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
己卯(1519)士禍에 被害한 趙光祖以下諸賢의 始末을 收錄한 [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 묵서필사본 單冊
<내용> 己卯(1519)士禍에 被害한 趙光祖以下諸賢의 始末을 收錄한 [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 묵서필사본 單冊으로 권두에 歲舍己卯(1639)淸和平山申翊聖謹序가 있다. 상태 대체로 양호하다.
<크기> 19.8×34.4cm
<참고> 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
金育(1580-1658)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己卯士禍와 관련된 인물들의 사적을 모아 기록한 책. 김육은 기묘팔현의 한 사람인 金湜의 현손이다. 권두에는 1639년에 쓴 申翊聖의 서문이 있다. 己卯錄 目錄의 구성은 <八賢傳>과 ‘一時名賢’이라는 제목하에 <革科>·<流竄>·<削罷·別科被薦>·<儒士>·<散班>·<宗室>의 항목이 있다. <팔현전>에 수록된 인물은 領議政 鄭光弼∙左議政 安塘∙左贊成 李長坤∙趙光祖∙金湜∙判書 金淨·應敎 奇遵·申命仁으로 본책에는 조광조와 김식의 기록 일부분이 낙질되어 있다. <流竄>에는 金絿 등 9인‚ <削罷>에는 孔瑞麟 등 33인‚ <散班>에는 成世昌 등 18인‚ 宗室 5인‚ <革科>에는 李延慶 등 17인‚ <別科被薦>에는 徐敬德 등 92인‚ <儒士>에는 朴光祐 등 29인‚ <補遺>에는 申英 등 9인이 수록되어 있다. 팔현에 대해서는 字‚ 號‚ 과거급제여부 등을 쓰고 己卯士禍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나머지 인물에 대한 기재내용은 간략하다. 그러나 수록된 인물이 200여 인이나 된다는 점에서는 기묘사화의 여파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想白본은 표지가 ‘己卯八賢傳’으로 되어 있으나 본책과 내용이 동일하며‚ 다만 신익성이 쓴 서문이 누락되어 있다. <奎 4500>의 ≪己卯八賢傳≫도 동일 판본이다. 본책은 中宗대 개혁정치를 표방하고 나선 己卯士林들의 사회적‚ 학문적 기반과 己卯士禍의 역사적 성격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병주)
기묘록 보유 하권(己卯錄補遺 卷下)
조변 전(趙抃傳)
[DCI]ITKC_BT_1318A_0030_000_0320_2002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조변은 경신생이며 자(字)는 호연(浩然)으로, 조정암(趙靜庵)의 친척 조카(가천재공 현령공파)이다. 안처겸(安處謙)과 젊어서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으며, 뒤에 그의 맏이 모의 사위가 되었다. 비록 학식은 없으나 천성이 밝고 통달하였다. 안처겸이 국문을 당할 때에, 들것을 메는 하인으로 변장하고 드나들면서 안처겸의 안부를 탐문하였다. 송사련(宋祀連)이 바친 문서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혹독한 심문과 장형(杖刑)을 당하고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가 19년 만에 풀려 나왔다. 평생 다리를 앓았는데 세 번 부스러져 뼈가 다섯 조각이나 나왔다. 만력(萬曆) 기묘년에 그의 나이가 80이 되어 여러 손자들이 수연(壽筵)을 베풀었는데, 그는 아직 기력이 건강하여 옛날같이 춤을 추고 시를 지어,
형의 나이 80이요, 아우는 70하고도 하나 / 兄年八十弟稀一
몸은 세상에서 기묘년 봄을 두 번 만났네 / 身世重逢己卯春
지난 일 아득히 감개도 많건만 / 往事悠悠多感慨
차마 다정한 친구와 담론할 수 없구나 / 不堪論與有情人
하였다.
위에 적은 송사련이 바친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조변(趙抃) 등 귀양간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와 그의 친척 이웃 사람들로서, 문서에 이름을 쓰기도 하고 자(字)를 쓰기도 하였는데 그 글자에 착오가 많았다. 또 박의 사위[朴婿]ㆍ김의 아들[金子]이라고 한 것도 있는데, 그것은 이서(吏胥)들이 적은 것이 분명하다. 고발한 문서는 기묘년의 그의 어머니 초상 때의 조객록(弔客錄)에 있다. 중종 때에 풀려 나왔다.


樂全堂集卷之六 / 序
己卯諸賢傳序 [ 申翊聖]
[DCI]ITKC_MO_0335A_0070_010_0190_2003_A093_XML DCI복사 URL복사
余於壬寅年間。得見己卯黨籍一卷。摠敍黨禍顚末。而自靜庵先生以下。凡罹文網者。立傳有詳略。以其受禍之輕重。而列於錮籍者無慮以百數。則一時善類盡之一網矣。此書卽順興安璐所編次。而外王父淸江李公所參定也。余時稚昧。猶能繹以誦之。蓋吾高王父社稷署令君爲諸先正所推重。而曾大父夷簡公少遊於大司成金先生之門。禍作之日。與太學生朴光佑諸人。守闕訟冤。以其妙於端楷。又能疾書。金公魯以諸生造列。斂管讓公寫疏。洎通籍。衮,貞餘孼。以爲黨人而劾之。事載金黃岡繼輝所譔碑銘中。以是吾家世知黨禍事甚悉。嘗聞己卯諸賢。莫不以堯舜君民之志。講內聖外王之學。而其德望重者受禍深。故表章之擧。不能無先後也。今忠淸道觀察使金君伯厚。以己卯八賢傳。問余將欲剞劂而行之世。余受而讀之。旣以書復曰。甚盛擧也。其於化理。得所先務矣。第當時德望重者受禍深。表章之所以有先後也。伯厚乃就其書。頗加去取。實遵安氏所編黨籍之列。又譔諸賢出處事行。以流竄削罷革科者。太學坊民之訟冤者。類以別之。又有附傳。無論貴賤。能左袒於斯文者。咸收錄之。遂成一書。核而文。簡而明。無餘憾矣。吾東方理性之學。圃隱文忠公實始倡於麗季。而遞顯遞晦。不絶如線。至靜庵先生而遹紹寒暄之緖。遡其淵源。擴而大之。遭遇靖陵不世之知。明勖勵相。拔茅彙征。庶幾丕變之化。而中影之蜮。潛機迅發。一時善類。殆盡之一網。噫。千一遘會。若將有爲。而兇邪逞憾。恣其毒害。豈天運不齊。一升一降。無所宰於其間耶。公議之定。不待百年。褒誅之典。少洩志士之痛。則可見其昭昭之靡忒也。伯厚當國家板蕩之餘。膺專省旬宣之任。首刊是書。以爲化民成俗之資。可謂得其先務矣。璐貞愍公之孫。伯厚大司成之玄孫。趾美敦本。後先纂輯。而余不佞獲從其後。以夙所誦言者。克相斯役。其亦幸矣夫。




시대저작자창작/발표시기성격유형권수/책수분야소장/전승
조선 |
김육 |
1638년(인조 16) |
정치서 |
문헌 |
1책 |
역사/조선시대사 |
국립중앙도서관 |
요약 조선후기 문신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내용들을 수록한 정치서.
서지적 사항
1책. 인본(印本). ‘기묘록( 己卯錄)’이라고도 한다.
편찬/발간 경위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과 아울러 중종 때 개혁정치의 주도적 인물로 알려진 김식(金湜)의 현손 김육이 찬술, 간행하였다.
그가 1638년(인조 16) 충청도관찰사로 재직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기호지방 출신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인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기묘당적 己卯黨籍≫과, 안당(安瑭)의 손자이고 안처겸(安處謙)의 아들인 안로(安璐)가 저술한 ≪기묘록보유 己卯錄補遺≫를 바탕으로 간행하였다.
내용
김정국의 ≪기묘당적≫은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94인의 생년·급제·최종 관직만을 소략하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저술된 ≪기묘록보유≫는 ≪기묘당적≫에 수록된 94인에 35인을 보충한 129인의 호와 시호는 물론, 그들의 모습·특별한 재능·인간됨·관력 및 겪은 사건, 친척 관계, 응수시편(應酬詩篇), 사망 연대 등에 관한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기묘당적≫과 ≪기묘록보유≫를 바탕으로 한 ≪기묘제현전≫은 더 많은 인원을 보충한 218인을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분류, 수록하였다.
먼저 8현(八賢)인 정광필(鄭光弼)·안당·이장곤(李長坤)·김정·조광조·기준(奇遵)·김식·신명인(申命仁) 등의 전기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어 김구(金絿)·한충(韓忠) 등 9인의 유찬(流竄:유배), 문근(文瑾)·공서린(孔瑞麟) 등 33인의 삭직과 파직, 성세창(成世昌)·신상(申鏛) 등 18인의 산반(散班:散官, 즉 일정한 직무가 없는 관직), 파릉군(巴陵君)·숭선군(崇善君) 등 5인의 종실, 이연경(李延慶)·경세인(慶世仁) 등 17인의 혁과(革科), 서경덕(徐敬德)·박소(朴紹) 등 92인의 별과피천(別科被薦), 박광우(朴光祐)·최수성(崔壽峸) 등 29인의 유사(儒士), 신영(申瑛)·조원기(趙元紀) 등 9인의 보유 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인물들을 분석해보면, 이른바 사림파에 속하는 인물 가운데에도 가계상으로는 훈구가문 출신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영남지방 출신보다 기호지방 출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사림파의 성립 초기에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 압도적이었으나, 중종 때에 와서는 조광조·김안국(金安國)·김정국 등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 주축이 되어 개혁정치를 이끌어 갔음을 위의 여러 기록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기묘당적≫은 김정국의 문집인 ≪사재집 思齋集≫ 권4에 수록되어 있으며, 김정국 자신이 의식하고 있던 기묘인(己卯人)들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인물은 김정국이 동류의식 또는 공동피해자 의식을 가졌던 사람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기묘록보유≫는 안로의 할아버지·아버지 및 그들과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승(家乘)의 성격도 포함한 기록이다.
따라서, 편견이나 윤색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록된 인물이 ≪기묘당적≫과 거의 일치하고 있어 사림파 집단의 인적 구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이다.
≪기묘제현전≫은 김육의 생존시대, 즉 사림파 주도의 정치가 본격화되어 있던 시기에 기묘인, 즉 중종 때 사림파의 계보가 어떻게 파악, 정리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록이다.
≪기묘당적≫·≪기묘록보유≫·≪기묘제현전≫ 이외에 작자 미상이지만 ≪기묘록보유≫와는 체계를 달리해 기묘년에 화를 당한 사람은 물론, 그 사건을 꾸민 인물들의 전기도 함께 수록한 ≪기묘록속집≫이 있다.
그 내용은 크게 별과시천거인(別科時薦擧人)·좌당인원(坐黨人員)·구화사적(構禍事蹟) 등 몇 부분으로 나뉘어 기술된 것으로, 내용과 체계가 광범위하고 짜임새가 있어 그 가치가 높다.
또, 저자는 분명하지 않으나 내용으로 보아서는 ≪기묘록속집≫의 저자와 동일인의 저작으로 짐작되는 ≪기묘록별집≫이 있다.
이 책은 <제현봉사 諸賢封事>라는 제목 아래 1517년(중종 12, 丁丑)에 김식이 짓고, 이충건(李忠楗)이 연명해 올린 바 있는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한 것 등 6개의 봉사를 수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것은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인물들이 사화 이전에 건의한 문장들을 모은 것으로 또한 그 가치가 높다. ≪기묘록보유≫·≪기묘록속집≫·≪기묘록별집≫은 ≪대동야승≫에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묘록 별집(己卯錄別集)
제현봉사(諸賢封事)
[DCI]ITKC_BT_1320A_0010_000_0010_2002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정축년(1517)에 눌재와 충암이 폐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다. 충암 지음 [丁丑訥齋冲庵請復廢妃愼氏] 冲庵製 -
삼가 생각하옵건대, 제왕(帝王)으로서 천명(天命)을 이어받아 표준[極]을 세우는 도는 처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일을 시작하는 처음에 바른 데서 출발하면 큰 기강과 근원이 질서정연하여 광명(光明)이 위에서 비춰 온갖 일과 교화에 통하여 미침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듯 하여, 어디를 가더라도 바르지 않음이 없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교화가 이루어지기만을 바란다면, 마치 근원을 흐려 놓고 흐르는 물이 맑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주역(周易)》에는 건곤(乾坤)을 앞에 실었고, 《시경(詩經)》에도 관저편(關雎篇)으로 시작하였으니, 배필의 관계는 인륜의 시초이며 온갖 교화의 근원이요, 기강의 으뜸이며 왕도(王道)의 처음입니다. 노(魯) 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면류관(冕旒冠)을 쓰고서 친영(親迎)하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공자는 추연(愀然 슬픈모양)히 낯빛을 변하면서, “두 이성(異性)이 결합하는 경사로써 선왕의 뒤를 계승하여, 천지ㆍ종묘ㆍ사직의 주인이 되는 일인데, 어찌 임금께서는 너무 과하다고 하십니까.” 하고 대답하였고, 제(齊) 나라 환공(桓公)은 규구(葵丘)에서 회맹(會盟)하면서 첫 명령에, “첩(妾)을 아내로 삼지 말라.” 하였습니다. 무릇 공자께서 낯빛을 변하신 것은 애공이 천지ㆍ종묘ㆍ사직의 주인될 사람을 소홀히 여겨 그 예식을 함부로 하려고 한 것을 한심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또 환공은 패자(霸者)이면서 오히려 배필이 중한 줄을 알고 능히 그 명분을 그르치고자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시초를 마련하고 이루는 도리인 바 왕자(王者)로서 삼가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옛적 주(周) 나라가 창건될 때에, 태왕(太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은 모두 성덕(聖德)이 있어서 제가(齊家)의 도(道)를 숭상할 줄 알았고, 예(禮)를 지키어 문란하지 않았으며, 대대로 어진 왕비를 얻어 인륜의 근본을 바로잡았으니, 왕화(王化)의 근원을 맑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주 나라가 처음의 시작을 바르게 하고 근본을 단정하게 하기를 깨끗하고 흠이 없게 하였으며 짙고 두터워서 경박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왕의 교화가 집안에서 시작하여 조정에 양양(洋洋)하게 넘쳐흘렀고, 성대하게 사방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마치, 천지의 조화가 음양에 근본하고 일월성신과 호흡하여, 한서(寒暑)가 순환하여 산천(山川)ㆍ조수(鳥獸)ㆍ초목(草木)에까지 널리 미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지아비는 지아비로서, 지어미는 지어미로서, 아비는 아비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 임금은 임금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 각자 도리를 다하여 조금의 간사함이나 더러움도 그 사이에 섞이지 않아 천지가 편안해지고 만물이 제대로 생육(生育)되기에 이르렀고, 추우(騶虞)와 인지(麟趾) 등의 아름다운 상서가 나타나 장구하게 8백 년이라는 국운을 누렸으니, 어찌 〈관저〉ㆍ〈작소〉(鵲巢 《시경》의 편명, 후비의 덕을 칭송함.) 등의 풍화가 아니겠습니까. 국운이 쇠퇴하기에 이르러서는 내교(內敎)가 무너져서,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정궁(正宮 왕후)을 폐출하여 마침내 오랑캐의 화란을 불러들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첩을 올려서 정궁으로 삼아 예의와 명분을 어지럽히다가 마침내 쟁탈하는 난을 재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당(唐) 나라 고종(高宗)은 황후(皇后)를 폐했다가 마침내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자손까지 끊어졌으며, 송(宋) 나라 철종(哲宗)도 황후를 폐해서 본원(本源)이 무너지니 간사한 무리들이 재앙을 빚어 내어 결국에는 정강(靖康, 1126~1127)의 변고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첩을 부인으로 삼아 떳떳한 체통을 더럽혔던 사람들이야 그 화란이 어찌 적었겠습니까. 위(魏) 나라 문제(文帝)가 곽귀빈(郭貴嬪)을 왕후로 삼으려고 하자 중랑(中郞) 매잠(枚潛)이 논쟁을 폈고, 당(唐) 나라 명황(明皇)이 무혜비(武惠妃)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을 때에는 어사(御史) 반호례(潘好禮)가 간쟁하였습니다. 대저 예부터 치란과 흥망의 자취는 이와 같이 뚜렷하게 징험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제왕의 배필을 중하게 여기고 풍화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자 한다면,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 등이 삼가 보건대, 고비(故妃) 신씨(愼氏)가 폐척을 당해 궐(闕) 밖에 있은 지 거의 12년입니다. 신 등으로서는 당초의 사유를 자세히 알지 못하온대 무슨 큰 사고가 있었습니까. 어떠한 큰 명분에 의해서 이런 너무나 놀라운 일을 하셔야 했습니까. 무릇 임금이 대통을 받들어 선왕의 뒤를 계승하게 되면 먼저 부부(夫婦)의 도를 바르게 하여 천지와 나란히 하고, 안으로는 음교(陰敎 내교(內敎))로써 밖으로는 양덕(陽德)으로 다스려서 묘사(廟社)와 신지(神祗)를 주재하는 것입니다. 대저 배필이란 그 중대함이 이와 같으니, 만약에 부모에게 불순하였거나 종묘ㆍ사직에 죄를 짓지 않았다면, 설사 자질구레한 허물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코 의절(義絶)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명분도 사고도 없이 폐척하였으니 어떻게 종묘를 받들 수 있겠으며 하늘의 뜻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옛적 한(漢) 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원망한다는 이유로 곽후(郭后)를 폐하였고, 송(宋) 나라 인종(仁宗)은 질투한다는 이유로써 황후를 폐하였는데, 당시뿐만 아니라 후세에까지 기롱하고 풍자하여 명군(名君)으로서 큰 과오였다고 여겨 왔습니다. 이제 신씨는 폐출할 만한 사유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폐출하신 것은 과연 무슨 명분 때문이었습니까. 정국(靖國) 초기에 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 등이 신수근(愼守勤)을 제거하고나서 생각하니, 신비(愼妃)는 신수근이 낳았는지라, 그 아비를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세우면 다음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자신을 보존하려는 사심에서 신비를 폐출하려는 모략을 꾸며냈던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이유도 명분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씨는 전하께서 세자가 되시던 첫해부터 점괘에 잘 맞아 좋은 배필로 삼으시고 의식을 갖추어 자전(慈殿)께 뵈었을 때, 고부(姑婦)의 분의(分義)는 이미 정해졌던 것이며,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받드시게 되자 중곤(中壼)에 정위(正位)하여 신민(臣民)의 하례를 받으셨고 종사의 주부(主婦)로서 응하였으니, 전하에 대해서는 유적(䄖翟 꿩무늬가 있는 황후의 제복)의 존엄함이 세워졌고, 조종(祖宗)과 신지(神祗)에 대해서는 빈조(蘋藻 제사 음식)를 받들게 될 희망이 있게 되었으며, 국민에 대해서는 모후(母后)로서의 명분이 분명해졌습니다. 자전께서는 어기고 거슬러 꾸지람을 받으실 만한 일이 없었으며, 제주(第稠)에는 쫓겨갈 만한 허물이 없었으니 귀신과 사람이 슬퍼하고 원망하는 바입니다. 전하께서는 강포한 신하들의 억제를 받아 항려(伉儷 부부)의 중함을 보전할 줄 모르셨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말에 ‘빈천할 때의 친교는 잊을 수 없고, 조강지처는 내쫓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신씨는 대저(代邸)에서 몇해동안 주장(酒獎)을 갖추었고 쇄소(洒掃)를 받들었습니다. 사생을 같이 하기로 맺고, 의기(義氣)로 서로 믿어 암울한 조정의 변란도 함께 겪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귀하게 왕비의 몸이 되어 천승(千乘)을 차지하였건만 미련도 없는 버림을 받았으니, 높고 낮아 환경을 달리함이 한때 높은 하늘에 오르는 듯하다가 다시 아홉 길 못에 빠진 격이옵니다. 지존(至尊)의 배필이며 금슬(琴瑟)의 벗으로서, 임금의 정전(正殿)을 멀리 떠나 여염집에 섞여서 기상(氣像)이 쓸쓸하니, 이 소식을 듣는 자 눈물을 흘리고 그 앞을 지나는 자 탄식합니다. 옛적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오랑캐의 난을 당해서 황급한 중에도 돈독했던 은의(恩義)를 어기지 않았던 일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예기(禮記)》에, “자식으로서 그 아내가 아무리 좋다라도 부모가 좋아하지 아니하면 그 아내를 버리고, 자식으로서 그 아내가 싫더라도 부모가 나를 잘 섬긴다 한다면, 자식은 부부의 예(禮)를 행하여 죽을 때까지 은의를 쇠하게 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아내를 폐출하는 일은 한결같이 부모의 명령을 들어야 함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이번엔 자전(慈殿)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서 왕실의 주부(主婦)를 가볍게 폐체(廢替)하였으니, 주 나라의 왕계(王季)의 일과는 다릅니다. 《주역》에, “부부의 도는 영구하지 않아선 안 된다.” 하였고, 그 말을 부연(敷衍)한 자는, “부부란 것은 종신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합근(合巹)한 예를 지키고, 만세의 시초를 중하게 여겨 감히 옮기거나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의 배필이었던 문정(文定)을 생각지 않으시며, 보불(黼黻)과 빈조(蘋藻)의 주부라는 것도 돌보지 않으시고, 흙덩이를 버르듯 내형(內刑)을 내리시니, 주 나라 문왕(文王)의 일과 다르기도 합니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도는 가정을 다스리는 데에 근본하나니, 한번 가정을 바르게 하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부터 어지럽고 망하게 되는 것은 가법(家法)이 바르지 못한 데에 원인을 두지 않은 것이 없건만, 우리 나라의 가법은 한결같이 정도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태조(太祖)께서는 왕업을 창건하시고 규범을 남기신 성군(聖君)이시나, 총희(寵姬)에게 미혹하여 적서(嫡庶)의 명분을 흐리려 하셨고, 선릉(宣陵)께서도 애매한 사고를 연유로 송(宋) 나라 인종(仁宗)의 잘못된 전철을 밟았습니다. 한 번 근본 세우기를 잘못하자, 그 흐름이 연산(燕山)에게 파급되어 드디어 방탕한 끝에 3강(三綱)이 끊어지고 종사(宗社)가 거의 폐허로 될 뻔하였으니, 그 앙화가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대횡(大橫 거북점에 큰 가로무늬가 나타난 것으로 제왕이 될 조짐이라 한다.)한 길운(吉運)을 얻고, 억조 백성의 촉망에 순응하여 위태로운 사태를 헤쳐 평탄하게 시행하고, 거칠고 어두운 법령을 척결하여 청명한 데로 나아가게 하셨으니 이 시대는 바로 3령(三靈 천ㆍ지ㆍ인)이 눈을 닦고 우러러보면서, 전하께서 혁신하는 날만을 기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마땅히 한 가정의 근본을 다스리고, 천지와 생민을 위해서 만세에 전할 큰 터전을 세워, 해와 달이 하늘 복판에 걸린 것처럼 빛나고 밝게 할 때이건만, 헐떡이며 힘을 내어 떨칠 줄 모르시고, 인륜과 왕화의 근원을 위로부터 먼저 흐리게 하셨습니다. 이러고서 다스려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 많은 의혹을 사게 됩니다. 아, 어찌 전하 혼자의 허물이겠습니까. 당초에 권세를 빙자하고 일해 온 신하들은 베어 죽여도 그 죄는 오히려 남을 것입니다. 원종(元宗) 등이 어찌 명분의 중대함이 천지와 같이 엄절하여 범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마는 오직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간교한 계락이 앞섰던 까닭에, 방자하게 돌아봄도 기탄함도 없었던 것입니다. 중국에 보낼 소초(疏草)를 잡은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즈음을 타서, 전하께서는 오직 그들이 하는 바를 어기거나 거스리지 못할 것이다 하여, 임금을 겁박하여 손바닥에 놀리듯 하면서 국모를 내쫓아 새 새끼 팽개치듯 하였으니, 이를 차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 심사(心事)를 추측하면 동탁(董卓)과 조조(曹操) 같은 행동인들 무엇을 꺼리겠습니까. 신하로서 반역할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주벌하는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로서 바로 이 따위 무리 때문에 만든 것이겠습니다. 만약 신씨가 죄인의 소생이므로 지존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종묘 제사의 주부가 될 수 없다는 것으로 핑계를 삼더라도, 수근(守勤)의 죄는 본래 종묘 사직에 관련되지 않았으니 신비에게 무슨 누(累)가 되겠습니까. 설사 종사에 죄를 지어 죽음을 받았다 하더라도 신비는 간여한 일이 없었으니, 허물로 잡아 논급(論及)할 바가 아닙니다. 옛적 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에 곽씨(霍氏)가 반역을 모의하다가 3족이 베임을 받았으나 곽후(霍后)는 간여하지 않았다 하여 폐출당하지 않았고, 우리 나라에서도 심온(沈溫)이 헌릉(獻陵)에게 죄를 받았으나 소헌왕후(昭憲王后)께서는 옥 같은 몸에 아무런 욕도 받지 않았으니, 지나간 역사에서도 이를 분명하게 고징(考徵)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수근은 국가에 관계된 죄가 아니었으니, 주관 의친(周官儀親)의 법에 따른다면 비록 용서하여 목숨을 온전하게 하여도 괞찮은 일이지만, 이제, 이미 죄주었고 또 신비에게도 누를 입혀 폐출하여야만 했으니, 이것은 자신들의 몸만 아끼고 임금은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왕실의 주손(冑孫)으로서 대통을 이었으니, 명분이 바르고 공론이 순조로와 3대(하(夏)ㆍ은(殷)ㆍ주(周))의 세 대를 계승하던 일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었건만, 원종 등이 국사를 도모한 것이 착하지 못하여서 전하를 쇠란한 세대에 서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연산(燕山)은 지극히 무도하여 삼강(三綱)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도리가 없었으므로 신(神)이 싫어하였고, 조종(祖宗)이 의절(義絶)하였으며 친척이 배척하였고 인심이 떠났으니, 비록 왕위에 앉았을지라도 실상은 왕위에서 옮겨진 외로운 필부(匹夫)로서 이성(異姓 다른 성을 가진 사람)에게 척살(刺殺)될 뻔하였습니다. 다행히 신명의 보이지 않는 도움과 사방(四方)의 구가(謳歌)에 힘입어, 3보(三寶 토지ㆍ인민ㆍ정치)가 전하에게 귀속된 까닭으로 전하께서 왕위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저 대통을 이어 대를 계승하는 것은 천지 고금의 대사(大事)이니 마땅히 명명백백하게 하여 실올만큼도 속이거나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태양이 하늘 복판에 걸려 있어 만물을 명쾌하게 보는 것과 같은데, 어찌 구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정(反正)하던 처음에 마땅히 대비(大妃 인목대비)의 명을 거행하여 연산이 천지와 조종과 신민에게 버림받은 죄상을 낱낱이 따져 묘사(廟社)에 아뢰고 천자에게 고하여 명(命)을 청한 다음에 전하께서 빛나게 대위(大位)에 올랐어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와 같이 했더라면, 대통을 이어 대를 계승한 도(道)가 명명백백하여 속이거나 감춤이 없고 사방에서 만세토록 하늘에 걸린 태양을 우러러보듯 하였을 터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원종은 대의에 어두워서 전하께서 대통을 이은 광명 정대함을 우선 선대(禪代)했다는 문투(文套)를 빌려 천조(天朝)를 속였으니, 애석합니다. 전하께서 강포한 신하에게 억제를 받고 가교(家敎)마저 그르치어 인륜의 근본과 왕화(王化)의 근원과 정시(正始)의 도리를 능히 빛내고 넓게 선양하지 못하셨으니, 무엇으로 중화(中和)하고 위육(位育)하는 공을 이루며 하늘의 마음을 편하게 하시겠습니까. 온갖 교화가 따라서 날로 잡박(雜駁)하여지고 풍교가 자연히 퇴폐하여진 것입니다. 괴상한 기운이 자욱하고 음양의 순환이 질서를 잃었으며, 일월(日月)이 엷어지고 침식되며 수재와 한재(旱災)가 비등하고, 꽃과 열매가 겨울에 피며, 심한 서리가 여름에 내리고, 장맛비ㆍ뜨거운 볕ㆍ바람ㆍ우박ㆍ별ㆍ무지개ㆍ곤충 따위 요사스러운 재변이 거듭 나타나곤 합니다. 근래에 후정(後庭)에게 애도하는 반열(班列)을 철거한 지 얼마 안 되어 장경왕후(章敬王后)께서 갑자기 빈천(賓天)하시고 곤위(壼闈)가 참혹하니, 생각하건대, 하늘이 전하에게 깊이 경고한 것인가 합니다. 《한서》〈유향전(劉向傳)〉에, “화평(和平)한 기운은 상서를 이루고, 괴상한 기운은 재앙과 변이[災異]를 이룬다. 서녀(庶女 빈천한 여자)라도 원통함을 품고 죽으면 6월에도 서리를 날려 제비[燕]를 친다.” 하였습니다. 저 빈한한 마을 미천한 여자가 하늘과 아무런 간여도 없을 것 같지마는 그 원통한 것으로 맺힌 기운이 오히려 서리를 날리는 재변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존의 배필로서 천지와 묘사의 주부였으니, 신인(神人)과 상제(上帝 하느님)도 당연히 돌봐야 할 터이건만, 연고도 없이 폐출하여 적막한 집안에서 길이 그윽한 고민을 맺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천지의 화평한 기운을 해롭게 하였으니, 여러 가지 요사스러운 기운이 거듭 잇달아 오는 것도 괴이할 것이 못 됩니다. 성상(聖上)께서도 여기까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었습니까. 아, 기왕의 잘못은 할 수 없거니와 어찌 다시 바로 할 수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마음 한 번 돌리시는 데에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내정(內政)에 주장이 없으니 이때를 틈타서 꺼림없이 결단하시어 신비를 다시 곤전(坤殿)의 위(位)에 바로잡으신다면 천지의 마음이 편할 것이요, 조정의 신령이 마땅하다 여길 것이며, 신민의 소망에 부응(副應)하는 바가 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자리(왕후의 자리)를 누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미 떨어진 근본을 보존하고 이미 어긋났던 옛 은의를 온전하게 하시면 이것은 바로 큰 의리와 정당한 도리에 합치되는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령 어떤 자가 이미 폐출되었다는 이유로 망령되게 이론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전일에 폐비하자고 주장하던 신하에게 아부하여 형편을 관망하고 다시 전하의 가법(家法)을 어지럽히려는 데에 불과합니다. 원종이 비록 왕실에 큰 공이 있었다 하나 그 당시에 천명과 인심이 다 전하에게 귀속하였으니, 이 무리가 아니더라도 신기(神器 왕위)는 딴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침 천명과 인심의 기회를 타서 힘을 썼던 것인데, 그 공을 자부하여 방자하게 군부(君父)를 겁박하고 국모를 추방하여 천하 고금의 대의를 범하였으니, 이는 만세의 죄인입니다. 공으로써 죄를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발호할 때에 전하께서는 확고하게 폐비하라는 청을 듣지 않으시고 협제(脅制)한 죄상을 살피어 명백하게 형법(刑法)을 바로하였더라면 옳았을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못하시고 그들을 본디와 같이 영귀(榮貴)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공에 대해서는 흡족히 포상한 바가 되었습니다. 지금 원종이 비록 죽었으나 마땅히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서 관작을 추탈하고 중외(中外)에 효유하여 당세나 후세에게 큰 명분은 절대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을 환하게 알려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몇 가지 일에 대하여 의리를 바탕으로 처리하고 제정하여 지체하고 의심하는 바가 없으시다면 이왕의 잘못을 깨끗이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인륜의 근본과 왕화의 근원과 정시(正始)의 도리가 맑고 빛나서 천지가 막혔다가 다시 활짝 갠 것 같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또 정일(精一)하고 근독(謹獨)하시어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바탕을 미루어 모든 정사를 확충하실 수 있다면, 주(周) 나라의 인지(麟趾)ㆍ추우(騶虞)와 같은 풍화도 이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왕업은 8백 년을 넘어 만세 무궁하기까지 이를 것입니다. 신 등이 소원한 신하로서 외람되이 지위에 넘치는 짓을 했다는 꾸지람을 받게 됨을 피하지 아니하고, 감히 전하의 귀를 더럽히는 것은 진실로 이 몇 가지 일이 명분과 의리에 관계된 지극히 중하고 또 큰 것이므로, 마음속에만 접어두어 한 번이라도 임금에게 아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 등이 가슴에 분하고 억울함을 품은 지 오래였습니다마는 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은, 장경왕후께서 곤위(壼位)를 주장하시는데 만약 신비를 복원하면 장경왕후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장경왕후께서 빈천하시고 곤위가 다시 비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때가 바로 신비를 반정할 기회이며 또 말을 구하시는 때를 당하였으므로, 신 등이 급급하게 곡진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방금 하늘의 주지함이 그치지 않고 정치 교화가 순수하지 못하며 온갖 일들이 향방(向方)이 틀어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힘껏 하시되 오직 공경하시어 천심을 편하게 하시기를 엎드려 원하옵니다. 신 등의 구구한 회포에 억울한 생각이 아직도 많사오나 모두 말씀드리기 어렵사오니, 전하께서는 굽어 통촉하시옵소서.
정축년(1517)에 한송재가 지평을 사직하고 바로 당시 폐정을 진소하다.[丁丑韓松齋辭持平因陳時弊]
소신(小臣)이 지난달 그믐에 어미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궐문에 나아가 사표를 바치고 어미 생전에 상면하기를 기원하였더니, 지나친 은혜를 내려주시어 말미를 얻어 남쪽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미의 병세를 살피오니, 두통과 어질병으로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손과 발에 생긴 종기로 통증이 온몸에 뻗치고 있사온 바, 이 증세는 평소부터 앓던 것이나 지금에 더욱 심해졌습니다. 나이가 노쇠하였고 원기가 점점 약해지니, 마침내 구호하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의원의 말이, 이 증세는 목욕하는 것이 좋다 하기에 모시고 온양(溫陽)에 왔습니다. 신의 집에서 겨우 두어 참 쉬면 갈 수 있는 거리로써 묘시에 떠나 신시에 도착하여 이제 목욕을 하였습니다만 목욕을 마치자 또 갑자기 이질에 걸렸습니다. 몸은 약하고 힘은 빠졌으며 숨결이 급해지고 땀을 한없이 흘리는데다가 날씨는 벌써 위엄을 부리고 있으니 여러모로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시탕(侍湯)하고 있사온 바, 정리로 보아 차마 떠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조리(調理)하고 간호하는 동안을 기다리려고 한다면 다시 열흘이나 한 달이라는 오랜 날짜가 걸리게 될 것입니다. 소신이 직사(職事)를 떠난 지 벌써 20일이나 되었고, 대헌(臺憲)의 임무는 잠시라도 비울 수 없으니, 전하께서는 이 정상을 굽어 살피시어 소신의 직함을 경질하시와 모자의 정을 다하도록 인정(仁政)을 드리우소서. 《충암집》에 잘못 기록되었음. 아, 신이 언관(言官)으로 있은 지 벌써 백 일이 넘었습니다마는 분분하게 대열만 좇았을 뿐이었고, 반성하건대, 광구(匡救)한 보람이 너무도 부족하였습니다. 이제는 어미의 병으로 드디어 벼슬에 돌아가지 못하오니 말을 펼 수 없고 책임을 이행할 수 없사옵니다. 평소에 뜻하였던 바를 깊이 생각하면 실상 부끄러울 뿐이오나 충정(衷情)을 누를 길 없어 보고 기록한 바를 대략 아뢰나이다. 신이 처음 올 때가 마침 초가을이었습니다. 지나온 고을이 하나뿐이 아니었고 만나본 사람도 하나뿐이 아니었습니다. 들에서는 벼 농사 형편을 살폈고 백성을 만나면 민간의 급한 실저을 들었사온 바, 참으로 말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밭에 풀만 있고 쟁기질도 하지 않은 것이 있기에 물었더니, “지난해에 가물었고, 봄에 양식이 떨어져 자력(資力)이 모자라 심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묘종(苗種)은 있는데 김매지 않은 사람은, “금년 보리가 여물지 않아 양식이 떨어져 호미질을 못하였다.”는 것이었고, 모종은 있으나 이삭이 빼어나지 못한 사람은, “배가 고프고 힘이 탈진하여 때 늦게 심었고, 가을 들어 김매었다.”는 것이었으며, 이삭은 있어도 알 들지 않은 사람은 말하기를, “우박도 오고 가물기도 하였으며 바람을 맞아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민간 중에는, 혹은 묵은 곡식이 떨어졌는데 햇곡식이 아직 여물지 않아서 의창(義倉)에 조곡(糶穀 장리곡식)을 말하는 자가 있기도 했으며, 지아비는 병역에 나가고 지어미만 남아서 봄이 와도 밭갈이를 할 수 없고 가을이 와도 수확할 것이 없는 자도 있었고, 혹은 저녁 끼니를 못 먹고 혹은 아침 밥도 못 먹은 채 푸른 밭에서 옷자락을 들고 이삭을 가려 뽑아 낱낱이 따는 자도 있었으며, 봄에 천연두를 앓고 여름에는 염병을 앓게 되니, 겨우 두어 이랑에다가 조[粟]를 심었으나 아직 타작도 하기 전에 죄다 공부(公府)에 실어가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혹 토양이 비옥하고 못이 깊으며 벼가 무성하고 열매가 실한 경우도 있기에 물어 보니, 이는 대체로 보아 부호의 집과 세도하는 무리들의 전지(田地)라는 것이었으며, 땅이 메마르고 묘종이 피어나지 못하고 황무(荒蕪)하여 벼가 성숙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피폐한 백성의 전지였습니다. 토양의 성질에는 걸고 메마름이 있으며 백성의 재력에는 넉넉하고 모자람이 있겠지마는, 백성들 중에 곤란하고 굶주리는 것은 모두 서민이었고, 전지의 겉흙이 깊고 비옥한 것은 모두 부호들이 겸병하고 있어서, 수재가 있거나 한재가 있거나, 경우에 따라 농사 방법도 또한 다르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본 바로써 백성들의 말을 듣고 들판을 자세히 살피면서 백성들의 슬픈 심정을 생각하니, 슬퍼지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납니다.
