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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이시(李蒔)1569(선조 2)∼1636(인조 14)]■〈조주후풍가 操舟候風歌〉「오로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9. 29.

[이시의 시]   〈조주후풍가 操舟候風歌〉

◐뎨 가는 뎌 샤공아 배 잡고 내 말 들어

◐順風 만난 후의 가더라 아니가랴

◐於思臥 中流에 遇風波하면 업더딜가 하노라

~이시(李蒔;1569~1636)~

 

<해설>

저기 있는 저 사공아, 배를 멈추고 내 말을 들어라

순풍을 만난 뒤에 가도 괜찮지 않겠느냐,

가다가 중간에서 풍파를 만나 엎어질까 염려스럽구나.

 

◈ 배경

 

이시는 호는 성우당(善迂堂)인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쌍계(雙溪)에 거주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능창군이 죽게 되자 그 생살(生殺)의 권한을 쥐게 된 것은 당시의 병조판서 유희분(柳希奮)이었다. 유희분은 유자신(柳自新)의 아들로서 광해군의 처남이었다. 자는 형백(亨伯)인데 선조 23년 생원이 되고 동 30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보다 앞서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희분은 세조대왕의 능인 광능참봉(光陵參奉)이었다. 그래서 난리가 일어나자 세조대왕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의주까지 달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왜군이 사방에 길을 막고 있으므로 철원 근방에서 왜군의 유탄을 맞았다. 이때 극진히 간호해 준 것이 나중에 첩이 된 안악(安岳)기생 매화(梅花)였다. 그들 역시 피난 가다가 희분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능양군은 동생 능창을 구하고자 집에 있는 패물을 희분의 첩 매화에게 갖다 주었으며, 희분을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희분은 핑계를 대고 좀체로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능양군은 또 희분의 집에 가서 주인을 찾았다. 그랬더니 희분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하고 능양군은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그제야 청직이도 딱했던지 “대감께서는 서강(西江) 한창군(漢昌君)의 별장에 가시고 정말 아니 계십니다. 급하시면 그리로 가보십시오.“ 한창군은 희분의 매부인 조국필(趙國弼)을 말한다. 능양군은 문안에서 서강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희분은 이때 조국필과 술을 마시며 기생에게 노래를 시키는 등 질탕하니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능양군이 찾아왔다는 하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계신다고 그래라“ 희분은 버럭 소리를 질었다. 국필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형백, 능양은 왕손인데 대접상 나가 만나보는 게 인사가 아니오, 그리고 웬만하면 그 아우를 살려 주게 그려“라고 말했으나 희분은 딱 거절했다. 국필은 자기가 희분 대신 사당에 나가서 능양군을 만났다. “아무래도 문창(희분의 관작명)이 술이 취하여 대감을 만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하고 좋은 말로 위로하였다. 능양군은 ”아아, 내 아우가 끝내 죽는구나!“하고 탄식했다.

◐이시의 「오로가」◑

 

이시李蒔(1569-1636)는 광해군 때의 학자이며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그의 자는 중립中立, 호는 선오당善迕堂이다. 그는 도를 굽히면서까지 명예를 따르지 않는다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한평생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조주후풍가操舟候風歌」라는 시조 세 수와 「오로가烏鷺歌」라는 시조 한 수를 남겼다. 「오로가」를 보기로 한다.

 

가마귀 지지는 곳에 백로(白鷺)야 가지 말아

희고 흰 깃에 검은 때 묻힐세라

진실로 검은 때 묻으면 씻을 길이 없으리라.

(가마귀 : 까마귀. 지지는 : 지저귀는)

 

교훈성이 강한 작품이다. 작가 이 시의 아우가 광해군 때 정언이라는 벼슬을 하자, 이시는 때가 아니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아우는 형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 폐모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오로가」는 간신들에게 휩쓸리지 말라는 뜻을 까마귀와 백로에 비유해서 말했다. 그리고 「조주후풍가」는 인간의 처세를 순풍, 삭풍 속의 어부에 비유하여 난세에 몸조심하기를 경계한 시조 작품이다. 이시는 이 작품을 「셋째 아우를 경계한다」라는 서찰과 함께 아우에게 보냈던 적이 있다. 다음은 권구의 시조 작품이다.

 

 

■[이시(李蒔)1569(선조 2)∼1636(인조 14)]■

 

자는 중립(中立), 호는 선오당(善迂堂). 본관은 영천(永川). 예안

간재 이덕홍(李德弘)의 아들로,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서 13, 14세에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이때 아버지의 도(道)를 굽혀서까지 명예를 따르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할 것을 단념하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글 중, 사람이 순풍에 돛을 단다면 험한 길도 쉽게 갈 수 있지만, 출발을 잘못하여 폭풍우를 만나면 배는 뒤집히고 사공은 익사한다는 국문시조 〈조주후풍가 操舟候風歌〉가 유명하다.

 

만년에 오천(迂川)의 하류에 오계서당(迂溪書堂)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학자들을 길러내었다. 그의 학행을 흠모하여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는데, 그것을 기록한 《오계서당동화록 迂溪書堂同話錄》이 있다.

 

친상 중 집상하느라고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로는 《선오당유고》 2권이 있다. 뒤에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에 추증되고, 오계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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