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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심양왕(瀋陽王)◑●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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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왕(瀋陽王)◑

[요약]

1307년에 원 무종 즉위에 기여한 대가로 충선왕은 심양왕의 작호를 받고 심양을 포함한 지역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 지역은 홍복원 일족들이 세력이어서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충선왕이 단행하려던 개혁들을 비난하기도 하고 고려에 행성을 세우자고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원황제의 개입으로 무마되었다.
1313년 충선왕은 고려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1316년 심양왕위를 조카인 왕고에게 내려주자 고려왕과 심양왕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심왕 고는 원 영종의 총애를 받아 고려 왕위를 넘보았으나 영종이 살해된 후 심양왕의 세력은 수그러졌다. 1374년에는 원에서 심양왕을 고려 왕으로 봉했지만, 당시 고려에서 원세력이 소멸해가던 시기라 성사되지 않았다.

충선왕(忠宣王)은 원에 머무는 동안 1307년(충렬왕 33)에 원 무종을 도와서 그가 즉위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대가로 이듬해 이 작호를 받아 심양을 포함한 랴오양[遼陽] 지방에 사는 고려인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1310년에는 심왕으로 개칭되었다. 그 지역은 몽골침략 이후 고려의 유이민과 전쟁포로들이 많이 이주하여 흩어져 살던 지역으로, 이전에 원은 안무고려군민총관부라는 특수행정단위를 설치하여 그 장관으로 고려인인 홍복원 일족 및 영녕공 준을 임용했었다. 이후에도 그 일족들이 실권자로서 세력기반을 다지고 있었는데, 충선왕이 심양왕으로 봉해짐에 따라 홍씨일파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1312년(충선왕 4)에 홍복원의 손자인 홍중희·홍중경 형제는 충선왕이 단행하려던 개혁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원의 중서성에서 대질변론까지 하려 했는데, 충선왕에 대한 원 황제의 각별한 옹호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홍중희 형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충선왕이 고려 왕과 심양왕을 겸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고려에 행성을 세우자고 요구했다. 이 입성의 논의는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행성으로 만들어 국가로서의 기능을 말살하자는 것이었는데, 고려에서 맹렬한 반대가 일어나 원의 인종이 입성을 논의하지 못하도록 조서를 내림으로써 끝을 맺었다.

 

심양왕과 고려 왕을 겸했던 충선왕이 1313년에 고려 왕의 지위만 아들 충숙왕에게 전해주고, 1316년 심양왕의 지위는 조카인 왕고에게 분리해서 내려줌에 따라 고려 왕과 심양왕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심왕 고는 1320년(충숙왕 7) 원에서 영종이 즉위하자 그의 총애를 받아 고려 왕위를 넘보게 되었다. 때마침 고려에서는 채홍철·권한공·채하중·조적 등이 심왕당을 만들어 심왕 고를 고려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이듬해 충숙왕은 심왕당의 참소를 받고 원에 불려가 국왕인을 빼앗기고 구류되다시피 하여 국왕으로서의 행세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1323년 원나라에서 영종이 살해되고 태정제가 즉위하게 되어 충숙왕이 국왕인을 돌려받고 귀국함으로써 심왕당의 세력은 수그러졌다. 그뒤 1339년(충숙왕 복위 8)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은 다시 원의 태사 백안의 후원을 받아 고려 왕위를 차지하고자 충혜왕과 대립했다. 이에 심왕당은 충혜왕의 궁을 습격하는 등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나, 충혜왕이 승리하고 심양왕옹립운동은 다시 좌절되었다.