신이 일찍이 조정에 있을 적에 사람들이 금년도 풍년이라 하기에 신도 그런 줄로만 여겼더니, 이제 와서 본 바로는 조정에서 듣던 것과 너무 다릅니다. 아, 신이 젊었을 때, 초야에 살면서 민간의 어려움을 고루 겪었건만, 잠시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이미 그 근본을 궁구하지 못하고 남들이 옮기는 말에 속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비단옷을 입고 자라 화려한 집에 출입하며, 풍족한 진미(珍味)를 먹는 자가 어찌 민간의 형편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보지 않으면 실상을 밝힐 수 없고 듣지 아니하고는 그 실정을 짐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저 호세(豪勢)하는 집은 재력이 넉넉하고 전지마다 못이 있어서, 깊이 갈고 여러 번 김매니, 벼농사가 풍년 아닐 때가 없으며, 이로 인해서 남에게 자랑하는데 그 말이 저자 거리와 조정에까지 전해져서 벼가 이미 실하다는 등 연사(年事)도 풍년이라는 등 하는 것입니다. 무릇 전해 듣는 자는 진실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엄연하게 풍년들었다라고 말하니, 어찌 크게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민들은 힘이 모자라고 재력이 이미 다하여 때가 지난 다음에야 심고 미처 김도 매지 못하니, 비록 바람이 조화롭고 비가 순조로운 때를 만난다 하더라도 오히려 흉년이란 말은 면치 못합니다. 하물며 지난해 봄엔 매우 굶주려서 갈고 심는 일을 거의 자력으로 못하였고, 드디어 4,5월에도 눈이 오고 서리도 내렸으며, 요찰(夭札 젊은 사람의 죽음)마저 생겼고, 6월에도 우박이 왔으며, 7월에는 가물었습니다. 더구나 기후는 숨막힐 듯 추위가 절박하고 바람은 미친 듯 차가워서 만물이 윤택하지 못하지 벼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였습니다. 간혹 수확할 만한 전지가 있더라도 끝내 훼손된 것까지는 메꾸지 못합니다. 이러므로 백성은 본업을 잃어 새가 수풀에 흩어지듯 사방으로 흩어지며, 그러면서도 애달파하고 원망하는 심정을 윗사람에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 고을이 이와 같으니 저 고을을 알 수 있고, 한 도(道)가 이와 같으니 여러 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한 가지만 들어 말하여도 만 가지에 통하고, 한 쪽만 보아도 천하를 다 짐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남방(南方)은 금년 농사에 재변이 심하지 않다.” 하는데도 제가 본 바는 이와 같으니 평안ㆍ황해 몇몇 도는 짐작만으로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 재변이 극심하고 백성의 원성이 사무치기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니, 신이 두려워하기는 정사를 좀먹고 나라를 망쳐버릴 근원이 폐부(肺腑) 사이에 심어져, 움이 자라고 가지가 뻗어나서 이런 재변을 나게 한 것인가 합니다. 만약 이런 것을 살피지 아니하고 도리어 뜬말을 믿어서 시절이 이미 순조롭고, 연사도 풍요하다 하여 백성에게 조세를 거두면서 재량(裁量)할 줄 모르고 백성을 부리면서 쉬게 할 줄 모르면, 하늘은 변괴로써 더욱 꾸짖고 백성은 살아 남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천재(天災)와 세려(歲沴 해마다 오는 요기(妖氣))는 이미 구할 수 없으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기근을 구휼하는 정책은 진실로 모르는 척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계책과 조정의 의논에서 이를 간과하지 않으리라 생각되오나, 신도 또한 관견(管見)이 있습니다. 무릇 백성들의 근심은 재상(災傷)을 명백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거나 등분(等分 수확량의 등급을 매기는 것)을 공평하게 정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바 조세를 부과하는 문호와 공물(貢物)을 바치는 길이 모두 여기에 관계되는 것이오니 진실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監司)가 수령(守令)을 가려 보내서 답사하게 하면, 수령은 수확이 줄었는지 열매가 실한지를 돌아보지 않고 큰 길만 따라 가다가 위관(委官)에게 부탁하면, 위관은 또 서리(胥吏)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서리는 또 길 걷고 물 건너는 것을 꺼리어서 편하게 몇 동리만 다니면서 닭을 잡고 밥을 짓게 하여 백성의 재물과 짐승만 없앱니다. 하물며 서리는 뇌물 바치는 자를 이(利)롭게 여기는 까닭에, 세력이 강하고 교활한 자에게는 혹 실한 것인데도 재해를 입었다고 보아 주고, 빈천한 자에게는 혹 재해를 입은 것인데도 실한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수령들이 힘쓰는 것은 추렴[出斂]을 많이 하는 데 있는 까닭으로 흉년이 들어도 흉년이라 하지 않고, 조금 풍년이 들면 크게 풍년이 들었다고 등급만 높이 매기어 그 나누임을 분명히 하지 않습니다. 애닯게도 이 어리석은 백성은 극도에 달한 곤란을 어디에 호소하겠습니까. 심지어 김매지도 여물지도 아니한 전지를 가지고, 처음에는 서리에게 침해를 당하고 끝에는 수령에게 곤란을 당합니다. 혹은 환자곡(還上穀)이라는 명목으로 금년과 지난해에 누적된 바가 있다 해서, 혹은 공물이라는 명목으로 방납(防納)과 직납(直納)이라는 구별이 있다고 해서, 전세(田稅)는 순열(順列)에서 벗어나고, 거두어 가는 품목은 고슴도치 털같이 많아 백성들은 따를 길이 없으매, 혹 전지를 팔아 공가(公家 관청)에 갚기도 하는데, 이익은 부잣집에 돌아가니, 집에 남은 양식이 없어, 혹 사방으로 흩어져 가면 곧 일족(一族)을 내쫓아 사방으로 나누어 놓고는 반드시 명목을 세워 교묘하게 수탈한 다음이라야 그만두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염(閭閻 동리)은 점점 비게 되고, 군정(軍丁)이 날마다 줄어들며, 전지는 더욱 황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 된 자는 바라만 보고 어쩔 줄 몰라 연사만을 탓할 뿐, 애석하게 여기고 나가서 살피지도 않습니다. 하물며 묵은밭에 조세를 거두는 것은 묵은밭을 개간하는 데에 게으른 자를 징계하려는 한 가지 일이었건만, 지금은 혹 자력이 모자라서 심지 못했거나, 양식이 떨어져 호미질을 못한 것, 도망쳐서 묵게 된 것, 묵어서 황무하게 된 것인데도 굶주려 부황(浮黃)난 백성한테 감히 게으름을 책망하며, 죽은 사람을 잡고서 억지로 조세를 요구하여, 이웃과 마을이 피해를 받고, 골육끼리 이별하는 바, 이것은 묵은밭을 개간하는 것을 권장하려는 당초의 본뜻이 아닙니다. 대개 조종께서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한 것은 착한 정사를 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제도가 통하지 않아서 다스림이 성공할 수 없고 법령이 흔들려서 백성이 편하지 못하면 고치는 것만 못합니다. 혹 논의하는 자는, “조종께서 창시(創始)한 제도를 갑자기 고칠 수 없다.” 하여, 이런 병통을 보면서도 눈을 딱 감고 구제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리어 막아 버리니, 참으로 다스리는 체통을 알지 못함이 심하기도 합니다. 같은 제도라도 때에 따라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며, 다스리는 데에 따라 그대로 두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는데, 변혁해서 통하게 하고 그 시대에 맞추어 시행하는 것이 하늘의 도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어지러운 세대를 이어 맡아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대저 난세(亂世)를 이어받고 치세(治世)를 이어받음에 따라 형세가 다르고 도도 같지 아니합니다. 만약 치세를 이은 임금이라면 삼가 조종의 성헌(成憲 일정한 법)을 지키는 일이 옳겠지만, 어지러운 세대를 맡은 세상에서는 물정(物情)이 바뀌어졌고 인심이 변했으며 법은 해이하고 도는 변했으므로 진실로 일률적인 기강과 규칙만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먼저 묵은밭에 거두는 조세를 혁파하여 조금이나마 빈궁한 백성의 원통함을 위로하고 또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으로서 명민하고, 정성스러운 자를 가려, 어사(御史)라는 호칭으로 농촌에 드나들게 하여, 그 해의 풍흉을 살피고 피해를 조사하며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널리 탐문하여, 서리들이 농간하지 못하게 하고 수령들도 그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수령으로서 매우 삼가지 아니하고 공정하지 못한 자는 특별히 죄로 유배하든지 죽이든지 하고, 아울러 그들의 자손도 금고(禁錮)하며, 서리로서 침탈하여 백성을 병들게 한 자는 그 중에서 가장 악질인 자를 효수(梟首)하여 사방에 회시(回示)하면, 사람들이 징계할 줄 알아서 간사함이 전혀 번지지 못할 것입니다. 또 백성이 가엾고 슬프다는 조서(詔書)를 감사와 수령에게 하유하여 지난해의 환자곡은 거두지 말 것이며, 또 사채(私債)로 인한 침탈을 엄금하고, 다만 당년(當年)에 나누어 준 곡식만을 수납하여 다음해에 대비하게 하시되, 곡식이 여물지 않았거나, 수확이 없는 고을은 혹 수량을 감해 주고 혹 거두지 못하도록 하신다면, 백성들이 거의 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정당(政堂)에 납시어 백관을 거느리시고 아침부터 강론하시고, 늦게 수라를 잡수시는 것은 다만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곤란은 이런 형편에 이르렀는데, 진작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아니하니, 상하가 서로 퇴미(頹靡)한 경지를 바라보기만 하고, 마침내 구제하지 말아야 옳습니까. 대저 물은 격류(激流)가 아니면 멀리 흐르지 못하고, 명령이 엄하지 않으면 일이 되지 않습니다. 이 두어 가지 일을 만약 앞으로 열흘 동안을 넘기면, 벼는 반드시 다 수확될 것이나 서리(胥吏)들은 벌써 간계를 부리게 될 것이니, 사후에 비록 적발하여서 죄를 처단하더라도 다만 그 사람만 죄받았을 뿐이고, 백성에게는 아무 혜택도 미치지 못합니다. 간계를 막으려면 일이 벌어지기 전에 하는 것이 낫고, 덕을 입히려면 일찍 도모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니, 전하께서는 다시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제의(提議)하는 자 중엔, “연사가 그렇게 흉년은 아니니 국가 수용(需用)을 여유 있게 하지 않을 수 없고 관용물자(官用物資)를 저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창고에 비축할 것을 반드시 다 거두고자 하며, 수확량 등급을 엄하게 하려 들어, 백성에겐 각박하더라도 공용(公用)은 풍부하게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손발의 살을 깎아서 배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굶주리더라도 손발이 남아 있으면 그래도 구할 수 있거니와, 손발이 없는데 배만 남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정 안에서의 경우, 일 없는 관직과 필요 없는 비용은 없애야 하고, 외방(外方)에서는 고을마다 정해져 있는 공물의 명목과 액수를 감해야 하며, 심하게 말한다면, 위로는 후궁(後宮)의 수효를, 아래로는 경ㆍ대부의 녹봉도 모두 감해야 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장구한 계책은 생각지 않고 백성만 들볶으면 이것은 백성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신하이며, 백성은 굶주리는데 흉년이 아니라고 하면 이것은 임금을 속이는 신하입니다. 아, 조정은 사방의 근본이건만 서리는 수령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수령은 감사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며, 감사는 조정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만 있습니다. 아, 지금 조정에는 좋고 나쁨이 명백하지 않으며, 간사함과 정직함이 뒤섞였고, 옳고 그름이 혹 흐려지고 있으며, 공적으로 사적으로 서로 속여, 높은 벼슬에는 반드시 군자가 있지 않고, 낮은 반열에는 반드시 소인(小人)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선비는 일정한 뜻이 없고 습속은 정해진 방향이 없어, 동쪽을 배반하면 서쪽으로 달려갑니다. 혹은 의기(義氣)에 따라, 혹은 세도(勢道)에 따라, 혹은 술잔에 따라, 혹은 잡박(雜駁)한 대로 떼지어 모여들어서 경술(經術) 있는 사람을 오활하다 지목하고 충신을 가식(假飾)한다 비웃으며, 학문이 밝은 사람을 꺼리고, 행검(行檢)을 닦는 사람을 그르게 여겨서, 겉으로는 활달한 행동을 하는 척하면서 남모르게 자신만을 이롭게 하려는 욕심을 구상합니다. 그 중에 혹은 몰래 딴 배짱을 품어 말은 해도 충심을 다하지 아니하고, 기미(機微)를 감추어 형편만 살피는 자가 있으며, 혹은 교묘한 말과 상냥한 낯빛으로 이쪽 저쪽 양편을 오가면서 선동하고 시기하는 자도 있습니다. 사대부의 버릇이 이와 같으므로 거짓과 그릇된 일만 자라나고, 나라 일은 날로 무너지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만 어진 자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불초한 자가 능히 번성하지 못함은, 얼마 전에 큰 난리를 겪었기에 사람마다 잘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며, 전하께서는 착함을 좋아하시고, 공경(公卿)은 어진 사람을 몹시 꺼리지 않기 때문인가 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마음에 강대(强大)한 뜻이 없으시고, 대신은 일을 계획하면서 모두가 고식적인 병폐가 있어, 비천한 관습만 따르고 도리어 원대한 계획은 싫어하며, 잘하려는 자는 의심을 받고, 나쁜 일을 하는 자는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이는 식견 있는 자가 남모르게 슬퍼하고 남모르게 눈물 짓는 까닭이옵니다. 만약 전하께서 덕을 함양하는 데에 태만하여 어짊을 숭상하는 길이 막히고, 대신은 뭇사람의 깔깔거림만을 즐겨하여 사사로운 지모(智謀)가 앞선다면, 임금은 믿을 곳이 없고, 아랫사람은 지킬 바가 없어져 간사한 무리들이 궐내에서 거드럭거리고 충실한 무리들은 산림(山林)에서 눈물 지어 나라는 거의 전복될 것입니다. 대개 물건을 옮기려면 자루를 잡아야 하고 백성을 교도(敎導)하려면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도학(道學)을 밝혀 마음에 통하고, 사랑함과 미워함을 공정하게 하여 시행하는 데에 응하며, 공경(公卿)과 재상(宰相)을 권면하여 순리를 따르게 하옵소서.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운 것도 잘 살피고, 옳은 말을 들으며 행동도 보옵소서. 착한 일을 좋아하되 따르지 못할 듯한 태도로 노력하고, 악한 일은 나에게 관계된 것이 아니라도 꺼리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군자인 줄을 알면 심복같이 친하시되, 친할 뿐 아니라 반드시 높은 관직에 둘 것이며, 그 사람이 소인인 줄을 알면 독사같이 버리시되, 버릴 뿐 아니라 반드시 귀양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것을 밝게 보여서 감동하여 일어나는 길을 활짝 열면, 조정에서는 온 집사(執事)들이 외방에서는 모든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착한 일을 본받아야 하고, 악한 일은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충심으로 공사를 행하여 양심껏 백성을 구휼할 것이니, 사대부의 바르지 못함을 왜 걱정하며, 백성을 보살피지 못함을 왜 염려하겠습니까. 사람은 정해진 성품이 없으므로 가르치면 착한 데로 옮길 수 있고, 세상에는 일정한 습속이 없으므로 변화시키면 아름답게 고칠 수 있는 것이어서, 어둡고 어리석은 자를 현명하게, 간사한 자를 충직하게 할 수도 있으니, 변화시키는 기틀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청구(靑丘 우리 나라의 별칭)는 중국의 동쪽 연변지대(沿邊地帶)로서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3국(三國 신라ㆍ고구려ㆍ백제) 이전은 말할 수 없거니와 3국으로부터 고려를 거치면서 세상은 더욱 허탄한 것을 숭상하며, 법망이 엉성하고 절목(節目)이 소루하고 제도가 간략하여 부끄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본조에 이르러서 아름다운 예악과 착실한 인의(仁義)는 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미개한 풍속을 면하지 못했고 사대부는 염치와 사양을 숭상하지 않아서 윤리를 다 펴지 못했고, 교학(敎學)도 그 방향을 못 찾아 임금과 신하 사이엔 정이 막혔고, 조정의 예절은 옛날 같지 못합니다. 나쁜 것은 털어 버리고 착한 것은 보태어서 새롭게 해야 할 기회는 바로 전하의 손에 달렸는데, 정사를 도모하고 다스림을 힘쓴 지는 벌써 1기(紀)가 지났으나 아직도 나타난 효과가 없습니다. 세월은 사람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기회는 또 잃기 쉬운 것이어서 신은 그윽이 슬퍼합니다.
아, 소신은 시골 출신으로서 외람되게 차제 아닌 발탁(拔擢)을 받아왔으나 학문이 얕으면서 뜻은 소탕(疏宕)하고 지위는 낮으면서 말은 고항(高亢)하니, 임금에게 버림받지 않더라도 반드시 남한테 화(禍)를 받을 것입니다. 하물며 신의 아비는 늙었고 어미는 벌써 병중이며 신도 또한 위장에 병이 있어서 살이 빠지고 뼈가 드러났으니, 조정에 어찌 오래 있겠습니까. 바라는 바는, 신의 말을 오활하다 마시고, 때로 마음에 반성하시며, 다스림이 족하다 하여 게으르지 마시며, 악을 제거하였다 하여 방심하지 마시고, 뜻있는 사람은 그 재주를 다하게 하고, 백성을 본성대로 이루게 하신다면, 신은 비록 말라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신은 마음속에 격절(激切)한 바 있어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면서 삼가 죽을 줄 모르고 아뢰나이다.
무인년(1518)에 홍문관에서 소격서를 혁파하기를 청하다. 정암이 부제학 때 [戊寅弘文館請革昭格署] 靜庵副提學時
삼가 생각하옵건대, 지금 소격서를 설치하여 도교(道敎)를 선포하는 것은 백성에게 사교(邪敎)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성대히 이를 좇아 받들고 있지마는 실지로는 머뭇거리며 따르지 않고 있으니, 밝고 밝은 의리에도 어긋나고 분명히 허탄하고 망령된 형상입니다. 이는 진실로 군신(君臣)에 있어서 사(邪)와 정(正)의 나누어지는 바이고 정치에 대해서는 순조로워지거나 어지러워지는 이유가 되며, 상제(上帝)께서 기뻐하고 성내는 조짐에 해당하는 것이니, 왕자의 정사라면 없애고 막아야 할 일입니다만, 이제 도리어 높이고 숭상하여 관청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어 받들며 제사[醮祭]하여 섬기면서 제향(祭享)해야 하는 신(神)이나 되는 듯 공경하고 있습니다. 번성한 축도(祝禱)로 간귀(奸鬼)를 제사하고 있으니, 허탄한 가르침으로 백성을 인도하여 온 세상을 괴이한 곳으로 몰고 가려는 것입니까. 아, 백성들이 변치 않고 덕(德)으로 여기는 것은 없으니 오직 임금의 교화를 덕으로 여길 뿐입니다. 임금이 천명을 받들고 하민(下民)을 거느리는 일에 있어서 자기 몸부터 솔선하는 방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의의가 어떻습니까.
조정에서는 이 점을 생각하고 염려하여 간사함을 없애는 데에 뜻을 두고, 마음은 정도(正道)를 부식하는 데에 전념해야 합니다. 논의를 벌린 지가 열흘이 넘고 달이 넘었습니다. 대신이 시작하여 대간(臺諫)이 극론하였으며, 시종하는 신하도 또한 충심으로 아뢰었습니다. 온 나라 신민(臣民)이 스스로 새롭게 하기를 힘쓰며, 함께 대도(大道)를 생각하여 전하의 덕음(德音)을 눈을 비비며 기다리고 있건만 천청(天聽 임금의 말씀)은 오히려 막연하기만 하십니다. 강단(剛斷)을 외면하고 유연함에 사로잡혀 머뭇거리기만 하고 용단을 내리지 못하시니, 하늘과 사람 사이에 신뢰와 감각이 서로 막히었고, 임금과 신하가 두 갈래로 갈라져 상하가 각각 다른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고서야 태화(太和)를 일으키고 순량(淳良)한 풍속에 젖어, 모든 신료가 착한 일에 힘쓰기를 바라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제왕이 교화를 순독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며, 대중을 거느리고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다만 공론을 따라서 물정(物情)을 잃지 않는 데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경계하여 소민(小民)의 말이라고 이르지 않고, 민첩한 용기와 과감한 결단으로 물정을 따르는 데 힘썼던 것입니다. 대개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을 총(聰)이라 하며, 간사함과 바름을 살피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유혹하여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을 강(剛)이라 하며, 확고하여 의심함이 없는 것을 단(斷)이라 합니다. 무릇 이 네 가지는 모두 임금이 마음을 써야 할 것으로써 하루도 여기에서 이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도가(道家 교를 믿는 사람)의 말이 유현(幽玄)하여 인증할 바 없고, 밝아도 증거할 곳이 없음은 대중이 밝게 아는 바인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고집하여 거절하시며 반드시 조종(祖宗) 때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조종께서 과연 신봉하셨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것을 조종에게 돌리면 이것은 조종의 허물을 나타냄이니 무례한 일이 되며, 우쭐우쭐하다가 우연하게 남았다는 것으로 조종에게 돌린다면 이것은 선조에게 누를 끼침이니 불경하다 하겠습니다. 불경하고 무례한 일이란 사람으로서 감히 할 바 아닙니다. 고려(高麗) 말기에 교화가 펼쳐지지 못하여 사람이 이교(異敎)를 섬겼는데, 거짓과 그릇됨을 답습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는 더럽게 물든 것을 깨끗하게 씻어야 할 때인데, 무엇 때문에 기다리고 의심하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천명을 공경하고 기업(基業)을 염려하여 학문을 불지런히 하고, 덕업(德業)에 매진하여 사치하고 방탕한 일에 빠지지 않으시며, 삼대 성왕의 도(道)를 탐구하여, 무릇 괴이한 무리를 억제하고 바른 도를 부식하는 데에 힘을 다하지 않으심이 없건마는, 오직 이 한가지 일에는 성명(聖明 임금의 총명)이 가리어져서 없애려 하시다가 신봉하시고, 혁파하고자 하시다가 도리어 의심하시니, 건강하고 정수(精粹)한 덕을 크게 잃으시는 일입니다. 신 등은 전하의 마음에 정일(精一)한 공(功)이 혹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는가 합니다.
마음이 전일(專一)하면 정직 방정하여 의리(義理)의 바름을 지키고, 마음이 정수(精粹)하면 순수 청백하여 사(邪)와 정(正)의 분간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이용하여서 밝은 도에 통하게 되고, 일에 시행하여서 착한 길로 고칠 수 있어 좌(左)에나 우(右)에나 정일한 공효(功效)가 아님이 없습니다. 혹 공(功)이 미진하면 간사한 상념이 몰래 잠재하였다가 같은 무리를 끌어들여 남 모르게 자라나며, 뭇 망령된 것이 틈을 타 일어나고, 여러 거짓이 떼지어 모여드는데, 곁눈질하며 아양 떠는 간사한 무리가 또 인연하여 서로 맺게 되니, 장래의 화(禍)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 등은 바로 이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굳센 결단을 내리시기에 인색하셔서, 여러 사람의 심정을 의심나게 하며 억울하게 하십니까. 사람의 기(氣)가 억울하면 하늘의 기도 억울해집니다. 억울하면 괴려(怪戾)한 기가, 통창하면 융화한 기가 납니다. 그래서 재앙을 구제하는 방법은 여러 사람의 심정을 통창하게 하여 천심(天心)을 화(和)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릇 도리에 어긋나고 정사를 해롭게 하여 인심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없애 버려서 위로하고 즐겁게 하여야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의 기는 자연히 화창하여지고 하늘도 괴상한 재앙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앙에 대응하는 방법은 천리(天理)에 순응하고 바른 도를 닦으며 인심을 화하게 하는 것이 가장 상책입니다. 그러므로 성왕(聖王)은 천도(天道)를 받들어 법으로 하니, 도는 전일한 데에 쌓여지고, 정사는 순수한 데에 세워지니 응접하는 일이나 시행하는 것이 하나의 이치로 통일되어 황극(皇極)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학문으로 마음을 밝히시고, 밝음으로써 정일을 꾀하시어, 이단(異端)에 의혹되지 마시고 괴설(怪說)에 빠지지 않으셔서, 떳떳한 마음을 따라 백성을 정도(正道)로 교화하실 수 있다면 우리의 도에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기묘년(1519) 7월 대사간 이성동ㆍ사간 이청ㆍ헌납 송호지 정언 김전ㆍ권전 등의 소. 정언 권전이 기술함. [己卯七月大司諫李成童司諫李淸獻納宋好智正言金錢權磌等疏] 權正言所述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자질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기틀로써, 우리 여러 신하와 만백성을 두었고, 조종 백년의 사업을 빛나게 펴셨으니, 진실로 천년에 한 번 있을 위대한 시기입니다. 이런 까닭에, 백성들이 다스림을 바라는 것은, 마치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을 바라고,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는 것과 같고, 임금의 다스림을 구하는 것은 마치 뜨거운 것을 잡은 자가 차거운 것을 원하고 습(濕)한 곳에 있는 자가 마른 곳을 구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위와 아래에서 지극한 다스림을 서로 바라고 있건만, 다스림은 더 진전하지 못하고 교화는 더욱 새로워지지 못한 그대로입니다. 세월은 멈추지 않아서 좋은 시기를 놓치고만 있으니, 뜻 있는 선비는 모두 이를 탄식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유능한 임금은 소강(小康)에 만족하지 않는데, 하물며 아직은 소강의 시기도 아닙니다. 지금 이때는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늘은 위에서 효상(爻象)을 움직이고 땅은 밑에서 고요하지 못하여, 기(氣)가 재앙을 일으키고, 물(物)이 변괴를 낳는 일이 해마다 달마다 없을 때가 없으니, 하늘의 꾸지람과 경고가 이미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고 창고는 비어서, 사람은 부자(父子)끼리도 보전할 수 없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굶주림을 구제하는 일에 만전을 기할 수 없으니,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지극히 밝은 사람은 일이 생기기 전에 알고, 그 다음의 사람은 생기려 할 때에 알며, 또 다음의 사람은 이미 생긴 다음에 압니다. 생기기 전이라면 손바닥을 뒤엎는 듯 아주 쉽게 해소할 수 있고, 생기려 할 때라면 힘을 들여야 해소할 수 있지만, 이미 된 다음이면 마음을 태우고 힘을 다해도 혹은 구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을 생기기 전이라 하면 속임이요, 있으려는 중이라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이런데도, 마음을 태우고 힘을 다해서 구하지 아니하면 뒤에는 아무리 잘하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다스림에 그 근본을 얻었던 까닭에 재변이 많아도 화는 되지 않았고, 일에도 강령(綱領)을 얻었던 까닭에 일이 급해도 쉽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임금의 마음은 다스림의 근본이 되며, 어진 재상은 일의 강령이 됩니다. 신 등은 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개 목수가 집을 짓는 데에 비록 규구(規矩 자와 콤파스)와 먹줄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먼저 그 마음에 확정한 뒤에 규구와 먹줄을 쓰는 까닭에 일이 어지럽지 않습니다. 임금에게 비록 법도와 형정(刑政)이 있다 하더라도 먼저 마음을 정해서 대비하지 아니하면, 온갖 닥치는 일에 어찌 순조롭게 응하고 곡진하게 처리할 수 있어서 일이 도리에 맞고 만물이 조화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중도(中道)를 잃으면 밖으로는 사물이 그릇됩니다. 그릇됨이 쌓이고 어긋남이 모이면 사방에서 일이 모두 잘못되어 위로는 천도(天道)에 어기고, 아래로는 지의(地宜)에 잘못하게 됩니다. 괴상한 기운이 성해지면서 여러 가지 재변이 일어나고, 사람의 화(禍)도 따르게 되니, 국가의 부(富)와 억조 백성을 어떻게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堯)의 흠명(欽明)과 순(舜)의 정일(精一)과 탕(湯)의 지경(祗敬)과 문왕(文王)의 극정(克正)이란 것이 모두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또 하늘은 백성과 만물의 조상이며 임금은 백성과 만물의 주인인 까닭에, 임금의 하늘을 짝[配]하는 것입니다. 원(元)ㆍ형(亨)ㆍ가(利)ㆍ정(貞)은 하늘의 도이며, 인의(仁義)ㆍ중정(中正)은 임금의 표준입니다. 하늘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만품(萬品)을 생장시키며,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하면서도 만물을 포용하는 것은 그 도에 이탈하지 아니한 때문이며, 임금이 대중(大衆)의 마음을 조화시키면서 힘들이지 않고, 여러 생명을 형살(刑殺)하여도 배반하지 않는 것은 능히 표준을 세운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은 임금을 사랑하여 그의 교화를 돕고, 임금은 하늘과 나란히 그 공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 생각의 미세한 것도 하늘에 부합하고 감응하는 것이 가장 빠르니 두렵지 아니합니까. 동중서(董仲舒)가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간여하는 때를 말하기를, “국가가 장차 도를 잃어 패망이 있으면 하늘이 먼저 재이(災異)를 내어 그를 꾸짖어 경고하고,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면 또 괴변을 내려 깨우치고 두렵게 하며, 그래도 고칠 줄 모르면 상패(傷敗)하는 환란이 이른다.” 하였습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오늘의 세태는 참으로 위태합니다. 신 등이 엎드려 보옵건대, 전하께서는 인자하고 명철하며 깊고 고요하신 자질을 지니시고, 격치(格致 격물치지)와 성정(誠正)의 학문을 궁구하셨으며, 멀리 요(堯)ㆍ순(舜)ㆍ탕(湯)ㆍ문(文)을 본받아 급급히 도를 바라고 계시면서 오히려 아직도 부족하다고 하시니, 정말 이러한 태도로 다스리신다면 햇빛을 가까이하면 그림자가 생기고, 종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늦어지기만 하여 다스림은 날로 멀어지며 나라는 점점 병들어 가는 속에 방치하고, 온화하고 태평스럽게 선양할 일은 살피지 아니하십니까. 그윽이 전하를 위해서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신 등은 진실로 전하의 마음이 편안함만 구하여 구차하게 여기에 구애되어서가 아니라, 사세가 그렇지 못한 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세가 구차하고 뜻이 없어 용기를 떨쳐 매진하지 못한다면, 또 누구를 기다려서 다스린다는 것입니까. 하물며 임금이라는 중한 위치에서 사세 때문에 할 일을 못한다는 것입니까. 전하의 단점은 지성과 측달(惻怛)한 마음으로 신하와 백성을 거느려 분려(奮勵)하지 못함입니다. 무릇 정치를 하는 데에 겉치레만 따르고 굳은 결단으로써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옳고 그른 사이에 가부(可否)가 어지러워집니다. 매양 형세만 중하게 여겨서 지당한 법은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전하의 마음이 중정(中正)과 인의(仁義)의 극(極)에 합치되지 않았음인가 합니다. 대저, 보필하는 신하를 두어서 만백성의 위에서 총애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몸을 영화롭게 하고, 이록(利祿)으로 도우려는 것이 아니요, 임금을 바르게 하여 위로 상제와 짝하고 아래로 여러 백성에게 신임받도록 하려는 때문이니, 이렇게 못한다면, 녹을 먹으며 직위(職位)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공(周公)은 터득한 것이 있으면 밤에도 앉아서 아침되기를 기다렸다가 실행하였으며, 먹던 것을 내뱉고 감던 머리칼을 움켜쥔 채 천하의 선비를 맞았다 합니다. 또 이윤(伊尹)은 그 임금이 요(堯)와 순(舜)같이 되게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를 마치 저잣거리에서 종아리 맞는 것과 같이 여겼으며, 한 지아비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자기를 밀쳐서 도랑 속에 빠진 것같이 여겼다 하니, 옛날의 정승이 어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녹만을 생각하는 무리가, 이윤과 주공은 옛 성인이니 따라갈 수 없다고 핑계합니다마는, 한기(韓琦)는 일을 잘못하면 죽음으로 자처하려는 충성이 있었고, 중엄(仲淹)은 백성이 근심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근심하고 백성이 즐거워한 뒤에 내가 즐긴다는 뜻이 있었습니다. 만약 마음씀이 이렇지 못하다면 용렬한 임금과 어두운 조정에서 정승 노릇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중급 정도의 임금도 보좌할 수 없을 터이니, 하물며 중급으로 자처하지 않는 임금이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만약 벼슬에 무턱대고 나왔다가 사퇴하지 아니하고, 녹봉을 탐내어서 피하지 아니하며, 또 잘못을 알고도 고칠 줄 모르며, 임금이 허물이 있어도 바로잡지 못하고, 백성이 원망이 있어도 풀어 주지 못하며 착한 사람이 있어도 천거할 줄 모르고, 간사한 자가 있어도 배척할 줄 모르며 착한 말을 쓰지 못하고 임금의 은택을 가로막아 아래로 전해지지 못하게 하여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물정이 거슬려지면 그 감응하는 것은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상(商) 나라 임금은 공손하고 침묵하여서 꿈에 감응을 얻었고, 주 나라 선왕(宣王)은 자리 한편에 앉아서 현상(賢相)을 사모하였습니다. 임금과 정승의 서로 기다림이 어찌 훌륭하다 아니하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보상(輔相)을 기다리시는 것이 어떠하시며, 대신으로서 전하를 보필하는 바가 또한 어떻습니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희망하는 바가 크지 않고, 아랫사람이 웃어른을 보필하는 데에 진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태평한 날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걱정되는 바는, 나아갈 듯 물러갈 듯하며, 실(實)한 듯 허(虛)한 듯하여, 기맥(氣脈)이 웅장하지 못하고 규모가 엄하지 못함이니, 이것이야말로 대신의 허물입니다. 정광필(鄭光弼)은 굉후(宏厚)하고 광대(廣大)한 도량이 있어, 일찍부터 공보(公輔 정승)가 될 만한 촉망을 받았는데, 성희안(成希顔)이 당시 인재를 뽑을 때 첫머리에 광필을 정승으로 추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광필은 암랑(岩廊 의정부)에 있게 되면서 여러 사람의 마음에 영합하기에 힘을 쓰며, 세속과 같이하기만을 즐겨하고, 개연히 옛적 성왕(聖王)의 다스림을 회복해 보려는 데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세속에서 초탈할 줄 몰라 전하를 광명 정대한 지경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과격한 행동이나 흑백을 가려야 할 언론은 피하여 억제하려고만 노력했으니, 잘못된 것도 몽롱하여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신용개(申用槪)는 영걸(英傑)스럽고 초매한 기상이 있어서, 젊었을 때부터 재망(才望)을 차지하였고, 또 성품이 너그럽고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아 한계를 긋지 않았고, 선비를 대우하는 것이 친숙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을 당하면 쉽게 판단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말을 하여 계획하는 데는 삼가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조정으로부터 중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안당(安瑭)은 몸가짐이 진중하였고 마음씀이 밝고 신중했으나 젊었을 때부터 스승과 벗의 도움이 없었으며, 학식과 역량이 원대하지 못하면서 자기 소견에만 사로잡혀 겸허한 태도로 국론을 받아들일 줄 몰랐기 때문에, 정부에 들어와서 이부(吏部)에 잘못하여 명망이 손상되었습니다. 이 세 사람들은 장점이 부족한 것을 덮을 수 없었고, 자신을 수양하는 바는 실상을 가리지 못했으며, 또 정성을 쌓고 근면을 다하여 우리 임금을 반드시 요순 같은 임금이 되도록 하고, 우리 백성을 요순 시대의 백성이 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줄 몰랐으니, 옛 어진 정승이 마음 쓰던 것과 같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옛 도를 회복해 보시려는 뜻이 있으셔도 그들은 때가 예와 지금이 다르다 하며, 전하께서 어진 사람을 구하는 마음이 있으셔도, 그들은 지금 사람은 문견(聞見)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심하고 뜻이 합하지 못하고 있으니, 큰 강령(綱領)과 온갖 일이 날로 허물어지게 되는 원인이옵니다.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굶주려 죽는 이가 서로 잇달았으나 책임을 느껴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하는 사람이 조목을 열거하여 세부(稅賦)라도 면제하기를 청하면 또 따라서 핑계대는 말을 하니, 이것이 어찌 대신의 도리입니까. 이래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이 손을 잡고 탄식하며, 가슴을 두드리면서 한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신 등이 이에 감히 성덕(聖德)의 단점을 논하고 대신의 잘못을 배척하는 것은 남의 잘못을 들춰내어 제가 곧다고 하는 바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먼저 그 단점을 살펴서 자신을 책망하고 힘써 고치시게 하려는 욕심이며, 또 전하께서 대신의 병통을 아셔서 말할 때에 각 대신의 정상을 파악하신다면, 옳고 그름이 거의 서로 바르게 처리될 수 있을까 함입니다. 그런다면 대신도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책임을 명심할 줄 알게 되어 경장(更張) 발전하도록 힘쓰고 더욱 진보할 것이니 어찌 적은 도움이나마 없겠습니까. 군신과 상하가 진실로 뜻을 같이하여서 사의(私意) 때문에 서로 틀어지지 않고, 형적(形迹)으로써 고집하지 말며, 또 외면으로만 같은 척하여 구차하게 합하지 아니하면 어찌 체통이 서지 않음을 걱정하며 어찌 기강이 바르지 않음을 걱정하며 어찌 조정이 엄숙하지 않음을 걱정하겠습니까.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풍속을 신실(信實)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임금은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고 신하는 신하 노릇하기가 어렵다. 정사가 다스려지면 여민(黎民)이 민첩하게 덕에 나아간다.” 하였으니, 천하의 일에 이것보다 나은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대저 나라에 사기(士氣)가 있는 것은 사람에게 정신과 혈맥이 있는 것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기운이 빠져 방심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니 곧게 양성하여도 오히려 굽어질까 염려되며, 바르게 진작시키더라도 오히려 쓰러질까 염려되며, 의(義)로 보호하여도 오히려 겁이 많을까 염려되는 것입니다. 사기가 한 번 흔들리면 나라에 믿을 만한 것이 없고 사기가 한 번 떨쳐지면 나라가 약하더라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자가 나라를 위해서 비록 격렬한 언론을 분발(奮發)하고, 탁절(卓絶)한 행동으로 고립(孤立)되더라도 포용하고 길러 주어 조금이라도 좌절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공자(孔子)께서, “중도(中道)로 행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으면 반드시 광견(狂狷)한 선비라야 한다.” 하시었으니, 성인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선비라는 자는 검속(檢束)하는 것이 익숙하지 못하고, 조집(操執)이 확고하지 못하며, 고명하고 원대한 식견이 없으며, 충적(充積)하고 화락한 실덕(實德)이 없으면서 먼저 혼후(渾厚)하고 평화(平和)함을 힘쓰고 있어서 그 폐단은 점점 방직(方直)하고 준절(準絶)한 행동이 적고, 우뚝하게 항언(抗言)하는 기풍이 없어지는 경향으로 점점 흐르고 있으니, 이 점은 신 등도 면치 못하는 폐단입니다. 이것이 어찌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중도를 행하여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개 억제하는 것이 지나친 때문입니다. 직위가 높을수록 지론(持論)이 점점 구차스러워지고, 모순과 규각(圭角)을 없애는 데 힘쓰면서 체통을 얻었다 하는 바 이 풍습이 점점 자라면 사기는 쓰러지고 무너져서 구(救)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서경》에 이르기를, “걱정이 없을 때에 경계하라.” 하였고 또, “보이지 않을 때에 도모하라.” 하였는 바 모두 미리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을 하는 그러한 시기는 아닙니다. 다만 미리 한다기보다는 더욱 급해진 시기입니다.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의논이 강구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정령(政令)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는 이러한 때이건만 저축한 곡식은 두어 해를 지탱할 수 없고, 사마(士馬)는 백승(百乘)을 감당하지 못하며, 군정(軍情)은 지구전(持久戰)을 견디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만약 창졸간에 사변이라도 있으면 스스로 믿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에서는 염려도 않고 있고, 아래에는 이를 걱정하여 스스로 인책(引責)하려는 사람조차 드물어서, 논의(論議)하는 동안에도 전연 언급되지 않고 혹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묵살해 버리니 필경에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 군정(軍政)에 대한 일은 거리가 먼 선비로서는 진실로 자세히 알지 못할 바이거니와, 전하께서 대신과 함께 강구하고 계획하시어 속히 도모하셔야 할 바입니다. 아마도 이런 말씀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긴요한 근본이며, 오늘날에 당면한 급한 병폐인가 하옵니다. 여러 가지 폐단을 낱낱이 들기 어렵고 제왕(帝王)의 법도를 경솔하게 논의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신 등을 비루하다 하여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대신을 경계 면려하시어 각자 마음껏 하게 하신다면 지난일은 그뿐이거니와 다가오는 일은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대요(大要)를 말씀드린다면, 전하께서 학문을 강론하고 선비를 접견하실 즈음의 상례(常例)로 대하지 마시고 성심(誠心)을 베푸실 일입니다. 그리하여 말하지 못한 바가 있는가 간절히 염려하시고, 듣지 못한 바가 있는가 정성스러이 염려하시어, 묻지 못한 것이 있으면 물으시고, 모르면 그대로 넘기시지 마실 것이며, 분별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분별하시고 분명하지 않으면 그대로 넘기지 마실 일입니다. 그렇듯 말을 다하게 하여 숨김이 없게 하신다면 성상의 의심도 풀리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혹 청정(淸靜)한 침실에 홀로 계실 때에도 기상(氣像)을 엄숙하게 하시어 좌우에 방정한 선비가 있는 듯한 마음으로 조금도 방심하거나 태만함이 없게 하시고 마음과 형체가 다 엄숙하고 정일(精一)한 가운데에 있게 하신다면 의리는 나날이 자라나고 총명은 나날이 넓어져서 사벽(邪僻)은 범함이 없어지게 될 것이니, 제왕의 도(道)도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다면, 백성이 왕화(王化)를 향앙(響仰)하지 않거나 사물이 천리에 순응하지 않거나 천하가 본받지 않거나 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이에 유념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기해년(1539) 준암이 끊어진 대를 잇도록 중종에게 올리다[己亥樽巖請繼絶世上中宗].
