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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 남원 광한루원 옆 귀부(龜趺) 삼청이정사적비, 부사정암선정비, 부사조위수유혜거사비(한양조씨 정암파종회)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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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광한루원 옆 귀부(龜趺) 삼청이정사적비, 부사정암선정비, 부사조위수유혜거사비(한양조씨 정암파종회)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남원 광한루원 옆 귀부(龜趺) 삼청이정사적비, 부사정암선정비, 부사조위수유혜거사비

광한루원 옆에는 현존하는 남원부사들의 선정비, 공덕비, 불망비 등을 한 곳에 모아두었다. 본래는 여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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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 옆에는 현존하는 남원부사들의 선정비, 공덕비, 불망비 등을 한 곳에 모아두었다. 본래는 여로 곳에 산재해있을 것이나 근대들어 도시개발로 인해 갈 곳을 잃으면서 이곳에 모아두게 된 것이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귀부를 갖춘 비석은 3개가 된다. 아마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다는 것은 다른 비석보다 격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래된 순으로 나열하면, 부사 정엄 선정비(1573), 부사 조위수 유혜거사비(1684), 삼청이정사적비(1747)이다.

광한루 옆 비석군

부사 정엄 선정비는 현존 하는 남원부사들의 선정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앞면에 부사정영공엄선정비(府使鄭令公淹善政碑)라고 명문이 새겨져 있다. 당시 정엄의 남원부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전라 순무어사(巡撫御使) 신응시의 서장에 다음과 같은 인물평이 있다.

 

석조물 30 비석군(碑石群) =

(순서는 앞줄부터 좌측에서 우측으로 )

 

▶ 삼청이정사적비

남원부사 이식이 삼청(진상청, 보민청, 연호청)의 문란함을 바로잡은 공적을 새긴 사적비로 영조 24년인 1748년에 세웠다. 대리석 비신에 귀부와 이수로 되어 있는데 귀부와 이수조각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앞면 상단에 비명, 그 아래에 비문이, 우측에 숭정 기원 후 재

무진 12월 세움이라 새겨져 있다.

▶ 부사 이상억 사적비

화강암 비석으로 철종 13년인 1862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석의 앞명에는 부사 이후상억사적비, 우측에 확반만포구?군정, 좌측에 인족불요 막백무세 읍양개관, 뒷면에 숭정후 4 임술 맹하 세움이라 새겨져 있다. 남원지에 의하면 1855년(철종 6년)남원부사로 재임하면서

광한루를 중수 하였다고 전한다.

▶ 이용준 불망비

화강암으로된 월두비로 1938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아후이공용준 영세불망비, 뒷면에 숭정기원후 5 무인 9월 일 세욺이라 새겨져 있다. 1879년(고종 16년) 광한루가 북쪽

으로 기울어지자 추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월랑을 건립한 부사이다.

▶ 관찰사 이석구 불망비

1882년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 이공서구영세불망, 뒷면에 숭정후

4임오 중동 세움이라 새겨져 있다. 이서구(1754~ 1825)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낙서, 호는 척재다. 정조 17년(1793년과 순조 20년(1820년) 두차례 전라 관찰사를 지냈으며 수지면

견두산을 제압하도록 호석을 세워 남원 부중에 재앙을 막았다. 이설에는 단가 호남가를

지었다고 전한다.

▶ 부사 조위수 유혜거사비

비석의 앞면에 부사 조령공위수유혜거사비라 새겨져 있고, 우측에 8자, 좌측에 4자가 있으나 거의 마멸되어 알아 볼 수 없다. 뒷면에는 새이거 갑자건비 중년 북절 무진 12월 중건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귀부와 이수를 갖춘 비석이다. 조위수는 1680년 8월 1683년 7월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 이 비는 1684년에 새웠는데 비가 넘어져 1688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부사 조위수는 정유재란때 없어졌다는 과목전 지금의 용성초등학교에 있었던 용성관에 있던 남원부의 과일밭을 다시 복원한 인물이다.

