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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암각시문(巖刻詩文)●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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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암각시문(巖刻詩文)●

■전남 완도군 보길면 중통리 산1-1 우측끝자락

■전남 완도군 보길면 중통리 산 9 우측끝자락

■연락처, 대표번호 : 보성군청문화관광과문화제담당:061-550-6621

 

◐八十三歲翁 (팔십삼세옹)

☞팔십셋의 늙은 몸이

◑蒼波萬里中 (창파만리중)

☞푸른마다 한 가운데 더 있구나

◐一言胡大罪 (일언호대죄)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三黜亦云窮 (삼출역운궁)

☞세번이나 쫒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北極空瞻日 (북극공첨일)

☞대궐에 계신 임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南冥但信風 (남면단신풍)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 밖에

◐貂裘舊恩在 (초구구은재)

☞단비 갖옷 내리신 은혜가 있으니

◑感激泣孤哀 (감격읍고애)

☞감격하여 외로운 충청으로 흐느끼네

*고산앙지(高山仰止)

 

■시경(詩經)의 소아보전(小雅甫田)편에 나오는 글로

●高山仰止(고산앙지)-높은 산은 사람이 우러르고

●景行行止(경행행지)-큰 길은 사람이 따르네

여기서 고산,경행(高山,景行)은 공자의 도덕과 학문에 비유됨이다.

◐雖不能至(수부능지)-비록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더라도

◑然心鄕往之(연심향왕지)-마음만은 그것을 향하리

 

위의 문장에서 “고산앙지(高山仰止)”를 따온 것이다.

도봉서원(道峰書院) 건너편 계곡에 고산앙지(高山仰止)라 새겨진 바위가 반쯤 물에 잠겨 있다.

조선 인조(仁祖1640) 때 김수항(金壽恒)이 새긴 글씨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여회 이상 거명되었으며, 불후의 명작인 일만여회 이상의 논서를 남겨 놓은 것은 우리 역사의 아름다운 꽃으로 승화시켜 놓은 것이라고 선생님은 강조하신다. 우암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121권, 주자언론동이고 6권, 주자어류소분 140권, 정서분류 66권, 논맹혹문정의통고 34권, 절작통편 36권, 주문초선 7권, 문공선생기보통편 등을 합하여 426권 등으로 아주 많으며, 우암의 문집은 숙종 때 우암집 167권, 정조 때 송자대전 215권과 서문부록 21권 등 236권 102책이 목판으로 간행됨으로써 서책으로 따지면 총 755권의 글을 남겼다.

이외에 상소문, 시와 서 그리고 산문 등 총 10,300편의 방대한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학문적 깊이와 넓이가 가이 없으니 놀라운 일이다. 우암은 관직에도 연연하지 않았다고 한다. 4대 왕을 모시는 동안 왕이 관직에 소명한 횟수가 167회나 되었으나 다만 37회만 조정에 나갔을 뿐이었다. 우암이 집의로 있을 때 ‘장릉지문’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역적 김자점이 청나라에 고자질하여 청나라의 추궁으로 사임하고 야인으로 돌아간 적도 있다.

또 효종의 북벌 의지를 확인한 우암은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효종을 도와 북벌에 매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우암의 정치사상은 올린 상소에 나타나는데 민생에 대하여 여러 시책을 건의하고, 특히 양반 서얼에 대한 귀천의 차별을 타파하고, 처첩의 신분제도 검토, 적서의 차별타파, 사노비를 양민으로, 동성동본 금혼 등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적 개혁을 주장하여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우암의 사상적 핵심은 안으로 공경해서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사상’과 밖으로 불의를 끊고 의를 세워 올곧게 나간다는 ‘명천리정인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도의정신’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또한 우암은 명덕, 즉 덕을 실천함에 있어 밝고, 옳고, 크고, 착하고, 빛나고, 아름답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마음씨의 실행 등 여덟 가지를 모두 갖추었으니 성인이라고 부를만 하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출처 : 호남교육신문(http://www.ihop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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