엎드려 보오니, 구언(求言)하시는 교지가 내린 지 벌써 세월과 시일이 경과하였습니다. 마음에 항상, “전하께서 말을 좇기를 물이 흐르는 듯하는 때를 당해서, 진실로 한 가지 소회(所懷)나 한 가지 소견이라도 있으면 누군들 기꺼이 나아가 성상의 기망(期望)에 보답하여 거의 생사(生死)간에 원통함이 없게 됨을 보며, 전하의 인정(仁政)하는 길을 더욱 넓게 하여 방가(邦家)에 한없는 아름다움을 심도록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소소한 폐단이야 나약함을 격동시킨다면 자연 없어질 것이니, 무엇을 우러러 아뢰겠습니까. 신이 궁벽하고 먼 외방(外方)에 있어서 미처 듣지 못한 일이겠습니다만, 말을 좇으심을 이날까지 적막하게 들을 수 없었습니다. 신은 들으니 멸망한 집을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이어 주는 것은 성왕의 법이며, 성왕의 법은 곧 하늘의 뜻이라 합니다. 독사의 독함과 형극(荊棘)의 악함은 사람마다 없애려는 것이지만 하늘은 따라서 살리니 물(物)을 살리는 하늘을 사람이 어길 수 있겠습니까. 앞세대의 일은 다 성학(聖學 임금의 학문) 가운데에 있어서 분명하게 아실 터이니, 신이 낱낱이 거론하지 않거니와 귀와 눈으로 듣고 본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산(魯山 단종대왕)과 연산(燕山)을 무도한 임금이라 하지마는, 한편에서 하는 말을 들으니, 노산은 약해서 떨치지 못했을 뿐이라 합니다. 그러나 폐위(廢位)하게 된 것은 모두 종사(宗社)를 위한 대계(大計)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덕이 높게 들려서 신(神)과 사람에게 화합하셨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나라를 잃은 죄를 논할 것 같으면 폐위시켜 그만두게 한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으나, 속적(屬籍 호적에 기록됨)된 신분(身分)으로 논할 것 같으면 오히려 지친(至親)입니다. 범인(凡人)의 경우에는 반드시 후손(後孫)을 만들어 주는 것이 법인데 지친인 경우에는 후손을 궐(闕)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지친이라는 신분으로 본다면 두 사람의 폐주(廢主)를 위해서 후사(後嗣)를 세우는 데에 무슨 안 될 일이 있으며 어려워할 바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으로서는 듣고도 알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들의 묘소를 수호(守護)하게 하시고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케 하셨으니 이것은 인(仁)의 단서입니다. 착한 단서가 겨우 노출되었을 뿐 아직 확충(擴充)되지 못하시니 신은 성상을 위해서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대학》에서 효(孝)ㆍ제(悌)ㆍ자(慈)를 말하면서 〈강고(康誥 서경의 편명)〉에 말한 “적자(赤子 벌거숭이 아이)를 보호하듯 한다.” 하는 말만을 인용하였습니다. 대개 이 효ㆍ제ㆍ자 세 가지는 모두 천일(天一 북극성으로 방위의 좌표가 된다.)입니다. 비록 불효한 자식과 불우한 아우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 어버이나 형으로서 자애(慈愛)하지 않는 것은 만물에도 그런 유례가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호랑이도 부자간에 인(仁)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어리석고 망령스러워서 조정(朝廷)에 죄를 얻고 전야(田野)에 물러난 지가 19년입니다. 외정(外廷)의 일도 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전하의 구궁(九宮)의 안 침석 위의 일을 쉽사리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미(嵋)는 곧 전하께서 총애하시던 아들이라고 항상 일러 왔습니다. 먼 지방으로 폐출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처음에는 괴상한 일이다 여겼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하고 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미가 득죄(得罪)한 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전하께서 대의(大義)로 결단하신 것이라고 여겨 왔었습니다. 마침내 자살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밥을 먹으려다간 숟갈을 버리었고, 자려고 누었다가 눈을 붙이지도 못한 채 거듭거듭 생각하여 보았으나 그 연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말을 하자면, 차마 못 할 일을 전하께서 차마 한 것이 아니고, 인도하는 자가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였으니, 그 당시 어떻게 견디셨으며 그때 일을 다시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미의 어미 박씨(朴氏)는 교만하고 방종 한 죄로 오랫동안 외방에 방치되어 패가망신하였으나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신은 미의 일을 슬퍼합니다마는 미를 위해서 슬퍼함이 아니고, 사람들이 우리 전하의 자애를 상하게 하였음을 통탄하는 것입니다.
대저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은 모두 하늘의 자식인데 혹 원하던 것이 제대로 안 되면 하늘을 우러러 욕설하여 못 하는 말이 없으나, 하늘이 위엄을 부려 그 사람을 징계하였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성주(聖主)의 도(道)도 마땅히 이와 같이 하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미가 무도하게 저주하였다면 해당한 형(刑)이 제대로 있으니, 비록 용서할 수는 없으나, 저주했다는 죄상은 쉽사리 밝힐 수 없는 것이므로 옛사람도 이런 경우에 조심하였습니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는 포악한 임금이었으나 죄인이 태형(台刑)에 해당된다는 말을 듣고 종신토록 생각하였다 합니다. 미가 저주하는 데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신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만, 당시에 논의하던 자들은, 춘궁(春宮 동궁)의 뒷날의 처지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 친구들한테 서로 자랑삼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상 전하의 사랑하던 첩과 총애하던 아들은 쫓김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으니 어찌 된 일이옵니까. 신은 더욱 의혹됩니다.
의신(儀宸 왕자)의 덕은 하늘이 명한 바이며, 사람들이 받든 바이나, 박씨의 교만함과 미의 거만함은 누군들 모르며, 누군들 그르게 여기지 않았습니까. 가령 급한 일이 있으면 춘궁을 위해서 죽을 자는 비록 풀 베듯 하더라도 그치지 않았을 것이나, 미(嵋)를 위해서 죽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은 3광(光 해ㆍ달ㆍ별)을 관통하고 구천(九泉 황천)을 태형(台刑)통철(洞徹)하여도 오히려 판연히 알기에는 부족합니다. 논의한 자의 말이 춘궁의 후일 처리를 위함이라 하나 이것은 제 몸을 위해서 한 책모에 불과합니다. 만약 의신에게 우애하는 도리에 독실하고 전하의 일을 본받도록 하고자 하셨다면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옛적에 맹손(孟孫)씨는 사냥하다가 사슴 새끼를 잡아서 진서파(秦西巴)에게 들려 가지고 돌아오는데, 어미 사슴이 울면서 따라오기에 서파는 사슴 새끼를 놓아 주었답니다. 맹손은 크게 노하여 서파를 축출하였으나 석 달 만에 다시 불러서 아들의 스승으로 삼고, “사슴 새끼에게도 못 할 짓은 차마 하지 못했는데 내 아들에게 못 할 일을 차마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오당(吳唐)이 아이를 데리고 사냥 나가서 사슴 새끼를 쏘아 죽였는데, 어미 사슴이 놀라 돌아와서 슬피 울기에 또 어미 사슴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다른 새끼 사슴을 만나 쏘려는 참인데, 화살이 갑자기 나가면서 그 아들을 맞추어 버렸습니다. 당이 아이를 안고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궁중(宮中)에서 불러 “오당이 그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사슴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였습니다. 당이 듣고 놀라서 몸 둘 곳을 몰랐다 합니다. 그 당시의 무리들도 누군들 자식이 없었겠습니까만, 이런 일을 차마 하여 전하를 도리어 한낱 필부였던 진서파(秦西巴)의 소위보다도 못하게 하였으니, 신은 오당이 통곡하던 일이 그 사람들에게 앞으로 있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대저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으니,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는 한 번 후회하시는 단서를 베푸시어 사람들이 마치 일월과 같이 우러러보도록 하셔야 하겠습니다. 묘당 암랑(廟堂巖廊 의정부)와 제제(濟濟)한 관각(館閣 홍문관과 대각)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지난일이라고 핑계하여 어쩔 수 없다거나 자질구레하여서 덕으로 보아서 경(輕)하다거나 중하다거나 할 것이 못 되며 정사로 볼 때도 크다 작다 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그때로써는 숨길 바이며, 후일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말을 하는 자가 반드시 허물이 되기 때문입니까. 신도 전일에는 말하지 못하다가 오늘을 기다려서 말하니, 제 몸을 아끼는 일이 아니요, 전하를 사랑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말을 해도 안 해도 죄는 같으므로, 감히 미친 말을 내어서 전하의 귀를 더럽히는 것이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신은 본디 병폐가 많고 또 재덕도 부족하지마는 이 성(城)을 지키면서 구구하게 물러가지 않는 것은 성상에게 하직하여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말은 아뢸 수 없는 말이라 하여 다시 전리(田里 시골)에 돌려보내, 목숨을 송추(松楸 무덤 옆에 심은 나무)에서 마치게 하시면 성은(聖恩 임금의 은혜)이 지극하심이옵고, 귀양보내 죽인다 하여도 또한 도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충정이 넘쳐 스스로 그만둘 수 없으므로 삼가 죽을 줄 모르고 아룁니다.
정축년(1517)에 태학생들이 포은 정 문충공을 부자의 묘정에 배향하기를 청함. 8월에 생원 신 권전 지음[丁丑太學生請圃隱鄭文忠公配享夫子廟庭八月生員臣權磌所製].
삼가 소장(疏章)을 올리나이다. 주상 전하께서는 팔짱을 단정히 끼시고 면류관을 엄숙히 쓰시고서 다스리는 도에만 유의하셨습니다. 근년 이래로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과 백성을 근심하시는 마음이 여러 번 중외(中外)에 나타났고, 정사하는 사이에 매양 경악(經幄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하셨습니다. 조종께서 개혁하지 못한 폐단을 바로잡고 동방(東方)에서 회복하지 못했던 예(禮)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날마다 재집(宰執 재상)을 인견(引見)하여 논란하실 때, 하나같이 풍속을 순박하게 하고, 사습(士習)을 새롭게 하는 일로 근본을 삼으셨고, 규모를 굉원(宏遠)하게 하고자 하셨으니 훌륭하시기도 합니다. 임금이 한 번 움직임은 온 백성이 우러러보는 바이며, 임금의 한 마디 말씀은 만백성이 귀 기울여 듣는 바입니다. 임금이 한 번 착함을 생각하면 곧 온 나라의 착함이 되는 것이므로, 옮기고 돌리는 기틀이 이번 한 차례의 변혁에 있으니, 이는 우리 도(道)가 크게 일어날 기회인 것입니다.
신 등이 선비의 갓을 쓰며 선비의 옷을 입고 태학에 들어가서 고무되고 감화되어 눈물을 흘릴 정도입니다. 장차 3대(하ㆍ은ㆍ주)와 같은 성한 문명을 친히 보게 될 듯하므로 권권(惓惓)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진실로 조금이라도 사도(斯道 유도)에 보탬이 되고, 또 행해질 수 있는 말이라면, 어찌 감히 숨겨서 전하의 성의(誠意)를 돕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생각하건대, 나라는 도(道)로써 높아지고, 도는 학문으로써 밝아지는데, 도와 학문이 흥하고 쇠하는 것은 참된 선비가 숨느냐 나타나느냐에 매어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면서 도에 근본을 두지 않거나, 도를 닦으면서 학문에 근본을 두지 않거나, 학문을 하면서 참된 선비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다면 구차할 뿐입니다.
신 등이 삼가 듣건대, 건(乾)은 굳세고[健] 곤(坤)은 순(順)하여 성대하게 행하여지는 것이 도의 근본이지만, 오직 깊고 가늘어서 보기가 어려운 까닭으로 사람들이 날마다 그에 따라 행하면서 깨닫지 못하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밝히지 못하고, 밝지 못하기 때문에 행해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도는 중지하는 적이 없습니다. 천지보다 앞에 있었으나 그것이 시작이 아니며 천지보다 뒤에 있을 것이나 그것이 끝이 되지 않고, 양양(洋洋)하게 혼합하여 겸해 갖추어서 빠트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 기운이 있는 자는 이 형상이 있고, 누구나 이 형상이 있는 자는 이 이치가 있습니다. 고금(古今)의 차이로 인해 덜거나 보탬이 없고, 화이(華夷 중국과 오랑캐)의 차이로 인해 넉넉하거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만한 사람을 기다려서 이루고, 그럴 만한 사람을 기다려서 밝히며, 그럴 만한 사람을 기다려서 행해지는데, 오직 성인만이 그를 다할 수 있고, 오직 성인만이 그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성현(聖賢)을 자주 내지 않기 때문에 어둡고 막힐 때가 항상 많은 것입니다.
밝고 밝은 지극한 이치가 도리어 사람의 사욕에 가리어져서, 우둔하고 깜깜하여 알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게다가 백가(百家 여러 가지 학설)와 이단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사람을 의혹시켜서 인의(仁義)를 막으며, 심지어는 예악(禮樂)마저도 무너뜨렸습니다. 인륜과 기강을 전도시켜 찬역(簒逆)이 연달았고, 중국이 이적으로 변하였으며, 인류가 금수처럼 되어 학교를 비록 설치하였으나 사람의 기강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무릇 사도를 해롭게 한 일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거니와, 신 등이 이런 말씀까지 드리는 것은 진실로 전하의 도를 위해서는 차마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학(道學)의 중함이 이렇듯 지극한데, 그를 밝히는 길은 참된 선비에게 있습니다. 참된 선비로서 운수가 통하여 위에 있던 자로는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 같은 분들이고, 참된 선비로서 운수가 궁(窮)하여 아래에 있던 자로는 공자(孔子)ㆍ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자(子思子) 같은 분들입니다.
위에 있던 분은 임금이었기 때문에 백성을 거느리고 자신을 본보기로 하여 변화시켰으므로 정사가 행하여져 천하가 태평하였고, 아래에 있던 분은 스승이었기 때문에 전성(前聖)을 계승하여 후세의 학자를 개유(開諭)하였으므로, 그 교화가 멀리 드리워져 만세가 밝았습니다. 천하를 태평하게 한 것은 혜택이 한 시대에 미쳤을 뿐이었으나, 만세를 밝힌 것은 계발(啓發)한 것이 무궁합니다. 모두 사도에 관계된 것이므로 오래도록 경앙(景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혜택이 한때에 미친 자는 그에 대한 보답도 한때에 있을 뿐이나 만세를 밝힌 자는 그에 대한 보답이 만세에 이르도록 계속됩니다. 아, 이러므로 선성 선사(先聖先師)를 학교에 제향하고, 성문(聖門) 70제자와 역대 여러 현인까지 모두 사도에 공이 있었던 분들도 종향(從享)하였음은 또한 이치에 당연합니다.
신 등이 삼가 상고하건대, 맹자가 죽은 뒤에 천여 년을 지나도록 도학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송(宋) 나라 주염계(周濂溪)로부터 비로소 그 단서를 열었고, 그 단서를 넓혀서 밝힌 분이 두 정자(程子)였으며, 그것을 모아서 크게 성취시킨 분이 주자(朱子)로서, 참된 선비의 성함이 이때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육경(六經)의 도(道)가 이에 이르자 천지와 같이 높아졌고, 사서(四書)의 뜻도 여기에 이르자 해와 달같이 밝아졌으니, 이때에 이르러 우리 도의 형통함이 극도에 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러 군자(君子)도 마침내 비색(否塞)한 운수를 만나, 도는 함장(函丈 스승)에만 밝았을 뿐 몸은 곤했습니다. 그리하여 비방이 분분하였고, 뭇 소인에게 노함을 받았으므로 그분들을 드러내 밝히고 존숭(尊崇)하여 선성(先聖 공자)에게 종사(從祀)하도록 하는 특별한 조처가 송나라 이종(理宗)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사신(史臣)의 말에, “선유(先儒)를 존숭하면 우리 도도 중해지는데, 천찰(天札 조서 따위)을 한번 반포하니, 우리 도는 기운을 더 얻었고, 만세 이후에까지 모두 선유의 도의(道義)가 높았음을 알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송 나라 사기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를 때마다 참된 선비들이 민락(閩洛) 지방에서 많이 배출되었고, 포양(褒揚)하는 의전(儀典)이 순우(淳祐 1241~1252) 연대로부터 시작된 것에 대해 감탄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도에 큰 다행이었습니다.
신 등이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外地)이어서 단군 시대는 아득하여 징험할 수조차 없고, 기자(箕子)가 봉해지면서 겨우 문자(文字)는 통했으나 삼국 이전은 대개 논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고려(高麗)는 건국하여 4백여 년을 지났으나, 겨우 구차스럽게 평정하였을 뿐, 오히려 이전의 풍습을 인습하였고 불교가 성행하여 이적(夷狄)을 끌어들였습니다. 아, 하늘이 덮고 땅에 실려 있기로는 같은 나라이며 같은 사람이니, 무슨 간격이 있겠습니까마는, 풍토와 기후에 국한되어서 비루한 습속에 우물거리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으나 사도를 계발하고 창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동방의 수치였습니다.
다행히 황천(皇天)이 돌보시어 고려 말기에 종유(宗儒)인 몽주(夢周)를 나게 하였습니다. 걸출한 재질이 빼어났고, 경세제민하는 재주를 품었으며, 성리(性理)를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자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강론한 학설이 발월(發越)하며 묵묵한 중에 심오한 뜻을 알아 낸 것이 선유(先儒)와 합치하였고, 충효의 큰 절행은 당세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상례(喪禮)를 제정하고 사당(祠堂)을 세운 것도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거하였으며, 문물(文物)과 의장(儀章)을 모두 고쳐 정하였습니다. 학교를 세워서 가르침을 베풀고, 유술(儒術)을 진흥하였으니, 사도를 밝히고 후학을 계발한 것은 동방에서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학문을 주염계(周濂溪)와 정자(程子)에 비교한다면 실로 차이가 있다 하겠지만 공을 주(周)ㆍ정(程)에게 견준다면 거의 같다 하겠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국조(國朝)의 열성(列聖)께서 계승 계발하시어 옛날의 더러운 것을 일신하시었고, 세종(世宗)ㆍ문종(文宗)의 치화(治化)는 옛 시대의 다스림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근래 몇 년 동안은 조정과 여염에 명인(名人) 길사(吉士)로서 일컬을 만한 자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도를 자기의 책임으로 여겨서 은연중에 멀리 몽주의 유서(遺緖)를 이은 자로서는 김굉필(金宏弼)이 곧 그 사람입니다. 굉필은 기국(器局)이 방정하고 성행(性行)이 단결(端潔)하여 성학(聖學)에 독실하여 노력하고 실천하였습니다. 행신(行身)은 포용성이 있었고, 처사(處事)하는 데에도 도량이 있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데에 공경함이 없는 데가 없었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순순하여 지성으로 하였습니다.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먼저 《소학(小學)》과《대학(大學)》을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규모가 일정하고 절목(節目)에 질서가 있으며 유도하고 제휴함에 조금도 게으른 적이 없었습니다. 어지러운 세대를 만나 여러 차례 환난을 겪었으나 고요하게 처신하였으며, 공경하는 마음을 독실하게 하여 죽을 때까지 해이하지 않았습니다. 그 문하에서 종유하며 배우던 자들은 사도가 극히 순박하다는 것을 들어 알고는 태산과 북두성같이 우러러 받들었습니다. 지금의 학자 중에도 덕행을 귀하게 여기고 문예(文藝)는 천하게 여기며 경술을 높이고 이단을 억제할 줄 아는 것과, 전하께서 호오(好惡)를 밝히고 취사(取捨)를 살피며 기강을 정돈하고 풍화를 선양하시려는 것 등은 실상 굉필의 힘에 관계된 바가 있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이 두 사람의 덕택을 입었건마는, 두 사람의 공을 아는 자는 온 세상에서 찾아도 아마 적을 것입니다. 이때야말로 바로 전하께서 순우(淳祐) 연대의 고사(古事)를 다시 거행하실 시기입니다.
신 등이 그윽이 보건대, 백성이 살아온 이래로 한 차례 태평하고 한 차례 어지러워지는 것은 대개 운수가 성할 때와 쇠할 때가 있고, 도가 밝을 때와 어두울 때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운수가 성하면 어진 자가 형통하고, 운수가 쇠하면 어진 자도 막히며, 도가 밝으면 학술이 높아지고, 도가 어두워지면 학술이 드러나지 않는데, 형통하고 막혀짐과 높아짐과 드러나지 않음은 임금에게 달린 것입니다. 방금 전하께서 어진 이를 예(禮)로써 높이고 학문을 성심으로 숭상하시니, 운수가 성해지고 도가 맑아짐은 오직 이때인가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선비를 아직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안유(安裕)와 같이 종사(從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성명(聖明)으로서 잘못하는 일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풍속을 순후(醇厚)하게 하고 사습(士習)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이번 조치에 달려 있는데, 신 등은 전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시고 뜻을 모아 다스림을 도모하시며 장차 유신(維新)하는 교화를 일으키려고 하시면서, 송 나라 이종(理宗)이 한 일을 하실 줄 모르십니까. 애석합니다. 이종은 염(濂 주돈이(周敦頤))ㆍ낙(洛 정호(程顥)ㆍ정이(程頤))과 주(朱 주희(朱熹))ㆍ장(張 장재(張載))을 존숭하고, 왕안석(王安石)을 물리쳤으니, 사람을 좋아할 줄 알고, 사람을 미워할 줄 아는 인(仁)이 있다고 하겠습니다마는 권간(權奸)을 차례로 등용하여서 진덕수(眞德秀)와 위요옹(魏了翁) 같은 현인이 있어도 능히 스승으로 삼을 줄 몰랐으니, 이것은 현인을 보고도 현인인 줄 모르고, 현인이 아님을 보고도 현인이 아닌 줄을 모르는 혼암(昏闇)한 자였습니다.
족히 전하를 위해서 아뢸 바가 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좁은 곳까지 비춰 주는 밝음을 더욱 넓히시며, 굳은 결단을 쾌하게 하시어, 덕음(德音 임금의 말씀)을 천하에 알려 특별히 윤허하시어 몽주(夢周)와 굉필(宏弼)을 문묘(文廟)에 종사하도록 하심을 엎드려 원합니다. 이렇게 하시면 동방에 도학이 중하다는 것이 밝아지고, 이 백성이 존숭할 바가 있음을 알게 되어, 사도에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신 등은 감히 정성을 다해서 구중(九重)에 바치오니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정축년(1517) 8월 초7일 올림.
ⓒ 한국고전번역원 | 이익성 (역) | 1971

별과시 천거인
[DCI]ITKC_BT_1319A_0010_0
00_0010_2002_003_XML DCI복사 URL복사
별과시(別科時)에 천거한 사람들로 서울 밖에서 천거된 사람은 모두 1백 20명인데 천과(薦科)에 오른 사람은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는데, 나머지 78명은 아마도 그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 똑같이 기록한 듯함.
이상 두 참봉은 유일(遺逸)로서 벼슬을 받았다가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유학 박계효(朴繼孝)는 삼가(三嘉) 출신으로 학행과 재질이 있었고 기개와 도량이 강정했다. 예의를 다하여 상례를 모셨다.
생원 송석현(宋錫賢)은 영광(靈光) 출신으로 마음이 투철하고 효우가 돈독하였으며 재행(才行)이 뛰어났고 재능이 있었다.
생원 임말손(林末孫)은 수원(水原) 출신으로 조행이 있고 언행이 청렴하였으며 남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였다.
생원 변벽(卞璧)은 거창(居昌) 출신으로 학행과 기식(器識)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거스름이 없었다.
생원 형사보(邢士保)는 거창 출신으로 효행과 학문이 있었다. 임오과(壬午科)에 올라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유학 유자방(柳子房)은 거창 출신으로 조행과 기식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우에게 믿음이 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다.
좌랑 정경(鄭瓊)은 효행이 드러났으며 학문이 두루 통하였다. 이하는 모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다.
판관 박찬(朴璨)은 재행과 효렴이 있었다. 이상 두 사람은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생원 이종경(李宗慶)은 학행과 기식이 있었는데, 연경(延慶)의 아우이다.
생원 신겸(愼謙)은 조행이 있었고, 여유가 있었다.
진사 정세경(鄭世卿)은 재행과 효행이 있었다. 추천으로 벼슬에 올랐다가 파직되었다.
참봉 김석홍(金錫弘)은 학행과 조행이 있었다.
진사 홍등(洪縢)은 선을 좋아하고 잘못을 반성하여 잘 고쳤으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일찍이 유일(遺逸)로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생원 신광록(申匡祿)은 학행이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을 지성으로 사귀어 자상하게 인정을 다하였다.
유학 이후(李煦)는 재식이 있어 집에 있으면서 고요히 심성을 길러 옛사람의 학풍이 있었다.
진사 여희단(呂希端)은 학행과 재행이 있었다.
사부(師傅) 목희증(睦希曾)은 조행이 있었으며 성질이 질박하고 유순하였다.
진사 이문건(李文楗)은 침중(沈重) 숙성(夙成)하였으며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충건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는데, 을사년에 집안에 화를 당하여 귀양갔다가 죽었다.
사부 여희림(呂希臨)은 효심이 많았다.
진사 김안도(金安道)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檢行)하였다. 영상 김령(金鈴)의 아들로 음직을 받아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진사 이백록(李百祿)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하였다.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순후하고 삼가며 효행이 있었다.
생원 김인손(金麟孫)은 경학에 밝고 지조가 있었다. 후에 이름을 단(亶)이라 고치고 임오과에 올라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생원 허금(許䃢)은 결백하고 조심스러웠는데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참봉 김만억(金萬億)은 언행을 삼가고 학문을 좋아했다.
도사(都事) 홍사부(洪士俯)는 결백하고 언행을 조심하여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참봉 김창(金琩)은 언행을 아주 조심했다.
유학 김진종(金振宗)은 향하는 바가 견실하고 확고하였다. 무자년에 급제하여 을사년에 벼슬이 전적에 이르렀다가 귀양가 죽었다.
진사 원계채(元繼蔡)는 지조가 있는데 을묘년 식년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생원 박세훈(朴世勳)은 재주와 식견이 있는데 세희(世熹)의 형이다.
군수 이은(李誾)은 지조가 있고 결백하였으며 학식이 있었다.
전 도사 이세번(李世蕃)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생원 이선장(李善長)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생원 우순필(禹舜弼)은 학행이 있었다.
전 현감 최상(崔祥)은 조행이 있었다.
진사 이세웅(李世雄)은 뜻이 돈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치부를 하지 않았다.
유학 박두남(朴斗南)은 몸가짐을 잘하여 조행이 특이하였다.
생원 송미창(宋彌昌)은 재행이 있었다.
유학 윤거신(尹居莘)은 학행이 있었다.
참봉 이광식(李光植)은 효행과 일을 잘 처리하는 국량이 있었다.
생원 박번(朴蕃)은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유학 문준(文濬)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다.
유학 문회지(文繪地)는 뜻을 돈독하게 행하였다.
유학 한계유(韓繼愈)는 뜻이 돈독 견실하였으며 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유학 김인범(金仁範)은 기절(氣節)과 재능이 있었다.
유학 진건(陳騫)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재주와 문식이 있었다.
유학 허초(許礎)는 지조가 떳떳하였으며 재기(才氣)가 있었다.
진사 허자(許磁)는 재행이 있어 계미년 알성별시(謁聖別試)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을사년 위공원훈(僞功元勳)으로 삭탈되었다.
유학 김시창(金始昌)은 학행이 있었다.
생원 박훈(朴薰)은 근실하여 실행력이 있었다.
생원 이영우(李永祐)는 마음씀이 거침없었으며 뜻을 세우는 데 지조가 있었다.
유학 유여주(兪如舟)
생원 신세경(申世卿)
유학 김윤종(金尹宗)은 김식(金湜)의 문인으로 명천(明川)에 귀양갔다가 풀려 상주(尙州)의 집에서 죽었다.
유생(儒生) 서경덕(徐敬德)은 개성(開城) 출신으로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가 거처하니, 남들이 향거(鄕擧 향리에서 위로 인재를 천거함)하였다.
유학 윤환(尹瓛)은 여주(驪州) 출신으로 지절(志節)이 방정하고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유학 정소(鄭韶)는 남양(南陽) 출신으로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랐다.
유학 이윤문(李允文)은 충주(忠州) 출신이다.
유학 김증(金增)은 청주(淸州) 출신이다.
생원 상진(尙震)은 임천(林川) 출신으로 기묘년 동별시(冬別試)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를 성안군(成安君)이라 추증하였다.
유학 김극양(金克讓)은 보령(保寧) 출신으로 문음으로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는데, 좌의정 극성(克成)의 아우다.
생원 김숭종(金嵩宗)은 음성(陰城) 출신이다.
진사 이난손(李蘭孫)은 온양(溫陽) 출신으로 갑신년 별시에 올라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이상 일곱 사람은 모두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해(李蟹)는 나주(羅州) 출신으로 재주와 덕행을 겸비하여 실천력이 독실하였으며, 경(經)에 밝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생원 박이홍(朴以洪)은 창평(昌平) 출신으로 마음씀이 순박하고 독실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생원 장응두(張應斗)는 장수(長水) 출신으로 효제(孝悌)ㆍ충신(忠信)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재학(才學)을 겸비하였다.
진사 최필성(崔弼成)은 부안(扶安) 출신으로 지극한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문ㆍ무의 재주를 겸비하였으며 빈한하면서도 구차하게 취함이 없었다.
유학 어득한(魚得漢)은 고성(固城) 출신으로 학식이 있었다.
진사 김응청(金應淸)은 영덕(盈德) 출신으로 학식이 있었고 몸가짐이 성실했으며, 착한 것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빈곤하면서도 잘 사는 것을 도모치 않았다.
생원 김세보(金世寶)는 청도(淸道) 출신으로 거상(居喪)에는 죽을 마시었으며 또한 재예(才藝)가 있었다.
진사 김상(金湘)은 문경(聞慶) 출신이며 말이 적었고 벼슬에 나아가 군수에 이르렀다.
진사 손계돈(孫季暾)은 경주(慶州) 출신으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학식이 있다.
진사 이인견(李仁堅)은 영천(榮川) 출신으로 마음 가짐이 청렴하고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감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정(李涏)은 인동(仁同) 출신으로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다.
생원 박덕손(朴德孫)은 함안(咸安) 출신으로 문학을 좋아하고 웃어른을 공경했으며 고향에서 공순하였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은 봉화(奉化) 출신이며, 수차에 걸쳐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다.
미란시 인물
난리 이전 정부의 육조ㆍ대간ㆍ시종ㆍ팔도 방백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좌의정
우의정 안당(安瑭)
좌찬성 최숙생(崔淑生)
우찬성
좌참찬 이자(李耔)
우참찬 이유청(李惟淸)
좌사인(左舍人) 이청(李淸)
우사인(右舍人)
검상(撿祥) 장옥(張玉)
이조 판서 신상(申鏛)
참판 윤은보(尹殷輔)
참의 정충량(鄭忠樑)
정랑 정완(鄭浣)
정옥형(丁玉亨)
이충건(李忠楗)
좌랑 구수복(具壽福)
이인(李認)
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
예조 판서 남곤(南袞)
병겸판(兵兼判) 이장곤(李長坤)
참판 방유녕(方有寧)
참지 성운(成雲)
형판(刑判) 김정(金淨)
공겸판(工兼判) 김령(金鈴)
한성 판윤 한세환(韓世桓)
대사성 김식(金湜)
판결사 이세정(李世貞)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승지 윤자임(尹自任)
우승지 공서린(孔瑞麟)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同副承旨) 박훈(朴薰)
주서(注書) 이기(李芑)ㆍ안정(安珽)
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
집의(執義) 박수문(朴守紋)
장령(掌令) 김인손(金麟孫)
최산두(崔山斗)
지평(持平) 이연경(李延慶)
이희민(李希閔)
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
사간(司諫) 유여림(兪汝林)
헌납(獻納) 송호지(宋好智)
정언(正言) 김과(金鈛)ㆍ이부(李阜)
예문제학(藝文提學)
봉교(奉敎) 채세영(蔡世榮)
조구령(趙九齡)
대교(待敎) 권예(權輗)
이공인(李公仁)
검열(檢閱) 이구(李構)
신잠(申潛)
김신동(金神童)
강은(姜㶏)
대제학(大提學) 남곤(南袞)
제학(提學) 김정(金淨)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직제학(直提學)
전한(典翰)ㆍ정응(鄭譍)
응교(應敎) 기준(奇遵)
부응교(副應敎) 장옥(張玉)
교리(校理) 조우(趙佑)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 권적(權磧)
부수찬(副修撰) 심달원(沈達源)
박사(博士)
저작(著作) 경세인(慶世仁)
정자(正字) 권장(權檣)
김명윤(金明胤)
감사(監司)
경기(京畿) 한효원(韓效元)
충청(忠淸) 신공제(申公濟)
전라(全羅) 김안국(金安國)
경상좌(慶尙左) 이항(李沆)
상동(上同) 문근(文瑾)
강원(江原) 김굉(金硡)
황해(黃海) 김정국(金正國)
함경(咸鏡) 손중돈(孫仲暾)
평안(平安) 허굉(許硡)
개유수(開留守)ㆍ조원기(趙元紀)
난후 인물
난 후 추죄(追罪) 때에 정부 6조(六曹)ㆍ대간(臺諫)ㆍ시종(侍從)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領議政) 김령(金鈴)
좌의정(左議政) 남곤(南袞)
우의정(右議政) 이유청(李惟淸)
좌찬성(左贊成) 이계맹(李繼孟)
우찬성(右贊成) 장순손(張順孫)
좌참찬(左叅贊) 한세환(韓世桓)
우참찬(右叅贊)
이조 판서(吏曹判書) 심정(沈貞)곤(袞)으로 대신하다.
참판(叅判) 김근사(金謹思)
참의(叅議)
호판(戶判) 고형산(高荊山)
예판(禮判) 신상(申鏛)
병판(兵判) 권균(權鈞)
형판(刑判) 홍숙(洪淑)
공판(工判)
한판윤(漢判尹)
판결사(判決事) 이세정(李世貞)
대사성(大司成)
병참판(兵叅判) 방유녕(方有寧)
대사헌(大司憲) 이항(李沆)
집의(執義) 유관(柳灌)
장령(掌令) 서후(徐厚)
채침(蔡忱)
지평(持平) 오준(吳準) 이순(李純)으로 바꾸다.
이영부(李英符)
대사간(大司諫) 이빈(李蘋)
사간(司諫) 남세준(南世準)
헌납(獻納) 남효의(南孝義)
정언(正言) 조침(趙琛)ㆍ한승정(韓承正)
도승지(都承旨) 윤희인(尹希仁)근사(謹思)로 대신하다.
좌승지(左承旨) 박호(朴壕)
우승지(右承旨) 성운(成雲)
좌부(左副) 윤은필(尹殷弼)
우부(右副) 조옥곤(趙玉崑)
동부(同副) 김희수(金希壽)
주서(注書) 정세호(鄭世虎)
이기(李巙)
대제학수(大提學守) 이행(李荇)
제학(提學) 이항(李沆)
부제학(副提學) 이사균(李思鈞)
직제학(直提學)
전한(典翰) 이지(李遲)
응교(應敎) 유부(柳溥)
부응교(副應敎) 김영(金瑛)
교리(校理) 임추(任樞)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 권예(權輗)
부수찬(副修撰) 손수(孫洙)ㆍ이환(李芄)
박사(博士)
저작(著作)
정자(正字)
좌당인원(坐黨人員)
[DCI]ITKC_BT_1319A_0010_000_0020_2002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찬축류(竄逐類)
대사헌 조광조ㆍ부학 김구ㆍ응교 기준ㆍ전한 정응ㆍ수사(水使) 한충(韓忠)ㆍ정랑 윤광령ㆍ유생 김윤종ㆍ주서 안정ㆍ판서 김정ㆍ승지 윤자임ㆍ승지 박훈ㆍ사인(舍人) 최산두(崔山斗)ㆍ파성군(巴城君) 경(璥)ㆍ유생 이중(李中)ㆍ생원 이약수ㆍ검열 신잠(申潛)ㆍ대사(大司) 성금식(成金湜)ㆍ승지 박세희(朴世熹)ㆍ병사(兵使) 유용근(柳庸謹)ㆍ정랑 정완(鄭浣)ㆍ의학교수 안찬(安瓚)ㆍ유생 오희안(吳希顔)ㆍ유생 박두남.
삭탈류(削奪類)
좌찬성 최숙생ㆍ교리 양팽손(梁彭孫)ㆍ현감 송호례ㆍ지평 조우ㆍ숭선 정(崇善正) 총(灇)ㆍ정랑 노필(盧㻶)ㆍ우찬성 이자(李耔)ㆍ정랑 이약빙(李若氷)ㆍ지평 이연경ㆍ사인 이청ㆍ강녕 부정(江寧副正) 기(祺)ㆍ현감 이사검ㆍ지평 이희민ㆍ교리 송호지ㆍ정랑 이충건ㆍ시산 정(詩山正) 정숙(正叔)ㆍ장성 부수(長城副守) 엄(儼)ㆍ부사 하정(河珽)
천거과(薦擧科) 출신이 28명인데, 기묘년에 귀양간 사람이 3명, 신사년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귀양간 사람이 2명, 죄를 입은 사람이 3명, 처음으로 벼슬한 사람이 2명, 다시 등과(登科)한 사람이 1명, 한가히 지내는 사람이 15명이다.
파직류(罷職類)
좌의정 안당ㆍ관찰사 김정국ㆍ검열 이구ㆍ좌랑 윤구(尹衢)ㆍ참의 이성동ㆍ찰방 윤내신(尹來莘)ㆍ현감 안처순(安處順)ㆍ좌랑 유성춘ㆍ참봉 유맹달(柳孟達)ㆍ참판 유운(柳雲)ㆍ좌찬성 이장곤ㆍ봉교(奉敎) 조구령(趙九齡)ㆍ좌랑 구수복(具壽福)ㆍ관찰사 문근ㆍ찰방 김태암(金兌巖)ㆍ현감 박수량(朴遂良)ㆍ찰방 윤상림(尹商霖)ㆍ참봉 김석홍(金錫弘)ㆍ우참찬 김안국ㆍ지평 이영부ㆍ부사 권벌(權橃)ㆍ봉교 채세영ㆍ참판 김세필ㆍ참봉 봉천상(奉天祥)ㆍ현감 최운(崔澐)ㆍ참봉 노우명(盧友明)
피척류(被斥類)
영중추 정광필ㆍ참의 정충량ㆍ생원 박광우ㆍ찬성 이계맹ㆍ좌랑 윤개(尹漑)ㆍ판서 신상(申鏛)ㆍ박사(博士) 임권(任權)
이상 열거한 사람들은 약간 조정에 용납되었다.