▶ 부사 김영근 불망비

비석의 앞면에는 부사 김후영 근영세불망이라고 새겨져 있고,뒷면은 마멸되어 알아 볼 수

없다. 아랫부분에 계묘 8월이란 것만 남아 있는데 1848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비석은

농대석과 가참석을 갖추고 있는데 농대석은 네모꼴이고 가첨석은 망두형으로 되어 있다.

헌종 5년(1839년)남원부사를 지냈다.

▶ 부사 민여임 선정비

비석의 앞면에는 부사 민영공여임청덕선정비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마멸되어 11월만 알아 볼 수 있다. 네모꼴의 농대석(좌대)과 꽃잎무늬의 둘레에 둥근 모양의가첨석을 갖추고 있다. 민여임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성지, 호는 취웅, 본관은

여흥이다. 1591년에 진사가 되고 1597년 정유재란때 명나라 장수의 접반관이 되고, 1614년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 부사 송수연 불망비

비석의 앞명에는 부사 송후수연영세불망이라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정축 9월세움이라

새겨져 있다. 사각의 농대석과 망두형의 가첨석을 갖추고 있다.

▶ 부사 박정 선정비

▶ 부사 박종대 선정비

▶ 부사 이병석 불망비

▶ 부사 홍집규 선정비

▶ 부사 조병문 선정비

▶ 부사 안응수 선정비

▶ 부사 홍병희 불망비

▶ 부사 정엄 선정비

▶ 부사 남진화 불망비

▶ 부사 조명교 선정비

▶ 부사 조진의 불망비

▶ 현감 남주헌 선정비

▶ 관찰사 민??선정비

▶ 관찰사 이헌직 불망비

▶ 어사 이면상 불망비

▶ 부사 김윤현 불망비

▶ 좌영장 배상규 선정비

▶ 어사 심동신 불망비

▶ 삼도토포사 김시풍 불망비

▶ 부사 송상인 청백비

▶ 북시장 개창비

이 비석은 남원 북시장을 개창한 내용을 기록비를 세웠는데 이 비가 퇴락하여 없어지자 다시 그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남원 북시장은 현재 남원의료원이 있는 자리로 1900년 이태정 군수가 열었다고 한다. 군수 이태정은 고종 36년에 남원군수로 부임하여 1년간 재임하였다.

▶ 관찰사 이돈상 불망비

▶ 부사 성안의 비

이비석은 광해군 3년(1611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광한루원 동쪽 연못가 약 30미터

지점에 있다.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의 아버지 비석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비석의 전면에는 부사 성공 안의 선??라 새겨져 있는데 선자 아래는 확인할 수 없다.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배경인 숙종 임금 즉위(1675년)시대 보다 약 60여년전에 남원 부사를 지냈기 때문에 춘향의 아버지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광해군 초기때 성부사의 딸로 태어나 이 도령과 인연을 맺어 60여세의 수를 누린 후 세상을 떠나고 숙종조를 배경

으로 소설로 등장하였다는 가정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 춘향전의 여러 근원설화가운데

광해군때 태어난 성안의 아들 성이성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부사 생일 잔치에 참석하여

금준미주천일혈~' 하는 시를 짓고 암행어사 출두를 하였다는 성이성 설화가 있는데 이

설화의 주인공 성이성이 성안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 기타

이밖에도 춘향사당 남쪽 20미터 지점에도 양남식 기적비와 그 뒤로 면장 양재영 시혜비,

그리고 이승면 대통령이 썼다는 충혼불멸비(대한청년단 남원 군단에서 1954년 세움), 충혼비(빨치산토벌작전에 희생된 전투경찰의 충혼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고, 북문 우측에는

최근에 세워진 광한루 연혁비가 있다.

 

남원은 사람이 많고 땅이 넓어서 예전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는데, 부사 정엄은 목소리와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도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라서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온 경내가 편안합니다. 몇 해 동안 유임시키고 경관으로 차출하지 말기를 바라니, 어리석고 천한 백성이 사체를 모르는 것이기는 하나 그 성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비석을 세운 후 1년 뒤인 1574년 정엄은 국왕의 포상 대상자로 선정된다. 포상 대상자로 된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남원 부사 정언은 따뜻하게 민중들을 돌보고 자상하게 행동을 하되, 문서를 처리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를 친히 살펴 집행하고 민원을 막는 폐단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습니다.”

