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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고창 남강정사(南岡精舍)▣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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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박명부의 시문집▣

 

●1915년 박명부의 후손 박경환(朴景煥)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하당(荷塘) 조종필(趙鍾弼)의 서문, 권말에 정재교(鄭在敎)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부(賦) 2편, 시 40수, 교서(敎書) 3편, 소(疏) 7편, 차자(箚子) 4편, 권3·4에 계사(啓辭) 5편, 장계(狀啓) 4편, 전문(箋文) 1편, 서(書) 21편, 잡저 10편, 권5에 서(序) 5편, 기(記) 2편, 발(跋) 3편, 명(銘) 2편, 찬(贊) 2편, 축문 8편, 제문 9편, 전(傳) 1편, 비갈(碑碣) 2편, 권6∼8에 부록으로 연보 1편, 교론(敎論) 2편, 사제문(賜祭文) 1편, 증시(贈詩) 22수, 증서(贈序) 2편, 만사(挽詞) 12수, 제문 12편, 행장 2편, 묘지명·신도비명·상향축문·기(記)·양송(樑頌)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 가운데 ‘울산민폐소(蔚山民弊疏)’에서는 군오(軍伍)·전선(戰船)·전결(田結)·목장(牧場)·관속(官屬) 등의 폐단을 낱낱이 열거해 그 개혁을 건의하였다. ‘강릉민폐소(江陵民弊疏)’에서도 대동(大同)·전결·족린(族隣)·포보·영송(迎送) 등 다섯 가지의 폐단을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다.

 

‘청견불긴공물소’에서는 와서(瓦署)의 토목, 사재감(司宰監)의 소목(燒木), 선공감(繕工監)의 재목, 교서관(校書館)의 자작판(字作板), 봉상시(奉常寺)의 초둔(草芚), 사섬시(司贍寺)의 휴지 등 긴요하지 않은 공물에 대해 3분의 1 정도 감면해 주자고 건의하였다.

 

장계 가운데 ‘청설둔전수속장계(請設屯田收粟狀啓)’에서는 모든 왕손들이나 재상들이 점유하고 있는 연해의 논밭 소유권을 혁파하고 둔전을 많이 두어 거기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통영(統營)이나 병영의 군량을 충당하자고 건의하였다.

 

서(書) 가운데 ‘상한강선생예의문목(上寒岡先生禮疑問目)’에는 상례 중의 시묘·상식·삭망·기제·연복(練服)·부제·담복 등의 예의(禮疑)에 대해 질문한 내용과 정구(鄭逑)의 답서가 함께 실려 있어 예설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답묘당문폐서(答廟堂問弊書)’에서는 공물의 폐단을 지적하였고, ‘여이참판서(與李參判書)’에서는 호패 문제에 대해 논하였다.

 