관찰사 윤세호(尹世豪)ㆍ검상 장옥(張玉)ㆍ관찰사 공서린(孔瑞麟)ㆍ급제(及第) 고운(高雲)ㆍ한림(翰林) 정원(鄭源)
이상 열거한 사람 가운데 어떤 이는 파직되었고 어떤 이는 서용되었다.
부사 유인숙ㆍ부사 박영(朴英)ㆍ부사 정순붕(鄭順朋)ㆍ부사 신광한(申光漢)
이상 네 사람은 경진년에 파직되었고, 신사년에 삭탈되었다.
부사 이윤검(李允儉)ㆍ도사 김광복(金光復)ㆍ수찬 심달원(沈達源)ㆍ급제 허백기(許伯琦)ㆍ현감 조언경(曺彦卿)ㆍ참의 최명창(崔命昌)ㆍ부사 박상(朴祥)ㆍ급제 김필(金珌)ㆍ현감 권장ㆍ부제학 이사균(李思鈞)ㆍ평사(評事) 이홍간(李弘幹)
이상의 어떤 이는 반(班)이고 어떤 이는 산관(散官)이었다.
피죄류(被罪類)
유생 홍순복(洪舜福)ㆍ박사 안처근(安處謹)ㆍ유생 최수성(崔壽城)ㆍ최운(崔澐)ㆍ유홍(柳洪)ㆍ학유(學諭) 안처겸(安處謙)ㆍ정랑 신변(申抃)ㆍ생원 이종익(李宗翼)ㆍ이중(李中)ㆍ수찬 권전(權磌)ㆍ생원 신석(申晢)ㆍ숭선 정(崇善正) 이총(李灇)ㆍ오희안(吳希顔)
경외관동천인
참봉 노우명(盧友明)은 함양(咸陽) 출신으로 조행(操行)과 명망이 있었으며 학술이 있고 단정하였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담박 고요하였다.
참봉 유맹달(柳孟達)은 임천(林川) 출신으로 천성이 순정(淳正)하였으며 성질이 활달하고 효행이 두드러졌으며 재능이 있었다.
김대성(金大成)의 문하생들로 구성(龜城)에 귀양갔다가 풀려났다.
박인성(朴仁誠)은 □□생으로 자는 성지(誠之)인데 김대성의 문하생으로 귀양갔다가 풀려나 서울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동몽교수(童蒙敎授)를 받고, 뒤에 바뀌어 수운 판관(水運判官)을 배수(拜授)하였으나 졸하였다.
김윤종(金胤宗)은 □□생으로 자는 계지(繼志)인데 김대성의 문하생으로 명천(明川)에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김덕수(金德秀) 형제
권위(權緯)ㆍ권경(權經)은 교리(校理) 경유(景裕)의 서자인데, 김대성의 문하생으로 귀양갔다가 풀려났다.
윤광일(尹光溢) 이상에서 숭선 정(崇善正) 이총 이하부터는 이신(李信)의 옥에 연루되어 죄를 입었는데, 무술년 중묘조에 모두 풀려났다. 에 밝혀졌다.
안형(安珩)은 경자생으로 자는 족조(族祖)인데, 보거(保擧 상관이 보증하고 추천함.)로 □□이 되었다가 기묘년에 파직되었다. 신석(申晢) 이상은 송사련(宋祀連)ㆍ정상(鄭瑺)이 모함하여 주륙당하였다. 윤세영(尹世英)은 유생으로 주륙당하였다. 황현(黃俔)은 무(武)에 힘썼으나 서얼(庶孼)이라 하여 주륙당하였다.
최세관(崔世寬)은 귀양가 죽었으며 이수견(李壽堅)은 귀양갔다.
박순(朴峋)은 귀양갔다. 위 사람들은 정상이 교제한 지 얼마 안 되는 무뢰한들로 송사련과 정상이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 고할까 두려워하였는데, 다행히 그 옥사에 모두 빠졌다.
봉천상(奉天祥) 학년(鶴年)
민간(閔簡)은 선전관(宣傳官)으로 곤장을 맞고 죽었다. 권우란(權遇鸞)은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풀려났다.
이상은 어지러운 말 때문에 연루된 사람이다. 정숙(正叔)은 동복 동생 청화 수(淸化守) 창숙(昌叔)에게 연좌되어 송계 수(松溪守) 중숙(仲叔) 등 5형제와 학년의 동생 서원 정 구(西原正玽) 등은 중종 무술(1538)년에 특사되어 다시 서용되었다. 기타 처자와 연좌된 사람들은 인조 을사년에 모두 풀려났다.
조변(趙抃)은 정민(貞愍)의 조카로 본이름은 변(忭)인데, 귀양갔다가 풀려나 아직도 살아 있다.
수명(壽命)은 종실(宗室) 삼정 수(三政守)인데, 옥당 수(玉堂守)의 동생으로 심문당하고 귀양갔다가 풀려나 다시 서용되었다.
노세걸(盧世傑)은 정민(貞愍)의 □□로 인의(引儀 자원하여 벼슬을 내놓음)로써 심문당하고 귀양갔다.
박사림(朴士林)은 정민의 씨족인데, 찰방으로 심문당하고 귀양갔다.
김사명(金士命)은 정민이 서울로 올라갈 때, 배리(陪吏)로 자기가 같이 올라가면서 친절히 보호하였다.
의손(義孫)은 종실 동산 수(洞山守)인데 심문당하고 귀양갔다가 풀려나 다시 서용되었다.
연현령(延玄齡)은 전사의(司儀)로 여묘살이 도중 귀양갔다가 죽었다.
연창령(延昌齡)은 전별좌(別坐)로 여묘살이 도중 귀양갔는데 다시 풀려났다.
김명원(金明遠)은 습독관(習讀官)으로 장흥(長興)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본명은 광원(光遠)인데 귀양갔다가 풀려났다.
권몽령(權夢齡)은 심문당하고 귀양갔다.
이상 다섯 사람은 옥당수(玉堂守)의 집과 이웃이었다.
송호례(宋好禮)는 추천으로 구례 현감(求禮縣監)이 되었는데 기묘년에 파직되었으며 호지(好智)의 형이다.
박국남(朴國南)은 상을 당하여 죽산(竹山)에 살았다. 안경순(安敬順)의 본이름은 경순(景純)이다.
유사(儒士) 김옥정(金玉精)도 풀려났으며 권세형(權世亨)도 유사인데 풀려났다. 송수(宋壽)는 별시위(別侍衛)인데 풀려났다.
이상 여섯 사람은 정민이 거처하는 소격서(昭格署) 동가(洞家)와 이웃이었다.
박쉬(朴淬)본 이름은 수(燧) 는 안처겸(安處謙)과 같은 방에서 공부한 친구인데 풀려났다.
이사흠(李思欽)은 안처겸(安處謙)과 반궁(泮宮)의 같은 방에서 지낸 생원으로 풀려났다.
이상에서 조변(趙抃) 이하 18명과 당적에 기록된 5명은 모두 심문당하고 귀양갔는데, 풀려나 생환한 자가 10여 명이었다. 무릇 여기에 기록된 자는 모두 가까운 종족이나 이웃의 무리들로 이름 자에 착오가 있다. 또 박 아무의 사위라거나 김 아무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이서(吏胥)가 기록한〈조객록(弔客錄)〉에서 밝혔다.
김철견(金鐵堅) 등 양민과 천민이 모두 60여 명이었는데, 역시 모두 북변(北邊)으로 귀양갔다. 혹 같은 이름으로 변방에 귀양 간 이도 수3호(戶)였다. 김귀천(金貴千)이라는 자는 처겸이 평소에 보호한 사천(私賤)이었다.
이상 김철견 등은 계사년 가을에 모두 풀려 돌아온 자들로 모두 60명인데 그 가운데 9명은 옥당수(玉堂守) 집의 아이종이고, 4명은 정민(貞愍)의 여자종 남편이며, 2명은 의정(議政) 김응기(金應箕)의 종이었다. 기타 2, 3명은 정민이 평소에 친히 믿었던 자들로 모두 부인의 상중에 일을 맡아 한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묘소 부근에 거처하는 백성들이거나, 같은 군(郡) 산(山)의 석기장(石器匠)들로, 명록이란 것은 상장(喪葬) 때에 공역(功役)을 관리한 장부다.
구화사적(構禍事蹟)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병인년(1506)에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과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반정을 하려 할 때에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을 시켜 비밀리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생각을 떠보게 하였다. 이에 수근이 말하기를,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것이니 나는 말할 수가 없소.” 하였다. 곧 연산(燕山)의 비(妃)는 수근의 누이요, 중종(中宗)의 전 왕비는 수근의 딸이기 때문이다. 귀손이 마침 등극사(登極使)로 명 나라 서울에 가는데 일이 발각될까 스스로 의심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이 되어 길에서 죽었다. 원종 등은 귀양가 있는 이과(李顆)가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수령과 더불어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기일을 당겨서 먼저 거사하려 하였다. 그런데 9월 초이튿날에 마치 연산군이 장단(長湍)의 적벽(赤壁)에서 놀이를 하게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초하룻날 저녁에 원종 등이 장사들을 훈련원(訓練院)으로 모으기로 약속을 하니 그날 모인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으나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이에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 유자광(柳子光)을 부르고 그의 계책에 따라 두터운 유지(油紙)를 오려 표신(標信)을 만들어서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죄수와 역부(役夫)를 몰아 돈화문(敦化門) 앞 수백 보쯤 되는 곳에 나가서 말을 세워 진을 치고, 운천군(雲川君)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의 저사(邸舍)를 호위하게 하고, 변수(邊修)ㆍ최한홍(崔漢洪)ㆍ심형(沈亨)ㆍ장정(張珽)을 시켜 궁 내성(內城)을 지키면서 내사복시(內司僕寺)에 쌓아둔 꼴더미에 불을 질러 뜻밖의 변에 대비하게 하고, 또 신윤무(辛允武)를 보내어 용맹한 장사 이조(李藻)를 거느리고 신수영(愼守英)ㆍ신수근(愼守勤)ㆍ임사홍(任士洪)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끌어내어 쳐 죽이게 했다. 그리하여 초이튿날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전지를 받들어 관원을 보내어 종묘에 고하고, 왕을 폐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喬桐)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하고, 그의 부인 신씨를 봉하여 왕비로 삼아 법가(法駕)를 갖추어 궁중에 들어와서 여러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국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를 석방하고, 여러 역사(役事)를 파하니 기뻐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초4일에, 세 대장(大將 성(成)ㆍ박(朴)ㆍ유(柳))와 유자광 등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미 그 아버지 신수근을 베었으니, 그 딸이 왕비의 지위에 있을 수 없다.” 하고, 폐하여 친정으로 내쫓고,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책봉하여 왕비로 삼으니 곧 그가 장경왕후(章敬王后)다. 장경왕후는 을해(乙亥, 1515) 2월 26일에 원자(元子)를 낳고, 7일 만에 승하하였다. 그리하여 그때 여론이 연산군의 모후(母后)와 자순왕비(慈順王妃)가 모두 후궁으로 있다가 승진하여 정비(正妃)가 된 일이 있으니, 만일 성종(成宗)조의 전례를 따른다면 박숙의(朴淑儀)와 홍숙용(洪淑容)이 모두 장성한 아들이 있으므로 새로 낳은 원자를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하고,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원자는 곧 우리 인종(仁宗)이다. 이때에 충암(冲庵)ㆍ김정(金淨)은 순창(淳昌) 군수로 있고, 눌재(訥齋)ㆍ박상(朴祥)은 담양(潭陽) 부사로 있었는데, 조정에서 여론을 듣겠다는 전교(傳敎)를 받고 이들은 공동으로 소(疏)를 올려 항의하기를, “본국의 심온(沈溫)이 태종(太宗)에게 죄를 지었으나, 소헌(昭憲)왕비의 옥체(玉體)에는 흠이 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제 원종의 무리가 스스로 제 일신을 위하려는 꾀로 군부(君父)를 협박하고 국모(國母)를 쫓아내어 천하의 큰 명분을 범하였으니, 관작을 삭탈 추방하여 그 죄를 만세에 밝히고, 신씨를 복위시켜 예전 은혜를 온전히 하게 하라. 그렇게 해야만 옆자리에 있는 후궁들이 엿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8월 12일에, 양사(兩司)에서 알성별시(謁聖別試)초시(初試)를 시행하여 파장(罷場)하고 숙배(肅拜)한 뒤에 양사의 관원들이 모두 서빈청(西賓廳)에 모였다. 이때 대사간이행(李荇)이 주장하기를, “만일 다시 신씨를 세움으로써 왕자의 경사가 있게 되어 가례(嘉禮)의 선후를 의논한다면 신씨가 먼저이니, 원자(元子)를 어느 땅에 두려는가.” 하여, 김정ㆍ박상의 상소를 잘못된 주장으로 몰아 버렸다. 대사헌 권민수(權敏手)등도 이 이행의 의견에 붙좇아 죽일 죄로 몰려고 합사(合辭)하여 심문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이들을 잡아 올려다가 신문하였으므로 일이 거의 헤아리기 어렵게 되었다. 이때 좌의정 정 문익(鄭文翼), 정광필(鄭光弼)공이 조정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구제하려고 말하기를, “그들의 말이 비록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죄를 주어서는 안 되오. 죄를 주면 진언(進言)하는 길을 막게 하는 것이오.” 하였다. 그리하여 8월 23일에 곤장 1백을 때리고, 도형(徒刑) 3년에 처하여 외방 역(驛)으로 정배시키고 직첩(職牒)만 모두 빼앗게 했다. 그러나 곤장은 면하게 되었으니 이는 정 대신의 힘이었다. 안 정민(安貞愍, 안당〈安瑭〉)공이 이조 판서로서 대신의 뜻이 조정에서 행하여지지 못하여 체통이 서지 않는 것을 분하게 여기고, 8월 28일에 조회가 파하자 곧 아뢰기를, “박상과 김정(金淨) 등이 무슨 의견이든지 제시하라는 조정의 영을 공손히 받들고 충성을 다하여 진언을 한 것인데, 지금 한두 사람의 말을 들어 도리어 엄한 견책을 가한다면 이것은 실상 진언하는 길을 막고 사기를 저상시키어 만세의 비방을 사는 것이다. 재상은 국론을 바로잡고 국사를 결단하는 것이요, 대간은 특별히 허물을 다스리고 어긋남을 규탄할 뿐이다. 그래서 대신과 육경(六卿)과 시종신(侍從臣)들이 모두 그들에게 죄를 주지 말기를 청하였으니 국시(國是)가 여기에 있는 것이오. 그런데 대간은 홀로 그르다고 하니 이것이 공정한 주장이라 할 수 있는가. 또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를 죄준다면 누가 몸을 잊고 나라에 따르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권민수와 이행은 다시 안 정민을 반박하고 나라를 그르친다고 지탄하여 거의 한 달이나 지나서야 물의가 가라앉아 정지되었다. 이 뒤로부터 조야의 인사들이 모두 용기를 잃고 두려워서 몸을 움츠리고 말을 꺼리면서도 권민수ㆍ이행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응교(應敎) 이언호(李彦浩)가 9월 초4일 밤에 임금 앞으로 나가 아뢰기를, “신이 근자에 시관(試官)이 되어 한 응시자가 대답한 책문(策文)을 보니, 거기에, ‘대간으로서 박상(朴祥)등에게 죄를 주자고 주장한 것은 스스로 직책을 잃은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유생의 망령된 주장이니 의당 낙방을 시켜야 옳았을 터인데, 오리어 뽑았으니 심히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지 않으니, 우부승지 신상(申鏛)이 곧 아뢰기를, “과거 보는 자가 대답하는 책문은 각각 자기의 뜻을 말하는 것이니 문리가 화려한 것을 취할 뿐입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혐의하여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선비를 취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언호가 감정을 품고 대사헌 권민수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민수는 곧 신상을 탄핵하려고 하였으나 대간들이 협조를 하지 않아 드디어 폐기되고 말았다. 그 뒤 11월 28일에 정암(靜庵)ㆍ조광조(趙光祖)가 처음으로 정언이 되어 곧 이행의 무리를 배척하여 말하기를, “대간은 직책이 언로를 맡고 있는 것인데 도리어 사실을 말하는 사람을 죄주어 먼저 언론의 길을 스스로 막음으로써 임금으로서 간함을 막는 부끄러움을 이루어 놓았으니 그 실수가 크다.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니 파직시킴이 옳다.” 하고, 되풀이하기를 마지않았다. 이에 임금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양사의 관원들을 모두 갈아 버리게 하였다. 12월 초2일에 신임 대사헌 이장곤(李長坤)과 신임 대사간 김안국(金安國)은 언로를 구원하자는 조정암의 주장을 두둔하였다. 그러나 장령 유보(柳溥)와 김희수(金希壽)는 이언호의 의논에 현혹되어 권민수와 이행을 두둔하여 말하기를, “언로라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장곤은 여러 번 되풀이하여 상대편을 타일렀으나 여전히 서로 용납되지 못하므로 대궐로 나가서 각각 자기들의 주장을 전달하였다. 이에 임금은 장곤과 안국을 체임시키고, 유보 등으로 대신 그 직책에 나가도록 명하였다. 이때 직제학(直提學) 김안로(金安老)양쪽이 다 옳다는 의논을 제기하여 보 등의 체직(遞職)을 논박함. 등이 분명히 분별하지 않고 “조광조는 언로를 부식(扶植)하기 위함이었고, 권민수ㆍ이행은 종사를 위하여 죄주기를 청한 것이니 처음부터 모두 그른 것이 아니다.” 하였다. 당시에 조정 의론이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여 다투므로 박열(朴說)은 대사헌이 되었으나 병을 칭탁하여 사표를 제출하고, 방유녕(方有寧)은 대사간이 되어 의론이 정암과 같았으나 홍문관의 탄핵을 받았다. 그때 의론이, “김정과 박상이 허물없이 폐비된 신씨의 원통함을 풀어 주고 또 첩이 정실 아내가 되는데 대의명분이 없다는 것을 밝히려 함이었는데, 권민수ㆍ이행은 이를 간사한 의논이라 지탄하니, 실상은 재주를 질투하고 착한 이를 원수같이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언호가 간사함에 아첨하는 것이나 안로가 양쪽이 옳다는 것이 모두 만세 공론에 죄를 얻은 것이다.” 하였다. 하루는 한림(翰林) 이약빙(李若氷)이 공적인 일로 좌의정 정 문익공의 집에 갔었다. 문익공이 말하기를, “대간은 직책이 언로를 맡은 것인데, 유보ㆍ김희수는 언로를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편견을 고집하니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또 홍문관은 양편이 옳다는 말만 내세워 분명히 분별함이 없으니 나는 그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였다. 그때 대신과 육경(六卿)이 권민수ㆍ이행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집에서만 의논할 뿐 조정에 나아가서는 변별하여 해명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집하는 무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임금의 뜻에 의혹을 조장시킬 뿐이었다. 병자년 봄에 이르러 대신ㆍ대간ㆍ시종들이 박상ㆍ김정의 석방을 청했으나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차자를 올려 힘써 건의하였으나 또다시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두들 말하기를, “양쪽이 다 옳다는 의논에 끌리어 오래도록 용서를 받지 못한다.” 하였다. 그리고 공론이 다시 벌어져서 허물을 옥당(玉堂)의 상소에 돌렸다. 3월 초 8일에 정언 박세희(朴世熹)가 직책을 내놓으면서, “신이 전에 부수찬(副修撰)으로 있을 때에 직제학 김안로(金安老)가 양쪽이 다 옳다는 말을 꾸며 내었습니다. 그때 신의 뜻은 그렇지 않았으나 남에게 구속을 받아서 감히 따로 자기의 뜻을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 말에 대답하기를, “자기 뜻에 그르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때 곧 진달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금 와서 내 뜻이 본래 그렇지 않았다 하면 어찌 그게 말이 되는가.” 하였다. 이에 세희는 진땀이 등을 적시어 죽고자 하나 죽을 땅이 없었다. 장령 홍언필(洪彦弼)과 지평 윤지형(尹止衡)이 또한 사표를 제출하면서, “언필이 응교가 되고 지형이 수찬이 되었을 때 김안로의 교묘한 속임수에 끌리어 같은 말로 함께 상소를 올렸다.” 하였다. 3월 초 10일에 홍문관 교리(校理) 신광한(申光漢)ㆍ부교리(副校理) 이청(李淸)ㆍ부수찬 윤자임(尹自任)ㆍ저작(著作) 기준(奇遵) 등이 이때에 와서 뉘우쳐 깨닫고 또한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권민수와 이행이 조정암을 아주 미워하게 되었다. 이언호는 김모재(金慕齋)와 이 일을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 언호가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그때 왜 김정ㆍ박상을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어 조정 의론을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만들었는가.” 하였다. 이 해 겨울 12월 초 3일에 김정ㆍ박상이 공론에 따라 조정으로 들어오자 언호는 전라 감사로 나가 기묘년에 죽고, 민수는 충청 감사로 나가서 무인년에 죽었으며, 이행은 파면을 당하였다. 그때 수원 부사 이성언(李誠彦)이 소(疏)를 올려 신구(伸救)하다가 그도 또한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었다. 김안로도 이조 참의로부터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때부터 의론을 주장하는 선비들은 착한 것을 보면 포상하여 천거하고, 악한 것을 보면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여, 행실이 효제에 어긋나고 인의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조정에서 일을 함께 하고자 아니 했으므로, 반드시 착한 것을 좋아하여 그 청백함을 함께 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여 그 더러운 것을 함께 싫어하니, 좋고 나쁜 것이 분명하고 옳고 그른 것이 칼로 벤 것 같았다. 그리하여 착한 무리들이 등용되고 사람들이 맑은 이름을 사모하여,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된 것이 이때에 가장 성하였다. 대개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아랫사람은 더 심하게 좋아하고, 굽은 것을 바로잡다가 도리어 곧음이 지나치는 것은 필연한 이치이다. 연소한 신진들이 제도를 개혁하기에 용감하나,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 어질어진다.”는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우(唐虞)의 정치도 기일이 되어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기묘년에 이르러, 득실을 근심하는 무리들이 한산한 벼슬에 버티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찬양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비방하여 청류(淸流) 좋아하는 무리라 하면서 남을 지탄했다. 후생들 중에 힘써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소학(小學)의 무리라 하고, 천거되어 뽑힌 선비들을 현량과(賢良科)라 하여, 서로 비방하고 속된 말을 퍼뜨려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심을 갖게 하였다. 이에 같은 것끼리는 당을 만들고 다른 것들은 공격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정 문익(鄭文翼)ㆍ신 문경(申文景)ㆍ안 정민(安貞愍)이 함께 삼공의 자리에 있으면서 양쪽을 화해시켜 억제하려 했으나, 간원(諫院)에서는 도리어 삼공의 재기(才氣)가 부족하다고 논핵하였다. 조 문정(趙文正)도 그때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그도 또한, “이럴까 저럴까 하여 시속을 따른다.”는 비방을 받았다. 이때 왕의 은총을 받던 여러 현인들은 매양 경연에 나아가 한 장(章)을 강할 때마다 의리를 이끌어 비유하고, 경전(經傳)에 출입하여 미묘한 곳까지 관철하였다. 이때 기준(奇遵)ㆍ박세희(朴世熹)ㆍ양팽손(梁彭孫)ㆍ최산두(崔山斗) 같은 이는 말이 경솔하였고, 그 나머지 재주 있고 날카로운 선비들도 경솔한 결점이 있었으나,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건의하여 사뢴 것에 대하여서는 기어코 왕의 동정을 얻고자 아침에 강연(講筵)을 시작하면 해가 늦은 뒤에야 파했다. 그래서 임금의 몸이 피로해지고 권태를 느끼며 때로는 하품을 하기도 하고 혹은 용상에 기대어 신음하는 소리까지 있었다.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두 사람은 이 강연에 대하여 임금이 싫어하는 눈치를 알고 드디어 모의하여 서로 결탁했다. 그리하여 심정이 몰래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본가로 문안 보내는 계집종을 통하여 조광조(趙光祖)가 나라를 도맡아서 정치를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여 왕을 삼으려 한다는 말을 하게 하고, 또한 항간의 무식한 사람들의 말처럼 꾸며 궁중에 전파시키니, 궁중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때 홍경주(洪景舟)는 일찍이 찬성(贊成)이 되었다가 논박을 당하여 체임되었으므로, 그는 항상 조광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곤ㆍ심정과 곧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를 시켜 그의 딸 희빈(熙嬪)에 이르기를,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을 아침저녁으로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의 뜻을 흔들어 놓게 하였다 그리고 또 산벌레는 나무 열매의 달콤한 즙(汁) 들쥭여 늛물 을 잘 먹으므로 그 즙으로 ‘주초가 왕이 된다〔走肖爲王〕’는 네 글자를 궁중의 동산에 있는 나뭇잎 위에 써 놓게 하였다. 혹은 뽕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산 벌레가 갉아먹어 자국이 나니 도참(圖讖)의 글과 비슷하게 되었다. 그리고 궁녀를 시켜 그 잎을 따다가 임금께 바치어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니 박빈의 친정집 종의 말과 서로 같아지게 되어 겉과 안이 서로 부합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뜻이 더욱 의심을 나타내어 사사건건 놀라고 두려워하여 밀서를 경주에게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곤은 시국의 의논이 과격하고 바르지 못하다는 말로 신 문경(申文景)을 찾아가 말하고 그의 뜻을 떠보니 문경은 한 말로 그 간사한 속임수를 꺾어 버렸다. 그래서 남곤은 속으로 풀이 죽었으니 대개 신 문경이 일을 처리하는 데 판단을 잘하기 때문에 남곤은 그 간사한 꾀를 팔지 못한 것이었다. 10월 초3일에 문경이 세상을 떠나니 이미 꺼릴 것이 없었다. 이보다 먼저 정암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이욕(利欲)이란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것이요, 국가의 병폐의 근원도 이 이(利)의 근원에 있다.” 하여, 반정 때에 공이 없어 허위로 책록된 사람을 삭제하여 그 욕심을 징계하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못하여 드디어 폐기된 일이 있었다. 그후 정암이 다시 대사헌이 되자 대사간 이성동(李成童)과 함께 양사(兩司)를 합하여 상주하고, 홍문관도 이에 동조하고 정부와 육조(六曹)도 모두 한결같이 앙청하였다. 그래서 11월 초9일에 마침내 윤허를 받은 일이 있다. 남곤ㆍ심정은 이번의 기회 탄 것을 다행으로 여기어 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굽히고 있는 재상들에게 함께 조광조 일당을 해하자는 뜻을 말하니, 지중추(知中樞) 안윤덕(安潤德)은 자기는 능력이 없다고 대답하고, 권균(權鈞)은 지위가 낮다고 사양하고, 여성부원군(礪城府院君)ㆍ송질(宋軼)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그 밀서에, “광조의 무리가 정국(靖國) 공신을 삭제하기를 청한 것은 강상(綱常)을 중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공이 없었던 자를 삭제하고 그 후에 겨우 20여 명만을 남겼는데, 명색이 연산군을 폐한 죄를 천단(擅斷)하자고 하는 것이니, 경의 무리가 어육(魚肉)이 될 것이고 내게까지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주초(走肖)의 무리들은 간사하기가 왕망(王莽)ㆍ동탁(董卓)과 같다. 그래서 온 나라의 인심을 얻고 백관의 첨앙(瞻仰)하는 바가 되었으니, 하루아침에 송 태조(宋太祖)와 같이 황포(黃袍)를 몸에 걸치는 변이 있다면 비록 사양하려 하나 사양할 수 있겠는가. 광조 등이 현량과를 두자고 청한 것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라고 여겼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반드시 우익(羽翼)을 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제거하려 생각하나 경의 사위 김명윤(金明胤)이 또한 그 속에 끼어 있으므로 이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의 심복이 몇 사람이 있는가. 광필(光弼)은 왕실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다. 장곤(長坤)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소아배(小兒輩)에게 붙었으니 믿을 수 없다. 심정은 비록 근일에 논박을 당하였지마는 재간이 있으니 대임(大任)을 맡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광조 등을 제거하려는 뜻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말고, 남곤ㆍ심정에게 물어 보는 것이 어떠한가. 용근(庸謹)ㆍ한충(韓忠)ㆍ세희(世熹)ㆍ자임(自任)은 모두 무예(武藝)가 있어 두려운 자들이니, 아침에 이 무리들을 없애면 저녁에 죽더라도 반드시 걱정이 없겠다.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奇遵)이 광조 같은 이야말로 정승의 자리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니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에게 나오는 것이므로 나를 반드시 임금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한갓 자리만 지키고 있는 존재로 알 것이다. 광조는 말이 공손하고 용모가 온순하여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수년 동안에 순서를 뛰어 발탁하여 등용했으므로 현달하게 되었는데 도리어 내가 주초(走肖)의 술책 가운데 떨어졌다. 그래서 드러내 놓고 죄를 주려 하나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ㆍ육조 유생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할 터이니, 내가 능히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처치하여야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근일 이래로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자도 베개를 편안히 하지 못하여 야윈 뼈만 앙상히 튀어나온다. 내가 명색은 임금이라고 하지마는 실상인즉 나 자신 임금인지 알 수가 없도다. 옛날에 용근(庸謹)이가 나를 거만한 눈초리로 보았으니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경 등은 이들을 먼저 제거하고 뒤에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본가에 내린 것은 언문 편지인데, 한문으로 번역하여 지금 싣는다. 그리하여 사실이 이와 같은데 이것이 도리어 간흉한 무리의 문자라고 여기는가. 이에 고형산(高荊山)ㆍ홍숙(洪淑)ㆍ손주(孫澍)ㆍ방유녕(方有寧)ㆍ윤희인(尹希仁)ㆍ김근사(金謹思)ㆍ성운(成雲) 등이 비밀리 약속한 기일에 모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사할 때에 병조 판서가 없으면 위사(衛士)들을 호령할 수가 없으므로, 판서 이장곤이 집에 없는 틈을 타 날마다 세 번씩 가서 명함을 들여보내어 먼저 의심하게 하고 장곤이 대궐로 들어가 이 사실을 아뢰는 저녁에 쪽지 편지로 속여 불러냈다. 또 미복(微服)으로 걸어서 영의정 정 문익공의 집으로 가서 달콤한 말과 위급한 말로 달래려고 위협하였으나, 공은 끝내 수긍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어리석고 미혹하여 계교가 이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남곤은 할 수 없이 물러와서 홍경주에게 말하기를, “영상은 굳이 말리나 우리들은 꼭 해야 하겠다.” 하고 홍경주를 시켜 임금에게 아뢰도록 했다. 내용인즉, “변(變)을 고하려 하나 근시(近侍)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심복들입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신무문(神武門)을 열어 주시옵소서. 밤을 타서 들어가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이는 사관(史官)과 승지가 알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15일 초저녁에 홍경주ㆍ김전(金銓)ㆍ남곤ㆍ이장곤ㆍ고형산이 신무문 밖에 모이었고, 이미 대궐에 들어간 도총관(都摠官) 심정과 참지(參知) 성운이 직무 보는 곳으로부터 와서 합치어 함께 합문(閤門) 밖에 앉아서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기를, “신 광필ㆍ경주ㆍ곤(袞)ㆍ장곤ㆍ형산ㆍ홍숙(洪淑)ㆍ정(貞)ㆍ주(澍)ㆍ유녕(有寧)ㆍ희인(希仁)ㆍ근사(謹思)ㆍ운(雲) 등은 엎드려 살피건대 조광조가 서로 붕당을 만들어 자기에게 붙는 사람은 진급시키고 자기와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하여 명성과 위세가 서로 붙쫓고, 권세와 요직을 모조리 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개인적인 행동만 하여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후진들을 유인하여 공정하지 못하고 과격한 것으로 습성을 만들어 젊은이로서 어른을 능멸하며 천한 자로서 귀한 사람을 무시하게 하여 나라 형세가 전도되고 조정 정사가 날마다 글러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속으로는 분함과 탄식함을 품었으나 그 세력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곁눈질이나 하고 다니며 두려워 발을 모으고 설 뿐입니다. 자세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청컨대 유사(攸司)에게 회부시켜 그 죄를 명백하게 밝혀 주소서.” 하였다. 그리고 경주를 시켜 아뢰게 하고 김근사ㆍ성운으로 가승지(假承旨)를 삼고, 심사순(沈思順)으로 가주서(假注書)를 삼으며, 남곤으로 이조 판서를 삼고, 또 무기를 대궐 뜰에 베풀어 놓으니 이는 대궐 문으로 잡아다가 죽이려 함이었다. 그리고 남소(南所)를 지키는 군사에게 시위(侍衛)를 명하여 사정전(思政殿)에 나와 대기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주와 남곤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일이 급하여 친히 국문할 겨를이 없사오니 빨리 승정원과 홍문관에 들어와 번드는 인원을 잡아다가 가두도록 명령하시옵소서.” 하였다. 이때에 승정원에서는 전연 알지도 못하고 있다가 근정전(勤政殿)에 불빛이 일어남을 본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숙직하는 좌승지 공서린(孔瑞麟), 우승지 윤자임(尹自任)ㆍ주서 안정(安珽)ㆍ검열(檢閱) 이구(李構)가 합문(閤門) 밖에 나가니, 근정전 서쪽 뜰에 호위하는 군사들이 늘어서서 촛불을 밝히고 모여 앉았다. 윤자임이 나가서 묻기를 “재상이 입궐하는데 승정원(承政院)에 알리지 않았으니 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였다. 그러나 좌우가 서로 쳐다만 볼 뿐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장곤이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말을 하려 하다가 감히 말을 꺼내지 않는다. 조금 있다가 내시 신순강(申順剛)이 나와서 성운을 부른다. 성운이 곧 칼을 차고 급히 들어간다. 안정이 붓을 잡고 합문까지 쫓아 들어오니, 순강이 문지기를 시켜 잡인(雜人)을 금하게 하였다. 안정이 성운의 띠를 붙들고 들어가려 하자 문지기가 안정의 손을 잡아 제치며 여럿이 붙들어 내어 밀친다. 이에 심정이 빨리 걸어 나와 안정의 손을 잡고, “상감이 지금 매우 노하여 계시니 들어가지 말라.” 한다. 조금 있다가 성운이 나와서 소매 속으로부터 작은 쪽지를 꺼내어 이장곤에게 주면서, “이 사람들을 급히 하옥(下獄)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승지ㆍ주서ㆍ검열 및 응교 기준(奇遵)ㆍ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을 하옥시키니 누수(漏水) 북[鼓]이 두 번 울었다. 이에 먼저 기미를 알고 명단에 이름을 서명했던 여러 재상들이 모두 대궐로 들어가 드디어 합문에 모인 재상들과 더불어 입대(入對)하여 두렵고 놀랄 만한 일이라고 크게 들먹이며, 임금에게 권하기를, 빨리 선전관과 금부 도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참찬 이자(李耔)ㆍ형조 판서 김정(金淨)ㆍ대사헌 조광조(趙光祖)ㆍ대사성 김식(金湜)ㆍ부제학 김구(金絿)ㆍ도승지 유인숙(柳仁淑)ㆍ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ㆍ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ㆍ동부승지 박훈(朴薰) 등을 궐문에 잡아다가 죽이라고 하였다. 장곤이 이때 비로소 그날 밤에 때려 죽이자는 의논임을 알고 극진히 간하기를, “수상에게 숨기고 도적의 꾀를 행할 수는 없으니 수상을 불러다가 죄를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경주가 급히 처단하기를 청하고자 약간 기동하려는 형세를 보이니 장곤은 손을 내두르며 말리기를, “공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오.” 하고,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니 경주가 자기 꾀대로 못하고, 임금의 노여움도 조금 풀어졌다. 그래서 영의정 김광필을 부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정원(政院)에서는 이조에 숙직하는 낭관들을 경연청으로 불러들여 대간ㆍ홍문관ㆍ승지ㆍ주서ㆍ한림이 모두 갈렸으니 승전(承傳)을 받으라고 재촉하였다. 그때 좌랑 구수복(具壽福)이 이유를 알지 못하여 정원 관리에게 물으니 정원 관리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남곤ㆍ이장곤에게 말하기를, “대간ㆍ시종과 사필(史筆)을 잡은 사람들을 모두 바꾼다면 조정에 이목이 없으니 밤중의 이런 일이 또한 민멸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차마 여기에 이름을 쓸 수 있는가. 자세히 이유를 물어본 뒤에 이름을 쓰겠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영의정이 명령을 받고 급히 대궐 뜰에 들어오니, 수복이 나가 묻기를, “정원에서 패초(牌招 왕명으로 승지가 신하를 부르는 일)하여 대간ㆍ시종이 모두 갈렸으니 빨리 승전을 받으라고 재촉하였고, 또 듣자니, 이자ㆍ김정ㆍ조광조ㆍ김구ㆍ김식ㆍ유인숙ㆍ박훈ㆍ박세희를 모두 잡아오라고 명령하고 번드는 승지 윤자임ㆍ공서린ㆍ주서 안정ㆍ한림 이구ㆍ응교 기준ㆍ수찬 심달원은 이미 금부(禁府)에 하옥되었다는데, 화를 일으킨 연유를 알지 못하므로 감히 승전(承傳)에 서명할 수가 없습니다. 뜻밖에 이런 변을 만나니 할 바를 알지 못하겠소이다.” 하였다. 이에 영상이 대답하기를, “사세를 보아서 처리하겠다.” 하고 경연청으로 들어갔다. 이때 승지가 이조 좌랑이 전지(傳旨)를 받지 않으므로 들어가 임금께 아뢰어 치죄하려 하자 영상이 말리면서, “지금 상감의 노여움이 극에 달했는데 지금 만일 아뢴다면 나이 젊은 낭관이 반드시 큰 죄를 지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홍경주ㆍ김전과 급히 입대하여 하교를 듣는데, 광필이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기를, “나이 젊은 유생들이 시기의 적당함을 알지 못하고, 옛일을 본따서 이제 실시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조금만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대신과 함께 의논하게 하소서.” 하며, 눈물이 두 볼로 흘러내려 옷소매가 모두 젖으니 임금이 갑자기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간다. 광필이 빨리 나가 임금의 옷자락을 붙들고 머리를 조아리니, “이자(李耔)의 무리를 옥에 가두고 우의정 안당(安瑭)을 부르라.” 명령하였다. 이때 수상이 빈청(賓廳)에 나오자마자 다시 아뢰기를,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모두 죄를 줄 수 있습니까. 승지는 본래 본심이 아니고 바른 의론을 좇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이자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어서 국가에서 앞으로 반드시 크게 쓸 사람이니 파직만 시키는 것이 온당할 것 같고, 광조의 무리는 무슨 털끝만한 사의(私意)가 있겠습니까. 