 

1345년(충목왕 1) 심양왕 고가 죽고 심양왕위가 공석으로 되었다가, 1354년(공민왕 3) 그의 손자인 독타불화가 물려받았다. 2년 뒤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시도하자 부원 세력이 심양왕 독타불화를 고려 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본인이 사양했다. 공민왕이 죽은 1374년에는 북원에서 심양왕을 고려 왕으로 봉했지만, 당시 고려에서 원세력이 소멸해가던 시기라 성사되지 않았다. 1376년 독타불화가 죽은 뒤에는 심양왕 책봉이 없었다. 이와 같은 심양왕과 고려 왕 간의 알력은 고려 조정의 내부분열을 일으켜 입성논의 등이 제기되는 등 나라의 독립성을 상실할 정도의 위기가 초래되었는데, 이는 원의 이이제이 정책에 말려든 결과라 할 수 있다.

 

중·일의 역사왜곡 <171>원(元)나라는 왜 ..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중·일의 역사왜곡 <171>원(元)나라는 왜 고려왕(高麗王)을 심양왕(瀋陽王)이라 했는가

중·일의 역사왜곡 <171>원(元)나라는 왜 고려왕(高麗王)을 심양왕(瀋陽王)이라 했는가 고려(高麗)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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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의 역사왜곡 <171>원(元)나라는 왜 고려왕(高麗王)을 심양왕(瀋陽王)이라 했는가???

■고려(高麗)의 역사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사학자(詐學者) 왜 인가???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8-16 09:35:35

 

세계대륙을 가장 광대하게 정복한 원(元)나라는 고려왕(高麗王)을 심양왕(瀋陽王)이라 불렀다. 어찌해서 원(元)나라는 고려왕을 심양왕이라 했는가? 원사(元史)에 의하면, 고려왕 거(昛;25대)의 공싱호(功臣號)를 심양왕으로 바꿔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서경(西京)이 심양(瀋陽)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보고 있다.(元史 卷 22~23).

 

우리나라 자학반도식민사학자(自虐半島植民詐學者)들은 고려를 반도로만 보고 있는데 분명한 것은 고려(高麗)는 그 수도(首都)도 반도에 없었다. 고려 황성(皇城)도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 국사의 동녕부(東寧府)와 고려사(高麗史) 동녕로(東寧路)는 다르다.

 

지금 우리나라 국사교과서에서는 동녕부는 지금 북의 평양(平壤)에 있었다하고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그리고 황성(皇城)은 개성(開城)으로 표기했다. 즉 고려 황성은 황해도 개성으로 알고 있으며 서경은 평안도에 있는 평양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고려사 기록은 분명히 압록강 북쪽에 황성이 있다고 했다. 1370년 1월 동녕부를 평정하고 북방사람들이 귀순해 왔는데 “동쪽은 황성까지 북쪽은 동녕부까지, 서쪽은 바다까지, 남쪽은 압록강까지 적의 종적이 없어졌다”고 했다. 

 

분명히 남쪽에 압록강이 있고 북쪽에 동녕부가 있고 동쪽에 황성이 있으니 현재의 압록강을 고려 때 압록강으로 본다면 황성은 만주(滿洲)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于海南至鴨綠爲之一空) (高麗史第42卷 恭愍王19年).

 

그리고 서경은 압록강 북쪽에 있으며 철령(鐵嶺)에서 300리 거리이다. 왕성(王城)과 철령과의 관계를 나타낸 1388년 2월 기록이 있다. “사실 철령은 고려수도로부터 겨우 300리 거리에 있으며 공험진이 국경계선으로 되어 온 것이 한해 두해가 아니다(鐵嶺之山距王京僅三百里公嶮之鎭限邊界非一二年)”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동녕부가 압록강 북쪽에 있다고 했고 서경을 동녕부라 했으니 당연히 서경은 만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철령 남쪽과 압록강 북쪽사이에 심양(瀋陽)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왕경(王京)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 황제를 원나라에서 심양왕이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근처에 서경이 있었음을 분명히 나타내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즉 철령으로부터 북쪽이 고려땅임을 명백해지는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고려도 한반도는 물론 대륙(大陸)의 만주일대(滿洲一帶)와 철령 북쪽까지 있었던 것이다. 