‘황석산성실적(黃石山城實蹟)’은 정유재란 때 곽준·조종도(趙宗道) 등이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사실을 적은 것으로 정유재란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知足堂文集》은 1921년에 鄭奭采의 서문을 붙여 후손 纘基가 3권 1책의 한문본으로 간행하였다. 禹錫珪는 단양 군수를 지낸 玄寶의 현손이다. 숙종 초에 진사가 되어 참봉·봉사·직장 등의 벼슬을 거쳐 山陰 현감이 되었으나 1689년 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 그 후 20년이 지난 1710년, 이조 참판이 된 知友 李晩成의 천거로 진천 현감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했다. 본 국역서는 권두에 묘지 사진과 교지 등 화보가 있고, 金子相의 해제와 정석채의 서문으로 시작된다. 체재를 보면, 매 篇마다 앞에 원문을 제시하고 그 뒤에 역문을 첨부하고 주석을 마지막에 붙였다. 제1권은 19편의 시와 두 편의 疏, 그리고 17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두 편의 소 중 〈打愚 李先生 伸寃疏〉는 제2차 禮訟 때 송시열의 大功說을 지지하다가 파직된 李翔의 신원을 청하는 소인데, 상소의 원문이 없고 이 소에 대한 비답만 실려 있다. 저자의 저술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편지로서 소량의 문집 중 17편이나 되고, 그것들도 權尙夏, 李䎘 이만성, 閔鼎重 등 당대 노론측 중진인 公卿이나 지방장관 등 명환들과 왕복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저자의 인간관계나 당시 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제2권은 5편의 잡저와 각 1편씩의 序·策·제문이 수록되었는데, 잡저 중 〈서유록〉은 저자가 환로에 나간 1682년(숙종 8)부터 1687년까지 6년간 중요한 사실들을 備忘한 것이다. 나머지는 서원 사적과 館通 등인데, 특히 관통은 延礽君(후일의 英祖)의 世弟 책봉을 저지하려 한 소론 柳鳳輝를 賊臣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저자의 黨色이 잘 드러난다. 〈姓稧案序〉는 저자 집안의 친족계에 대한 서문이고, 책문인 〈問衣食訟獄貢賦軍伍士農工商(의식과 訟獄과 貢賦와 軍伍와 士農工商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자의 저술 중 가장 장편으로 저자의 정치적 식견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권3은 부록으로 행장과 묘갈, 그리고 저자가 받은 타인의 편지·만시·교지와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박찬수(朴贊洙)=

 

■구성과 내용■

●본집은 2권 1책으로 되어 있다. 권두에 金道和가 지은 序와 目錄이 있다.

●권1은 詩(83題), 書(9), 雜著(1)이다. 시는 詩體에 관계없이 대체로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만시는 뒤에 따로 배치되었는데 그 분량이 46題로 상당하다. 〈泮宮讌會次知館事趙公泰億韻〉은 1724년 윤4월 직강으로 재직 시 지사 趙泰億이 성균관 연회에서 「大學」의 ‘格物致知誠意正心’의 의미를 두고 창수할 때 지은 것이고, 〈丹院講會次白丈士升昕韻〉과 〈次朴肅而潚韻〉은 저자가 귀향 후 丹山洞主가 되어 「近思錄」을 강설하고 나서 창수할 때 지은 것이다. 이 밖에도 寒泉 鄭敏僑, 柳下 洪世泰, 白南 金始鑌, 慵窩 柳升鉉과 차운하거나 함께 지은 시들이 있다. 만시는 權斗經, 南九明, 李栽, 權泰時, 任華世, 족형 權大臨과 權大謙 등을 애도한 것이다. 書는 黃翼再, 鄭權, 蔡彭胤, 權相一, 金永甲, 金聖鐸, 權爀에게 보낸 것들로 이 중 1728년 長水縣 인사 김영갑에게 보낸 편지는 李麟佐의 난을 당하여 고을에 병사와 무기가 부족한 상황에서 힘을 보태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잡저의 〈碧溪戊申日錄〉은 장수 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1728년 1월 25일부터 체직되어 집으로 돌아온 날인 5월 7일까지의 일록으로 鄭希亮의 난에 대처하던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권2는 序(2), 記(1), 跋(3), 上梁文(2), 誄辭(1), 祭文(11), 祝文(2), 墓表(2), 遺事(2), 附錄이다. 序의 〈泮宮酬唱錄序〉는 지성균관사 조태억이 관원 및 諸生들과 창수한 시들을 엮은 「泮宮酬唱錄」에 붙인 것이고, 〈四禮輯要序〉는 저자가 조선 사회에 적절한 관혼상제 의식과 절차들을 여러 전적에서 모아 편차한 「四禮輯要」에 대한 것이며, 기의 〈知足堂記〉는 저자가 자택 남쪽에 당을 짓고 ‘知足’이라 이름 붙인 경위를 객과 문답형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발의 〈變禮集說跋〉은 저자의 족부 晦養堂 權尙精이 관혼상제 사례 중 變例에 해당되는 것들을 이전의 전적들에서 널리 상고하고 자신의 의견을 더해 분류 편목한 「變禮集說」에 대한 것이고, 〈丹山講會錄跋〉은 「근사록」 강설 후 白昕, 朴潚 등과 창수한 시들을 엮은 것에 대한 것이며, 〈書丹陽地誌後〉는 1738년 丹山洞主로 있으면서 저자가 白始升, 朴龍相과 함께 「丹陽地誌」를 改修하고 붙인 것이다. 상량문은 玉川의 追遠齋 이건 시와 仁里書堂 건립 시 지은 것이고, 뇌사는 金夏基에 대한 것이며, 제문은 족부 權尙精, 趙德鄰, 李守謙, 南國翰, 鄭確, 족형 權鳳興, 처 英陽南氏 등에 대한 것이다. 축문은 龍塘과 사직단에 올린 기우문이고, 묘표는 9대조 權自弘과 증조 權宜謹에 대한 것이며, 유사는 조부 權瑍과 부친 權重載에 대한 것이다. 부록에는 족손 權昌勣이 지은 家狀, 李獻慶이 지은 墓碣銘, 鄭彦儒, 鄭重器 등이 지은 輓詞 23편, 李亨煥 등이 지은 祭文 6편이 실려 있다.

