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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동명서원유허비문(강원관찰사 조종필:行공조판서)조인벽신도비(趙中衡)준공제막식◑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2. 13.

◐동명서원(東溟書院) 충현사(忠賢祠)현판◑

■충현사(忠賢祠)현판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1567-1649)■

==병참공파 서각가 25세 趙守衡부인 古暈(옛무리) 李殷珠 여사==

▣동명서원유허비명[東溟書院遺墟碑銘]▣

◐公有偉節 矢蹈于東 공유위절 시도우동

♠공은 거룩한 절개가 있으니,

노중련 같이 동해에 빠지기로 맹세했도다!

◑公有宏德 迺享儒宮 공유굉덕 내향유궁

♣공은 큰 덕이 있으니, 서원에서 향사하였다.

◐睠彼凔溟 百川之宗 권피창명 백천지종

♠저 푸른 바다는 백 갈래의 냇물이 모인 곳이다.

◑仰公遺躅 萬世高風 앙공유촉 만세고풍

♣공이 남긴 자욱은 만세에 높은 풍도로다.

◐戒爾樵牧 是欽是崇 계이초목 시흠시숭

♠초부와 목동에게 부탁하노니, 이를 흠모하고 공경하라!

                                               ===後孫 觀察使 鍾弼[1898]===

  ▣▣▣ [ 동명서원 창건기 ] ▣▣▣  

내가 중승으로 있을 때에 사건을 논하는데 너무 지나치다고 배척을 받아 이 땅으로 보직되었다. 수레를 내리면서부터 먼저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를 것을 급무로 삼아 향교를 중창하여, 크게 짓고 재사를 개조하여 새롭게 하였다. 또 학전을 마련하여 제생을 조석 식사의 이바지 거리로 삼았다. 그런데 생각건대 교생들중에 군을 면하려는 자가 많이 있어 떠들고 소란을 피우므로 비록 준수하고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오히려 재사에서 착실히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렬읍에서도 모두 서원을 한적한 곳에 지어 많은 선비의 학업을 닦는 장소로 삼고 있는데 돌아보건대 이 읍에만 홀로 없으므로 나는 분개한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재물과 목공을 모아 백록동의 옛 제도를 본받으려 하였더니 마침 조장에서 본부 대포진을 철거할 계제를 당하였다. 군기와 군향을 본부로 옮겨 왔으나 만호가 살던 관사만 홀로 우뚝하게 솟아 있어 장차 헐어다가 관용에 보태 쓰게 되었다. 내가 선뜻 기쁜 생각이 나서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하느님이 내게 집 한채를 빌려 주서 제생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으려는 것이니 꼭 헐어야할 이유가 없다. 」

하고 이에 구관을 그대로 쓰기로 하고 현판을 걸어 동명서원이라 일렀으니, 대개 제실과 강당이 의젓하고 다시금 새로웠다. 이에 부로와 제생이 모두 모여 감사하므로 내가 이르기를,

「무릇 서원을 세우는 데는 반드시 그 지방의 명현이나 높은 덕이 있는 자를 모셔서 사당을 지어야 하는 것이니 예전부터 이르는 바, 『향 선생이 죽으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은 이것을 이르는 것이니 이 고장에도 또한 사당에 모실만한 선현이 있는가?」

하였더니 전 정언 노경복은 나이 지금 八十으로 명경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조정에서도 드러났으며, 전일의 착한 분의 행적도 많이 알고 있으므로, 이 고장의 거인이며 덕이 두터운 자로 일컫는데 수염과 눈썹은 희고 말라서 백학과 같았다.

앞 자리에 나와 말하기를

「이 부는 멀리 떨어져 큰 고개와 바다로 쌓여 있어 예전의 어진이로 손 꼽을 만한 분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으나, 고장 부로들의 전하는 말에 용원부원군 조아무개라는 분이 국초에 이 땅에 와 숨어 살았는데 그의 남긴 풍습과 혜택이 매우 크니 조공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두렵고 놀라와서 이르기를,

「용원 부원군은 나의 八세 조이다. 그 분의 사업, 공훈과 벼슬하고 물러간 일은 세대가 멀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가승을 상고해 보면 공은 여조에 있어 예전에 세운 공훈으로 명망이 세상을 뒤덮었는데 마침 고려의 운은 다하였고, 진인은 한 집안에서 일어났으므로 벼슬하지 않고 물러가 동해 가에 숨어 있었으니 그 높은 풍도와 큰 도의심은 지금까지 세상에 빛나니 마침 사당을 지을만 하나 나는 그 분의 먼 자선으로 감히 이 예절을 거행하는데 앞장 서서 할 수는 없다.」