한갓 예전 사람의 글만 보고 지극한 정치를 본받으려 하였고, 그 사이에 혹시 과격한 일이 있었더라도 중하게 다스릴 것은 못 됩니다. 방금 성군(聖君)이 들어선 시대에 불행히 선비를 죽였다는 소문이 나면 반드시 사책(史冊)을 더럽힐 것이니, 부디 금부로 하여금 추문(推問)하여 죄 있는 자는 죄를 주고 죄 없는 자는 벌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김전ㆍ남곤ㆍ심정이 머리를 나란히 모으고 의론하여 죄목과 전지(傳旨)를 썼다. 이때에 지평 이희민(李希閔)은 기별을 듣고 달려 서문(西門)에 이르니 지평 이연경(李延慶)ㆍ홍문 정자(弘文正字) 권장(權檣)이 먼저 이르러 함께 보루문(報漏門) 앞에 이르니, 판서 김정(金淨)을 벌써 잡아왔다. 이조 좌랑 구수복이 마침 월화문(月華門)으로 나왔다가 함께 그 옆에 앉아 서로 이야기하고 얼굴빛을 잃었다. 두 지평이 드디어 월화문 안으로 들어가니 부장(部將)이 막고 들여보내지 않는다. 김근사가 또 잡인을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지평이 이미 갈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아뢰고자 하는가.” 하였다. 희민이 분이 나서 탄식하며 연경과 함께 곧장 경연청으로 들어가서 영상을 보고 말하기를, “오늘 밤의 일은 너무 남몰래 한 일입니다. 저희들의 직책이 비록 갈렸으나 오래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으니 이런 큰 변을 보고 감히 모르는 체하고 앉아서 보기만 할 수는 없소이다. 또 좌우에 사필(史筆)을 잡는 자가 없으면 국가의 큰일이 민멸되어 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민망스럽소이다.” 하였다. 영상이 이 말에, “그대들은 잠시 물러가라 상감의 노여움이 매우 심하여 광조 등을 죄주려 하는 것이지 우리들이 어찌 선비를 죽이려고 하겠는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구제하도록 주선하겠다.” 하고 봉교(奉敎) 조구령(趙九齡)ㆍ채세영(蔡世英)ㆍ권예(權輗)로 하여금 전과 같이 사건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희민과 연경이 드디어 물러나오니 밤이 이미 오경이나 되었다. 그들은 연추문(延秋門) 밖에 나와서 우상 안당(安瑭)을 만났다. 연경이 앞으로 나가서 말하기를, “나라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오직 대감을 바랄 뿐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봉교 채세영이 본관(本館)으로 나가니, “모두 파직되었다.” 하였다. 그리하여 갈 바를 모르고 머뭇거릴 즈음에 영상의 사기(史記)를 편수하라는 지시에 따라 앞으로 나가 여러 재상들에게 묻기를, “어떻게 국사를 써야 마땅할까요, 그 시초부터 들려 주시오.” 하였다. 그러나 좌우가 서로 쳐다볼 뿐 감히 말을 못하였다. 그래서 나가서 영상에게 물으니, “다만 본 대로 쓸 뿐이다.” 하므로 “그리하겠다.” 하고 물러났다. 우상과 영상은 힘을 다하여 신구(伸救)하는 한편 조정에 모여 함께 의론하자고 아뢰기도 하고 또 여러 번 되풀이하여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새벽에 먼저 유인숙ㆍ공서린ㆍ홍언필이 석방되고 다음에 안정ㆍ심달원ㆍ이구가 석방되었으며 최후로 이자가 석방되었으나 파직되었다. 이때에 성균관 유생들은 대궐 뜰로 몰려들어 호곡(號哭)하며 각 동네 향약(鄕約)의 무리들도 차자를 올리고 대궐을 지키므로 도리어 그 떠도는 말을 사실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 방면되지 못한 자가 여덟 사람이나 되었다. 그 중에 윤자임ㆍ박훈은 대신들이 모두 사면해 주기를 청한 자들이었으나 오히려 방면되지 않았다. 그때 신순강이 임금께 참소하기를, “성운이 명령을 받고 합문으로 들어오는데 윤자임이 안정을 시켜 끌어내었고, 말이 또한 공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더욱 노하여, “자임은 무예가 있으니 더욱 두렵다.”하고 먼저 위졸을 시켜 대궐 뜰에서 포위하게 하였다. 이날 남곤을 불러 정사를 맡으라고 하였으나 그는 병을 핑계삼아 명령을 보류하게 했다. 당시에 화를 만든 것은 실상 남곤이 주동이 되었던 것인데, 환심은 자기가 사고 스스로 물러나 앉아서 두 번이나 불러도 느긋하게 버티고 움직이지 않으니, 그 계교가 교묘하고 간사하다. 어찌 주모자의 간사한 꾀를 면할 수 있으랴. 이에 영상과 우상에게 명하여 정사에 참여하여 주의(注擬)하게 하였다. 대사헌에 유운(柳雲), 대사간에 윤희인(尹希仁)은 특지(特旨)에 의한 것이요, 홍문관ㆍ예문관(藝文館)은 바꿀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유임하게 하였다. 새 대사헌 유운은 한 번 상주하여 사직하고 집의(執義) 윤세림(尹世霖)ㆍ장령 이겸(李謙)ㆍ지평 조광좌(趙廣佐)ㆍ임추(任樞)ㆍ신변(申抃) 등과 급박하게 화를 구원하느라 미처 숙배도 못하고 합문에 엎드려 극진히 간하기를, “만약 공정한 일이라면 광명 정대하게 처리하십시오. 대개 사람을 처형하면 여러 사람을 함께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 등이 듣건대, 이 일은 궤휼하고 간사한 자가 몰래 알린 것입니다. 대체로 몰래 알린다는 것은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망하게 하는 조짐입니다. 전날 이줄(李茁)이 밀고하자 대간이 그 점점 더해갈 것을 극진히 말하였음을 임금께서도 이미 환하게 아실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 있는 공경이 모두 어질고 착하므로 진실로 몸을 바치어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는 터인데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신 등이 직책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의리로 보아서도 직무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비옵건대 신 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 간사한 사람 마음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소서.” 하였다. 새 대사간 윤희인 등은 사은한 뒤에 다른 동료 사간 오결(吳潔)ㆍ헌납(獻納) 이충건(李忠健)ㆍ정언 윤개(尹漑)ㆍ유형(兪炯) 등과 함께 논계(論啓)하기를 마지않았다. 그리고 전 승지 유인숙ㆍ공서린ㆍ홍언필은 보통 옷으로 대궐로 나가고, 전 대간 이성동(李成童) 등이 또한 대궐에 나가 광조와 더불어 옥에 나가 같이 죄를 받기를 청하면서 해가 지도록 아뢰면서 강청하였다. 또 전한(典翰) 정응(鄭譍)도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렸는데 말뜻이 간절 측은하였고, 파릉군(巴陵君) 경(璥)도 빈청(賓廳)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고, 또 병조 판서 희강(希剛)의 자(字)를 부르면서, “여우와 쥐 속에서 꼬리를 흔들며 함께 선량한 사람을 해친다.” 하며 못 할 말 없이 맹렬히 꾸짖었다. 한편 김전ㆍ성운 및 양사(兩司) 판의금(判義禁) 이장곤ㆍ지의금(知義禁) 홍숙을 보내어 함께 추문(推問)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구ㆍ김식을 국문하기를, “권세와 요직을 두루 차지하며 후진을 달래어 끌어들이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며 자기에게 붙는 자는 끌어올리어 서로서로 패를 지어 속이고 논격함으로써 풍습을 이루어 조정 정사를 날로 그르치고 국사를 뒤엎어 놓았다.” 하였다. 그리고 박세희ㆍ윤자임ㆍ박훈ㆍ기준을 추문함에는, “서로서로 패를 지어 속이고 논격함으로써 풍습을 이루어 조정 정사를 날마다 그르게 만들어 국사를 뒤엎어 놓았다.” 하였다. 그러나 모두 항복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은 드디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대체로 대궐문이 아홉 겹이나 되니 우러러 진달할 길이 없도다. 한번 친히 묻는 것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다.” 하므로, 곧 명하여 추문하고 법률에 따라 하였는데, “광조 등 네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하고 세희 등은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어 종이 되게 한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광조ㆍ김정은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라.” 명하고, 도승지 김근사를 시켜 받아 쓰도록 하였다. 그러자 근사는 임금의 앞에서 사관이 가지고 있는 붓을 빼앗아 뽐내며 이를 쓰는데 조금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봉교(奉敎) 채세영은 옆에 있다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나가 아뢰기를, “비록 죄가 있는 사람이라도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한 연후에 죽이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죄목이 모두 죽을 죄가 아닙니다. 죽을 죄가 아닌데 잘못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나라의 중한 일을 대신들과 더불어 가부를 의논하지 않고 독단으로 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근사에게 대들며 항언하기를, “이것은 사필(史筆)이니 다른 사람이 잡을 수 없는 것이오.” 하고, 도로 빼앗았다. 그때 그의 말이 심히 정직하므로 좌우가 모두 숙연하였다. 판결이 내려지자 대신들이 급히 면대하기를 청하고 말이 심히 간절 측은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 광조 등 네 사람은 곤장을 때려 유배시켜 안치하고, 박세희 등 네 사람은 곤장을 감하여 부처(付處)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영상이 많은 관원들을 거느리고 다시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만일 곤장을 맞으면 반드시 다시 살 희망이 없사오니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7번이나 아뢰고 이경(二更)에야 물러나왔다. 이때 광조 등의 죄를 결정하자 도성 사람들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고 보는 사람들은 얼굴빛을 잃고 통곡하였다. 드디어 광조는 능성(綾城)으로, 김정은 금산(錦山)으로, 김구는 개녕(開寧)으로, 김식은 선산(善山)으로, 박세희는 상주(尙州)로, 박훈은 성주(星州)로, 윤자임은 온양(溫陽)으로, 기준은 아산(牙山)으로 나누어 귀양보냈다. 그 이튿날인 17일에, 나누어 귀양보낸 8사람을 도로 금부에 모이라고 명령하고, 승지 성운을 보내어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는 신하로서 상하가 같은 마음으로 지극한 정치를 나타내기를 기약하였으니,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 너희들이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 데 지극히 과오가 많아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부득이 죄를 주는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인들 또한 어찌 편안하며 죄주기를 청한 재상도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으랴. 너희들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모두 내가 밝지 못하여 그 기미를 먼저 막지 못한 때문이다. 만일 법대로 죄를 준다면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나 너희들이 사심이 없이 나라 일을 하였기 때문에 감하여 가벼운 것을 좇아서 죄주는 것이다. 너희들은 오래 경연[經幄]에 있어서 보통 관원이 아니므로 특별히 너그러운 법을 쓰는 것이니, 너희들은 알고 가라.” 하였다. 그 이튿날인 18일에, 홍경주ㆍ남곤ㆍ김전을 불러 모두 입시케 하였다. 그때 홍경주는 말하기를, “요즘 인심이 모두 두려워하는 눈치인데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제 공을 어전에서 말하는데, “신이 하루 전에 김전의 집에 가서 사림(士林)의 일을 이야기하다가 김전의 말에, ‘나이 젊은 것들이 대신의 반열에 붙어 있으면서 늙은 신하들의 조그마한 허물만 보아도 입이 닳도록 배척하므로 조정 정사가 글러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니, 내가 아침에 이 뜻을 아뢰다가 저녁에 죄를 당하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안하겠다.’ 하므로, 신이 이미 상감의 뜻을 짐작하므로 모두 말해 주었습니다. 또 남곤을 만났을 때 시국 일에 이야기가 미치자, 곤은, ‘요즘 젊은 아이들이 상감의 융숭한 권애를 믿고 시국 정사를 극단으로 논하여 늙은 신하는 전혀 용서하지 않아 조정 정사를 날마다 글러지게 하니, 후세에 비록 소인으로서 군자를 죽였다는 이름은 면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이 뜻을 아뢰려고 조복(朝服)을 입기까지 하였다가 그만두었다.’ 하므로, 신이 이미 상감의 뜻을 짐작하는 까닭에 숨김없이 말해 주었습니다. 곤이 또 말하기를, ‘이 일을 아뢰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광필에게 물어 보고 조처해야 한다.’ 하므로 그날로 곤은 광필의 집으로 찾아가 사림의 얘기를 끄집어 내니 광필이 굳이 말리며, ‘사림의 화를 일으키려 하는가. 나는 어리석고 미혹하여 계교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하므로 곤이 두 말도 하지 않고 물러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이튿날 또 남곤을 만나서 말하기를 ‘영상이 굳이 말리니 우리들이 마땅히 스스로 하여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5일 어둑 무렵에 신 등이 북문으로 들어가서 비밀히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먼저 경주(景舟) 등은 근거도 없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가짜로 참문(讖文)을 만들어서 임금께 올리어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후에 당류(黨類)가 이미 이루어지자, ‘정국 공신(靖國功臣)을 삭제하자고 청한 것은 마음대로 연산군을 폐한 죄를 주상에게까지 미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여 공포를 느끼게 하니 임금은 일찍이 유언비어와 참문에 미혹된지라 북을 내던지는 거동이 없지 않았다. 또 겁을 주기 위하여, ‘무부(武夫)들이 무리를 모아 선비들을 쳐 없애려고 하는데 자고로 사림의 화가 일어나면 종사가 편안히 보존되던 때가 없었으니, 먼저 광조 등을 죄주어 경동하는 인심을 가라앉히느니만 못합니다.’ 하였으므로 왕은 재빨리 사건을 유발시켜 정귀아(鄭歸雅)의 사건이 비로소 발각되었다. 그러나 임금은, “광조의 복이다.” 하였으니 그 현혹된 것이 이렇게 심하였다. 경주가 스스로 공로를 말한 것은 보답받기를 바람이었는데 그 작록을 보답받기 전에 먼저 죽었다. 또 유운이 광조들에게 감정을 품었다 하여 대사헌을 제수하였는데, 도리어 광조를 신구(伸救)하고 또 그는 윤희인이 밀계에 이름을 쓴 것에 대하여 침을 뱉었으므로 본래 물망이 없다고 탄핵받아 이빈(李蘋)으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빈은 또 유운이 숙배를 하지 않아서 조정에서 체모를 잃었다고 탄핵하여 체임시키고 이항(李沆)으로 대신하였다. 이빈은 남곤ㆍ심정의 매와 사냥개[鷹犬] 노릇을 하며 대간에 출입하여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을 제거했으나 겨우 두어 해의 영광과 총애를 누렸다. 이항이 부름을 받고 올라올 때에 함양(咸陽) 군수 문계창(文繼昌)이 시를 지어 주며 송별하였는데 시는 상권에 보인다 항이 조정에 돌아온 지 수일 만에 다시 광조의 무리를 의논하여 죄를 더하고, 또 35명이 당을 만들었다고 탄핵하여 모두 귀양을 보내자고 청하였다. 임금이 근정전에서 정부와 대간에게 고루 물으니, 정(鄭) 영의정이 극력 신구하였다. 그러므로 대간에게 전교하기를, “이 사람들에게 모두 죄를 준다면 인심이 퍽 두려워할 것이다. 만일 그 괴수 되는 자의 죄만 다스린다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나아가는 길이 바르게 되고 인심이 정하여질 것이다. 또 소인이 조정에 가득하여 크게 종사에 관계하는데, 대신은 이웃집 일 보듯 두리번거리고만 있으니 어찌 대신의 체모인가. 시종하는 신하들도 또한 두 생각을 가지고 후일의 계교를 꾸미는 자가 있으니 나는 이 사람들도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무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면 뿌리가 마르면 가지와 잎이 저절로 시들고, 도적을 다스리는 데 비유하면 먼저 그 괴수를 다스리면 따라다니는 자들은 다스리지 않아도 된다. 삼정승들이 가만히 앉아서 조정일을 바라보기만 하고 시비를 정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직책을 잃은 것이다.” 하고, 영의정 정광필을 좌천시켜 중추원 영사(中樞院領事)로 삼고, 우의정 김전을 영의정으로 삼고, 찬성 남곤을 좌의정, 참찬 이유청(李惟淸)을 우의정으로 삼아 면대하여 경중을 의논하여 등수를 나누어 죄를 정하는데, 조광조는 사사(賜死)하고 김정ㆍ김구ㆍ김식은 절도(絶島)에 귀양보내고 박세희ㆍ윤자임ㆍ기준ㆍ박훈은 지극히 먼 변경에 귀양보내고 유용근(柳庸謹)ㆍ정응(鄭譍)ㆍ최산두(崔山斗)ㆍ정항(鄭沆)은 외방에 귀양보내고, 최숙생(崔淑生)ㆍ이자(李耔)ㆍ이희민(李希閔)ㆍ양팽손(梁彭孫)ㆍ이약빙(李若氷)ㆍ송호지(宋好智)ㆍ송호례(宋好禮)ㆍ이연경(李延慶)ㆍ이충건(李忠健)ㆍ윤광령(尹光齡)ㆍ조광좌(趙光佐)ㆍ이청(李淸)ㆍ시 산정(詩山正) 정숙(正叔)ㆍ강녕 부정(江寧副正) 기(祺)ㆍ숭선 정(嵩善正)총(灇)ㆍ장성 수(長城守) 엄(儼)은 관직을 삭탈하고, 안당ㆍ유운ㆍ김안국ㆍ김정국은 파직하고 위 유용근 이하 20명은 3공과 대간이 3등을 나누어 표를 붙이어 정죄한 것 또 한충(韓忠)은 절도에 귀양보내고, 파릉군 경(璥)과 안찬(安瓚)은 원방에 귀양보내고 위 세 사람은 각각 논계한 자이다. 이장곤ㆍ권벌(權橃)ㆍ윤구(尹衢)ㆍ이구(李構)ㆍ김세필(金世弼)도 추가 의논하여 국문한 뒤에 파직시켰다. 화가 일어나던 날 각 방리(坊里)의 소두가 되었던 사람 충찬위(忠贊衛) 정의손(鄭義孫)ㆍ박자일(朴自逸)ㆍ안숭복(安崇福)ㆍ전의전함(典醫前銜) 이성(李誠)ㆍ왜학훈도(倭學訓導) 정철현(鄭哲賢)ㆍ이세손(李世孫)ㆍ악생(樂生)송기(宋冀)ㆍ서리(書吏) 최인석(崔仁碩)ㆍ이중진(李仲進)은 모두 곤장을 때리고, 왕자제군(王子諸君)의 청구노(請求奴) 학년(鶴年)은 곤장 백 개를 때리고 귀양가는 것을 면하게 하였다. 천과(薦科)를 혁파하여 성수종(成守琮)의 급제(及第)를 삭제하고 신광한(申光漢)ㆍ정순붕(鄭順朋)ㆍ유인숙(柳仁淑)ㆍ이성동(李成童)ㆍ구수복(具壽福)ㆍ권장(權檣)ㆍ김광복은 또한 바깥 관원이나 한산한 직책을 제수하였다가 조금 뒤에 모두 파면하였다. 무릇 당인이 천거하여 뽑아서 벼슬을 시킨 사람과 보증하고 천거하여 수령이 된 사람은 함께 연루되니, 조정이 비다시피 되었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좌천되고 귀양간 사람이 각 고을에서 서로 바라볼 정도였다. 그런데도 형조 판서 심정은 옥이 비었다고 임금을 속여 상을 받았다. 이때문에 아첨하고 간사한 짓이 풍습을 이루어 아부하여 상을 바라는 자가 서로 줄을 이었다. 경진년에 이신(李信)은, “김대성이 대신을 해치기를 꾀한다.” 하니, 당시의 재상이란 자들이 자기에게 저촉된 데 노하여 용납하여 숨겨준 자는 변방으로 보내고, 제자들은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고, 죄수의 친족으로서 문안한 자 남봉년(南鳳年)ㆍ여해(呂海) 같은 사람도 또한 심문하고 곤장을 가하였으며, 김대성과 함께 유숙한 하정(河珽)은 곤장을 계속 4백여 대를 맞고 거짓 공술을 하였다. 배소를 멋대로 떠난 김정과 기준은 추가 논죄하여 도주하여 피신한 것으로 지목하고 모두 가시 울타리 속에 가두었다. 신사년 9월에, 안처겸(安處謙)ㆍ문근(文瑾)ㆍ유운ㆍ유인숙ㆍ정순붕(鄭順朋)ㆍ신광한ㆍ이성동ㆍ박영(朴英)을 추가 논죄하여 각각 죄목을 만들어 삭탈하였다. 그 해 겨울에 이르러 송사련(宋祀連)이 고변(告變)하자 대신을 해치려고 꾀하였다는 것을 모두 이미 자복하였는데, 남곤ㆍ심정이 중한 죄에 빠뜨리려고 하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므로 형방승지(刑房承旨) 조옥곤(趙玉崑)이 그 사주(使嗾)를 받아서 사실 아닌 것으로 끝까지 문초하였다. 시산정(詩山正) 정숙(正叔)은 도망하여 숨었다가 4일 만에 자수하였다. 그때 옥곤은 홀로 대궐 뜰 위에 서서 크게 말하기를, “죄수 놈들이 이미 모두 항복하였으니 너는 도마 위 고기와 같다. 물을 것도 없으니 다만 속히 사실대로 토설하라.” 하였다. 정숙이 오래 굶어 정신이 혼미한데다가 엄하게 곤장 두어 개를 맞자 심신(心神)이 떨리고 겁에 질려 중얼중얼 헛소리를 하였다. 곤장을 잡은 자가 살살 꾀어 말을 시키고 이를 굳혀 옥안(獄案)을 만들고, 고의로 큰 죄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고문을 당하여 죽게 된 사람들은 또 모두 법에 의하여 처치하였었다. 송사련이 불러 댄 명록(名錄)에 든 사람은 모두 곤장과 유배를 당하고 양민과 천인은 모두 먼 변방으로 옮기었다. 김정과 기준을 추가 논죄하여 망명(亡命)의 율(律)을 적용하여 적소에서 사사(賜死)하였다. 남곤이 제 손으로 소장(疏章)을 지어 당인(黨人)의 행위를 일일이 들어 반역을 옹호한 죄를 교묘하게 꾸미어 되도록 엄한 형벌과 중한 법을 준용(遵用)하는 뜻으로 대간을 사주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 대강에 말하기를, “지난번에 국운이 불행하여 사림의 틈을 만들었다. 박상ㆍ김정은 본래 음흉하고 간사한 바탕으로 과격한 의논을 주장하였으므로, 이때를 당하여 시비가 끝이 없었고 의논이 물 끓듯 하여 몇 달이 지나고 오랜 기간이 흘렀다. 안당(安瑭)이 뒤를 이어 아무 공로도 없는 소인으로서 전형(銓衡)을 맡아서 사람을 등용하고 물리침에 있어서 조정에서 의논하지도 않고 사사로이 집에서 의논하였다. 조광조ㆍ김식ㆍ박훈은 모두처겸(處謙)과 친한 친구이므로, 그 아비에게 말하여 처음으로 6품 벼슬을 제수하여 조종(祖宗)의 사람 쓰는 법을 허물어뜨리고 그 권세가 이미 이루어져서, 안당이 정승이 되자 많은 소인들이 뜻을 얻어 서로 칭송하고 찬양하게 되어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유운ㆍ김안국ㆍ이자ㆍ최숙생ㆍ김구ㆍ한충ㆍ유인숙ㆍ박세희ㆍ김정국ㆍ신광한ㆍ기준ㆍ정응ㆍ이약빙ㆍ최신두ㆍ이충건ㆍ이희민ㆍ양팽손ㆍ정완(鄭浣)ㆍ이청(李淸)이 요직에 임명되고, 대간 시종에 드나들며 중요한 기무(機務)를 잡고 붕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행동은 더러우면서 다스리는 체하고 사사로운 일을 공무라 가탁하여 날마다 붕당 만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만일 자기와 다른 자는 비록 공경 대신이라도 반드시 그 과실을 얽어서 배척하고, 자기에게 붙는 자는 혹은 학행이 있느니 혹은 이학(理學)을 아느니, 혹은 향방(向方)을 아느니 하여 두둔하므로 이 뒤로부터는 자기에 붙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이것뿐 아니라 이약빙ㆍ기준은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노골적으로 말하기를, ‘광조는 이조 판서에 합당하고 이자는 병조 판서에 합당하고, 문근은 형조 판서에 합당하다.’ 하였다. 심지어 안찬은 서얼인데도 또한 형조 정랑이 될 수 있다 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었다. 편전(便殿)에 입시하여 광조는 말하기를, ‘문근은 옛사람의 순박하고 곧은 풍조가 있다.’ 하고, 문근은, ‘광조는 정주학을 연원으로 한 학문이 있는데 이 따위 일들은 이루 다 말할 필요도 없고 성명(聖明)께서도 통찰하신 것이다.’ 하였다. 또, 간당들의 일이 실패 하던 날, 그들의 죄를 드러내어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곧 정법(正法)대로 하지 못한 실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아주 간특한 자는 제거되었으나 그 뿌리가 아직도 남아 있어 근거를 잃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무리들이 여러 날을 대궐에 엎드려 모두 죄가 없다고 말하고, 혹은 이 사람들은 충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여, 아래로 유생에 이르기까지 궐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와서 머리를 풀어뜨리고 통곡하였으니, 광조의 무리가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미혹함이 이렇게까지 심한 것을 볼 수 있다. 아주 흉한 자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속으로 붙어 몰래 자라 오랜 뒤에 나타나서, 지금 광조의 여당인 정숙ㆍ안처겸이 정세가 불리하게 되어 모두 사형을 받았으므로, 임금은 반성하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비록 한 가지 재앙이 닥쳐옴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다시 두려운 생각을 더하여 경계하고 조심하여야 하겠거든, 하물며 이 흉역의 변괴에 있어서는 정히 전하께서 반성하여 스스로 책망하고 근본을 단정히 하고 시초를 고칠 날이다.” 하였다. 대개 남곤ㆍ심정의 무리가 반역이라고 얽어 씌워 모함하는 짓을 자행하여 온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당인들을 의논하여 신구(伸救)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계교를 꾸민 것이 극히 간사하고 교묘하였다. 아, 조광조 일당의 일을 일부러 비뚤게 들추어 내고, 그들의 말을 거짓말로 지적하여 죄과 속으로 끌어넣되 남의 눈에 비단으로 보이듯이 찬란하게 하고 남의 귀에 생황 소리로 들리듯이 교묘히 꾸며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떤 벼슬에 합당하고, 어떤 사람의 재주는 어떤 임무에 알맞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통속적으로 하는 말이요, 서로 칭찬하는 말은 아니다. 문근의 순직한 것과 조정암의 이학(理學)은 나라 사람들이 함께 칭송한 것이니, 임금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함이요, 본래 헛명예로 서로 칭송한 것은 아니다. 형조 좌랑 조광좌(趙光佐)가 옥사의 의심스러움을 조정암에게 물었다. 그때에 유명한 선비들이 자리에 가득한데 안찬이 뒤에 도착하므로 그 의심나는 것을 그에게 물은 일이 있었는데, 안찬의 분석하는 것이 명류들의 결단한 것과 같았다. 정암은 말하기를, “만일 안찬으로 하여금 형조에 앉게 한다면 지연될 옥사가 없겠다.” 하였으니, 대개 안찬의 재주를 아깝게 여기고, 조광좌의 결단 못 하는 것을 기롱한 것이었다. 어찌 서얼로서 낭관을 시키고자 한 것이랴. 기타 곧은 것을 뒤집어 나쁜 것으로 만들고, 글을 부연하여 헐뜯기를 구한 것이 모두 이런 종류다. 어진 선비를 발탁하여 자격을 따르지 않으면 자기를 위해서라고 헐뜯고, 공천을 써서 특별히 별과(別科)를 설치하면 당파를 만든다고 지목하며,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배척하면 자기와 다른 사람은 배척한다 하고, 행실이 착한 사람을 추천하면 떠밀어 주고, 칭찬하고 아부하고 결탁한다고 하여, 임금을 시비에 현혹시키고 신하가 감히 의논을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권세를 오로지 마음대로 하여 기염(氣焰)이 하늘을 흔들어 못하는 짓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참혹한 화를 두려워하여 당인으로 화의 장본을 삼아, 친척간에도 서로 통문을 하지 않고 보기만 하면 자기를 더럽힐 것같이 하고 길에서도 피하였다. 참으로 하늘의 도는 순환하기를 좋아하여 제게서 나온 것은 제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개 남을 해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여 스스로 총애와 녹을 굳힌 자는 멀어야 10년을 지나지 못하고 혹은 제 명에 죽지 못하니, 눈앞의 한때의 영광과 총애를 얻기 위해 더러운 냄새를 만세에 남기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홍경주 찬성(贊成) ㆍ김전 영상(領相) ㆍ이빈 참판(參判) ㆍ성운 경상감사(慶尙監司) ㆍ채침(蔡忱) 대사헌(大司憲) ㆍ조침(趙琛) 참판 은 4ㆍ5년 동안에 서로 이어 사망하고, 병술년에 남곤 영상 이 죽고, 이항 사성(司成) 은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고, 심정 좌상 도 귀양갔다가 신묘년(1531)에 함께 죄를 입어 죽었다. 이행(李荇)도 유배되어 있는 곳에서 시체로 묻혔으니 이것은 모두 김안로가 개인적인 원망을 갚은 것이요, 그 죄를 바로 잡은 것은 아니다. 이보다 먼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바로 인종(仁宗)의 맏누이다. 연성위(延城尉)에 봉해지고 안로는 갑자기 경상(卿相)에 승진되었다. 갑신년(1524)에 이조 판서로서 권세를 오로지하여 마음대로 하자, 정부와 6조가 모두 그 죄상을 탄핵하여 멀리 내쫓았으니, 심정ㆍ이행ㆍ이항이 그때 의논을 주장한 자이다. 그 뒤에 안로가 공주를 인연하여 풍덕(豐德)으로 이배되었다. 민수천(閔壽千)이 경기 감사로 있는데 가서 안로를 달래기를, “왜 기묘년에 관계했던 사람들을 조정(調停)하는 뜻으로 두 심씨와 서로 결탁하지 않는가.” 언경(彦慶)ㆍ언광(彦光) 하였다. 대개 두 심씨가 기묘년 사람들을 쓰고자 하였으나 후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안로는 마음속에 넣어 두었다가 민수천의 말대로 그의 처족 채무택(蔡無擇)에게 달려가 고하였다. 그때 정언으로 있었다. 무택은 주창하기를, “동궁(東宮)이 외로우니 심히 근심스러운 일이다. 동궁의 우익(羽翼)과 기묘년 사람들을 조정하는 것은 안로가 한 번 일어나는 데 있다.” 하였다. 대사헌 심언광이 그 조정한다는 말을 믿고 따라 호응하여 붙쫓으니 온 조정이 그편으로 쏠렸으나, 사간 이언적(李彦迪)만은 힘써 말하기를, “그 마음가짐과 처신을 보면 참으로 소인의 정상(情狀)이니, 만일 뜻을 얻게 되면 나라를 반드시 그르칠 것이다.” 하자, 심언광이 조정(朝庭)에서 선언하기를, “언적이 조정에 있으면 안로가 들어올 수 없다.” 하여, 드디어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부제학(副提學) 성세창(成世昌)이 동료를 거느리고 안로를 쓸 수 없다고 논계하며, 심정이 사림을 얽어 빠뜨린 것과 같다고 무함하여 귀양보내니, 온 나라 사람이 감히 말을 못하였다. 안로가 일단 뜻을 얻어 임진ㆍ계사 연간에는 조정에서 당인을 등용할 뜻이 있어, 먼저 귀양가 있는 사람을 사면하는데, 오직 김구와 박훈이 살아 있어서 석방되자, 김안로가 의정 김근사에게 사주하여 이미 내린 공론을 꺾어 없애 버리고 전보다 더 심하게 금고(禁錮)시켰다. 정유년에 이르러, 세 간흉이 죄를 입자 그 때에 윤안인(尹安仁)이 내지(內旨)를 받아 대사헌 양연(梁淵)과 대사간 김희열(金希說)이 김안로ㆍ허항(許沆)ㆍ채무택을 논책하여 사사(賜死)하였다. 태학에서 소장을 올려 기묘의 원통함을 말하니, 온 나라 신민들이 기뻐하며 서로 경사로 여기어, “봉황이 조양(朝陽)에서 우는 것 같다.” 하였다. 당시에 당인으로서 생존하여 등용된 이가 겨우 10여 명이었다. 중종이 말년에 크게 경장하려 하였고,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덕 있는 여러 현인들이 왕의 계획을 보좌하고, 후진 여러 선비들이 성군의 세상을 쫓아 사모하여 무릇 풍습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는 것을 반드시 기묘의 정치를 본받아서 지극한 다스림을 일으키기를 바랐으나, 불행하게도 두 성군이 서로 이어 승하하므로 세상일에는 변천이 많아 정순붕ㆍ기(李芑)가 또 을사년에 화를 일으켰다. 윤원형(尹元衡)이 일찍이 말하기를, “을사 반역인들이 곧 기묘의 남은 싹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론이 이루어지려다가 도로 위축되어 오래도록 떨치지 못하였다. 원형의 무리는 성품이 본래 시기를 좋아하고 혹독하여 자기의 원망이 아니라도 선량한 사람을 미워하여 해쳤으나 실상은 자신이 도리어 간사하고 악한 함정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융경(隆慶) 무진년에 금상(今上)께서 경연에서 찬성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근일에 시종하는 신하들이 모두 남곤이 간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자, 황은 “조광조를 무함하여 해쳐서 기묘사림의 화를 얽은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김계(金啓)가, 남곤이 도깨비 짓을 하여 사림을 일망타진한 일을 죽 들어서 일일이 진달하자, 황이 다시 나와 말하기를, “신은 입이 둔하여 분명히 전달하지 못하였는데 김계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하였다. 즉일로 임금이 정원에 명하여 김계의 말을 써서 아뢰게 하고, 또 옥당ㆍ양사로 하여금 남곤의 죄상을 의논하여 열거하게 하였다.
이에 옥당과 대간이 소장을 번갈아 남곤의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삭탈하여 그 죄를 50년 뒤어 밝히고, 정암에게 높은 관직과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천과(薦科)를 회복하였으니, 기묘의 원통함이 거의 깨끗이 씻어졌다. 그러나 하늘의 그물이 넓어서 홍경주가 오히려 빠졌고, 심정이 또한 죄의 괴수로 후세에 이름짓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림의 유감이 되지 않으랴. 또 지금의 의논하는 자가 위협당하여 복종한 자는 다스리지 말라는 뜻에 따라서 북문(北門)으로 들어간 재상들은 오히려 괴수와 위협당하여 복종한 자를 분간하려 하니, 슬프다, 붙쫓은 무리들이 실은 더 심한 짓을 하였으니, 당초에 고변할 때에 비록 그 간사한 꾀가 이미 궁중에서 용납되었다 하더라도 김전ㆍ고형산ㆍ홍숙ㆍ손주가 없었다면 공사를 칭탁하여 간악한 꾀를 이루어 임금의 총명을 속이고 가리지 못하였을 것이고, 이원(李湲)ㆍ세정(世貞)이 없었다면 선비의 공론이라고 말하여 죄를 더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이빈ㆍ채침ㆍ조침이 아니었다면 패거리를 만들어 세력을 차지하고 사대부들을 해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굽어봄이 심히 밝아서 벌을 내린 것이 더욱 참혹하였다. 혹 비명에 죽거나, 고육계(苦肉計)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나, 동창(東窓)에서 뉘우치고 한하는 것들이니, 간흉한 무리는 원래가 괴수와 추종자를 의논할 것이 아니다. 우리 태종(太宗) 대왕이 권신에게 아부한 손흥종(孫興宗)의 죄를 중한 법으로 처치하려 한 것은 간사한 적신을 베는 아름다운 뜻이니, 실상 만세의 마땅히 법받을 것이다.
주간죄목(誅奸罪目)
경인년(1530) 겨울에 대사헌 김근사(金謹思)와 대사간 권예(權輗) 등이 아뢰기를, “심정이 간사하고 탐욕스럽고 탁(濁)하여 권세를 오로지하고 방자하게 행하여, 김극핍(金克愊)ㆍ이항(李沆)과 사생을 함께 할 친구를 맺어 서로 원조하고 구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극핍과 항엑 배척을 당한 뒤로부터 좌우의 손을 잃은 것같이 되어 분함을 품고 스스로 위태하게 여기어 간사한 꾀와 비밀한 계교를 부리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때 마침 성세창(成世昌)이 홍문관에 들어옴을 보고 스스로 기회를 얻었다 생각하여 몰래 세창을 사주하여 그 계교를 달성하려 하였으나, 남의 눈을 끝까지 속이지 못하여 정상이 실패하여 드러났습니다. 세창은 이미 조옥(詔獄)에 갇히었으니 마땅히 법률에 의하여 바르게 다스리겠지만, 그러나 심정은 죄의 괴수인데 괴수는 놓아 두고 협박을 받아 추종하는 자만 다스린다면 어찌 임금으로서 공정하게 사람을 부린다고 하겠습니까. 대개 임금이 대신을 중하게 여기는 것은 대신의 도리를 하기 때문인데 심정이 후진을 끌어들여 인심을 모으고 시종과 사귀고 간사한 꾀를 부리며 사곡하게 이항을 맞이하여 머물러 자게 하면서 사사로이 의논하고, 박씨(朴氏)의 뇌물을 받고도 박씨의 계집 종을 요구하였으니, 과연 대신의 도리입니까. 국가의 위태하고 망하는 것이 항상 대신의 독재에서 나오는 것인데 임금이 혹 강하게 제재하지 못하여 일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뉘우쳐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성종조 때에 임사홍(任士洪)이 슬며시 지평 김언신(金彦臣)에게 부탁하여 현석규(玄碩圭)를 논박하였는데, 성종께서는 그 간사한 정상을 알고 곧 먼 변방으로 추방하였으나, 다만 법으로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연산군의 위태롭고 망치는 화(禍)를 열어 주게 된 것입니다. 지금 심정은 대신의 자리를 도둑질하여 차지하였으니 사홍과 비교할 바가 아니요, 대간을 일망타진하였으니 석규 한 사람과 비교될 바가 아닙니다. 죄가 사홍보다 큰데 지금 죄를 적용하는 것은 다 오히려 사홍보다 가벼우니, 청컨대 법률에 비추어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12월에, 심정을 강서(江西)로 귀양보내고 세창을 평해(平海)로 정배시켰다. 이때 김안로가 세창이 자기를 배척함을 원망하였는데, 조정에 돌아오자 세창이 심정과 함께 사림을 해쳤다고 얽어 무함하여 쫓아내었다. 심정은 신묘년 12월에, 이항(李沆)과 더불어 동시에 죽음을 당하였고, 세창은 정유년에 김안로가 처형된 뒤에 석방되어 관직을 회복하였다. 심정의 직첩(職牒)을 도로 돌려 달라는 일로 중종ㆍ명종 때에 자손이 여러 번 상소를 하였으나 모두 규탄을 당하고 또 외람하게 소장(訴狀)을 바친 것으로 벌을 받았다. 인종이 즉위한 처음에 이항의 직첩을 도로 주었는데 대간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회수하였다. 만력 무진년 가을 9월 금상(今上)의 비망기(備忘記)에 전교하기를, “지금 경연관 이황(李滉)의 말을 듣건대,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는 것이 의당하다 하니, 대신들은 의논을 취소하고 또 홍문관 양사(兩司)에서는 마땅히 그 죄를 조목조목 들추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대사헌 김귀영(金貴榮)ㆍ대사간 강사상(姜士尙)ㆍ부제학 노수신(盧守愼)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남곤이 간사하고 음흉하여 나라의 명맥을 깎아 손상시킨 죄를 극력 말하였고, 좌의정 권철(權轍)은 아뢰기를, “엎드려 보옵건대, 이황이 아뢰어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자는 일은 그 뜻이 지극히 바릅니다. 기뵤년 이래로 사림의 화가 모두 남곤이 악의 괴수가 됨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몸이 이미 죽고 뼈가 이미 썪었으니, 지금 비록 관직을 빼앗더라도 진실로 족히 그가 사림을 참벌(斬伐)한 분노를 풀 수 없습니다. 이미 광조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남곤이 오히려 관작을 보전한다면 선악이 분별이 없고 시비가 밝지 못한 것입니다. 곤이 심정과 서로 좋아하여 함께 탐하고 간사학 행실이 없는 사람으로서 맑은 사류(士類)들에게 용납되지 못하게 되자, 그 고기를 씹고자 하여 낮과 밤으로 주둥이를 놀려서 홍경주와 체결하여 벌레 먹은 잎사귀의 참서(讖書)를 만들어 비밀히 임금께 주달(奏達)하여 임금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밤을 타서 신무문(神武門)을 열고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여 처음에는 광조의 무리를 잡아들여 대궐 뜰에서 때려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영상 정광필을 불러 영상이 임금의 앞에 이르자 영상은 만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구제하고 해명하니, 남곤이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였습니다. 전날 저녁에 남곤이 흰옷을 입고 초립(草笠)을 쓰고 거짓 남 생원이라고 일컫고 광필에게 가서 명함을 드리니, 광필이 남곤의 거짓인 것을 알고 놀라 일어나 나가 보니 밀지가 있다고 말하므로 광필이 엄한 말로 거절하였습니다. 남곤이 그때에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천한 사람의 옷으로 밤을 타서 정승의 집에 이르렀으니 그 귀역(鬼蜮)의 형상이 심합니다. 남곤이 임금과 윗사람을 속이고 간사한 꾀를 부리어 사림을 쳐서 해치고 국가 명맥을 깎아 손상시킨 것이 옛날 소인이라도 그보다는 더할 자가 없으니 관작을 추탈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우의정 홍섬(洪暹)도 아뢰기를, “남곤이 선량한 사람을 시기 질투하고 사림을 일망타진하였는데 그 몸은 비록 죽었으나 아직도 관작을 보전하고 있으니, 세월이 50년이 지났어도 민심은 오히려 격노하고 있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함을 분명히 나타내어 대중의 노여움을 위로하고 보답하소서.” 하였다.