권말에 門孫 權翰模가 1907년에 지은 발이 있다.

 

▣南道 정자기행(2597)-고창 남강정사(南岡精舍)▣

전북 고창군 아산면에는 정자만 반암리 두암초당(斗巖草堂)을 시작으로- 대동리(동면) 청금정(聽琴亭)-대동리(선동) 봉강정사(鳳岡精舍)- 계산리 삼호정(三湖亭)- 학정리 이매당(二梅堂)-남산리 서호정(西湖亭)- 상갑리 청계정사(淸溪精舍)- 남촌리 남강정사(南岡精舍)-남촌리 운곡정사(雲谷精舍- 남촌리 사가정(四嘉亭)- 송파정- 복덕리 덕천구려 등이 현존하고 있다

 

그중에 남촌리에 처사적 삶을 살았던 재야지식인 성암(惺菴) 나상일(羅相一 1871 고종8 ~1940)이 만년에 지어 후생을 가르치면서 유유자적했던 남강정사(南岡精舍)를 통해 시간여행을 떠난다.

 

8대조 선계(仙溪) 성인(星仁)의 묘하(墓下)에서 지성으로 추원(追遠)하여 세업(世業)을 지켰고 경사(經史)를 강구(講究)하며 후생을 교회(敎誨)하여 노년토록 소요자적(消遙自適)했다.

 

조선 중기의 학자 나식(羅湜)의 12세손으로 1912년에 장음정집(長吟亭集) 중간하고 권두에 전라남도 장성 출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헌종 12)∼1916)의 중간서를 쓴 것으로 보아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창의 일제강점기 한학자요, 역사학자로 평천정사(平川精舍)을 짓고 학문을 연마했던 경암(敬菴) 김노수(金魯洙, 1878~1956)가 기문을 쓰고 시로 이르기를

 

◐책을 읽고서 당일 재능과 포부에 뜻을 두며

◑한 해를 보내며 또 다시 안 씨의 가난을 즐기네

◐부귀는 다툼이 있어 하수들은 성취하기 어렵고

◑자연에서 하지 말란 것 없으니 심신을 편안히 할 수 있다네

 

정자명에서 강(岡)은 비탈진 언덕의 길, 언덕 작은 산을 의미하는 단어로 남쪽 언덕에 있어던 정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네 선비들이 그렇게 단순에게 정자명을 정하지 않는다.

 

논어에 '子曰, 學而不思則岡하고, 思而不學則殆니라.'라는 문구가 나온다. 즉 배우기만 하고 사색을 하지 않으면 어두워 얻는 것이 없고,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라상일은 그러한 삶을 살다 떠난 처사, 재야 지식인이었다.

 

남강정사 원운 시에서 수구초심의 마음을 흘러내고 있다.