 

지나(支那)가 우리역사를 숨기기 위해 지명(地名)과 지역(地域)을 바꿔서까지 역사왜곡 한 것을 수없이 볼 수 있다. 오늘은 고려가 강한 국가를 이룩한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령부(東寧府)는 압록강 북쪽에 있었고 이곳은 고려 영역이었다

 

동령부(東寧府)는 원래 원나라에서 만든 부(府)이다. 동령부가 원나라의 동령부이지만 본래 원나라 땅이 아니라 고려 땅이었다. 그런데 1269년 이연령(李延齡), 최탄(崔坦), 현원(玄元烈)등이 고려 땅을 들어 원에 항복함으로 2년 뒤 동령부라고 했다.(至元六年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府縣鎭60城來歸至元8年改西京爲東寧府).

 

철령 북쪽이 고려 땅인 것은 이미 밝힌 대로 명(明)의 주원장(朱元璋)이 1381년 명나라를 세우고 7년 후인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鐵嶺尉)를 설치하려하자 우왕(禑王)이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을 보내어 철령으로 이곳이 고려 땅임을 밝혔다.

 

즉 “철령으로부터 북으로 가면서 문주(文州),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 함주(咸州)등 여러 고을을 지나 공험진(公嶮鎭)까지 자래(自來)로 우리나라(高麗)땅이다”고 했다. 명(明)의 영토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1388年 高麗史 卷137).

 

또한 이곳은 반도가 아니다. 압록강 북쪽의 만주이다. 자학반도식민사학자(自虐半島植民詐學者)들이 서경을 우리나라 평안도(平安道) 평양으로 알려온 것과는 판연히 다르다. 또 동령부를 평양(平壤)으로 본 것과도 너무나 다르다. 

 

이미 청(淸)나라가 1785년 제작한 ‘대청광여도’도 개원과 심양(瀋陽)사이에 있는 철령을 확인할 수 있는데도 자학반도식민사학자(自虐半島植民詐學者)들의 동령부와 철령이 한반도라고 하고 있으니 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분명 압록강 북쪽에 있는 평양을 고려 땅으로 보아온 자학반도식민사학자(自虐半島植民詐學者)들의 상식으로는 답이 나올 수 없다. 만주를 신라와 고려 땅으로 생각도 해보지 못한 것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현상인 것이 문제이다. 

 

‘철령이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 경계에 있는 고개’라고 하는 현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도 문제요, 자학반도식민사학자들의 주장도 문제이다. 청(淸)나라가 1785년 제작한 ‘대청광여도’ 검토해 보면, 철령이 개원과 심양사이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도 이를 묵살함은 우리역사를 위해서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장춘(長春)은 어디였나…현재도 4곳이 있다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장군과 이성계(李成桂)장군이 출발한 장춘(長春)이 어디에 있는가. 한반도에는 장춘이라는 지명(地名)이 없다. [동지여지승람]에도 없다. 대륙에 있는 사로신라(斯盧新羅)의 땅이었던 광령에서 길림까지 근접지역에는 4곳이 있다. 

 

그렇다면 고려군대는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지금은 만주라고 하나 당시는 동북 3성(省)이나 만주보다는 옥리진(沃麗振)으로 불렸던 역사성이 있다. 금(金)나라 이전에 없었던 만주라는 명칭의 유래와 현재 있는 지명으로 2곳의 만주의 이름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문수의 전음으로 만주(滿住), 만주(滿珠)에 의거한 것이라 한다. (滿洲源流考의 記錄).

 

이는 만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만들어 진 것으로 해석되나, 동북삼성(東北三省)중 요녕성(遼寧省) 장성(長城) 북남에는 해주(海州)와 해성(海城)이 있다. 25사(史) 동이전(東夷傳)에서 동옥저(東沃沮)에는 해주가 있다고 했고 그 서쪽이 고구려(高句麗)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옥저(沃沮)에서 제일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니 서옥저(西)沃沮)가 옳은 표현이다. 해주가 있고, 근처에 의무무려산(醫無閭山)이 있으며 홍산(紅山), 사해(四海)문화지역이다. 이곳은 옥(玉)이 많이 생산되던 지역이기도 하다. 