하여 세 번이나 머뭇거리면서 사양하였더니 부로와 제생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용원군의 절의는 전해 온지가 오래되었는데 우리 양양 사람은 그 남아 있는 말만 듣고도 감동하였으니, 예의와 염치가 있는 것은 모두 그의 덕택이니 일 향의 의논이 다 그러한데 부사는 어찌 자기의 선조라고 혐의할 것인가.」

하고 드디어 최정립, 이현일을 시켜 서원 북쪽에 사당 짓는 일을 감독하게 하여 제사지내게 하므로 나도 마지못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소금 가마 한 자리와 어선 한 척과 둔전 七석 지기를 마련하여 춘추향사의 미천과 제생이 공부하는데 쓸 양식으로 삼았다. 아! 흥하고 패하는 것도 운수가 있고 이루어지고 헐어짐은 일정한 법이 없으니 옛날 군인의 적을 막던 곳이 오늘날 선현을 향사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후일에 인재와 선비들이 쏟아져 나와 계속하여 조정에 벼슬하여 사대부가 대를 잇게 되면 태령밖에 있는 거칠고 궁벽한 시골로 하여금 공자, 맹자의 도덕을 지키는 지방이 될 것이니 내가 이것을 경영하여 설립한 공도 또한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 원컨대 제생은 힘쓸지어다.

후손 양양부사 위한

[2012.5.양양읍 조산리 동명서원에서 現서원장님과 함께 가서 찍은 신도비] 

[양양동명서원앞에세운우계양렬공조인벽신도비문번역문]

▣[대광보국숭록대부 용원부원군 양렬공 우계 조선생 신도비명]▣

▣[大匡輔國崇祿大夫 龍原府院君 襄烈公 愚溪 趙先生 神道碑銘]▣

선생의 諱는 인벽(仁璧)이오 號는 우계(愚溪)이며, 또 해월정(海月亭)이라한다. 性은 조씨(趙氏) 貫鄕은 한양(漢陽)이시다. 시조 諱 지수(之壽)는 고려의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僉議中書事)이시고, 그 아들 諱 휘(暉)는 쌍성총관(雙城總管)이시고, 아들 휘(諱) 양기(良琪)는 습작으로 총관이 되시어 나이 十三세에 원(元)나라에 청병하여 동쪽 일본을 정벌(征伐)함에 군사를 온전한 채로 돌아오고 또 합단(哈丹)을 토벌하여 포로를 원나라에 바차니 원세조가 크게 기특히 여겨 비단 도포와 옥띠(지금의 漢陽趙氏家寶/●서울시 동산문화재 나1-계13525호●)를 하사하여 장려(獎勵)하니 선생께 조부.증조부가 되신다.

아버지의 諱는 돈(暾)이신데 처음 처음 諱는 우(祐)라 하였다. 여진(女眞)의 난을 숙청하고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일등공신으로 책록되시고 삼중대광 용성부원군(三重大匡龍城府院君)으로 봉하셨다. 비위 군부인(郡夫人)은 간성이씨(杆城李氏) 평리 홍복(洪福)의 따님이시다.