 

◐남녘 산기슭을 보자 하니 동강 숨어 살고

◑책상머리 편안한 몸 햇살을 죄니 기쁘네

◑고향 가까이에 의지해 마침내 나도 늙어가고

◑소나무 국화는 여러 꽃망울과 다투어 하지 않네

 

◐정원에 이기 발자국 찍힌 머문 사람 오래되고

◑시얼에 촛불 켜고 책 읽는 밤은 길기도 하네

◑서당에서 오직 슬기로운 법을 마음으로 전하고

◑힘써 공주하는 아이들이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8대조 선계(仙溪) ) 성인(星仁)의 묘하(墓下)에서 지성으로 추원하여 세업을 지켰고 경사(經史)를 강구하며 후생을 교회(敎誨)하여 노년토록 정사를 지어 소요자적(消遙自適)했다.

 

당대 제야지식인이었던 안동 김영한(安東 金寗漢 1878 고종 19~1950)과 광산인 효당(曉堂) 김문옥(金文鈺 1901∼1960), 김노수(金魯洙)의 기(記)가 있다.

 

김노수의 기에서 "부귀는 다툼이 있어 하수들은 성취하기 어렵고/ 자연에서 하지 말란 것 없으니 심신을 편하니 할 수 있다네"하며 후인들에게 뜨끔한 일침을 때린다.

 

전남 화순군 이양면 출신 정재(正齋) 양회갑(梁會甲, 1884~1961)이 들려 시(登南岡精舍)를 남겼다.

 

그의 초명은 영구(榮龜)이고 자는 치구(致九)이며 호는 성암(惺菴)이고 본관은 안정(安定)이다. 장음(長吟) 정식(亭湜)의 후손이며 야헌(野軒) 나길순(羅吉順)의 아들이다. 1871년(고종 8년)에 아산면 남촌(南村)에서 출생했다.

 

용모가 준수하고 재질이 영명하여 문리가 숙성하매 족대부 찬판 감(鑑)이 칭찬하여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들칠 것이다..” 하였다.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병선(秉璿)의 아우로 우국지사 순국지사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을 스승으로 섬겨 경학의 깊은 뜻을 얻어듣고 심석이 순절한 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헌종 12)~1916)을 종유하여 의리를 강명했는데 송사는 칭찬하여 “포부와 경륜이 속사(俗士)에 비길 바 아니다.”라고 평했던 인물이다.

 

그는 위선에 특성을 보여 지리서를 탐독하여 불리한 선영을 길지(吉地) 가려 이장하고 석물과 제전을 갖추었다. 또한 선세의 사적을 발굴하여 문헌록을 간행하고 장음정집(長吟亭集)을 중간했다.

 

하당 조종필(荷塘趙鍾弼) 전라감사가 “영호(英豪)하고 고매함이 현세에 보기 드물다.” 하고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동학란 후로 세상이 어지러워 사양했다.

 

세상을 잊고 만년에는 남강정사(南岡精舍)를 지어 후생을 가르치면서 처사적 삶을 살다가 1940년 세상을 떴다. 저서로 성암유고(惺菴遺稿 서:安鍾宣) 5권 권 1책이 간행되었다.

 

고창에 객사 하는 등 유독 인연이 많았던 대 철인이요 스승 이황을 가르쳤다는 평을 받고 있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 중종 22 ~ 1572 선조 5)이 450여년 전 남강하며 읊은 시로 또다른 고창의 정자 흔적을 찾아나선다.

 

마음 갖고 도 배웠으나 얻은 것 없고

나를 미루어 남에게 함도 성실히 못했노라

몸 수습해서 예전의 공부를 하려 하니

머리 돌려 신경 생각 견디지 못하겠네

將心學道嗟無得 推己加人愧未誠

謾欲收身尋舊業 不堪回首憶神京

 

동산에 대 심고 삼경(三徑)을 열었으며 

울 밖에 심은 뽕나무 몇 가지나 살았는가

촌락을 왕래하며 한낮을 보내고 

밤 깊어지자 맑은 달 쓸쓸히 비추네

園中種竹開三徑 籬外栽桑活幾條

墟曲往來移白日 夜深淸月照寥寥

 