전교하기를, “남곤의 일은 다만 옥당의 차자(箚子)뿐 아니라 근일의 경연에서도 또한 여러 번 말하므로 물어 보았다. 그래서 지금 조정의 의논을 보니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양사ㆍ옥당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남곤의 죄를 늘어놓으며 주장이 또한 모두 같았다. 이는 곧 꾀함이 없이 한결같은 것이라 하겠다. 조정 의논이 이와 같으니 좇지 않을 수 없다. 남곤의 관작을 모두 삭탈하여 사림의 분을 풀게 하고, 이 일을 양사와 옥당에 일러라. 남곤의 관작을 빼앗고자 하는 것은 광조의 도학을 추앙(追仰)하고 한때의 추향(趨向)을 허여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주-D001] 북을……거동 :
예전에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 : 증자라고 한다)은 지극한 효도로 유명하고 또 지극히 착한 선비였다. 그러나 그 증삼이 밖에 나간 동안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어머니를 보고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증삼의 어머니는 마침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서 “내 아들은 사람을 죽일 사람이 아니다.” 하고 태연하게 베를 짰다. 조금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와서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니 그때에는 그의 어머니도 조금 머리를 갸웃하였다. 그러는데 또 한 사람이 와서 분명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니 세 번째에는 그 어머니가 들고 있던 북을 던지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여러 번 말하면 믿게 된다는 말로 이 일을 인용하였다.
화매(禍媒)
[DCI]ITKC_BT_1319A_0010_000_0040_2002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심정전(沈貞傳)
심정(沈貞)은 신묘생인데 자는 정지(貞之)이다. 생원으로 임술년에 급제하였다. 말과 용모가 교활하고 아첨이 넘치며 자칭 꾀를 잘 내고 임기응변을 잘한다 하니, 사람들이 지혜 주머니로 지목하였다.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화천군(花川君)으로 봉해졌다. 을해년 겨울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탄핵을 당하여 갈리었다. 무인년 4월에, 안 정민(安貞愍 안당(安瑭))이 이조 판서로서 임금께서 친림한 정사에 입시하였었다. 그때에 형조 판서에 결원이 생긴 것은 여러 번 탄핵을 받아 경질되어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때 어떤 보좌하는 동료가 심정을 추천하였다. 이때 정민공(貞愍公)은 말하기를, “심정은 화천군으로서 족하다.” 하고, 끝내 물망에 넣지 않았다. 5월 15일 친림한 정사에 정민공이 들어가 참여하였는데 특별히 우의정을 제수하였다. 그래서 물러나온 뒤에 심정이 형조 판서가 되었다. 이보다 먼저 정암이 부제학으로서 용인(龍仁)에 있는 선형(先塋)에 분황(焚黃)하러 갔었는데, 이날 크게 지진이 일어나 서울 밖에 가옥이 모두 무너졌다. 정암이 말하기를, “오늘 심정이 반드시 형조에 참여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형조 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즉일로 재변에 관하여 두루 방문하며 물었으므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공론에 진 것을 스스로 분하게 여기어 물러가 강정(江亭)에 들어앉아 있었다. 아들 사손(思遜)이 또 주서(注書)로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니, 모두 불평을 품고 앙심을 먹었다. 드디어 남곤ㆍ홍경주가 와서 일을 꾸며서 가만히 경빈(敬嬪) 박씨의 친정의 문안하는 종을 통하여 도리에 어긋난 말로 교사하여 궁중에 전파하여 당화(黨禍)를 일으켰으니 자세한 것은 사적 가운데에 기록되어 있다. 그 뒤에 형조 판서가 되었는데, 옥송(獄訟)을 처리할 때 곡직(曲直)을 판별하는 것에 힘쓰지 않고 오직 판결만 힘써서 옥이 빈 것만을 들어 궐에 나아가 주달하려 하였는데, 못 잡게 법으로 금한 소를 잡아 그 고기를 가지고 고하는 자가 있었다. 이때 심정은 이를 보고, “사슴의 고기도 늙은 쇠고기와 똑같으니라.” 하였다. 부하 아전이 그 뜻을 알아채고 사슴의 고기로 보고하였다. 그리고 심정은 임금께 아뢰기를, “민중이 성군의 교화를 입어 거의 형벌을 가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은 명하여 그에게 술을 내렸다. 그 임금을 속이는 것이 흔히 이와 같았다.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자 김극복ㆍ이항과 서로 결탁하여 지반을 굳혔다. 경인년에 관작을 삭탈당하고 강서(江西)로 귀양갔다가 조금 뒤에 죽음을 당했다. 아들 사손(思遜)과 사순(思順)은 함께 정축년 문과에 급제했는데, 사손은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있다가 정해년에 야인에게 죽었고, 사순은 승지로 있다가 신묘년에 관직이 파면되었다. 그때 마침 비방하는 글을 종루(鐘樓)에 붙인 일이 있었는데, 비방하는 글에 채무택(蔡無擇)ㆍ허항(許沆)의 이름자가 있었다. 중종의 어휘(御諱) 자가 항(沆) 자이므로 항(抗) 자, 역(斁) 자로 되었다. 글에 무군(無君)이란 말이 있고 스스로 주해(注解) 하기를 모두의 마음[皆之心]이라 하였다. 의논을 주장하는 자가 사순의 한 짓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은 명령하여 본가의 서적을 수색하여 필적을 감정하라고 하므로 한 책을 찾아보니, 그 책 표면에, 〈남산에 올라 똥을 눈다[登南山放糞]〉는 시가 있고, 그 시에 이르기를,
한 소리 뇌우가 천지를 흔드니 / 一聲雷雨掀天地
향기는 장안 백만 집에 가득하도다 / 香滿長安百萬家
하였다. 중종이 보고 미워하여 여러 번 형벌과 심문을 가하고 두어 달을 가두어 두니 그로 인하여 옥중에서 죽었다. 심정이 통정한 경빈 박씨는 쥐를 그슬려 저주한 변을 만나서 복성군(福城君)과 함께 고향으로 쫓겨나가 있다가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죽었으며 당성 위(唐城尉) 홍려(洪礪)도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가정(嘉靖) 정해년(1527) 2월 26일에 동궁(東宮)에서 해방(亥方)이 되는 땅에 그슬린 쥐 한 마리를 달아매고 물통을 만든 나무조각에 비방하는 글을 써서 함께 걸었다. 이때 인종이 동궁으로 있었는데 인종이 해년(亥年)생이고 2월 26일은 탄신일이다. 해(亥)는 돼지에 속하는데 쥐가 돼지 같기 때문이다. 그때 의논이 동궁을 저주한 것이라 하였다. 궁중에서 박빈의 한 짓이라 지목되어 그 시녀와 당성 위의 노복들이 곤장에 많이 죽었고 또한 거짓 자백한 자도 있기 때문에 죄를 입는 데 이르렀다.
[남곤전(南袞傳)]
척언(摭言) : 남곤(南袞)이 판서 홍경주(洪景舟)와 함께 대궐 북쪽 신무문(神武門)을 경유하여 밀계(密啓)하였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밤중에 사람을 명하여 선전관을 보내어 금위군(禁衛軍)을 거느리고 부제학 김정(金淨)ㆍ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등 일곱 사람을 대궐 뜰에 잡아왔다가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또, 기묘의 변은 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의 호)이 실상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승지와 사관을 피하여 후원 북쪽 신무문을 통하여 몰래 아뢰어 그 옥사를 이루었다. 그 뒤에 소년배가 부랑자를 모아 임금의 곁을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명목으로 서로 이어 일어나서 목을 바치어 죽음으로 나가면서도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지정이 속으로 두려운 생각을 품고 매일 어둔 밤에 남이 알아보지 못하는 옷차림을 하고 몰래 이곳 저곳을 떠돌며 잠을 자고 새벽이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기를 1년이 넘도록 하다가 일이 가라앉자 그치었다.
《관물필기(觀物筆記)》에는, “이임보(李林甫)가 잠자리를 옮긴 것이나 남곤이 집을 옮긴 것이 소인의 하는 일로 고금에 동일한 정상이다.” 하였다. 《보유(補遺)》에 의하면, 남곤은 신묘년(1471)에 출생하였고, 자는 사화(士華)요, 갑인년에 급제하였는데 호는 지정(止亭)이다. 일찍이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므로 사대부간에 이름이 높았다. 서로 교유하는 홍언충(洪彦忠)ㆍ박은(朴誾)ㆍ이행(李荇) 같은 이는 모두 한때의 착한 선비였다. 그러나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여러 사람들이 또한 진심으로 마음을 주지 않고 다만 공명의 그릇으로만 여기었다. 하루는 그 여러 사람들이 그 집 북쪽 천석(泉石)에서 놀았는데, 남곤은 그런 천석이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 여러 사람들이 거기에 있는 바위를 대은(大隱)이라 부르고 냇물을 만리(萬里)라 하였으니, 남곤이 명리의 길에 분망하여 산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을 조롱한 것이다. 사문(斯文) 최보(崔溥)가 일찍이 남곤을 소인의 재질이라고 말하였다. 정덕(正德) 정묘년(1507)에 승지로서 친상을 당하여 집에 있었는데, 문사 문서귀(文瑞龜)로부터 김공저(金公著)ㆍ박경(朴耕)등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유자광(柳子光)이 무오년에 옥사를 얽어서 사류들을 모조리 죽이었으므로 드디어 연산군의 살육을 좋아하는 욕심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으니 자광을 없애 조금이라도 지하의 원혼들을 위로하여 줌이 낫겠다.”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곤은 서귀가 하는 이런 말을 듣고 변복하고 대궐 문으로 들어가 변(變)을 고하여 옥사가 이루어지자 가선(嘉善)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대간은 남곤의 고변이 공을 바라는 데서 나왔다고 탄핵하고, 공저 등의 처자를 석방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자광이 오래지 않아 죄를 입으니 사람들이 남곤을 나쁘게 여기었다. 계유년(1513)에 대사헌이 되니 조야에서 모두 분하게 여기었다. 그리고 소릉(昭陵)의 회복을 청하여 윤허를 얻었다. 그러나 그때 의논이 남곤을 가볍게 여기어 대제학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안 정민(安貞愍)은 말하기를, “옛날로부터 재주와 행실이 겸비한 사람이 많지 못하다. 그러니 남곤의 문사(文詞)만은 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문형(文衡)을 맡게 하니, 한편에서는 기뻐하고 한편에서는 유감으로 생각하였다. 정축년(1517)에 이조 판서로서 찬성에 승진하고, 기묘년 봄에 예조 판서를 겸하였는데, 이때에 대간이 정국훈적(靖國勳籍)에 허위로 기록된 사람을 삭제하자고 청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명령하여 조정 의논에 부치게 하니 남곤은 그 의논을 피하고자 능헌관(陵獻官)이 되어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뒤에 정암이 대사헌으로서 곤과 함께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정암이 앞에 나와 아뢰기를, “근일에 숭품(崇品)인 육경(六卿)으로서 능헌관(陵獻官)이 된 자가 있으니, 그 사람이 분명히 조정의 큰 의논을 피하려 하여 구한 것입니다. 신하 된 사람으로 그 몸을 아낀다면 나머지는 보잘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묻지 않았으나 남곤이 부끄럽고 황공하여 땀을 흘리고 나왔다. 드디어 신 문경(申文景 신용개(申用漑)의 시호)의 집에 가니, 문경이 병으로 집에 있다가 누워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곤은 말하기를, “근일에 의논이 심히 격(激)하다.” 하였다. 문경이 벌떡 일어나며, “공이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격이란 말은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고 나라를 망치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곤이 표면에 나타내지 않고 물러갔다. 때의 의논이 바야흐로 올바르니 명리와 지위를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꺼리고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날로 생기어 가시가 등에 있는 것 같았다. 이 해 겨울에 신 문경이 죽자 다시는 거리낌이 없었다. 11월 15일에, 판의금 겸 병조판서 이장곤(李長坤)ㆍ홍경주(洪景舟)ㆍ김전(金銓)ㆍ고형산(高荊山)을 꾀어 초저녁에 북문으로 들어가서 정원(政院)을 속이고 비밀리 아뢰어 당화를 구성하였으니, 모두 남곤이 주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밤에 이조 판서를 제수받았다. 그리고 곧 물러나왔다. 그러나 정사 때에 두 번이나 명하여 불렀으나 병을 핑계하여 나오지 않았다. 12월에 또 35명을 적어 올려 모두 속속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다. 이때 임금이 정부와 대간에게 두루 묻기를, “이 사람들을 모두 귀양보낼 수는 없다. 차등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광필을 체임시키고 남곤을 승진시켜 좌의정을 삼고, 김전ㆍ이유청을 삼공에 채우고 이어 초계(抄啓)한 사람의 명부를 가지고 면전에서 경중을 의논하여 3등으로 나누어 벌을 주었다. 그리고 아뢰어 청하는 일은 언관에게 맡기었으니, 그 계교는 비록 교묘하나 어찌 주모자인 간웅의 이름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신사년(1521)에 송사련의 옥사가 이루어지자 곤이 스스로 소장을 짓는데, 일부러 형벌과 정사가 엄하지 못하느니, 조정의 기강이 풀렸느니 하는 두어 조목을 들어서 당인들을 얽어 무함하고 교묘하게 꾸며 주장을 늘어놓고 반역에 동조하였다고 지목하여 되도록 엄한 형벌과 준엄한 법을 적용하도록 대간을 사주하여 글을 올려서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변론하고 구원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그 계책이 지극히 간사하고 교묘하였다. 그 뒤 5~6년 동안에 당시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서로 이어 사망하고 인심을 속이기 어려워서 공론이 저절로 과격하여지자 항상 부질없이 탄식하며 근심을 품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족인 젊은 사람을 향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어떻다고 말할까?”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소인으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평생에 쓴 원고를 찾아 내어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오직 〈유자광전(柳子光傳)〉만이 세상에 유행하는데 극히 자세하고 주밀하다고 한다. 소인이라야 능히 소인의 정상을 안다는 것이 참으로 거짓말이 아니다. 융경(隆慶) 무진년(1568)에 많은 사람의 여론으로 인하여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적손으로는 외손만 있고 서자가 뒤를 이었다.
[홍경주전(洪景舟傳)]
홍경주는 □□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제옹(濟翁)인데, 신유년(1501)년에 급제하였다.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지고 차서를 건너뛰어 찬성을 제수받았다. 이때 사문(斯文) 정붕(鄭鵬)은 홍문관 교리로서 사은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말하기를, “홍경주가 찬성이 되는 것을 보고 심장에 병이 생겨 물러나와서 벼슬에 뜻이 없다.”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논박을 당하여 체임되자, 불평이 만만하여 원한을 품고 드디어 남곤ㆍ심정과 더불어 서로 좋아하며 맑은 사류들을 없애기를 꾀하였다. 그 딸 희빈(熙嬪)을 시켜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에게로 돌아갔다는 말로 슬며시 임금의 뜻을 움직이고, 금원(禁苑) 나뭇잎에 거짓 참서(讖書)를 만들어 잎을 따다가 임금께 보여 의혹을 자아내게 하여 박빈(朴嬪)의 집 종이 말한 것과 안팎이 서로 맞게 하니, 임금의 뜻이 의혹이 심하여 일마다 놀라고 두려워하여 드디어 밀서(密書)를 경주에게 내려, 이 글을 가지고 은밀히 세력을 잃고 있는 재상들을 사주하여 함께 당인들을 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남곤ㆍ심정과 꾀를 합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정원(政院)이 알지 못하게 여러 사람과 북문으로 들어가 합문(閤門) 밖에 이르렀다. 심정ㆍ성운도 번드는 곳으로부터 와서 모였다. 임금께 나와 참석하기를 청하고, 남곤과 함께 친히 차자를 올렸는데, 자세한 것은 사적(事蹟)과 각 전(傳) 아래에 기록되어 있다. 화가 일어난 뒤 이틀 되는 날 곧 18일 경주가 김전ㆍ남곤과 더불어 부름을 받아 입시하였다. 그때 경주는 말하기를, “요즘 인심이 모두 두려워하여 일의 단서를 알지 못합니다.” 하고, 이어 임금 앞에서 스스로 공치사하기를, “신이 하루 전에 김전의 집에 가서 이야기가 사림(士林)의 일에 미치니, 김전은, ‘나이 젊은 무리들이 대신의 반열에 뽑혀 있으면서 늙고 오래된 신하들이 어쩌다 작은 허물이 있으면, 입이 닳도록 배척하여 조정 정사가 비뚤어지고 인심이 불안하니, 내가 아침에 이 뜻을 아뢰고 저녁에 죄를 당하더라도 마음에는 편안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전하의 뜻을 알기 때문에 다 말하였습니다. 또 남곤을 보고 일을 말하니, 곤은, ‘어린아이들이 상감의 융숭한 대우를 믿고 시국의 정치를 극력 의논하여 늙고 오래된 사람들을 전혀 용서하지 않아 조정 정사로 하여금 날마다 틀려지게 하니, 뒷세상에 비록 소인으로서 군자를 죽였다는 이름은 면치 못하더라도 내가 이 뜻을 아뢰고자 하여 이미 조복(朝服)을 갖추었다가 그만두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전하의 뜻을 알기 때문에 감히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또 남곤은, ‘이 일을 아뢰자면, 마땅히 먼저 정광필에게 물어서 처리하여야 한다.’ 하고, 그날 곤이 광필의 집에 가서 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광필은 굳이 말리며, ‘사림의 화를 일으키려고 하는가. 나는 어리석고 미련하여 계교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하기에, 곤은 다시 말하지 않고 물러왔습니다. 신이 그 이튿날 또 남곤을 보고, ‘수상이 아무리 말리더라도 우리들은 꼭 하여야 하겠다.’ 하고, 15일 초저녁에 신 등이 북문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이날 또 말하기를, “무사(武士) 정귀아(鄭歸雅)ㆍ박배근(朴培根) 등이 일찍이 당을 모아 사류들을 쳐 없애려 하였으므로 오늘 회의하여 상소하는 것이니, 광조 등을 중한 형률(刑律)에 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대궐 뜰로 잡아오게 하여 사방 문을 닫고 친히 국문할 것을 명하고 전교하기를, “전날에 홍경주가 이 무리들이 장차 난을 꾸미려 한다고 말하므로 내가 생각하기를, ‘자고로 사림이 화를 입으면 종사(宗社)가 편안히 보전되는 때가 없었으니, 먼저 스스로 죄를 주어서 가만히 인심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다.’ 하였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하면 이는 광조 등의 복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은 위협하는 말에 유혹되어 급히 저질렀던 것이다. 화를 일으키던 밤에, 먼저 남소(南所)의 군사들을 대궐 뜰에 배열시켰으니, 세희(世熹)와 자임(自任)이 무력과 용맹이 있다는 말에 겁이 나서 그러한 것이었다. 이렇게 간흉한 자들이 남을 두렵게 하여 의혹을 품게 하는 것이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꾀는 이미 성공했으나 두어 해가 되지 못하여 몸이 죽었으니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가.
슬프다. 비밀리 유시(諭示)했다는 계교가 옳다면 어찌 감히 무사(武士)의 화를 핑계삼아 먼저 이 제안자를 죄줄 수 있는가. 먼저 무사를 제거하지 못하고 그 제안자에게 형이 미친다는 것은 만번 생각하여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밀로 한 유시가 누설될까 의심하고 현인들로부터 배척하는 의논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말을 꾸며서 전교를 내린 것이니, 간악한 무리가 임금의 뜻을 엿보고 헤아리는 것이 반드시 한량이 없는 것이다. 일이 심히 간교하고 은밀하여 안팎이 들썩거리고 두려워하니, 탄식할 일이다.
이항전(李沆傳)
이항은 □□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사호(士浩)인데, 젊어서 재명(才名)이 있었고, 임술년(1502)에 급제하여 청환과 요직을 고루 지냈다. 직위가 높아지자 속으로 아첨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품어 방자하게 기염을 부렸다. 기묘년(1519)에 경상 좌도 관찰사를 제수받았는데, 11월에 우도 관찰사 문근(文瑾)과 상주(尙州)에서 모여 잔치하며 취했다가,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계교를 얻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다는 명령을 받고 즉일로 길을 떠났는데, 함양(咸陽) 군수 문계창(文繼昌)이 쫓아 함창(咸昌)현에 이르러 시를 지어 전송하기를,
명공의 이번 감이여, 신선에 오름 같구나 / 明公此去似登仙
서린 뿌리와 얽힌 마디를 날카로운 칼로 끊어 내소 / 盤錯須憑利器剸
사냥한 뒤에 세 구멍을 가진 토끼 어찌 없으리 / 獵後豈無三窟兎
마침내 한 독수리가 푸른 하늘에 오름을 보겠도다 / 會看一 鶚上靑天
하였다. 이항이 기뻐하며 받고 조정에 돌아온 지 수일 만에 다시 논죄하기를 더하여, 여러 현인들을 끌어넣아서 붕당을 짓는다고 지목하여 귀양보내어 추방하고, 연루자를 샅샅이 찾아내어서 눈 한 번 흘겨본 원망도 반드시 보복했다. 병조 판서가 되자, 모든 변방 장수를 제수하는 것이 한결같이 뇌물의 많고 적은 데 따르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항이 병판이 된 뒤로부터 첨사와 만호의 값이 높아졌다.” 하였다. 뒤에 박운(朴雲)의 보화와 재물을 받고, 운을 응사(鷹師)로 임명했는데, 그것이 탄로나 대질 신문을 받아 죽음에서 감해져 귀양갔다가 신묘년(1531)에 심정과 동시에 사사되었다. 박운은 곧 원종(元宗)의 아들이다.
이빈전(李蘋傳)
이빈은 □□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국형(國馨)이요, 임술년(1502)에 급제하였는데, 심사순(沈思順)의 처부(妻父)이다. 천성이 편벽하고 거칠며 괴팍하고 거만하였다. 안 정민(安貞愍)이 일찍이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 나라 서울에 가는데, 이빈이 검찰관(檢察官)이 되어 만 리를 동행하면서도 하루도 함께 앉아 이야기하고 웃은 일이 없었다 하니, 교만하고 망령되고 공손하지 못한 부류였다. 화가 일어나니, 장단(長湍)부사로서 대사간이 되어 항상 남곤과 심정의 매와 개 노릇을 하여 오로지 자기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임오년(1522)에 이조 참판으로서 어깨 부들기에 등창이 나서 온 등어리가 썩어 문드러져 석 달 만에 죽었다. 자식도 없다.
[성운전(成雲傳)]
성운(成雲)은 □□년에 출생하였고 자는 □□인데, 갑자년(1504)에 급제하였다. 화가 일어나자 참지(參知)로서 밀지(密旨)로 약속을 하고 기한 전에 들어가 번들었다. 처음에 가승지(假承旨)로 임금의 전교를 출납하여 승전(承傳)을 제수받았는데 자세한 것은 이장곤(李長坤) 등의 전(傳)에 기록되어 있다. 뒤에 병조 판서로서 심언광(沈彦光)에게 쫓겨나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하루는 대낮에 가위에 눌려 정신을 잃었는데, 기괴한 형체 없는 귀신과 머리ㆍ얼굴ㆍ사지가 없는 사람들이 좌우에 늘어서 있었다. 놀라고 혼미하여 본성을 잃어서 겁에 질려 중얼대며 눈을 감고 보지 못한 지 심여 일 만에 죽었다.
이신전(李信傳)
당적(黨籍)에 이르기를, “이신(李信)은 본래 중인데, 대사성 김식(金湜)이 이학(理學)으로 생도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곧 머리를 기르고 검을 옷을 벗고 와서, 붙좇아 배우고 물으며 김식의 집 담가에 토실(土室)을 쌓고 몸을 굽혀 부지런히 학문하니 식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친자제 대하듯 힘껏 교훈하였다. 김식이 패한 뒤에 식이 제자들을 모아서 대신을 해치기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옥사가 성립되자, 상을 받았다. 충청도로 돌아가 강도로 연루되어 곤장을 맞아 죽었다. 충청도를 낙안(樂安)으로 고쳤다.
보유: 이신은 낙안(樂安)의 관노(官奴)이니,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퇴속(退俗)한 뒤에 김식의 문하에 수업하였다. 식이 귀양가자, 그는 마침 외지(外地)에 있다가 귀양간 곳까지 쫓아가서 식을 따라 몰래 영산(靈山) 이중(李中)의 집에 이르렀다. 이때 이신을 먼저 내보내어 무주(茂朱)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는데, 그는 속으로 도적의 마음을 품고 얽어 씌워 무고하여 옥사를 만들어 천인을 면하고 자기 고향에 돌아와 살았다. 뒤에 말 도둑의 두목으로 잡혀 갇히니, 군수 김문서(金文瑞)가 때려죽였다.
송사련전(宋祀連傳)
송사련(宋祀連)은 천인 중금(重今)의 손자요, 감정(堪丁)의 아들이다. 사예(司藝)ㆍ안돈후(安敦厚)가 성화(成化) 을미년년(1475)에 상처(喪妻)하고, 나이 늙고 병이 있어 동복형인 감사(監司) 관후(寬厚)의 여종 중금(重今)으로 잠자리를 모시게 하였다. 중금에게는 딸자식이 있으니, 곧 데리고 들어온 감정(堪丁)인데, 돈후가 데려오기 전에 낳은 딸이다. 이 감정은 성질이 교활하고 간사하여 나이 14, 15세 때에 도리어 불순한 말을 하였다. 사예(司藝)가 이간할 조짐이 있음을 노하여, 아들 총(璁)을 시켜 막대기로 심하게 발바닥을 때리어 발가락 두어 개가 부러졌는데, 배천[白川] 외가로 보냈다. 계묘년(1483)에 사예가 세상을 뜨자, 사예의 아들 정민(貞愍)과 그 형 부사(府使) 장(璋)과 정랑(正郞) 총(璁)과 의정(議政) 김응기(金應箕)의 부인이 모두 중금에게 길러져서 혼인하고 출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금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이에 감정을 배천에 사는 갑사(甲士 군인) 송자근쇠[宋者斤金]에게 시집보내고 돈후의 아들 안인(安璘)이 송자근쇠를 관상감(觀象監)에 소속시켜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고, 홍치(弘治) 무신년(1488)에 사련(祀連)을 낳았다. 장성하자 의사(醫司)에 붙이려 하였으나 모두 그 어미가 몸을 속량(贖良)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천문학(天文學)에 종사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그 아비가 기왕에 본감(本監)의 판관(判官)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인의 아우 안당(安瑭)도 지리학(地理學)으로 관상감에서 벼슬을 하였으니, 또한 김의정이 제조(提調)가 된 덕택이었다. 정덕(正德) 을해년(1515)에 중금이 배천 집에서 죽으니, 김응기의 부인이 처겸(處謙)에게 가서 호상하여 장사지낼 것을 권하였다. 집안에서 사련을 친자제 같이 보았는데 성질이 또 예민하고 재주 있어 사람의 눈치를 잘 알아차렸다. 그래서 대갓집에서 더욱 믿고 사랑하여 무슨 일이든 모두 그에게 맡겼다. 기묘년(1519)에 본학(本學) 과거에 참여하여 판관에 제수되었다. 신사년(1521) 겨울에 처겸이 친한 친구와 한담하다가, “아무개만 제거하면 사림을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련이 이 말을 듣고 계교를 얻었다고 스스로 다행히 여기어 헛농담을 하는 체하고 화답하여 서로 거들어서 교묘하게 말을 꾸며 가지고 그 처남 정상(鄭瑺)과 더불어, “대신들을 도모하려 한다.”고 변을 고하려는데, 증거가 없는 것이 걱정이 되어, 처겸의 모부인의 초상 때의 〈조객록(弔客錄)〉과 초빈(初殯)ㆍ장사(葬事) 때 일을 한 역인(役人)의 명부(名簿)를 들어 사람을 불러 모아 거사하려 하였다 하고, 또 정상과 서로 결탁한 무뢰배 4~5명을 참모로 삼았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임금은 영상 정광필ㆍ좌상 남곤ㆍ지의금(知義禁) 심정ㆍ승지 윤희인(尹希仁)ㆍ조옥곤(趙玉崐)을 부르게 하여 함께 추고(推考) 국문하여 옥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남곤과 심정은 피고들이 자기들 비위에 저촉되었다고 노하여 얽어 씌워 더 큰 죄에 빠뜨렸다. 그리고 사련에게는 상을 주고 절충(折衝)을 가자하였으며 정상은 군직(軍職) 4품을 주었다. 그리고 각각 죄인의 가재(家財)와 전택(田宅)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 뒤에 사련은 운명을 판단하는 기술로써 사대부들과 교제를 하였으므로, 병조 판서 김모재(金慕齋)에게, “높은 품질(品秩)의 체아직(遞兒職)에 붙여 주자.” 청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자 모재는, “사련이 20여 년 동안 녹을 받은 것은 고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들의 말이 만일 큰 죄에 해당되는데도 고변할 때에, 다만 대신을 도모한다고만 하였다면, 이는 임금을 속인 실증이 되는 것이요, 이미 거사할 시기가 지난 후에 자기 자신을 모면하기 위하여 한 것이라면, 이것은 다스릴 만한 죄는 있어도 기록할 만한 공은 없는 것이니, 머리와 목을 보전한 것만도 이미 족하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후진들에게 말하기를, “선현(先賢)들은, ‘벼슬을 하는 사람은 무당 보살할미 등속을 더욱 멀리하고 끊어야 한다.’ 하였고, 나 역시 ‘집에 있는 사람은 점치고 운명을 말하는 사람을 친근히 하고 서로 접촉할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련은 안씨의 집에 출입하며 그 집안의 운명이 비색한 것을 점쳐 안다고 하여, 은혜를 배반하고 화를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얻었으니, 이것은 거울삼을 만한 일이다.” 하였다. 기사년에, 금상께서 야대(夜對)할 때에 경연관이 아뢰기를, “지난 기묘년에 남곤ㆍ심정이 이미 당화(黨禍)를 일으키자, 이랬다 저랬다 하는 무리들이 서로 연속하여 상을 바라고 당시의 사류들을 모함하여 모두 어육이 되게 하고, 자기만 벼슬과 상을 보전하여 지금까지 편안히 누리고 있으니, 이것은 실로 사림이 통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더 묻지를 않았다. 그 이튿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사련이 그 기별을 듣고 교외로 나갔는데 얼마 안 되어 죽었다. 한 딸과 다섯 아들이 있는데, 딸은 한 원수(漢原守)에게 출가하여 자녀가 없어 순 원령(順原令)으로 후사를 삼았고, 아들은 인필(仁弼)ㆍ익필(翼弼)ㆍ한필(翰弼)인데, 내외 세 파가 서얼로서 법을 속이고, 과거를 보다가 사관(四館)으로부터 정거(停擧)를 당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글을 올려 말하였으나 오히려 풀리지 못하였다.
정상전(鄭瑺傳)
정상(鄭瑺)은 금루학(禁漏學) 인년(麟年)의 아들이요, 관상감(觀象監) 지(漬)의 손자이니, 곧 사족(士族)이요, 어머니는 판관 노공유(盧公裕)의 첩의 딸이다. 정상이 안팎의 서얼로서 상으로 받은 것이 풍족하자, 옷차림과 기구 등속에 외람된 물건을 많이 사용했다. 기유년(1549)에 사헌부에서, 무늬 있는 비단에 자주색 분홍색이 서로 비치는 상복(常服)을 입은 자를 적발하여 금부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려 하였다. 그래서 정상도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떠들어 대기를, “밀계할 일이 있다.” 하였다. 그래서 옥관이 상부에 보고하므로, 정원에서 그를 불러 물었다. 이에 정상은 말하기를, “대간이 신사년(1521)에 죄를 입은 사람들의 자제들만의 말을 듣고, 나를 죄 없이 얽어 넣었다.” 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구수담(具壽聃) 등은 정상의 혐의를 더 들추어 임금께 아뢰기를, “정상이 분수에 맞지 않게 의복을 입어 비난의 대상이 된 지가 이미 오래고, 또 지금 죄수가 되어 있으면서도 고변한다고 핑계삼아 대간을 모함하니, 청컨대 조옥(詔獄)에서 끝까지 고문하소서.” 하였다. 그리고 의금부 동지사 조사수(趙士秀)도 아뢰기를, “정상의 죄는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보복이라고 둘러대며 대간을 모함하니, 이제 금부로 옮겨 마땅히 통렬하게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사년에 죄를 입은 시산 부정(詩山副正) 정숙(正叔)과 동서간이므로 이 자를 다스리는 것을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으나, 피하지 말고, 대간을 놀린 죄만으로 국문하여, 전 가족을 부령(富寧)으로 옮기게 하니, 거기에서 30년 만에 죽었다. 딸 하나가 평원 수(平原守)에게 출가하였는데 아들 덕양 령(德陽令)을 낳았다.
[주-D001] 분황(焚黃) :
고관(高官)이 되면 그의 부ㆍ조ㆍ증조까지 관직을 추후로 내리게 되는데 그것을 증직이라 한다. 이 증직하는 직첩(職牒 사령장)은 반드시 누런 종이에 썼으므로, 그 누런 직첩을 그 본인의 무덤 앞에서 불로 태워서 이런 관직이 내렸음을 알린다. 그것을 분황이라 한다.
신원소장(伸冤疏章)
[DCI]ITKC_BT_1319A_0010_000_0050_2002_003_XML DCI복사 URL복사
기축년에 생원 이종익이 찬적의 원통함을 신구함[己丑生員李宗翼伸竄謫之冤]
신은 들으니, 우(禹)와 탕(湯)은 자기를 죄주었기 때문에 그 흥함이 신속했고, 걸(桀)과 주(紂)는 남을 죄주었기 때문에 그 망함이 빨랐다 합니다. 아, 남과 더불어 충성을 하되 자신의 진실을 다하고, 처신을 공평하게 하되 다른 사람에게 완전하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이나 불초한 이가 서로 권하는 바요, 치란(治亂)이 나누어지는 원인입니다. 신이 엎드려 보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상성(上聖)의 자품으로서 중흥의 운명을 개척하였으므로 사직에는 걱정거리가 없고 종묘에 경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오히려 또 친히 능침(陵寢)에 거둥하시니, 조상을 받드는 효성이 지극하고, 몸소 적전(籍田)을 가시니 백성을 거느리는 어짊이 깊습니다. 윗사람의 것을 덜어 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는데, 먼저 조세를 감하라는 명령을 내리셨고, 분함을 징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다시 서방을 정벌하는 의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위대하도다, 천하의 으뜸되는 착함이 모두 전하의 몸에 집중되었음이여. 오히려 하늘의 견책에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글을 내리어 자신을 죄주어 전전긍긍하면서 잠시라도 편안히 있지를 않고 겸공(謙恭) 숭고(嵩高)한 높음을 지키어 여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산림의 무리에게까지 미쳤으니, 이것은 또 대우(大禹)가 좋은 충고를 듣고 엎드려 절하고, 성탕(成湯)이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은 성대한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좋은 습속이 이루어지는 교화를 또다시 오늘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을 당해야 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임금이 있는데도 한 포의(布衣)의 선비조차 성명의 뜻에 응하여 고황(膏肓)에 맺힌 병을 고치려는 이가 없으니, 이것이 신이 분수 넘게 죽으려 하는 까닭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저도 소년 때에 경서를 읽었고, 전하와는 일찍이 반면식(半面識)이 있으므로 자나 깨나 그리워하였습니다. 세월이 그럭저럭 흘러서 20년이 홀연히 지났는데도 사업은 이미 텅 비었고, 또 지기(志氣)마저 잃어서 몸도 바로잡지 못하고, 집안도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죄와 허물이 한 몸에 운집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 책망하여도 소용이 없고, 뉘우쳐도 도리가 없으므로 달게 자포자기하여도 소문조차 나지 않으니, 이 세상에서 무용한 존재가 된 줄을 안 지가 꽤 오랩니다. 오늘날, 전하의 은혜는 부모의 은혜와 같습니다. 은혜가 이미 이와 같다면, 신이 감히 한 가지 어리석은 소견으로써 구중(九重)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말과 행실이 서로 맞는 것은 대인의 일이요, 말이 행실보다 앞서는 것은 소인의 하는 짓입니다. 신은 한갓 말만 할 뿐이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의 신분을 구별하여 그 말을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출관직방(出關直方)의 의논을 돌아보지 않아 엎어지고 넘어져도 뉘우치지 않는 것을 전하께서는 허락하시겠습니까. 신은 신의 말이 반드시 옳다는 것이 아니오니, 전하께서는 좌우 대신들과 그 득실을 따져 보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만으로 아뢰겠습니다.