부사 정엄 선정비 전경

비신의 위 개석이 하엽과 보주형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귀부를 보면, 굉장히 추상적으로 거북이를 조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리를 묘사한 부분에서 단순미가 두드러진다.

거북이 등껍질을 보면, 민무늬로 귀갑문이 없다.

 ​그로부터 대략 110년 후, 1684년에는 또 하나의 귀부를 갖춘 선정비가 세워진다. 부사 조위수 유혜거사비이다. 유혜거사비란(遺惠去思碑)란 선정비의 일종으로 글자그대로 은혜를 남기고 간 수령이나 감사를 고을백성들이 사모하며 세운 비이다. 비석 앞면에는 조령공위수유혜거사비(府使趙令公渭叟遺惠去思碑)라고 명문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세이거갑자건비중년복절무진십이월중건(歲二去甲子建碑中年復折戊辰十二月重建)라고 새겨났다. 1684년 비를 세웠는데 이 비가 넘어져서 부러지는 바람에 1688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양인 부사 조위수 유혜거사비이다.=

 부사 조위수 유혜거사비

비석의 앞면에 "부사 조령공위수유혜거사비"라 새겨져 있고, 우측에 8자, 좌측에 4자가 있으나 거의 마멸되어 알아 볼 수 없다. 뒷면에는 "새이거 갑자건비 중년 북절 무진 12월 중건"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귀부와 이수를 갖춘 비석이다. 조위수는 1680년 8월 1683년 7월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 이 비는 1684년에 새웠는데 비가 넘어져 1688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부사 조위수는 정유재란때 없어졌다는 과목전 지금의 용성초등학교에 있었던 용성관에 있던 남원부의 과일밭을 다시 복원한 인물이다.

 

비석의 앞면에 '부사조령공위수유혜거사비(府使趙令公渭叟遺惠去思碑)'

비석의 뒷면 '새이거 갑자건비 중년 북절 무진 십이월 중건'(歲二去甲子建碑中年復折戊辰十二月重建)

귀부와 이수를 갖춘 비석으로 조위수는 숙종6년 1680년 8월부터 1683년 7월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 조위수유혜거사비는 1684년에 세웠다. 부사조위수는 번잡하고 과시성 행사를 줄이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귀부를 보면, 등껍질에 비해 머리가 상당히 크게 조각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이 머리를 보면, 선과 원 최소단위로 눈코입을 그렸다. 조선시대 민간예술의 단순미를 잘 보여준다.

이전과 달리 거북이 등껍질에 귀갑문을 묘사하였다.

개석을 이부로 구성되었다. 최상단에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두 마리의 용을 3차원 적으로 조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을 세우기 전인 1681년, 조선왕조실록에 조위수의 직질(職秩, 관직의 직급)을 올린 것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하기를,

“남원 부사(南原府使) 조위수(趙渭叟)가 관사(官事)를 잘 가다듬은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수령의 직분인데 갑자기 직질(職秩)을 올려 주시니, 상(賞)을 주어 권면하는 전례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팔도[八路] 3백여 고을의 다스린 공적이 특이하게 표명된 것이 조위수와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만약 직분 안의 일이라 하여 포상(褒賞)하는 전례(典例)가 없다면 앞으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권면하고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개정하라는 논의가 꼭 타당한지 나는 모르겠다.” 하였다.