삼경(三徑)은 세 오솔길이란 뜻으로,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일찍이 자기 집 대나무 밑에 세 오솔길을 내 놓고 친구인 구중(求仲),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서로 종유했던 데서 전하여 은자(隱者)의 처소를 가리킨다. 《三輔決錄》 그리고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 또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卷5》

참고문헌=高敞의 儒學

[문화.오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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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題

知足堂文集 序

知足堂文集目錄

卷之一

壬戌葽夏被薦赴 昌陵

雨後

贈全退軒 克泰

與崔明谷 慶湜 翫黃花同醉

除夕

至日謝李進士 晩昌 投新曆

高陽途中

次全退軒述懷 三首

輓金安仲 以仁

贈李進士 新之

次姜保寧 山斗 韻

門外松

次權典籍 九萬 請脯韻

次李歸樂堂 晩成 韻

次望江亭韻

憶故園

戊辰正月出宰山陰

贈璉弟

庚寅秋赴鎭川設春秋講會于鄕校而歸樂堂時以巡撫適至朴淸安 慶餘 亦來訪皆有志斯文而共賦一律

舘學儒生䟽

打愚李先生 翔 伸寃疏

上逸休堂李先生 䎘

答宋霽月堂 奎濂

與李歸樂堂

與李歸樂堂

答李歸樂堂論語問義

答權遂庵 尙夏

與權遂庵

與李睡村 畬

答洪淡圃 受瀗

答宋翰林 疇錫

與金監司 洵

與韓判官 配周

答李慶州 茂疏

答李慶州

與李修撰 徵明

代新寧儒生上閔老峰

寄子洪傳

卷之二

雜著

西遊錄

德洞書院事蹟

尙德祠事蹟

府誌修正時少識

舘通

姓稧案序

問衣食訟獄貢賦軍伍士農工賈

祭文

祭亡室淑人義城金氏文

卷之三

附錄

行狀

墓碣

山陰作宰時諸賢賀韻

尺牘

權尙夏 書簡

權煜 書簡

李睡村 書簡

李縡 書簡

寒水齋遺札

權尙夏 書簡

權尙夏 挽詩

權煜 書簡

九弟德基 書簡

詩(元韻)

謹次逸休相公韻送山陰使君

送禹殿中伯玉之任山陰

奉贐山陰使君赴任之行

贈別禹伯玉使君之任山陰

奉別禹使君之任山陰

奉贐山陰禹使君伯玉之行

奉別山陰使君赴任之行

李畬書簡

奉別山陰使君之行

敎旨

跋 從七代孫 夏敎

又 八代孫 纘基

又 從九代孫 鍾根

▣함양의 인물 - 조선시대_박명부 : 1571~1639

함양군민신문 | 입력 : 2016/07/13 [04:04]

▲ 농월정(弄月亭) © 함양군민신문

[농월정(弄月亭)주련(柱聯)]

 

山蒼水烟洞天幽(산창수연동천유)

산은 푸르고 물안개 자욱히 하늘만 보이는  이 골짜기 그윽할사

知足遺風此地留(지족유풍차지류)

지족당이 남기신 풍류 이 곳에 남아 있구나

碧草空階春色暎(벽초공계춘색영)

파아란 풀 인적없는 반석 길엔 봄빛이 어려 있고

白雲深處野心浮(백운심처야심부)

흰구름 잦아진 곳 촌로의 마음도 구름되어 흐르네

主人已遂重新志(주인이수중신지)

정자의 주인장은 새로운 포부  그 옛날 철석같이 가다듬었음이라

翫客偏尋古渡頭(완객편심고도두)

오늘도 방문객은 반석 징검다리 이리저리 찾고 있고

石面至今三字刻(석면지금삼자각)

반석위엔  지금도 석자 이름 이리 저리 남았는데

莓苔小蝕洗淸流(매태소식세청류)

꽃 이끼 피어난  반석이 시쳐 흘러 맑았어라

 

 