□□ 유자광(柳子光)이 또한 간사하여, 김종직(金宗直)에게 원한이 있다고 속으로 죽여 없애려는 뜻을 품었다가 그 일을 모함하게 되매, 드디어 당세 임금의 살벌한 화단(禍端)을 만들어 내어, 사직이 거의 동요할 뻔하였습니다. 아, 종직이 전연 그른 것이 아니고 자광이 옳지 못한 것을 안 연후에야 비로소 함께 격물(格物)의 학문을 의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 번 내세우면 신더러 미쳤고 어리석다 하겠으나 10년 동안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 스스로 믿는 바가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신은 앞으로 올 화가 종직의 때보다 더 클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렵니까. 처음에 전하께서 김식(金湜)ㆍ김정(金淨)ㆍ조광조를 전혀 잘못 시험하시어, 즐거이 왕을 보좌할 신하인데도 서로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전전긍긍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전하께서 인재를 볼 줄 아시는 명성을 세인의 이목으로부터 어긋나게 하시고, 오늘날의 쇠퇴한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그것은 실로 김종직으로부터 잠재해 내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밝게 보는 임금과 때를 구제하는 대신이 없다면 거의 위태한 것입니다. 그리고 형벌을 감하여 지나치지 않게 한다면, 어찌 하늘과 땅이 함육(涵育)할 뿐이겠습니까. 후일에 젖내 나는 무리들이 당시 대신들에게 허물을 돌리어,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큰 죽음을 당했으니, 이것은 신이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 광조의 마음 쓰는 것이 원래 그러하지 않았는데 조두(俎豆 예의(禮儀))를 잘못 배워서 그 화가 이러한 것이니, 신하된 자로서는 거울삼을 만한 일입니다. 유자광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사이 사이 빠진 것이 있다. 신이 이미 이전의 두어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하겠지마는, 다시 그때에 탄핵을 당한 사람은 모두 쓸만하다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은 들으니, 요(堯) 임금은 조정에 사흉(四凶)이 있다고 해서 원개(元凱)의 어짊을 버리지 않았고 주(周) 나라는 집에 이숙(二叔)이 있다고 해서, 노(魯) 나라와 위(衛) 나라와의 친교를 버리지 않았으니, 어찌 두어 사람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세대의 인물을 다 무고할 수 있습니까. 아, 저 사람은 마땅히 벌을 줄 것과 또 이 사람은 버리지 못할 것을 안 연후에야, 비로소 함께 궁리(窮理)의 학문을 의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마는 받아들인다면 제 말이 천하를 횡행하더라도 좋습니다. 이제 신이 가만히 지금의 정세를 살펴보고 자세히 물정을 추리해 볼 때, 오늘의 조정이 갈라져서 조개와 황새의 형세가 되어 백년의 환을 끼쳐 주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모름지기 전하의 밝으심과 재상들의 넓은 도량으로 잘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대체로 인정이라는 것은, 이것을 높이면 저것을 억누르고, 저것이 강해지면 이것이 약해지니, 신이 어떻게 하면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사람을 얻어서 그와 함께 넓고 크게 도를 의논할 수 있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격물궁리(格物窮理)의 학문을 추구하사 선악의 큰 근원을 밝히시고, 솔선수범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시고, 공평정대하게 더욱 왕자의 도량을 열어서 조정의 기운을 화하게 하시와,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드신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다시 조목조목 열거하여 진달하오리다.
신은 들으니, 제왕이 법을 운영하는 것이 미덥기는 사시(四時)와 같고 굳기는 금석과 같아서, 이것으로 조종(祖宗)의 법을 전하고, 이것으로 한때의 호령을 행하나니, 그런 뒤에야 백 가지 폐단을 없앨 수 있고 백 가지 이익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사면(赦免) 전에 있는 자는 비록 무거우나 반드시 석방하고, 죄가 사면 뒤에 있는 자는 비록 가벼우나 반드시 살필 것입니다. 공경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이 처음부터 그 사이에 행하여지지 않는 것이 아니오니, 이것이 왕자(王者)의 정치입니다. 옛적에 당 나라 절도사 우적(于頔)이 들어와 조회하자, 헌종(憲宗)이 총명과단하여 여러 사람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으므로 회채(淮蔡)의 공을 이룬 것이 이런 까닭입니다. 지금에 와서 사면이 지났는데도 반드시 죄를 주고자 한다면, 반드시 말하기를, 법률에 어긋나게 죄를 다스리느니, 또는 위로부터 지나치게 엄히 징계하느니 할 것이므로 이것은 모두 그릇되고 망령된 주장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평하게 의논하십시오. 어찌 한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형벌은 받고 덕은 입지 못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또 조정에서는 마땅히 충후한 신하가 부족한 것을 근심할 것이요, 형벌이 심하지 못한 것은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일찍이 무거운 법을 쓰는 세상을 지내셨으니 말을 하자면 더욱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후사에게 법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 신은 들으니, 궁한 음기가 차게 엉기면 만 가지 물건이 드디어 폐색되었다가 따뜻한 봄에 한 번 움직이고, 맑은 기운이 바야흐로 형통하면, 곤충(昆虫)ㆍ초목ㆍ날짐승ㆍ물고기ㆍ동물 심지어 식물 등이 모두 한 원기 밑에 나타나고자 하거늘 더욱이 만물보다 영험한 존재로 태어나 밝은 시대를 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전날 탄핵을 입은 사람들을 보건대, 평생에 모두 군자로 자처하였으니, 그 가운데에 어찌 분발하고 힘써서 스스로 공을 세워 전 허물을 속(贖)할 자가 없겠으며, 일찍이 시종에 출입하다가 물러가 초야에 처하여 있으니, 어찌 바람을 임하여 회상하면서 섭섭하게 대궐 뜰을 바라보는 자가 없겠습니까. 대개 착한 생각은 항상 우환에서 생기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이 안락에서 잃는 것이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천지가 만물을 소생시키는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서 크게 왕자의 법도를 잇는다면, 산 사람은 천지에 유감이 없을 것이요, 죽은 사람도 귀신에게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공자도 말하기를, “재주 있는 사람을 얻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였는데, 지금에 그 인재를 폐하여 두고 매양 인재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니, 이것은 이른바 비록 염파(廉頗)ㆍ이목(李牧)을 얻더라도 능히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마음에 얻지 못하면 정열이 집중되고 그 정열이 불평한 기운에 집중되면, 유명(幽明)을 통하여 울결(鬱結)ㆍ상승(上昇)합니다. 그래서 음기가 이기면 서리와 우박이 되고 양기가 도우면 가뭄이 되니, 이것은 이치의 필연적인 것이어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감옥 속과 매질 아래서 정상이 혹 상달되지 못하고 일이 혹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어찌 죄 없이 잘못 죽는 자이겠습니까. 또 사방을 돌아보건대, 귀양가는 사람이 서로 잇따르고 하늘을 바라보며 원통함을 부르짖으며 간 자는 돌아오지 않고 귀양오는 자는 오히려 계속되니, 사람이 한 세상에 나서 그 수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제왕이 사람의 충성을 허여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는 뜻이겠습니까. 당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사마시(司馬試)의 장원에 들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10년 동안 초나라의 물과 단풍 숲 밑에서 / 十年楚水楓林下
오늘밤 처음으로 장락궁의 종소리를 듣노라 / 今夜初聞長樂鐘
하였으니, 10년 만에 나라로 돌아오는 것이 예전에도 전례가 있었으나, 광명을 보지 못하고 거의 일생을 마칠 때까지 영락하여 마침내 전하의 위대한 도량을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신은 듣건대, 우리 나라의 인심과 풍속이 대개는 중국과 같으나 혹 같지 않은 것도 있으니, 한 사람이 벼슬을 하면, 칠족(七族)이 부양되어 함께 근심과 즐거움을 표하여 서로 관계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중국의 풍속이요, 낳아서 머리털에 물이 마르면 사람마다 각자의 마음을 가져서 재물을 나누어 각각 살고 혹은 서로 숨기는 것은 우리 나라의 인심입니다. 이때문에 한 사람이 악한 일을 지으면 친구가 서로 연루되어 화를 당하는 자는 천하에 많이 있으나, 꾀를 함께 하고 흉한 일을 같이 하고도 우연히 천벌을 벗어나는 자는 고금에 다만 두세 사람뿐일 것입니다. 또 김처례(金處禮)같은 자는 역적 처의(處義)의 아우인데, 사형을 면하고 탐라(耽羅)로 귀양갔다가 7년 만에 돌아왔으니, 이것은 세조(世祖)께서 한 세상을 뒤흔들던 솜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황제(高皇帝)의 《대명률(大明律)》이 천하에 통행되는 것을 폐할 수가 있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덕을 공경하는 공적을 받아들여 법률에 의하여 죄를 다스리되 수시로 그 은택을 베푸신다면, 이것이 어찌 인정과 법을 아울러 위엄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제왕으로서 어찌 근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 임금의 근심은 9년의 물이요, 탕 임금의 근심은 7년의 가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 근심할 것은 마땅히 근심하고 마땅히 근심하지 않아야 할 것은 근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재와 한재가 우와 탕의 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선왕들과 하늘에 제사하던 마음을 진실로 상상할 만합니다. 만약 전하께서 우와 탕의 근심으로써 근심을 삼지 않고 한갓 피부로 느끼는 말단의 일에만 구애되신다면, 이것은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잡는 것 같아서 차라리 근심할 줄을 모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전하의 용맹한 생각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신이 부지런히 간곡하게 되풀이하여 진달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앞으로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까? 또 기다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 조정의 큰 의논이 이미 정해진 바에야 초야의 미미한 자취로 어찌 감히 이론을 제기하겠습니까. 천고의 재앙됨이 오늘과 같은 적은 없어서 1년에 부지런히 움직여 얻는 것은 적수공권(赤手空拳)이니 천도(天道)는 막연하고 인사(人事)는 공평을 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구구한 저의 작은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 세상에 나서 조정의 근심을 품고, 분수를 모르고 당세의 일을 논하였으니, 신의 참람하고 망령된 점 진실로 죄를 피할 수가 없음을 아나이다. 전하께서 자신을 책하고 여론을 갈구하는 오늘날을 당하여, 무릇 신하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귀를 가리고 입을 다문 채 시기(時忌)를 피하고 고식(姑息)적인 태도만 취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주장을 내세워 전하의 바람을 외롭게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신자(臣子)가 군부를 떠받드는 것이 조정에 있고 초야에 있다고 해서 더하고 덜함이 있지 않으니, 이것은 밤중에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의지하여 길이 탄식하고 재차 누웠다 다시 일어나서 끝내 묵묵히 참지 못한 것입니다. 다행히 전하께서 보신다면, 큰 쇠북의 한 소리가 반드시 추상(秋霜) 같은 엄숙함에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이 마음에 간절한 충심과 성의를 감출 수 없어서 삼가 백번 절하고 만번 죽음으로써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다.
-공의 이런 주장이 부당하다 하여 당시 재상의 비위에 거슬렸으므로 멀리 바다 섬으로 귀양갔다가 그 뒤에 병이 되어 분통이 터져 두 번째 상소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가정 정유 십이월 태학생 등 상소(嘉靖丁酉十二月太學生等上疏) 중중
엎드려 생각건대, 종사(宗社)에 경사가 있어 큰 간흉이 이미 제거되니 조정에서는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두려움을 풀고 사림에서는 원망하고 미워하는 분노를 씻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정(邪正)을 가리고 시비를 분별하여 묵은 것을 개혁하고 새것으로 고치어 태평을 보전할 기회입니다.……신은 지위가 정치를 꾀할 만한 것이 못되고 책임을 말할 만한 것이 없으나, 구구한 마음에 분수를 모르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진실로 충심에 의해 격발된 마음은 피차 다름이 없으며, 공론에 따라 발언한 것은 존비(尊卑)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시골 사람의 과격한 말과 꼴이나 베는 자의 얕은 견해를 진달하여 조금이라도 전하의 의견을 듣자는 두터운 소망에 보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나라에 대한 사기(士氣)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원기와 같아서, 원기가 허약하면 백 가지 병이 침노하고 사기가 위축되면 백 가지 간사함이 틈을 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밝은 임금은 사기를 붙들기에 급급합니다. 사기는 천지의 양명(陽明)을 나타내고 의(義)와 도(道)를 배합하여 삼강(三綱)을 지탱하고 오륜을 붙들어 항상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므로, 곧게 길러서 해가 없으면 가히 명분을 정할 수 있고 기강을 세울 수 있으며 공사를 분별할 수 있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획정할 수 있으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고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변별할 수 있으므로, 사심 없는 의론이 확장되고 탐관오리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군자는 이 기운을 보호하여 반드시 진작시키기를 생각하고, 소인은 이 기운을 꺼리어 반드시 꺾으려 하니, 오직 임금이 배양하고 변별하는 여하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기운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나면 온유해지고 돈후(敦厚)해지며, 위태한 세상을 만나면 강함을 나타내어 굳세어지나니, 배양할 즈음에 만일 그 중도(中道)를 잃는다면, 온유돈후해져야 할 때에 혹 강함을 나타내어 굳세어져 그 폐단이 격한 데 지나치고, 강함을 나타내어 굳세어져야 할 때에 혹 온후해지면 그 폐단이 지나치게 고식적이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정치에 해로운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에서는……연산조의 혼란으로부터 인심이 흐려져서 여러 조종조의 배양한 사기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는데도 오히려 다행히 남은 실머리가 혹 존속하는 것이 있었으므로 당시에 일을 보던 권간(權奸)이 이를 깊이 꺼리어 한 번 무오년(1498)에서 꺾고 두 번 갑자년(1504)에서 꺾어서 모조리 탕진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늘의 운수는 회복하지 않음이 없는 이치와 조종의 묵묵히 돕는 돌봄에 힘입어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오래 물든 풍속을 고치고 일대의 정치를 새롭게 하게 된 것입니다. 온유돈후한 사기가 팔짱을 낀 남면(南面)한 임금 밑에서 묵묵히 운행되어 종횡으로 뻗어나가고 나뭇가지처럼 자라나 과격하지도 않고 투안(偸安)하지도 않으므로 거의 근사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중흥을 일으키던 처음의 피폐된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어 사심 없는 의론이 모두 베풀어지지 못하고 탐관오리가 다 없어지지 못하였으나, 이것은 특별히 오래된 버릇이 졸지에 변경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불행하게도 신진들이 ‘왕자(王者)가 있어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어질어진다.’는 말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하루아침에 고쳐 발분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독립하여 고결한 지조를 품고 강개한 뜻을 드러냈으나, 이때의 사기는 드디어 격(激)에 이르렀습니다. 격의 이름이 비록 투(偸)보다 나으나 그 해(害)가 되는 데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심을 살펴본다면, 일호(一毫)의 나쁜 마음은 없어 오직 임금이 있는 것만 알고 자기 몸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으며, 오직 나라 있는 것만 알고 집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교화(敎化)를 일으키기에 뜻을 날카롭게 하시어 친애하고 믿으셔서 자신의 허물을 듣기 좋아하고 간함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셨고, 그 계책 듣기를 좋아하여 건의 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성명(聖明)을 믿고 지치(至治)를 나타내어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되게 할 수 있고, 우리 백성을 요순시대의 백성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인의 글을 읽고 부질없이 옛일을 사모하며 시속의 쇠한 것을 슬퍼하나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어느 일이든 옛일을 가지고 지금에 시행하려 하였습니다. 옛적에는 사람이 낳은 지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간다 하여 대체로 처음으로 배우는 선비는 반드시 소학을 익히게 하셨고, 옛적에는 남전(藍田) 여씨(呂氏)의 향약(鄕約)의 법이 있다 하여 그 법을 온 나라에 유행하게 하였으며, 옛적에는 현량과(賢良科)가 있다 하여 또한 그런 과거를 설치하였으니, 이와 같은 유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대체로 모두 옛것을 이끌어다가 현대 일을 똑같게 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힌다는 이름을 얻었으니, 이것은 비록 그 사람들의 죄이지마는 또한 전하께서 그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각별하였고 사림(士林)이 그 사람들에게 열복(悅服)한 것도 또한 그 사람들이 유속(流俗)에서 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도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금의 때를 당해서는 오직 우리만이 큰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사이에는 또 행실을 꾸며 명성을 구하는 무리가 있어서 때를 타서 붙어다니며 군중의 형세를 조성하고 국론을 마음대로 하였으므로, 칭찬받는 자라고 반드시 모두 어질고 옳은 것이 아니요, 비난 받는 자라고 반드시 모두 불초하고 그른 것이 아닙니다. 이런 버릇이 날마다 자라서 온유하고 돈후한 기운이 태반은 사라졌으니 이것이 모두 과격의 폐단입니다. 그러나 신 등이 가만히 들으니, 《논어》에 이르기를,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의 어짊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신 등도 또한, 이 사람들의 허물을 보고서 이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등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진실로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무리지어 나아가기를 요구하고, 득실을 근심하는 무리들이 불만스럽게 뜻을 얻지 못한 분함으로 틈을 엿보아 공격하기를 기다린 것이 오랩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어진 이에게 일임하는 정성이 조금 의심쩍게 되자, 간사한 무리들이 그 틈을 타서 날마다 참소를 올려 은밀히 화의 장본을 만들어 놓은 연후에 가만히 신무문으로 들어가서 임금의 마음을 두렵게 하여 움직이니, 이것이 이른바 호리(狐狸)와 같은 태도를 드러내고 시랑(豺狼)과 같은 횡포를 자행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정과 사림이 일망타진되었으니 만일 충성스럽고 곧은 대신이 뇌정(雷霆)과 같은 위엄을 무릅쓰고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지 않았더라면, 잠깐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변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생하였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들의 죄를 확정하고자 하셨다면 마땅히 탁 터놓고 밝히 들으시고 널리 여러 의논을 받아들여 모든 국민과 함께 죄를 주더라도 조금도 불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두 가지는 간사한 무리들의 속이는 말을 믿으시어 그날 밤으로 일을 일으켜, 조정이 이때문에 쑥밭이 되어버렸으니, 이것이 당고(黨錮)를 죄주고 청류(淸流)를 물에 던지는 화와 어찌 다릅니까. 그러나 권세 있는 간흉배들이 막아 가리고 대궐문마저 굳게 막혔으므로, 충성을 다하여 의분하는 사람들이 한갓 상통(傷痛)과 울분(鬱憤)을 더할 뿐, 팔뚝을 걷어붙이고 원한을 삼키면서도 마침내 감히 아뢰지를 못하였습니다. 다만 관학(館學)에 있었던 선비들만이 그 충성 때문에 간흉들에게 화를 당하고 정직함 때문에 배척을 당한 것을 애달피 여기어 대궐에 엎드려 소장을 올리고, 궐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가서 대궐 뜰에서 부르짖어 울며 금부에 갇히기를 다투면서 아무것도 사양치 않는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유생들의 즐겨하는 바이겠습니까. 진실로 전하께서 깊이 현혹되었음을 민망히 여겨서 만에 하나라도 깨닫기를 바랐던 까닭입니다. 전하의 의혹이 비록 어지럽고 급한 때라 깨닫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만일 한가하고 조용한 때에 깨달으신다면 사정(邪正)은 거의 가려질 것이요, 시비가 거의 밝혀질 것이며 언로(言路)가 열릴 수 있을 것이요, 사기가 진작될 수 있을 것이며, 조정의 화평한 복이 이로부터 비로소 싹을 내려 후일 권간의 화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뜻이 있는 선비는 항상 전하께서 깨닫지 못할까 근심하고, 권간의 무리는 오히려 전하께서 혹시라도 깨달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권간의 말은 쓰임이 되고 충성된 뜻이 있는 선비는 날로 멀어졌으므로 전하께서 권간을 믿는 것은 더욱 심하여지고 권간이 전하를 속이는 것은 더욱 굳어져서, 비록 전하를 깨우치고자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즐거이 무익한 말을 하여 권간을 미워함으로써 그 화를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이로부터 사기는 날마다 투박(偸薄)하여져서 엄벙덤벙하여지고 사정(邪正)은 혼돈되고 시비는 뒤집혀져, 권간은 더욱 기탄없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마음대로 행하고, 탐하고 더러운 것이 습관이 되어 뇌물이 공공히 행하여지고,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욕심을 순순히 품게 되니, 각각 서로 권세를 다투어 사(邪)로써 사를 공격하여, 한 권간이 비록 제거되나 또 한 권간이 이어 나와, 전하께서 전날 권간을 믿던 마음이 또 뒷날 다른 권간에게로 옮겨지게 된 까닭이 된 것입니다. 김안로는 흉측하고 간사하며 탐욕스럽고 독살스러운 괴수로서 위로는 슬그머니 전하의 뜻을 엿보고, 아래로는 자기의 무리들을 사주하여 조정에 뿌리를 서리고, 위엄과 복을 마음대로 희롱하며 바른 것을 핑계하여 간사한 것을 팔고, 공사를 빙자하여 사사를 영위하여 큰 권세의 자루가 손바닥 속에 옮겨지자 온 조정이 감히 자기를 의논하지 못하게 되므로, 좋아하고 미워하고 옳고 그른 것이 모두 그 입에서 나오고, 살리고 죽이고 폐하고 두는 것이 모두 그 손을 연유하여 착한 무리를 배척하고 추방하는 것이 전날의 권간보다 더 심합니다. 그래서 일국의 신민들이 발을 포개고 눈을 기울여 임금의 세력이 날마다 위에서 고립되는 것을 앉아서 보면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굳히면서 감히 한마디도 아뢰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절개 있는 선비가 그 사이에 끼어 있지 않아서 그랬겠습니까. 진실로 사기가 매우 떨어져 떨치지 못하는 것은 실상은 전하께서 기묘(己卯) 사람들은 간사한 신하가 아닌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그 당시에 깨달으셨다면 전날의 권간이 또한 스스로 방자하지 못하였을 것이요, 만일 전하께서 권간을 죄주던 때에 깨달으셨다면 후일의 권간이 또한 스스로 번성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신 등은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전일의 권간을 죄준 뒤에 혹 기묘에 벌을 당한 사람을 가까운 곳으로 옮기시고 써 주실 뜻이 있으시다면 거의 깨달은 것입니다. 김안로가 제 심복으로 재상 지위에 있는 자를 몰래 사주하여 이미 제기된 공론을 꺾어 개인적인 의견으로 돌려버리자 전하께서는 또 전교하시기를, “이제부터는 입을 닫고 기묘의 일을 말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야의 사림(士林)들이 시비를 분명히 알지 않는 이가 없으면서도 건의하기가 어려워서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 천하에는 양쪽이 옳은 법이 없고 또한 양쪽이 그른 것도 없는 것입니다. 권간이 그르다면 권간이 아닌 자는 반드시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째서 쾌히 깨닫지 못하십니까. 권간의 막고 가리는 화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근일의 세 간흉들이 항상 사기가 혹 떨칠까, 언로가 혹 열릴까, 저희들의 간사한 정상을 혹 은폐시키기 어려울까 두려워하여, 터무니없는 죄를 만들어 일국의 원로를 배척 방축하여 거의 죽을 땅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치고 씹으려 하여, 심지어는 대궐 뜰에서 제술(製述)하는 사이에 한 말이나 여항(閭巷)에서 술에 취하여 희롱하는 가운데의 이야기까지도 모두 혹독한 법문을 이용하여 마침내 큰 죄에다 뒤집어 씌우니, 이것은 부질없이 조정에서 사기를 꺾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초야(草野)에서까지도 몹시 꺾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공론이라는 것이 한결같이 세 간흉의 목구멍으로부터 온 것이니, 시비와 사정에 있어서 그 곧은 것을 캘 수가 없습니다. 진우(陳宇)가 임하(林下)에서 죽은 뒤로부터 공론이라는 것이 아주 없어져서 보통 때에도 이야기가 시국 일에 미치면 눈짓을 하여 서로 쳐다보고 입을 다물어 벙어리가 됩니다. 그래서 부형이 경계하는 것 중에는 말을 삼가라는 것이 최고입니다. 소탈한 무리가 있어 혹시 잘못 말하기만 하면 옆의 사람이 서로 돌아보고 실색을 하여 문득 지적하여 근심거리를 만듭니다. 아, 사기의 저상됨이 이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권간의 무리가 어찌 번성해지고 방자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나라에 도가 있으면 위태한 말과 위태한 행실을 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고상하게 하고 말은 공손하게 하라.”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나라 다스리는 자가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히 하게 한다면 어찌 위태하지 않으랴.”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세 간흉이 뜻을 얻었을 때에 안팎의 신하가 쌓인 위세를 두려워하고 겁내어 남의 전답과 집을 빼앗아도 검색할 줄을 모르고 남의 비복을 취하여도 감히 변명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재물을 실어 들여 벼슬을 사고 물건을 바치어 총애를 사는데, 간혹 공정하고 청렴하여 권세가를 섬기지 않음으로써 세 간흉에게 거스름을 당하면, 비록 효행이 탁연하여 칭송할 만하여도 이미 표창(表彰)된 정문(旌門)도 보전하지 못합니다. 이것도 또한 권장하는 데 깊이 방해가 되고 풍속을 해치니, 사기가 꺾이는 것이 또한 여기에 관계가 있습니다. 사기의 지나친 것과 사심 없는 의논이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가상한 점이 있지마는 지나치게 투안(偸安)한 뒤로부터는 염치가 아주 없어지고 탐하고 더러운 것이 풍속이 되어서, 해가 생민에 미치고 나라의 근본이 단단하지 못하여 한없는 말류(末流)의 폐단을 다시 구제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사신의 명령을 받든 자가 장사치의 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중국에 가서 이익을 도모하여 중국 사람들에게 더럽게 보여 명예와 지조를 떨어뜨리고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고 나라를 더럽히니, 이것이 비록 한 귀퉁이의 일이지마는 나머지 세 귀퉁이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 등이 가만히 사기(士氣)에 관하여 근원을 추구하여 보건대, 기묘(己卯)의 과격(過激)함은 세도를 진작하는 일을 자임하여 병이 난 실수이고, 기묘 이후의 지나치게 투안에 빠진 것은 권간이 서로 이어 임금을 속인 데에서 생긴 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비록 모두 폐단은 있으나 만일 그 마음씀이 어느 것이 바르냐 거짓이냐를 캐어 본다면 시비는 분명하여 집니다. 또 소인으로서 극히 간악한 자는 평상시에는 음흉한 꾀가 총명을 속이려고 하지 않지마는 다른 때에는 간계를 가릴 수 없는 것이고, 군자로서 미숙한 사람은 지나친 행동이 없을 수 없으므로 비록 한때에는 질책을 당하지만 마침내는 만세에 이르도록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부질없이 기묘 사람의 과오만 책하고 권간이 기묘 사람을 무함한 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시비에 있어서 어찌 되겠습니까. 대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심정(沈貞)과 이항(李沆)은 전에 처벌되고 세 간흉도 후에 이어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온 나라의 혈기있는 자가 기뻐 날뛰며 서로 경하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묘년에 죽음을 당한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불쌍히 여기는 탄식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지하의 썪은 뼈에게 아첨하고 사사로운 마음을 두어서 그렇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모든 일을 권간의 예로써 본다면 한때의 공론이 정당한 것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충신과 간흉의 자취가 장차 후세에 혼동이 되어서 시비가 어느 편을 따라야 할지 모르므로, 권간이 스스로 서로 공격할 것이니, 위태하고 망하는 기미가 어찌 또 이로부터 싹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적에 서한(西漢)의 습속(習俗)은 그 폐단이 지나치게 투안(偸安)하였는데, 망할 적에는 왕망(王莽)이 신기(神器)를 도적질하여도 천하가 숨을 죽이어 감히 말을 못 하였고, 동한(東漢)의 습속은 그 폐단이 격(激)에 지나쳤으나, 쇠할 적에는 조조(曹操)의 간사함으로 나라를 차지하고자 하였지만 마침내 신하의 칭호를 버리지 못한 것은 당시의 기절(氣節)이 오히려 아래에서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투(偸)와 격(激)의 환란이 예전에 있어서도 감계(鑑戒)할 수 있으니, 기묘 사람의 본심을 구하고 권간의 흉한 꾀를 살피어 사정(邪正)을 정하고 시비를 밝히고 사기를 진작시켜 과격하지도 않고 투안하지도 않은 아름다움이 있게 하는 것은, 특별히 전하의 한 번 생각하는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전하의 마음에 진실로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공부가 있어 본체의 밝으심이 거울과 평평한 저울이 공평한 것처럼 되신다면 고운 것과 흉한 것이 도피할 수가 없고, 가볍고 무거운 것이 저절로 차이가 나게 되고, 사정과 시비가 정확하게 상고될 수 있어서 임용하는 즈음에 취하고 버리는 것이 마땅함을 얻고, 조정 사이에 충(忠)과 간(奸)이 저절로 분별되어 전날에 권간을 추종하던 무리들로서 비록 법망에서 빠진 찌꺼기일지라도 또한 마땅히 향할 바를 알아서 장차 세상을 따라서 변화할 것입니다. 사(邪)와 정(正)이 분별되면 시비가 혼동될 근심이 없고, 조정이 화합하여 하나가 되면, 사류가 분립하는 근심이 없어서 국맥(國脈)이 연장되고 사기가 진작되는 것이 장차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전날에 권간이 삼경(三經)의 설(說)을 주장하고 시비를 혼동하여 들고 일어난 것은 성상의 총명을 은폐하고 현혹시키며 조정을 억눌러 흉한 꾀를 도모하려는 술책이었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권간의 흉계를 통촉하시고 시비의 표적을 밝게 살피어 사정을 분별하고 조정을 화합시키어 오늘날의 사기를 과격에 병들지 않게 하고 과투(過偸)로 패하지 않게 하소서. 그 요결(要訣)은 다만 전하께서 더욱 성학(聖學)을 힘써서 뜻이 진실하여지고 습성이 바르게 됨으로써 편벽된 사정을 끊어 없애고 본체의 밝음을 보존하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신 등은 모두 보잘것없는 자로서 부질없이 나라의 녹을 소비하면서 전하의 천지사방에 두루 베푸시는 화육(化育) 가운데에서 유영(游泳)한 지가 하루나 한 달이 아닙니다. 평소에 청사(靑史)를 목격할 때 간사한 무리들이 인군을 속인 것을 보고 오히려 책을 덮어 놓고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스스로 이 세상에서 보았는데야 어떻겠습니까. 마침 여론을 수집하시는 때를 당하여 지식이 얕은 것을 스스로 혐의하지 않고 문득 한 가지 얻은 어리석음을 바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유의하옵소서.