 

여담(餘談)으로 요녕에서 생산되는 옥기(玉器)를 ‘순’이라하고 ‘우기’라는 명칭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당시 옥의 값어치는 대단한 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옥을 가졌다는 것은 넉넉하다는 것이고 가득하다는 뜻이 포함될 수 있는 재물(財物)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수효가 만에 이르다, 곡식이 익다, 속이 차다, 활을 힘껏 잡아당기다, 잔 가득히 따른 술, 뽐내다, 속이다, 만주의 준말, 번민하다, 섬 등으로 해석된다. 해주근처의 의무무려산(醫無閭山)에서 옥이 생산되고 고대무덤에서 옥갑(玉匣)이 발견되는 사해지역이 이 근처에 있다. 

 

분명히 옥의 형태는 만(滿)의 뜻과 같으니, 같은 음(音)의 옥과도 무관치 않다. 만주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에 옥저(沃沮)가 있었다. 고구려 칸(干)이 다스리던 지역과 낙랑왕(樂浪王)이 다스리는 옥저가 있었는데, 북옥저(北沃沮)는 추모왕 때, 동옥저는 태조왕(太祖王)때 고구려가 되고, 낙랑국(樂浪國)이 패망해 옥저가 고구려 땅이 되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동쪽에 옥저가 있었고 해주(海州)는 옥저 땅이라고 했는데 의무무려산(醫無閭山) 남쪽 장성(長城) 북쪽에 해주가 있으며 이 근처에서 옥(玉)이 생산되는 지역인데 옥(玉)과 같은 발음 옥(沃)을 쓴 옥저가 있었다. 

 

저(沮)의 발음은 (在呂切, 將豫切, 子余切, 將先切)이라고 했다. 만주(滿洲)의 주음(州音)을 지유절(之由切)이라고 하나 ‘저(沮)’와 ‘주(州)’는 비슷하게 발음되고 있어 만주(滿洲)는 옥저(沃沮)와 같은 뜻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다.(吳在成, [九黎系 高麗史연구]52~61面 參照, 引用).

 

고려는 송령(松嶺)이동에 장성을 구축 했다 

 

고려가 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고려개국 100년 후인 1035년 9월, “서북지방 송령(松嶺) 이동에 장성(長城)을 구축해 변방(邊方)의 적들이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았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권(卷)6, 세가(世家)6, 정종(靖宗)”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정종(靖宗) 원년(1035) 5월 내원성(來遠城) 사절(使節) 안서가 흥화진(興化鎭)에 보낸 통첩, 6월, 영덕진서 거란(契丹) 내원성에 보낸 통첩(通牒)에 고려가 돌성(石城)을 쌓아 대로(大路)를 막으며 목책(木柵)을 세워 군사행동(軍事行動)을 저지(沮止)한다. 운운(云云)하는 기록이 있다.

 

또한 요양(遼陽), 심양(瀋陽) 금복개해(금주(錦州), 복주, 개주, 해주, 요동반도는 고려의 서쪽에 있는데 금주(錦州)부근 장성(長城)상에 지금도 송령문(松嶺門)이라는 지명(地名)이 있다. 이것은 이곳 송령(松嶺)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자학반도식민사학자(自虐半島植民詐學者)는 아직도 내원성(來遠城)=현 심양 봉성현 경계에 있는 흥화진을 평안도 의주북방으로 가르치고 있음은 한심한 일이다. 

 

지나 [고금지명 대사전]에는 흑룡강 청강현 서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는 이 장성을 1119년 12월 석자 더 높이 쌓았다고 했다. 이 성을 쌓을 나라는 고려이다. 