계영배 농월정(弄月亭) 달빛을 희롱하다

/계영배(여리청)

 

계수나무 박힌달을 금도끼로 다듬어서

영춘화로 장식하고 돛대달고 삿대저어

배띄워서 은하수를 돛단배로 건너가니

 

농월정이 구름속에 우뚝솟아 반겨주네

월색고운 고요한밤 바람마저 숨죽일제

정자마루 내려앉아 달빛사냥 떠나볼까

 

달빛녹은 금물결로 지필묵을 곱게갈아

빛깔좋은 농익은달 화선지에 그려넣고

을야의밤 고요할때 저달빛을 품어보리

 

희노애락 한잔술에 시인묵객 취하는밤

롱(농)주잔에 비친달을 잔을채워 들이키니

하늘품은 농월정에 아름달이 떠오르고

다가가니 천상선녀 계곡물로 손짓하네

출처: https://sugisa.tistory.com/entry/농월정(弄月亭)주련(柱聯) [晛溪亭(현계정):sugisa:티스토리]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며 수우당 박덕형의 손자로서 본관은 밀양으로 함양군 안의면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8세에 글을 지었을 정도로 총명하였으며 16세에 정온 선생의 부친인 정유명에게 학문을 배웠고 19세때 증광병과에 급제하였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 부정자의 벼슬을 시작으로 이듬해 승문원 저작을 제수받았으며, 가을에 한강 정구 를 뵙고 스승의 예를 올렸다.

임진왜란시 고향인 안의에서 의병을 모으고 진주로 가서 초유사 김성일을 만나 왜적을 물리칠 계책을 논의했으며, 곽재우 장군의 진영에 들어가 전투에 참여하면서 의병 모집하는 일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헌부 지평을 거쳐 진주판관, 합천군수 등의 벼슬을 역임하기도 했다. 죽산부사 시절에 공부자묘(孔夫子廟)를 중건하여 학문을 일으켰으며 흉년에는 곤궁한 백성의 구원에 주력하였다.

광해군 때 조정의 어지러운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고자 여러번 상소를 올렸으며, 어릴 때 같이 수학한 동계 정온이 영창대군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갈 때는 이를 변호하기도 하는등 나라의 평안에 노력하였으나 조정이 더욱 어지러워져 향리로 내려왔다.

인조가 등극하자 다시 홍문관 부수찬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때 지족당은 조정에 있으면서 긴급하지 않은 공물은 없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상소를 올리는 것을 비롯해 둔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54세때 죽산도호부사, 56세 때 제주목사, 59세 때 형조참의 등의 내외직을 두루 거쳐, 61세때는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조상들의 묘가 있는 곳이라서 부임하지 않았다.

곧 이어 승정원 승지에 임명되어 여러 시정책을 건의하는 등 소임을다했으며, 66세 때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지족당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 지족당(知足堂)이라는 편액을 걸어 좌우명으로 삼았다.

67세때인 1637년 9월 마침내 농월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서 7월에 호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정자를 지어 자연을 벗삼아 평생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농월정을 지은 후에도 조정에선 예조참판 등의 벼슬로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고자 했다.

이후 68세 때 조정에서는 지족당의 출사를 강력하게 요구해 왔으나 사양을 거듭하다 어쩔 수 없이 강릉도호부사에 부임해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인 1639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으며 1651년 조정에선 그의 학덕을 기려 이조판서에 추증을 하였고 화천사에 배향되었다

농월정은 400여년 역사를 간직한 유서깊은 정자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한 선비가 자연에 자신의 몸을 의탁한 채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정자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농월정 앞 바위에 '지족당 장구지소' 라는 글을 새겨 놓았는데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를 짚고 거닐던 곳' 이란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자는 여러 번 중수를 거친 것으로 옛스런 멋은 없지만, 달을 희롱할만한 절경임에는 틀림이 없다.

출처: 함양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농월정(弄月亭)♣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에 있는 누정.