선샌께서는 용진현(龍津縣,現강원도문천시 옥평동일대로 변경)의 세거하시던 댁에서 태어나셨다. 태어나시면서 특이한 바탕이 있으시어 어려서부터 슬기와 도량이 남의 생각밖에 뛰어나셨다. 자란 뒤에 학문과 문장을 겸하고 통하여 능히 부조(父祖)의 유풍을 ㅇ;ㅣ으 시고 공민왕을 섬겨 등주(登州)의 十二城을 넓혀 平正하시고 또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이방실(李邦實)과 더불어 서경(西京)의 백년 동안 빼앗겼던 땅을 토벌하여 회복시켰다. 공민왕(恭愍王)二十一년엔 안함(安咸)·변주(邊州)·북청(北靑) 등지에 도적이 들어 그것을 크게 격파시키고 적 七十여 首級을 베이고 봉익대부(奉翊大夫)를 배수하였다. 우왕(禑王)五年 己未(1379)에 계림에 도적이 들어옴에 강릉도 도원수 겸 부윤을 배수하고 그곳을 다스렸다. 八年 壬戌(1382)에는 강릉도 상원수가 되셔서 부원수 권현룡[[壬戌辛禑八年○大明 洪武十五年]임술신우 8년(1382), 대명 홍무 15년○江陵道上元帥趙仁璧 副元帥權玄龍 與倭戰 斬首三十級。○ 강릉도 상원수 조인벽(趙仁璧)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이 왜적과 싸워 머리 30급을 베었다.]으로 더불어 적을 쳐서 대파하고 적의 머리 三十급을 베었다. 十一年 乙丑에 교주도(交州道)에 도적이 들어옴에 사도 도지휘사(四道 都指揮使)를 배수하셨으니 사실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용원부원군삼사좌사겸판소부시사(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三重大匡龍源府院君 三司左使 兼 判小府寺事)를 하사 하였다. 그런 뒤에 고려의 운수가 종말을 고하니 조선조 태조(太祖 李成桂)께서 등극하여 남매의 情義로써 세 번 부르시고 일곱차례나 벼슬을 제수 하였으나 모두 나서지 않으시고 망복지의(罔僕之義=신하로 되지 않겠다는 의리)를 굳게 지켜서 관동(關東)의 양양(襄陽)의 시상촌(柴桑村)으로 돌아가 누우셔서 여울물을 노련탄(魯連灘)이라 하고, 돌을 도취석(陶醉石)이라 하여 강해 이장년(江海 李長年). 월촌(月村) 정만(鄭槾)으로 더불어 도의의 사귐을 삼아서 바다 위에 작은 집을 짓고 해월정(海月亭)이라 이름하여 바다로 도피한 뜻을 부치고 흰 옷과 백립을 쓰고 거문고 노래를 스스로 즐겨 산수의 사이에 방랑하여 세상밖에 일을 묻지 아니하고 세모의 하늘 아래 혹 대궐을 사랑하고 서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시를 지어 이르기를

 

♠蝶趐勳名薄 (접혈훈명박) 龍腦富貴輕 (용뇌부귀경)

♣나비의 날개처럼 공명은 얄팍하고,

♣용의 뇌인 부와 귀도 가벼이 여기노라!

♠萬事驚秋夢 (만사경추몽) 東窓海月明 (동창해월명)

♣만사가 가을 꿈에 놀라듯 사라지고,

♣동창엔 바다 달이 밝게도 비쳐온다.

라 하고 또 이르기를

♠淡淡西山月 (담담서산월) 靄靄空中雲 (애애공중운)

♣맑고 맑은 서산의 달이며,

♣상하게 일어나는 공중의 구름이라!

♠山人不畏虎 (산인불외호) 永夜不掩門 (영야불엄문)

♣산 사람 호랑이 두려워 아니하니,

♣긴긴 밤에 사릿문 닫지 않네!

 

라고 읊으니 세상에서 선생의 시는 질탕하고 호매하여 세간의 때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청풍(淸風)과 높으신 절개(節槪)는 당시의 삼은(三隱 = 圃隱 鄭夢周 牧隱 李穡 冶隱 吉再를 말함)으로 더블어 나란히 아름다움을 같이하여 모진 이도 청념해지고 게으른 이도 서게 하였다. 동해의 황벽한 고을이 화하여 추로(鄒魯=孔孟이 사시던 곳)의 예악학문이 있는 고을이 되었으니 선생의 풍도는 산고수장(山高水長=덕화가 높고 긴 것을 말함)하다할 것이다. 태종조에 추성양절익위 보리좌명공신 보국숭록대부 문하좌정승 판도평의시사 영경연사(推誠亮節翊衛 輔理佐命功臣 輔國崇綠大夫 門下左政丞 判都評議寺事 領經筵事)를 贈職하고, 한산백(漢山伯)을 奉하고 諡號는 양렬(襄烈)이라 下賜하였다.

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하동정씨(河東鄭氏)는 一男 一女를 낳으니 아들 온(溫)은 개국정사좌명의 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이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으로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繼配 정화공주(貞和公主)는 조선 환조대왕(桓祖大王)의 따님으로를 六男二女를 낳으셨다. 아들 연(涓)은 좌명일등공신(左命一等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이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다음 후(侯)는 지돈령(知敦寧)으로 시호는 안정(安靖)이고 사(師)는 별호(別號)를 가천재(嘉川齋)라 하는데 예에 따라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중추부사(僉中樞府使)를 제수(制守)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양양(襄陽)에 가서 양렬공(襄烈公) 모시니 정종(正宗께서 충(忠)과 효(孝)의 두 가지를 온전히 하였다하는 교시(敎示)가 있으셨다.

