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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도시향제례❀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 (良節公) (휘 溫) 조선의 開國, 定社, 佐命功臣●양절공(휘 溫, 6世) 묘전 추향제 : 2024.11.2.토.11~~~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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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 (良節公) (휘 溫) 조선의 開國, 定社, 佐命功臣

●양절공(휘 溫, 6世) 묘전 추향제 : 2024.11.2.토.11~~~

조선의 개국, 정사, 좌명 삼훈공신으로 평생을 청렴, 검소, 온량, 공손, 과묵하게 생활하신 공(公)은 시조공(휘 之壽)의 6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휘 暾)이며 아버지 양렬공(襄烈公, 휘 仁璧)과 어머니 하동(河東) 정씨(鄭氏) 사이에서 1347년(충목왕 3)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하동 정씨는 공과 1녀 만을 낳은 뒤 일찍이 세상을 떠난 까닭에 아버지는 이자춘(李子春)의 딸이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누이인 정화공주(貞和公主)를 계배(繼配)로 맞아 6남 2녀를 낳았다.

공양왕은 1388년(우왕 14)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으로 ‘나라를 존망의 위험에서 구하고, 사직을 안정시킨 공로’로 1390년(공양왕 2) 4월, 45명의 신료들에게 회군공신록을 내렸는데 이 가운데 우대언(右代言) 조인옥(趙仁沃: 공의 숙부)과 이조판서인 공이 포함되었으며 공의 아버지인 삼사좌사(三司左使) 양렬공에게는 사직의 대계(大計)로써 계책(計策)에 찬성한 공로로 포상(褒賞)을 내렸다. 그리고 공은 같은 해 5월 임금에게 상소하여 청주 감옥에 갇혀있던 이색(李穡: 牧隱), 권근(權近: 陽村), 이숭인(李崇仁: 陶隱)등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에 공은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에 의하여 조선 왕조가 탄생되는 진통의 순간인 1392년(공양왕 4) 7월 12일, 왕대비(공민왕 정비 안씨)는 공양왕을 사제(私第)로 나가 있게 한 다음 시좌궁(時坐宮)에서 폐위시켰다. 그리고 16일에는 50인의 대소 신료(臣僚)와 한량(閑良), 기로(耆老) 등이 왕대비로부터 국새(國璽)를 받아 이성계의 저택으로 가지고 가서 이성계에게 전달하였다.

이들 50인의 대소 신료 가운데 조인옥(趙仁沃), 조온(趙溫)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수창궁(壽昌宮)에서 어좌(御座)에 앉지도 않은 채 서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문치에 왜구격파, 군비강화까지 이로써 고려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성계(太祖)에 의하여 새로운 조선 왕조가 탄생된 것이다. 이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리고 이 해 8월 20일, 9월 16일, 10월 9일 3차에 걸쳐 위차(位次)를 정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내렸다. 공이 가장 큰 1등 공신 16명에게 좌명개국공신(佐命開國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이 가운데는 조인옥이 포함되어 있고, 그 다음으로 공이 큰 11인의 2등 공신에게는 협찬개국공신(協贊開國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이 가운데는 공이 포함되었다.

이 때 공의 나이는 46세였다. 세 번째로 공이 큰 16인에 대해서는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이 가운데에는 조영무가 포함되어 있다. 좌명개국공신이란 천명(天命)을 도와 나라를 세운 공신이라는 뜻이고, 협찬개국공신이란 천명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즈음하여 모의에 참가해서 태조를 추대한 공신이란 뜻이며, 익대개국공신이란 태조에게 뜻을 두고 지조를 굳게 지켜 변치 않은 공신이라는 뜻이다.  공은 1393년(태조 2)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어 수주(髓州:정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으며 의주도(義州道)의 장정들을 군적에 등록시켜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또 1398년(태조 7년)에는 절제사(節制使)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26일에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때 친위군도진무(親衛軍都鎭撫)였던 공은 대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다.  공은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의 명에 의하여 대궐 안에서 숙위(宿衛)하고 있던 갑사(甲士:대궐을 숙위하는 군사)들과 패두(牌頭, 牌將:일꾼들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거느리고 나와 이방원을 도왔다.  며칠 뒤인 9월 1일, 공은 중추원사의흥삼군부좌군동지절제사(中樞院使義興三軍府左軍同知節制使)가 되었다. 9월 5일에는 태조가 왕위를 정종에게 양위(讓位)하였다. 이 날 공은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가 되었다.

다음 달인 10월 1일,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참찬문하부사 조영무 등 12인에게는 정사1등공신(定社一等功臣)을, 상의문하부사였던 공 등 17인에게는 정사2등공신(定社二等功臣)을 내렸다. 1399년(정종 1) 5월 공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고 8월에는 임금을 모시고 날마다 격구(擊毬)를 한 공으로 말 1필을 하사받았다. 이어서 11월 1일에는 종친과 훈신들에게 명하여 각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였는데 이 때 참지문하부사였던 공도 군사를 맡는데 참여하였다. 그 나머지 군사를 받은 자는 모두 혁파되었다. 1400년(정종 2) 1월 28일 제2차 왕자의 난 때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였던 공은 이방원을 제거하려던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4월 18일 사병혁파(私兵革罷)에 불만을 품었다고 하여 공을 참찬문하부사에서 파면시켰다가 5월 8일 복직되었다.

6월 2일 임금은 공에게 대나무로 만든 삿갓과 단비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하사하였다. 7월 2일에는 상왕(태조)에게 잘못 보인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운) 죄로 공을 완산부에 귀양 보내기로 하였다가 같은 날자로 서울 밖에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9월 8일 공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삼았다. 같은 해 11월 13일 정종은 방원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였다. 이로써 방원은 조선 왕조의 제3대 임금 태종이 된 것이다.  1401년(태종 원년) 공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이 되고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그리고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왔다. 하사 받은 재산을 가난한 친족들에게 나눠주었다. 1402년(태종 2) 공은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동북면찰리사(東北面察理使)를 지냈다. 이 해 조정에서는 삼훈신(三勳臣: 開國 定社 佐命功臣)을 이끌고 회맹제(會盟祭)를 지냈다. 즉 공은 고려 말에는 회군공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조판서, 밀직부사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뒤에도 태조, 정종, 태종 등 삼조(三朝)에 걸쳐 개국, 정사, 좌명공신이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의정부찬성사에 이르렀다.

공훈으로 많은 재산을 하사받았으나 모두 가난한 친족들에게 나누어 주고 조그만 초가집에서 살았다.  1417년(태종 17) 윤 5월 19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는 조회하는 것을 그치게 하고 부의(賻儀)를 보내며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장(禮葬)케 하고 양절(良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윤 5월 19일자 한천부원군 조온의 졸기(卒記) 말미에서 보면 "사람됨이 청렴하고 맑으며(廉靜), 따사롭고 어질며(溫良),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었다.

가산(家産)을 일삼지 아니하여 귀(貴)하였으되 능히 절약하고 검소(節儉)하였다. 아들에 의(儀,无后), 완(琓,적장손으로 이여옮), 하(河), 흥(興), 육(育)이 있다" 고 적고 있다.  묘(사진)는 파주시 교하면 오도리 장명산 남쪽 기슭 임좌(壬坐, 경기 파주시 오도동 산 21)에 배위(配位) 정경부인 장씨와 합장되었고 계배(繼配) 정경부인 박씨의 묘는 실전(失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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