예로부터 정자문화의 보고라 불리는 화림동 계곡의 정자 가운데 하나이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바 있는 지족당 박명부(1571~1639)가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건물로 몇 차례 중건을 거쳐 1899년 완성됐다.

농월정은 이곳에 얽힌 절개의 사연과 정자 앞 널찍한 달바위와 어우러진 멋진 정취덕분에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함양의 대표명소였으나, 12년 전 화재로 소실되면서 안타까움을 사오다

함양군의 결단과 밀양박씨 문중의 협조로 총 6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복원사업이 추진돼 왔다.

농월정이라는 이름은 '달을 희롱한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밤이면 달빛이 물아래로 흐른다고 한다.

농월정 앞에 넓게 자리하고 있는 반석을 달바위라고 부르는데, 바위 면적이 정자를 중심으로 1,000여 평 된다.

농월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지붕 2층 누각형태로 정자를 떠받치는 기둥인 도량주는 수령 200년 된 참나무를 껍데기만 벗겨내고 자연스럽게 사용해 견고함과 멋스러움을 더했고, 주춧돌은 화림동 계곡의 자연석을 활용해 자연미를 강조했으며, 정자 윗부분 기둥과 마루는 주로 소나무를 사용했다.

 

[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박명부의 시문집.

1915년 박명부의 후손 박경환(朴景煥)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조종필(趙鍾弼)의 서문, 권말에 정재교(鄭在敎)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부(賦) 2편, 시 40수, 교서(敎書) 3편, 소(疏) 7편, 차자(箚子) 4편, 권3·4에 계사(啓辭) 5편, 장계(狀啓) 4편, 전문(箋文) 1편, 서(書) 21편, 잡저 10편, 권5에 서(序) 5편, 기(記) 2편, 발(跋) 3편, 명(銘) 2편, 찬(贊) 2편, 축문 8편, 제문 9편, 전(傳) 1편, 비갈(碑碣) 2편, 권6∼8에 부록으로 연보 1편, 교론(敎論) 2편, 사제문(賜祭文) 1편, 증시(贈詩) 22수, 증서(贈序) 2편, 만사(挽詞) 12수, 제문 12편, 행장 2편, 묘지명·신도비명·상향축문·기(記)·양송(樑頌)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 가운데 ‘울산민폐소(蔚山民弊疏)’에서는 군오(軍伍)·전선(戰船)·전결(田結)·목장(牧場)·관속(官屬) 등의 폐단을 낱낱이 열거해 그 개혁을 건의하였다. ‘강릉민폐소(江陵民弊疏)’에서도 대동(大同)·전결·족린(族隣)·포보·영송(迎送) 등 다섯 가지의 폐단을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다.

‘청견불긴공물소’에서는 와서(瓦署)의 토목, 사재감(司宰監)의 소목(燒木), 선공감(繕工監)의 재목, 교서관(校書館)의 자작판(字作板), 봉상시(奉常寺)의 초둔(草芚), 사섬시(司贍寺)의 휴지 등 긴요하지 않은 공물에 대해 3분의 1 정도 감면해 주자고 건의하였다.

장계 가운데 ‘청설둔전수속장계(請設屯田收粟狀啓)’에서는 모든 왕손들이나 재상들이 점유하고 있는 연해의 논밭 소유권을 혁파하고 둔전을 많이 두어 거기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통영(統營)이나 병영의 군량을 충당하자고 건의하였다.

서(書) 가운데 ‘상한강선생예의문목(上寒岡先生禮疑問目)’에는 상례 중의 시묘·상식·삭망·기제·연복(練服)·부제·담복 등의 예의(禮疑)에 대해 질문한 내용과 정구(鄭逑)의 답서가 함께 실려 있어 예설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답묘당문폐서(答廟堂問弊書)’에서는 공물의 폐단을 지적하였고, ‘여이참판서(與李參判書)’에서는 호패 문제에 대해 논하였다.

‘황석산성실적(黃石山城實蹟)’은 정유재란 때 곽준·조종도(趙宗道) 등이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사실을 적은 것으로 정유재란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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