政亂倫喪。遂廢擧杜門。扁其堂曰晝夢。惟以書籍自娛。癸亥天佑大東。仁祖改玉。士林之深藏不市者。皆彈冠而出。公亦應擧。登甲子進士。自是屛跡衡門。絶意世事。遂築別業於方丈山西龍湫洞裡。徜徉逍遙。自稱山西病翁。噫。公以英拔嵬偉之資。有忠孝慷慨之節。龍蛇之變。憂國憤賊。扼腕流涕。只以祖母日迫西山。不得許身於國。而猶能奮義殺賊。其所素蓄積。槩可想矣。李忠愍以統制立大功。而中丸卒。公詩以悼之。逮至丙丁。則衰病已甚。望斷赴難。而徒切忠憤。聞三學士殉節瀋中。感慨作詩曰殺身柴市文承相。餓死燕京謝信州。其忠義之氣。老而不衰者。又可見矣。在舞勺之年。仰觀日變。逆知時亂。隨其見聞。有此集成。童年先見。尤可奇也。自壬午止于戊寅。乃以五十七年間事。爲巨編八帙之書。名曰山西雜錄。其於朝廷之事變。民生之休戚。時運之盛衰。世道之汚隆。無不備載。而嚴於淑慝逆順之分。尤惓惓於忠臣節士之跡。能使善者有所勸。惡者有所懼。實是衰世之一龜鑑也。有關於世道者亦大矣。公以名家遺裔。流落南鄕。不幸早孤。而乃能自奮力學。文章足以鳴於世。智勇足以顯於時。而才命不謀。齎志以歿。良可惜也。嗚呼。公雖不遇於當時。惟玆一書。可以有傳於後世。雖謂之不朽可也。記昔甲子歲。公之折蓮而到門也。吾先子判書公時以掌令。見邀於慶席。今公所抱秀才愃甫。袖其書來示余。求所以發揮者。余今年八十有一。衰病杜門。無意於翰墨。而念及疇曩。不勝感懷。不敢以老拙孤其意。乃取公自叙。略加刪定。間附所傳聞於前輩者。以爲一通。而至其當日人謀之臧否。事勢之緩急。觀此集者。自可以知之。今不復覼縷焉。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7
저자 | |
성명 | 최시옹(崔是翁) |
생년 | 1646년(인조 24) |
몰년 | 1730년(영조 6) |
자 | 한신(漢臣) |
호 | 동강(東岡) |
본관 | 삭녕(朔寧) |
특기사항 | 윤증(尹拯),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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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맹산(誓海盟山)
[요약] (誓: 맹세할 서. 海: 바다 해. 盟: 맹세할 맹. 山: 뫼 산)
바다에 맹세하고, 산에 맹세한다는 말로, 충무공의 비장한 맹세에 바다와 산천이 다 응답했다는 의미.
[내용] 이하 조선일보 정민의 世說新語 [275] 서해맹산 (誓海盟山)의 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혼자 다락 위에 기대 나라의 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 같다. 안에는 계책을 결단할 동량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다. 종묘사직이 끝내 어디에 이를지 심사가 번잡하고 어지러워 온종일 엎치락뒤치락했다.' 충무공 '난중일기' 중 1595년 7월 1일 기록이다.
그는 자주 악몽에 시달리고 불면에 괴로워했다. 소화기가 안 좋았던 듯 토사곽란을 달고 살았다. 4수 남은 시 속에서도 그는 늘 잠을 못 이룬다.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에서는 "근심겨운 마음에 뒤척이는 밤, 새벽 달빛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라 했고, '무제6운(無題六韻)'에서는 "우수수 비바람 몰아치는 밤, 또랑또랑 잠조차 이루지 못해. 아픔 품어 마치도 간담 꺾인 듯, 상심하니 칼로 살을 가르는 듯해. 산하는 참담한 빛을 띠었고, 고기와 새 그마저 슬픈 노래뿐. 나라엔 창황한 형세 있건만, 이 위기 돌이킬 인재가 없다. 회복함 제갈량을 그리워하고, 내달림 곽자의를 사모하노라. 여러 해 방비의 계책 세워도, 이제 와 성군을 속이었구나(蕭蕭風雨夜, 耿耿不寐時. 懷痛如摧膽, 傷心似割肌. 山河猶帶慘, 魚鳥亦吟悲. 國有蒼黃勢, 人無任轉危. 恢復思諸葛, 長驅慕子儀. 經年防備策, 今作聖君欺)"라는 탄식을 삼켰다.
조경남(趙慶男)이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 충무공이 한산도에서 읊은 20운의 시 중 단지 남은 한 연으로 소개한 구절은 이렇다. "바다에 맹서하니 어룡이 꿈틀대고, 산에 다짐하자 초목이 알아듣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대체 무엇을 맹서했기에 초목 어룡조차 격동되어 대답했던가? 공이 자신의 칼에 써서 새긴 검명(劒銘)에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서를 하니, 산하조차 낯빛이 움직이누나(三尺誓天, 山河動色)"라 했고, 그 맹서의 내용은 다른 칼에 새긴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매, 산하가 그 피로 물들어지리(一揮掃蕩, 血染山河)"에 담겨 있다. 충무공은 우리에게 피 끓는 이름이다. 영화 '명량'이 한국 영화사 기록을 날마다 갈아치우는 모양이다. 공에게 부끄럽지 않을 날을 기다린다.
이하 한국고전번역원 글에서
○ 전라 좌수사 이순신으로서 삼도 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한산도에 결진(結鎭)하여 거제에 있는 적과 대치하여 한 달이 넘지 않아서 수비(守備)가 이미 완전히 준비되었다. 때때로 거북선을 발동시켜 나오는 적을 잡으니, 적은 겁내고 움츠러져서 감히 나오지 못하여 경상 우도의 연로(沿路)와 호남의 일면이 안전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으면서 지은 20운(韻)의 시 가운데, “바다를 두고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을 두고 맹세하니 초목이 아네.” [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 등의 구절이 있다.
조경남(趙慶男)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선조 26년(1593년)10월27일
이 충무공(李忠武公)의 한산 절구(閑山絶句) 발
바다에 가을이 저무니 / 海國秋光暮
찬서리 내리고 기러기 떼 높이 나네 / 霜寒鴈陣高
시름으로 잠 못 이루는 밤에 / 憂心輾轉夜
으스름달만 활과 칼을 비추누나 / 殘月照弓刀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움직이고 / 誓海魚龍動
산에 맹세하니 초목도 아네 / 盟山草木知
송시열(宋時烈) 송자대전(宋子大全) > 송자대전 제148권 > 발(跋) >
공이 일찍이 지은 시가 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바다에 맹세함에 어룡이 동하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는도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하였는데, 이 시를 외우는 자들 가운데 눈물을 지으면서 격동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김육(金堉)잠곡유고(潛谷遺稿) > 잠곡유고 제13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출처] 바다에 맹서하니 어룡이 꿈틀대고|작성자 몽촌
●被傳者: 趙慶男(1570-1641)
●表題: 山西趙先生年譜
●산서공(山西公) 조경남(趙慶男, 山西雜錄/亂中雜錄) 의병장 신도비명(神道碑銘): 上章涒灘(庚申, 1920)...金寗漢撰(通政大夫全秘書院承 安東人 金寗漢撰(통정대부전비서원승 安東人 김영한찬)(동강 김영한, 東江 金寗漢: 1878~1950,일중 김충현 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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