 

그리고 송령의 위치는 서북쪽에 있어야 함으로 동북쪽에 있는 함흥(咸興)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당시 서북쪽 방향을 보면, 986년 거란(契丹)은 요해(遼海)밖에 있었다. 여기서 요해는 요하(遼河) 상류(上流)를 말한다. 요하상류(遼河上流)에 거란(契丹)이 있다(遼海卽遼河上源也 [明史] 卷41~42面)는 것이다.

 

또한 1356년(공민왕4년) 7월 동북면 병마사유인우가 쌍성(雙城)을 함락시켰다. 화(和), 등(登), 장(長), 정(定), 예(預), 문(文), 선(宣)등 각주와 의덕(宜德), 원흥(元興), 녕인(寧仁), 요덕(耀德),정변(靜邊)등을 수복했다. 원나라에 빼앗겼던 함주(咸州) 이북의 지방을 수복했다. 

 

1374년 4월 무술(戊戌) 명(明)나라의 중서성(中書省) 자문(咨文)을 보내어 전 원나라 요양성(遼陽城) 평장 유익이 금주(金州), 복주(腹州), 해성(海城)등지인 요동반도(遼東半島)를 가지고 귀순(歸順)하였음으로 황제가 그를 본위(本衛)의 지휘(指揮)로 임명 했다고 고려(高麗)에 통보했는데 그 이전은 고려(高麗) 땅이라는 기록이다.(高麗史 卷43 恭愍王6).

 

즉, 공민왕(恭愍王) 19년(1370년 7월 동령부(東嶺府)에 출정(出征)해 동년12월에 평정하였고 그 때 “요(遼陽), 심양(瀋陽)은 본래 옛 강토이다(遼瀋元係本國舊界)”라고 하였고 또 강계만호로 하여금 방문(榜文)을 붙였으니 요양과 심양이 고려 땅이라는 것이다. (高麗史 第42卷). 

 

따라서 사서(史書)의 기록으로 보아 장성을 구축한 1035년 이전부터 현(現) 요동반도를 포함한 장성의 남쪽은 고려의 영역(領域)임을 입증(立證)하고 있다. 

 

글을 맺으며

 

우리나라 역사교제를 보면 너무 지나와 일본의 왜곡역사에 편중되어 있어서 마치 우리의 역사가 대륙 아닌 반도에 치중하고 있음을 보는데 우리역사는 대륙사임을 다시 말하게 된다. 그것은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왜(倭) 까지도 모두 대륙에 있었고 그 수도들도 반도에 없고, 모두 대륙에 있었음에도 반도식민사학을 하는 자만이 반도라 하고 있다. 

 

그리고 지나와 일본의 역사도 엄밀히 말하면 거의가 우리역사에 포함되어야 할 역사이다. 은(殷), 주(周), 진(秦). 한(漢), 수(隨), 당(唐), 원(元), 명(明), 청(淸)등의 역사를 보면 이 나라들은 모두 우리의 동이족이며 우리와 뗄레야 뗄수 없는 같은 피를 나눈 나라들이다. 

 

한 예를 들면, 천하를 통일했다는 진(秦)은 본래 서이족(西夷族)으로 흉노족계열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시황(秦始王)인 영정(嬴政)은 오래(惡來)의 후손으로 은인(殷人)으로 은(殷) 역시 동이족의 나라이니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 동이인(東夷人)나라인 것이다. 

 

또한 한(漢), 수(隨), 당(唐), 원(元), 명(明), 청(淸)을 세운 나라들도 우리와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축제에서 떡과 술을 나눠 마시던 사이로 우리역사에 포함되어야 할 나라들이고 왜(倭)역시 백제가 망한 후 유민이 가서 세운 나라로 우리역사에 포함시켜야 할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나라들이 서로 조상이 다르지 않고 같은 조상을 가지고 상고시대부터 유라시아를 지배한 기마민족의 우리들이다. 고려 역시 요동으로부터 철령위 까지 70개소의 병참(兵站)을 설치해 동북아(東北亞) 일대를 호령한 강대한 나라인 것이다.