부(傅)는 동지돈령(同知敦寧)이고, 보(保)와 백(伯)은 무후(無後)하다. 세 따님은 선공감정(繕工監正) 황길원(黃吉源)과 내부부령(內部副令) 임맹양(林孟陽)과 소윤(小尹) 곽왕보(郭王輔)에게 출가(出家) 하였다.

큰 아드님의 손자 의(儀)는 첨지(僉知)이고, 완(琓)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한풍군(漢豊君)을 봉(奉)하였고, 하(河)는 도제(都制)요, 흥(興)은 참판(參判)이오, 육(育)은 의영고사(義盈庫使)이다. 둘째 아드님(涓)의 손자 모(慕)는 총제(總制)요, 자(慈)는 돈령(敦寧)이오, 혜(惠)는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시호는 공안(恭安)이오, 련(憐)은 동지돈령(同知敦寧) 병조참판(兵曹參判)이다. 셋째 아드님의 손자 득수(得壽)는 사정(司正)이오, 넷째 아드님의 손자 맹발(孟發)은 김화현령(金化縣令)이오, 중발(仲發)은 장성현감(長城縣監)이오, 계발(季發)은 녹사(錄事)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의 산소는 개성 흥교면 사관리의 축좌(丑坐) 언덕에 계시다. 사패지(賜牌地:공신에게 주는 땅)의 산판(山坂)이 있으며, 묘비(墓碑)가 있으시다. 정화공주(貞和公主)의 산소는 장단 진서면 전제리 취적교(吹笛橋)의 동북방 五리 자좌(子坐) 언덕에 있고, 역시 사패지(賜牌地) 산판(山坂)이 있으시다. 아아! 우리 선조의 성덕(聖德)과 끼치신 음덕(陰德)으로 자손에게 유택(幽宅)이 흘러서 그 수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도학(道學) 문장(文章)과 이름난 공경들이 면면하게 대를 이어서 동국(東國)의 대성(大聖)이 되었다. 그리고 문정공(文正公) 별호 정암(靜菴)과 같은 분은 오현(五賢)의 으뜸으로 동방(東方)의 사표(四表)가 되시니, 이 또한 선생의 끼치신 덕이 아니겠는가?❁

양양(襄陽) 옛 고을의 수석(水石)의 성지(聖地)를 추상하니 선생의 발자취가 이르지 낳은 곳이 없었으나 세상이 멀고 사람이 없어져서 무성한 풀과 보리(麥)가 성하는 탄식이 있을 따름이다. 지난 인조 무진년에 후손 부사 위한(玄谷 緯韓)이 마침 이 고을에 임하여 선세의 자취를 찾아 계술(繼述)하고 동명서원(東冥書院)을 세우니, 고을의 선비들이 또 선생의 큰 절의를 추모하여 서원의 북쪽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우고 조두(俎豆=祭器와 祭物)를 베풀어서 향사(享祀)하고 가천재공(嘉川齋公)을 배향(配享) 하였다. 대개 향선생이 몰하심에 향사하는 의리이었다. 병화를 여러 차례 겪어서 세웠다 폐했다하기를 수차 있었는데 정종조 병오년에 순흥(順興)으로 옮겨 세웠다가 고종조 신미년(辛未年)에 이르러 온 나라의 사우를 모두 훼철시켰다. 그 후 무술년(戊戌年)에 후손 관찰사 종필(鍾弼)이 양양의 옛 터에 비[東溟書院遺墟碑]를 세우고 각을 세웠다.

철훼된지 이미 백여년(1982년)이 되었는데 광복함에 미쳐서 경향의 종친들이 서원을 복원할 생각을 가지고 여러 차례 상의하고 사림들에게 통해 알리고 아울러 성균관(成均館)에 통고(通告)하니, 당시 관장 이재서(李載瑞)가 선생의 대절(大節)을 크게 사모하여 성의를 같이 하고 협조하여 드디어 옛 터에 다시 세웠다. 시작한 지 三년만에 준공을 고하니 사우가 거듭 새로워졌다. 이에 국내의 진신들이 모두 모여서 분주히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가천재공(嘉川齋公)을 배향(配享)하였다.

다만 그러나 산소는 이북 땅에 있어서 여러 후손들이 성묘(省墓)하거나 향사(享祀)를 할 수 없으니, 맺힌 한이 극진(極盡)하다. 이러므로 모두가 의론하여 말하기를 양양(襄陽) 땅은 선생의 끼친 자취뿐 만이 아니라 후학들이 사우를 세우고 해마다 향사하는 곳이니 마땅히 여기에 단을 마련하여 묘제의 의식을 겸행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하여 드디어 터를 닦고 비를 세우고 아울러 신도비문(神道碑文)을 마련함에 존중의 여러 선비들이 중형(中衡)으로 하여금 명(銘)을 하라하니 돌아보건대 불초한 후손이 지식이 적고 학문이 없으니 어찌 능히 성한 덕과 큰 행실에 손을 쓸 수 있겠는가. 굳이 사양타 못해서 드디어 그 참남됨을 잊고서 명(銘)을 하였다. 이르되

 

◈송악(松岳)은 높고높고

용진(龍津)은 맑고맑다.