-윗글은 생원(生員) 윤희성(尹希聖)이 지은 것인데 뒤에 장원에 뽑히어 벼슬이 이조 좌랑에 이르렀다. 칠림(漆林)ㆍ윤수(尹壽)의 아들이다.-
중종에게 정암ㆍ충암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소[上中宗請復靜庵冲庵官爵疏] 경자 신축 연간
엎드려 생각하건대, 인군의 마음은 공평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편벽된 것보다 더 병되는 것이 없으니, 공평하면 밝은 것이 생기고 편벽되면 어둠이 생깁니다. 밝으면 천하의 일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어두우면 천하의 일이 가려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군이 진실로 능히 공정하고 밝으면 일의 시비와 사람의 사정(邪正)에 있어서 기미가 비록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능히 알고 능히 살피지만 혹시라도 편벽되고 어두우면 일의 시비와 사람의 사정에 있어서 형적이 이미 나타났더라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천하 국가가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지는 것과 군자ㆍ소인이 한 번 사라지고 한 번 나타나는 것이, 어찌 임금의 마음이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과 밝고 밝지 못함으로 말미암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인군의 마음이 본래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한 번 편벽된 데서 실수하면 공평하지 못하고, 본래 밝지 못한 것이 아니지만 한 번 어두운 데 들어가면 밝아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편벽되면 한 가지에만 편벽될 뿐이 아니라 일과 사람들에 대하여도 어두워집니다. 이렇게 된다면 시비가 어떻게 뒤바뀌지 않으며 사정이 어떻게 혼돈되지 않으며, 착한 말이 어디로부터 들어오며 착한 교화가 어디로 말미암아 나오겠습니까. 국맥이 날마다 깎이어도 오히려 그 그른 것을 고집하고 사기가 날마다 상실되어도 오히려 뉘우칠 줄을 알지 못하여, 마침내는 종사가 전복되고 국가가 패망한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군자는 임금이 공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소인은 그 편벽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군자는 임금이 밝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소인은 그 어두운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임금을 사랑하여 그 도를 행하려 하고 소인은 제 몸을 그르쳐서 그 이익을 이루려 합니다. 인군된 이는 한 마음의 근원을 공평하게 하여 편벽되고 집착된 것으로 하여금 해하지 못하게 하며, 한 마음의 근본을 밝히어 어두운 것으로 하여금 이간질하지 못하게 하여 정도를 부식하고 간특한 것을 뽑아 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공평하여지면 오직 한 가지에만 공평한 것이 아니라 일과 사람들에 공평하여지고, 밝아지면 한 가지에만 밝은 것이 아니라 일과 사람들에게 밝으니, 이렇게 되면 시비가 이때문에 정하여지고 사정이 이때문에 변별되고, 한 사람을 포상(褒賞)하면 만 사람에게 권하게 되고 한 사람을 징계하면 백 사람이 힘쓰게 되어, 공공한 의논은 사사 의논을 이기고 양강(陽剛)한 것은 음유(陰柔)한 것을 눌러서 원기는 더욱 융성하고 국운은 더욱 장원하여 질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심히 높고 학문의 힘이 또 지극하여, 다스림을 원하는 마음은 소의한식(宵衣旰食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보다 간절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은 배고프고 목마름에 먹고 마시는 것보다 급합니다. 지난번에 조광조(趙光祖)의 무리가 대대로 흔하지 않은 예우(禮遇)에 감격하여 비상한 은총에 보답하고자 생각하였으니, 전하를 인도한 것을 보면 학문은 정일(精一)의 학문이요 사업은 요순(堯舜)의 사업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정치를 새롭게 하려면 반드시 경장(更張)하는 도(道)가 있어야 하는데 탐하고 더러운 것이 풍속이 되었으므로 개혁하기를 생각하여 염치를 숭상하였고, 투안(偸安)하고 위미(萎靡)한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진흥시키기를 생각하여 절의를 숭상하였고, 촌락사이의 작은 백성들이 예로 사양하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향약(鄕約)의 예전 법을 행하였고, 과거 이외에 재주와 준걸이 혹 등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현량(賢良)을 천거하는 예전 제도를 회복하였습니다. 집마다 효제(孝悌)의 행실을 두텁게 하고 선비는 의리의 학문을 익히어 착한 데로 향하고, 도(道)로 나가는 자가 발꿈치를 접하여 성하게 일어나고 풍기를 상하게 하고 습속을 망치는 자가 자취를 감추어 가만히 사라졌습니다. 백성의 어른이 된 자는 맑게 근신함을 임무로 삼고, 베고 죽이는 것으로 일을 삼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는 자는 공사를 받드는 것으로 직책을 삼고, 자기 개인을 살찌게 하는 것으로 꾀를 하지 않으며, 삼공 육경의 문에는 뇌물을 바치는 길이 끊어지고, 사대부 사이에는 벼슬을 구하여 다투어 경쟁하는 풍기가 종식되었습니다. 한 착함과 한 능함이 모두 그 적시(適時)에 나타나고 폐단과 작은 결점이 모두 그 묵은 것을 고쳐서 급급하여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고 면려하여 조금도 게으른 것이 없었으니, 가히 나라만 생각할 뿐 집은 잊어버리고 공사에 따르며 사사는 잊고 임금에게 따르며 몸은 잊고 뜻은 이윤(伊尹)ㆍ주공(周公)을 따른 것입니다. 다만 세상을 경험한 것이 오래지 못하고, 근심에 대비하는 것이 미숙하여 ‘반드시 한 세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모르고, ‘빨리 하면 통달하지 못한다’는 경계에 어두워서 점점 물젖듯 하고 오랜 시일을 거쳐 태평의 정치를 이루지 못하고, 곧 시급히 바람 움직이듯 하는 교화와 화하고 빛나는 풍속을 가져오려 하였습니다. 때문에 옛스럽고 일반적인 것에 습관이 된 자는 괴이하다고 지목하고, 두루뭉실한 데 습관이 된 자는 꾸미고 과격하다고 비방하며, 전날에 자리만 차지하고 밥만 먹던 자도 능히 그 녹과 지위를 보전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혹시 용납되지 못하자 질투하는 마음을 품고, 당시에 아양부려 웃고 유순한 말을 하는 자가 진취하는 데는 빨랐는데 지금 와서 혹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해칠 꾀를 품어서,여럿이 얽는 것이 비단같이 짜여지고[萋斐成錦] 여럿이 불어대는 것이 키질하는 것같아[哆侈成箕] 성상께서의 허락이 한 번 대궐로부터 옮겨지자 북문이 갑자기 밤중에 열리어 남곤ㆍ심정의 무리가 호리(狐狸)의 아양을 부리고 사훼(蛇蚖)의 해를 방자하게 해서, 착한 것을 해치고 바른 것을 더럽히는 말에 그 교묘함을 다하고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정상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어서, 조정의 위아래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한때의 충성되고 곧은 선비가 모조리 참소하고 해치는 손아귀에 빠졌습니다. 신 등이 말이 여기에 미치자 통곡을 억제치 못하겠습니다. 만일 노성(老成)한 이가 머리를 두드리며 구제하지 않았던들 사림은 씨가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 등은 알지 못하거니와 광조가 무슨 죄가 있기에 전하께서 갑자기 드러내어 죽이셨습니까. 처음에 맡겼을 때에는 의심하지 않으시고 믿어서 두 가지 생각을 가지지 않으셔서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이 없고 계교를 좇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성탕(成湯)이 이윤(伊尹)을 대접하는 것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대접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나중에는 대접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보기를 독약같이 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중한 법에 처하고 마니, 어찌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의심하는 것뿐이겠습니까. 이것으로 본다면 전하의 마음이 처음에는 비록 공평하고 밝았지만 뒤에는 편벽되고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곤ㆍ심정은 광조가 위엄과 권세를 제 마음대로 한다고 훼방하면 전하께서는 실지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광조가 예전 법을 변경시키고 어지럽힌다고 훼방하면 전하께서는 실지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광조가 노성한 사람을 배척한다고 헐뜯으면 전하께서는 당연한 것으로 의심하고, 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서로 불어난다고 헐뜯으면 전하께서는 당연한 것으로 믿어 여우처럼 의심하는 것이 이미 마음에 뿌리 박혔으니, 전하께서 광조의무리에게 아끼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죽이고 또 죽이어도 전혀 뉘우치지 않은 것입니다. 전하께서 광조가 과격한 폐단이 없지 않다고 한다면 광조는 공동 책임을 사양하지 못할 것이나, 전하께서 광조가 실지로 이런 몇 가지 일을 했다고 한다면 어찌 광조의 진정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광조의 임금께 충성하는 마음과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은 밝기가 일월 같고 굳기는 금석 같아서 재주가 있으면 반드시 뽑으니 형적은 복을 누리는 것 같지만 실상 그런 것이 아니요, 악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규탄하니 형적은 세력을 부리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어서, 소인이 권병(權柄)을 오로지하고 세력을 빙자하여 제게 붙는 자는 드러내 쓰고 제게 배치되는 자는 내쫓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는 다행히 이것으로 광조를 의심하지는 마소서. 광조가 마음을 세운 것이 심히 높고 이치를 살피기를 깊고 밝게 하여 왕도(王道)를 귀히 여기고 패술(霸術)을 천하게 여기어, 제도가 옛 도리에 합하는 것이 있으면 때의 마땅한 것을 돌아보지 않고 회복하고, 법이 백성에게 편치 못한 것이 있으면 예전 법이라고 해서 반드시 좇지 않았으니, 형적은 비록 예전 것을 고친 것 같으나 실상은 제왕의 물려준 법을 좇은 것이니, 소인이 사사로운 뜻과 자기 소견으로 새 법을 만들어 나라의 형전(刑典)을 문란시키고 백성의 이목을 어지럽히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행히 이것으로써 광조를 의심하지는 마십시오. 광조는 남의 착한 것을 좋아하기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같이 하고, 남의 재주를 용납하기를 자기가 가진 것같이 하였으니, 그때를 당하여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은 비록 초야 가운데 있더라도 반드시 천거하여 끌어낼 계책을 생각하였거늘 하물며 노성한 오래된 신하들에 대해서야 어떻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흐름에 휩쓸리고 더러운데 합하고, 구차하게 용납하고 머리를 비비며 나오고 훼방도 없고 명예도 없고, 떼로 나오고 떼로 물러나고 나이 늙었어도 덕이 없고, 벼슬이 높아도 명망이 없는 자가 모두 노성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광조의 배척하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까. 소인이 나라 정사를 오로지하려 하여 원로와 석학(碩學)들을 손도 놀리지 못하게 하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행히 이것으로 광조를 의심하지는 마십시오. 광조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공평하고 바르고 뜻을 세운 것이 곧고 규칙적이며 담담하기가 물과 같고, 담박하여 사정이 없으나 다만 군자는 군자와 동류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몸을 닦음에 있어서는 도를 같이하여 서로 돕고, 그것으로 나라를 섬김에 있어서는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구제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배반하지 않고 죽든지 살든지 서로 떠나지 않았으니, 아끼는 것은 명절(名節)이라 이익과 녹으로 서로 편당을 짓지 않았으며, 행하는 것은 충성과 신의라 훼방으로 서로 넘어뜨리려 하지 않았으니, 한 때의 바른 사람과 곧은 선비가 과연 광조의 친구 아닌 이가 없었는데 모두가 나라를 근심하는 무리였습니다. 소인이 자기의 당을 만들려고 나쁜 사람들을 배치하여 서로 소리와 세력을 부채질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행히 이것으로 광조를 의심하지는 마소서. 기묘 사람들이 군자가 많다고 일컫는데 광조가 가장 우수하여 과거에 오르지 않았을 때로부터 성리(性理)의 학문에 뜻을 날카롭게 하고, 성현의 사업에 마음을 두어서 연구의 정함과 실천의 독실함이 몸에 배고 마음에 터득하여 안과 밖이 서로 길러지고 겉과 속이 함께 바르게 되어 한 말과 한 행실이 도에 어그러지지 않고, 한 번 움직임과 한 번 고요함이 모두 의를 주장하여 강하고 큰 기운은 이미 몸에 충만하였고, 명예와 이록(利祿)의 사념(私念)은 마음에 걸치지도 않았습니다. 하물며 전하가 다스림을 도모하는 날을 당하여 그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성군의 교화를 돕고자 하는 것이 마땅히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살펴보건대, 반드시 전하의 간하는 것 좇기를 물 흐르듯 하는 아름다움과 착한 것을 좋아하는 정성을 믿고서 감히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어찌 전하께서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데 광조가 핍박하고 재촉한 것이겠습니까. 죽음을 주라는 명령이 한번 내리자 광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조금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광조는 이미 전하께 배반함이 없거늘 전하는 홀로 어찌 광조를 버리십니까. 김정(金淨)과 기준(奇遵)은 모두 충성되고 곧은 말을 하는 선비로서 함께 무거운 화에 연좌되었으니, 남곤ㆍ심정이 김정ㆍ기준에게 죄를 가하려 하면 어찌 할 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겠습니까. 김정과 기준이 모친과 서로 떨어져 있었는데 마음으로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 김정은 그 어머니를 본 뒤에 죽고자 하였고, 기준은 그 어머니가 있는 곳을 바라본 뒤에 죽고자 하여 말미를 빈 것이 하루 동안밖에 되지 않는데 그 고을 수령은 그때의 여론을 탐지하여 거짓으로 고하고, 남곤ㆍ심정은 그 죄를 모함하여 교묘하게 꾸며 드디어 망명(亡命)한 것으로써 두 사람을 얽었으니, 참으로 망명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스스로 돌아올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분명한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만약 그 일을 분명히 아셨다면 또한 허물을 보고 어진 것을 알아서 그 정상이 용서될 만도 하였을 것입니다. 소인 무리들이 요로를 차지하여 막고 가리는 것이 바야흐로 극도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간신의 기망하는 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닙니까. 남곤ㆍ심정의 무리가 모두 간사한 중에도 남곤이 가장 무상합니다. 다행히 문묵(文墨)의 재주로 대제학의 중한 책임에 있게 되어 속으로는 가만히 해치는 흉계를 가지고 밖으로는 순종하는 태도를 지어서 거짓 천거하여 이끄는 체하여 사림에게 예쁘게 보이려 하였으니, 이것이 가충(賈充)이 임개(任愷)를 충성스럽고 곧다고 천거하고서 다시 배척하는 것과 이봉길(李逢吉)이 이신(李紳)을 풍헌(風憲)에 천거하였지만 실상은 배척한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간사하고 아첨하는 교태(巧態)가 공론의 천대를 당하고, 선을 둘러서 꾸미는 술책이 밝은 눈에 드러나자 절치부심하여 날마다 중상하고 해하기를 생각하여 가만히 홍경주와 결탁하여 궁내의 원조를 만들어 착한 사람을 해칠 계교를 꾸몄으니, 곧 석현(石顯)이 사고(史高)를 인연하여 소망지(蕭望之)를 죽인 꾀요, 이임보(李林甫)가 혜비(惠妣)의 원조를 얻어서 장구령(張九齡)을 무함한 술책입니다. 밝은 성군을 미혹시키지 못하고 교묘한 말이 쓰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자 거짓 참설(讖說)을 칭탁하여 깊이 성상(聖上)의 총명을 흔들어 놓았으니, 조정(祖珽)이 백승(百升)의 동요(童謠)로 곡률광(斛律光)을 중상하고 이봉길(李逢吉)이 비의(緋衣)의 설(說)로 배도(裴度)를 얽은 것보다 더 심합니다. 성학(聖學)이 고명하여지면 참과 거짓을 속일 수 없을 것을 계산하여 경연(經筵) 위에서 확약하여 의논하지 말자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장포(張布)가 오왕(吳王)의 호학(好學)하는 것을 훼방하고 구사량(仇士良)이 인군에게 글을 읽지 못하게 한 것과 똑같습니다. 자고로 소인은 각각 한 가지에만 교묘한 것인데, 남곤은 겸하였습니다. 제 개인 의견으로 성수종(成守琮)의 급제를 빼앗은 것에 이르러서는 조정을 우롱하는 것이 어린아이 보듯 한 것뿐이 아닙니다. 신 등의 소견으로 본다면 정직하기가 광조 같은 이가 없는데 전하께서 알지 못하셨고, 음특하고 간사하기가 남곤 같은 사람이 없는데 전하께서 깨닫지 못하셨으니, 장차 어떻게 일국의 시비를 가리시고 조정의 어질고 간사함을 분별하사 선비의 습관이 날로 바르게 되고 백성의 풍속이 날로 두터워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뒤로부터 투안하고 방탕하는 풍습이 길러지고 우유부단한 습관이 앉아서 이루어져, 검속(檢束)하는 것으로 화의 근본을 삼고 소학(小學)으로 거짓 학문을 삼아 간혹 말이 방정(方正)하고 행실이 곧은 자가 있으면 반드시 떼를 지어 능멸하고 뭇사람이 무시하여 반드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하는 자는 게을러지고 악한 일을 하는 자는 방자하여져서 몸은 꾀하되 나라는 꾀하지 않고 이익은 따르되 의리는 따르지 않아서, 이륜(彝倫)이 거꾸로 놓이고 강상(綱常)이 무너져서 일 년 동안에 자식이 아비를 죽인 것이 세 사람이요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종이 상전을 죽이고 동기간에 서로 죽인 것은 이루 셀 수가 없으니, 이러고서야 위태하고 망하는 것이 어찌 이르지 않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전후의 간흉들이 나라의 명맥을 좀먹고 총명을 가리어도 전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하늘 운수가 돌기를 좋아하여 성상의 마음이 한 번 돌이켜지자 심정과 이항이 죽음을 당하였고, 세 간흉이 뒤를 이어 죽고 기묘 사람들이 서로 연하여 등용되어 함께 나라 정사를 다스리어 정치의 교화를 도모하는데, 광조만이 홀로 우로(雨露)의 은택을 입지 못하고, 남곤만이 홀로 부월(鈇鉞)의 베임을 받지 않았으니, 공론이 분하고 답답하여 오랠수록 더욱 격동합니다. 한 나라가 모두 전하께서 시비를 결정하여 인심을 쾌하게 하는 것을 바라는데 지금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니, 앎이 있는 선비로 누가 한심낙담하여 전하께 유감이 없겠습니까. 근자에 시종(侍從)의 소장(疏狀)과 대간의 차자가 가히 한때의 공론을 다하였다 하겠는데, 전하께서 굳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도리어 광조더러 시초에 난을 열어 놓았다 하니, 광조가 그 난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옛적에 위징(魏徵)이 정륜(正倫)과 후군집(侯君集)을 당 태종(唐太宗)에게 천거하였는데, 위징이 죽은 뒤에 정륜은 죄로 쫓겨나고 군집은 반란을 꾀하였으므로, 태종이 드디어 당파를 두둔한 것으로 의심하여 위징의 비를 넘어뜨렸으니, 전하께서 광조를 의심하는 것이 또한 당 태종이 위징을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다른 날에, 요동(遼東)을 정벌한 뉘우침이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홀로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인군의 마음이 편벽되게 어두워지면 군자를 가리켜 소인이라 하고 소인을 군자라 하니 비록 충성된 말과 정직한 의논이 있으나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이하는 없어졌다 모년(某年) 모사(某司)에서 올린 것인지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 알지 못하니, 이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가정 을사 춘 태학생 등 상 인종 소(嘉靖乙巳春太學生等上仁宗疏)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비의 풍습이 국가에 대하여 관계되는 것이 중대합니다. 선비의 풍습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에 따라서 국가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이 판단됩니다. 선비의 풍습이 바르면 향하여 나가는 것이 정하여져서 국가가 다스려지고, 선비의 풍습이 바르지 못하면 향하여 나가는 것이 정하여지지 않아서 국가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인군된 이가 그 다스려지는 방도를 생각하고 그 어지러워지는 원인을 막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방법은 또한 인군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혀 향하여 나갈 길을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그런 뒤에라야 아래에 있는 사람이 또한 보고 느끼는 것이 있어서 나갈 바를 알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세상이 타락되고 풍속이 더러워져서 인정이 범상한 것을 좇고 시속을 따라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당시 사람들이 눈으로 본 바와 귀로 들은 것을 활용하여 나아가고 물러가게 함으로써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힌 연후에야 사람들이 또한 좋아하고 싫어하는 실상을 알아서 의지하여 돌아갈 곳을 알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선비의 풍습은 안일에 빠진 지가 오랩니다. 그 안일에 빠진 원인을 궁구하여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호걸의 재주로써 조광조(趙光祖)는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현군과 권신이 만나는 때를 당하여 우리 선왕이 다스림을 구하는 성의를 보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바치어 지치(至治)에 이르기를 기약하였는데, 국가가 불행하여 간사한 무리가 화를 얽어서 임금을 사랑하는 신하와 나라를 근심하는 선비로 하여금 모두 뜻만 품고 길이 하직하여 구천(九泉)에서 한을 품고 있게 하였으니, 뜻이 있는 선비로 누가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두드리고 눈물을 흘리다가 피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광조의 학문의 바름은 그 전수받은 유래가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개연히 도를 구할 뜻이 있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수업하였는데, 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우고 종직의 학문은 그 아버지 사예(司藝) 신(臣) 숙자(叔滋)에게서 전하여 받았고, 숙자의 학문은 고려 신하 길재(吉再)에게서 전하였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얻었는데, 정몽주의 학문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가 되었으니, 학문의 연원이 이와 같습니다. 그 평소에 사람 대접하기를 온화한 빛으로써 하고, 사물을 대하기를 정성으로써 하고, 부모를 섬기는 데는 그 효도를 다하고, 형제간에 있어서는 우애를 극진히 하였고, 궁리하는 것이 더욱 정밀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욱 독실하여서 큰 근본이 이미 서자, 공리(功利)의 설이 흔들리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을 슬퍼하고 옛것을 사모하며, 왕도를 귀히 여기고 패도를 천히 여기는 공평하고 바른 마음과 방정한 행실이 금석(金石)보다 불변하여 신명(神明)으로 가히 바로잡을 수 있었으니, 그 몸소 행하는 바른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선왕께 우대를 받자, 선왕의 선비를 사랑하는 마음에 감격하고, 선왕의 어진 이를 대접하는 성의를 기뻐하여 요순 시대의 고요(皐陶)ㆍ직(稷)ㆍ설(契)과 같은 현신의 사업을 자신의 임무로 알고 이제(二帝)ㆍ삼왕(三王)의 다스림을 그 임금께 희구해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한갓 그 임금이 있는 것만 알고 그 몸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며, 한갓 나라가 있는 것만 알지 집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 무릇 옛적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정사가 오늘에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뢰지 않은 것이 없고, 무릇 오늘날의 어진 사람 좋은 선비로서, 때에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거하여 쓰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옛적에는 사람이 낳은 지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갔으므로 처음 배우는 자로 하여금 배우게 하였고, 옛적에 삼물(三物)ㆍ팔형(八刑)의 제도가 있었으므로,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의 법으로 행하게 하였고, 옛적에는 현량(賢良)ㆍ방정(方正)ㆍ직언(直言)ㆍ극간(極諫)의 과(科)가 있었으므로 천거하는 고시(考試)를 제정하였으니, 임금을 섬기는 정성과 시정하는 방법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 몸소 행하는 바른 것이 이미 이러하였고, 시정하는 방법이 또 이러하여 선왕의 총애가 더욱 지극해지니, 귀역(鬼蜮)과 같은 간사하고 질투하는 무리들이 장차 태양 아래에 뜻을 방자히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석(沙石)을 머금고 기노(機弩)를 베풀어 두었다가기필코 그 틈을 엿보아 쏘려 하였으니, 그것을 맞지 않은 자가 적은 것입니다. 남곤ㆍ심정ㆍ이항의 죄를 이루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 남곤은 질투하고 간사한 괴수로서 문묵(文墨)의 조그만 재주로써 꾸미었고, 심정ㆍ이항은 탐하고 독하며 흉하고 간교한 무리로써 남곤의 턱으로 가리키는 것을 좇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공론이 더욱 확대되고 시비가 더욱 분명하여져서, 현(賢)과 사(邪)의 형세가 둘이 병립하지 못할 것을 보고는 서로 배척 방축할 술책을 꾸며, 떳떳하지 못한 참서(讖書)와 컴컴한 말을 만들어서 임금의 총명을 의혹시키고, 밤중에 일을 일으켜 가만히 북문으로 새어 들어가서 경동하였으니, 구중(九重)이나 되는 궐문에, 아랫사람의 정을 품달하기 어렵고 일이 졸지에 일어났으니 진정과 허위를 분별하기 어려웠습니다. 선왕이 부득이하여 구차하게 그 말을 좇았으니 처음에야 어찌 우리 선왕의 뜻이었겠습니까. 이때를 당하여 태학의 모든 생도들이 궐문을 밀치고 상소로 항쟁하여 대궐 뜰에서 통곡하고 금부에서 갇히기를 다투었으니 광조의 죄는 명목이 없고 사림의 울분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다행히 선왕의 명성(明聖)함을 힘입어서 특별히 경감하는 조항을 따라 명령하기를, “너희들이 모두 시종의 신하로서 위와 아래가 마음을 함께하여 기필코 지극한 다스림을 보려하였으니,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년 이래로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과오가 된 듯하여 사람의 마음에 불평을 샀으므로 부득이 죄를 주는 것이다. 나의 마음인들 또한 어찌 편하겠느냐.” 하였으니, 그렇다면 광조를 죄준 것이 어찌 선왕의 뜻이겠습니까. 이 뒤로부터 음험한 사람들이 당을 만들어서 요직에다 채우고, 거짓 학문이니, 괴이하고 과격하니,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일 벌이기를 좋아하느니, 예전 법을 변경하느니 하고 지목하여, 무릇 한때의 어진 사대부들을 모조리 호미로 뽑듯 낫으로 베듯 하였습니다. 아, 이 몇 가지 말이 어찌 고금 간당들의 어진 선비를 밀쳐 빠뜨리는 한결같은 함정이 아니겠습니까. 기이한 것을 숭상하느니, 일을 좋아하느니, 예전 법을 변경하느니 하는 비방은 사마광(司馬光) 같은 어짊으로도 면하지 못할 것이며, 괴이하고 과격하다느니 거짓 학문이라느니 하는 비방은 주희(朱熹) 같은 어짊으로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같은 말세에 간사한 무리로써 기탄할 것이 없는 자들이 어진 선비의 죄를 얽으려면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우리 선왕께서 광조의 무죄함을 추후에 생각하사 장차 거두어 서용(敍用)할 계책을 세우고자 하니, 남곤ㆍ심정ㆍ이항의 무리가 속으로 윤세정(尹世貞)ㆍ황계옥(黃季沃) 등 무뢰배 두어 사람을 사주하여 글을 올려 모함하고, 의논하여 선비들의 공론이라고 칭탁하여 중한 법에 처치하였으니, 세정ㆍ계옥의 세상에 드문 무소(誣疏)는 진실로 서희(徐熹)가 글을 올려 주희를 베자고 간청한 것과 다름이 없지마는, 당시 간인(奸人) 중에는 사심보(謝深甫)와 같이 편지를 땅에 던진 자도 없었으니 그 괴팍하고 잔인한 것이 또한 너무 심하였습니다. 신 등이 엎드려 듣건대 사형에 처하자는 결의가 한번 결정되자, 길가는 사람도 눈물을 흘리며 목을 놓아 울어서 그 무죄한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광조의 어짊은 사람들에게 깊이 믿어졌던 것입니다. 그가 죽을 때에 조용히 얼굴빛마저 찌푸리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 근심하듯 하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밝은 해가 이 땅에 나타나면 밝게 단충(丹衷)을 비치리라.” 하였으니, 광조의 충성은 천지가 함께 조감(照鑑)하는 바입니다. 애석하게도, 광조의 어짊으로 선왕의 어짊을 만났으나 마침내 간사하고 음험한 무리의 모함을 당하여 한을 안고 땅 속으로 들어갔으니, 신 등이 매양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을 하게 됩니다. 무릇 선왕의 밝음으로써 어찌 광조가 털끝 만큼도 사심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특별히 남곤ㆍ심정 무리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급하여 이런 부득이한 조치를 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선왕의 뜻이었겠습니까. 아, 신하와 백성이 복이 없어서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갑자기 정호(鼎湖)의 애통이 있었으니, 미처 광조를 추복(追復)하지 못한 것이 선왕의 남긴 뉘우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책임이 도리어 전하에게 있지 않습니까. 전하의 정성과 효도가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선왕께서 친애하던 자를 사랑하고, 존문(存問)하던 자를 공경하여, 무릇 뜻을 계승하고 일을 따르는 것을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으시니, 홀로 광조에게만 선왕의 마음을 미루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선왕 말년에 위로는 대간과 시종이 아래로는 포의(布衣)와 위대(韋帶)의 선비가 소장을 번갈아 다투어 올려 광조의 죄 없는 것을 밝히려 한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상소 가운데에 거의 모두가 궤격(詭激)하다느니 일을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을 인습(因襲)하여 썼으니, 이것이 어찌 족히 광조를 안다 하겠습니까. 광조의 행신(行身)ㆍ처사(處事)가 공정하고 바른데, 이를 가리켜 궤격하다느니 일을 좋아한다느니 한 것은 남곤ㆍ심정ㆍ이항 그 사람들입니다. 광조의 뜻을 밝히려고 하면서도 도리어 광조를 참소한 말을 습용(襲用)하는 것은 또한 얕게 광조를 아는 것입니다. 그 예전 법을 변경하였다는 것은 신 등이 변명을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법이 세워지면 반드시 폐단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 때에도 또한 손익(損益)의 제도가 있었으니, 덜고 보태고 하는 것은 그때 그때 적당하게 하여야 하나 고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삼강 오륜뿐입니다. 광조가 고친 것이 삼강입니까, 오륜입니까. 한(漢) 나라 선비 동중서(董仲舒)의 말에, “정치를 하는데 행하여지지 않거든 심한 것은 반드시 변경하여 변화시켜야 한다.” 하였습니다. 선왕 초년에 연산조의 남은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었으니 어찌 맞게 고칠 때가 아닙니까. 그 고칠 때를 당하여 참으로 성인의 신화(神化)가 아니면 그 교조(敎條)와 법령의 시행이 어찌 흔적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만일 흔적이 있다면 보고 듣는 데서 익혀져 보통 사람들이 누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절대로 변경ㆍ교화했다고 해서 광조를 나쁘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아, 질투 원망하는 해(害)와 번지르르한 말은 만번 죽어도 갚기가 어려운데, 심정ㆍ이항은 비록 이미 죽음을 당했으나 그 현인을 질투한 죄를 밝게 밝히지 못하였으니, 그에 해당한 죄로 벌을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남곤은 간흉의 괴수로서 영화를 누리고 제 명에 죽었으니, 권장하고 징계하는 도(道)가 과연 어디 있습니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현인은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화에 빠지고, 현인을 질투하고 임금을 속인 간흉은 도리어 부귀의 영화를 누렸으니 어찌 반대가 아닙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광조의 지정(至情)을 살피시고 선왕의 남긴 뉘우침을 생각하시와 제사를 지내도록 해 주시고 벼슬을 추증하여 주시기를 선왕께서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에게 한 것과 똑같이 하신다면 사림(士林)에 있어서뿐 아니라 국가에 있어서도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아, 광조를 뒤늦게나마 포장(褒獎)하는 것은 지하에 있는 썩은 해골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요, 또 신 등이 잊지 못하는 것은 광조가 실상 우리 선비의 종장(宗匠)이기 때문입니다. 광조가 죽은 뒤로는 선비들의 기운이 지치고 풀린 지가 오래고 선비들의 습성이 박하여진 것이 심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정직한 기풍이 없어지고 겸양의 도를 잃어버리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것이 습관이 되고, 탐하고 더러운 것이 풍기를 이루어 모두 엄벙덤벙하는 것으로 귀한 것을 삼고, 연약한 것으로 어진 것을 삼으며, 고상한 말을 하는 자를 미쳤다 하고, 정당한 행실을 하는 자를 거짓이라 하여, 아첨하고 간사한 버릇이서경(西京)의 말년보다 더 심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강하고 굳세고 바르고 곧아서 도를 지키고 이치를 따르는 선비가 그 사이에 나온다면, 위학(僞學)의 무리로 이름을 짓고 괴이(詭異)하다는 비방을 가하여 수십 년 동안에 이 몇 개의 글자로써 현인과 군자를 금고(禁錮)시키어, 반드시 그 몸을 용납할 수 없게 만들고야 마니, 이것이 어찌 태평성세의 일이라고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전하께서 새로 하늘의 명령을 이으시니 사방의 백성들이 목을 늘이고 눈을 비비며 새로운 정치를 보고 있으니, 진실로 이때에 이르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게 나타내지 않는다면, 간사한 무리가 반드시 장차 갓을 털며 서로 경하(慶賀)하고 착한 것을 하는 자는 게을러질 것입니다. 아, 당시의 선비로서 죄 없이 잘못 걸린 자가 이루 셀 수 없지만 김정(金淨)ㆍ기준(奇遵)의 죽음 같은 것이 가장 억울한 것입니다. 정과 준이 모두 광조와 함께 뜻이 같고 도가 합쳐져 힘을 합하여 다스림을 도왔는데, 화가 일어나자 정은 금산으로 귀양가고, 준은 아산으로 귀양갔습니다. 마음으로 반드시 죽을 줄을 알고 한 번 그 어머니와 함께 영결하기를 생각하고, 정이 고을 원에게 휴가를 빌어 보은(報恩)에 가서 그 어머니를 보고 돌아왔으니, 이것을 망명(亡命)이라 할 수 있습니까. 준의 어머니는 멀리 무장(茂長)에 떨어져 있으므로 가 뵙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고개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고, 옛사람이 기(屺)에 오른 뜻을 붙이고 한참만에 스스로 돌아왔으니, 이것도 망명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두 신하가 진실로 망명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스스로 돌아올 리가 있었겠습니까. 두 고을의 원이 남곤ㆍ심정의 뜻에 맞추고 아부하여 억지로 죄를 만들어서 무고하므로, 남곤ㆍ심정이 이에 다시 제멋대로 말하기를, “김정ㆍ기준이 꿈쩍하면 옛사람을 법받는다고 하면서 마침내는 임금의 명령을 위반하였으니 그 무리들의 하는 짓이 대개는 이와 같다.” 하여, 이것으로 광조에게 연루시키고 심한 자는 역적 모의를 하였다는 이름으로 광조에게 붙여 임금의 총명을 굳게 가리었으니,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자고로 소인은 교묘히 꾸미는 것이 못하는 짓이 없으니, 조여우(趙如愚)의 충성하고 곧음으로도 또한 꿈을 빌려 부험(符驗)을 삼아 역적질을 꾀하였다는 참소를 면치 못하여 원통하게 도중에서 죽었으니, 광조의 진정도 또한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어 한 번 씻어 주면, 오직 세 신하의 혼령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에서도 감격하여 울 뿐만 아니라, 선왕의 하늘에 있는 영령도 또한 전하가 능히 뜻을 계승하는 도를 다한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직을 회복하고 그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은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는 외형적인 일이고, 그 사람을 숭상하고 그 뜻을 높이는 것이 호오를 분명히 하는 실제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세 신하의 관직을 능히 회복하더라도 참으로 그 정리를 살피어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 뜻을 높이지 않는다면, 그 좋아하는 것이 이른바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히어,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향하여 나갈 곳을 알게 하려 한다 해도 그것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대학》에, “명령하는 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반하면 백성이 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차리십소서. 신 등이 뜻은 크고 행함은 없이 소홀하고 거칠어 외람되게 수선(首善)의 자리에 있으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마음에 강개(慷慨)한 것이 하루 한 달이 아닙니다. 대체로 학교라는 것은 예의로 서로 앞장을 서야 할 곳인데, 떼로 몰려 강학하는 자가 다만 과거와 이록(利祿)으로 선비의 사업을 삼고, 예의가 무슨 물건인지 학문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며, 만일 뜻 있는 선비가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고 경서를 안고 마음을 의논하는 자가 있으면, 떼를 지어 배척하고, 뭇사람이 비방하여 도학의 사기(邪氣)라고 눈짓하고, 궤격(詭激)의 남은 버릇이라고 손가락질하여 서로 괴이하게 여겨 웃으며 꺼리고 미워하니, 신 등이 몸소 친히 보고 울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연유를 추구하여 보면, 기묘의 화에서 연유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아, 위학(僞學)의 당이 한 번 금고(禁錮)되고 한 번 제거되자, 조씨(趙氏) 송(宋) 나라의 명맥이 차츰차츰 깎아 없어졌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의 은감(殷鑑)이 아닙니까. 신 등이 한갓 옛사람의 글만 읽고 멍청하게 나갈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까지 된 원인을 생각하면 광조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피를 쏟으며 말씀을 드리오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으로 인해 말을 버리는 것을 하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다행할지 모르겠습니다. 위는 생원(生員) 강유선(康惟善)이 지은 것.
인조(仁祖) 비망기(備忘記)에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천하의 모범된 자리에 있으면서 옛것을 좋아하고 시국을 의논하여 소장을 세 번이나 올렸는데 말이 간곡하고 의리가 곧으니 배운 것의 바름이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우리 선조(先朝)의 양육한 은택을 또한 상상할 수 있다. 말을 좇지 않는 것은 뜻이 있는 것이고, 또 태학(太學)은 비록 공론이 존재하는 곳이라고는 하나 시비를 정하는 것은 따로 조정에게 있다. 너희들이 시비를 확정하기를 기약하는 것은 제생들의 할 일이 아니다. 우선 물러가서 다시 생각하라.” 하였다.
무진 사월 부제학 박대립 직제학 노수진 등 소(戊辰四月副提學朴大立直提學盧守愼等疏)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기는 것을 성왕(聖王)은 급선무로 삼나니, 진유(眞儒)가 있어도 존경할 줄을 알지 못하면 성인의 도가 밝아지지 못하고 시비가 마침내 확정되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중종(中宗) 초년에 조광조가 세상에 드문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질로서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의 전함을 얻어, 도덕을 나타내고 밝혀 세상의 큰 선비가 되었고, 덕이 뛰어난 한 임금을 만나 충성과 정성을 다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교화를 밝히고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고, 중종이 또한 그 어짊을 알아서 말을 들어 주고 계교를 받아들여 좋은 보필(輔弼)로 삼았으니, 옛적 흥성한 세상의 다스림을 거의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신 남곤ㆍ심정ㆍ이항은 강함을 분하게 생각하고 자기들보다 나은 것을 꺼려, 교묘하게 흉한 꾀를 자아내어 홍경주와 결탁하여 불측한 말을 꾸며 임금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서, 마침내 조광조를 귀양보내어 죽이는 데 이르게 하였으니 다만 죄 없이 원통함을 품게 했을 뿐 아니라, 충성의 분노가 지하에서 수백 년 동안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국가의 원기가 여지없이 깎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림들이 분히 여기고 한탄하는 것이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그 뒤 50년 동안에 간사한 소인과 권세 있는 간신이 계속 권세를 잡아서 한 세상을 억눌러 제어하였으므로 사기가 꺾이고 공론이 막히어, 광조의 충의와 도덕으로서도 포장하는 특별한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였으니, 어찌 깊이 가슴 아픈 일이 아닙니까. 오직 다행히 전하께서 총명과 예지로써 사(邪)와 정(正)을 밝게 살피어 이미 광조의 어짊을 알았는데도 오히려 선왕이 한 일로 핑계하고, 공론이 격동하여도 오히려 어렵게 여기니, 신 등은 아마도 전하께서 실상 선왕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 합니다. 중종이 당초에 광조를 죄줄 때에 하교하기를 “너희들이 시종의 신하로서 본래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함께하여 지극한 다스림을 나타내려 하였으니 너희들 인물이 어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두 취할 만한 사람이다.” 하여, 잊지 못하는 뜻을 보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광조가 죄를 입은 것이 중종의 본심이 아니고 실상 권간의 압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년에 이르러 매우 뉘우치고 한하는 뜻이 있어서 광조와 동시에 추방된 사람들을 모두 거둬들여 재상의 반열에 두었고, 인종이 또한 선왕의 뜻을 알아서 명하여 관작을 회복하였으니, 선왕의 성스러운 뜻은 이것으로 인하여 의심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무슨 미안한 것이 있어서 쾌히 공론을 좇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일 큰 벼슬과 아름다운 시호를 주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게 보이면, 뜻을 계승하고 일을 따르는 큰 효도가 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왕위를 이은 처음에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하게 여기고 세상의 도의를 변하여 옮길 큰 기회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는 정신을 차리소서.
우응교 이담제(右應敎李湛製)
전교하기를 “조정 의논이 이와 같으니 추숭(追崇)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때에 대사간 백인걸(白仁傑), 사간 유희춘(柳希春)이 공자 사당에 배향하려 하는데 홍문관의 상소가 이와 같으므로 이렇게 명한 것이다.
[주-D001] 원개(元凱) :
옛날 중국 요 임금 적에 원(元) 자 이름 가진 8형제와 개(凱) 자 이름 가진 8형제가 모두 재주 있고 착한 선비여서 그 당시부터 팔원 팔개라는 말이 있어 왔다.
[주-D002] 염파(廉頗)ㆍ이목(李牧) :
두 사람은 모두 중국 전국시대의 조(趙) 나라 명장으로 이름 높은 사람들이다.
[주-D003] 당고(黨錮)를……던지는 화 :
예전 한(漢) 나라 말년에 선비들이 정대한 기풍과 준급한 이론으로 세상에 감사하고 어리석은 자들과 대립하였으므로, 정부에서는 그 선비들이 당파를 조직하고 과격한 행동을 방자스럽게 한다고 하여 모두 금고형(禁錮刑)에 처하였었다. 그 뒤 당(唐) 나라 말년에 역시 강직한 선비들이 정대한 이론으로 위정자들을 비난 공격하므로 권력을 잡은 흉한들이 그들을 모두 잡아서 황하(黃河)에 던져 죽이면서, “이놈들은 맑은 청류(淸流)이니 더러운 물을 먹여야 한다.” 하였다.
[주-D004] 여럿이……것 같아 :
이 두 문자는 모두가 여러 소인이 입을 모아서 참소(讒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여럿이 하는 말이 얽히고 얽혀서 비단 짜듯 하였고, 여럿의 입김이 모여서 키질하는 바람만하여진다는 뜻이다.
[주-D005] 노성(老成)한 이 :
이것은 정광필(鄭光弼)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때 조광조를 잡아들여서 당장 때려죽이려 하였던 것을 정광필이 수상(首相)으로 임금의 옷깃을 붙들어 가며 울고 말려서 겨우 당장 죽이는 것을 면하였다.
[주-D006] 조정(祖珽) :
저본에는 "조정지(祖挺之)"로 되어 있으나 오류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 삼물(三物)ㆍ팔형(八刑) :
삼물(三物)은 육덕(六德)ㆍ육행(六行)ㆍ육예(六藝)로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는 육덕이고,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은 육행이고,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는 육예이다. 팔형(八刑)은 불효(不孝)ㆍ불목(不睦)ㆍ불인(不婣)ㆍ부제(不弟)ㆍ불임(不任)ㆍ불휼(不恤)ㆍ조언(造言)ㆍ난민(亂民)의 형벌을 말한다.
[주-D008] 사석(沙石)을……두었다가 :
남을 해하려고 하는 자가 가만히 모래와 돌을 가지고 있다가 모르는 결에 홱 뿌린다든가 쇠뇌[弩]에 화살을 재어 가지고 모르는 결에 쏜다는 뜻이다.
[주-D009] 정호(鼎湖)의 애통 :
예전 중국의 선사시대(先史時代)에 황제(黃帝)라는 임금이 정호(鼎湖)라는 호숫가에서 죽어서 그 신하들이 그의 남겨 놓은 활[弓]을 붙들고 울었다 한다.
[주-D010] 서경(西京)의 말년 :
예전 한(漢) 나라가 장안(長安)에 서울을 정하였을 때를 서한(西漢)이라 하고 장안을 서경이라 하였는데, 그 서한의 말년에는 왕씨(王氏)들이 임금의 외가로서 권력을 잡고 있어서 선비들과 관원들이 모두 그에게 아부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었다.
[주-D011] 옛사람이……오른 뜻 :
기는 산등성이란 말이다. 객지에 가 있는 사람이 부모가 생각나서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고향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만력 기묘 좌참찬 백인걸 소(萬曆己卯左參贊白仁傑疏)
[DCI]ITKC_BT_1319A_0010_000_0060_2002_003_XML DCI복사 URL복사
그 대강에 이르기를, 조광조(趙光祖)가 어질기는 어질지만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것은 그 일이 중대합니다. 신이 감히 다시는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만 우선 광조의 일과 공적을 들어서 대강 한두 가지만 진달하겠습니다.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가 가르침을 베푼 이후로 수천백 년 동안에 유자(儒者)로서 세상에 이름난 자로는 두드러진 사람이 별로 없고, 다만 정몽주(鄭夢周)가 도학을 비로소 창도하고, 김굉필(金宏弼)이 능히 그 실마리를 이었으나 오히려 크게 나타나지 못하였고, 조광조에 이르러서 나이 17세로부터 학문에 뜻을 독실히 하여 행동할 때에는 법도에 따르며 하루 종일 엄숙한 자세로 꿇어앉아 있는 것은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 같았으며, 매양 이경말(二更末) 삼경초(三更初)에 이르면 혹 옷 입은 채 조금 자기도 하고 혹 옷을 벗고 자기도 하며, 사경(四更) 중간에 이르면 소세(梳洗)하고 의관을 정제(整齊)하여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이 진흙으로 만든 사람 같았습니다. 글을 읽는 데는 《소학》ㆍ《대학》ㆍ《논어》ㆍ《근사록(近思錄)》과 성리(性理)에 대한 여러 가지 책으로 급선무를 삼고, 실천에 있어서는 효(孝)ㆍ제(悌)ㆍ충(忠)ㆍ신(信)으로 근본을 삼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경오(庚午)에 이르러 진사 장원에 뽑히니 명성이 드날리고, 어진 사람 불초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동방의 성인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부를 쌓기를 오래 힘써 진실로 가운데에 차서 밖으로 드러난 자입니다. 이때에 안당(安瑭)이 전형(銓衡)을 맡아서 처음에 사지(司紙)를 제수하여 벼슬길을 통하게 하였고, 그 뒤에 을해년 과거에 올라 사문을 흥기시키는 것으로써 자기 임무를 삼고, 도를 행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것으로써 자기 책무를 삼아서, 조정에 선 지 다섯 해 동안에,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고 아래로는 유림(儒林)을 용동(聳動)시키고,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켜 거의 정치의 교화를 이루었으니, 사람마다 향할 곳을 알고 효도와 공경을 숭상하여 관학(館學) 유생(儒生)이 서로 예법을 좇을 뿐만 아니라, 시정(市井)의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또한 모두 사모하고 본받아서, 부모를 지성으로 섬기어,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애통하고 3년동안 시묘(侍墓)하는 것을 위아래가 모두 행하고, 북망산 언덕에 표석(標石)이 별 늘어서듯 하였으니, 또한 모두 광조의 덕화가 미친 것입니다. 깊은 산과 막다른 골짜기에도 또한 덕화의 미침을 입어서 어린애들이 다투고 싸우는 일이 있으면 말하기를, “이때가 착하지 못한 일을 할 때인가.” 하였으니, 사람을 감화시킴의 깊은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다만 종유(從遊)하는 자 한충(韓忠)ㆍ박세희(朴世熹) 같은 이가 또한 당시 사림의 영수로서 재기(才氣)가 고매(高邁)하고 강하고 날카로운 것이 중도에 지나쳐서, 자기 생각대로 하고 곧장 이루려 하여 옛 신하를 구별하고 소인을 격노하게 하여, 마침내 큰 화를 만들었습니다. 애석하게도 광조 같은 어진 이가 있는데, 연소한 무리들이 과격하여 화를 초래하게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만일 광조가 일을 처리할 때 자세히 살피어 오직 중(中)과 정(正)에 힘써서 나이 젊은 무리가 정광필을 논박하려 하자 힘껏 말리고, 향약(鄕約)에 연치대로 앉는 것을 행하려 하자, 비록 억지로 말리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폐단이 생길 것을 염려하였으니, 지금 교정(矯正)하고 격려(激勵)하는 일을 불가하다 하여 말린 것을 낱낱이 들 수가 없습니다. 광조의 어짊에 대해 사람들이 흠을 잡는 것이 없는대도 여러 간흉들이 사학(邪學)을 하고 괴이한 행실을 하는 사람이라고 헐뜯어서, 시정에서 거상하는 자까지도 괴이한 행동으로 지목하여 신문하려 하였고, 사대부의 처소로 향하는 자를 기묘의 남은 싹이라고 지목하여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광조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민멸(泯滅)되어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던 처음에 신이 경연에서 말하기를, “궁중에서 지금은 광조를 역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였더니,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광조가 역적이 아닌 것을 궁중에서도 이미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자세히 아시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생들이 사액하기를 청한 상소가 그다지 중대한 일이 아닌데도 역시 허락하지 않았으니, 신이 감히 문묘에 배향하자는 일로 두 번 아뢰지 않고 다만 그의 사적과 공적을 진달하는 것뿐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는 통찰하소서.
-이때에 태학생들이 일두(一蠹)ㆍ한훤(寒暄)ㆍ정암(靜庵)ㆍ회재(晦齋)ㆍ퇴계(退溪)를 문묘에 배향하고자 두세 번 글을 올렸는데 그 소장의 뜻은 위와 같다. 정암은 한양(漢陽) 사람인데 한양이 지금 양주(楊州)에 매어 있으므로 양주 사람들이 서원을 짓고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상소문 가운데에다 언급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71










































728x90
반응형
'◐정암조광조,학포양팽손◑' 카테고리의 다른 글
■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經筵成均館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文正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幷序。■ (1) | 2024.08.01 |
---|---|
▣靜菴先生文集[卷首] / [卷首]肅宗大王御製/肅廟御製刊行後識[閔鎭遠]靜庵先生文集序[宋時烈] (1) | 2024.07.26 |
[靜菴先生遺墨] (4) | 2024.07.13 |
●綾州謫廬遺墟追慕碑記/遺墨● (0) | 2024.07.09 |
「행수가(杏樹歌)」한규복이 지은 「행수시(杏樹詩)」 (0) | 2024.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