조위수가 고을수령의 모범이 될 만큼 남원부사로서의 역할을 잘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황폐화되었던 남원의 과목전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692년 국왕이 인정했던 조위수는 파직당한다.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준다. 파직당한 이유는 수원에서 치른 시재의 감독관이 되었을 때, 뇌물을 받고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때 사건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원(水原)에 시재(試才)하러 나간 어사(御史) 심계량(沈季良)과 부사(府使) 조위수(趙渭叟)가 청탁에 따라 사람을 뽑는 일이 많아 뇌물이 공공연하게 나돌게 되므로 사람들의 말이 매우 자자했었다. 사실이 발각되자, 병조(兵曹)에 명하여 문서를 고찰하여 조사하도록 했었는데, 서울과 외방(外方) 사람으로서 터무니없이 소속하게 된 자가 절반을 넘었다. 임금이 노하여 심계량은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가 나쁜 일을 하였다 하여 형리(刑吏)에게 회부하여 삭직(削職)하였고, 조위수는 파직(罷職)하도록 하였다.”

 

  1747년에는 이전 선정비나 유혜거사비와는 약간 성격이 다른 사적비가 세워진다. 사적비도 물론 후세에 보여주기 위한 기념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앞의 것들이 한 인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사적비는 당시에 일어난 사건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때 세워진 사적비는 삼청이정사적비(三廳釐正事蹟碑)로 남원에 있던 삼청의 문란을 바로 잡은 사건을 기록한 비석이다.

 첫 번째 비석이 삼청이정사적비이다.

귀부의 머리는 거북이보다는 용과 비슷하게 조각하였다. 머리 위 두 개의 뿔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삼청의 문란으로 실추된 권위를 바로 잡고자 용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용으로 조각되었지만 해학적으로 묘사한 탓에 권위적이기 보다는 친근하게 생겼다.

다리 부분도 용의 비늘을 덮여놓았다.

등부분에도 귀갑문이 보인다. 앞선 시기의 두 귀부와 비교해보면, 시대가 흐를수록 귀부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거북에서 점점 용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민간예술이다보니 전체적으로 단순미와 해학미가 지배적이다.

비신의 측면에는 숭정기원후재무진(崇禎再戊辰)이라 쓰여져 있다. 숭정제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비석이 세월질 당시 명이 망한 지 100년쯤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있다. 이것은 청나라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조선 선비들은 청나라를 중화(中華)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징삼청사적비 역시 개석은 이수로 만들어졌다. 민간예술답게 용임을 나타내는 최소의 단위만 사용하여 용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당시 남원에는 조세와 관련된 3개의 관청이 있었다. 진상청(進上廳), 보민청(保民廳), 연호청(煙戶廳)이다. 진상청은 공납, 보민청은 구휼기관으로서 환곡, 연호청은 부역과 관련된 기관이다. 하지만 당시 삼청이 조세를 빼돌리거나 돈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는 등 국가 조세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극심화된 삼정의 문란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러던 중 남원부사인 이식이 이런 문란을 바로 잡았고 이것을 기념하고자 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남원성 남문 바로 옆 오른쪽 삼청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백성들과의 근접성을 높이고자 남문 옆에 입지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부터 보민청, 진상청, 연호청이 있다.

 

하지만 1786년 남원 유학생이던 김규완이 올린 원정에 남원의 폐단을 지적한 기록이 있다.

 

첫째 지소(紙所)를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요, 둘째 보민청(保民廳)의 쌀을 돈으로 대봉(代捧, 돈으로 대신 갚음)하는 폐단이요, 셋째 연호청(煙戶廳)이 환자미(還上米, 임금에 진상하는 쌀)를 가져다 쓰는 폐단이요, 넷째 유혜전(遺惠錢)으로 빚을 주는 폐단이요, 다섯째 환자미를 삼청채(三廳債)라고 칭하면서 작전(作錢, 돈으로 바꿈)하는 폐단이요, 여섯째 전세(田稅)인 쌀과 콩을 함열(咸悅)의 관원이 돈으로 받는 폐단이니, 특별히 구획(區劃)하게 하여 남원의 백성을 살려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미 사건사가 아니나 백성의 폐단과 관계되는 일이니, 감히 곧바로 감률(勘律)을 청하지도 못하고 또한 그대로 둘 수도 없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소서.

 

결국, 이식의 삼청문란의 평정은 일시적인 미봉책이였을 뿐 구조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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