 

여기서 안변 철령은 300리에 요양과 심양이 있기에 심양왕이라 한 것이다. 철령은 반도가 아니고 요동에 속하며 철령북쪽에 문(文), 고(高), 화(和), 정(定), 함주(咸州)가 있다. 이 철령은 반도가 아닌 만주에 있는 것이다.

 

즉, 고려사에 나오는 철령은 요양과 심양 동북에 있는 철령이며 철령 북쪽 쌍성(雙城)이 바로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의 쌍성(雙城)이고 화주(和州)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려가 한반도 그것도 평안도와 원산(元山) 이남이라는 것은 허구(虛構)인 것이다.

 

(以上은 吳在成, [九黎系, 高麗史연구]. [九黎系, 倭 日本]. 정희철 [중국은 없다.]. 정성희 [이야기, 고려왕조사]. 백지원 [고려왕조실록]. 朴鐘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국인 자부심 더 알씨사랑], [한국인 자부심 물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코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아리랑],.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外 多數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 이전글 : 고려 이성계장군 때 요(遼), 심(瀋), 고려영토 회복했다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

 

여몽전쟁(麗蒙戰爭) 중 몽고에 투항하였거나 유망(流亡)한 고려인들을 심양과 요양(遼陽)에 거주시키고, 1234년(고종 21)홍복원(洪福源)을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에 임명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던 것을 1261년(원종 2)에 개편한 것이다.

이해에 만가노(萬家奴)를 총관부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삼았으며, 1263년에는 그 전에 토루카(禿魯花)로서 원에 보내졌던 고려 왕족 영녕공 준(永寧公綧)을 안무고려군민총관에 임명하여 심양의 고려인 2,000여 호(戶)를 다스리게 하였다.

한편,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洪茶丘)도 1261년에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에 임명되어 심양의 안무고려군민총관부와는 별도로 요양의 고려인들을 다스렸다.

이 후 영녕공(왕준)과 홍다구의 아들들이 안무사(安撫使)·고려군민총관의 관직을 세습하면서 각각 심양과 요양의 고려인들을 통치하다가 1296년(충렬왕 22)에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摠管府)로 통합되어 제주의 탐라군민총관부(耽羅軍民摠管府)와 함께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소속되었다.

시대 : 고려 성격 : 관청 유형 : 제도 시행일 : 1261년(원종 2) 폐지일 : 1296년(충렬왕 22)

◐안무고려군민총관부 [安撫高麗軍民總管府]◑

[시대 성격 유형 시행일 폐지일 분야]

고려
관청
제도
1261년(원종 2)
1296년(충렬왕 22)
역사/고려시대사

[요약] 

원나라가 심양(瀋陽)지방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특수행정기구.

[내용]

여몽전쟁(麗蒙戰爭) 중 몽고에 투항하였거나 유망(流亡)한 고려인들을 심양과 요양(遼陽)에 거주시키고, 1234년(고종 21)홍복원(洪福源)을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에 임명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던 것을 1261년(원종 2)에 개편한 것이다.

이해에 만가노(萬家奴)를 총관부의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삼았으며, 1263년에는 그 전에 토루카(禿魯花)로서 원에 보내졌던 고려 왕족 영녕공 준(永寧公綧)을 안무고려군민총관에 임명하여 심양의 고려인 2,000여 호(戶)를 다스리게 하였다.

한편,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洪茶丘)도 1261년에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에 임명되어 심양의 안무고려군민총관부와는 별도로 요양의 고려인들을 다스렸다.

이 후 영녕공과 홍다구의 아들들이 안무사(安撫使)·고려군민총관의 관직을 세습하면서 각각 심양과 요양의 고려인들을 통치하다가 1296년(충렬왕 22)에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摠管府)로 통합되어 제주의 탐라군민총관부(耽羅軍民摠管府)와 함께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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