정기와 영기을 모아

선생을 탄강케 하였도다.

성한 시대 충성스런 신하로

나라 호위 간성(干城)되었다.

등주(登州)를 확대하고

서경(西京)을 회복했다.

백년토록 침노(浸怒)한 땅

일조(一朝)에 되찾았다

요순(堯舜)임금 이루었고

당우(唐虞)세상 만들었다.

왕명으로 작(爵)봉하니

삼중(三重)이요 대광(大匡)이라.

고려(高麗) 운수 다해가니

양양(襄陽)으로 은퇴(隱退)하다.

외로운 신하 나라 망하니

전 임금 잊지 못해.

서산에서 고사리 꺾고

시상촌(柴桑村)서 국화 먹네.

충성심은 해와 달을 꾀어 뚫고

의리는 감상을 중히 한다.

두 임금 섬지기 아니하고

스스로 다스리며 높이 나른다.

홀로서 충성심 보존하고

푸른 저 하늘에 보답한다.

곧은 충성 높은 절개

늠름하기 상설(霜雪)같다.

하늘같이 솟은 빗돌

길가에 세웠도다.

산이 평파하고 바다가 마르도록

만세(萬世)토록 길이길이 창성(昌盛)하리.

 

 

◐단군기원 四千三百十年 정축 七월 유화절에

二十세손 中衡은 손을 씻고 삼가 碑文을 짓고 誠力으로 建立하다.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17세손 종업(鍾業)은 번역하다.

 

[飜譯文筆寫影印:嘉川齋公派 24世孫 晛溪 趙炳龍]

[2021.03.22.21:00.斗井軒에서.....]

동명서원은 1628년(인조 6년) 양양 도호부사였던 조위한이 양양 지역 유림들과 공의로 고려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 정신으로 양양 조산리에 낙향하여 후세 양성에 주력한 양렬공(襄烈公) 우계 조인벽 선생(태조 이성계의 매부)의 교학이념, 호국정신, 충절 등을 본받기 위해 양양 조산리에 창건해 위패를 모시고 동명서원이라 칭하였다.

 

그 후 조인벽 선생의 넷째 아들인 가천재 조사 선생을 추가로 배향해 오늘에 이르렀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던 중 전란으로 전소돼 1787년(정조 11년) 양경공 병참공파 11세 단구공(丹邱公) 조정(趙貞)이 경북 봉화군(봉성면 동양리 와란마을 412-5번지)으로 옮겨서 복원, 같이 배향했으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년) 훼철되어 1898년 강원도 관찰사 조종필이 양양 조산리의 동명서원 유지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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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74년에 동명서원 복원을 추진해 1982년에 완공(정통대종회중심)했는데, 그 후 건물이 노후돼 1999년 11월 사이비통합대종회(조종익, 조윤원 주동) 주관으로 철원조씨(첨지공후손이란자들!)들을 끌어들여 전면적인 보수공사를 마쳤다.

 

그 이후 한양조씨대종회 양측간에 매년 불렴화음이 일었고, 불행하게도 선조님의 노여움으로 2005년 양양산불에 사당이 전소됐으고, 한양파종회간 종인들의 대대적인 다발적 성금과 국가지원으로 충현사 현판은 양경공 병참공파 종친종부이신 옛무리[==병참공파 서각자 25세 趙守衡부인 古暈(옛무리) 李殷珠 여사==]여사님이 판각하여 세로이 복원하게 됐였다. 동명서원 유물로는 유허비, 중건비, 봉안문, 1982년 복원시 복원참가회사 및 명단과 성금자명단현판들이 재사내에 걸려 있다.

 

이후 작년엔 또다시 서원 서쪽 담벼락이 묻어지고, 홍살문이 태풍으로 인해 묻어지는 사태가 나 양양군청문화관광과에서 다시 홍살문을 세우게 되는 이변[異變]이 계속 이여지고 있다.

 

■양경공파종회 임원들게 묻는다! 그들의 지조론(志操論)은 어디에다 엿받고 팔아 먹었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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